6.

 

그 할아버지한테 연락할 거야?”

남편은 바지호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명함을 잔뜩 꽂아둔 칸에 줄무늬 종잇조각 하나가 생뚱맞게 들어 있다. 옛날 공책에서 찢었는지 냄새가 난다. 그의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가 또박또박 적혀 있는데, 볼펜 똥이 시커멓게 묻어 있다.

? 부장은 아예 전화도 받지 말래. 혹시라도 대리점 차렸다가 노후 비용 다 날리면 어떡하냐고.”

이렇게 말하며 남편은 자기 배에 붙이다시피 안고 있는 건우를 내려다본다. 일요일 오전, 온 가족이 다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며 여유로운 산책을 즐기는 중이다.

우리 옆을 지나가던 중년 여자들이 쑥덕댄다. “주중에는 실컷 일하고 주말에는 애보고. 우리 아들도 저런 대접 받을까봐 장가를 못 보내겠어.” “에이, 저런 사위 보면 되잖아?” “난 아들만 셋이잖아.”

중년들의 대화에 귀가 간질간질하고 눈도 따끔거린다. 이런 불편함에 종지부를 찍듯 시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온다.

 

작년에도 둘째 출산을 핑계로 쉬었으니까 올 추석 때는 꼭 성묘를 가야한다는 요지이다. 곁다리 얘기처럼 지난 주말에도 안 왔는데 이번에도 안 오느냐고 묻는다. 물김치 새로 담갔다, 소꼬리뼈 고아 두었다, 장조림도 해놓고 멸치도 잣을 넣어 함께 볶아 뒀다 등의 말도 이어진다.

애들 먹기 좋게 소금도 거짓말 같이 조금만 넣고.”

소와 소의 꼬리와 그 꼬리의 뼈 대목부터 대략 놓고 있던 정신 줄을 얼른 붙잡는다.

어머니, 오디 드실래요?”

?”

애들 아빠가 출장 갔다가 오디를 얻어왔는데요, 어머니는 뭔지 아시죠?”

간만에 고부간의 대화가 활기를 띤다. 그 와중에 주말을 통째로 희생하느니 지금 후다닥 움직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어마어마한 깨달음처럼 뇌수를 뒤흔든다.

 

시어머니는 웬일로 손자손녀도 보는 둥 마는 둥 오디부터 찾는다. 불과 삼십 여분 거리지만 이 한여름에 냉장고에서 아이스박스로, 거기서 다시 실온으로 옮겨오는 동안 오디는 형편없이 망가져 있다.

아이고, 아까워 죽겠네. 그러게 가까이 살면 내가 어젯밤에 바로 처리를 했을 텐데.”

진짜 아까운 건 응급처치를 못 받아 망가진 오디가 아니라 먼 곳으로 장가를 보낸 아들이다. 그 아들과 그 아들의 가족 앞에서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방치해두고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듯 그녀는 이내 행동에 돌입한다.

불에 덴 살갗처럼 짓물러버린 오디는 살림의 대가의 손 안에서 마파람에 게 눈 사라지는 속도로 씻김과 선별 작업을 거쳐 믹서 안으로 들어간다. 바싹 갈린 오디는 블루베리와 체리를 섞어 놓은 것 같다. 거기에 우유를 붓고 얼음을 몇 개 띄우자 과일 주스가 따로 없다. 두 아이는 신바람이 나서 날뛴다. 남은 오디는 시댁의 냉동실로 들어간다.

 

7.

 

욕실 문이 닫힌다. 따뜻한 물이 흘러나와 욕조를 데우며 사라진다. 무더운 여름임에도 물은 따뜻한 것이 좋다. 욕실에 뽀얀 증기가 어린다. 닫힌 공간에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바로 알몸으로 욕조 안에 앉아 샤워기의 물세례를 받는 이 시간이다.

청신한 초록빛의 뽕나무 숲 위로 검푸른 어둠이 내린다. 시커먼 천정에 환한 구멍처럼 뚫린 달의 비호를 받으며 칠순을 넘긴 촌부가 오디를 따고 있다. 뽕나무 사이를 누비는 솜씨가 탄복할 만하다. 촌부의 밤은 어느덧 거창의 밤으로 바뀐다. 시퍼런 어둠이 내린 산비탈, 저승사자처럼 우뚝 선 나무들을 바라보며 초로로 접어든 영문학도가 희랍어 알파벳을 외우고 있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시그마, 오메가. 그 풍경화 속의 나뭇가지 사이에 코알라가 매달려 있다. 만년 영문학도의 고독을 완성해준 침엽수가 유칼립투스로 바뀐다.

어제만 해도 엄마 똥을 먹던 아기 코알라가 엄마 등에 찰싹 붙어 있다. 엄마와 아기 코알라는 슬며시 잠드는 듯, 그 잠에서 슬며시 깨어나는 듯, 무심히 죽어가는 듯, 그 죽음에서 무심히 부활하는 듯 우아한 춤을 춘다. 그 사이사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늙은 유칼립투스 이파리를 먹는다. 옆집 코알라들이 이사를 한다. 땅바닥으로 내려가지도 않고 공중에서 유칼립투스를 갈아타는 기술이 거의 신공, 공중부양 수준이다. 휘청대는 유칼립투스 나무 가지 사이로, 어딘가 뜨거운 나라에서 커피콩을 고르는 옛 남자 친구가 출몰한다. 얼핏 그의 얼굴이 보이려는 찰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5.

 

7시경, 남편은 부장과 함께 전주의 대리점에 도착했다. 업무는 곧바로 끝났지만 먼 길을 온 김에 자기 처남을 한 번 보고 가라는 대리점 사장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완주군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데 파이프 산업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부장의 차는 GPS의 가르침을 받으며 푸르디푸른 논밭을 착실히 가로질러 갔다. 마침내, 황량한 들판에 숲 속의 오두막처럼 호젓하고 자그마한 집 한 채가 나타났다. 한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짙은 구릿빛 얼굴, 그 얼굴에 새겨진 산 지렁이처럼 굵은 주름살, 앙상한 팔뚝과 손등을 휘감은, 툭툭 튀어나온 검붉은 핏줄. 아무래도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하는 농장주의 느낌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씨방, 매형이 전화했드라고. 어서들 오셔.”

남편과 부장은 거실로 안내되었다. 선반과 탁자와 벽 곳곳에 아들딸과 손자손녀의 사진이 세워져 있고 붙어 있고 걸려 있었다. 공간 자체가 사진을 위해 존재했고 그것이 곧 역사였다. ‘빛바랜이라는 수식어를 꼭 붙여야 될 것 같은 흑백사진 속의 올망졸망 촌스러운 아이들이 학사모로 자라났고, 그 학사모들이 제 짝을 만나 아들딸을 낳은 다음 칼라 가족사진의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농장주의 아내가 밥상을 차려왔다. 자반고등어 한 토막을 빼면 풀 천지였다. 부장은 황홀경에 들떴다.

요즘은 염분이 나쁘다고 자반고등어도 싱겁게 만들던데 이건 진짜네요! 된장국은 이거, 아욱인가요? 머위며 완두콩이며. 다 유기농일 거 아닙니까.”

, 그렇고말고. 옛날에야 부지런히 농약을 쳤지만 요새는, 씨방, 몸이 따라줘야 말이지, 농약 치는 건 엄두도 못내. 그러니까 그냥 지들이 알아서 크고 알아서 열매 맺고 그려. 절로 유기농이 된다니껴.”

 

애매한 동문서답이 오가는 중에 풀밭 밥상이 나가고 술상이 나왔다. 인삼주, 복분자주, 매실주, 솔방울 술, 왕벌술, 뱀술 등 열 개는 족히 넘는 장독에 가득 담겨 있는 술을 일일이 다 퍼온 것이었다. 풋풋한 솔방울이 알코올 속에 송골송골 맺혀 있고, 형체와 질감과 색감이 고스란히 보존된 벌 수십 마리가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차 있고, 알코올 속에 생매장된 얼룩무늬 뱀 한 마리가 대가리를 위로 쳐들고서 병마개를 향해 독을 뿜어내고 있었다. 부장은 그 술을 한 모금씩 홀짝홀짝 들이켜며 음미했고, 남편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썼다.

각설하고, 여다가 대리점을 낼까 하는디, 씨방, 좀 도와들 줘.”

안 그래도 한동수 사장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정확히 어디에다?”

여다가 낸다니께! 이게 다 내 땅이여. 작년에는 집도 새로 지었구만.”

, . 그래도 대리점을 내려면 우선 자본금이 많이.”

나 돈 많이 벌었어, 씨방, 재산이 십억도 넘는당께. 우리 아들딸도 다 서울 살어, 씨방, 큰놈은 의사고 작은놈은 변호사고 큰딸은 교사고 작은딸은 인물이 정윤희 뺨치게 좋아서 판사한테 시집을.”

농장주의 목구멍에서 뱀술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뱀이 허물을 벗듯 그의 말도 계속 되었다. 인생의 각 시즌마다 조금씩 변주됐을, 꼭 압운을 맞춘 것처럼 질서정연한 자식 자랑은 숙연하고도 권태로운, 또 권태롭고도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무리 그래도 파이프 사업이 생각보다 어렵고요, 파이프에 대한 전문 지식도 필요하고

, 이 양반이 참! 씨방, 뭘 해도 농사짓는 것보다 어렵깐디? 좀 잘 가르쳐줘 봐이, 씨방, 내가 칠십 둘이라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여.”

칠십 둘이라는 나이에 부장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농장주는 굳이 그들을 숙소까지 바래다주었다. 온갖 편의시설을 갖춘 민박집이고 엎드리면 코 닿을 데 있다고 했다. 도무지 코가 얼마나 길어야 할까. 남편과 부장은 어느덧 캄캄해진 논밭 사이로 난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어갔다. 종류별로 골고루 마신 술이 다 깰 정도였다. 드디어 자그마한 집 한 채가 나타났다. 문을 두드리자 쉰 살은 족히 됐을 법한 남자가 나왔다.

이 양반들 오늘 여기서 자야 쓰겄는디?”

남자는 별 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얇은 잠바 하나를 걸치고 다시 나왔다. 농장주가 부장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이 사람한테 숙박료는 줘야 쓰겄는디?”

넋 놓고 있던 부장은 얼른 지갑을 꺼냈다.

저어기, 얼마나?”

좀 넉넉히 줘, 씨방, 한 삼 만원이나.”

창졸지간에 집을 뺏기고도 무덤덤한 기색이던 중년 남자는 지폐 세 장도 무성의하게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부장과 남편이 막 뚫고 온 시골길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부장은 안방에서 자고 남편은 마루에서 잤다. 일어나는 즉시 혼자 서울로 출발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는 남쪽 나라의 뜨거운 아침 햇살이 얼굴을 사정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아차! 시계를 본 남편은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이제 일어났는겨?”

한 아주머니가 인사를 건넸다. 생면부지의 관계이지만 우리 집에서 잤으니 가족보다 더 허물없는 사이라는 투였다. 그녀는 툇마루에 앉아 완두콩의 꼬투리를 벗기고 있었다.

읍내 나가는 버스 어디서 서요?”

저어기 전봇대 보이지? 저기서 옆으로 꺾으면 금방이여.”

전봇대까지도 백 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남편은 곧바로 가방을 들쳐 매고 마당을 나섰다.

벌써 가는겨? 11시는 돼야 오는디.”

버스 배차 간격이 그렇게 길 수 있다는 사실이 서울내기인 남편에게는 부조리처럼 여겨졌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완두콩 더미를 헤적였다. 꼬투리를 벗기니 완두콩 다섯 알이 동화의 주인공들처럼 소복이 들어 있었다. 부장이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나왔다. 비슷한 시각에 농장주도 나타났다.

 

부장과 남편은 점심을 얻어먹고 떠날 채비를 했다. 농장주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참, 어젯밤에 내가 뭘 좀 했는데 말이여.”

순식간에 일회용 플라스틱 박스가 나타났다. 거의 검다고 할 만큼 짙은 보라색에 알이 포동포동 굵은 최상품의 오디였다. 부장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고, 이 귀한 걸! 오디 아닙니까! 부모님이 양잠을 하셔서 집 주변이 전부 뽕나무 밭이었거든요. , 거참, 어릴 때 형이랑 오디 따 먹고 입이며 손이 전부 시퍼레져 갖곤, 하하!”

어허, 씨방, 이 양반이 뭘 좀 제대로 아는구먼. 내가 어제 밤새 딴 거여!”

농장주와 부장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고 남편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가느다란 초록색 줄기는 날카로운 칼날에 싹둑 잘린 쥐꼬리 같고 열매 부분은 기형이나 돌연변이 굼벵이에 색소를 입혀놓은 것 같았다. 박목월의 시에서나 들어본 오디, “뽕나무 열매를 그날 처음 본 것이었다.

 

남편과 부장이 차에 탔다. 농장주는 막 닫히는 창문에다 대고 간밤에도 곱씹었을 법한 얘기를 꺼냈다. 천기 누설하듯 반쯤 속삭이는 어조에 자신이 노회한 사업가임을 과시하려는 듯 눈도 찡긋했다.

씨방, 대리점은 언제쯤 낼 수 있을까,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4.

 

토요일 아침. 건우가 누나 뒤를 졸졸 따라 다닌다. 그러다 얼음 망치 놀이를 하는 것처럼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다. 발끝을 살짝 들면서 다리 한쪽을 움찔하기도 한다. “!” 한 차례의 파고가 지나갔는지, 터질 것처럼 시뻘게졌던 얼굴빛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잠시 뒤 아이는 엄마에게로 설설 기어오더니 엄마의 어깨를 잡고 엉성하게 선다. 다시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이 시뻘게진다. 조심스레, 격려하듯 아이의 등을 쓰다듬는 동안 두 번째 파고가 지나간다. 저만큼 기어가는 아이에게서는 막 나온 똥이 모락모락 연기처럼 냄새를 피어낸다.

엄마, 건우 응가했어!”

우진이는 손뼉까지 친다. 엄마를, 엄마 젖을 빼앗아간 동생을 마구 할퀴고 싶어도 혼날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분한 마음에 손만 부르르 떨던 녀석이 동생이 대변을 볼 때는 그렇게 신이 나는 모양이다.

건우의 대변을 치우는 걸로 시작된 하루는 또다시 말과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아이들 아침을 먹이고 나도 먹고 아이들 목욕시키고 나도 씻고 청소를 하고 빨랫감을 싹 쓸어 세탁기 안에 넣고. 어느덧 점심때다. 한숨을 가다듬고 전열을 정비하는 엄마를 향해 건우가 엉금엉금 기어온다. 내 어깨를 잡고 선 아이를 살포시 안아준다.

엄마, 나도, 나도!”

우진이가 옆에서 까불어댄다.

엄마 몸은 하나인데 둘을 어떻게 다 안아주니?”

큰아이는 금세 불퉁하고 시무룩해진다. 짧은 시간, 분노와 반항, 체념과 인내 사이를 오가다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혔는지, 슬그머니 내 등 뒤로 와서 머리를 기댄다. 몸의 앞판과 뒤판에 아이 둘을 붙이고 있자니 묘하게 뿌듯하고 푸근한 느낌이다. 갑자기 건우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오늘 건우 응가하는 날이야!”

날도 덥고 양도 많아 다시 씻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10킬로가 훌쩍 넘지만 아직 제 몸도 잘 못 가누는 사내아이를 두 번이나 씻기자니 힘에 부쳐 슬슬 성질이 난다. 이런 심사를 귀신 같이 아는 건우는 또 건우대로 더 버둥거린다. 건우의 손에 크림 통 뚜껑을 쥐어 주고서 간신히 기저귀를 채우고 나니 우진이가 크림 통에서 크림을 신나게 파내고 있다.

김우진!”

그 일에 어찌나 몰입했는지 우진이는 몸을 부르르 떤다. 엄마의 성난 얼굴을 보면서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투다. 그 사이 건우는 냉큼 몸을 뒤집은 다음 누나 옆으로 기어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어설픈 몸짓으로 크림 통에 손을 푹 집어넣는다. 나는 얼른 건우의 손에서 통을 낚아챈다. 그 반동 때문에 건우의 상체가 앞으로 수그러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자지러질 것 같은 울음이 터져 나온다. 순식간에 건우의 입이 피범벅이 된다. 건우를 안아 올려 달램과 동시에 손에 잡히는 대로 가재 수건을 입안에 넣었다가 뺀다. 내 어깨도, 가재 수건도 금방 피에 흠뻑 젖는다. 우진이도 옆에서 엉엉 울고 있다. 이 최악을 멋지게 장식해준 것은 막 도착한 남편의 메시지.

마누라야, 흑흑, 늦잠 잤어. 저녁은 아빠랑 먹자^^;”

목 놓아 울고 싶은 마음을 두 아이가 표현해준다. 우선 건우에게 젖을 물린다. 금방 곯아떨어지는 걸 보니 상처는 크지 않은 모양이다. 그 사이 울음을 그친 우진이는 엄마의 젖무덤에 얼굴을 파묻은 채 새근대는 동생을 우수에 찬 눈으로 하염없이 지켜보다가 조용히 잠이 든다.

 

남편이 집에 온 시각은 밤 9시 경. 서울 근처에서 길이 막혔단다. 항상 이런 식이다. 길은 어디선가, 언젠가는 꼭 막힌다. 막히기 위해 뚫려 있는 것이 길이다.

그렇게 큰 교통사고는 처음 봤어. 뇌수가 터졌나봐. 노란 물이 뇌수밖에 더 있겠어?”

녹초가 된 그의 얼굴에는 죽을죄를 지은 것 같은 표정이 드리워져 있다. 그 죄를 사해달라는 듯 플라스틱 상자 두 개를 내놓는다. 그것은 놀랍게도, 오디였다. 한 알을 집어 입안에 넣어 봤다. 물컹하고도 달달한 기운이 입안으로 퍼지지만 어딘가 울적한 맛이다.

아빠, 이거 블루베리야?”

누나의 물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생은 손부터 갖다 댄다. 손에 닿는 감촉이 신기한지 움찔 물러서더니 한 박자 쉬고 다시 손을 갖다 대는데 이번에는 제법 대담하다. 낮잠을 푹 잔 탓에 둘 다 눈이 말똥말똥하다. 박스 두 개를 냉큼 냉장고에 집어넣었지만 뭔가 마뜩치 않다. 시쳇말로 즉취 식품이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석사논문을 통해 엘리엇의 쓴맛 단맛을 다 보았다고 판단한 삼촌은 일찌감치 주제를 바꾸었다. 파고 또 파도 마르지 않는 샘물, 셰익스피어였다. 주제 하나를 잡아 몇몇 작품을 연구해볼까, 아니면 한 작품을 골라 집중적으로 해부할까. 이 고민을 하는 동안 한 학기가 흘렀다. 아무래도 후자가 낫다는 결론에 도달, 작품을 고르기 시작했다. 비극과 희극과 로맨스와 역사극 중 어떤 걸로 할까. 돌고 또 돌아 저 유명한 햄릿으로 낙착되는 데 꼬박 세 학기가 지났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나는 삼촌 집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삼촌은 강의가 없는 날이면 하루 종일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삼촌의 책상 위에는 원서들이 여보란 듯 펼쳐져 있었다. 책장에 입추의 여지도 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것도 전부 그렇게 두툼하고 묵직한 원서들이었다. 녹초가 되어 귀가하는 삼촌의 손에도 원서가 들려 있었다. 부질없이 손때를 탄 어딘가 처량해 보이는 <Hamlet>. “To be, or not to be.” 어느덧 삼십도 후반으로 접어든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도 아닌, 그 문구의 해석을 담은 무수한 논문과 연구서를 정리하느라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그 사이 삼촌의 시간의 돌쩌귀가 왕창 어긋나 버렸다. “The time is out of joint.”

몇 년이 지나도록 논문이 쓰이지 않자 삼촌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놈의 박사, 그놈의 교수는 남한테 주고 영어 강사로 살자, 그렇게 자본금을 모아 마흔 다섯이 되기 전에 학원을 하나 세우자. 그러고서 애매하게 발가락 몇 개를 걸어두었던 대학을 박차고 나왔다. 할아버지 수준의 지지부진한 늦깎이 연구생보다 여전히 젊은 축에 들어가는 관록 있는 강사가 몇 배는 더 상쾌해 보였다. 실제로도 그의 삶은 상쾌했다. 그럴수록 삼촌에겐 더 잘 사는 동네, 더 넓은 아파트, 더 질 좋은 음식이 필요했다. 그 요구를 삼촌은 간당간당 만족시켰고 그 간당간당함을 즐겼다. 다른 변수가 없었더라면 그의 한 세월은 그렇게 끝났을까.

유나이티드 킹덤에서 누군가가 날아왔다. 영문학도 아닌 영어학 전공에 교수법까지 공부한데다가 어엿한 박사였다. 그런 자가 대학에 자리 잡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학원 판에 뛰어든 것이다. 학원이 통째로 흥분했다. 삼촌은 자신의 성실함과 노회함,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입시제도에 대한 방대한 정보력을 믿었다. 그 자신감으로 네이티브 스피커나 다름없는 박사 강사와 맞섰다.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삼촌은 오랜 시간, 호기롭게 저항했다. 질기게 버팀으로써, 그리하여 참담한 파국을 맞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 정녕 서사는 몰락에서 시작된다.

 

 

사십대의 삼촌은 거창 군민이었다. 그는 영강 근처의 새 아파트에 살면서 고물처럼 낡은 엘란트라를 몰고 거창 일대의 소도시를 돌아다녔다. 교육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적어도 그런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부산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강사의 출현은 가뭄의 단비였다. 게다가 바람을 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귀향한 것이라지 않나. 다들 나가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다시 들어오는 데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는 누구나 알았고, 이 점을 높이 쳐주었다. 영어 선생으로서 그의 주가는 나날이 치솟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삼촌은 비교적 건강한 생활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숙모의 얼굴은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커다란 두 눈은 허허로운 구멍처럼 덩그러니 뚫려 있었다. 부산 토박이인 그녀가 일거리도, 친척도, 친구도 없는 산간벽지에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됐다. “너거 삼촌 평생 한 될까봐 들어가긴 했지만 애들 대학만 가면 나도 거창 나올라고.” 삼촌은 그녀 옆에 헐렁하고 엉성한 자세로 앉아 초연과 달관의 표정을 지었다. 각각 엄마와 아빠를 쏙 빼닮은 두 딸은 부모의 찬란했던 한 시절을 다부지게 보여주려는 듯 너무나 예뻤다. 인간의 몰락과 상승의 찰나적인 접점을 포착한 것 같은 풍경에 눈이 시려왔다. “거창에도 있을 건 다 있어요.” 큰 딸은 쌍꺼풀이 크게 진 영롱한 두 눈을 굴리며 이런 말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냉장고에서 어젯밤에 만들어둔 당근 브로콜리 진밥을 꺼낸다. 끓인 물을 부어 찬기를 없앤다. 엄마가 부산을 떨자 아이도 흥분한다. 그러나 쟁반에 담겨온 물그릇과 밥그릇을 보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밥숟가락을 입에 갖다 대니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다. 한 손으로 머리를 쥐고 억지로 먹이려고 하자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고 팔을 마구 내젖는다.

건우 밥 먹기 싫어? 그럼 엄마도 건우 밥 안 줄 거야.”

모자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대치한다.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던 아이는 한 손을 들더니 쟁반으로 가져간다. 그러고는, 엎을 줄 알았는데, 저리로 슬쩍 밀어내는 것이다. “으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기까지 한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엄마가 냉장고의 쪽문을 여는 모습을 보자 아이의 목소리와 표정이 금세 달라진다. “, !” 격렬한 기쁨 뒤에 어설프지만 ! !” 소리도 들린다.

치즈 한 장을 바닥내고 밥 반 공기를 비운 다음 나른한 포만감에 젖어 엄마 품으로 안겨드는 아이. 이 아이가 나의 둘째 아이 건우이다. 아들이다. 첫 아이는 딸이고 이름은 우진이다. 우진이는 예정일보다 두 주 빨리 태어났고 8개월이 지나면서 걸음을 떼고 돌을 넘기고는 뛰어다녔다. 건우는 예정일보다 닷새 늦게 태어났고 십오개월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기고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생길까? 성별? 딸아이는 빠르고 남자아이는 늦다고들 한다. 순서, 즉 첫째냐, 둘째냐? 보통 첫째는 느리고 둘째는 빠른데, 그 이유는 말 그대로 둘째이기 때문, 즉 첫째의 행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란다. 몸집의 차이? 몸집이 작으면 발달이 빠르고 몸집이 크면 그 반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실제로 두 아이가 생겨나 자라가는 과정은 이런 인과론을 지지해주는 척하면서 의뭉스럽게 비켜간다. 아니면, 엉성하고 느슨한 우연론의 망 밑에 촘촘한 인과론의 고리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4시가 훌쩍 넘은 시각, 건우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을 나선다. 우진이가 막 어린이집에서 나온다. 셋이 함께 근처 부동산에 들렀다가 놀이터로 간다. 우진이는 말을 탄다. 시커먼 때가 낀 노란 플라스틱 말인데 정말 볼품없는 생김새이다. 그 옆에는 시소가 하나 있다. 열 서너 살쯤 돼 보이는 소녀가 한 쪽에 앉아 있다. 얼굴이 제법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어딘가 이상하다. 맞은편에는 늙은 엄마인지 젊은 할머니인지 헷갈리는 중년 여자가 앉아 있다. 둘이 함께 춤추듯 시소를 탄다. 그 소리에 맞추어 건우가 시나브로 잠이 든다.

우진이가 말에서 자동차로 옮겨간다. 역시나 시커먼 때가 낀 볼품없는 빨간 플라스틱 자동차이다. 시소를 타던 소녀가 큰소리로 엄마!”라고 외치며 뭐라고 옹알댄다. 순간, ‘다운증후군이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임신 중에 받았던 각종 검사와 그때마다 정도의 차이를 두고 수반되었던 불안이 상기된다. 의학은 모든 것을 인과론으로 환원하지만, 본질상 그래야 하지만. 소년들이 돌멩이처럼 굴러와 파란 시소와 노란 말과 빨간 자동차를 몽땅 차지한다. 모녀의 행복한 시소 놀이도 끝난다. 여전히 자고 있는 건우도 깨울 겸 유모차를 조심스레 밀며 슈퍼마켓에 간다.

찬거리를 사는 동안 잠에서 깬 건우가 칭얼댄다. 허기가 진 탓도 있을 것이다. 진짜 허기가 졌고 자기가 허기가 졌음을 아는 우진이는 대놓고 짜증을 낸다. 애호박과 표고버섯과 두부를 유모차 밑의 광주리에 넣고, 칭얼대는 작은 아이는 등에 업고, 짜증내는 큰아이는 유모차에 태운다. 볼썽사나운 귀갓길이다.

 

9시를 넘긴 시각. 스무 평 남짓한 아파트, 우레탄 덮개 밑에 모래를 감춰놓은 놀이터, 공터와 잔디밭과 나무 벤치가 있는 구청 앞, 매일매일 축산물과 수산물과 채소 중 하나를 싸게 파는 슈퍼마켓 사이를 오가며 그리는 동선이 마무리되었다. 어둠이 내렸고 아이들이 잠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움직임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이 상황이 너무 좋아 얼마간을 그렇게 있다. 인스턴트커피 몇 알을 뜨거운 물에 녹인다. 코를 간질이는 뜨거운 기운과 향기, 혀끝에 와 닿는 옅은 커피 맛. 다시금,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움직임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상황이 너무 좋다. 너무 좋아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다. 아무 데도 가지 않고서 전주로 간 남편, 거창의 산골로 들어간 삼촌, 코알라와 캥거루의 나라로 떠난 69년생 우연이, 값싸고 질 좋은 커피콩을 찾아 우간다와 네팔과 페루를 오가는 69년생의 옛 남자 친구를 되는 대로 마구 생각한다.

 

3.

 

내 기억 속의 용태 삼촌, 즉 막내 삼촌은 항상 대학생이었다. 다른 삼촌들과는 달리 키가 훤칠 크고 몸매가 늘씬했으며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에는 풍성한 턱수염과 구레나룻의 파르스름한 뿌리자국이 도드라졌다. 우리 집에 얹혀사는 처지임에도 삼촌은 왕자처럼 늠름하고 성주처럼 당당했다. 단층짜리 주택에 방 두 칸을 빌려 쓰는 우리 집에는 참 어울리지 않는, 향긋한 비누냄새를 풍기는 미남의 영문학도. 이 초상화를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소품이 그의 손에 들린 한 권의 양서였다. 책은 주기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햄릿맥베스였고 등대로떠나는 율리시스”,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영문학도는 대학에 오래 머물렀다.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얄궂은 작품이 그의 연구 대상이었다. 석사논문을 준비하는 동안 삼촌은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이년 쯤 뒤에는 얼굴이 계란처럼 갸름하고 쌍꺼풀이 크게 진 예쁜 언니와 결혼했다. 뽀얀 피부에 젖살이 다보록한 그녀는 삼촌 강좌의 수강생이었다.

숙모가 뱃속에서 둘째를 키우고 있을 때 삼촌은 거의 사오년간 붙들고 있던 석사논문을 끝냈다. 이른바 엄정한 심사를 거쳐 석사학위를 따고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그의 청춘도 저물어갔다. 처자식이 딸린 삼십대 가장,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는 서른을 목전에 둔 아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망졸망 커가는 두 딸, 방 두 칸의 전세 연립 주택. 삼촌은 모든 희망을 박사논문에 걸었다. 일단 쓰기만 쓰면 박사논문이고 제출만 하면 학위를 따는 것이고 학위만 따면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