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귀를 기울이면

 

 

 

 

 

P항 근처, Y다리 밑에는 곧 쓰러져버릴 것 같은 판잣집, 슬레이트집이 많았다. 대개가 철학관, 점집이었다. 한문깨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사주팔자나 좀 봐달라고 통사정을 하던 시절은 지났다. 대개의 집이 버려진 것도 당연했다. 더러 문이 열린 곳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것은 따뜻한 햇볕과 비릿한 바닷바람뿐이었다. 약국 영감은 이 흔적기관과 같은 점집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렇지만, 80년 남짓한 그의 생애도 한 줄로 요약하면 참을 수 없을 만큼 비루하면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문학적인 구석이 있었다.

 

약국 영감은 당시 한국 남성답지 않게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것이 썩 미남이었다. 그 일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지어주는 감기약을 먹고 그가 파는 반창고를 붙였다. 덕택에 그는 누구 집 바깥양반이 장이 약하고 누구 집 아이가 치통이 심하고 또 누구 집 아이가 걸핏하면 무르팍을 깨는 장난꾸러기라는 것을 훤히 알았다. 언제부터인가는 약사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말벗 내지는 카운슬러가 됐다. 그 사이에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했다. 그들은 고등학교 윤리 교사, 7급 공무원, 모반도체연구소 연구원 등 한 단어로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직업을 얻었다. 그 무렵 그는 겸사겸사 노년도 준비할 겸 지적인 호기심에서 주역을 들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님들과 수다를 떨 때 하나씩 둘씩 적용해 보았다. 말하자면 약국 영감은 신 내림을 받은 무당이 아니라 학습과 공부로 다져진 역술가였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점괘와 해석이 상당히 잘 맞아 떨어지는데도 겸손했다.

 

문제는 가장 똑똑한 막내아들이 사업에 손을 대면서 시작됐다. 사업이 꼬이면서 10년도 안 돼 약국은 문을 닫았고 약국 영감의 3층 양옥에도 딱지가 붙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부인이 죽었다. 자식들은 약국 영감을 위해 작은 방을 얻어주었다. 형편이 좀 어려운 중년 부부가 세놓은 방이었는데, 주인집 작은 방과 벽이 붙어 있었다. 셋방살이를 시작함과 동시에 양국 영감은 명실상부한 역술인으로 거듭났다. 그의 방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복채도 적게 받는데다가 굿을 하라거나 부적을 쓰라는 따위의 말을 하는 일이 없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나이는 어쩔 수 없었다. 노환이라는 편리한 병명에 각종 약이 들러붙었다. 급기야 자리보전하고 눕는 일도 생겼다. 그때마다 그는 벽 너머에서 주인부부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아픈 사람을 또 어찌 내보내요?” “그래도 여기서 죽으면 골친데. 늙은 홀아비 죽어 나간 방에 누가 들어오겠어?” “아무리 그래도 이 엄동설한에. 그럼 날 풀릴 때까지라도 기다려요.” 그들은 조심하느라 일부러 목소리를 죽였다. 약국 영감은 날이 풀리기가 무섭게 그 방을 나왔다. 주인 내외는 고마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이후 약국 영감은 Y다리 밑에 자리를 잡았다. 세 자식들은 남세스러운 일이라며 난리를 쳤다. 늙은 아비가 청승떠는 꼴이 싫어서 새로운 거처를 알아보기까지 했다. 누구 하나 모시겠다는 소리는 선뜻 못해도 약국 영감의 생활비를 더 올려주었다. 덕택에 그는 사실상 복채를 받지 않는, 아주 특이한 역술인이 됐다. 그렇다고 복채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 밥 한 끼를 대접해야 했으니 말이다. 때문에 그는 손님을 꽤나 가렸다. 그가 무척 굶주려 있을 때 어느 손님이 찾아왔다. 스물이 될까 싶은 처자와 사십대의 우람한 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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