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고 천둥번개가 치고 굉음이 일면서 성이 폭삭 무너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소영이는 피식피식 웃었다. 가방을 갖다놓은 뒤에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인기척을 듣고서 마녀의 개가 고개를 들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는 기색도 역력했다. 녀석은 최근 들어 심히 늙어버렸다. 올 봄부터는 마녀의 빗자루, 즉 운송용으로도 쓰이지 않았다. 가끔 산책을 나가긴 해도 거의 하루 종일 이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졸고 있었다. 그럴 때는 소영이가 다가가도, 쓰다듬어주어도 꿈쩍도 안했다. 한 번은 심술이 나 귀를 꼬집었다. 감각이 둔해진 탓인지 녀석은 그저 고개를 조금 쳐들고 눈을 반쯤 뜬 채 소영이 옆으로 비스듬히 내리쬐는 햇볕을 좀 음미하곤 다시 잠들어버렸다. 한 번은 열린 창문 너머로 동네 고양이들이 우르르 몰려 든 일이 있었다. 마녀가 깜박 잊고 음식쓰레기를 복도에 그냥 방치해둔 탓이었다. 온 복도가 고양이 울음소리와 바스락대는 봉지 소리로 가득 했다. 그때도 마녀의 개는 낭창하게 게으름만 피웠다. 한번쯤 귓바퀴를 달싹이고 콧구멍을 벌름거리긴 했지만 그냥 고양이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감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 오늘따라 귀를 세웠다. 탄력이 없어 쫑긋서지는 못했지만 그 긴장감만은 소영이에게도 충분히 전해졌다.

어라, 너 왜 이래? 아줌마는?”

개는 대답이랍시고 컹컹 짖어댔다.

응가 하고 싶어? 배고파?”

 

소영이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개에게 줄 먹이를 찾던 중에 어항에 눈이 갔다. 연못에서 가져온 검정말이 물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소영이와 떡붕어 아저씨가 그 안에 풀어놓은 올챙이는 긴 꼬리를 흔들며 볼록한 배로 헤엄을 쳤다. 부화한지 얼마 되지 않은 올챙이는 검정말 숲을 한번 통과할 때마다 쑥쑥 커졌다. 꼬리가 짧아지는 것도 눈에 훤히 보였다. 터질 것처럼 탱탱한 배에서는 앞다리와 뒷다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항이 불안스레 진동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물과 올챙이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내 어항이 탁자와 부딪치면서 미묘하지만 또렷한 소리를 냈다.

 

소영이는 문득 아름이의 말이 생각나, 복도로 나갔다. 아까는 귀를 세우고 그렇게 짖던 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곤히 잠들어 있었다. 소영이는 마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집을 뒤졌지만 없었다. 그제야 마녀가 아직 학교에서 교사 놀이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맥없이 돌아서려는데 맞은편 벽이 뚫리면서 문지기가 나타났다. 그는 이제 여기서 살았다.

아저씨, 성이 흔들려!”

그 얘기 하려고 그렇게 뛰어왔어?”

문지기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갑자기 등 뒤로 마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낡아빠진 마법인 걸, 흔들리는 성이라니.”

아줌마도 알고 있었어?”

, 글쎄, 그러다 하루아침에 폭삭 무너질 수는 있겠다.”

그 하루아침이 내일이면 어떡해?”

어떡하긴, 죽어야지.”

 

마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문지기도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벽을 뚫고 사라졌다. 소영이는 성도 저렇게 스윽, 사라져버리지나 않을까 염려됐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안하던 어항도 안정을 찾았다. 오후에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다음 날도 별 다른 징후 없이 지나갔다.

 

며칠 뒤 어항의 올챙이는 모두 새끼 개구리가 되었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는 그들을 놓아주려고 밖으로 나가 다리를 건넜다. 소영이가 성탑 노파의 나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유리 상자의 뚜껑을 열자, 개구리들이 폴짝폴짝 뛰어나갔다. 그 동안의 갑갑함을 모조리 보상받겠다는 듯 녀석들은 순식간에 여기저기로 흩어져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보이는 건 무성하게 자란 부들과 연못가를 거의 다 덮은 개구리밥뿐이었다. 갑자기 부들과 줄풀이 서슬 퍼런 몸짓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의 발에서도 진동이 느껴졌다. 둘은 벌떡 일어나 앞을 응시했다.

 

그토록 컸던 성이 점점 더 작아졌다. 천둥번개나 짙은 어둠, 굉음이나 자욱한 먼지 따위도 없었다. 그냥 돌멩이들이 서로 부딪치듯 마찰음이 들리면서 좌우, 상하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성을 이룬 석재와 철재가 모두 변해서 나일론처럼 쪼그라들고 종이처럼 구겨졌다. 이내 성은 낡고 이빨 빠진 모형이 됐는데, 그 모양새가 쭈글쭈글한 것이 종이로 만든 집 같았다.

 

아저씨, 저게 뭐야?”

 

성의 그 많던 방, 창문, 문틈, 벽 틈새, 심지어 땅 속에서 뭔가가 무례하도록 생기롭게 튀어나왔다. 그것은 언젠가 이 성을, 아니 더 오래 전에 이 곳 땅을 거쳐 간 망자들이었다. 그들은 죽기 직전이나 직후의 모습이 아니라 살아생전에 가장 아름답고 예뻤을 때의 모습으로 부활했다. 그러고는 그 절정이 가장 참혹한 기만인 줄도 모르고 바람처럼 숲속 어딘가로 사라졌다.

 

햇살이 따사롭고 공기도 맑은, 5월의 찬연한 아침이었다. 한창때의 성탑 노파의 모습이 맨 마지막으로 보였다. 그녀는 적당히 살집이 오른, 허리도 전혀 굽지 않은 몸을 똑바로 세운 채 튼튼한 두 발로 타박타박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문지기와 마녀, 그녀의 개와 고양이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아직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부활의 대열에 합류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대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금괴만이 폐허 아닌 폐허, 잔해 아닌 잔해 위에 덩그러니 쌓여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그곳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횡 하는 바람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그는 이미 금괴를 품에 앉은 채 소영이 옆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들은 곧 그곳을 등졌다. 뒤에서 다리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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