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이 왔다. 성 주변에는 여느 해와 다름없이 유리벽이 쳐졌다. 마녀는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부풀어갔다. 배꼽 주변으로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뽀얀 솜털 같은 것도 아니고 새카맣고 윤기마저 나는 그야말로 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털 밭을 가르며 배가 터졌다. 선홍빛의 피가 솟구쳤다. 시골의사가 누렁소를 타고 기어왔다. 그 뒤를 따라 젊은 도시의사가 나타났다. 간호사도 함께였다.

팔자요, 팔자. 그쪽 잘못이 아니라, 그러니까 저어기. 뱃속에 들었던 그 녀석의 팔자가 그랬던 게야.”

시골의사의 말은 인정과 이해를 듬뿍 담고 있었다. 하지만 마녀는 점점 더 미쳐 날뛰었다. 그 순간만은 정녕 귀신에 홀린 마녀 같았다.

 

그 모든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도시의사가 나섰다.

사산이 무슨 큰일이라고.”

그는 간호사에게 눈짓을 했다. 간호사는 곧 마녀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하지만 마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문지기는 줄곧 문 칸에 말없이 서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시골의사는 안절부절못하고 수술대 주위를 맴돌았다. 그 다음엔 몸을 숙이는가 싶더니 아예 땅바닥에 엎드려 네 발로 기기 시작했다. 이건 정녕 가망 없는 환자였다. 어떤 농담도, 웃음도 허락되지 않는 절망적인 사례였다. 시골의사는 자신의 무능함과 자연의 폭력을 탓했다. 소영이는 사색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사람이 히스테리 때문에 죽는 법은 없습니다.”

이런 말을 최후통첩처럼 날리고 도시의사는 깔끔하게 떠나버렸다. 그가 떠난 뒤에도 시골의사는 여전히 방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제는 두 다리와 두 팔에 힘이 빠져 거의 엎어지다시피 했다. 문밖에서 보다 못한 개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개는 킁킁대더니 그의 바지자락을 물고 누렁소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시골의사는 안간힘을 쓰며 누렁소가 끄는 달구지로 기어 올라갔다.

 

젊은 도시의사의 말은 정확했다. 마녀의 히스테리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됐지만 목숨을 앗아가진 않았다. 이후 몇날며칠 동안 그녀는 의식을 잃는 행운을 누렸다. 그녀의 살갗이 벌겋게 부어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가려움증이 수시로 그녀를 괴롭혔다. 무의식 상태에서도 그녀는 손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박박 긁어댔다. 문지기는 그녀의 손을 묶어버렸다. 가려움증을 해소할 길 없는 그녀는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상태에서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팔뚝과 무릎, 머리통 등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곳들이 만나 곳곳에 상처를 만들어냈다. 하는 수 없이 문지기는 마녀의 손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또 다시 몸을 구석구석 긁어댔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할 길은 이것밖에 없는 양 수시로 손톱을 세웠다. 문지기는 주기적으로 마녀의 손톱을 깎아주었다. 그 일이 반복되는 동안 마녀의 몸을 덮었던 불그죽죽한 붓기가 빠졌고 살갗의 껍질이 하얀 막처럼 벗겨졌다. 허물을 벗는 작업은 오래 지속되었다. 문지기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마녀의 몸을 닦아주었다.

 

마녀의 미망은 한파가 꺾일 무렵에 끝났다. 풍선처럼 부풀었던 배는 병을 앓는 동안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지만 뱃가죽 위에는 쭈글쭈글한 주름이 생겼고 얼굴도, 몸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망했다. 10, 아니 20년을 세월을 한꺼번에 먹은 듯, 마녀는 폭삭 늙어버렸다. 중력의 법칙이 가혹하게 적용된 탓에 살가죽은 축축 늘어졌고 모든 지방들은 핵을 향해 모여 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녀는 문지기와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문지기를 보며, 혹은 그의 시선을 피하는 척하며 야릇하게 배시시 웃는 일도 있었다. 물론 한 번 생긴 주름은 사라지지 않았고 새 살은, 최소한 탐스러운 새 살은 영원히 돋아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 얘기가 시작되기 전, 언젠가 한 시절엔 분명히 존재했을 화사한 봄날로 회귀하는 것 같았다.

 

*

 

봄이 왔다. 날씨가 풀리면서 연못 위의 얼음이 물로 바뀌고 땅이 녹록해지고 몰랑해졌다. 성벽의 틈새, 이끼를 뚫고 처음 보는 싹들이 돋아났다. 그때마다 눈에 거의 뜨이지 않게 조금씩 균열이 생겨났다. 싹들은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 성채의 틈을 뚫어갔다. 푸른 연못 가두리에 부들, 개구리밥, 마름, 줄풀이 진풍경을 이루었다. 성을 에워싼 산에는 진달래가 진분홍색을 뿜어내며 봄을 축하했다. 성을 처음 본 아름이는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우아, 진짜 성이다! 움직이는 성이다! 진짜 신기해!”

?”

흔들흔들하면서 조금씩 밑으로 내려가잖아?”

설마! 성이 어떻게 움직이니?”

소영이는 그야말로 어린아이를 다루듯 아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정말 움직이는 걸. 성에 붙은 풀도 움직이잖아, 그치, 오빠?”

, 정말 움직이는 것 같아.”

은학이는 아름이의 말에 반대했다가는 또 봉변을 당할 것 같아 얼른 찬성을 해주었다.

둘 다 눈이 뼜나봐, 정말. 다들 이제 집에 가!”

언니, 뭐야? 우리도 성 안에 들어갈래!”

성이 움직인다며? 움직이는 성 안엘 어떻게 들어가니? 어서 집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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