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혹은 청춘의 기록
스물세 살이오―三月이오―咯血이다
(李箱, 「逢別記」)
스물일곱 살이오―오월이오―구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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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만 국문학도인 백수, 하루 두 갑의 담배를 바닥내는 골초, 대학에 들어온 이래 기숙사와 하숙집과 원룸을 전전하며 8년째 자취 생활, 친구라곤 딱 하나, 애인은 없다. 구토의 습격이라도 받지 않았다면 얘깃거리라곤 통 없는 것이 나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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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아이들을 따라 물수제비를 뜨려고 조약돌을 집어 든다.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는다. 휴머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독학자의 열띤 고백을 듣는다. 옛 연인과 재회하여 그녀를 포옹한다. 그때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구토가 거세게 치밀어 오른다.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그럼에도 뻔뻔하고 야성적인 실존에 대한 구토이다.
왜 당최 이것이 없지 않고 있느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조약돌이나 문손잡이가 아니라 구토를 향해 외치고 싶다. 그것은 변비처럼 우리의 신경을 지긋이 자극하여 비등점까지 끌고 가거나 아니면 설사처럼 느닷없이 우리를 덮쳐 쥐어짜고 우리의 실존을 화장실에 붙박아둔다. 나에게 후자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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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새도록 배를 붙잡고 씨름했다. 위아래로 연거푸 쏟아내는 동안 뱃가죽은 등가죽에 찰싹 달라붙었다. 동이 터올 무렵에는 몸도 제대로 펼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졌다. 척추가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 제법 익숙한 것이었다. 뭐가 문제일까. 하루 동안 뱃속에 들어간 음식물을 떠올렸다. 고향집에서 올라온 돼지고기 장조림과 고들빼기김치, 식은 밥, 연거푸 몇 개를 깎아 우걱우걱 씹어 먹은 참외. 음식물을 아무리 조합해도 마땅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119를 불렀다.
동네 병원 응급실. 의사의 얼굴을 보기가 무섭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소변과 혈액을 뽑혔다. 기분 나쁠 정도로 서늘한 판자 위에 누워, 역시나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엑스레이 촬영도 했다. 그러곤 응급실 침대에 누워 오래도록 링거를 꽂고 있었다. 악몽과 통증이 사투를 벌이듯 번갈아가며 나를 덮쳤다. 간호사가 다가 왔다.
“보호자는 언제 오세요?”
“곧 올 거예요.”
물론 보호자는 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슬그머니 눈이 떠졌다. 내 몸 위로 묵직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얀 가운, 청진기. 아까 본 그 의사다. 어딘가 시골 의사라는 단어 조합을 연상시키는, 지긋한 나이에 몸집이 푸짐한 할아버지. 이 인상에 몹시 부합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봐, 학생, 엄마는 언제 와?”
나는 실제보다 더 기운이 없는 척,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른 이상은 없고 장이 왕창 꼬였어. 열이 나고 아파도 별 수 있나, 그냥 기다려야지. 이제 슬슬 집에 가도 될 것 같은데, 왜 아무도 안 와? 엄마가 와야지 애를 보내지, 원.”
“엄마는 못 와요.”
내 말에 의사는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누구라도 와야지! 거참, 딱하네.”
혀를 끌끌 차며 의사는 퇴근했다.
어느덧 창밖이 거무스름했다. 이쯤 되자 진짜로 서러워해도 될 것 같았다.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업 중이었다. 이제 어쩌나. 아무리 서러움을 과시하고 싶어도 시골에다 전화를 거는 건 별로이다. 농사일로 한창 바쁠 때다. 스물일곱이나 처먹고서 병원에 드러눕다니. 비단 자식으로서, 맏딸로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도 염치없는 짓이다.
나는 모로 드러누워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링거액이 혈관 속에 눈물방울을 하나씩 떨어뜨릴 때마다 내 의식이 한 발짝씩 죽음을 향해 가는 것 같았다. 물론, 배탈 때문에 죽는 사람도 드물거니와 내 인생에 때 이른 죽음을 갈망할 만한 설움이란 전혀 없었다. 이게 나는 못내 속상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허름한 동네 병원의 지저분한 침대 귀퉁이에서 이대로 죽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날 좀 살려달라는 청춘의 원성을 싹 무시하고 억울할 것도 없이 황망하게 덜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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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한가운데서 나는 구토의 역사를 썼다. 그것은 거의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날이 새기 전부터 어른들은 돼지를 잡았다. 몸집도, 목소리도 제일 큰 돼지, 나의 꿀꿀이였다. 꿀꿀이 멱을 따는 소리는 제법 생경하고 또 처연했다. 얼마 뒤 녀석은 완전히 뻗어버렸다. 그 단절이 조금은 이상했다. 꿀꿀이의 몸뚱어리가 몇 조각났다. 이제 꿀꿀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가마솥 안에 들어간 것은 아까만 해도 꿀꿀대고 씩씩대며 돼지우리를 활보하던 그 꿀꿀이가 아니라 그냥 고기 덩어리였다. 한쪽에서 돼지고기가 삼기는 동안 나는 계속 코를 킁킁거렸다. 내 모양새가 왠지 오늘 새벽까지만 이 세상에 있었던 꿀꿀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든 지금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것은 꿀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한쪽에서 열심히 끓고 있는 탕국처럼 맛있는 음식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유쾌한 아침, 추석이었다.
차례를 지내고 선산에 성묘를 다녀오고 술판이 벌어지는 사이에 하루가 저물었다. 그 끄트머리에 나는 집 뒤의 묏등만큼 불러온 배를 껴안고 방안에서 뒹굴었다. 뒷간을 다녀오면 또다시 뱃속에 음식물을 채워 넣었다. 3, 4년 남짓한 내 인생을 다 헤적여 봐도 먹을 것이, 그것도 고기가 이렇게 푸짐했던 적이 없었다. 뱃속은 아프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내 손은 거침없이 고기조각을 탐했다. 급기야 또 뒷간으로 달려갔다. 아니, 뒷간까지도 못가고 앞마당 귀퉁이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설사가 뭉텅뭉텅 쏟아졌다. 바둑이는 컹컹 짖고 꼬리를 살랑대며 내 주위를 맴돌았다.
“아이고, 간만에 기름기가 들어가서 안 그렇나.”
내 뒤를 따라 나온 엄마가 말했다.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엄마, 꿀꿀이가 나 괴롭히는 거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도 뚝뚝 떨어졌다.
“그기 무슨 소리고? 딱 먹을 만큼만 먹으면 꿀꿀이도 좋아할 기다. 이제 고만 먹고 내일 또 먹으래이.”
엄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앞으로 꼬꾸라지며 음식물을 게워냈다. 대충 씹힌 고기 조각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돼지고기 냄새와 뱃속 냄새가 뒤섞여,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났다.
나는 힘없이 방 한구석에 드러누웠다. 엄마는 궤짝을 뒤져 알약 몇 개를 찾아냈다.
“민영이 아빠, 여 소화제가 어떤 거라요? 불이 캄캄해서 영 안 보이네.”
호롱불이 캄캄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엄마는 한글을 읽을 줄 몰랐다. 수내 마을 일대에서 밭일 잘 하고 담뱃잎 엮는 솜씨가 일품이기로, 또 장 잘 담그기로 소문난 엄마였다. 그래도, 아니 그 때문에 엄마는 자기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조금은 창피해했다.
“민영이가 알약을 먹겠나, 어디 한 번 보자.”
아빠는 소화제를 골라냈다. 조그맣고 동그란 초록색 알약이었다. 엄마가 밖에 나가 양푼에 찬물을 떠왔다.
“자, 입에 탁 넣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꿀꺽 삼키면 된대이. 함 해봐라.”
배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고분고분,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해보았다. 하지만 꿀꺽 삼켜진 건 물 뿐, 알약은 그대로 혀 안에 남아 있었다. 언젠가 장날 할머니를 따라 읍내에 갔다가 먹어본 사탕처럼 달달했다. 나는 혀를 놀려가며 알약을 핥았다. 하지만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달았던 사탕과는 달리, 알약은 이내 본색을 드러냈다.
“아이고, 써라!”
나는 알약을 툭 뱉어버렸다. 엄마와 아빠는 그 소중한 소화제를 무려 세 알이나 낭비하며 내 뱃속에 넣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나머지도 전부 하얀 맨 살을 드러낸 채 방바닥 어디에 쿡 처박혔다.
진땀을 빼는 사이에 뱃속도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자 내 손은 절로 방구석에 쌓아놓은 과일더미로 향했다. 잠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커다란 사과 하나를 전부 먹어치웠을 것이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과식, 아니 폭식의 습관은 그날 처음 생겼다. 이후 평생을 따라다닐 섭식장애의 기원이다. 또한 그때 나는 처음으로 똥과 오줌뿐만 아니라 토사물이 내 몸 어디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토 없는 실존이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