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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쏘다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실천문학사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재밌다"는 것. 조지 오웰은 자신을 정확히 알고 있었는데, '스스로 단어를 구사하는 재주'와 '불쾌한 사실들을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이 대단히 뛰어나며, 우리는 그의 재주와 능력을 통해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그 사형수가 웅덩이를 피해 발걸음을 딴 데로 옮기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신비감, 다시 말해 생명이 한창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생명을 앗아가는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보았다.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육체의 모든 기관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창자는 음식물을 소화해 내고, 피부는 스스로를 재생시키고, 발톱은 자라고, 세포도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모든 것이 이 냉혹한 어리석음 속에서도 악착같이 작용하고 있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세워지고 사형이 집행될 10분의 1초의 그 순간에도 그의 발톱은 여전히 자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었던 인도제국 경찰로서 그는 한 버마인 사형수를 외면하지 못 했고, 자신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사형장을 향하던 죄수가 무심코 웅덩이를 피하는 짧은 순간, '한 정신이 줄어들면 그만큼 한 세상이 좁아진다'는 통렬한 깨달음을 얻고 그걸 글로 쓸 수 있다면, 그는 운명적으로 작가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웰은 작가의 길을 걷게 되어 행복했을까? 그 자신은 순전한 이기심과 미학적 열정과 역사적 충동과 정치적 목적 때문에 작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좋으면서 나쁜 소설도 못 되는 쓰레기들이 출판사들과 그들의 광고로 먹고사는 신문사의 유대 관계 때문에 끊임없이 떠받들어지는 게 당시의 풍토였다. (사실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다.)
소설이 가까운 미래에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고 예견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분명한 이유가 잇다. 가장 훌륭한 문학가들이 소설로 다시 돌아오도록 권유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설은 마치 현대판 묘비나 펀치와 주디 쇼처럼 형편없이 경명적이고 절망적이며 변질된 형태로 계속 존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제국주의 영국인인 자신이 싫었던 만큼 작가인 자신도 기껍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독설과 신랄한 풍자는 자신이 속한 집단과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는 현실 속에서 나온 것이다. 구빈원으로, 빈민가의 여인숙으로, 유치장으로, 홉 열매 따기로 최하층의 생활을 자청하여 경험한 것은 객기나 변덕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부조리를 직면해야 한다는 작가로서의 사명감이었을 것이다. 범죄자와 정신병력자, 부랑자에 대한 단종법이 합법이고, 비유럽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여겼던 시대의 횡포 속에 그의 노력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이 시기에 얻은 폐병이 지병이 되어 결국 오웰은 4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으니, "체험 삶의 현장"처럼 하루의 겉멋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그렇다고 오웰이 냉소적이고 음습한 사람이었다고 여기진 말자.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과 경배가 즐거운 본능이었던 작가 또한 오웬의 모습이다.
우리가 실제로 아프고, 배고프고, 놀라고, 감옥이나 휴가촌에 갇혀 있지 않는 한, 봄은 여전히 봄이다. 원자폭탄이 공장에 쌓이고, 경찰이 도시를 서성거리고, 거짓말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고 있지만, 지구는 여전히 태양 주위를 돌고 있으며, 어떠한 독재자나 관료주의자라도 우리가 봄을 즐기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를 할 수 는 있을지언정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여전히 봄은 봄이라고 여기는 작가이기에 오웰은 정치적 목적으로 계속 글을 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 조지 오웰은 결코 미래에 대한 절망이나 비관 속에서 동물농장이나 1984년을 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희망적으로 바꾸고 싶었던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안타까운 것은 "코끼리를 쏘다"를 통해 조지 오웰의 전 생애를 명확하게 느껴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옮긴이가 오웰의 에세이를 고르고 고르는 과정과 자신의 생각에 따라 5부로 나누는 과정에 오웬 인생의 중요한 전기 중 하나인 스페인 내전에 관한 일련의 글들이 숨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스페인 내전후 뚜렷해진 오웬의 정치성향과 글쓰기의 목적이 드러나고, 내전 당시 부상과 지병이 도져 요양하는 환자의 눈으로 더욱 참담하게 제국주의의 실상을 폭로하는 "마라케시"를 만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마라케시"는 오웰이 식민지 경찰로서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쓴 글을 모았다는 1부에 있고, "나는 왜 쓰는가"는 작가로서 오웰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2부에 속해 있다. 차라리 마라케시를 2부로 묶는 게 오웰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스페인 내전을 다룬 자전적 소설 "카탈로니아 찬가"를 일독하는 게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오웰은 스페인 통일노동당을 지지하며 사회주의적 대의를 위해 1936-37년에 걸쳐 스페인 의용군에 합류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38년 카탈로니아 찬가를 출판한다.)
덧붙임) 많은 소설비평이 아마추어 비평가에 의해 행해진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경험있는 작가는 아니지만,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사람이 재능은 있지만 지루한 전문가보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잘할 수 있는 것이다. -> 그 시대에 이미 독자리뷰에 힘을 실어주니 무척이나 흥겹게 단숨에 써내려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