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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요일에 오는 전화치고 이른 시간에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도 낯설다.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더니 흐느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리고 정많은 막내 외삼촌이 밤새 술 드시고 누나 목소리 그립다고 내게 전화한 것일까.
그러나 힘겹게 말문을 연 삼촌이 토한 것은 외할머니의 부고.
아, 그렇구나. 당신이 드디어 가셨구나.
외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던가.
대학교 졸업하던 해 설날이 마지막이던가.
내게 외할머니는 마냥 낯선 존재라는 게 서글프다.
3대 독자였던 외할아버지는 손 많은 집안의 처자를 골라 혼례를 올리셨다 한다.
외할머니와 낳은 자식 중 비록 둘을 잃었으나 9의 자식을 낳았으니 당신의 소원은 푼 셈인데,
제사올릴 아들 대를 이은 거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거로 생각하신 건지,
할아버지는 자식을 양육하는 것에 등한하였고, 딸은 자식으로 치지 않았다.
하기에 여자는 언문과 더하기 빼기만 알면 된다는 할아버지 지론에 따라
맏딸인 울어머니는 초등학교 1학년이 학력의 끝이요,
10살부터 공장을 다니며 오빠와 동생의 학업 뒷바라지를 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26 노처녀가 되도록 고생만 하다가 할아버지의 강권에 아버지와 혼인하였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친정을 찾을 때마다 남의 집 귀신이 드나드는 불효를 한다며 박하게 굴었더랬다.
십여 년 전 당신 면전에서 어머니와 작은 외삼촌이 말다툼을 했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출입금지령을 내려,
그 후 몇 차례 찾을 때마다 어찌나 봉변을 주시는지 결국 발길을 끊게 하였다.
나에게도 외할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은 없는데,
아무리 어린 손녀라도 남자형제와 겸상 하는 꼴을 못 보고 마루나 부엌으로 내몰곤 하셨다.
언젠가는 무릎이 나오는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로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사촌여동생을 지팡이로 어찌나 모질게 내리쳤는지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에
외가에 가는 날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살피며 마음을 쓰곤 했다.
내게 그릇된 가부장의 극치의 기억을 심어준 외할아버지에 비해
외할머니는 그저 그림자같은 존재일 뿐인데, 딱 하나 섬찟한 이야기가 있다.
시집가서 일주일 만에 어머니가 못 살겠다고 친정으로 도망친 적이 있다 한다.
하지만 외할아버지의 불호령에 대문 안에 들어가지도 못 하고 집 밖에서 서성이는데,
외할머니가 살그머니 불러들여 뒷뜰 우물가로 데려가셨단다.
어머니는 한숨놓나 싶었는데, 외할머니가 치마섶에서 꺼낸 건 식칼 하나.
김가에서 못 살겠다면 김가 귀신이라도 되라며,
혼자 보낼 수는 없어 내 먼저 갈테니 얼른 따라오라며 외할머니는 당신의 목을 찌르셨단다.
다행히도 어머니의 황급한 만류로 큰 변이야 없었다지만,
어린 나조차도 할머니의 주름진 목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오싹 소름이 돋곤 하였다.
가문이란 무엇인지, 그 대를 잇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시집의 귀신이 된다는 건 무슨 뜻인지,
평생 할아버지의 그늘 속에 목숨을 걸고 말 없이 살았던 외할머니의 인생을 생각하면 숨이 막혀온다.
하기에 다시 들춰본 '달의 제단'의 여인 중 내게 새삼스러운 연민을 불러일으킨 여인은
해월당 유씨도 아니요, 정실도 아니요, 달시룻댁도 아니요, 포항댁 김유식일 따름이다.
순박한 촌부요, 명가의 종부다운 품격도 갖추지 못했고,
손이 귀한 집에 아들 하나 간신히 안겨 체면치레만 했을 뿐 평생 남편의 굄을 받지 못한 그미는
작가의 굄조차 못 받아 자신의 한많은 사연 중 그 어느 것도 남긴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의 외가에서 여자란 삼부종사의 존재로 제사이을 대를 잇는 것이 가장 큰 일이라면,
효계당 종부의 으뜸은 아름다운 제사를 올리는 거로 보여진다.
자손을 낳지 못해도 서안 조씨 특유의 아름다운 상차림을 이룩한 것만으로도
으뜸가는 며느리 대접을 받은 해월당 유씨의 존재가 내 눈엔 이채롭고,
마냥 업신여김을 받으며 상룡에겐 그저 욕정의 대상인 양 치부되던 정실이,
육포의 꽃무늬며 육적의 기린 형상을 만들 줄 아는 것만으로 종부의 자질이 논해진다.
비록 상룡의 할아버지는 솜씨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신이 중요한 거다 역정냈지만,
누리에 종가의 명성을 쌓은 건 역시 제사상이지 않은가.
상룡 친모의 초콜릿 갤러리에 대한 섬세한 묘사 역시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걸 보면,
아름다운 음식 솜씨에 대한 집착은 작가 자신의 강박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작가의 전작 '아름다운 정원'에서도
영주 생일상을 차리는 어머니의 바쁜 손길이 얼마나 정성들여 묘사되었던가.
각설하고 대잇기에 매이든, 부엌에 매이든,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들 사연은 하나같이 구구절절하기만 하고,
외할머니 원망하는 신세타령을 하다 어느날 문득 먼 길을 재촉해버린 어머니의 사연이 기구한지,
변변하게 사연 하나 남기지 못한 외할머니 삶이 더 기구할런지,
혹은 남편의 역정에도 불구하고 손주에게 효계당 씁은탕 흉보는 낙으로 살았던
포항댁 김유식의 숨겨진 사연이 더 많을런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