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열전의 저자와 함께하는 역사기행 - 여주, 영월
단종유배지였던 청령포는 이번 답사 여행의 핵심이었다.
청령포를 찬찬히 둘러보기 위해 이르지만 그 앞의 리버텔가든에서 점심을 먹었다.
곤드레국밥과 곤드레밥을 반반 나눠 시켰는데,
특히 국밥이 제대로라 애들조차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다 먹었다. (강추!)
단종이 청령포에 들어가기 전 주막에서 곤드레국밥을 대접받았다며
주인아저씨는 자랑스레 유래를 말하지만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배가 오길 기다리며 건너편을 바라 보자니 청령포는 울창한 송림으로 이루어진 섬 같아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서강으로 나뉘어져 있을 뿐 맞은편 강변에 불과하다.
지도에는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단종 거처 뒤로는 육육봉이라는 암벽산이 막혀 있어
천연의 감옥으로 안성 맞춤이었던 거다.
서강의 수심은 그다지 깊지 않았는데, 그나마 어제의 비로 물이 불은 축에 속한단다.
태백산맥을 넘는 높새바람의 영향을 받아 영월이 가물다는 걸 실감하겠다.
딸아이는 생전 처음으로 배를 탄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5분도 채 안되는 거리를 통통배로 건너는데,
이 정도 거리와 수심이라면 옛스럽게 나룻배나 뗏목을 운영하는 게 어떨까 싶었다.
뱃전에서 발견한 초소 - 딴에는 청령포의 아름다운 천년의 숲과 구색을 맞추려 했나 본데
시멘트벽에 페인트 그림이 영... 요새말로 안습이다.
배에서 내려 건너편을 바라보니 이 정도면 굳이 배가 없어도 도강이 가능하다 싶었다.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된 해가 1456년이었고,
그 이듬해는 극심한 가뭄으로 강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고 하니,
당시 영월의 호장 엄흥도는 매일밤마다 강을 건너 단종에게 문안을 드리러 갔다는데,
어쩌면 수이 걸어서 건넜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단종 어가에 들어서기 앞서 한참 동안 어둑한 송림을 산책했다.
빽빽한 소나무 숲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자니 산림청이 천년의 숲으로 지정한 이유가 공감됐다.
그 중에서도 관음송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수령이 600년이 넘는다 했다.
관음송 중간에는 옆으로 뻗은 가지가 있는데,
단종 유배 시절에는 저 가지가 땅 위에 의자처럼 누워 있어
단종이 그 가지에 앉아 오열하는 소리를 보고 들었다 하여 觀音松이라 한단다.
한참을 소나무숲에서 노닐다 어가를 들어선 순간 이게 뭐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내문을 보니 '2000년 4월 5일'에 복원한 거란다.
게다가 안내문에는 승정원일지에 따라 기와집으로 복원했다는데,
단종이 머문 '본채'와 궁녀와 관노가 머물던 '사랑채'로 이루어졌단다.
어쩌다 승정원일기가 일지로 둔갑하고 행랑채가 사랑채로 뒤바뀌었는지 부끄러운 일이다.
더욱이 행랑채는 당시 궁녀의 모습을 재현한 마네킹을 잘 보여주기 위해 유리문짝을 달았다.
본채는 정면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인데,
투막집이었는지 기와집이었는지 논란은 둘째치고 뭔가 어색해 보였다.
이유가 뭘까 싶어 나중에 웹 서핑으로 다른 한옥 사진과 비교해 보니
건물규모는 대가집 사랑채 수준인데 기단은 대문채 수준이라 균형이 안 맞아 보였나 보다.
하긴 건물 2채(59.6평, 12.4평) 복원에 든 예산이 달랑 1억이었다는데,
한옥 건축 비용이 평당 1천만원대인 걸 생각해보면 예산이 너무 졸렬했다 싶다.
<남산리 최씨고가 사랑채 비교>
<구미 쌍암고택 대문채 비교>
본채에도 역시 마네킹이 있었다.
우리의 조상은 전신사조(傳神寫照)라 하여 외모가 아니라 그 정신세계를 담아야 한다 했는데,
그 후손들은 외모조차 비슷하지도 않은 서양 마네킹을 세우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절하는 충신의 머리가 단종의 앉은 자리보다 앞으로 튀어나와 등짝으로 절드리는 꼴이요
아무리 단종을 감시하는 역이라 하나 포졸이 문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도 요상하고,
본채에 떡하니 궁녀의 침소가 함께 있는 것도 영 괴이쩍다.
귀양온 단종을 모시던 궁녀가 여섯이요, 시종이 하나 있었다는데,
어떤 궁녀는 행랑채에 숙소가 있고, 어떤 궁녀는 본채에 숙소가 있었단 말인가?
어가를 복원하지 말고 발굴한 터 그대로 석단과 기와편이나 놔두는 게,
단종어가를 향해 절 드리고 있는 두 소나무의 애가를 살리는 길이 아닌가 싶다.
어가 옆의 단묘유지비와 금표비는 영조 때 지어졌다.
숙종이 24년(1698년)에 단종과 그 충신의 이름만을 복위시켰다 하면
영조는 2년에 청령포에 금표비를 세워 왕이 계셨던 곳이라며 보호했고,
9년에는 장릉에 비각과 수복실과 정자각을 세웠고,
10년에는 단종태실비를 새로 세우고,
19년에는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에게 벼슬을 내리고,
34년에는 엄흥도에게 친히 제문을 내려 사육신과 같이 모시도록 하였으며,
39년에는 어가있던 자리에 친필로 단묘유지비를 세웠다.
영조가 왜 이리 단종복위에 신경을 많이 썼는지 이유가 궁금한데,
아버지 숙종의 업적을 이어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인지,
후궁의 아들로서 단종에게 동병상련을 느낀 것인지,
노론을 견제하고 소론에게 힘을 주기 위한 일환이었는지,
어쩌면 그 모든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는지, 모를 일이다.
청령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망향탑에 올랐다.
깎아지른듯한 절벽 위에 돌을 쌓으며 단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내문에는 단종이 아내인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쌓은 것이라 쓰여 있으나,
망향탑의 위치가 너무나 절묘하여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지금이야 난간으로 막혀 있지만 그 시절엔 한발만 내디디면 저 세상인 곳이다.
어쩌면 단종은 언제 닥쳐올지 모를 죽음의 예행연습장으로 이곳을 삼았던 게 아닐까.
망향탑 위로는 길도 이어지지 않는 육육봉이 높다랗게 솟아 있다.
끊임없는 단종복위운동으로 잠자리가 불편했을 세조가
육지의 섬이나 마찬가지인 청령포를 단종의 거처로 정한 이유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청령포를 떠나기 아쉬워 다시 한 번 소나무숲을 거닐었다.
울창한 송림의 가장자리로 나서면 어린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누가 부러 심은 건지, 저절로 자라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린 초록이 사랑스러워
7월에 다시 올 날을 벌써부터 손 꼽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