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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역사기행 우등불이라는 까페에 소속되어 있어요. 올해 그 첫 답사지는 강화도였답니다. 운요호사건과 강화도 조약으로 한국근현대사를 시작한 거죠. 참석자는 우리 3식구외 6명 더. 날이 더워 마로는 강화도에 내리자마자 늘어져 아빠가 안고 다니느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강화도박물관-초지진-고려궁지-전등사 순이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고인돌의 섬 강화도가 누락된 듯. 박물관은 갑곶에 위치해있는데 탱자나무가 무성. 초지진에서는 김포가 바다 너머로 보였습니다.

고려궁지는 공사중이라 들어가 보지 못하고 함께 있던 조선관사만 둘러보았습니다. 여기서 가족사진 한 장~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것은 전등사. 대웅전 처마 밑 나녀상 혹은 원숭이상.

 

전등사 대웅전 내 신중도. 신기하게도 절을 올릴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보통 대웅전에서는 정면 부처에게만 절을 올림)

전등사 약조전 내 용조각. 의미나 기능은 꼭 알아봐야지 하고는 방치중.

 

마로도 전등사가 서늘해서 맘에 들은 듯 열심히 돌아다녔죠. 삑삑이 신발을 신겼던 걸 무진장 후회했습니다. 조용한 경내에서 삑삑이 소리는 무진장 크더군요. 기념품으로 조그만 연잎 모양 향로 하나 샀어요.

 

전등사에서 나와 세미나후 족구 한 판.

저녁은 봄 밴댕이를 먹었습니다. 끝물이지만 맛있었어요. 가을에는 꼭 전어를 먹으리라 다짐했지요. 마로는 해가 완전히 지니 더욱 신나서 돌아다녔습니다. 더군다나 하루종일 머리핀을 빼지 않아 기특했지요.

 

밥 먹고 나온 뒤 밤바다 구경 후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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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07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부러워라. 역사기행. 올해나 내년에는 나도 큰아이 데리고 가고 말거야.
마로는 너무너무 귀여워요. 빨간 민소매원피스 입고 더운 날 엄마아빠 따라 잘 다녔나봐요.
전 아이 어릴 땐 정말 엄두도 못 냈거든요. 다 적응시키기 나름인데...
즐거운 일요일^^

조선인 2004-03-08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로도 낯가림이 심한데다가 워낙 잘 먹고 잘 자는 아이라(밥때, 잘때 조금만 놓치면 손도 못대게 포악해짐) 신랑 없으면 한두 시간 외출도 엄두를 못 내는 편이에요. 사실 이날 30도가 넘는 이른 더위속에 하루종일 애아빠가 무지 고생했습니다. ㅎㅎㅎ

다연엉가 2004-03-27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부럽네요. 그런데 아이들도 데리고 가도 되나요. 그리고 자주 가나요.
저도 같이 가고 싶네요.

조선인 2004-03-27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는 못 가고 계절에 한번씩은 가려고 노력합니다. 4월 5일에는 인왕산을 가기로 했는데 관심이 있으시면 다시 코멘트 달아주세요. 아이들도 갈 수 있게 계획세우고 있거든요.

비로그인 2004-04-01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로(근데 '마로' 이름에 담긴 의미가 궁금한데요? ^^)는 참 행복하겠어요. 일찍부터 엄마 아빠와 함께 우리 나라 땅 이 곳 저 곳을 밟으며 우리 나라가 이겨내 온, 이끌고 온 시간들을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
저도 대학 때 답사랍시고 꽤나 이 나라의 여기저기를 다닌 것 같은데, 님의 서재에서 다시 한 번 그 곳들의 기억을 되살려 보고 갑니다.^^

조선인 2004-04-02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로'란 우두머리 혹은 산꼭대기라는 뜻이에요. 좀 거창한 이름이죠? ㅎㅎㅎ

waho 2004-04-22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기 넘 귀여워요. 빨간 원피스도 잘 어울리고. 요즘은 아이만 눈에 들어 오네요. 세상에 모든 엄마들이 부럽고 존경스러워요. 제가 임신을 해보니 얼마나 힘든지 알겠더군요.

sweetmagic 2004-05-25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로 빨간색이 너무 이쁘게 잘 어울려요...글고 님..제가 아는 언니 닮았어요. ㅎㅎㅎ
 

이번 답사 주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요 사건이 모두 서울에서 벌어진데다가 그 터도 안 남은 터라
궁리끝에 김옥균의 고향인 공주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연관이야 없지만 가을 단풍을 보겠다는 욕심에 ㅎㅎㅎ
그러나 답사지 코스는 어느 하나 기대와 맞아떨어지는 곳은 없었습니다.
우선 김옥균 생가는 80년전에 전소되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란 하늘과 노란 은행나무,
아직도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 누렇게 말라가는 잔디밭...
가을 특유의 고즈넉한 정취가 물씬하여 넉넉하고 여유로와지는 마음이었습니다.


 

마로는 특히 은행잎의 노란 색에 완전히 반해버린 듯 합니다.

 

다음 답사지인 공주박물관은 정말 찾기 힘들더군요.
그러나 덕택에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드라이브를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공주교도소 가는 길!!!
저 길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고 싶다는 신랑 말대로 찬연한 은행나무길이었습니다.
보안상 사진촬영금지구역이라는 게 정말 아까왔어요 ㅠ.ㅠ
공산성 옆 금강변(?) 갈대밭도 좋았습니다.
여긴 드라이브 코스라기보다 산책코스로 더 좋을 듯 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냥 통과. 
급하게 길을 서두른 것과 달리 허탈하게도 공주박물관은 이전준비로 폐관.
변경코스로 떠오른 백제고분군도 무령왕릉 유지보수공사중.
할 수 없이 모형관을 구경하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모형관에는 5호분, 6호분, 무령왕릉의 모형이 있었는데
5호분은 장식이 거의 없는 암굴같은 느낌이었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무덤 같지 않게 화려하더군요.
마로는 그중에서도 6호분이 마음에 들었나봐요.

 

신랑과 일행은 백제왕릉의 꽃 무령왕릉에서 기념촬영.

제 신랑은 가운데 분홍 남방 입은 사람입니다. ^^;;

 

모형관 앞에서도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마로를 안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ㅎㅎㅎ

 

우리 가족 사진도 한 장 찍었지요.

 

실컷 사진 찍으며 놀다 보니 낮에 나온 반달이 보이더군요.
이뻐서 촬영했는데 사진상으로는 나무 위 하늘 중간의 점으로밖에 안보이네요.

 

갑사 가는 길에 그만 해가 지더군요.

 

갑사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져 계룡산 6경이라는 단풍을 볼 수 없었어요 ㅠ.ㅠ
아쉬우나마 갑사단풍 소개하는 게시판 앞에서 기념사진.

 

갑사에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북소리가 계속 들려오더군요.
알고 보니 스리랑카(?)에서 진신사리를 잠시 모셔온 기념으로
새로이 범종각을 세우고 공연(?)을 하는 거였습니다.
저희는 법고 공연에 푹 빠져있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도로 내려갔지요.

 

나뭇가지에 걸린 반달을 구경하며 하산하는 길에 은은히 범종 소리가 퍼지더군요.
우연의 일치치고 기가 막힌 횡재라 할 수 있겠죠.

 

하여 우리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쳤답니다.
내년 가을 기행은 무조건 계룡산 갑사로!!!

웃긴 건 다들 공연 구경하느라 갑사는 전혀 둘러보지 못했다는 것.

참, 갑사 밑에 있던 식당들은 무지하게 비싼 편이더군요.
신랑이야 운전해야 하니까 구경만 했지만, 그래도 좁쌀동동주는 참 맛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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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우리 민족과
'언어공통성' 있는 우리역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보면서

송현석 2002-maro@hanmail.net
2004년 1월 5일 19:21

중국이 발해사에 이어 고구려사를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려고 국가적 차원의 공작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중국은 2002년 2월부터 5년 기한으로 3조원의 예산을 투입해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대규모 연구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있으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물론 학계와 군대까지 동원해서 고구려사 왜곡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고대 우리민족과 중국의 역사서는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같은 우리 역사서는 물론이거니와 중국 역사서인 《오대사》, 《송사》, 《명사》등에서도 <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사를 고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삼국지》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과 《후한서》에서 고구려, 부여, 동옥저, 조선 등을 “東夷(동쪽의 오랑캐)” 즉, 중국과는 다른 민족과 다른 나라로 설명하고 있다.

민족과 민족형성의 중요한 준거인 ‘언어의 공통성’의 문제만 보더라도 고구려는 우리의 역사이다.

중국의 역사서인《삼국지》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과 《후한서》에 고구려, 부여, 동옥저, 조선 등은 언어적 차이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大同時時小異 : 크게는 같되 종종 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도 통역관을 대동하고 회담을 했다는 등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흉년만 들면 상당히 많은 이주민들이 국경을 넘나드는 현상 등에서 역사적 추론을 해보자면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거의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으리라는 추론은 타당하다. 반면 중국기록으로 볼 때, 말갈, 숙신 등은 부여, 고구려 쪽과 언어적 차이가 분명히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어학계는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남만주 일대부터 한반도 일대까지 이미 기원전부터 언어의 공통성이 상당히 형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민족이론(민족과 민족형성, 민족발전 등에 관한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준거로 ‘언어’를 많이 제기하는데, 고대사회부터 고구려와 한반도 이남에 걸쳐 언어의 공통성이 자리했다는 말은 고대사회에 이미 한민족 내의 공동체(정치·경제·문화·유대감 등)가 형성되고 발전했다는 의미이다.

고고학적으로도 요녕성과 길림성, 한반도 지역에 걸쳐 기원전부터 이미 해부학상 공통점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외지역과 구별되고 있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스탈린의 이론에 기초한 중국의 <민족이론>도 오늘날 중국의 고대사 조작을 모순에 빠뜨리고 있다. 스탈린은 “민족이란 언어, 지역 경제생활 및 문화의 공통성에서 표현된 심리상태의 공통성을 기초로 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공고한 공동체이다”라고 정의 내렸다.

즉, 스탈린은 언어(language), 지역(territory), 경제생활(economic life), 심리상태의 공통성(psychological make-up)의 네 가지를 민족형성의 요소로 들고 있다.

우리 민족이 고조선시대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고대문명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 역사적 사실을 중국의 민족이론에 비추어 말하면 고조선 이전부터 이미 우리 민족은 언어공통성과 경제공통성, 사회문화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고조선이라는 강력한 정치체제의 배경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고조선이 고대중국과 결전하며 민족자결을 지켜냈다는 것은 심리상태의 공통성 역시 중국과는 별개의 민족으로써 심리상태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국에서 주장하는 <한사군-고구려-발해> 계보는 억지이며 중국이 주장하는 민족이론에도 위배되는 자기모순의 산물일 뿐 아니라 보편타당성이 거세된 억지주장일 뿐이다.

중국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도 중국에게 조공을 바쳤기 때문에 군신관계였고 따라서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는 황당한 주장을 별치고 있다. 고대에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의 많은 국가들도 조공을 받쳤다. 그렇다고 이들의 역사가 다 중국의 역사인가.

원나라를 세웠던 칭기스칸의 제국은 알렉산더-나폴레옹-히틀러가 점령했던 땅을 다 합친 것보다 넓다. 칭기스칸은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이르는 중동까지 점령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럽과 아랍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란 말인가. 고려나 조선도 중국에게 조공을 바쳤다. 일본도 중국에게 조공을 바쳤다. 왜 이 국가와 민족은 중국의 역사가 아니란 말인가.


▲필자 송현석씨
중국의 억지는 상식도 없고 과학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주독립국가에 대한 후안무치한 태도이며 국교를 수립하고 있는 동반자에 대한 실례이다.

또한 중국의 이런 태도가 계속되는 것은 중국이 스스로 국가주의에 빠지고 있다는 증거이며 국제사회의 비난과 경계심만 부추길 뿐이다. 중국은 하루빨리 역사조작을 중단하고 자기모순에서 벗어나야할 것이다.

동서울청년회 회장 송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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