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돌이 > 태안반도 여행 -셋째 날, 태안, 서산

오전은 역시 팬션에서 잘 놀았다. 오후 1시 넘어서 주인아주머니께 고맙다고 전화드리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아이들 일정이 아니라 우리 일정이다. 일단 태안읍에 있는 백화산 중턱의 태안 마애삼존불로~~
절 입구까지 차가 올라가 별로 고생 안하고 마애삼존불을 찾아갈 수 있었다. 날이 맑았다면 서해안의 리아스식 해안이 다 보였을텐데 흐린날이라 다 뿌엿하니 아래는 잘 안보인다. 이곳의 마애 삼존불은 특이하다. 보통 삼존불은 가운데 부처상이 있고 양쪽에 보살상을 또는 또다른 부처상을 두는게 일반적인데 여기는 가운데 관음보살을 두고 양쪽으로 부처를 배치했다. 아미타불과 약사불인 듯 하다. 물론 크기는 가운데 관음보살을 작게 만들긴 했지만.... 이런 식의 배치는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어떤 이유일까? 짐작컨대 아마도 엄격한 불교교리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이라 아직은 순수한 기복신앙의 형태로 불교가 존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저 백제의 사람들이 염원하던 마음 그대로를 표현한건 아닐까? 새겨져있는 부처와 보살이 모두 옛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던 이들이다.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의 아픔과 소원을 들어주던 관음보살, 인간의 만가지 병을 고쳐주는 약사여래, 죽은 뒤 극락세계로 이끌어주는 아미타여래 - 당시의 백성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부처들이다. 바닷가의 삶이란게 얼마나 척박하고 많은 위험을 안고 사는가? 그런 백성들에게 그래도 한 때의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되어주었을 그들. 그런데 한 때는 서산마애 삼존불처럼 미소로 빛났을 이들의 얼굴은 그동안의 파손이 심해 미소를 거의 잃어버렸다. 얼굴표정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하기야 지금이야 이런 관광객들이나 가끔와서 휘 둘러보고 가는데 미소지을 일이 뭐가 있겠냐만은.....


태안 마애 삼존불, 불교교리의 기본마저 무시한 파격이 즐겁다. 가운데 보살을 모신 두명의 여래, 이 땅의 민중들이 가장 좋아했던 분들만으로 골라 모셨다. 왼쪽 아미타여래, 가운데 관음보살, 오른쪽 약사여래다)


할머니 따라 집앞절에 놀러다니는 아이들, 덕분에 아이들은 절에만 오면 무조건 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밥먹을 때는 어린이집에서 배운대로"두손 짝" 하면서 기도하자 하고, 절에서는 부처님한테 절하자 그러고... 예린이가 이대로 종교에 대한 편견도 나와 다름에 대한 편견없이 계속 그렇게 자라줬으면 좋겠다.

그다음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나는 가봤는데 남편은 못가본 유일한 곳. 서산 개심사로 가기로 했다. 개심사를 생각하면 또 여우님이 떠오르는건 뭐야 도대체....(알라딘 중독 증세다.)
10년만에 다시 찾는 곳이다. 10년 전의 그 풍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 가슴이 설렌다. 내 맘속에 있는 개심사는 주변의 산과 저수지의 어울림으로 가는 길의 풍광이 정말 멋졌었고 길은 포장도 안되어 진짜 울퉁불퉁, 거기다가 어찌나 좁은지 내내 다른 차를 만나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던 길이었다. 근데 이게 왠일 길 진짜 잘 뚫렸다. 오히려 그럼으로써 이전의 풍광의 멋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갑자기 긴장된다.
드디어 절 입구에 도착, 근데 없던 일주문이 생겼고 관광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랑 식당까지 생겨 여느 관광지와 다를 바 없는 곳이 되어 있는게 아닌가? 한편으로 씁슬하면서도 이 더위에 아이들을 꼬드길 수 있는 아이스크림을 파는게 반가워 넷이서 탱크보이 하나씩 입에 물고 절을 향해 갔다. 기억에는 없는데 꽤 긴 길이다. 아이들을 반은 걸리고 반은 업고 절로 올라가는 길이 왜 이다지도 멀고 힘드냐? 그래도 시멘트 길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옛적의 풍경이 그대로 살아있다. 절입구의 외나무 다리도, 대웅전의 단정한 자태도, 심검당의 예술스런 표정도 다 그대로다. 10년동안 이렇게 안 변하다니....


개심사 오르는 길에 잠깐 휴식 - 엄마 빨리와!


용감한 해아 - 절 입구의 외나무 다리도 무서울법한데 전혀 겁먹은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신나하는.... 해아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은 예린이 잔뜩 겁먹어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만세루 창으로 본 개심사 앞 풍경 - 한국 정원은 이런 창이 그대로 액자의 역할을 한다.


단정하고 아담한 대웅전의 모습 - 뒷산의 산세를 그대로 닯아 산속에 폭 안긴듯 다정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아직 조선의 독자적인 양식이 정립되지 않은 시기 고려와 조선의 건축양식들이 혼합된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심검당의 휘어진 나무들은 여전히 잘 있더라. 이 문을 만든 사람은 참 멋있는 이였을 터.... 그의 넉넉함이 오백여년 뒤어 한 지나가는 객의 마음까지 어루만져 준다.

개심사에서 아이들 업고 다니느라 너무 지쳐 서산 마애삼존불은 지나치기로 했다. 시간도 벌써 5시 30분 지금 부산으로 출발해도 올 때 기준으로 생각하면 새벽이 되어야 도착한다. 서방은 내일 출근인데.....
서해 고속도로로 가기 위해 서산쪽으로 나오는 길에 갑자기 끝도 없는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저푸른 초원위에'노래가 절로 나오나 내력을 알면 그리 신나지 않다. 이름하여 삼화목장. 옛적에 김종필이 잘 나가던 시절에 이곳에다가 숲의 나무들을 몽땅 잘라내고 외국에서 들여온 풀씨 뿌려 만든 곳이다. 딱 이 시대 군바리다운 발상이다.(지금이라고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기가 원하는걸 위해서는 산 하나쯤은 날려도 된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게 되는걸까? 이 인간 목장은 엄청 좋아해서 제주도에도 한 때는 목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 둘이서 이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서방이 "종필이 앞니 드러내고 말달리는거 한 번 상상해봐라" 한다. 둘이서 키득거리다가 또 불쾌해졌다. 세상에는 생각하는 것 만으로 불쾌해지는 인간들이 꼭 있다.


갑자기 펼쳐지는 목장 - 삼화목장이다. 엄청난 규모다.


개심사 입구 산중턱의 소떼들 - 예린이가 갑자기 이 소들 얼굴보러 산에 올라가자고 떼써서 죽는줄 알았다.

사흘간의 여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은 시원섭섭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더 놀고 싶기도 하고.... 그래도 자정전에 돌아가려고 둘이서 차를 있는대로 밟아댔다. 중간에 해아의 쉬~~ 소리는 계속됐지만 엄청 밟아댔더니 그래도 반 11시 반에 집에 도착했다. 갈 때보다 딱 두시간 덜 걸렸다. 짐은 모두 그대로 쌓아두고 그냥 자자...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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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진주 > 맨발 산책길



방학 첫날. 윤이와 영이는 일 년 간 벼르고 벼루던 맨발 산책길 1km 대장정길에 서다. 맨발로 걸을 수 있도록 잔잔한 모래섞인 황토흙을 깔아놓은 <맨발산책 전용로>.



"오메, 나죽네!" 벚나무의 시원한 그늘이 잠시 벗겨진 곳-가뜩이나 뜨거운데 오르막이다. 얼른 통과하고 보자는 윤이-엉덩이를 쑥 내민 채 허둥지둥 왕자님 스타일 다 구긴다. 영이는 아직 발바닥이 보드라운지 조금 걷더니 맨팬한 콩크리트 경계석 위로 걷는다. 나도 처음엔 시원하더니 나중엔 발바닥이 얼얼한게 감각이 없다.



중턱에 나무그루터기 의자가 있다. 이만큼 반가운게 또 있다냐? 영이가 낼름 앉는다. "이잉, 발바닥에 불나는 거 같아. 아파 죽겠어!" 형한테라도 엄살을 늘어놓는다. 엄마는 개의치않고 사진이나 찍는다. 메렁~



좌로는 숲이요, 우로는 호수라! 사잇길로 맨발로 걷는다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우리곁으로 오리유람선 한 척 유유히 떠간다. "엄마, 우리도 저거 타요. 네?" 오리배는 짠순이 엄마에겐 안 통하는 이루지 못할 영이의 희망사항이었다.



드디어 맨발산책로가 끝나고 발을 씻는다. 발씻는 돌세수대야 정말 좋다 그지?



으메 션한 거 으메 존거! 차가운 물로 발을 씻으니 날아갈 듯 개운하다. (윤이는 아직 발등까지 벌겋다)



신발이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신의 폭신한 안락감에 꿈길같이 걸어 야은 길재 선생 유적지에 갔다. 채미정 입구에 선 <회고가>시비 앞에서 윤이는 아는 걸 최대한 동원해서 시조에 실린 시대적 배경을 영이한테 전수한다. '우리 히야는 우짜면 이래 아는 것두 많으까?' 영아, 부러우면 너도 책 읽으렴, 지발 부탁이야..



채미정을 둘러보고 숲 속을 거닐다 보니 배가 고팠다. 감자옹심이 칼국수-칼국수 주제에 왜 이렇게 비싼겨?(4500냥)하고 버럭버럭 화냈던 적이 있지만 먹어보면 과히 예술의 경지라고나 할까 홍홍..감자로 빚은 옹심이와 감자면이 쫄깃쫄깃한게 맛이 기가 막히다. 김이 술술 나도 두 녀석이 얼마나 맛있게 먹던지. "다음에 또 오자"라는 약속을 하며 돌아섰다. 방학 첫날은 이만하면 제법 보람있었는데 앞으로 남은 날들은 과연......ㅡ.ㅡ;

/050721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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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돌이 > 남도의 마지막 겨울 햇빛 - 둘째날 해남

해남은 여러번 왔었는데 역시 기억에 남는건 신혼초에 남편이랑 둘이서 배낭매고 버스타고 왔던 때다. 걷기도 많이 걸었지만 그 때 참 맘씨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차를 많이 얻어타고 다녔었다. 추억을 떠올리며 나중에 아이들이 좀 더 큰다면 넷이서 배낭매고 여행다니자는 얘기를 둘이서 두서없이 해대면서 옛날 우리가 참 맛나게도 먹었던 명동정에 가서 게장백반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이 집은 그 허름한 분위기하며 주인집 부부하며 하나도 변한게 없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근데 음식맛이 여전히 맛있긴 한데 옛날처럼 그렇게 환상적인 맛은 아니다. 아마도 그동안 쓸데없이 입맛만 비싸진게 아닌지...

  '녹우당'으로 향했다. '녹우당'은 윤선도의 고택이다. 여기도 그 아득한 옛날 갔던 기억은 있는데 생각나는거라곤 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이 참 정겨웠다는 것과 집앞의 커다란 은행나무뿐... 다시 찾은 녹우당은 그동안의 정비사업으로 집앞이 깔끔하게(너무 깔끔하게) 정비돼버려 옛날의 정겨운 맛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은행나무만이 세월의 무게를 간직한 채 여전히 서있을뿐... 새롭게 해남윤씨 소유의 문화재들을 전시하기 위한 전시관이 있었는데 도난 문제 때문에 진품은 없고 중요한건 모두 사진들이라 김이 빠졌다. 다만 인상적인건 엄청난 양의 책들과 분재기(분재기란 옛날 재산을 자손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나눠준다는 기록이다.)였다. 그 시대에 저 정도의 책을 소유한 집이라면 엄청난 부자라는 얘기, 거기다가 분재기의 길이가 저렇게 길다는 것 역시 나눠줄 재산이 무지 많았다는 얘긴데... 분재기 안내문에 윤선도가 재산을 나눠줄 당시 노비의 수만 500여명이었다는 기록에 입이 쩍 벌어진다. 그러면서 작년 여름에 갔던 보길도가 생각났다.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 - 침대를 몇개나 만들수 있을까?
 

   보길도는 윤선도의 별장이라 할까? 부용동 정원이란걸 만들어 윤선도가 보길도 전체를 거의 자기 개인의 정원처럼 만들어놓고 노년을 즐겼던 곳이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간 사유와 그의 이후 보길도 생활은 이해하기 힘든 불협화음이다. 그가 보길도에 간건 조선 인조가 병자호란에 패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더러운 세상에 살 수 없다. 세상을 멀리하자'며 제주도에 가다가 잠시 들른 보길도의 풍광에 반해 눌러앉은 곳이다. 그후 그곳에 세연정이란 정원을 만들고 곳곳에 거처를 만들어 살면서 거의 날마다 세연정에 나가 그위 옥소암이란 바위위에 악공과 기생들을 불러 노래하고 춤추게 하면서 그 모습이 아래 세연정 연못에 비치는걸 보고 풍류를 즐겼다는 것. 이게 나라의 운명에 대해 비분강개하는 선비의 모습과 도대체가 매치가 안되는거다. 고등학교 때 배운 그의 어부사시가가 왜 훌륭한지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 나로서는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그것을 즐기는데 온힘을 아끼지 않은 전형적인 지배층으로서의 그가 이미지로 떠오를 뿐... 씁쓸하다. 갑자기 남편이 묻는다. "이 집안이 아직도 그렇게 부자일까" 글쎄 나도 궁금하다.

 녹우당은 윤씨 종가의 사랑채를 말하는데 여전히 집 전체의 구조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옛날보다 더 황량해진 느낌에서 그저 밋밋하게 둘러보고 나와 완도로 향했다.

  완도는 요즘 드라마 해신의 인기에 힘입어 관광객으로 넘쳐났다.   장보고, 그가 가져다주는 부와 진귀한 보물들에는 환호했지만 귀족이 아닌 그가 가지는 권력은 참을 수 없었던 신라 귀족에게 장보고는 반역자에 불과했다.  장보고를 제거한 후 그의 본거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섬의 주민들까지 다른 지역으로 강제이주 당해야 했었다. 그로 인해 완도에는 그와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이 제대로 남아있는게 없다. 그래서 몇 번의 이쪽 답사여행에서도 번번히 빠졌던 곳이다. 어쨌든 이번에 이곳을 다시 찾은건 나 역시 드라마 때문이니  텔레비젼의 위력이란...(드라마를 한참 재미있게 봤는데 요즘은 장보고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오바하는 장면들이 거슬려 안본다. 성질머리 하고는...ㅡㅡ;) 두 곳에 세트장이 건설되어있었다. 먼저 가까운 신라방 세트장을 찾았는데 문경에 있는 왕건 세트장의 썰렁함에 비하면 훨씬 볼거리가 있다. 혹시나 촬영팀이라도 만나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리라는 기대감에 갔는데 곳곳에 관광객만 넘쳐나는군. 갑자기 남편이 월요일엔 촬영을 안하고 쉰단다. (이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근거없이 한마디 해놓고는 딴청이다)
  다음에 간 청해진 세트장에서는 본격적인 장보고의 청해진 활동을 위해 세트장 건설이 한창이었다. 왕건 세트장 보고 지나치게 얼렁뚱땅 만들어진 건물들에 황당했었는데 여긴 공사가 장난이 아니다. 거의 건물들을 새로 짓는 수준이다.(우와! 우리나라 방송국들 돈 많아) 바다쪽으로 촬영에 쓰이는 배들이 점점이 떠 있어 구경갔다가 갑자기 몰아치는 찬바람에 얼어죽는줄 알았다. 나 추운것도 안괜찮은데 우리 예린이야 오죽하랴?  예린이 갑자기 가자고 난리다. 아이가 견디기에는 바닷바람이 너무 엄청났다. 게다가 아침밥을 깨작거리기에 과자를 못먹게 했더니 그 심통까지 겹쳐서 심술이 바닷바람만큼이나 세다. 점심은 잘 먹겠다는 약속과 함께 매점에 가서 과자와 음료수를 안겨주고 나서야 기분이 풀렸다.(단순한 것^ ^...)


                          완도 해신 세트장 - 신라방, 많이 보던 모습이군

 
                               완도 해신 세트장 -청해진, 무지 추웠다.

  몇 년 전 남편과 단둘이 찾았던 미황사를 다시 찾았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묵언수행중이니 절대정숙이라는 커다란 표지판 하나. 순간 걱정이 되어 예린이에게 "예린아 여기는 조용히 해야되는 곳이야 그러니까 떠들지 말자" 순간 예린이 왈 " 다음부터는 조용히 하는데 가지말자 왜 맨날 조용히 하는데만 가노"(허걱!!!) 중창공사를 몇군데 했음에도 아직은 미황사는 조용한 절이다. 절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달마산을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대웅전이 들어서는 이를 압도한다. 지붕의 선이 어찌 저리 산세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질까? 그러면서도 곳곳에 건물없이 담장을 터서 문을 만든 절집의 담장들이 아기자기하게 방문객을 맞이한다.
  부도밭을 가기위해 절 뒷편으로 난 오솔길을 산책했다. 드디어 떠들어도 된다니 예린이만 신이났다. 아빠에게 목마를 태워달래고는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둘이서 갈때는 얼마안되던 거리가 아이랑 같이가니 왜 이리도 머냐? 둘이서 예린이를 번갈아 업고 안고 도착한 부도밭은 너무 깔끔하게 정리되어져 예전의 그 아기자기하던 맛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래도 세월의 무게를 담담히 지내온 돌들은 여전히 정겹고 부도에 익살스럽게 새겨져 있던 게나 거북이의 모습도 정겹다. 어쩌면 엄숙할 수도 있는 이런 부도에 이런 정겨운 조각을 새긴 석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또 여기에 묻힌 스님 역시 인간미가 풀풀 풍겨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예린이가 부도에 새겨진 게에게 "꽃게야 내 풍선 줄게 잘 가지고 놀아"란다.


                                     달마산과 어우러진 미황사 대웅전과 응진전

 
                                      대웅전 앞뜰에서 풍선들고 신난 예린이
 

 
       부도밭 가는 길의 담장위의 나무 -나무의 자람을 위해 담을 허무는 마음이 아름답다


전망을 모두 가리는 건물의 지붕 - 대웅전 앞에 새로 건물이 들어섰는데 건물을 잘못 지으면 어떻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도로변의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김남주 시인의 생가로 갔다. 길거리에 커다란 표지판이 있어 찾아갔는데 시인의 흔적이라곤 집앞에 고은 시인이 써서 세운 철판뿐이다. 시인의 약력이 간단하게 소개된 글이었는데 고은씨 정도면 좀 다르게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쉽다. 집안에는 곳곳에 가난의 내음이 묻어나오고 조그만 안채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듯한데도 폐가의 분위기가 집을 압도한다. 피를 토하듯 시를 썼으며 지배자에게는 서슬퍼런 칼날이었던 그의 시를 생각하면서 조그만 시비라도 하나 시인의 집앞에 세워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이 집앞에서 윤선도를 다시 생각했다. 단순히 부자냐 가난하냐가 아니라 누가 진짜 시인일까를 생각해본다. 어부가 없는 어부사시사는 거짓일뿐이다.

  큰일났다. 내가 운전을 하는 사이 예린이와 놀아주던 남편이 전화통화를 길게 하는 바람에 피곤했던 예린이가 잠이 들어버렸다. 이제 좀 있으면 저녁먹을 시간인데 한 번 잠들면 옆에서 폭탄이 터진다 해도 꿈쩍도 않을 예린이가 밤늦게 일어나 밥투정에 안자고 놀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애가 잠드는 것도 모르고 전화에만 집중한 남편한테 신경질을 퍼부었다. 좀 미안하긴 한가보다. 그러면서 1시간이면 일어날거야 하는데 흥 어림없는 소리....

  자는 예린이와 함께 오늘의 마지막 일정. 고천암호에 철새를 보러 갔다. 동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지극한 남편을 위해 잡은 일정이다.(나는 동물 별로 안 좋아한다. 무섭다. 특히 날개달린 것들. 바퀴벌레도 날개달린게 제일 싫다.) 고천암호에 도착하자 끝도 없이 펼쳐진 갈대밭이 엄청나다. 멋지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으랴? 날이 너무 추워져 차안에 있다가 나갔다가 하면서 새들을 기다렸다. 해 저물 무렵 갈대밭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석양진 하늘의 장관에 감탄하면서.... 새들은 이제 다들 떠났는지 기대했던 만큼 많이 날아오르지는 않는다. 그래도 감탄을 연발하는 남편...(그래 새가 좋나? 나는 비둘기나 가창오리나 백로나 다 새일뿐인데...)


   고천암호의 가창오리들 - 이 새들은 아직까지 안가고 뭘하고 있을까? 다들 간것 같은데


                                       고천암호의 끝도 없는 갈대밭

해는 지고 잠시 둘이서 자는 예린이를 보면서 고민을 했다. 이틀의 강행군에 좀 많이 피곤하고 원래 예정대로 내일 강진까지 둘러본다면 모레 개학이 부담스럽다. 원래 여행이란 아쉬움을 남겨야 하는거야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6시간을 차를 달려야 하나? 피곤하면 운전 교대하기로 하고 집으로 출발(결국 운전은 남편 혼자서 다했다. 대단한 체력이야...에구 피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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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돌이 > 남도의 마지막 겨울 햇빛 -첫날 진도

드디어 올 겨울 벼르고 별렀던 전남 해안쪽으로의 여행이다. 부산에서 진도까지, 반도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군...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이제 짐챙기는건 선수급이다. 10분이면 끝) 셋이서 출발. 5시간 좀 넘게 걸려서 진도에 도착했다. 오늘도 우리 예린이는 최고의 여행 동반자이다. 카시트에 앉아 어찌나 잘 노는지... 좁은 차안에서도 어찌 그리 무궁무진하게 놀거리를 찾아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드디어 해남에 들어섰다. 그런데 차도 옆으로 펼쳐진 배추밭들의 배추가 전부 수확도 못해보고 그대로 말라죽어가고 있다. 한둘도 아니고 이 지역 배추밭들은 거의 다가 이모양이다. 중국산 배추가 엄청 수입된다더니 그래서인가 보다. 마음이 아프다.




               망금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진도대교 - 아래가 울돌목(명량)이다

 내 기억속의 진도는 거의 15년 전이다. 그 때는 남편과 단둘이였으면 좋겠지만 우리 둘 외에 60여명의 인간이 우르르 왔었다. 그때의 진도에 대해서 남아있는 기억이라곤 밤의 진도대교가 참 환상적이었다는 것과 여관의 밥이 무지하게 맛있었다는 것 외에 정말 전혀 기억이 안난다. 밤의 진도대교도 집사람과가 아니라 여자 후배 한명과 둘이서 거닐었었는데 한 밤의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둘을 도둑으로 오인한 여관집 진돗개한테 물려죽을 뻔 했다. 옛 추억을 더듬어 옛날 그 여관지에 다시 들려 점심을 먹었다. 아직 그 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반가웠지만 여전히 맛있는 밥도 반가웠다.

  다시 온 진도대교는 기억속의 것보다는 썰렁하다. 하지만 진도대교 옆 망금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진도대교의 풍경은 기억속의 그것보다는 못하지만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진도대교 바로 아래의 물이 바로 울돌목(명량)이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의 현장이다. 얼마전 읽은 칼의 노래에서 읽은 명량대첩의 대목들이 생각나 감회가 새롭다. 그저 우리나라 전쟁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전투의 하나로 기억될 뿐이지만 잠시 그날로 돌아가면 지금 저 바다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묻혔을까? 그들의 사연은 얼마나 구구절절히 많을까? 칼의 노래에서 적이 무리들로가 아니라 개인으로 보이는 순간의 이순신의 고뇌와 두려움을 떠올려보며 잠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것이 일본군이었든, 조선 수군이었든... 지금은 언제 소용돌이쳤냐는 듯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바다는 고요하기만 하다.

  금골산 5층 석탑을 찾아갔다. 여태까지 본 진도의 산과는 다르게 높지는 않지만 험준한 바위산인 금골산 아래 금성초등학교 내에 있었다. 고려말에 만들어진 백제 양식의 5층석탑이다.(백제의 탑 양식은 다른 지역에 비해 2층 기단부를 유난히 높게 만든다. 따라서 탑은 실제 높이보다 훨신 높아 보이고, 안정감 보다는 가볍게 땅을 박차고 날아오를 듯한 상승감을 갖는다.) 완벽한 비례는 아니지만 이런 시골 외진 구석에서는 보기 드물게 잘 만들어진 탑이다. 특히 초등학교 쪽에서 봤을 때 하늘을 등지고 선 탑의 상승감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고려말이면 백제가 망하고 통일왕조를 이룬지도 거의 700년의 세월이 흘렀을 터인데도 그 지방의 문화적 특성이 반복 재창조되는 건 어떤 힘에 의해서일까? 고려 중부에서는 다양한 양식의 탑들이 실험되어지고 있었음에도 이 지역에서 여전히 옛 양식이 그대로 재현되는 건 단순히 이 지방이 변방의 한구석이므로 중앙의 힘이 미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좀 진부하게 들리긴 하지만 전통의 힘 같은 것? 하지만 둘 다 별로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군.... 이럴 때 상상의 힘이 필요한데 내 상상의 힘은 좀 딸린다. 다음에 다시 온다면 다른 역사적 상상을 할 수 있을까? 금골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을 보고 싶지만 산을 보니 도저히 예린이를 데리고 올라갈 엄두가 안난다. 아이를 데리고는 좀 위험할 듯.... 하긴 하나쯤은 남겨놔야 다음에 다시 진도를 찾을 이유가 되어줄테니 아쉬운 눈길만 총총... 용장산성으로 향했다.


                                                   금골산 5층석탑


  남편의 말로는 분명히 대학 때 왔다는데 나는 도저히 기억이 안난다. 오늘 현장에 와봐도 처음본 것이다. 용장산성! 산성이라니 당연히 성곽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눈을 씻고 봐도 성곽이 없다. 다만 뒷산을 기대 산을 깎아 계단식으로 지은 건물의 축대들만 남아있다. 알고보니 여긴 행궁터다.(행궁이란 왕이 수도 궁성외의 다른 지역에 갈 때 머물기 위해서 짓는 궁을 말한다.) 여기는 고려 정사에서는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삼별초가 고려 조정과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왕족 온을 왕으로 세웠으니 바로 그의 궁궐 터이며 삼별초의 진도 근거지이기도 하다. 아마도 옛날에는 앞쪽에 성곽이 늘어서 있었으리라. 지금은 산성은 없어지고 궁궐의 축대들만 이렇게 남아있다. 전쟁 중이었으니 방어를 위해 궁궐도 이렇게 산을 깎아 지었으리라.
  이 자리에 서서 삼별초를 다시 생각해본다. 삼별초는 평소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우리 교과서는 여전히 삼별초의 항쟁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다루고 있다.(이건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통시절의 유산이다. 자신의 군사쿠데타의 역사적 정당성을 고려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인 삼별초에서 찾고자 했던...이순신 장군의 성웅화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박통시절 강화되었다.) 하지만 삼별초의 무엇이 그리 자랑스러울까? 그들이 몽고에 대항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돌아갈 곳이 없어진 그들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에 불과했던 것을. 삼별초가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집단 중에서는 공병(公兵)적인 성격이 강했다고는 하지만 역시 그들은 본질에 있어서는 최씨 정권의 사병이었다.(40년간의 몽고와의 전쟁기간 그들은 몽고와 싸우지 않았다. 다만 강화도에서 최씨정권을 지켰을 뿐이다. 그리고 가끔 몽고군이 물러가면 세금을 걷으러 육지로 나갔다.) 그런데 이들의 항쟁이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되어지면서 이들의 횡포에 의해 무신정권 기간 내내 괴롭힘을 당했던 백성들의 고통, 겨우 전쟁이 끝나고 이제 평화가 찾아오나 했는데 다시 삼별초에 의해 전쟁과 군역의 고통으로 내몰려야 했던 강화도, 진도, 제주도의 백성들의 고통은 실종되어졌다. 또한 항쟁의 주역이 삼별초뿐이었던 것처럼 다뤄지면서 당시 중앙정부에 대한 절망이 원인이 되어 삼별초의 항쟁에 가담했던 수많은 민중들의 외침은 실종되어져 버렸다.(박통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아직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국사 교과서 역시 정말 대단하다 ㅡㅡ;) 이 행궁의 건설에 동원되어지고 몽고와 마지막까지 싸웠던 백성들은 후대의 역사가 이들을 이렇게 푸대접할지 알았을까?


                                                           용장산성 행궁터

운림산방으로 향했다. 운림 산방은 조선말 소치 허련이란 사람이 살면서 그림을 그렸던 집이다. 이 지방의 다른 문화재와는 다르게 굉장히 공을 들여 보존사업이 이뤄진 곳이다. 처음 입구에 들어서자 굉장히 웅장한 기와집이 보여 우와! 이 사람 진짜 부자였던가보다 했다. 알고 보니 오른쪽의 건물은 소치 허련과 그 후대의 그림들을 전시해놓은 전시관이다. 조선말 허련이 살았던 공간은 운림산방이라는 정자는 아니고 정자의 형태를 가미한 아담한 건물과 그 뒤의 초가 살림집이다. 양반집 치곤 아주 소박하다고 해야되나? 가난하다고 해야되나? 그런데 운림산방앞의 연못만큼은 웬만한 대갓집 연못보다 훨씬 크고 훌륭하다. 특히 뒷산은 마치 이 집안소유의 병풍인듯 느껴질 정도로 이 집과 어울리는 모양을 하고 있다. 앞으로 연못과 뒷산이 이 집의 경계가 되어주니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제일 커다란 집이 되어버린게 아닌가?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면 정치가는 되기 힘들 것 같고 시인이나 화가같은 예술가가 저절로 될 것같다. 이 집안이 대대로 화가를 배출하는 이유를 알듯도 하다.


                                                               운림산방 전경

  옆에는 소치 허련 이후로 이 집안이 배출한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솔직히 동양화에 대해 잘 모르는 내 눈에는 허련의 그림은 그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조선말 진경산수화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표방하고 나선 한참 뒤에도 변방의 선비화가는 여전히 중국화풍 그대로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그의 그림에 감응하기는 참 어렵다. 오히려 그의 3대째 후손 중 정말 멋지게 여백을 활용한 화가의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기법이나 그런건 모르겠지만 산과 안개와 구름의 표현이 감탄사를 절로 나오게 하는 그림이었다.먹으로 그리면 산이요 여백은 그대로 안개가 되는 그림의 웅장한 기백에 입만 벌리고 섰다.



                            운림산방 전시실의 그림- 제목 몰라! 까먹었어요

  다시 오른쪽에는 진도 역사관이 있다. 말 그대로 진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해놓은 진도 박물관이다. 곳곳에 만들어놓은 명량대첩이나 유배문화 등의 인형모형들이 예린이는 신기한가보다. 명량대첩의 모형 앞에서는 깨진 배와 물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 "엄마! 배가 부서졌어. 그리고 사람들도 빠졌어! 어떡해?"를 계속 되뇌인다. 표정은 또 울먹울먹...감수성이 유난히 예민한 예린이! 가끔은 엄마는 그런 예린이가 걱정스럽다. 이 험한 세상 어찌 살아갈려나...

점점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서두러 세방낙조대로 향했다. 진도에서 낙조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곳. 세방낙조대!!! 30분가량을 차를 무식하게 달려 도착한 전망대앞 바다는 벌써 해는 넘어가고 마지막 여운이 섬들 너머 바다를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이쪽 지역의 다도해는 경상도 지역의 다도해에 비해 별로 운취가 없었는데 여기만큼은 다르다. 바다에 점점이 섬들이 박혀있고 그 너머의 낙조는 말을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얼른 "올해는 우리 예린이랑 해아랑 제발 아프지 않게 좀 해주세요" 소원을 빌었다. 남들은 일출보고 소원 빈다지만 늦잠꾸러기인 나는 불가능한 일이고 해야 그 해가 그 해인데 일몰의 해라고 안들어줄 리가 있겠나? 어디다가 빌든 내 맘이지.(^^)근데 해 떨어지고 나니 진짜 춥군.....



                                                                 세방낙조

  이제 오늘의 여정은 여기서 끝. 아니 아직 밥을 안먹었군.남편이 해남으로 가잔다. 해남가서 그 맛있는 밥을 먹고 싶다는군... 나도 역시 시간도 아낄겸 지금 해남으로 넘어가면 내일 동선이 좀 짧아질테니까.... 고픈 배를 움켜쥐고(우리는 항상 여행만 하면 배가 고프다. 그리고 한꺼번에 많이 먹는다.) 예린이는 남은 빵과 우유를 먹이고 컴컴한(정말 컴컴하다. 차가 거의 안다닌다)국도를 따라 해남으로 나왔다. 예전에 결혼 초에 둘이서 갔던 천일식당은 내일 찾기로 하고 오늘은 잘먹어 볼려고 잘한다는 해남 땅끝기와집이란데 들어갔다. 역시 음식은 맛있고 좋았지만 좀 많이 비싸다. 이정도 맛이면 다른 집에서도 훨씬 싸게 먹을 수 있을텐데... 본전 생각이 좀 나는군...



                                           밥집에서의 예린이 "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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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돌이 > 봄날의 연두빛 햇볕에 취하다.-첫날 담양, 장성

어렵게 시간을 낸 토요일이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주 5일제이지만 우리집 서방님은 고3담임. 대한민국 고3이 인간이 아니면 고3담임도 같이 인간이 아니다. 진짜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공휴일도 공휴일이 아니고 주5일제도 필요없다. 그래도 나의 닥달의 결과 겨우 이번달 한번만 주5일제를 써먹게 되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아이들을 챙겨서 길을 나섰다. 예린이와 해아가 둘다 감기기가 있는게 마음에 걸리지만 어찌 얻은 휴간데....한 7년전 결혼하고 얼마 안돼서 둘이서 차도 없이 여름에 손잡고 땀 뻘뻘 흘려가며 돌아다녔던 담양을 다시 가보기로 했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이기에 코스는 여기 저기 바뀌었지만.... 난 항상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레임이 너무 좋다.

문산휴게소에 들러 늦은 아침을 먹었다. 아이들이 생기고 난 이후 휴게소는 더 이상 잠시 쉬어가는 장소가 아니게 되었다. 아이들에겐 또 하나의 놀이터다. 예린이에겐 휴게소에서 먹는 우동을 제일 좋아한다. 엄마 맘엔 밥을 먹여서면 좋겠지만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우동 하나를 시켜서 둘이 나눠주니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는 휴게소 한켠에 마련된 놀이터로 직행. 이래 저래 놀다보니 1시간이 훌쩍 넘는다.






놀이터에서 신난 아이들 - 해아는 처음보는 놀이기구도 무조건 도전합니다. 하지만 겁많은 예린이는 조금만 무서워 보이면 못하죠. 이 미끄럼틀도 해아만 열심히 탔다는...


오후 2시, 5시간만에 담양 대나무 박물관에 도착. 옛날에는 이런 것 없었는데.... 박물관 마당에 들어서자 마자 대나무로 조그만 원두막을 지어놓고 그네 두 개를 아담하게 매어놓았다. 장시간의 여행으로 조금 지쳐있던 아이들의 환호.... 도대체 그네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이러다 언제 박물관 구경을 하나? 그네를 타며 즐거워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마당 넓은집에 이런 그네 하나 매달아놓고 살고픈 뚱뚱한 꿈이....




잠시 쉬는 예린이-엄마 피곤해

나중에 나올 때 다시 타자는 약속을 하고 겨우 박물관쪽으로 갔다. 내 기억속의 담양은 진짜 사람 보기 어려운 한적한 동네였는데 지금은 주말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로 벅적거린다. 박물관은 아담한 크기에 조그만 전시실을 3개 갖추었다. 대나무로 만든 옛날 물건들과 요즘의 새로운 디자인들이 다양하게 전시돼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그래도 제일 좋은건 박물관 복도에 전시되어 지나는 사람들이 앉기 좋게 마련된 평상이다. 또 뚱뚱한 꿈이... 마당 넓은 집에 아이들을 위한 대나무 그네, 나와 서방을 위한 대나무 평상 하나(^^).







대나무로 만든 다양한 제품들 - 특히 중간에 대나무로 만든 꽃병은 환상적이었다.


우리나라껀 아니고 동남아쪽이었던 것 같은데 - 이런 기억력 하곤(쩝~) 어쨌든 좀 엽기적이지 않은가?

박물관을 나와 바깥을 보니 대나무 체험공방 안내 표지판이 있다. 가격이 모두 붙어 있는데 아주 저렴하다. 호기심에 들러봤다. 3분정도의 도우미 아저씨들이 있고 여기 저기서 아이들이 뭔가를 만들고 있다. 모든 어려운 과정의 준비들은 다 되어 있고 그냥 거기에 앉아서 원하는걸 만들면 된다. 팔랑개비랑 부채랑 단소랑 등등..... 우리 집 아이들이 너무 어린지라 다른건 관두고 팔랑개비 두 개를 만들었다. 진짜 간단하다. 그냥 다 내놓은 대나무 구멍에 대나무 막대기를 조금 깎아서 망치로 통통 치고 끼워넣으면된다. 나는 바람개비랑 팔랑개비랑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르다. 완성된 팔랑개비를 들고 한 개당 1,000원 2,000원을 내고 마당에 나와 날려봤다. 잘 안난다. 갑자기 도우미 아저씨가 막 부른다. "아줌마 그렇게 하면 다쳐요. 자 잘보세요." 우와∼ 아이 둘은 정말 신났다. 박물관 한켠에서 막대기 하나로 그리도 행복할 수 있다니.... 나오는 길에 다시 그네 30분..




처음 본 팔랑개비에 잔뜩 신이 난 예린이와 해아, 이 조그만 것 하나로도 충분히 너무나도 행복한 아이들, 얘들은 여행 이틀 내내 팔랑개비를 손에서 놓지 않다.

겨우 박물관을 나오니 배가 고프다. 대나무의 고장이니 당연히 대통밥이다. 이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죽림원'이라는데를 전화를 걸어 물어 물어 찾아갔다. 삐까번쩍한 집은 아니나 식당의 풍취가 장난이 아니다. 건물 주위가 모두 대밭이다. 이 집에서 기르는 대나무로 대통밥을 짓는단다. 대통밥 사이사이로는 백숙용 닭들이 놀고 있고.... 예린이와 해아는 도대체가 배도 안고프다. 닭장안의 병아리를 본다고 정신이 없다. 처음 알았다. 오골계는 병아리도 까맣다는 것을.... 음식은 너무 배가 고파서 사진찍을 생각도 못했다. 대통밥은 진짜 맛있었다. 김치도... 하지만 그 외의 반찬은 뭐 그저 그렇다. 하지만 대나무 향기 그윽한 밥만으로도 충분히 한끼 뚝딱이다.


죽림원의 닭과 병아리, 오골계의 병아리는 어릴때부터 까맣더라


죽림원의 대숲

식당을 나오니 시간이 어중간하다. 담양에 잘데가 마땅치 않아(담양 리조트가 있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비싸다. 하룻밤에 159,000원이라니...그렇다고 그냥 모텔을 가자니 아이들 때문에 좀 그렇고...) 장성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백양사가 20분 거리니 백양사 먼저 보고 그 앞 관광단지에서 적당한 숙소를 찾기로 했다. 백양사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와보기는 처음이다.

백양사 진입로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제 막 새순이 돋아 파릇파릇한 아기 단풍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지금의 어린 잎들은 어쩌면 저리도 보드라운지, 저녁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잎들이 나지막하게 노래하는듯하다. 진입로 한편으로는 이 계절에 상상도 못할 만큼의 많은 계곡물이 쌓아놓은 계곡담으로 인해 자연적인 연못을 이루고 있다. 주변으로 산책로도 너무나도 아담하게 꾸며져 있고... 여기가 산사임을 잠시 잊고 어느 곳 공원에 와있는 듯 착각을 하게 한다. 절입구에 도착하자 배경의 학바위와 쌍계루가 연못물에 잠겨 한폭의 수채화가 된다. 흔히 절의 풍경은 수묵화로 연상되지만 이곳의 풍경은 너무나도 풍성한 색채로 인해 수채화의 맑은 기운이 감돈다.


백양사 진입로 - 가을이 되면 빨갛게 물드는 아기단풍나무들이 주종이다.





절에 들어서니 마침 저녁예불시간이다. 생각보다 많은 스님의 저녁예불소리가 낮으면서도 웅장한 음악으로 대웅전 마당을 감싼다. 잠시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맘껏 그 소리에 취해본다. 참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답사를 갈 때 항상 부족했던 2%가 채워지는 순간이다. 절은 부처의 공간이자 부처가 되고자 하는 승려들의 수행공간이기도 한 것을....저 장엄한 분위기는 절이 아니라 절을 둘러싼 관계가 만드는 것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문득 '불쌍한 불국사'(항상 나만 이래 주장하지만)가 떠오른다.


잠시 실례를 무릅쓰고...

갑자기 예불소리를 듣고 있던 예린이가 저도 절해야 된다고 고집이다. 아이들이 조용히 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특히 해아가) 잠시 대웅전에 들어갔다. 스님들이 모두 나가고 한 분의 스님이 조용히 독경중이다. 예린이는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자 너무나도 다소곳이 부처님께 절을 한다. 아마도 늘 절에 데리고 다니던 할머니의 영향이리라.... 횟수에 상관없이 저 하고 싶은 만큼 실컷 절을 하고, 그 옆에서 해아는 엉겁결에 언니를 몇번 따라 하다가 주변이 신기한지 두리번 거리고.... 예린이가 이제 나가잰다.


엄마보다 더 공손하게 절을 잘한다- 외할머니와의 절 나들이, 그리고 무수히 많은 시집의 제사에서 단련된 예린이의 절

웃기는 예린이. 밥먹을 때는 '두 손 짝'하며 해아에게 기독교식 기도를 시키고 절에 가면 그 예법에 따른 절을 너무도 공손히.... ^^
절을 나서며 만났던 수녀님과 스님이 함께 얘기하며 다정하게 걷는 모습처럼 조금은 서로에게 관대한 종교를 상상해 본다. ^^


규모가 큼에도 전혀 위압적이지 않은 대웅전의 모습

도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걸까?


사진찍으면 브이자를 그리는 언니를 따라하는 해아 - 하지만 아직 손가락을 제대로못해 늘 자기 나이를 물으면 펴는 세손가락이다. 한구석에 아빠땜에 삐진 예린이

특별히 볼만한 문화재는 없지만 너무나도 기분좋은 절이다. 제법 큰 관광지임에도 번잡함이 느껴지지 않고, 대웅전의 규모가 제법 큼에도 위압적이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아늑한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는 그런 절이다. 절을 나서니 저녁 어스름이 진다. 아이들은 피곤해 하나씩 아빠와 엄마에게 목마를 태우게 하고.... 근처 가게에서 물어 그나마 좀 깨긋한 숙소를 찾아 들었다.

아이들 목욕을 시키고 재우려니 해아가 많이 안좋다. 오늘 하루가 해아에게는 좀 무리였나보다. 열도 나고 기침도 심해지고 토하기까지.... 약은 먹였으나 밤새도록 기침에 잠을 못이룬다. 내일도 열이 계속나면 집으로 그냥 돌아가야 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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