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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할아버지 ㅣ 친구와 함께보는 그림동화 4
쟈끄 뒤케누아 지음, 유정림 옮김 / 사계절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할아버지가 젊어서 곡마단에서 일할 때 치료해준 사자를 우연히 다시 만나 함께 살게 된다는 따뜻한 이야기.
하지만 정말 '따뜻한' 이야기일까?
의심은 할아버지와 사자가 서로를 알아보는 장면부터 시작.
사자 주위에 갑자기 비현실적인 분홍색 오라가 가득하다.
게다가 동물원의 관리 아저씨는 사자를 사겠다는 할아버지의 요청을 받자 돈도 안 받고 사자를 내준다.
사자와 할아버지가 돌아오는 길엔 사람이 전혀 없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보면 사자는 충분히 엘리베이터 창밖으로 보일 수 있는 덩치임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를 탄 장면에선 할아버지 아래쪽에 사자가 있을 거라는 암시만 있을 뿐 사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장 의심스러운 건 맨 마지막 장.
분명 할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모자를 벗고 식사를 했는데,
잠자리에 든 할아버지는 다시 중절모를 쓰고 자고 있다. 왜?
나의 상상은 안 좋은 방향으로 비약해 버렸다.
은퇴한 지 오래된 할아버지는 가족도 없고, 생활도 빠듯하여 단벌 신사인 듯 보인다.
아침을 먹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와 산책을 하는 게 매일의 일상.
그의 단조로운 일상은 로타리를 뱅글 도는 버스로 표현된 듯 싶다.
사자의 하루 역시 할아버지와 다를 바 없어 아침을 먹고 터널을 지나 우리 안을 뱅글 뱅글 산책하는데,
할아버지의 날마다 똑같은 하루는 사자의 날마다 똑같은 하루와 너무나 흡사하다.
과연 할아버지는 어느날 우연히 동물원에 가는 일탈을 한 것일까?
거기서 젊은 시절의 친구인 사자를 만난 것일까?
그 사자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일까?
어쩌면, 어쩌면... 할아버지는 아예 외출도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중절모를 쓰고 침대에 누워 산책하는 꿈을 꾼 것은 아닐까?
되풀이 보면 볼수록 행복한 그림책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고
외로운 할아버지가 점점 더 짠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그림책을 슬프게 느끼는 건 나의 터무니없는 억측일 수도 있다.
일단 이 책은 <친구와 함께 보는 그림동화 시리즈>의 하나이고,
사자와 할아버지가 친구라는 설정 외에도 그림 곳곳에서 친구를 강조한다.
할아버지 산책 길에 있는 빵집은 '친구와 함께 먹는 집'이고,
할아버지가 사자에게 읽어주는 책은 '친구가 된 악어와 두꺼비'이며,
동물원 관리아저씨 사무소엔 쥐와 고양이가 함께 산다.
사자와 할아버지, 악어와 두꺼비, 쥐와 고양이도 친구가 되는데,
어떤 또래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건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와 사자가 서로 찡긋 윙크를 하는 장면은 표지로 쓰일 만큼 정겹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느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어 더욱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