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5년에 <리뷰>라는 잡지에 <거울에 대한 명상>이라는 단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폐간되고 없는 이 잡지에 소설을 보낼 때, 내 주변의 문우들은 만류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제대로된' 등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성미 급한 20대였고  '제대로된' 인정을 기다릴만큼 느긋하지를 못했다. 그 시절 나는 이미 소설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벌써 작가로 '행세'하고 있었고 그 성급한 자기확신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신춘문예가 소수의 당선자에게 복음을 전하고(물론 그 복음은 매우 한시적이며 그들에게는 밥벌이를 향한 또 한 번의 엄혹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지만) 나머지 대다수에게 새해 첫날부터 울적한 소식을 전하는 이 무렵, 스스로 작가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실은 오래 전부터 이미 그래왔다는 것을 낙선자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작가는 신분이 아니라 직업이라고(이때의 직업이란 돈을 벌어다주는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작가로 만드는 것은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긍지라고. 그리고 그 자기 확신은 심사위원의 인정보다 책상 앞에 놓인 자신의 원고로부터 올 때 더욱 확고하다.
언젠가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정식화한 적이 있다.
"작가가 되려면 이미 작가여야한다."

- 김영하, 문학단상 13 작가는 언제 작가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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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1-01-13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저 작가할래요!(죄송합니다 ㅠㅠ)

에디 2011-01-14 15:21   좋아요 0 | URL
그들에게는 밥벌이를 향한 또 한 번의 엄혹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밥벌이를 향한 또 한 번의 엄혹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밥벌이를 향한 또 한 번의 엄혹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밥벌이를 향한 또 한 번의 엄혹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지만

...죄송합니다 ㅠㅠ
 


올해라고 생각했던 일이 알고보니 작년이었다. 아마 1년전쯤의 사건이지만 여전히 올해 벌어진 일 같다. 뱅고어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시차적응을 핑계삼아 꽤 게으르게 지내던 중에 갑자기 형사들이 찾아왔다. 난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형사란 직업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꽤 심각한 태도로 날 서초경찰서도 아닌 서울지방경찰청으로 데려갔는데 (경찰차는 아니었다) 대낮에 용산과 이태원을 지나 서울역에서 햇빛이 비칠때쯤엔 오늘 날이 참 좋다고 생각이 들었다.

특수수사과. 라는 곳이었는데 정신을 조금 차렸을때 주위를 둘러보자 아마 '취조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방엔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로 내부에선 밖이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있었다. 내가 한 일은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와서 내게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는것이었는데 그동안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관'에 있는 친구들의 목록을 점검했다.

그 후 몇 명의 형사들이 들어와서 질문을 해대었다. 이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옆 방엔 그때 당시의 직장동료가 있었고 난 참고인으로 그의 혐의를 확증하기 위해 불려온 것이다. 하지만 진실로 내가할 수 있었던 모든 말은 다 무죄를 증명하는 것들 뿐이었다.


참고인

이란 신분은 결코 참고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 대하는 그들의 냉랭한 태도는 거의 공범자에 가까웠기 때문에 줄곧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닥치고) 변호사를 부르자였다. 그들은 굉장히 사소한 것들에서도 '왜?' 를 요구했다. 그걸 확인하는게 직업이지 않냐고, 지금 당장 알아보면 다 끝날텐데 왜 물어보냐고 되묻지 못했던것은 내가 꼬장을 부릴수록 옆 방의 동료가 괴로워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치사하다.


결국 난 절대 누구에게도 알려줄 필요가 없는 개인정보의 상당수를 공개했는데, 여전히 '왜' 가 달라 붙었다. 왜 이렇게 돈을 많이 쓰냐는 질문도 받았다. 아니 이게 무슨 미친소리야.


괴로웠던 것은, 동료의 무고함이었고 또한 이들의 무지함이었다. 세상엔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고 그 뛰어남은 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 뛰어남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불려와 있었다. 노력의 대가치고는 가혹한 상황이 마음이 아팠다.


세상엔 정보가 있고 기록이 있다. 이들이 그 모든 기록과 정보를 마음대로 볼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동료를 얌전히 내보내줄 것이다. 빅브라더라면 무고함을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지 못했고 (그럴수 있어도 상당한 행정적인 자원을 소모해야 가능했을 것이기에) 때문에 허공에 울리는 말로 기록을 대신해야 했다. 프라이버시는 좋은 것이지만 프라이버시의 내역을 증명해야하면 그건 꽤 괴로운 일이다.


저녁이 되어서 우호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옆방의 동료가 어떤 증거를 제시하여서 일이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내 방에도 계속 다른 형사들이 들어와서 비슷한 질문을 반복하였는데 마지막에 들어온 형사는 자기 아들의 학력과 미래설계를 상담해왔다.


경찰청 문을 나섰을 때 정말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당시에 강남에서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도심에 와있으니 평소보다 그녀와 가까이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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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2-31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무리 때문에, 에디님. 이건 단편 소설 같아요. 제가 퍽 좋아할만한 단편소설이요. 역시 알라딘에는 에디님이 있어야돼.

에디 2011-01-01 16:55   좋아요 0 | URL
이런말씀을.. 전남 영광이네요. 다락방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전 2011년을 꽤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치니 2010-12-31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알라딘에는 에디님이 있어야 돼 2

에디 2011-01-01 17:16   좋아요 0 | URL
그러시면서 '요즘 다시 뜸해지셔서 또 서재 안 오시나 은근 걱정 되었답니다.' .....ㅠㅠ
 


스티븐킹 신작이 나왔다. 난 종종 새로 보고 싶은 책이 생기면 자신에게 물음을 던진다. 지금 내가 책을 봐도 괜찮은가? 아니, 나중에 봐도 재밌을꺼야.


최근 몇년간은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대부분 (꼭 연인과 함께가 아니더라도) 호텔에서 보냈다. 누군가의 생일이나 특별한 날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는 문화는 클럽이나 파티와 달리 '요즘 애들이 노는 짓' 에서 내가 아주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다. 도심에서 격리된 공간에 있다는 것이 유난히 특별한지는 모르겠지만 호텔에서의 순간순간은 기억이 생생하다.


새벽에 호텔에서 나와 명동성당을 쏘다니는것도 크리스마스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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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12-28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호텔에 가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수영장 이용이에요. 다들 저녁 먹는 시간 즈음에 가면 나홀로 큰 수영장을 누비게 될 때가 있는데, 그 땐 괜시리 참 자유로운 느낌이 들어서 좋드라구요. :)

에디 2010-12-28 21: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수영장을 빼놓을 수 없죠! 그리고 조식뷔페랑... 디저트바랑...
 


"뭐 우리집에 그런 책이 있다고?"

"응 집에서 본거야"

그녀는 '파랑이 어쩌고 하는 책' 내용을 설명했다. 아니 생면부지의 스토리인데 그런게 우리집에 있을리가? 내가 산 책을 전부 다 보는건 아니지만 최소한 제목이나 주제는 알고 덮어두니까. 내용을 들어봐도 도저히 내가 좋아하거나 살만한 책이 아니었다. (그녀가 요약한 내용은 굉장히 추상성을 추구한 것 같았는데)

"작가는?"

"기억안나"

"단편이야?"

"응 여러 작가들이 있는거야"

오. 이건 힌트.

"혹시 마르케스랑 주제 사라마구랑 그런 무시무시한 사람들의 단편도 있어?"

"잘 기억은 안나는데 그런것 같아"

알겠다. 내가 내용을 몰랐던 건 단편집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론 내 책이 아니었던 것. 과거의 여자친구에게 내가 선물했던 책이고 그녀는 다 보고 나에게 빌려주었다.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

"그 책 재밌어? 난 안봤어"

"나도 몇개만 골라봤어. 왜 안봤어? 여자친구가 빌려준거라며"

왜냐면 내 취향의 책은 아니고, 아마 마르케스의 단편이 있어서 내가 선물했을 것이다. 우리가 한창 바쁠때 선물했을 것이다. 책 내용을 굳이 살펴보지 않았고, 특별한 응답도 못 받았으니까.


화제는 다시 다른 사건으로 넘어갔다. 얼마전 친구가 책 한권을 - 아마 찰리와 초콜릿 공장 - 뽑아 폈을때 나는 순간적인 예감으로 그 책을 빼앗아 들었는데, 역시나 첫장엔 누군가 써준 메세지가 있었다. "와 되게 예쁜말이다. 너 좋겠다" 이런 유의해야할 암초 - 어쨋거나 제3자에게 공개한다고 했을때는 암초다  - 들이 책장 곧곧에 숨어있는데, 문제는 어느 책에 있을지 내가 다 기억을 못한다는 것.


오늘은

"그 책 봤어? 여자친구가 빌려준 책?"

"아니"

"봐봐. 어떤 단편은 되게 좋아"


그래서 책장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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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12-16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가들의 면면이 화려해서 가지고 있는데, 신간이 구간이 되도록 못읽고 있었네요. 의외로 엄청 손 안가는 책 중 하나에요 전 ;;; 파란 글씨는 저도 참고할게요. 파랑에 얽힌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에디 2010-12-16 10:32   좋아요 0 | URL
그죠? 저도 이상하게 손이 안갔어요. 수전 손택 단편이 괜찮은 것 같아요 전.

다락방 2010-12-16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랑색 글씨들은 그러니까 전 여자친구가 써두고 빌려준건가요? 아, 얼른 읽어봐요. 마지막 문장 하나로 이야기가 시가 된다잖아요!

에디 2010-12-16 10:37   좋아요 0 | URL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썼어요. 수능 언어 영역 문제로 낼만하지 않나요? 본문을 읽고 다음 중 파란색 글씨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

다락방 2010-12-16 11:18   좋아요 0 | URL
'그녀' 가 쓴건가요? 에디님 집에 그 책이 있다는 것을 에디님께 일깨워준.

에디 2010-12-16 12:38   좋아요 0 | URL
'그녀' 라니까 이상하네요. 네 그 친구가요.
 

다시 웨스트윙

부수석 보좌관으로 정무를 담당하다 훗날 상원의원 매튜 산토스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선거캠프에 뛰어드는 조쉬 라이먼은 사실상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주인공이다.

(참고로 산토스는 오바마를 모델로 만들어졌으며 드라마 제작 당시엔 비록 민주당의 유망주이긴 했지만 확실한 대선주자는 아니었다. 전국구에 막 모습을 드러낼 시기였는데 작가들이 오바마의 연설을 눈여겨 보고 산토스도 명연설가로 만들었다)

아무튼, 조쉬는 다른 캐릭터들보다 순수주의자의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으며 주로 정무적인 일을 담당하다보니 마키아벨리적 성향도 자주 나타난다. 의회 표를 위해 의원들을 구슬리고, 협박하고, 니편 내편 가리지 않고 회유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이 때문. 조쉬에게선 손발이 오글거리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땐 민주당의 진보파나 녹색당, 페미니스트들을 냉소하는 모습도 자주 보이는데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타협하는것도 주로 조쉬가 담당한다.

영상은 여성리더쉽연합(Women's Leadership Coalition)의 에이미와 처음 부딪히는 장면. 조쉬가 주로 압박당하지만 둘은 곧 사귀게 된다... 에이미가 우리가 너네를 위해 투표하는데 신경 좀 쓰라고 밀어붙이자 "Who else should you vote for?"로 냉소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즉 민주당이란 정당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추후 애인관계가 발전하다 여성권과 관련된 의회표결에서 에이미가 백악관과 반대되는 로비를 시작하자 조쉬는 에이미의 직장에 로비해서 에이미를 해고시킨다. 이렇게 쓰고 보니 냉혈한의 아주 나쁜놈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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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12-14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밑에 에인슬리 헤이스라는 분보다 에이미가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드는데염.
(무,물론 말귀도 다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린 결론이라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요)

에디 2010-12-14 17:1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좋아해요 에이미. 어쨋거나 '범우리편' 이라 자주 나오는 편이고...
제가 메리 루이스 파커(에이미를 연기한 배우)는 그닥 좋아하진 않는데 웨스트윙에선 유독 매력적이라 한창 좋아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