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드>를 리뷰해주세요
피드 feed
M. T. 앤더슨 지음, 조현업 옮김 / 지양어린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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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 앤더슨이라는 작가의 글은 이번이 두 번째. 옥타비앗 낫싱, 검은 반역자라는 글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랬는데, 실재로서의 현실에 대한 고발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미래소설을 차용한 현실 비판소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토론을 위한 질문들을 읽어보면 이 글을 어떻게 읽어야하는지의 감도 잡히리라 생각한다.




책 제목이기도 한 피드는 뇌에 이식된 컴퓨터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된다. 일상에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휴대하기 좋은 사이즈로서도 만족할 수 없었는지 이를 뇌 속에 삽입하기에 이른다. 물론 좋은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자본이 충분한 사람들이듯이 좋은 피드를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현실에서는 국가에서 컴퓨터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지만 이 글의 피드는 국가의 정책이 아닌 거대 기업의 이익추구를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국가보다는 기업의 우위를 인정하고 있는 듯 한 인상을 보인다.




컴퓨터를 켜면 자동으로 뜨는 광고 배너들. 선택하는 것이 아닌 선택을 강요당하는 웹사이트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머릿속 생각을 지배하는 피드. 피드를 통해 친구들 가족들과 채팅을 하고 읽고 생각하는 행위는 잊은 지 오래가 된다. 가끔 환각상태에 빠지기 위해서는 특별한 사이트에 접속하기만 하면 오케이. 오로지 그들이 하는 것이라고는 달나라, 수성, 금성 등의 행성으로의 여행, 파티, 춤추기이며 피부에 상처를 내는 것이 유행인지라 피부를 손상시킨다. 지구촌 곳곳의 일들에 대한 관심을 갖는 바이올렛은 기인 취급을 받기에 이른다.




생각하지 않는 공간에서의 생각하는 자로서의 고통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그렇다면 현실은 이와 다른가?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지구촌 사람들에 대한 외면과 냉소적인 시선들은 인터넷상에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오로지 소비만을 위해 사람들의 사고와 시선을 왜곡하는 기업과 이에 앞장서는 미디어들은 또 어떠한가. 이글이 비단 미국에서의 일만을 시사 하지 않는 것은 인터넷과 거대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폐해가 세계 공통의 일이 되어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버려지는 자연과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지는 가난과 분쟁. 부유한 국가와 부유한 일부 사람들만이 환락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불합리함. 이런 것들이 가져올 것은 바이올렛이 그렇게도 경계한 지구의 종말인가? 물론 지구의 종말이라고 단언하기는 힘들겠지만 살아갈 가치가 있는 공간으로서의 지구의 모습과는 멀어지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극단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차근차근 다시금 현대의 우리 모습을 되살펴 보는 것이 좋다. 그런 시간을 조성하기 위해 쓰여 졌다고 생각되어지는 그런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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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오는 아프리카>를 리뷰해주세요.
눈 오는 아프리카
권리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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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아프리카라는 제목과 방랑자 같은 여행자가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는 모습에 첫눈에 매료되었다. 아, 이 책은 여행기로군!하는 기대는 세계여행의 꿈을 품은 평범한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책 읽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허나 눈 오는 아프리카는 눈 오는 아프리카의 실제모습이 아니었으며 여행기는 소설로 바뀌어야 했으니 예상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레 짐작으로 그랬던 것이었으니 책임을 돌리기 어렵지만 그래도 뭔가 속은 느낌이다.




그래도 소설 속 내용은 여행기와 같으니 너무 실망할 것은 없다. 사실 소설을 읽고는 그 느낌을 글로 쓰는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영화보기를 하고 줄거리를 이야기 하다보면 결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인 이유와 비슷한데, 직접 보기를 통해 느낌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내용은 상당히 방대하고 요약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세계의 곳곳을 들리거나 머물었던 유석의 여행은 눈으로 좇는 것조차 힘에 겨웠으니 말이다.




유석의 여행은 스스로도 그러했고 함께 하는 이들도 그러했고 이를 지켜보는 이조차 힘겨운 여행이다. 여행을 통해 성장통을 치유해 나아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어려움이요, 극복의 과정인 것이다. 여행의 목적은 있지만 절대이유가 있지는 않은 무료해 보이기까지 하는 여정은 오래도록 계속된다. 자신도 몰랐던 시간만큼 외국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스스로를 깨고 나오는 모습은 여지없는 성장소설의 면모를 가진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여행 중 접한 사실들을 기반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지나간 곳의 장면은 사뭇 섬세한 표현이 녹아있다. 그 곳에서 겪은 자신만의 느낌을 투영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술과 예술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엮어 두기도 해 책읽기의 흥미를 더해준다. 하지만 역시 고백하자면, 녹아들지 못하는 감정이 문제였다. 아마도 인간은 이유를 끊임없이 따져야 하는 생물인지도 모른다는 진리 때문인지도. 여행기는 시중에 차고도 넘치기에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렇지만 역시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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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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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읽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이끌려 책을 주문했다. 수능시험을 위해 토막글을 접했던 기억 때문일까 하는데 조금 생각을 전해주는 소설류가 필요하다고 느껴졌었다. 요즘 읽고 있는 책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주문한 책이 내 손에 들어왔고 주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잘 읽히다가도 멈추어야 하는 부분이 많은 책이 되어서인지 며칠째 손에 잡고 있어야 했다. 왜일까. 이런 책을 좋은 책이라 부르는 이유는...하는 생각을 예전에 가졌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는 어렴풋하게 알 듯도 하다. 소설이 전하는 이야기는 비단 소록도만의 이야기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소록도를 배경으로 한다. 나병 혹은 문둥병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 병을 앓은 자들은 천형이라고 한다는 무서운 병. 사지가 떨어져 나가는 그런 병. 오늘날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그런 병에 걸린 사람들이 자의에 의해 타의에 의해 찾는 섬. 그런 곳이 배경이다 보니 소설의 분위기는 사뭇 무거울 수밖에 없겠다. 어느 날 이 섬에 조백헌이라는 새로운 원장이 도착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전에도 여러 원장들이 지나갔던 섬에 새 원장이 도착했다 한들 그리 큰일이 난 것은 아니었을게다. 허나 섬사람들의 동태는 지나치리만큼 냉정하다. 쌀쌀맞게 군다는 것이 아니라 관심의 촉수를 숨긴 의뭉함을 가졌다고나 할까.




새롭게 부임한 원장은 새로운 섬 건설을 위해 일을 추진하고자 한다. 섬과 섬을 연결하여 새로운 땅, 새로운 낙원을 만들자고 하는 구상이 그것인데, 이상욱 보건과장의 반대로 갈등을 겪는다. 물론 호응조차 없는 섬사람 모두와의 갈등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지만. 아무튼 좋은 일을 하자는 취지에 맞지 않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의 행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상욱 과장의 근심과 걱정 속에 그리고 이상하면서도 특별함을 지닌 마을의 등장인물들의 과거를 알게 된다면 조금은 이해가 될 듯도 하다.




소설의 제목이 당신들의 천국이듯이 소록도 사람들이 새로운 낙원 건설에 있어 주체가 아닌 조력자 정도에 그치는 현실을 꼬집어 비판하고 있다. 좋은 취지의 일이지만 자발적 의사가 없이 추진될 경우의 과정 속에 내포한 비대칭적 시선이랄까하는 미묘한 갈등도 포함된 이야기다. 동상이니 하는 옛 기억을 자주 들추어내는 것으로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맺음의 갈등을 담기도 하고 탈출사건을 통해 환자와 인간 사이에서의 개인적인 갈등을 담아내기도 한다. 나환자들의 천국이니 낙원이니 하는 말들로 결국에는 환자들을 격리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이중성에 대한 폭로를 담고 있기도 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곳곳에 남겨둔다.




맨 처음 밝혔듯이 이 소설은 비단 소록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 속 크고 작은 조직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이 해묵은 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방법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소설을 읽고 직접 알아가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목적으로 두어도 좋을 것 같다.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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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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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주 기이한 이야기라고 책 속의 주인공은 말하고 있다. 영웅처럼 칭송받는 그였지만, 이전의 과거의 일이 그를 옭아매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대목이다. 자신의 이러한 평가에 대해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결국 그 모든 고민을 낯선이에게 토로하고 그는 이를 엮어 책으로 만들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엮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도를 가지고 있다라는 말이다. 그렇게 커다란 사건이나 사고가 없는 잔잔한 이야기는 시작된다. 원래 그런 것이다. 인간의 고민의 원천은 결국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루를 지내는 우리에게도 끊임없는 생각이 우물물처럼 솟아오르듯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내면의 고민과 번뇌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듯 한 느낌이 가득 차 있는... 낯선 이에게 고백을 하고 마는 주인공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스물다섯에는 장교가 되는 호프밀러이다. 일상의 평온함 속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그는 측은지심 즉 연민의 감정에 충실했기에 이러한 과거를 겪게 된다.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그런 행동으로 말미암은 결과는 충격적이지만 결코 이해하지 못할 그런 수준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선의의 거짓을 고하기도 하는 일상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그렇다.




케케스팔바라는 부잣집에 놀러갔다가 흥겨운 분위기에 취해 춤출 것을 청하다가 일은 시작된다. 부들부들 떨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소녀에게서 좌절의 빛을 본 순간 그녀가 장애를 가진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고 만다. 그녀에게 주었을 상처 및 모욕감 그로인해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견뎌 내야하는 그런 작은 불안 등이 그를 그녀에게로 이끌었다. 사죄를 하고 다시 인정받고 싶다는 기분에 이끌려 저택을 드나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기부터 호프밀러는 이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병자가 있는 그것도 상당히 마음의 상처가 깊은 히스테릭한 환자가 있는 집에 호프밀러의 등장은 빛과 같았고 그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따스해지는 눈빛과 다정스러움 등. 이를 통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함이나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증폭되기 마련이어서 그들에게 희망을 전도하는 일이 의무감을 주기도 했다. 에디트의 상황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고 그로인해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순수한 믿음이 호프밀러를 잠식해갔다. 그리고 케케스팔바의 힘없고 지친 뒷모습에 대한 연민이 콘도르의 정직한 말들을 왜곡시켜 전달하는 행동으로 옮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에디트와 케케스팔바는 이를 통해 닫혀있던 희망의 문을 열어젖히며 호프밀러에게 좀 더 솔직히 자신을 드러내고 만다. 이것은 현실성을 가졌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빛처럼 등장한 호프밀러. 그를 바라보는 에디트의 심정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매일처럼 부딪히는 건강한 젊은 남성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호프밀러가 빈번히 케케스팔바 저택을 드나드는 일에 비한다면 훨씬 더 정상적인 일에 가깝다. 문제는 호프밀러의 고뇌였는데 사랑하지도 않은 여인의 집착을 묘사한 부분을 본다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질 정도로 인간심리를 세세하게 분석해 낸다.




자신을 버려서라도 사랑을 하고 말겠다는 불구의 여인과 그녀를 온전히 거부할 수 없는 호프밀러. 그녀를 버려서는 안된다는 연민의 감정과 여인을 거부함으로써 다가올 결과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감정의 추를 조정하지 못한다. 책의 절반 이상이 호프밀러의 이 상황을 추적했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불편한 순간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를 비난할 수도 에디트를 욕할 수도 없는 것은 그의 의도가 순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만한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은 오해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그의 잘못을 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을 오랜 시간 돌이켜 생각해 온 호프밀러의 자책감을 줄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충분한 연민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순간의 측은지심으로 인한 연민의 감정은 모두 쓸데없는 일이란 말인가 하는 고민도 해볼 수 있겠다. 결국 츠바이크가 말하는 사랑이란 이러한 연민의 감정까지도 책임질 줄 아는 것이란 말인가. 답은 그렇다고 보인다. 책의 마지막 훗날 콘도르를 피해 달아나는 호프밀러의 묘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의 연민은 나처럼 치명적으로 우유부단하지도 않았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나를 심판할 수 있는 그가, 내가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그가 옆에 앉아있었다. … 몸이 떨리기 시작한 나는 어둠속에서 들키지 않기 위해 재빨리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그러나 그 이후로 나는, 양심이 알고 있는 한 그 어떤 죄도 결코 망각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p.434】




【젠장, 당신은 연민으로 상대를 바보로 만든 엄청난 책임이 있어요. 성인이라면 어떤 일에 끼어들기 전에 생각을 해야 되고 어느 정도까지 관여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남의 감정을 마구 휘젓지 말아야 한다고요. 인정하세요. 당신은 아주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동기에서 이 선량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그가 용감하게 또는 소심하게 행동했는지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어떤 결과가가 되었으며 무엇을 이루었는냐 입니다.




연민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으로, 남의 불행을 보고 느낀 괴로운 충격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려는 조급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남의 고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려는 본능적인 욕망일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연민이기도 합니다만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 연민은 인내하며 참으면서 자기의 힘이 한계에 부딪힐 때까지, 아니 그 이상까지 견디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자기의 임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악의 비참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갈 수 있을 때에만 지치지 않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까지 희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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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악마 1 로버트 랭던 시리즈
댄 브라운 지음, 홍성영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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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은 신성한 것을 건드렸다는 데에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것이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실을 폭로할 경우 더욱 그렇다. 이 책은 다빈치코드와 더불어 전 세계인의 관심을 가진 소설이기에 더욱 그렇다 할 수 있다. 워낙 짜임새 있는 내용인지라 소설속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이를 보탠다. 그렇기에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책이다. 허구의 내용이겠지만 이 책에서 다룬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종교와 과학의 충돌이라...현대화 된 세계에서 종교는 더욱 거대해져 가는 것을 보았을 때, 종교는 과학으로 인해 소멸하고 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신의 창조를 확고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함을 알고 있다. 이러한 때 종교인들의 위기감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인식의 시작이야말로 이 소설의 시작이다.




스위스의 CERN에서 사건이 시작된다. 천재 과학자의 죽음. 과학자의 가슴에 찍힌 낙인은 ‘일루미나티’ 전설속의 조직으로만 알려져 왔던 과학자들의 모임인 이 조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었다. 갑작스런 그들의 등장도 그렇지만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더욱 미묘하다. 하버드대 기호학자인 랭던의 등장이 필요한 순간이다. CERN의 소장 콜러의 요청으로 이 사건을 맡게 된 랭던은 가능성 있는 추리로 이 소설을 이끄는 주인공이다. 과학자는 곧 카톨릭의 사제였음이 드러나고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탄생한 ‘반물질’의 가공할만한 위력에 대해서도 말이다.




과학자의 죽음은 곧 또 다른 위기로 묻히게 된다. 핵폭탄의 위력을 능가하는 반물질을 담은 트랩이 사라진 것이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일루미나티의 회원일 것이라는 살인자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암시뿐이다. 그것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그러기 위해 반물질을 세상에 탄생시킨 과학자의 딸, 비토리아가 도착했다. 랭던과 비토리아는 반물질을 찾기 위해 바티칸으로 날아간다. 시기적절하게도 바티칸은 교황선거회의가 준비되고 있었다. 콘클라베라고도 하는 이 회의는 절대적으로 비밀회의였으며 교황선출이 있기 전까지 추기경들의 출입이 금지된다. 허나 문제는 후보로 지명된 추기경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암살자는 이들 추기경을 모두 과학의 제단위에서 제거할 것임을 교황청에 알려온다. 이전 교황의 서거로 인해 권력을 쥐고 있는 궁무처장은 세상에 알리는 대신에 우선 암살자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령관 올리베티의 의견을 따른다. 한 시간에 한 명씩 추기경에게 낙인을 찍고 살해하는 암살자와 급박한 시간을 따라 추리와 추적을 해 나아가는 랭던과 비토리아의 행적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일루미나티라는 고대의 조직이 로마교회의 심장 바티칸에 심어놓은 상징은 놀랍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 모든 것이 진실일까?하는 물음은 너무 잦다. 일루미나티 회원 베르니니의 작품들로 구성된 암시는 흙, 공기, 불, 물로써 과학의 원소를 나타내는데, 이전의 암시가 다음 사건의 단초가 된다. 추기경들을 살해하는 방식도 이와 동일하다. 한 명의 추기경도 살려낼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전 교황마저 일루미나티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종교의 심장인 바티칸은 반물질과 함께 과학의 힘으로 소멸할 것이었다. 비토리아는 결국 암살자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마지막 추기경까지 제거한 암살자는 비토리아를 계몽의 교회, 일루미나티의 근거지로 납치하게 되지만 곧 랭던의 뛰어난 추리력으로 인해 욕심을 채울 수 없게 된다. 놀라운 것은 계몽의 교회와 바티칸으로 이어지는 교황의 길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 곧 이는 교황청 안의 일루미나티가 숨어있음을 방증하는 것이 된다. 이 길을 따라 교황청으로 자리를 옮긴 랭던과 비토리아는 모든 사실을 궁무처장에게 알리고 추기경들의 안전을 위해 대피시킬 것을 결정한다.




사건은 더욱 꼬이기 마련이어서, CERN의 소장 콜러가 교황청을 방문하게 되고 암살자를 지시한 야누스라는 인물이라는 의심을 갖게 만든다. 궁무처장 가슴에 일루미나티의 다이아몬드 낙인이 찍히고 콜러는 살해된다. 갑작스러운 이야기 전개는 이 때부터다.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궁무처장은 반물질이 숨겨져 있는 장소를 알게 되고, 신의 교회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로 날아 소멸시키려는 궁무처장의 의도는 성공했지만 남은 길은 아직도 멀었다. 콜러가 죽기 전 랭던에게 전한 자료는 곧 수상한 궁무처장의 행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궁무처장의 의도는 만천하에 드러난다. 그리고 진실도 함께. 고대 과학자들의 조직이었던 일루미나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학의 성장과 함께 사그라지는 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공포라는 것을 알고 있던 궁무처장의 소행이었음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교황청의 소행을 불온한 것이라는 것만을 드러내는 소설은 아니다. 곳곳에 신을 믿는 이들의 진심이 묻어나는 행적과 발언 등이 이를 증명한다. 다만 과학 혹은 종교의 우선순위를 다투는 것은 무의미한 것임을 인정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결국 종교도 과학도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 아니겠는가. 상생하고 인정하는 길이 살아가는 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천사와 악마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은 그렇기에 옳지 않다. 종교 혹은 과학의 우위 등을 따지는 것에서 벗어나 명석한 추리를 즐기고픈 이들이라도 읽어봐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매력적인 댄 브라운의 소설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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