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진달래가 흐드러지는 아름다운 대학 캠퍼스를
연인과 다정하게 손잡고 걷는 대신
열람실 한 구석에 콕 박혀서 통계 문제를 "외우고" 있었다.

난 고등학교 때 심각한 수학 "phobia"에 시달렸다.
국어,영어는 만점이었으나 수학은 반타작도 하지 못했고,
툭하면 수학 시험시간에 문제를 다 풀지 못하고 답안지를 내는
악몽에 시달렸으며,
그런 악몽은 가끔 보다 자주 모의고사 시간에 현실로 나타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가장 좋았던 건
수학과 채변에서 해방되었다는 거였다.

그런데...수학은 다시 내게 돌아왔다.
그대 내게 다시~

경영대학원에서 통계는 필수다.
제목은 <경영통계>로 그럴 듯 하지만
내용은 학부 수준의 <통계학 개론>이다.

대학 1~2학년 애들에게 오히려 쉬울 문제들이다.
기본적인 수학 실력만 있다면....

이런 문제들이 내게는 암흑일 뿐이다.
30대 중반에 적분을 하다니! 조합, 순열, 확률함수...
기억상실증 환자가 가족 이름을 떠올리는 수준이다. 오호통재라!

일요일에 도서관에 틀여 박혀서
기출 문제들과 공식을 통째로 외워 버렸다.

저녁에는 시험 전날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어가 와서 갈비를 먹었다.
물론....기본으로 맥주도 마셨고
한국 소주를 홍보하기 위해 소주도 몇잔 마셔 주셨다.

웃고 떠들고 유쾌하게 소주를 마시면서도
낮에 달달 외운 공식들을 잊어 버릴까봐 두려웠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를 하다가 출근했다.

모니터 앞에 앉았는데
코에서 뜨끈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또 환절기 감기에 걸렸나...했는데
쌩뚱맞게 크리넥스에 방울 토마토 같은 핏방울이 얼룩졌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코를 감싸 쥐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덜컥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게 보통 몸 축나는 일이 아니다.
1학기 중간고사에 벌써 이렇게 지쳐서 어떻하지?
체력안배를 잘해야 겠다.

그런데....이 화창한 봄날에 연애는 언제하지?
이러다 연애세포가 다 죽어 버릴까봐 걱정이다.

이번 주말에는 찬찬히 당면한 일들의 우선순위를 생각해 봐야겠다.
Am I doing what I need to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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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4-24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 더 들이기 전에 때려 치는 건 어떨까요??? 너무했나?
수학 공부보담은, 차라리 책을 하나 더 쓰는 게 어떨는지... ^^
코피터질 일이기도 하지만... 훨~ 즐거울지 몰겠군요.
담엔 책 내기 전에 제가 교정봐드릴게요. ^^ 전문가는 별로 아니쥐만... 책 선물 받은 턱으루다가... 건강이 우선이랍니다.

2008-04-25 0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08-04-25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세포를 제외한 모든 세포는 다시 재생이 됩니다. 연애세포도 물론이고요. 걱정마시고 시작한 일이니 열심히 하십시오~ ^^ 화이팅!!

조선인 2008-04-25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세포라니, 아이 귀여워라. 죄송.

마늘빵 2008-04-25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연애세포란게 있어요. 저도 슬슬 죽어가고 있다는...

BRINY 2008-04-25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논문 발표할거냐는 전화가 왔는데, 논문이고 뭐고 정말 건강이 우선입니다. (20대때는 정말 며칠 밤새우다시피해서 논문 써도 코피 하나 안났구만..위염은 생겼지만..)지금 저 보약 먹으면서 그저 5월 연휴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입니다.

세실 2008-04-25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안타까워라. 님 공부보다 지금 필요한건 뭐? 연애, 건강이라구요~~~
음 저도 고등학교때 수학선생님 좋아하긴 했지만 성적과 연결되지는 않았다는거~~~ 어려워요! 그래서 애들은 어릴때부터 수학학원 열심히 보냅니다.
 

2년 전, 신임과장 교육을 받을 때였다.

모든 피교육생들이 그렇듯이
졸음과 사투를 벌이거나 또는 졸음에 순응하며 오전 교육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별 내용 없는 농담 따먹기 및 강의, 반찬 등을 품평하다가 책 얘기가 나왔다.
그 순간... 오전 내내 밀려오던 졸음이 확~달아났다.

내 앞에 앉아 묵묵히 젓가락질을 하던 카피라이터 A가
몇 달 전 책을 낸 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직장인 기획력 향상 프로젝트>라는 부제(요즘 책들은 부제를 봐야 주제를 알 수 있다.)로
첫 번째 책을 낸 카피라이터 A와
당시 책을 내겠다는 계획을(계획만!) 갖고 있었던 나는
눈을 반짝이며, 침까지 튀겨 가며, 책 얘기를 했다.

그 때 A는 내게 꼭 책을 내라고 했다.
책을 낸다는 자체만으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다며!

3박 4일간의 합숙 교육을 마치고 출근했을 때,
A에게 택배가 왔다.
자신의 첫번 째 책과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여행서 한 권이
수줍게 들어 있었다.

아마도...쪽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던 것 같다.
"글 쓰시는 분에게 책을 보내려니 쑥스럽네요.
성과장님도 책 나오면 보내 주세요. 홧팅!"

난 고맙다고 감사 메일을 보내며,
언젠가 책이 나오면 꼬~옥 보내겠다고 약속을 했다.

오늘로... 책이 나온 지 딱 1달이 됐다.
초판 1쇄 발행이 2월 27일이니까!
(3월 14일에 2쇄가 발행됐다.)

그런데.... 그 1달 동안 A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요즘 정신 없다 보니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아까... 특별한 연상 작용 없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내일, 아니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후, 출근하면 책을 보내야지!

요즘 회계를 배우고 있다.
매주 마다 퀴즈 보고.... 난리가 아니다.
구린 표현으로... 호떡집에 불난 것 같다.
30대 중반의 꽃피는 봄에 손익계산서를 작성하고 있을 줄이야!

자산 = 자본 + 부채
부채의 감소는 차변.
부채의 증가는 대변.

약속을 남발하고 지키지 못하면 다 마음속의 부채로 남는다. 부채의 증가는 대변!
내일 A에게 책을 보내면 부채가 약간이나마 감소하겠지... 부채의 감소는 차변! 음하하

A가 회사를 옮기지 않았기를!
(주소가 바뀌었다면 택배를 보낼 수 없으니...)

2년 전,
책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다며 마구 나를 "stimulate"해 주었던
(영어 쓰는 거 재수 없지만.... 딱 와 닿는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격려"도 어색하고.... "고무"는... 더 어색하다. ㅋㅋ)
A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소록소록.

내일 꼭 책을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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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7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8-03-27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이 쓰시는 'ㅋㅋ'는 뭔가 수선님과 어울리지 않는 듯 하면서 마구 유쾌하기도 하군요. 쭉 읽어 내려가다가 'ㅋㅋ' 에서 그만, 웃고 말았어요. 하하 :)

antitheme 2008-03-27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서 받아 본 책이 2쇄였습니다.

다락방 2008-03-27 15:26   좋아요 0 | URL
제가 동료에게 선물한 책은 1쇄였습니다.

2008-03-27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03-28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념으로 산 책이 1쇄였나 봅니다.
주인님이 싸인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죠~~~~
지난번 흥겨운 뒤풀이를 추억하면서..^^

kleinsusun 2008-03-28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ㅋㅋ 이거 저랑 안어울려요? ㅋㅋㅋㅋㅋㅋ
친구분에게 제 책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감사^^

antitheme님, 오....구매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당.^^

승주나무님, 4월 벙개를 기획(?)하고 있습니당.
작년 번개 참 즐거웠는데... 8월이었죠?
시간 넘 빠르네요. 우리 또 즐거운 시간을 가져 Boa요^^
 

 
 
지난 한주 동안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일주일 내내 들떠 있었고,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며칠 전,
회사 빌딩 지하 아케이드에 있는 서점에 갔었는데
내 책이 '금주의 추천 도서'에 진열되어 있었다.

책 표지에 있는 내 사진을 보니
참으로....머쓱했다.

서점 아줌마는 책 표지의 여자와 내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요즘 이 책 왜 이렇게 잘 팔려요?
많이 갖다 놔야 되나?"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씩 웃고 말았다.
회사 선후배들이 몇 권씩 샀으니 잘 팔렸을 수 밖에...
이 현상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ㅋㅋ

책이 발간된 2월 27일부터 지금까지의
붕~ 떠있는 것 같았던 흥분상태에서,
하루 종일 가슴이 뛰던 환각상태(?)에서 이제 벗어날 때다.

Back to the "rea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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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0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0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0 0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0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0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4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ntitheme 2008-03-24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출장 갔다 오자마자 이책 주문했어요. 언제 저자 싸인 받으러 가야될텐데...

2008-03-25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월 26일 오후 Tokyo.

택시를 타고 거래선에 가고 있는데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언니! 인터넷 서점에 언니 책이 떴어!
이제 정말 책이 나왔네. 축하해!"

마구 가슴이 뛰었다.
아...이 상태로 미팅을 어떻게 하지?
우황청심환이라도 하나 갖고 올걸...

책을 보지 못한 채로 25일 새벽에 Tokyo 출장을 갔다.
이틀 내내 어찌나 궁금하던지...
빨리 책을 보고 싶고, 만져 보고 싶고, 더듬어 보고 싶었다.

저녁 8시 비행기로 김포에 도착하니 10시 40분.
택시를 잡아타고 들어가자마자 인터넷에 접속.
인터넷 서점에서 내 이름을 쳤다.

책이 검색되었다.
<나는 오늘도 유럽 출장 간다>
표지에 있는 내 사진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 책이 정말 나왔구나!


2월 27일 오전 태평로

“과장님, 인터넷에 과장님 책 떴어요!
저 벌써 자료실에 신착 도서로 과장님 책 신청했어요!”

출근하자마자 들은 후배의 말에 무한감동!

상무님께 간략히 출장 결과를 보고하고 잠시 일하는 척 하다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출판사에 전화를 했다.
어제 택배로 보냈으니 곧 도착할거라고 했다.

그런데 1시가 되고, 2시가 되고, 3시가 되도 책이 오지 않았다.
다시 출판사에 전화를 했더니 5시에 책이 도착할 거라고 했다.
아...정말 시간이 안 갔다.
일손도 안 잡히고 가슴만 뛰었다.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5시에 택배가 왔다.
박스를 뜯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후배가 칼을 뺐더니 박스를 대신 뜯었다.

박스가 열리는 순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어찌나 울컥 하던지!

작년에 그 고생을 했는데,
정말 책이 나오기는 하는 건지 내 자신을 마구 의심했는데,
이렇게 물질화되어서 손에 잡히는 책을 보니 정말이지 울컥했다.

주위로 사람들이 마구 몰려들었다. 웅성웅성.
고맙게도 동료들, 선후배들이 함께 감동해 줬다.

상무님께 한부를 사인해서 드렸더니
“수고했어!”하시며 책값이라며 수표 한 장을 주셨다.

상무님에 대한 ‘급호감’을 느끼며 후배들이랑 술을 마시러 갔다.
첫 번째 책의 베스트셀러를 위하여!
건배를 하고하고 또 했다.
나중에는 그냥 통 크게 “밀리언셀러를 위하여!”로 구호를 바꿨다.
그냥 기분 좋아서 마시고 또 마셨다.


3월 1일 오후 집

2월 27일 펴냄.
이제 막 3일이 지났는데 참 많은 전화를 받았다.

또 월요일 아침에 백지연의 “SBS 전망대”에
“책 읽어주는 여자”로 출연하게 되었다.
6분간 전화로 백지연이랑 대화를 하며 책 소개를 하는 거란다.

난 출판사에서 라디오에 출연해서 책 소개를 하라고 해서
내 책을 소개하는 건지 알았는데,
소설을 소개하는 거라고 했다.

책날개 저자 소개에
“회사원들에게 소설을 소개하는 라디오 DJ를 해보고 싶다는
좀 엉뚱한 바람이 있다.”는 구절을 보고 섭외가 들어온 거였다.
월요일에 반응이 좋으면 고정이 될 수도 있다고!

아...중학교 3학년 때 송승환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랑 전화데이트를 해본 게
라디오 경력(?)의 전부인데, 잘할 수 있을까?
아직 뭘 소개할지 정하지도 못했다.

며칠 동안 정말 정신이 없었다.

어제는 교보문고 신간코너 매대에 놓여 있는 내 책을 보니
정말이지...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니까...책이 정말 나온 거다.
아....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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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5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8-03-06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감동감동이시겠다~
오늘 알았어요.. >.< 축하드려요~ !!
얼른 접수해야지!

릴케 현상 2008-03-06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재밌겠네요

2008-03-07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07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08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08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폭설 2008-04-22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안녕하세요?
책을 내셨군요!
감축 드립니다.^^ 그냥 영업도 아니고 우째 해외영업을 다 하시고 정말
능력이 출중하십니다. 부러버요.^^ 책은 빠른 시일내 사볼께요.

브로크백 마운틴에 관한 제 글에 달린 수선님의 댓글을 어쩌다 이아침
다시 읽게 되었는데.... 문득 그 댓글을 단 사람의 현재모습이 궁금하여
클릭했다가 이런 낭보를 보게 되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2탄도 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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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謹弔 민주노동당
 
  2008-02-04 오전 9:39:39

 

예상했던 결과다. 비상대책위원회의 혁신안은 불필요한 수순이었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중의 눈앞에 이른바 '자주파'의 정체를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제 당의 상황을 CD로 구워 북한 공작원에 넘겨주는 해당 행위를 해도, 민주노동당에서는 결코 제명당하지 않는다. 이른바 자주파는 그냥 당기위에 올려 조금 제재나 하자는 자기들 측의 중재안까지도 부결시켰다.
  
  1.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른바 평등파들이 퇴장하면서 다음 안건 하나가 의결 정족수 부족으로 상정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북핵자위론을 주장했던 어느 간부에 대한 징계안이다. 하지만 혁신안의 대부분의 내용이 부결되었으므로, 설사 의결이 이뤄졌어도 징계안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게 정당하다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공식 입장이라는 얘기다.
  
  비대위에서 혁신안 부결을 불신임으로 간주한다고 했는데도 부결시킨 것을 보면, 입에 '대동단결'을 달고 사는 그들도 충실한 종북이라는 원칙(?)이 문제가 되면, 대동단결을 안 하고 싶은 모양이다. 박용진 전 대변인이 '혁신안이 부결되면 당이 깨진다'고 울먹이며 호소를 해도, 종북파들의 태도는 단호했다. 당을 깨면 깼지, 북핵의 정당성과 '본사'에 보내는 보고의 의무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태도의 분명함은 평가해줄 만하다. 사실 내가 걱정했던 것은 이들이 대충 혁신안을 받아들여 사태를 무마한 후, 숨을 고르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튀어나와 이제까지 했던 짓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자신들의 색깔을 명확히 드러냈으니, 앞으로도 대중들 앞에서 거짓말하지 말고, 제 정치적 목표와 정체성을 숨김없이 분명히 밝히기 바란다.
  
  '종북노선이 문제가 아니라 패권주의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종북노선과 패권주의의 관계를 몰라서 하는 얘기다. 주사파들이 패권적 행태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종북노선의 관철을 위해서다. 당내에서 자신들의 종북행위에 제동을 거는 세력이 존재하니,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벌이는 작태가 바로 패권주의가 아닌가. 따라서 종북노선이 존재하는 한 패권주의는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손석춘 씨가 "통일운동에 찬물 끼얹지 말라"고 했던가? 북한에서 핵무기 만드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 그가 원하는 '통일운동'이라면, 그런 통일운동에는 앞으로 찬물이 아니라 똥물을 끼얹을 것이다. 그는 또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한다. 그의 독특한 윤리 감각에 따르면, 제 동지들 신상 파악해 북한에 보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그걸 비판하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져버린 패륜 행위다.
  
  옆에서 김민웅 씨도 거든다. 내 기억에 2002년인가? 제 동생이 서울시장 선거에 나왔을 때,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전쟁난다며 민주당에 표를 몰아달라고 해서, 나와 설전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쟁 위기까지 고취하며 민주노동당에 표주면 사표가 된다고 했던 그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갑자기 민주노동당에 대한 살가운 애정을 드러낸다. 그새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종북파의 정체를 몰라서 그런 발언 했다면 용서가 되겠지만, 그들을 접해 본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상황을 설명해주었고, 이번 대회에서 종북파의 정체가 명확히 드러났는데도 앞으로 계속 이 그들의 행태를 옹호하고 정당화한다면, 앞으로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종북파에게 갖춰야 할 인간적 예의가 있겠지만, 내게는 통일 되는 날 김정일 정권 아래 고생했던 북조선 인민들에 갖춰야 할 인간적 예의가 앞서기 때문이다.
  
  3.
  
  굶주린 북한 주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 압록강을 건너다가 익사했다고 하자, 태연히 "남한에서도 여름에 익사 사고 나지 않냐"고 대꾸하던 이들. 동성애에 대해 묻자 버젓이 "자본주의적 퇴폐"라고 대답하던 이들. 북한에 갔을 때 안내원에게 노래를 하나 불러달라고 하자 지도원 동무에게 허락을 받고 노래를 하더라며, 이를 "집단주의의 미덕"이라고 찬양하는 이들. 미선이 효순이 끔찍한 사체 사진을 연하장(?)만들어 돌리는 이들. 이런 이들하고 같이 '진보'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몇 년 전에 내가 당에 절대로 주사파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을 때, 민주노동당 내의 모 인사가 "그들도 언젠가 변할 것"이라며 주사파들과 나의 화해(?)의 자리를 주선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주사파는 내게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민주노동당 가입을 권유하는지 자랑을 했다. "동지, 김 주석이라면 이 상황에서 무엇을 했을 것 같소. 내 생각에 김 주석이라면 남조선 상황에서는 민주노동당을 했을 것이요."
  
  도대체 이런 사람들하고 진보정당을 같이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내가 얼마나 참담했겠는가. 종북주의자들이 온갖 편법으로 민주노동당의 조직을 장악해 들어와도 징계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미 당시에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그때 내가 탈당으로써 경고했던 일이 지금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운동을 해 봤다는 사람들이 결국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인가? 이것도 이해가 안 간다.
  
  이른바 평등파도 한때 망해가던 소련을 모델로 삼은 적이 있지만 동구의 몰락을 보고 생각을 바꾼 것처럼, 북한을 모델로 삼는 자주파도 언젠가 생각을 바꿀 것이다. 이게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는 주사파의 본질을 모르는 얘기다. 주사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 어떤 경험적 증거, 어떤 정합적 논리, 어떤 상황적 변화를 들이대도 깨지지 않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4.
  
  오늘로써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본사'와 연락을 방해하던 세력이 다 나갈 터이니, 이제 이름도 자기들이 애초에 원하던 대로 '민족자주당'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 그들은 드디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그들에게 축하의 말을 보내는 바이다. 앞으로 '본사'와 더 긴밀한 협력 아래 '조국은 하나다', '당과 인민도 하나다' 철학을 힘차게 구현해 나가며, 앞으로 진보진영과 아무 관계만 없어 주기를 바란다.
  
  '북한에 정말 아사자가 생겼는가?' '아니면 미제의 공화국 모략 선동인가?' '북한의 핵무기가 정당한가?', '북조선에서는 정말 당과 인민이 하나인가?' '그래서 조선노동당을 비판하면 곧 북조선 인민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가?' 이젠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제로 논쟁하느라 정력 낭비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평생 그렇게 믿고 살다가 죽게 내버려두고,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여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의제를 향해 진보를 하면 그만이다.
  
  민주노동당의 분열을 끝까지 막아보려고 남아 있었던 이들. 당신들의 생각과 충정을 존중한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으니, 더 이상 쓸 데 없는 노력을 접고 진정으로 현대적인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길에 나서라. 그리고 자신이 최소한 주사파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 남한의 진보정당이 최소한 조선노동당의 지사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이제 미련을 털기 바란다.
  
  진보정당을 재건하는 과제가 생겼다. 다시 시작하려니 모든 것이 막막할 것이다. 하지만 8년 전의 상황을 기억해 보라. 그때는 지금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운동권 내에서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수구세력에 대한 기대는 접어버리자. 그리고 앞으로 진보정당의 새로운 토대가 될 이들에게 눈을 돌리자. 사회에 진보적 역량은 충분하다. 그 역량은 이제까지 낡은 운동권 방식, 낡은 주사파 형식으로 표현되기를 거부해왔을 뿐이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새로운 진보정당에 참가할 뜻을 밝혔다. 남한의 진보운동이 드디어 거추장스런 주사파의 족쇄를 풀어버렸다. 몇 년 전에 버렸던 진보정당의 당원증 다시 주워들고 싶다. 오랜 세월이 걸릴지도 모르는 힘든 길이다. 하지만 진보하기를 포기할 수 없다면, 끝을 알 수 없는 길이라 하더라도 걸음은 내디뎌야 한다. 거대한 위기는 동시에 위대한 기회다. 건설될 새로운 진보정당에 입당을 신청한다.

진중권/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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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7 17: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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