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한달 째 계속된 야근,
해도 해도 계속 밀리는 업무,
회신 늦는다고 난리 치는 거래선들,
정말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데도
"원래 대리 때 일 제일 많이 하는거 아니야?"
너무도 당연하게 표정 없이 얘기하시는 팀장님.
요즘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다.
드뎌 오늘 아침,
잔뜩 지친 얼굴로 모니터를 멍하니 쳐다 보다
바람이라도 좀 쐬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잠시라도 탈출하고 싶었다.
근데....
팀장님이 자리에 안계셨다.
그래서 포스트 잇에 또박또박한 글자로(원래 내 글씨는 아직 국민학생 같다.)
"감기가 심해서 병원에 갑니다.13시까지 들어오겠습니다. 성수선"
라고 써서, 팀장님 모니터 하단부에 얌전히 붙힌 다음,
사무실을 나왔다.
그때가 11시 10분 전 쯤?
일단 나오니 살 것 같았다.
날씨도 좋았다.
광화문까지 터벅 터벅 걸어갔다.
일단은 광화문 우체국 옆의 커피빈에 가서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점심 시간 전에 가니 사람도 없고 참 좋았다.
평일에도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구나....
12시가 되면 근처 회사원들이 몰려와 아수라장을 만들 것 같아서,
잠깐의 독서를 마치고 교보문고에 갔다.
서점에 가면 항상 기분이 좋아진다.
( 난 아침에 일어나서 잠을 깨려고 책을 읽는다.뭔가를 읽어야 정신이 집중된다. 잠 들려고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몇권의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고, 또 알라딘에서 찜해둔 책들을 확인사살했다.
그리고....
책을 한권 샀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지금 "일민미술관"에서 사진전을 하고 있는 최민식 선생의 사진집이다. 시인 조은이 사진 한컷 한컷에 짧은 글을 써놓았다.
예술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꽂혀 있기에 집어 들었는데,
긴 세월, 만만치 않은 삶을 견뎌낸 시골 할머니들의 사진을 보고
순간 울컥했다. 책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최민식의 사진들을 보면서,
특히 만만치 않은 인생을 견뎌낸,
평생 고된 일을 하느라 울퉁불퉁해진 손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고 참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툴툴거리면서
사무실을 뛰쳐나와 여기에 있는거지?
모진 인생을 견뎐낸 할머니들,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난 할머니들에게 아주 깊은 "연민"을 느낀다.
그래서 영화 <집으로>도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볼 생각 없다)
구부정한 할머니가 외손주에게 무시 당하고 그런거 보면 막 화날 것 같다. 영화 보면서 스트레스를 무시무시하게 받을 것 같다.
마지막이 해피엔딩이건 감동적이건 상관 없다.
나는 지하도에서 껌파는 할머니만 봐도,
시장통에서 팔리지도 않는 나물을 팔면서 하루 종일 앉아 있는 할머니를 봐도,
평생 고기 한번 제대로 못먹고 모은 돈을 집 앞에 있는 대학 장학금으로 턱하니 내놓는 할머니를 봐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난 평생 화장품 하나 제대로 된거 안쓰고,
고기 한번 제대로 못 먹어 보고,
악세사리라고는 금가락지 하나 뿐인 할머니들이,
평생 하도 고된 일을 해서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평생 모은 돈을 대학에 기증하는 걸 보면 화가 난다.
그냥 그돈으로 평생 고생만 해온 할머니들이
비행기도 한번 타보고,
비싼 고깃집에서 고기도 한번 배터지게 먹어 보고,
집도 좀 번듯한 데로 이사가서 등따시고 배부르게 살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 피와 땀과 한의 결정체인 돈을 공부도 안하는 애들 잔뜩 모여있는 대학에 기증하다니...
뜻은 고맙지만, 난 평생 당신을 위해 단 한번의 사치를 해 보지 않은 할머니들이 안타깝다.
짧은 시간 최민식 선생의 사진집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주로 "부끄러움"이었다.
서점을 나오는 길에 바로 그 옆에 있는 일민미술관에서
최민식 사진전을 볼까도 생각했지만,
13시까지 간다고 스스로 말했기에,
땡떙이를 치고 사진을 감상하면 그 피사체들에게 더욱 더 미안할 것 같아서,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돌아갔다.
주말엔 최민식 사진전을 보러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