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2년 12월, LA에서 San Francisco로 가는 기차에서 옆에 앉았던 미대생이 그린 그림. 벙거지 모자를 눌러 쓰고, 가슴이 디따 넒은 것이 [Before Sunrise]의 에단 호크를 닮은 애였다.
옆 모습이 예쁜데 스케치를 해도 되겠냐고 말을 걸어오더니,
자기 스케치북에 있는 50장이 넘는 그림들을 한장씩 보여 주었다.
귀찮아서 대~충 보다가...
이 그림에서, 아니 이 그림의 문장에서 전율을 느꼈다.
사춘기 이후 하루도, 정말 하루도, 이 질문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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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여름이었다.
진로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 30대가 되면 "안정"의 시대가 오리라 믿었었는데....
30대가 되어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만 알아버렸다.ㅠㅠ)
그 당시 압구정에 유명한 사주 cafe가 있었다.
이름이 마이다스던가?
나 만큼이나 고민이 많았던 친구 E와 함께
그 cafe에 갔던 적이 있다. 아주...더운 날이었다.
친구 E와 나는 나란히 앉아,
백지 위에 날라가는 한문으로 생시를 써내려 가고 있는 아저씨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의 첫마디는.... 정말 뜻밖이었다.
친구 E를 쳐다보며 말했다.
" 그저....영어, 컴퓨터만 파는구만."
우리는 기절할 뻔 했다.
그 친구의 학부 전공은 컴퓨터공학.
대학원은 동시통역 영어.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래진 나를 쳐다 보며 아저씨는 말했다.
" 어찌 친구랑 그렇게 달라....
책을 읽어도 돈 안되는 것만 읽는구만... 으허허허..."
친구에게는 앞으로 큰 돈을 번다고 말했다.
나에게는......쓸 데 없이 사업 같은건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
쓸 만큼의 돈은 항상 있단다.
친구에게는 주위에서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신경 쓸 일이 많고,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 주위에 많단다.
나에게는..... 사고를 쳐도 항상 수습을 해주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고 했다. 편하게 살면 된단다.
친구에게는 남자친구(지금의 남편)와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나에게는.....결혼은 늦겠지만(헉!!!) 좋은 사람을 만날 꺼라고 했다.
어제, 친구 E의 집에 놀러 갔었다.
친구가 만삭이라 날도 추운데 집으로 간다고 했다.
만삭이라 몸 움직이기가 어려울지 알았는데,
APEC 통역까지 갔다 왔단다. 나 보다 훨씬 바쁘고 부지런하게 살고 있었다.
친구가 해주는 저녁을 먹었다.
애를 낳으려면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며,
Tefal 전자 후라이판에 항정살을 구웠다.
당근... 술 한잔이 땡겼으나 임신부와 무슨 술을 마시랴....
깻잎에 고기를 싸서 친구가 끓인 약간은 싱거운 된장찌개랑 맛있게 먹었다.
아마도....임신부 보다 많이 먹은 것 같다.ㅠㅠ
친구네 집은 참 아늑했다.
주방 앞에 있는 진열장에는
여러 종류의 차들과 술들이 있었다.
쇼파는 널부러져서 TV 보다가 잠들기에 딱 좋았고,
공부방에는 책상 2개와 컴퓨터 책상, 이렇게 3개의 책상에
책들(물론...소설 나부랭이 같은건 단 한권도 없다.)이 잔뜩 쌓여있었다.
옷방에는 유모차와 미리 사둔 애기 옷들, 장난감들이 있었다.
Home,Home,Sweet Home....
거실에 걸려 있는 초대형 결혼사진하며,
sweet home 그 자체였다.
친구의 스위트 홈에서 차를 마시고 있으려니,
왠지 내가 방랑자, 또는 외계인처럼 느껴졌다.
도대체....나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는거지?
뭔가....내가 인생의 궤도를 약간 이탈해서 빙빙 돌고 있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위트홈이 부럽다기 보다,
그저 친구가 확보하고 있는 그 "공간"이 부러웠다.
사실...요즘 오피스텔을 하나 얻을까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이제...부모님에게 더부살이 할 때는 지난 것 같다.
나만의 온전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추운 날에 사람 많은 극장으로 카페로, 식당으로 돌아 다니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루 종일 게으름을 피울 그런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책 읽고, 자고, 먹고, 책 읽고, 또 자고...
월요일 부터 토요일까지 태국,대만 출장이다.
출장 준비를 다 못해서 내일은 회사에 나가야 할 것 같다.
오늘 따라....
피곤하고, 다 귀찮고, 또 출장도 걱정되고....
에쿠니 가오리가 말했다.
함께 자는 남자의 팔이 편안하다고...
오늘 같은 날,
약간은 지치고 힘든 오늘 같은 날,
하루 종일 빈둥거리다가 그런 편안함을 느껴 봤으면 좋겠다.
(나는 우찌....이리 솔직할까나? ㅠㅠ)
붐벼 터지는 극장과
담배 냄새 자욱한 cafe와 추운 날씨가
왠지 날 외롭게 하는 가뿐하지 않은 토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