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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르처 지음, 김재희 옮김 / 이프(if)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느꼈다.
여자와 남자,양성간의 소통되지 않는 벽은 타고난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성별에 따라 구분되어 교육된, 사회적 규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고등학교 때, 내 가사 성적은 "가"였다.
수,우,미,양,가에서 제일 꼴찌인 "가".
다른 과목도 다 그랬냐구?
난 내신 1등급이었다.
즉, 국영수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과목은 다 "수"였다.
그런데 왜 "가사"가 그 모양이냐구?
가사는 내 선택 과목이 아니었다.
난 제 2외국어(독일어)를 선택했고,
학력고사 때 가사 시험을 칠 필요가 없었다.
고3때 우리 반에서 독일어를 선택한 애는 5명 밖에 없었다.
나머지 50명은 모두 가사를 선택했다.
독일어 시간에 50명은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거나 다른 공부를 했고,
가사 시간에 5명은 아예 나가 있었다.
그것도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학교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라고 했다.
물론 친절한 선생님의 배려에 감사하며 학교 독서실에서 실컷 떠들었지만...
가사가 선택 과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중간고사,기말고사는 봐야 했다.
다른 애들은 벼락치기라도 해서 대충 시험을 봤다.
하지만 나는 전혀 하지 않았다.
정.말. 하기가 싫었다.
남자애들이 공업인지 기술 시간에 뭘 배우는지는 잘 모르겠다.
교과서를 본 적도 없으니까...
지금은 교과 과정이 어떻게 바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 "가사"라는 과목의 교과내용은 참으로 허.접.했.다.
왜 그런걸 배워야 하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저고리 만들기, 바느질의 종류,
탕평채에 들어가는 재료가 아닌 것은?,
무슨 음식을 만들 때 순서를 번호로 나열하시오 등등.
이런걸 왜 배워야 할까?
누가 저고리를 만드나?
일 년에 몇 번 입어 보기도 힘든 판에...
중학교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때는 교과 이름이 "가사"가 아니라 "가정"이었다.
중3 때, 우리 담임선생님은 바로 그 "가정" 선생님이었다.
" 너 일어서! "
" 그 뒤에! "
" 그 대각선 뒤에!"
하며 애들을 일으켜 세워서 질문을 하면, 애들은 공포에 떨며 대답을 해야 했다.
나도 호명을 받았다.
선생님 : OOO 만들 때 들어가는 재료 말해봐!
수선 : ( 곤란한 표정을 짓다 씩 웃으며) 가스렌지, 냄비, 국자, 앞치마....
애들이 웃고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다.
선생님은 너무 화가 나서 내 머리통을 출석부로 때렸다. 별이...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허접한 과목을 배우는 것 까진 좋다고 치자.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여자만 배워야 하는가?
난 어릴 때부터 이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들도 와이셔츠 단추 떨어지면 자기가 달 줄 알아야 하고,
밥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왜 "가정", "가사"는 여자만 배우는가?
저고리 만들기, 버선 만들기, 조각 이불 만들기...
이런 쓰잘 데 없는 내용 다 빼고,
단추 달기, 간단한 음식 만들기, 못 박기, 형광등 갈아 끼기 등
이런 실용적인 가사/기술 통폐합 과정을 만들어서 여자, 남자 같이 배워야 한다.
그리고...
정말, 진정 중요한 것은
비타민 A는 어떤 식품에 많이 들어 있고,
비타민 C는 어떤 식품에 많이 들어있고
이런 게 아니라,
"가사"는 여자가 당연히 해야 할 타고난 책임이 아니라,
여자와 남자가 분담해서 해야 할 일이라는 걸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다.
엄마가 새벽부터 일어나 먹기 싫다고 하는데도 밥 차려주고,
당신은 화장품 하나 제대로 못 사면서 공부도 안하고 또 못하는 아들을 위해 과외비는 아낌 없이 쓰며,
그저 공부만 잘하라는 말을 듣고 자라서
'여자는 원래 가족들에게 희생하는 존재구나'
생각하는 남자 어른이 되면,
한 가정의 불행이 시작된다.
여자와 남자,
개성과 취향과 개인의 능력을 떠나
항상 성에 따라 먼저 구분하고,
그 구분에 따라 역할을 교육하고
그 역할과 사회적 책임, 금기에서 벗어나면 비난을 하고....
이런 속에서 전통적인 여자의 집합에도, 남자의 집합에도 속하지 못하는 성적 소수자들은 평생 고통을 받고....
<아주 작은 차이>는 30년 전에 독일에서 출판된 책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을 사는 한국 여자들의 상황과 너무나 똑같다.
인터넷 서점에 있는 <아주 작은 차이>의 독자서평들을 읽어보니,
여성학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이 숙제로 책을 읽고 쓴 독후감들이 많이 있었다.
대부분 일상에서 겪으면서도,
어머니의 모습에서 보고 느끼면서도,
자각하지 못한 현실에 놀라는 내용이었다.
이 책을 부부나 연인이 함께 읽고 얘기를 해 본다면 좋을 것 같다.
"알면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알아야 배려할 수 있고, 그래야 더 행복할 수 있다.
특히 젊은 부모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아들은 태권도장에 보내고,
딸은 피아노 학원에 보내고,
이런 전형적인 틀 속에 아이들을 가두지 말고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배려해 주면 좋겠다.
특히 딸들에게도 "경제적 독립"의 중요성을 꼬~옥 가르켜 줬으면 좋겠다. 어렸을 때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