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상징 - 주술적-종교적 상징체계에 관한 시론 까치글방 137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이재실 옮김 / 까치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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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문화의 태동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성의 절대성과 인간문화의 보편성은 의심의 여지없이 타당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역사는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면서, 특수하고 상대적이며 미시적인 주변상황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등장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의 상대성을 수용하며, 인간문화양식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위로부터의 거시사보다 아래로부터의 미시사에 더 매력을 느낀다. 그야말로 우리들은 20세기의 그늘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와 상징'을 다루는 종교사가들은 여전히 인간에게는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그 무엇이 실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감각적 현상세계는 '실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영원성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형이상학적이긴 하나, 존재론적 관점에서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그 무엇'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그 무엇이란 바로 '이미지와 상징' 같은 것이다.

이미지와 상징은 인류가 탄생한 이래 세계도처에 걸쳐 명맥을 유지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란 점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들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의식구조의 본질에 대해 말해줄 뿐만 아니라,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철학을 부여하며, 세계도처의 인류가 교감하고 의식을 교류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정녕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해준다는 의미이다.

가령 상징의 보편성은 달의 형태변화로부터 순환의 이미지를 추출해내고, 조개로부터 여성 성기의 이미지를 얻으며, 물로부터 혼돈과 잠재성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그것은 어느 지역 어느 시대의 특수한 산물이 아니라, 인류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미지이다. 때문에 인류는 이러한 이미지를 주술적-종교적 의식에 활용함으로써 우주의 리듬을 회복하고, 영혼의 안식과 위안을 얻는 것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미지와 상징'의 중대한 의의를 발견하고, 그 구체적 사례 및 의미와 역할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엘리아데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인간을 발견했다고 자부하는 서구인에 대해, 단순하고 삭막한 '지역주의자들'이라 비판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지와 상징이 시간적 공간적 경로를 통해 전파되었을 가능성 - 동시보편적으로 발생했다기 보다 - 즉 역사적 특수성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지와 상징'은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므로, 동일한 우주에 살고 있는 인류의 의식구조는 유사한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징의 구조는 역사에 의해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질 지라도, 불변하는 보편성을 지닌다고 단언할 수 있다. 가령 기독교는 기존 종교의 상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지만, 근본적 변화는 아니었고 또한 상징의 보편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세계적 종교로 성장했던 것이다.

인간은 비록 덧없이 짧은 생을 살다가는 존재이기에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등장이래 면면히 이어져온 '이미지와 상징'은 보편적이며 실재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시각은 다분히 철학적 존재론에 근거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덧없는 세상을 등지고 종교적 수행 속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은 분명 우리에게 무언가를 시사해 주고 있다.

비록 우리는 인도의 수행자들처럼 이러한 철학을 극단까지 밀고 나갈 수는 없지만, 현실세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에 참여하는 동시에, 삶의 철학으로서 상징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삶은 더 의미있고 값진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징의 긍정적 기능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사이비 종교인들의 상징관이다. 그들은 상징의 의미를 깊게 음미하려 하지 않고, 곧이 곧대로 해석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위험한 종교적 해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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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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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애초에 내가 이 책을 읽으려던 목적은 일본의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함이었다. 물론 그것은 이 책이 역사서일 것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 책 '국화와 칼'은 일본에 대해 문화인류학적으로 접근한 책이었다. 문화인류학은 인간의 특이한 행동방식 속에서, 그러한 행동을 야기한 근원적인 동기를 찾으려 한다. 따라서 일본인들의 세계관을 면밀히 파헤치고자 하는 이 책 역시 일본인들의 언어, 친족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유형을 분석하여 그들의 의식구조에 관한 비밀을 벗겨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국무성의 의뢰를 받아 '베네딕트'에 의해 수행된 이 프로젝트는 일본에 설치될 미군정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고자 의도되었다. 전쟁기간 내내 지속된 일본군의 돌출적 행동이 서구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에, 그 근원적 동인을 밝히는 것이 미국으로선 급선무였던 셈이다. 베네딕트에 의해 완결된 프로젝트로서 이 책 '국화와 칼'은 일본과 서구의 문화를 선명히 대비할 뿐만 아니라, 일본전통의 족쇄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유교문화권에 살면서도, 너무 가까이 있기에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동양적 세계관이다. 베네딕트가 그것을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은, 먼 거리에서 숲을 관조할 수 있었기 때문일런지 모른다. 사실 동양적 가치관인 충 효 은혜 의리는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기에, 그것들의 참된 의미가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서양인의 시각에서 그것들은 두드러져 보이는 그 무엇일 수 있고, 소위 그들의 합리적 세계관에 비해 모순되는 것일 수도 있다.

베네딕트는 서구의 시각에서 볼 때, 일본인의 의식구조가 모순돼 보이는 이유를 그들의 '의리의 문화'와 '명예의 문화'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행위의 기준을 내면의 양심보다 외부의 시선에 두는 문화이다. 즉 서양인들의 행동기준이 양심을 따르는데 반해, 인본인들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는데서 오는 수치심에 따라 행동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2차 대전 패배 후 일본의 격렬한 저항이 예상됐지만, 그 예상이 빗나간 이유는 그러한 일본인들의 의식구조로서 설명될 수 있다. 즉 미군은 명예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에 대해 아무런 모욕감도 주지 않고 일본의 천황제와 계층제의 질서를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알맞은 위치'를 보존해 주었다는 것 그리고 기회주의적인 일본인들의 행동방식 등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국화'와 '칼'은 이와 같이 모순돼 보이는 일본인들의 의식구조를 예리하게 포착한 상징이다. 칼 자체는 본질적으로 공격성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칼의 녹을 제거하는 행위는 자기에 대한 책임을 상징하고 있다. 국화의 경우 고고히 피어나는 절개의 상징이자, 성장을 억제하는 국화꽃 철심은 억압의 상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철심을 제거함으로써만 일본인들은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베네딕트가 일본인들의 이중적인 의식구조를 '국화와 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들의 긍정적 면모 즉 자기 책임과 자유는 패망 후 일본의 재건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책이 출간되고 반 세기가 지난 현 시점에서 일본의 부흥을 보노라면, 2차 대전 후 미군정의 대일정책이 성공적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베네딕트에 의해 저술된 이 책 '국화와 꽃'이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미군정기의 한국에서는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에 접근하기 위한 어떠한 연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미군정의 태도는 대한반도 정책의 혼란과 실패를 유발할 뿐이었고, 결국 한반도의 분할로 귀결되었다. 우리로서는 몹시도 유감스런 일이었다.

사실 베네딕트의 '국화와 꽃'을 읽으면서 많은 의혹과 아쉬움이 남았던 대목은, 그녀가 조선의 역사와 한일관계의 역사에 대해 도외시하거나 무지함을 드러낸 부분들이었다. 당시 양국에 대한 미국의 인식 차이로 인해 현재 일본의 번영과 한국의 분단을 초래했다는 점은 우리로서는 너무도 쓰라린 대목이다. 현재 일고 있는 반미감정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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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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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물리학의 세계로 통하는 문은 너무도 좁다. 수학적 지식으로 무장된 과학자들에게만 통행증이 발급되기 때문이다. 그곳은 특권을 지닌 물리학자들만의 공간으로, 수학적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은 감히 접근조차 불가능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알려져 왔다.
일반상대성이론의 발표 당시 전세계에서 그것을 이해한 사람은 12명 남짓이며, 양자역학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확신한다고 '리처드 파인만'은 언급한 바 있다. 파인만의 견해는 이론물리학의 세계가 내로라는 물리학자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영역임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하물며 수학적 지식이 거의 없는 일반대중에 있어서랴!

하지만 구세주처럼 나타난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일반대중들에게 희망찬 복음을 전한다. '무언가를 전문용어 없이 일상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물리학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이론물리의 수학적 공식을 일상언어로 전환하는 능력에 있음을 시사한다. 러더퍼드의 이 말은 일반대중들에게 암흑처럼 느껴지는 이론물리의 세계에 한 줄기 빛을 던진다.

하지만 그러한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실천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초끈이론을 전공한 '브라이언 그린'이란 젊은 물리학자가 그 과업에 도전하였다. 그는 쉬운 언어로 '우아한 우주'를 설명하여, 물리학의 세계로 통하는 문호를 대중들에게 개방하고자 시도하였다.

브라이언 그린은 뉴튼의 고전물리학으로부터 최첨단 초끈이론에 이르는 환상적인 여정에, 수학의 문외한인 우리들을 초대한다. 그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초끈이론의 세계에서 상식적 세계관은 허물어진다고 강조한다. 진리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에 웅크리고 있다고 폭탄선언하며!

그 사례는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한 시간여행, 일반상대성이론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휘어진 공간,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 초끈이론을 통해 증명된 숨겨진 차원 등 이루 열거하기 조차 힘들 정도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사는 시공간에서 늘상 일어나는 사실 자체이며, 브라이언 그린의 아주 쉬운 언어를 통해 묘사된다.

이론물리의 세계에서 브라이언 그린이 우리를 안내한 종착지는 초끈이론의 세계이다. 그 곳은 그린의 전문영역으로서, 그에 의하면 초끈이론이야말로 통일장이론(우주에 존재하는 기본적 힘인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을 아무런 모순 없이 하나의 체계아래 통합할 수 있는 근본이론)의 유력한 후보라는 것이다. 사실 통일장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위대한 천재 아인슈타인이 매달렸지만, 실패로 끝난 바 있다. 하지만 브라이언 그린과 함께 우리는 일반상대성이론의 세계를 이미 관람한 터여서, 아인슈타인의 무등을 타고 초끈이론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우리의 안내자 브라이언 그린은 이 환상적인 여정의 타이틀을 '엘러건트 유니버스' 즉 '우아한 우주'로 정했다. 그 발상은 양자적 미시세계로부터 거시 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무한한 우주를 단순한 수학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그린의 확신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이론물리세계의 언어인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그 세계의 아름다움을 완벽히 체험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린의 설명이 곁든 슬쩍 엿보기를 통해 필요한 만큼의 지적 호기심은 얼마든지 충족시킬 수 있다.

이 놀라운 환상체험을 통해, 우리는 이론물리학의 세계로 통하는 좁은 문이 브라이언 그린에 의해 확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어느 누구의 도움없이도 과거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곳을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리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브라이언 그린! 그는 '리처드 파인만'과 더불어 물리학의 전도사로 불릴 충분한 업적을 이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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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林火山 2009-01-2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Naver Opencast의 "風林火山의 분야별 대표 도서 소개"(http://opencast.naver.com/BK175)라는 캐스트의 캐스터 風林火山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제 캐스트에 발행했는데, 혹시라도 발행을 원치 않으시면 '캐스터에게 한마디'에 적어주시거나, itmedusa@gmail.com으로 메일 주세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베이징 이야기 이산의 책 20
린위탕 지음, 김정희 옮김 / 이산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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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문화의 요람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은 일반서민과 외국인들에게 좀처럼 문호가 개방되지 않았던 곳이다. 서기 천 년 이후 북방민족의 점령아래 있었던 북경은 중국의 고도이자 궁정이 안치된 성역으로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제한되었고, 중국내전 이후에는 공산당의 근거지로서 외국인들의 출입이 봉쇄된 바 있다. 물론 개방의 물결이 휘몰아친 후 상황이 개선되었지만, 지금은 뜻하지 않게 '사스의 공포'로 다시 장막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기소침해 할 필요는 없다! 북경에 들어가는 다른 경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린위탕'의 '베이징 이야기'가 그 유서 깊은 도시의 비밀을 속속들히 파헤쳐 버렸다. 베이징을 알고싶어 하는 사람들, 베이징에 갈 수 없는 사람들, 베이징 여행을 기약하고 있는 이들에게 감히 이 책을 권한다.

이 책 <베이징 이야기>를 단순한 기행문이나 견문록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베이징을 소개하는 린위탕의 시도는 참신하고 다각적인 접근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시도는 베이징의 풍경을 묘사한 기행문, 자연의 서정성을 음미한 문학작품, 건축과 예술에 서린 사연을 서술한 역사스케치, 자연과 예술의 심미성을 추구하는 미학의 요소를 두루 아우른다. 따라서 이 책을 읽노라면, 마치 베이징의 정원인 원명원이나 이화원의 아름다운 회랑을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이 환상적인 체험은 린위탕의 서정적이고 절제된 필치에 의해 더욱 매료되고 만다.

베이징에 대한 린위탕의 실험이 다양한 쟝르를 통해 시도될 지라도, 혼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베이징의 사람들, 베이징의 자연, 그리고 사람과 자연의 정서가 교감되는 지점인 베이징의 예술로 저자의 시선이 좁혀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린위탕은 베이징의 사람과 자연 그리고 양자를 연결하는 예술을 기행문 문학 역사학 미학 속에 녹여버렸던 것이다!

베이징은 소박하고 담백한 보통 사람들, 즉 왕조의 교체와 정치적 격변 속에서 꿋꿋이 제자리를 지켜온 서민들의 숨결이 살아 있다는 점에서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베이징은 그냥 보아 넘기기엔 좀 특별한 아니 환상적인 구석이 있다. 그곳은 후미진 거리와 싸구려 음식점 그리고 은밀한 홍등가가 서민들의 삶과 밀착된 곳이지만, 궁정사회의 수려한 건축과 빼어난 예술품이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 즉 최하층 삶으로부터 최상층 삶에 이르기까지 문명발전단계의 극과 극이 연결돼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들은 최고의 문학과 최고의 예술은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삽입된 다 수의 화보들은 우리의 그러한 의지를 허물어 뜨린다. 베이징의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운 예술세계는 인간의 기교가 더이상 어떻게 정교해지고 서정적이며, 더 완벽한 미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킨다. 나는 '베이징의 예술세계를 체험한 이가 유럽의 예술세계를 경험한다면, 금방 식상해 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베이징은 분명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도시이다. 누구라도 아마 한 번 쯤은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만약 기회가 생겨 베이징에 가게 된다면 출발 전날 밤, 꼭 '린위탕'의 '베이징 이야기'를 읽길! 이 책은 분명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고, 건축과 예술의 세계에 대한 당신의 심미안을 높여줄 것이다. 베이징의 아름다운 세계를 사전 지식없이 마주친다면, 그 역사적 순간은 허무한 것이 될 것이다! 세상에 그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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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의 부리 -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
조너던 와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추천 / 이끌리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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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이후 최근까지 지속된 진화론-창조론 논쟁은 지루한 소모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체계적 논리와 이론적 심미성을 가졌음에도, 진화론은 사변세계의 벽에 갇혀 있었다. 따라서 창조론자들은 공허한 말장난이라 진화론을 비판했고, 진화론자들 역시 증거없는 논리로서 반박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한 그 지루한 논쟁의 와중에서 다윈이 남긴 희미한 빛은 비록 암흑같은 무지의 세계를 환하게 비추지 못했을 망정, 꺼지지 않고 지속되기에 충분했다.

그 후 진화의 역사상 몇 차례의 도약이 있었고, 이제 다윈의 후계자들은 그의 무등을 타고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다윈이 보지 못했던 것, 다윈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생생한 진화의 증거까지 제시할 수 있다. 더 이상 진화론은 가설이 아니다. 그것은 가설의 족쇄를 풀고, 사실 자체로서 당당하게 우리 앞에 부활한 것이다.

이 책 '조너던 와이너'의 <핀치의 부리>는 진화론에 관한 생생하고 현장감있는 증거들의 보고이다. 종래 출판되었던 진화론 관련 저작들은 진화가 너무도 점진적이어서 긴 시간동안 겨우 미미하게 변화하며, 따라서 화석을 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핀치의 부리>는 그러한 견해를 단호히 거부한다. 진화는 우리의 뒷뜰에서도 항상 일어나며, 우리는 그것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핀치의 부리>는 그러한 사실을 정확한 데이터로 입증해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진화론에 대한 지루한 논쟁이래, 이 소식은 모든 갈증과 체증을 단번에 풀어줄 정도로 경이로운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떤 찬사로도 부족한 책 임에 틀림없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과 더불어 가장 탁월한 진화론 관련 저작에 이 책을 위치시키고 싶다. 또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더불어, 이 책이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할 21세기 고전의 반열에 자리매김될 것으로 확신한다.

조너던 와이너가 이 책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진화가 수 세대에 걸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세대에도 수 차례 발생한다는 자연선택의 역동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정지해 보이는 이유는 자연선택의 밀고 당기는 힘에 의해 평형이 지속되는듯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심한 관찰자들은 자연의 혼란스런 광경과 시끄러운 소음에 빈혈을 느낄 지경이다! 실제로 그들은 진화의 역동성과 격렬함이 늘 그들을 어지럽힌다고 호소한다. 이러한 진화의 역동성은 기존의 점진적 진화에 대한 가설보다 훨씬 아름답게 와 닿는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인간의 겸손, 즉 진리를 터득해 갈수록 점점 숙연해지라는 인간의 겸손에 관한 것이다. 조너던 와이너는 지구 생명의 탄생이래 진화의 계보의 맨 윗자리를 인간이 차지한다고 믿는 오해와 자만심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학습을 통해 기술과 문화를 습득하는 행위는 결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닐 뿐더러, 동물세계의 경쟁과 자연선택의 법칙은 예외없이 인간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인류는 결코 이 행성을 구성하는 다른 종의 동료들보다 특별한 존재도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행성의 앞선 주인이었던 다른 종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증산을 위한 농약과 살충제의 살포는 오히려 해충의 군비경쟁을 가속화시키지 않았던가? 우리가 그들의 영역권을 인정해줌으로써만, 비로소 그들도 우리의 영역과 지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종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헛된 시도를 재고해야 한다는 이 책의 강한 메세지는 우리를 더욱 숙연하게 한다.

<핀치의 부리>는 심오한 자연의 이치를 추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루하지 않다. 무엇보다 일반의 비전공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여졌다는 점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또한 자연의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 다윈 후계자들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소개함으로써 극적인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고, 그 속에서 인류임을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읽어야할 명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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