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 리들리의 붉은 여왕
매트 리들리 지음, 김윤택 옮김 / 김영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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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저널리스트들은 지식사회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 일쑤다. 정작 자신이 해놓은 것 하나 없이, 남들의 성과를 재단하는데 도가 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곱지 않은 시선이야 말로 사회적 편견이 아닐까 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전공분야에만 익숙한 과학자들과 달리, 전분야를 꿰뚫고 있는 저널리스트들에게 저술가로서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다수 노벨상 수상자들의 글솜씨가 별 볼일 없음을 감안할 때, 이들도 지식사회의 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저널리스트들 중엔 날카로운 시각과 통찰을 겸비한 이들이 적지 않다. '핀치의 부리'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조너던 와이너', '카오스'의 개념을 대중사회에 명쾌히 소개한 '제임스 글릭', '경도'와 '갈릴레오의 딸'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데이바 소벨', '과학의 종말'로 지식사회에 충격을 준 '존호건'........ 그러나 누구보다 탁월한 저널리스트를 꼽으라면, 그는 단연코 '매트 리들리'여야 한다. 그는 '게놈'에서 인간의 유전자에 얽힌 비밀을 심도있게 파헤쳤고, '이타적 유전자'를 통해 협동을 포함한 인간적 덕성의 진화를 아름답게 보여주었다.

리들리의 야심은 대단하다. 그의 책들은 생물의 평범한 진화에 그치지 않고, 인간본성의 진화과정를 걸고 넘어가려 한다. '인간본성에 대하여'를 써서 지식사회에 충격을 주고 처절한 비판까지 감내해야 했던 '에드워드 윌슨'에 비해, 리들리의 처지는 나은 편이다. 뒷시기에 태어난 리들리야말로 풍부히 축적된 진화생물학계의 수혜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리들리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박학다식하며 날카로운 통찰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게놈'과 '이타적 유전자'가 한국에서 대히트한 후 '붉은 여왕'이 출시되었지만, 사실 '붉은 여왕'은 리들리의 초기 작품에 속한다. 이 책 '붉은 여왕'은 앞선 두 작품보다 훨씬 흥미로운 주제인 성을 다루고 있다. 리들리는 스토리를 풀어나가기 위한 연결고리로서 성을 설정한다. 그것은 성의 발생과 양성의 대세화로부터 시작해, 성이 인간의 진화에 미친 영향을 탐색하고 놀랍게도 인간뇌의 급속한 성장이 성선택의 압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가설에까지 다다른다.

사실 리들리에게 번식을 위한 성선택은 생존을 위한 자연선택 못지않게 진화에서 중대한 요소이다. 특히 인간의 독특한 문화는 성선택의 산물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자는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고 양육하는데 순진한 남편을 이용하지만(일부 일처제 선호), 남자는 유전자를 제공하는 바람둥이에 불과할 뿐이다(일부 다처제 선호). 더우기 순진한 남자들은 자신의 유전자가 섞이지 않은 바람둥이 아내의 자식을 양육하는 일에 헌신적이다! 인간진화의 놀랍고도 타산적이며 비참한 면을 들춰낸 리들리의 주장에는 놀랍게도 논리적 헛점이 보이지 않는다.

진화의 엄연한 진리는 인간이 몹시 희극적인 존재이며, 다른 동물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일깨워 준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풀하우스'에서 강조했듯 인간은 진보적 진화를 거쳐온 것이 아니라, 다양성에 의해 파생된 '오른쪽 꼬리'에 안착했을 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행운이었다!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 '붉은 여왕'의 논리는 상대적 위치의 불변에 초점을 맞추지만, 절대적 위치나 전체적 수준은 분명 정교하고 세련된 수준에 이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과거보다 월등히 성장한 현재 메이저리그의 수준급 3할 타자가 과거에 활약했더라면 4할을 쳤을 수도 있다고 말한 굴드의 주장과 같은 맥락에 있다.

자연의 모든 생명에 대한 인간의 지위는 상대적인 변화를 겪지 않았지만, 다른 생명체가 정교해졌듯 인간도 세련된 진화의 과정을 밟아 왔다. 그것은 성의 발생, 양성의 등장, 성선택의 압력 의한 인간지능의 성장, 독특한 심리상태의 형성 등을 초래한 성의 메커니즘 덕분이었다. '붉은 여왕'이야말로 성을 도구로 인간을 인간답게 창조한 조물주였던 셈이다. 그때문에 성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병적인 수준까지 치닫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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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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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힘은 위대하다! 뉴튼은 축적된 지식의 체계를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을 과거인보다 우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과거인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현대인을 '거인의 무등을 탄 난장이'에 비유했다. 이 비유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리고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뉴튼의 비유와 에코의 선견지명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입증했다!

이 위대한 책 '총, 균, 쇠'는 시공을 넘나들며 인류 문명의 기원을 추적한 '지식 오딧세이'이다. 아마 이 책만큼 명쾌하게 인류 문명의 수수께끼를 밝혀낸 책은 이제까지 없었을 것이다. 사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의문을 품고 착수했던 프로젝트는 너무도 야심찬 것이어서, 세계적 석학들조차 혀를 내두르거나 회의를 품었음직 하다. '각 대륙과 인종에서 나타나는 문명발전의 우열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으며, 우열을 초래한 궁극 원인은 무엇인가?' 이 얼마나 야심차며 오만하기까지 한 질문인가!

그러나 저자는 기적에 가까운 열정과 참신한 아이디어 그리고 인류가 축적한 다양한 학문을 동원하여, 그 수수께끼를 완벽하게 해결했다. 이제 지상에 남은 모든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사형을 언도받는다! 왜냐하면 인종간 대륙간의 우열과 발전 차이는 단지 상이한 자연환경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상징인 총, 균, 쇠는 대륙간 환경의 차이로 말미암아 유라시아인들만 소유하게 된 우연의 산물이다. 신대륙 원주민들이 그것을 만들어내지 못할 만큼 열등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던 것은 아니다. 만약 대륙간의 인종이 뒤바뀌었더라면, 어떤 결과가 발생했을까? 유라시아에서 태어난 인디언들이 총과 쇠와 병원균과 문자와 정치조직으로 신대륙의 백인들을 유린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까?

자, 이제 1만년 전의 인류가 유인원과 막 차별화되던 시점의 지구로 시간여행을 떠나 보자. 몇몇의 신대륙은 아직 인류가 도착하지 않은 빈 공간이며, 아메리카에는 배링해협을 건너 방금 도착한 인디언들이 적응을 준비하고 있다. 인류가 기원한 아프리카는 다양한 인종의 본산이며, 유라시아에는 오래 전에 정착한 인류가 터를 잡고 있다. 과연 1만년 전 자연환경의 차이를 제외하면 동일한 조건에서 출발했을 인류 중, 어느 대륙의 인류가 가장 먼저 문명을 창조해 낼까? 레이스는 시작되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모든 환경조건 면에서 유라시아가 월등히 유리했다고 본다. 유라시아는 다른 대륙에 비해, 길들이기 쉬운 야생동식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전학적 조사를 기초로 대륙별 후보가축과 후보곡물의 자료를 제시한 후 유라시아의 손을 들어준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원주민들의 두뇌와 유전적 기질에 대한 분석에 착수한다. 가축화 곡식화 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하더라도, 인간의 유전적 결함으로 길들이는데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경험에 의하면, 원주민들은 주위의 야생동식물의 습성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다. 놀랍게도 그들이 길들이는데 실패한 동식물은 현대의 전문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유라시아인들은 야생동식물의 식량화에 성공한 후, 문명사회를 만들어 냈던 것이며 다른 대륙을 훨씬 앞서 나갈 수 있었다. 따라서 아메리카 인디언과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백인들에게 유린 당했던 이유는 열등한 유전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불리한 자연환경에서 출발한데 원인이 있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지식여행은 대강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놀라운 세계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선, 인간에 의해 축적된 지식체계의 놀라운 장관을 체험할 수 없다. 세계의 위대한 석학들 가령 '스티븐 제이 굴드'는 즐겨 인간 종의 오만과 자존심에 칼날을 들이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굴드를 포함한 인간 종의 위대함에 대한 확신을 포기할 수 없다. 인간은 유일하게 지식의 세계를 개척한 종이기 때문이다. 이 책 '총, 균, 쇠'를 읽는다면, 누구라도 나의 생각에 동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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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05-02-19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가을님의 서재에 들렀다가 이 멋진 서평글을 '다시' 읽게 되는군요. 문득 들렀다가 멋진 책들로 빼곡한 님의 서재를 둘러보는 즐거움을 오랜 만에 또 다시 느낄 수 있어서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아울러 님의 서재에 꽂혀있는 많은 책들과 리뷰글 덕분에 제가 정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럼
 
강희제 이산의 책 1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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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너선 스펜스'의 책을 접할 때마다 항상 기대가 앞선다. 그의 작품은 어느 것을 막론하고 참신한 방법과 새로운 실험이 시도되기 때문이다. <천안문>에서 스펜스는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심미안으로 찬사를 받았고, <마테오리치 ; 기억의 궁전>에서는 전기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는 - 마테오리치의 기억의 세계에 배치된 이미지에 따라 리치가 살던 시공간의 세계를 재구성한 방식 -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그는 탁월한 실험정신을 발휘해 역사의 대중화에 기여함으로써, 수많은 문외한들이 아름다운 역사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또한 그는 끊임없는 영감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직업적 역사가들의 분발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의 모든 작품이 언제나 다양한 실험과 영감의 원천이었으므로, 이 책 '강희제'에 대한 나의 기대는 클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을 읽고 한참이 지난 지금도, 강희제의 인자한 모습과 위엄있는 육성이 또렷이 느껴질 정도로 그는 바로 내 앞에 있는 듯 하다. 도대체 역사의 시인, 스펜스가 어떤 농간을 부렸길래! 사실 강희제의 삶을 재구성한 이번 실험에서, 스펜스는 강희제가 독자들에게 직접 회고담을 들려주는 식의 '자서전적 전기'의 형식을 시도하였다. 혹 독자들은 역사학에서 시도된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 의해, 역사의 객관성이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할런지 모른다. 하지만 스펜스는 이미 중국사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사료를 섭렵함으로써, 역사적 객관성과 문학적 심미안이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있는 셈이다.

사실 전기에서의 일인칭 시점은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묘사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다. 마치 주인공의 인생 역정을 자신이 직접 고백하는 효과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스펜스가 이 책에서 왜 그러한 실험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중국의 유서깊은 관료체제 하에서 거의 모든 황제들이 인격체라기 보다 제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데 반해, 강희제는 끊임없이 번민하는 너무도 인간적인 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사실 황제로서의 강희제라기 보다, 인간으로서 강희제의 개성을 생생히 드러낸 스펜스의 기교야말로 이 책의 최대 묘미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내면세계에 더 가까이 접근함으로써, 그가 인자하고 자애롭고 합리적 식견을 가진 항상 고뇌하는 한 인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드라마틱하게 돌아가는 베이징의 정치세계 속에서 분노하고 번민하는 강희제의 모습은 우리 보통사람들의 감정과 다를 바 없다. 강희제 자신이 말하는 그의 인생역정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적이고 문학적이며 드라마틱하게 와 닿지만, 그것은 스펜스의 문학적 심미안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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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종말
존 호건 / 까치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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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인 제목답게 참신한 주제로 접근한 '존 호건'의 '과학의 종말'은 내게 충격 그 자체였다. '과연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지식의 한계란게 존재할까?' 책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해 온 사람이라면, 철학적 인식론의 냄새를 다분히 풍기는 이 의문으로 한 번쯤 고민했을 법하다. 과학저널리스트인 '존 호건'이 이 문제의 해결에 도전하였다. 그는 이름만 들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세계적 석학들을 인터뷰하며 지식의 한계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이 엄청난 프로젝트에 앞서, 호건은 과학적 지식의 윤곽과 경계를 명확히 설정하고자 한다. 소위 '과학의 전도사'들이 과학과 사이비과학으로 규정했던 이분법적 도식을 극복하고, 그는 이 사이에 '반어적 과학'이란 것을 위치시킨다. 반어적 과학이란 기존 과학의 범주에 포함돼 있었던 '우주론' '카오스 이론' '초끈이론' '인공지능이론' 따위로서, 경험적으로 입증 불가능한 범주에 속한 과학영역이다. 이들은 철학적 심오성을 추구하거나 이론적 심미성으로 치장되지만, 전통적 경험과학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열렬한 반어적 과학의 추구자들 중에는 지식의 지평을 무한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호건이 '참된 과학'으로 규정한 것은 경험적으로 입증가능하며 실용성을 띠는 교과서적인 과학이다. 호건이 보기에 대체로 환원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던 과학자들이 이 부류에 포함될 수 있다. 이들은 현대과학의 정신이랄 수 있는 실험주의에 투철하며, 전체적 윤곽보다 미세한 부분의 분석과 해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생명현상이나 인간의 심리현상까지 물리화학적 메커니즘으로 밝혀내려 한다. 당연히 반어적 과학자들은 심오한 철학을 무기로 그들을 공격한다. '환원주의자'들이라 비난하며!

반어적 과학자들의 공격은 거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과학적 진리추구가 종말에 다다르고 있다는 환원주의자들의 설득력있는 전망까지 비판한다. '과학의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그들의 전망은 너무도 놀라우며 비극적이다! 사실 인간이 추구해야될 지식이 바닥난다면, 인간에게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는가? 자 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논의의 요지를 따라가 보자.

진화생물학계에서 다윈의 유력한 후계자라 할 수 있는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론이상으로 생물계를 설명할 수 있는 강력한 이론은 더이상 발견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그에 의하면 생물계의 거시적 윤곽과 틀이 세워진 상태에서 이제 남은 일이라곤, 세세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식의 납땜질(토머스 쿤에 의하면 퍼즐맞추기)이라는 것이다. 다수의 이론 물리학자들 역시 동일한 견해를 표명한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발견에 뒤이어 통일장이론이 정립된다면, 이론물리세계의 궁극적 지식이 완성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인류의 역사가 무한히 지속될 지라도 납땜질식 퍼즐맞추기는 바닥나지 않을 것이다! 진리추구의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은 어찌보면 '대박 이론'을 노리는 원대한 야심가들이 아닐까?

그렇더라도 과학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이는 정말 씁쓸할 소식이다. 빅매치가 사라진 시대를 사는 권투광들의 절망을 생각해 보라! 인류도 아마 그러한 허무감에 시달리지 않을까? 더 씁쓸한 전망은 환원주의적 과학을 대체할 강력한 패러다임이 현재로선 없다는 것이다. 만약 '케이오 플렉서티'가 진정한 과학 즉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과학으로 '입증'된다면, 그것은 이미 환원주의에 다름아니다. 논리실증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경험주의까지 장착한 소위 참된 과학(환원주의)은 그런 점에서 종교보다 더 극악무도한 폭군일런지 모른다. 과학과 다른 패러다임이 과학의 틀내에서 효율적으로 판단된다면 그것은 과학에 다름아니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과학에 의해 배척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과학에 매료되고 그곳에서 탐닉하길 즐기는 내 자신을 보더라도, 그것이 종교보다 더 강한 흡인력을 지녔음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중독도 더 강력하고 자극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데, 하물며 과학에 종말이 가까워졌다니 인류가 허무의 세계로 추락할 숙명적 존재는 아닐런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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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지음, 신좌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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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식은 다양한 학문의 영역을 통해 추구된다. 각 학문간의 출발점은 다를지라도, 어디선가 교차하는 지점이 있게 마련이다. 놀랍게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접목이 요즘들어 활기를 띠고 있다. 심리학 인류학 경제학에 대한 진화생물학의 도전이 그것이다. 바야흐로 학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심리학자와 인류학자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행동패턴과 문화 그리고 환경요소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추적해 왔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자들은 인간과 무관하게 생물진화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자 했을 뿐이며, 거기에서 축적된 지식을 우연찮게 인간에게도 적용하게 되었다. 진화적 적응방식인 곤충과 포유류의 군집생활이 폭넓게 연구됨에 따라, 인간의 사회생활도 진화생물학이란 창을 통해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충돌의 예고편이었다.

한편 그 무렵 진화생물학계에 진리에 버금가는 가공할만한 무기가 발견되었다. '리처드 도킨스'에 의해 제안된 '이기적 유전자'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기적 유전자설은 개체의 이익보다 유전자의 자기복제가 우선이라는 가히 생물학계의 궁극이론이었다. 그 이론은 논쟁이 분분하던 학계의 다양한 가설들을 말끔히 교통정리하고, 수많은 모순들을 제거해 나갔다. '이기적 유전자'란 렌즈로서 과연 자연계의 모든 진실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을까?

그러나 쉽지 않은 문제가 등장했다. 유전자의 이기적인 자기복제가 제1명제라면, 어째서 개미와 꿀벌들은 여왕과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걸까? 인간세계에도 이타적인 사람들이 무수하지 않던가? 곤충사회의 경우 친족(여왕)을 통한 유전자의 복제가 자신의 직접 복제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이 판명됨으로써, 어렵지 않게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침팬지사회와 인간사회는? 인간이야말로 친족과 하등 관련없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까지 이타적이지 않던가?

바로 이 지점에서 생물학자들은 저유명한 경제학이론인 게임이론과 죄수의 딜레마를 도입한다. '뷰티풀마인드'의 주인공 '존 포브스 내쉬'가 일정부분 기여한 이론말이다. 결과는 정말 놀라웠다. 이기적 개체보다 이타적 개체에게 이익이 돌아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고, 이타적 협동사회야말로 제로섬게임이 아닌 모두에게 시너지효과가 분배되는 사회였다. 영리한 영장류와 초창기의 인간은 약간의 시행착오를 통해 그 놀라운 지식을 터득했고, 그들의 한 본성으로서 개발해 나갔던 것이다.

이 책 <이타적 유전자>의 저자 '매트 리들리'는 그 놀라운 진화과정과 인간등정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본성의 진화에 관한 그의 논리적이며 설득력있는 글담은 경제학자 심리학자 인류학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어쩌면 이들 사회학자들은 수세기동안 정립되어온 자신들의 이론이 한 순간에 폐기처분되지 않을까 두려워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매트 리들리'의 관심은 다른데 있다.

그는 인간이 협동을 추구하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유전자와 개체의 이익 때문이란, 인간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는 이타주의자들의 선천적 인간윤리에 대한 옹호는 당위로서 의미가 있을 뿐, 분명 진실은 아니라고 공박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간의 이타적 행위는 분명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계산된 본능에서 나올 뿐이다. 이는 너무도 게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사실 '리처드 도킨스'가 그랬듯이, 리들리도 이 엄청난 철학적 괴리감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단지 우회하여 이타적 행위의 당위성을 설파할 뿐이다. 인간의 사유권을 인정하고 거래를 활성화시켜 생태계보전에 힘쓰자거나, 지역공동체를 육성하자는 등 미래의 대안사회 건설에 대한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속물적인 진실의 간극을 메꾸기 위해, 자연과학적 방법론은 별 효용성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사회과학적 접근이 더 효율적일런지 모른다. 나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첫 충돌에서 자연과학이 완승을 거두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어지는 라운드에서 사회과학은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그들의 승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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