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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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서술하는 학자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감각적인 필치로서 역사의 심미주의를 추구하거나, 어떤 이는 탁월한 방법론으로서 뛰어난 개가를 올리기도 한다. 아마도 전자가 역사와 문학을 경계를 넘나들며, 역사를 스케치하는 조너선 스펜스라면, 후자는 단연코 진즈부르크에게 그 영예를 수여해야 할 것이다.

미시사라 불리우는 그의 역사학적 접근방식은 역사의 중심으로부터 접근하는 기존의 연구방법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아래로부터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전체의 핵심구조에 접근해 간다. 마치 셜록홈즈가 길거리의 담배꽁초에서 사건의 핵심 단서를 포착해내듯, 알려지지 않은 아주 사소하고 미세한 부분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실타래를 풀어나가듯' 사건을 질서정연하게 배열한 후, 문제의 해결에 다다른다. 따라서 탐정과도 같은 진즈부르크의 역사적 접근방식은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비록 과거를 살았던 옛 사람들의 이야기는 소설처럼 드라마틱하지 않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의 방식만은 추리소설처럼 극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서양 중세사의 영역에 속한, 이 역사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농부이자 방앗간 주인인 메노키오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진즈부르크의 메노키오는 '셜록홈즈의 담배꽁초'와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메노키오로부터 사건의 단서를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그가 매우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야심은 대단하다. 왜냐하면 평범한 중세농부의 이야기로부터 실타래를 풀어나가, 중세농촌 사회의 핵심적 구조를 파헤치는데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진즈부르크는 이탈리아 방앗간 주인인 메노키오 관련 자료를 중세교회의 종교재판 기록으로부터 찾아냈다. 그는 메노키오에 관한 기록을 꼼꼼히 훑어본 후, 메노키오의 언술과 소장장서 및 독서법까지 추적할 수 있었다. 메노키오의 독서법은 매우 중요한 단서인데, 왜냐하면 그의 독특한 사상체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서를 바탕으로 진즈부르크는 메노키오 즉 이탈리아 농부의 사상체계의 형성이, 바로 중세 농촌사회의 오랜 전통인 구전문화를 바탕으로, 기록문화를 재구성했기에 가능했다고 진단한다. 방앗간 주인을 통한 미시적 접근으로부터 시작해, 구전문화에 기초한 진보적 현실적 반기득권적 농민문화의 오랜 전통 즉 거시적 구조체가 드러나고 있다. 사소한 시작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마치 양쯔강에서 펄럭인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에 태풍을 몰고 오듯!

정말 놀라운 결말이다. 마치 반전이 백미인 뛰어난 스릴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방앗간 주인으로부터 시작해 중세사회의 핵심구조를 파헤친, 진즈부르크는 '역사를 추적하는 탐정'이라 불릴 만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이러한 역사학적 시도가 이탈리아에서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서양에서 미시사의 태동과 궤를 같이 한다.

반면에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여전히 한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정치경제사에 몰두하고, 정치상층 인물로부터 시작하려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한국사학은 너무도 진부하고 보수적으로 느껴진다. 서양이 일찍부터 주목해 왔던 일상사 심성사 미시사의 영역은 한국에서 아직도 미개척된 상태로 남아 있다. 아마 일반인들이 한국사를 외면하는 것은 상당부분 그러한 이유에 기인한듯 싶다.

그렇다면 역사의 대중화, 한국사의 대중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과제는 자명해졌다. 선택 역시 더욱 명료해 졌다. 기존의 접근방식을 고수해 역사를 학자군의 지적놀음으로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아래로 부터의 역사'를 추구함으로써 역사가 일반 대중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도록 할 것인지의 여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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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종교의 본질 - 학민글밭 4
멀치아 엘리아데 지음 / 학민사 / 198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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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과 원시인들에 비해 현대인들은 어떤 점에서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아마 많은 사람들은 현대인들이 소유한 '합리성'이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합리성으로 말미암아 우리 선조들은 무지몽매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고도의 과학을 발전시킴으로써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현대인은 고대의 종교적 인간이나 원시인들의 삶과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우리 '인식의 틀'은 저들의 주술, 종교행위, 식인풍습에 대해 야만성과 미개함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러나 야만적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삶과 세계관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삶의 방식을 우리 선조들이 포기했기에 현대인들은 진정한 자유를 상실하게 된 허무한 존재들이라 한다면 과연 지나친 억측일까?

이 책 '성과 속'의 저자인 탁월한 종교학자 '멀치아 엘리아데'는 이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는 입장을 피력한다. 우리의 삶이 가진 근본적인 결함들을 그 근거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현대인들의 삶이 원시인보다 못하다고 보았을까? 엘리아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먼저 현대인들이 고대의 종교적 인간이나 원시인들과 어떻게 다른지 추적해 보자. 현대인들은 원시인들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성화된 삶과 종교적 세계관을 완전히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 그들은 원시인들의 삶과 사고방식이 산업화와 기술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신념아래, 과거의 원시적 삶을 포기하고 종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산업화와 기술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더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대가란 무엇일까? 먼저 현대인들의 합리적 세계관이 가진 모순부터 짚고 넘어가자. 우리들의 합리적 시각은 원시인들이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 삶에 과거의 원시적 잔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그 사례들은 장례식 결혼식 입사식 집뜰이 집의 구조 등등 일일히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다.

이러한 과거의 유습을 우리가 늘상 지니고 있는 까닭은, 분명 그것도 효율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원시적 종교적 잔재가 어째서 이로운 측면이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엘리아데는 답한다. 원시인들은 현대인들이 불결하다고 느끼는 그들의 삶을 성화함으로써, 우주를 창조하는 신들의 작업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절대적 자유를 획득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 모두를 폐기한 대가로 점점 규제에 속박되고 위안을 얻지 못하는 허무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원시인들의 성행위는 풍요를 위한 신적 결합의 모방이었지만, 현대인들의 성행위는 은밀하고 규제가 따르는 것이 돼 버렸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에 무엇이 필요한가? 자유를 상실한 그들이 구제될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놀랍게도 엘리아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원시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세계에 대한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즉 현대인들의 삶이 원시인들의 세계이자 신들의 창조행위와 마찬가지로, 우주적인 맥락으로 위치되기 위해 '상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원시인들의 삶을 모방하기 보다, 원시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정신적 지평의 확장을 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인과 원시인 간의 화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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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제와 프랑스 혁명 - 프랑스혁명200주년기념총서 2
또끄빌 지음, 이용재 옮김 / 일월서각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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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이 단계는 구체제의 봉건주의적 생산양식을 혁파하고 부르주아지의 주도에 의한 자본주의 및 시민사회의 확립을 주된 과제로 설정하였다. 구체제의 봉건제도를 혁파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나름대로의 진보성을 띤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이론가들 역시 이 혁명의 역사적 필연성과 진보성 등에 의의를 부여한 바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전형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모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신생 개발국가들의 혁명은 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른바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된 제3세계 및 아시아 제국가들의 혁명은 해당 국가들의 후진성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미성숙된 상태에서 곧바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이행하는 경로를 거쳤다. 북한 중국 베트남의 혁명 역시 인민민주주의 경로를 거쳤고, 산업화의 과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더불어 긴급한 과제로 부상하였다. 프랑스혁명(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과 달리 이 혁명의 특징은 혁명의 주도권이 부르주아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로 넘어갔다는 점, 노농동맹을 통해 진보적 개혁정책(토지개혁 등)이 실시된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민주주의혁명이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고찰로 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은 프랑스혁명의 실제와 이론을 생동감있고 조리있게 펼쳐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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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칼 세이건 지음, 이상헌 옮김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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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과학의 전도사'로 지칭되고 있는 '칼 세이건'은 미국을 대표하는 지성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과학 역사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저술활동으로써,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미신적 사이비과학을 척결하는데 생애를 바쳤다. 그의 기념비적 대작인 '코스모스'는 가장 위대한 과학서적의 하나로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죽음의 문턱에 접어든 말년에 저술된 이 책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과 '에필로그'는 과학에 대한 끝없는 애착과 열정을 통해 과학의 대중화를 마지막으로 부르짖은 노작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제갈공명이 죽은 후 그의 목각인형이 적들을 몰아냈듯, 세이건은 말년의 노작들을 통해 사이비과학과 최후의 결전을 선포했던 것이다.

칼 세이건이 주창하는 '과학의 대중화'는 한 명의 위대한 과학자보다, 과학적으로 깨인 다 수의 대중들을 양산해낼 수 있는 사회제도적 구조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노벨상 수상자를 여럿 배출해왔으되, 인구의 대다수가 과학맹인 미국은 더이상 희망이 남아 있는 국가가 아니다. 생각해 보라! 대다수의 국민이 과학보다 UFO, 비과학적 종교, 점성술, 심령술, 빅풋, 네스호의 괴물, X-File류의 드라마에 관심을 가진다면 과학적 사고방식이 들어설 자리는 얼마나 좁아지겠는가? 세이건은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이러한 사이비과학들의 헛점을 논리적으로 공격할 뿐만 아니라, 과학의 대중적 보급을 위해서도 드라마틱한 과학사적 발견이나 자연과 우주의 경이로움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자고 제안한다. 그에 있어 진정한 유토피아는 다 수의 국민이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무장하고 합리적으로 일을 해결하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과학만이 유일한 대안인가? 과학이 세이건에게 신앙과도 같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과학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 종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 증가하는 것은 과학에 치명적 결점이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과학에도 결점은 존재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이 원자폭탄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게놈프로젝트가 생명에 대한 조작의 가능성을 뒷받침했듯, 분명 과학에도 윤리가 수반되어야함을 역사는 명백히 입증해 주었다. 그래서 종교인들과 과학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째서 과학은 종교를 비판하려 드는가?'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종교는 자체의 결점을 시정하기 위해 열린 마인드를 유지해 왔던가? 세이건은 과학과 종교와 같은 사이비과학의 본질적 차이를 열린 마인드에서 찾고 있다. 과학은 모든 이들에게 문호가 개방돼 있고, 오류수정의 메커니즘이 과학 내에서 가동하고 있으며, 자신을 회의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무엇보다 겸손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신적 사이비 과학은 어떤가? 그것들은 언제나 독선으로 가득차 있고 자신에 대한 공격을 논리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할 뿐이다. 진화론 지동설이 교황청에 받아들여 지기 까지 수세기를 허비하지 않았던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과학이 어둠 속을 밝히는 영원한 촛불로 남을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과학보다 더 나은 패러다임이 언제 등장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건데 과연 과학보다 세계를 더 잘 해석하고 더 성공적인 패러다임이 존재해 왔던가? 종교전쟁으로 수 십 만의 사람들이 죽어갈 때, 과학은 새로운 식량과 기술의 개발로 수 많은 아사자들을 구출해내지 않았던가? 과학 역시 많은 오류를 범해왔지만, 그 자체 내에 자신의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가동되는 이상, 그리고 과학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현존하지 않는 이상 아직도 과학은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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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12-24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을 대체할 패러다임, 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과학은, 우주나 자연이 움직이는 방향과 법칙을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그 원리를 이해하려는 학문을 대체하겠다니, 뭘로 대체를 한다는 건가요? 마치, 경제 연구에 있어서 경제학을 대체할 패러다임을 찾겠다든가, 소설에서 문학을 대체할 패러다임을 찾겠다던가, 그런 말처럼 들리는데요?

가을 2007-12-26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저처럼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도 드물 것 같아요. "과학의 종말"이란 책을 읽고 제가 썼던 서평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사실 저는 '리처드 도킨스' 같은 이른바 환원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추종자거든요. 종교인들이 주로 쓰는 저의 표현을 님께서 잘 짚어내신 것처럼, 저 역시 과학처럼 우주 자연을 해석할 수 있는 학문은 여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만약 등장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과학이겠죠. 님의 지적은 정말 일리 있는 지적이고, 저 역시 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시간되면 꼭 님의 서재에 들르겠습니다^^
 
마녀의 문화사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은주 옮김 / 다빈치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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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이야기는 서양 중세 역사의 단골메뉴이다. 그러나 중세의 소외집단으로서 문둥병자, 유대인, 창녀 등과 함께 중세의 암흑기를 뭉뚱그려 설명할 때 종교와 결부된 부차적 지위에서 조명받았을 뿐, 그 자체로서 마녀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서적은 드물다. 이 책은 마녀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매우 유익하다. 물론 그것이 마녀의 실존여부에 관련된 것이든, 혹은 중세의 역사에서 점했던 마녀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에 관한 정보이든 말이다. 칼세이건은 그의 노작'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마녀를 실존하지 않았던 역사의 희생양으로 설정함으로써, 과학의 대중적 보급과 마녀신앙의 허구를 결부시킨 바 있다. 물론 이 책 '마녀의 문화사'는 마녀의 실존여부보다도,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마녀가 가지는 사회사적 의의를 규명하는데 목적을 둔다. 마녀는 중세의 종교적 권력이 강화하는 과정에서 설정된 희생양이었지만, 그러한 전통이 중세를 끝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느 사회에서나 기득권을 가진 계층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희생양을 설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서양 중세기의 마녀사냥과 너무도 흡사한 방식으로서 마녀사냥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냉전시기의 매카시즘은 빨갱이 사냥을 빙자한 마녀사냥 몰이로서 너무도 유명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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