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유리를 녹여
다시 온전한 덩어리로 만드는
불길인 걸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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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말의 두려움도 없는 실천, 아무런 이득과 안락도 가져다주지 않는 노고, 모든 비난과 단죄, 억압과 배제를 뚫고 나아가는 용기, 지배자와 지배의 법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위험은 충실성이 요구하는 궁극의 내기다. ‘네 확신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라. 그렇지 않으면 예속과 복종만이 있을 것이다. 사유란 바로 그런 충실성, (불)가능한 것에 대한 확신과 용기가 법과 현실의 잔혹함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결연한 충실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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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희망의 희미한 빛은 어둠 속에서만 나온다. 시대의 어둠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희망을 위한 고민과 몸짓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언뜻 보면 그 몸짓은 아주 미미해보인다. 게다가 절망이 지배하는 곳에서 불가능을 향한 몸짓은 모두 ’미친 짓’으로 치부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미친 짓‘이 없다면 절망은 끝까지 절망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한 절망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서는, 어두운 시대와 작별하기 위해서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만들어내는 실천, 미친 짓으로 치부되는 과감한 주체적 실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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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라>


옛 생각이 난다.

학부 1학년 '맑스와 헤겔' 수업 F에서 시작해 대학원까지 이어지는 서사가 있는데, 쓰기 귀찮다. 나한테 여전하다고 하셨는데, 암튼 선생님 글 너무 조아. fidelity 충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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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의 대가를 감수한다면 사유와 동행하는 삶을 구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바디우가 <사르코지는 무엇의 이름인가>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그때 필요한 것은 객관적인 조건이 아니라 사유로 나아가는 결단과 그 결단을 유지하는 용기다.
 결단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자동성이 지배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종의 단절이 필요하고, 그 단절은 결단을 통과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내리는 결단은 종종 삶의 방향을 바꾼다. 사유를 향한 결단은 자동성과의 부분적인 결별이다. 그로써 삶은 사유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번의 결단이 아니다. 그 결단이 다른 결단, 자동성으로 복귀하는 결단을 통해 뒤집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다. 그 결단을 지속하고자 할 때 우리는 장애물에 부딪히고 그 장애물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말하자면 용기란 ‘지속의 용기’인 셈이다. 자동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유를 지속할 때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다르게 구축된다. 자동성이 지배하는 일상과 거리를 두는 새로운 일상이 나타날 테고, 그 일상 속에서 사유의 실천이 펼쳐질 것이다. 삶을 바꾸는 것은 용기다.

<사유하라>


선생님께 많이 배웠던 기억이 난다. 배운 대로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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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 이후 지금까지 칠갑산, 내연산 다녀왔다. 
어제 당일치기로 포항 가서 등산하고 계곡 트래킹.

직업 만족도와 실거주 만족도가 하늘을 찌른다.
본질이 해결되니(좋아하는 일로 먹고살기)
비본질은 필요가 없고 관심도 안 간다.

말로는 바다 가고 싶다면서
몸뚱이는 산으로 향하는 인간.

근데 왜 방학 때 월급 줄어드냐. 
방학 때만 맛난 거 사주는 사람 있음 좋겠다.
베이징덕. 분명 13에 먹었었는데 언제 20됐지. 아 비싸-_ㅠ
방학 때 월급 안 줄어들게 해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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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삶에서 추방당한 상황을 끝내겠다는 것. 스스로를 유배시키고 힘에 부치는 일에 도전하는 걸 그만두고 덜 대단한 것에 만족하겠다는 것.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성을 가진 존재답게 인생을 다시 한번 추스르고, 어두운 그림자나 분노는 완전히 지워버리겠다는 것. 고집을 부리려거든 조용히 부리자. 평화롭게. 당당한 관조, 포니아가 즐겨 하는 말처럼, 그게 제격이다.


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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