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 여덟 가지 테마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앙투안 콩파뇽 외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다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사람을 다르게 우러러 볼 수 있는 책, 프루스트의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는 수많은 작가들의 불면증 치료제(?)로 활용되어 온, 책을 펴고 한페이지를 다 읽기전에 잠들어버린다는 악명 높은 책이다. 금정연의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에는 이 책에 대한 서평에 이 소설이 왜 읽다 잠들수 밖에 없는지 다양한 변명(?)과 예시들이 들어있다. 소설가 김연수는 신년 계획을 세우고 매일 자기 전에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페이지를 읽겠다고 다짐했지만 1월 1일 부터 3월 4일까지 그가 읽은 건 고작 1권 47페이지 였다고 고백하면서 이런 탄식을 한다. "빌어먹을 저녁식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 외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는 이런 대화가 오가기도 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때?"
"당신은 읽었어요?"
"아니, 나는 교도소에도 간 적이 없고, 어딘가에 오래 은신할 일도 없었어. 그런 기회라도 갖지 않는 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들 하더군."


이렇게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힘들만큼 어려운 책이니 내가 이 책을 사놓기만 하고 안 읽었다는 것에 그렇게 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진 않아도 되겠지? 나도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권의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조용히 그대로 덮어두고 아직까지 안펴봤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 팔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꼼짝없이 갖혀있어야 한다거나, 교도소에 갈 일이 생긴다면 완독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을 펴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 좀 더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덕분에 책꽂이에 고이 꽃혀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꺼내들고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으니 이 책의 효용이 있긴 한 셈이다.  

프루스트와 함께한 여름 은 8명의 전문가들이 시간, 등장인물, 프루스트와 사교계, 사랑, 상상의 세계, 장소들, 프루스트와 철학자들, 예술 등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다각도로 분석한 책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난해한 책이 어떻게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프루스트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책에 자세히 나와있다. 


"긴 세월, 나는 일찍 잠에 들었다." 

이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문장이다. 이 문장의 그 첫 번째 단어와 첫 번째 음절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집약하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실 3,000페이지에 가까운 '긴' 소설이다... 시간이 우리의 인생 위로 어떻게 지나가는지, 우리를 어떻게 변모시키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시간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는지 보여주기를 희망했던 프루스트에게는 이만한 길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p.25>



프루스트는 '시간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글로 옮기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과거 어느 때를 기억하며 그 기억을 따라 떠오르는 생각들을 모두 소설로 나타낸 것일까?
현재와 과거의 충돌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현재도 과거도 아니지만 일종의 시간성의 본질이 되는 어떤 시간 속에서 길을 찾게 한다<p.54>

책에는 수많은 영화나 책에서 등장하는 그 유명한 마들렌에 관한 구절도 나온다. 


침울한 하루를 보내고 그 다음날도 울적하리라는 생각에 짓눌려 있던 나는 곧 기계적으로 차 한 숟가락에 마들렌 한 조각을 얹어 부드럽게 만든 뒤 입술에 가져다 댔다. 케이크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을 건드린 순간 나는 전율했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뭔가 경이로운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감미로운 희열이 나를 엄습하며 고립시켰다. 그것은 이내 사랑이 작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어떤 소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인생의 부침은 무심하게, 실패는 대수롭지 않게, 그 인생의 짧은 시간은 허망하게 느끼도록 해주었다. 아니, 오히려 이 본질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 자신이 보잘것없고 사소하며 언젠가는 죽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p. 186 >


맛있는 마들렌 한 조각에 대한 희열을 이런 수많은 단어를 써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하지만, 마들렌으로 인해 인생의 침울함, 인생에 대한 허망함 조차 쫓아버릴 수 있는 화자를 보며 나도 마들렌 한 조각 먹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 잡혔다. 차 한잔에 동그란 마들렌 한개를 먹으면 지금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고통이 훅하고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을 읽더라도 여전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려운 소설이다. 하지만 소설의 다양한 관점과 숨어있던 매력을 알게 되니 좀 더 강한 적극성을 가지고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토록 긴 소설이 짧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장 콕토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 읽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나도 프루스트의 문장 안에서 헤매이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매혹되고 싶다. 어디 한번 도전해볼까?

프루스트의 매력을 알려주는 이 책과 함께 용기를 가지고 당신도 잃어버린 시간을 한번 찾아보는건 어떨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프리쿠키 2017-09-2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시간을찾아서..
소장하고 있는 것만으로
다림냥님은 대단하신겁니다.^^

다림냥 2017-09-24 23:06   좋아요 1 | URL
ㅋㅋ 사실은 1,2권만 가지고 있어요ㅋ 다 읽고 나면 그 다음권도 사야지 하고선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어요ㅋㅋ 이제 한번 진짜로 읽어봐야겠습니다ㅋㅋ
 
거미집 짓기
정재민 지음 / 마음서재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미줄은 두가지 종류의 실로 돼있데. 가운데를 향하는 직선의 실과 그 똑바른 실들을 연결하는 둥근 실. 똑바른 실을 방사실이라 부르고, 원형의 실을 나선실이라 불러." < p.371>


우리집 앞 계단 복도 창문에서 거미 한마리가 열심히 집을 짓고 있었다. 벌써 얼기설기 만들어놓은 거미줄 사이로 벌레 몇마리가 잡혀 거미에게 잡혀먹은 듯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빈집도 아닌 곳에서 거미가 이렇게 열심히 거미집을 짓고 있다니, 덕분에 나는 바로 앞에서 실시간으로 거미가 엉덩이에서 실을 뽑아내며 왔다갔다 거미집의 윤곽을 완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앙에서 바깥으로 방사형으로 왔다 갔다 이어준 다음, 그 줄을 뱅글뱅글 돌면서 그물처럼 이어준다. 소설이 거미집 짓기 와 같다더니, 이 소설 과연 그러네. 무방비 상태로 책을 읽다가 점점 작가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책을 덮었다. 
이 작가 대단하군. 책을 읽고나서 작가 소개를 다시 찾아봤다. 정재민 이라는 신인작가였고, 공과대 출신 작가였다.  꼬박 4년을 들여 이 소설을 완성했단다. 난 이 소설이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한순간도 지루하게 늘어지는 부분 없이 긴장감을 유지하며 팽팽하게 이어가다, 마지막엔 정신이 얼얼하도록 뒷통수를 때리는 책이다. 책을 읽는동안 빼두었던 책의 띠지를 보면서 비로소 그말에 공감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이야기가 시작된다더니 정말 그렇다. 

거미집 짓기 는 1963 년 도계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와 2012년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차례로 교차되며 진행된다.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두개의 이야기기가 진행되다가 어느 시점부터 겹쳐지기 시작하고 거미의 나선실처럼 꼼꼼하고 팽팽하게 이어진다. 2012년, 소설가 이재영은 박물관에서 우연히 얼굴에 화상 입은 남자를 보고 인간적인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잠시 인터뷰를 하자고 말을 걸어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하다 어떤 부분인지 모를 부분에서 남자는 흥분하여 소설가의 멱살을 잡고 테이블에 내다 꽂아버린다. 이유없이 당했다고 생각하는 소설가는 호기심 반, 분노 반으로 남자가 사회복지사 라는 정보만 가지고, 도대체 이 남자는 누구이며,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라는 의문을 품으며 서울의 복지관들을 뒤져가며 남자의 정체를 찾고 접근해 가기 시작한다. 

1963년의 탄광촌에는 서희연이라는 탄광촌에 어울리지 않는 하얗고 예쁜 여자아이가 있다.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며, 어머니는 왠일인지 바깥출입 하는 것을 두려워해 딸인 희연이 시장보는거 부터 새벽에 나가 물떠오는 것까지 많은 일을 한다. 집들은 따닥따닥 붙어 여섯집이 한지붕을 썼고, 다른 집과의 경계가 나무판자 하나여서 옆집에서 하는 말이 다 들릴정도로 가족의 사생활이 없는 공동체 생활이었다. 아빠는 술 먹으면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희연은 그런 아빠가 싫었다. 

이런 전혀 다른 시간적 배경으로 시작해서 2012년의 소설가는 화상입은 남자의 이름은 '정인' 이며, 봉천동의 한 복지관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자원봉사자로 지원해 그 남자에 대해 캐내기 시작하고, 63년도의 희연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성인이 된다. 똑같이 시간이 흐르는 만큼 소설 중반이 넘어가면 이 두 시대의 인물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소설 속 인물이 품었던 욕망과 숨은 진실이 무엇인지 아주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얘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의 심리나 생각들이 심도있게 묘사되는데, 그런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특히 좋았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숨겨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섬뜩한 생각, 그런 무섭고 깊은 심리들을 은근하게 잘 풀어놓은 부분들이 마음에 들었다. 


"거미가 집을 지을 때 맨 처음 하는 일이 튼튼한 곳을 골라 직선으로 연결하는 거야, 작가와 독자 모두 인정할 수 있는 튼튼한 사실들. 사실이 아니라도 좋아. 공감할 수 있는 감정들. 작가는 마음에 드는 재목들을 모으지만, 자신도 왜 거기에 끌리는지 알 수는 없어. 거미가 해야 할 일은 그것들을 서로 연결해나가는 거야. 그런데 무엇이 관계 없는 것들을 끈끈이 옭아맬까? ... 줄이 탄탄해지는 장력은 어디서 나올까?.... 사람들이 거미집을 볼때면 줄을 보는 것 같지만, 동시에 줄과 줄이 만드는 공간도 보는거야. 바로 그 빈공간을 채우는 것이...." 
<p.372>



소설 속 인물 영훈이 '거미' 라고 부르는 소설가 여자가 나온다. 소설을 쓰는 것은 거미집 짓는 것과 같다는 말은 그 여자가 하는데, 아마도 정재민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소설이란 것이 뭘까 하는 고민을 거미라는 여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에 녹여 담아낸 것 같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소설가 이재영은 소설을 더 잘 쓰고 싶어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취재하고,  그 속에 숨은 동기나 욕망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방법이 좀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만큼 소설이 인간의 숨은 욕망을 건드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에 대해 말할 시간이다. 그러려면 몇 걸음 앞에 있는 상실에 대해 말해야 한다. 
잃은 뒤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길을 가다 구덩이에 발이 빠지는 순간은 예상할 수 없이 찾아온다. 아픈 곳을 문지르며 몇 걸음 걸어 나간다. 옷을 털고 돌아보니 구덩이는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이제 벗어났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뒤돌아 걸음을 내딛는다. 슬픔은 그렇게 시작된다. 
< 거미집 짓기 p.459>



사람이 사람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같은 인간이지만 내가 겪지 못한 무언가를 겪은 인간을 정말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소설은 그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소망하며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인생에서 우연히 맞딱뜨리는 내 속의 섬뜩한 감정, 그것을 낯선 자가 쓴 소설에서 발견하면 무서우면서도 반갑다. 그래서 소설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이 거미집 집기라고 했던가. 길을 가다 거미줄에 걸리면 벌레 뿐 아니라 거미보다 몇 백배는 큰 인간도 당황하며 허우적 거린다. 그 끈적하게 달라붙는 거미줄의 느낌은 내가 소설에서 숨어있던 익숙한 감정을 만났을 때의 느낌이요, 잘 만들어진 거미줄을 보며 느끼는 놀라움은 그 치밀한 얼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부분들이 다 맞아떨어진 소설 같아서 나는 이 소설이 무척 마음에 든다. 정재민 작가가 얼른 다음 소설을 또 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용돌이
전건우 지음 / 엘릭시르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용돌이 하면 우선 어릴 적 읽었던 이토 준지의 공포 만화가 떠오른다. 만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왜 기꺼이 찾아 보고선 무서워했던건지. 덕분에 소용돌이라는 말은 공포와 혐오라는 말과 연관되는 단어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동명의 제목으로 나온 전건우 작가의 장편소설 소용돌이, 또 그때의 무서운 기억이 떠오르려나 하는 생각으로 책표지를 봤는데 왠걸 귀엽다. 달팽이 같기도, 모기향 같기도 한 소용돌이 위로 집들이 '히히히' 같은 모습으로 지어져 있다. 의도한걸까, 우연일까 궁금해하며 책을 읽었는데, 읽으면서 결론을 내렸다. 일부러 의도한거였구나ㅋㅋㅋ 


이웃님들이 밤에 읽으면 무섭다고 해서 일부러 밤시간에만 골라서 읽었다. 오랜만에 소름끼치는 공포를 맛보고 싶기도 했고, 변태같을지 모르나 난 최대로 그 무서움을 즐기고 싶었다. 이 책의 소재는 한이 서린 물귀신 이야기다. 시퍼런 바다나 깊은 강을 보면 아찔한 공포를 느낄때가 많기에, 물속에서 까만 머리를 풀어해치고 밑으로 마구마구 끌어당길 것 같은 물귀신은 섬뜩한 소재이긴 하다. 소설 초반 죽음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민호의 이야기를 읽을때 섬뜩해서 주변에서 누가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깜짝 깜짝 놀라며 읽었다. 하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공포보다는 어렸을 때의 친구들이 모여 함께 떠난 모험담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서울에서 죽음에 관한 사진을 찍어 돈을 벌어 먹고사는 '나'(민호)는 어느 날 친구 길태에게 유민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어릴 적 절친 독수리 오형제 중 하나였던 유민의 죽음은 충격적이기도 했고, 뜬금없기도 했지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광선리로 향한다. 1991년 엄마, 아빠가 이혼한 후 갑자기 외할머니댁에서 살게된 민호는 광선리에 1년동안 지내면서 친구들과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다. 추억이라기엔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한 기억이긴 하지만. 그 기억이 너무 끔찍해 다시는 광선리에 발도 들이기 싫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이끌려 유민의 장례식장에 방문한다. 거기서 그간 잊고 살았던 독수리 오형제 친구들과 재회하게 된다. 창현, 길태, 명자, 유민, 민호 이렇게 다섯은 늘 함께 붙어 다니던 독수리 오형제였다. 그들에겐 공통적으로 광선리에서의 끔찍한 악몽이 있다. 


소설 소용돌이 는 1991년 그때의 사건과 현재 다시 뭉친 친구들에게 닥친 사건을 교차로 보여주며 어릴적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났음을 보여준다. 어릴적 의붓아빠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해 늘 온몸에 상처를 달고 살았던 유민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오형제는 솥뚜껑 저수지의 물귀신을 불러내어 유민의 아빠를 죽여달라고 주문을 외운다. 아이들의 어설픈 주문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물귀신이 깨어나 유민의 아빠는 방안에서 온몸이 물로 가득찬 채 익사하고 만다. 그 뒤로도 물귀신은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사람을 여러명 죽였지만 독수리 오형제는 귀신을 불러낸 것이 자신들의 짓이라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고 다들 마음 한켠에 죄책감과 공포를 안은 채 살아왔다. 


하지만 다시 만난 유민의 장례식장에서 그 악몽이 다시 재현되기 시작한다. 일단 유민부터가 물귀신에게 당해서 익사체로 발견되었고, 이후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익사로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물귀신의 공포가 되살아났음을 예감한 친구들은 다같이 모여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아나가기 시작한다.


소용돌이는 공포소설 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험소설 이라 일컫고 싶다. 초반의 공포 분위기가 뒤로 갈수록 스펙타클한 아이들의 모험 만화를 소설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명색의 귀신인데 좀 신비스러운 맛이 없고, 사람들앞에 너무 대놓고 나타나는가 하면, '히히히', '어디에 있니' 라며 노래를 부르며 희생자를 찾아다닌다. 개성강한 주인공 4명과 사기꾼 삘의 퇴마사 남법사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스토리가 흥미롭긴 했지만, 별로 무섭진 않았다. 물론 내가 생각보다 간이 커서일수도 있다ㅋㅋ



생은, 산다는 것은 이리도 고통스럽다. 그래도 살아가는 이유는 함께하면 좋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 소용돌이 p.493 >



작가의 말을 보면 

"세상의 절반은 어둠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빛이 깃들어 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단다. 어둡고 공포스러운 이야기 속에서도 밝은 빛이 깃든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던 작가의 바람이 이 소설에 투영된 것 같다. 물귀신이 휘젓고 다니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도 결국은 빛이 깃든 이야기로 잘 마무리 지은 걸 보면 말이다. 띠지를 보면 '열세 살때의 친구같은건 다시 생기지 않는다' 라는 카피가 있다. 정말 그때처럼 순수하게 사귈 수 있는 친구들은 앞으론 절대 없겠지. 13살 이후로 25년간이나 각자의 삶을 살다가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다시 뭉쳐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며 공동의 적을 향해 싸울 수 있다는 것! 공포소설 에서 이런 아름다운 우정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날 무섭게 하려면 좀 더 쎈! 이야기가 필요한 가 보다ㅋ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9-21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1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 황금부엉이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펼쳐들자마자 눈을 의심케 하는 오타 투성이의 초등학생 일기 수준인 찰리 고든의 '경과 보거서'를 볼 수 있다. 찰리고든은 33살의 어엿한 어른이지만, 아이큐 68의 저능아 어른이다. 한 대학교에서 실험실 쥐 앨저넌의 뇌를 수술해서 쥐의 지능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수술에 성공하였고, 그 기술을 처음으로 인간에게 적응해보기 위한 적임자를 찾았다. 찰리는 배우고자 하는 동기가 아주 뛰어난 저능아였기에 운좋게도(?) 수술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찰리는 수술 전 천재 쥐 앨저넌 과의 미로찾기 게임에서 단 한번도 이길 수 없었지만, 수술 후 앨저넌과의 미로게임 따위는 가뿐히 이길 수 있는 천재가 되어간다. 

< 앨저넌에게 꽃을 >은 찰리 고든이 수술을 받기 전인 저능아 시절부터 수술을 받고 나서 엄청난 지능을 지닌 천재가 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 또다른 변화를 맞이하게 되기까지의 모든 경과보고서가 담긴 책이다. 날짜상으로 따지면 3월부터 11월까지인 고작 8개월 남짓의 시간동안 이 세상 사람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바보와 천재사이를 벼락같이 오간 그의 이야기는 SF 소설 의 탈을 쓴 휴먼스토리이다.  


일반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으며, 따라서 원인도 두가지 라는 점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빛에서 빠져나올 때와 빛 속으로 들어갈 때이며, 이는 육신의 눈 뿐만 아니라 정신의 눈에도 해당된다. 이 점을 기억하는 사람은 시야가 흐릿하고 혼란스러운 사람을 보았을 때 쉽게 웃지 않을 것이다. 먼저 그 사람에게 더욱 밝은 곳에서 지내다가 벗어나서 어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를 물어보거나, 아니면 어둠 속에서 있다가 대낮의 빛을 향해 고개를 돌려서 지나치게 밝은 빛을 봐서 앞을 못 보는 것인지 물어볼 것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조건과 존재 상태에 있으면 행복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가엾게 여길 것이다. 저 아래에서 올라와 빛 속으로 걸어가려는 자를 보고 웃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웃음은 빛에서 나와 동굴로 되돌아가려는 자를 맞이하는 웃음에 비해 더욱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플라톤 [국가], 앨저넌에게 꽃을 p. 5 >



빛과 어둠에 관한 플라톤의 글이 이야기 시작 전에 서문처럼 쓰여져 있다. 책을 읽으면서 줄곧 이 글의 의미심장함을 느꼈다. 
바보가 갑자기 천재가 되면 어떤 현상이 생길까? 예를 들어 내가 불쌍히 여기던 옆집의 동네 바보가 어느 날 천재가 되어 돌아와 20개 국어를 하고, 듣도보도 못한 이론에 관해 나에게 묻기 시작한다면 나의 반응은 어떨까? 거기다 그동안 그가 알아듣지 못할거라 생각하며 막 내뱉었던 말을 그가 다 기억해내서 "사실은 그때 니가 날 비웃고 무시했던 거구나." 하고 나온다면 난 좀 무서울 것 같다... 

찰리 고든은 저능아로 태어나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고, 어느 빵가게에서 청소 등의 잡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빵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그가 순진하고 착한 바보라서 마음껏 놀려먹으며 지낸다. 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웃어주는 것이 좋다. 그들이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웃어주는거라 생각하며 '좋은 칭구들'이라 여긴다. 찰리 옆에서 "야, 너 찰리 고든 같은 짓 좀 하지마." 라며 자기들끼리 찰리를 놀리며 조롱하는 말을 해도 찰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찰리가 극비리에 뇌수술을 받고 조금씩 지능이 상승하기 시작한다. 천천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들이 그때 나를 비웃었던 것이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웃고만 있었구나.' 그런 생각들이 찰리를 괴롭히고, 외롭게 만든다. 변화는 빵가게 동료들에게도 찾아온다. 바보같았던 찰리가 어느 날부터 눈빛이 달라지고 똑똑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자신들이 모르는 어려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찰리에게 두려움과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동료들은 이제 스스로 찰리를 피하며, 같이 일하기 싫다고 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정신적 고향이었던 빵가게에서 쫓겨나듯 그만두게 된 찰리는 똑똑해짐과 동시에 외로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찰리는 계속적인 심리 상담으로 어슴프레하기만 하던 머릿속 기억을 되짚어가며 자신이 왜 부모에게 버림받았는지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가기 시작한다. 그 속에서 자신의 부모님이 자신을 대하던 태도와 여동생과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자신의 글자 선생님이었던 키니언 선생님이 점점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저능아 일때는 어른으로만 보였던 그녀가 생각보다 어렸다는 것에 놀라며 그녀를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면 머릿속이 윙윙거리며 공황장애가 온다. 자신에게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왜 저능아 찰리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와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드는지, 찰리는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의 모든 지적 능력을 총 동원해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소설을 읽으면, 어눌하고 오타투성이었던 그의 글이 시간을 거듭할수록 점점 유려해지고, 나중에 가서는 이해하기도 힘든 고차원적인 말도 쏟아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을 수술했던 교수와 박사도 찰리와의 대화에서 지식의 한계를 드러내고, 찰리는 그들도 결국엔 전문성에 한계가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지라는 어둠속에 갖혀살던 찰리가 지식이라는 빛을 알게되고, 그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록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가 드러날까 두려워하고 그를 피하게 된다. 소설 < 앨저넌에게 꽃을 >은 바보가 단시간에 천재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본인의 심리적 문제, 주변사람들의 변화 등을 잘 짚어내고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아프다. 어쩌면 그냥 모르는게 약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저능아였던 찰리는 주변의 놀림을 당할지언정 그래도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겼으나 똑똑해진 찰리는 알게 되는 것이 많아질수록 점점 고독해지고, 그의 똑똑함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고 주눅들게 만들기도 한다. 찰리에게 행해진 실험을 발표하는 자리에 실험참가자로 함께 가게 된 찰리는 자신이 실험실 돼지가 된 듯한 느낌을 가지며 저능아였을 때는 마치 인간이 아니었던 것처럼 취급 받는 것에 분노한다. 그리고 자신의 동료 천재 쥐 앨저넌과 함께 도망치는데...  과연 그는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가슴이 저릿함을 느꼈다. 그냥 엎어져 펑펑 울고 싶은 기분이랄까. 너무 티없이 순수한 어린아이를 보면 눈물이 핑도는 것처럼, 마냥 울고 싶은 그런 느낌. 문체만으로 한 인간의 지능수준과 감정상태를 눈에 보일듯 잘 나타낸 대니얼 키스에게 찬사를 보낸다. 과연 SF계의 노벨상 인 휴고상과 네뷸러상 수상작 답다. 그의 다른 저서 빌리밀리건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앨저넌과 찰리, 대니얼 키스 모두에게 꽃 한송이 소박하게 선물하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9-21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1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 - 명화와 함께하는 달콤쌉싸름한 그리스신화 명강의!
천시후이 지음, 정호운 옮김 / 올댓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 이라니, 우리로 따지면 호랑이 담배 필 시절 정도 되려나. 그리스 신화 의 신들은 인간처럼 사랑하기도 하고, 슬퍼하고, 욕심도 내고, 괴로워도 하면서 인간과 더불어 수많은 얘기들을 만들어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우리 생활 곳곳에, 대륙이름, 우주의 행성이름, 별자리 등에도 그리스 신들의 이름이 남아있을 만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많이 거론되는 신화이다. 어릴적 읽은 기억은 있지만, 워낙 신들의 수도 많고, 너무 옛날이야기라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아직 그리스 신화 에 대한 지식이 많이 없는 상태였는데, 이 책은 아주 기본적인 신들의 인척관계 소개부터 시작해서 한명 한명의 신들의 이야기에 대해 차례대로,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 의 저자 천시후이 는 중국의 대학에서 20년동안 그리스 신화 를 강의했는데, 수많은 학생들이 이 강좌를 듣기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옛날 이야기를 현대생활에 아주 맛깔나게 버무려서 재미나고 쉽게 알려주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든 아주 쏙쏙 이해가 된다. 책의 곳곳에 담긴 시의적절한 명화들도 그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보니 더 생동감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우선, 인간은 예언 능력 자체를 가져서는 안 된다. 미래를 알면 삶이 진행되지 못하고 의미와 매력을 잃게 된다. '스포일러 조심' 이다! 미래를 예지할 수 있으면 재난의 영향이 앞당겨지고 시간이 행복을 희석해버린다. 두 번째, 선지자는 생활 속에서 같은 인간들뿐만 아니라 신들도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에 행복할 수가 없다. 영화 속에서도 조직폭력배들이 입을 막기 위해 상대를 죽이면서 하는 말이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있다'다. 세 번째, 미래와 운명을 안다고 해서 아널드 슈워제네거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 예정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예언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트로이전쟁에서 카산드라는 자신의 예언능력 때문에 뼈아픈 대가를 치뤘다. <p. 77>


인간이 예언능력을 가진다면? 단순하게 생각했을 땐 미래를 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더 생각해보니 미래를 안다고 해도 그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그건 오히려 재앙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가올 미래때문에 현재까지 송두리째 빼앗기는 삶, 그건 결국엔 모든 현재가 미래에 저당잡히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한치 앞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걸까.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마다 차이는 있을 지언정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들과 한계를 지닌 인간과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빛과 태양의 신 아폴론이 인간 시빌레에게 구애하며 원하는 선물을 마음대로 고르라고 하자, 시빌레는 두손으로 모래 한줌을 움켜지고 이 모래알 수만큼의 나이를 살게 해달라고 말한다. 모래알이 천개였으므로 천년의 생을 얻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젊음을 유지하게 해달라는 말을 쏙 빼놓고 말았다. 시빌레는 계속해서 늙어가기 시작했고, 나이를 먹을 수록 외모도 추해지고, 치욕스러운 일도 많아졌지만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다. 오래사는 것이 너무나 치욕스러워서 스스로를 나무통에 가두었고 천년을 꽉 채우고 죽을때 까지 '죽고싶다'는 말만 했다는 시빌레의 이야기는 무섭다. 그리스 신화에서 영생은 어쩌면 천벌에 가까워 보인다. 

무한한 능력을 가졌지만, 어쩌면 하는 행동은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어보이는 신들과 그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 신화 특유의 마법적인 요소와 극적인 전개가 돋보이지만, 마냥 유치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의 삶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것이 어쩌면 신화의 역할이 아닐까. 
그리스 신화 를 아주 재미난 드라마 한편 보는 것 처럼 즐겁게 읽고 싶다면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 을 추천한다. 재미난 이야기와 명화를 함께 보다보면 그리스 신화가 아주 친근하게 느껴질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