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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전건우 지음 / 엘릭시르 / 2017년 8월
평점 :
소용돌이 하면 우선 어릴 적 읽었던 이토 준지의 공포 만화가 떠오른다. 만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왜 기꺼이 찾아 보고선 무서워했던건지. 덕분에 소용돌이라는 말은 공포와 혐오라는 말과 연관되는 단어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동명의 제목으로 나온 전건우 작가의 장편소설 소용돌이, 또 그때의 무서운 기억이 떠오르려나 하는 생각으로 책표지를 봤는데 왠걸 귀엽다. 달팽이 같기도, 모기향 같기도 한 소용돌이 위로 집들이 '히히히' 같은 모습으로 지어져 있다. 의도한걸까, 우연일까 궁금해하며 책을 읽었는데, 읽으면서 결론을 내렸다. 일부러 의도한거였구나ㅋㅋㅋ
이웃님들이 밤에 읽으면 무섭다고 해서 일부러 밤시간에만 골라서 읽었다. 오랜만에 소름끼치는 공포를 맛보고 싶기도 했고, 변태같을지 모르나 난 최대로 그 무서움을 즐기고 싶었다. 이 책의 소재는 한이 서린 물귀신 이야기다. 시퍼런 바다나 깊은 강을 보면 아찔한 공포를 느낄때가 많기에, 물속에서 까만 머리를 풀어해치고 밑으로 마구마구 끌어당길 것 같은 물귀신은 섬뜩한 소재이긴 하다. 소설 초반 죽음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민호의 이야기를 읽을때 섬뜩해서 주변에서 누가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깜짝 깜짝 놀라며 읽었다. 하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공포보다는 어렸을 때의 친구들이 모여 함께 떠난 모험담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서울에서 죽음에 관한 사진을 찍어 돈을 벌어 먹고사는 '나'(민호)는 어느 날 친구 길태에게 유민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어릴 적 절친 독수리 오형제 중 하나였던 유민의 죽음은 충격적이기도 했고, 뜬금없기도 했지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광선리로 향한다. 1991년 엄마, 아빠가 이혼한 후 갑자기 외할머니댁에서 살게된 민호는 광선리에 1년동안 지내면서 친구들과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다. 추억이라기엔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한 기억이긴 하지만. 그 기억이 너무 끔찍해 다시는 광선리에 발도 들이기 싫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이끌려 유민의 장례식장에 방문한다. 거기서 그간 잊고 살았던 독수리 오형제 친구들과 재회하게 된다. 창현, 길태, 명자, 유민, 민호 이렇게 다섯은 늘 함께 붙어 다니던 독수리 오형제였다. 그들에겐 공통적으로 광선리에서의 끔찍한 악몽이 있다.
소설 소용돌이 는 1991년 그때의 사건과 현재 다시 뭉친 친구들에게 닥친 사건을 교차로 보여주며 어릴적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났음을 보여준다. 어릴적 의붓아빠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해 늘 온몸에 상처를 달고 살았던 유민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오형제는 솥뚜껑 저수지의 물귀신을 불러내어 유민의 아빠를 죽여달라고 주문을 외운다. 아이들의 어설픈 주문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물귀신이 깨어나 유민의 아빠는 방안에서 온몸이 물로 가득찬 채 익사하고 만다. 그 뒤로도 물귀신은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사람을 여러명 죽였지만 독수리 오형제는 귀신을 불러낸 것이 자신들의 짓이라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고 다들 마음 한켠에 죄책감과 공포를 안은 채 살아왔다.
하지만 다시 만난 유민의 장례식장에서 그 악몽이 다시 재현되기 시작한다. 일단 유민부터가 물귀신에게 당해서 익사체로 발견되었고, 이후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익사로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물귀신의 공포가 되살아났음을 예감한 친구들은 다같이 모여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아나가기 시작한다.
소용돌이는 공포소설 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험소설 이라 일컫고 싶다. 초반의 공포 분위기가 뒤로 갈수록 스펙타클한 아이들의 모험 만화를 소설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명색의 귀신인데 좀 신비스러운 맛이 없고, 사람들앞에 너무 대놓고 나타나는가 하면, '히히히', '어디에 있니' 라며 노래를 부르며 희생자를 찾아다닌다. 개성강한 주인공 4명과 사기꾼 삘의 퇴마사 남법사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스토리가 흥미롭긴 했지만, 별로 무섭진 않았다. 물론 내가 생각보다 간이 커서일수도 있다ㅋㅋ
생은, 산다는 것은 이리도 고통스럽다. 그래도 살아가는 이유는 함께하면 좋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 소용돌이 p.493 >
작가의 말을 보면
"세상의 절반은 어둠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빛이 깃들어 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단다. 어둡고 공포스러운 이야기 속에서도 밝은 빛이 깃든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던 작가의 바람이 이 소설에 투영된 것 같다. 물귀신이 휘젓고 다니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도 결국은 빛이 깃든 이야기로 잘 마무리 지은 걸 보면 말이다. 띠지를 보면 '열세 살때의 친구같은건 다시 생기지 않는다' 라는 카피가 있다. 정말 그때처럼 순수하게 사귈 수 있는 친구들은 앞으론 절대 없겠지. 13살 이후로 25년간이나 각자의 삶을 살다가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다시 뭉쳐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며 공동의 적을 향해 싸울 수 있다는 것! 공포소설 에서 이런 아름다운 우정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날 무섭게 하려면 좀 더 쎈! 이야기가 필요한 가 보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