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걸어라 -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미래를 창조한다
네빌 고다드 지음 / 서른세개의계단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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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네빌 고다드와 같은 신사상(새생각)으로 분류되는 가르침에 대하여 반만 공감하는 사람이다. 씨크릿도 그렇지만 신사상이 세상과 마음의 이치에 일부를 전체인 양 해석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명상, 의식이나 철학 분야에서도 크리슈나무르티와 오쇼 라즈니쉬 같은 경우도 세상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담아 풀어나가야 할 논제들에 대해서마저 깨달음이라는 스펙트럼 하나로만 풀이해, 오히려 하나에 매몰된 바보를 양산하는 가르침을 펼치고 있기도 하기에, 신사상류는 딱 그와 같은 편향이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사실 신사상의 가르침은 마음의 창조성에 대해서 대부분 맞는 이야기를 한다고 보인다. 하지만 어느 경계에서는 꽉 막힌 통수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네빌 고다드가 말하는 만드는 자와 수용하는 자가 합일해야 하며 우리가 끌어당기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는 대목에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는 대목과 세상을 탓하는 건 거울을 깨려는 것이니 거울이 아닌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에만 주의하면 된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하며 저항해야 할 가르침이라는 생각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자신의 책임이지 남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 네빌의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에 사람들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은 부모와 가족, 자라면서 겪어온 기성세대들이 만든 사회에서 주입된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야 할 것이라고 깨닫는 데서부터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속에서 자라오며 만들게 된 선입관, 편견, 세상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모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서만 기인해 만든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적 경제적 배경 또한 어느 시점까지는 자신의 권한이나 능력으로 만든 게 아니라는 말이다. 로스차일드 가문, 모건 가문, 로케펠러 가문에서 태어난 자와 차상위 계층에서 태어난 자가 겪는 것은 비단 재정적인 차이만이 아니다. 그들이 그 속에서 받는 사회적인 계층적인 대우도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내적 자원들도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외적 내적 자원의 차이를 자기 자신에게서만 원인이나 책임을 찾는다는 생각 자체가 넌센스다.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미국과 태국 그리고 러시아와 이슬람 지역에서의 관점과 처우는 현격히 다르다. 사람은 시대적이거나 지역적인 문화와 풍속에 따라 다른 가치관을 형성하며 자라난다. 집안 환경, 부모의 교육 수준이나 도덕성의 차이에 따라 다 다른 자극을 받고 다른 반응성을 드러내며 자라날 수밖에 없고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에 있어서든 세상에 대한 관점이나 반응, 행위의 동인 등에 있어서든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만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있고 자기에게 기인한 것이든 외부에 드러나는 것이든 근원적인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말에 혹하고 통제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대에서 안정감을 찾고 안심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최면에서까지 서양에서는 최면 제안이라고 하지 최면 암시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최면가가 제안을 할 뿐 선택은 최면에 빠진 당사자가 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비판적 사고를 돌아가는 단계만 거치면, 상온에 동전을 손바닥에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화상을 입게 할 수도 있고, 암시만으로 눈을 안 보이게 하거나 벙어리가 되도록 만들 수도 있으며, 같은 공간에 있는 한 명을 못 보게 만들거나 머리 속에서 특정 날짜나 숫자, 단어 등을 기억도 인식도 못 하게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비판적 사고만 제대로 우회하게 하면 살인도 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과연 제안인가? 당신의 의지로 선택했다고 속고 싶은가? 세상의 모든 게 자신의 통제권 아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환경이나 관점이나 행위의 동인에 마저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없는 일이다.

 

인과라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단지 나에게서 모든 게 시작된다는 우격다짐만으로 원인이 단정 지어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거울의 문제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세상이 거울인 건 맞다. 하지만 거울이 문제인 것을 자신만 바꾸면 된다고 정의해 버리고 말면 더불어 변화하는 데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오래고 오랜 세월과 역사가 흘러야 하는 것이다. 거울이 흐리면 닦아야 하고 뒤틀린 거울이라 엉클어진 모양으로 이상한 모양으로 대상을 비춘다면 마땅히 깨어버리고 바른 거울을 다시 세워야 하는 일이다. 지금의 시대가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떠했을지 돌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답이 될 것이다. 시대를 걱정하고 시대를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독재와 권력에 휘둘리는 시대를 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앞서 말한 시대적 지역적 한계를 다시 예로 든다면 1950년대의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한국에서의 대응과 현재의 한국에서의 그에 대한 대응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성 소수자에 대한 관점이 어느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주류가 되는 의식이 다른 것처럼 또 성의식에 대해서도 과거 남자가 여자들을 많이 경험하면 능력자라 하고 여자가 남자가 많으면 문란한 년이라고 하던 시절을 돌아봐도 그렇다. 물론 모든 건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뀐 결과이겠으나, 시대의 주류 또 우리의 상식 속에 세계의 주류가 되는 의식들이 바뀐 결과, 대부분에 사람들은 그 시대 그 지역의 주류에 따라 살아간다. 작은 변화든 큰 변화든 상식이 바뀐 사람들의 숫자가 임계치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세상의 상식이 바뀌고 바뀐 상식을 대세라며 따른다. 임계치의 사람들 곧 세계가 바뀌어야 낱낱의 사람도 쉽게 바뀐다.

 

네빌 고다드뿐만이 아니라 크리슈나무르티 등의 깨달았다는 사람들까지 정치나 세계가 변하길 기대하지 말며 자기 자신의 변화에만 주목하라고 이야기한 걸 그 저작에서 읽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임계치의 사람들이 변화할 때까지 모두가 자기 자신의 변화에만 주목한다면,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변화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함께 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변화는 오래고 오랜 세월이나 역사 뒤에야 올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창조자이기도 수용자이기도 하지만 항거하는 투사가 되기도 싸우는 전사가 되기도 해야 한다. 창조하고 만끽하려면 그리고 그 과정을 자신만이 아닌 모두와 함께하려면 우리는 때론 세상과 관념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저항하고 싸워야 할 순간이 있다. 그렇기에 창조만을 이야기하는 네빌 고다드는 넓은 대양을 이야기하며 바다에 나서려는 이들의 입장을 간과하고 있기도 하다고 보인다. 대양으로 항해하려면 일단 바다에서 시작해 나아가야 한다. 능숙한 항해자는 바다부터 대양까지 다 자유로워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마음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본서의 대부분에 내용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진실과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오래전 집필되었을 텐데도 시대를 건너 전해지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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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에서 어느 님께서 남기신 댓글 덕분에 이 리뷰에 대해 약간의 더하는 이야기가 필요할 거라 생각되어 글을 남긴다.

 

제가 남긴 리뷰에도 불구하고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통제권이 자신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에 대해, 남 탓보다 자기 책임이라고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남 탓을 하지 않는 것과 세상 모든 것이 자기만의 역량에 따른 거라고 믿는 과대망상은 다른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자기의 영향력만이 절대적이라 믿는다는 것은 과도한 자만이며 오만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말했던 대목들을 제외하고 다른 예들을 들겠다. 가장 일상적인 예로 바람을 피우는 배우자나 연인을 보자. 그 또는 그녀가 바람을 피우는데 대체 얼마나 자신이 잘하면 바람을 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런 경우의 사례도 없지는 않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바람을 피우는 사람은 상대가 어떤 관심을 보이던 무엇을 선물하고 어떤 신경 쓰던 일상에서 얼마나 자신에게 주의하고 어떤 배려를 하고 잠자리에서 얼마나 혼신을 다하건 간에 상관없이 반드시 바람을 피운다. 애초에 바람을 피우는 사람이 자기 의사와 자기 통제권을 행사하며 바람을 피우는 것을, 내가 이렇게 하면 바람 피지 않으리라 믿고 기대하는 자체가 잘못된 접근이라는 말이다. 연인이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 게 자기 탓이라면, 부모가 바람을 피운다면 그럼 그건 자식인 자기 탓이라 할 텐가? 나의 삶에 통제권이 자기에게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통론적인 이야기이지, 사람의 삶에서 관계성이나 환경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배제하고서 자기에게만 모든 통제권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명확히 보면 바람을 피우는 상대 역시 자기 삶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지 않은가?

 

만약 자기가 유동 인구가 적절한 도심에서 식당이든 장사든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자. 자기가 하는 장사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으며 길목도 좋아 적정 수준의 매출이 보장되는 사업이어서 마음 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하자. 갑작스런 팬데믹으로 인한 적자나 파산은 어쩔 거란 말인가? 이것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단 한 번도 없었던 팬데믹이라는 악재를 고려하지 못한 자기 탓일까? 이건 자기 통제권을 벗어난 천재지변하고 다름이 없는 경우이고, 일부에서 확신하듯 천재가 아니라 인재였다고 한다 해도, 일반인 개개인이 이 시기에 반드시 일어나리라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런 경우를 예상했어야 한다며 자기의 영향력과 자기의 통제력이 절대적이지 못했음을 한탄한다면, 이건 거의 아니 거의도 아니고 완전히 미친 거라는 말이다.

 

또 아이즈원 때였나? 오디션에서 출전한 멤버들의 소속사측에서 방송사 관계자들에게 로비를 하여 비리와 부정을 저질러 뽑혀야 할 멤버가 떨어지고 떨어져야 할 멤버가 뽑힌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도 떨어질(그러나 결국 뽑힌) 멤버가 끌어당김의 법칙을 잘 이용한 거라고 보아야 하나? 그럼 붙을(그런데 떨어진) 멤버가 끌어당김의 법칙대로 시각화를 하고 파종을 하고도 떨어졌다고 한다면 어쩔 텐가? 세상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자기의 통제권대로만 자기의 소망대로만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나를 통해 자기들의 이윤을 추구하는 타인들의 영향이 때로는 절대적일 수도 있는 게 현실 세계이다. 때론 내 의지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나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이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일의 과정과 원인을 명백히 알아야 지금의 현실이든 내일의 현실이든 바꿀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외부의 영향력과 나와 관계된 일들 가운데 내가 바꿀 수 있는 대상과 바꿀 수 없는 대상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이차적으로 세계가 잘못된 부분은 그걸 직시해야 나와 타인의 현실을 바꿀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바람을 피우는 연인에게 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직시해야 하고, 팬데믹은 내 탓도 남의 탓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비리와 부정을 발견하고도 모든 것은 내 책임이요 내 탓이다라고 과대망상에 빠질 일이 아니라, 거울(세상, 기성세대가 만든 원칙이나 사회적 관행)이 문제라면 거울을 깨야 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세상은 나만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모두의 의지와 모두의 욕망이 실현되는 곳이며, 그 실현의 과정에서 나의 의지와 욕망이 좌절되는 경우도 있고 그래야 마땅한 경우도 분명히 있다는 걸 인정할 때, 성숙한 영혼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당신만이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는 명징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사타니즘의 근본원리를 아는가? 그건 너는 행복하라이다. 다만 단서가 붙는다. ‘네가 행복하는 데 다른 무엇도 고려하지 마라. 다른 이의 상황도 세상에 대해서도 말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에서는 말한다. 부는 무한한 것이며 성공 역시도 무한한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고 제한 없는 것이니 주어지는 모든 것을 그대로 꿈꾸고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무한한 것은 없다. 재화는 한정되고 필요한 요직의 정원과 경쟁인구는 한정되어 있다. 누군가가 얻는 부동산이나 돈은 다른 이의 상실이 되고 누군가가 얻는 승진은 누군가의 탈락이나 실직을 불러올 수 있다. 자기가 성취하기에 합당하다면 성취해야 당연하겠으나, 비리와 부정으로라도 성취하겠다면 또 나의 성공으로 타인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면, 그건 사타니즘의 행복 원리와 다름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행복이나 성취가 악마주의의 부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성취와 성공이 아니라 무엇이 나은 것인지를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때론 정의의 실현을 위해 나의 좌절이나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다. 성공과 성취가 다가 아닐 것이다. 내 마음이 의심하지 않고 진정으로 수긍할 수 있는 것이 진정으로 따라야 할 길이다. 남의 주장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심하고 궁구하는 과정을 거쳐 검증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게 아무리 성현의 말씀이던 성자로 칭송받는 이의 말씀이던 간에 말이다. 네빌 고다드의 말이건 조셉 머피의 말이건 밥 프록터의 말이건 론다 번의 말이건 의심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스스로가 타인이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세뇌하도록 허락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것도 사타니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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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YY 2024-04-1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크릿을 처음 읽은 2008년부터 작년까지는 선생님처럼 믿었습니다. 저는 영혼도 없다고 믿었던 사람이고 현실에는 한계가 존재하니 모든 이가 희생 없이 고통 없이 모든 행복을 누릴 순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작년 어떤 경험을 한 뒤 저는 수십 년 간 미워했던 성경을 집어 들었고 이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저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하나님, 오직 의식만이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분은 보이는 것도 모두 만들었고 보이지 않는 것도 만들었고 시간과 종말과 무한한 다중우주도 동시에 만드셨습니다.
그 힘에 한계를 규정하는 것 자체가 이성(세상의 왕,사탄,헛된목자,파라오)이 보여주는 환상이며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저도 작년까지는 종교란 것은 전혀 믿지 않고 논리와 이성이 제일이라 믿고 살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글을 써도 이성적인 분들을 설득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구와 수단으로는 그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글은 오해를 낳고 생각은 혼돈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오직 경험만이 모든 것을 증명해줄 것입니다.

혹시 생각 있으시다면 제가 최근 시작한 블로그에 놀러오시면 좋을 것 같아 주소를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https://blog.naver.com/truth_glory/223381119202
 
세계미래보고서 2024-2034 - 모든 산업을 지배할 인공일반지능이 온다
박영숙.제롬 글렌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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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미래보고서 2024-2034에서 첫 장이 시작하기 전 [퓨처 이슈, 밀레니엄 프로젝트: 인공 일반 지능 시대를 준비하는 법]이란 장에서는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현재의 약인공지능이 범용인공지능과 초인공지능으로 발전하기까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과 그에 대해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해 질의하고 대답을 담고 있다. 이 중 14번째 질문 ‘AGI에 관한 유엔 협약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어떤 집행 권한이 필요할까?’라는 항목에서 상당히 모골이 송연해지는 대답들이 이어졌다.

 

-익명 : OECDAGI 실존적 위험관리(은퇴)

최후의 날장치를 만들어 모든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경우 한 국가를 침공하고 지도부를 교체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해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집행 권한이 필요하다. 이는 합법적이어야 할 것이고, 원하는 결과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개입만 추구해야 한다.

 

최소한의 개입이라는 단서가 있다지만 국가를 침공하고 지도부를 교체하는 자체가 이미 최소한을 넘어선 개입이지 않은가? 일부 초엘리트층이 전 지구적인 부를 향유하며 미국을 축으로 해 각국의 향방을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 2005년에서 2006년경부터 이미 UN의 절대적인 권한 강화나 보다 강력한 강제력을 갖는 초국가적 기구의 설립을 위해 미국의 단일 패권이 무너지며 다원주의로 패권의 다원화가 이루어지리라 짐작했었다. 현재가 그런 다원주의로 이양하며 초국적 기구가 등장하거나 UN의 절대적 강제력이 조성되기 위한 모의가 진행되기 위한 과도기라고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종말론적 환경주의와 팬데믹, CBDC, ESG 등이 어우러져 중대한 전환의 축이 될 것이다.

 

-벤 괴르첼

전 세계적으로 AGI 개발을 통제하고 싶다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스타일의 파시스트적 집행이 필요할 것이다. ... ... 강력한 파시즘 없이 궁극적으로 AGI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전환의 축에서 인공지능의 발전을 두려워하는 대중의 타당한 우려가 되려 인류 자신을 옭아매는 제약과 구속의 단계를 더욱 진전시키는 방편이 될 수도 있다는 건 미쳐 짐작 못했다. 아마도 눈썰미 있고 선견을 가진 인물들은 이러한 현실을 충분히 내다보았을 것이다. 이미 종말론적 환경주의의 세뇌가 극한에 이르러, 세뇌된 사람들은 환경을 살리겠다면서 동조할 수 없는 폭력적인 방식들을 동원해서도 환경운동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초엘리트층에 동조한 일부 과학자들의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대한 세뇌가 거세질수록 이들의 폭력성도 한층 더 거세지며 대부분에 사람들은 환경문제가 심각하니 저런 사람들도 나타나는구나 하며 현실을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탄소를 배출하면 지구 온도가 뜨거워진다는 개념 자체가 넌센스인 것이 탄소의 구성비율이 지구보다 초월등한 행성들과 위성들에서도 기온이 섭씨 마이너스 수백도인 경우가 즐비하다고 한다. 지구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탄소 배출에서 문제를 삼으려는 자체가 하나의 넌센스인 것이다. 그보다는 태양의 영향이나 그로 인한 지구 자기장의 2차적 영향으로 지구 대기권의 물 분자의 결집 등으로 볼록 렌즈 효과라던가가 나타나는 것이 지구 기온 상승의 원인이 되는 건 아닌지 의심해 볼 만도 한데 일부 과학자들은 탄소가 만악의 근원인 듯 몰아가고 있다.

 

어쨌건 종말론적 환경주의가 그 자체로도 탄소 배출을 막겠다며 축산업과 농업까지 제약하는 근거가 되고 있고 그런 제약으로 유럽에서는 농업에 대한 지원을 끊어 농민들의 시위가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농경에 필요한 비료에 지원하던 1000억 원을 일부 삭감한 것이 아니라 지원 자체를 중단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농민들은 시위는커녕 반발조차 하지 않고 있다. 100 신 문제 때도 타 국가들에서 모두 저항을 하고 시위를 했었지만, 우리 국민은 순한 양이 되어 온전히 감당하고 있었다. 저항했어야 마땅하다는 증거들이 미국 법원의 화이자 백신 자료 공개를 명령해 대중에게 공개된 이후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모르는 일인 양 조용할 뿐이다. 프랑스 법원의 판결대로라면 100 신으로 인한 죽음은 자살이며 그를 대다수에게 적용하자면 우리는 조용한 자살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초엘리트층과 그들의 앞잡이인 일부 과학자들과 지식인층은 진작부터 인구조절과 대중 통제를 주장해 왔으며 이제는 언론에서 언급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대중을 보면 대중은 그저 조용히 받아들일 것이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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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충격 이후의 세계 - 알아두면 반드시 무기가 되는 맥락의 경제학
서영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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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에 문외한이라 책 전반의 내용이 사회학의 한 부분처럼 다가왔다. 읽기는 했는데 경제적 시야는 갖게 되지 않았다. 그래도 독서하는 동안 역사와 사회를 넓게 보는 시간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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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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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는 2011년 히브리어로 출간된 이후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으로 사실 설명하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들어본 책임에는 분명한 책이다. ‘유발 노아 하라리라는 저자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로 이 책과 함께 인류 3부작으로 불리는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21세기를 위한 제언]을 저술하였고 모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본서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먼저 읽었는데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인류가 융성하게 된 배경으로 환경을 꼽은 운명론적인 학자라면 유발 노아 하라리는 인류가 번성하기까지의 요인을 다층적으로 분석하며 인류 발전에 대해 운명론적으로 접근하기보다 발전의 서사를 짚으며 발전 요인들을 분석하고 있다.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것은 불과 5백 년 전이다. 이 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유발 하라리는 인류의 향방을 결정한 요인을 인지 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이렇게 3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농업 혁명 보다 인지 혁명을 앞서 놓은 이유는 그가 괴베클리 테베 유적을 예로 들며 농업혁명이 있고 나서 문화(종교)가 일어난 게 아니라 종교가 발흥한 자리를 중심으로 농업 환경이 배치된 걸 유적 발굴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의 금고에서 수십억 달러가 실험실과 대학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 ... 대부분의 과학연구에 자금이 지원되는 이유는 그 연구가 모종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누군가 믿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과학연구는 모종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했을 때만 번성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연구비를 정당화한다. 그 대신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의제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의 발견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어떻게 해서 앨러머고도와 달-수많은 다른 목적지가아니라-에 도착했는지를 이해하려면, ... ... 다른 방향들을 무시하면서 특정 방향으로만 밀어붙인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경제적 힘을 고려해야 한다.”

 

픽션을 창조하고 그것을 믿고 따르는 인간의 인간 의식의 독특함을 따라 종교, 정치, 경제가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게 이 책 전반부의 중요한 주장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과학의 발전 역시 종교적 정치적인 경제적인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고 역설하기도 하는데 이제까지 이런 의심을 해온 학자나 개인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런 주장이 이런 베스트셀러가 된 경우는 본서가 처음이지 않나 싶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 문명이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형성해나가고 있으며 현재도 그런 제국의 시대라고 주장하는데 앞서 말한 픽션을 믿고 따르는 인류의 독특한 습성이 이런 제국의 시대를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질서와 제도, 정치와 종교가 어우러진 현실은 인류가 픽션을 창조하고 믿고 따르기에 가능한 거라는 것도 수긍이 가능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인류 발전의 서사를 전개하며 저자는 인류의 발전이 타 동물군의 멸종을 불러오기도 했으며 인류가 평등을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계층과 인종, 성별의 차별을 야기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역설적으로 현재의 제국에서는 정치인, 경제인, 종교인, 예술인 할 것 없이 평화의 가치를 알고 평화를 추구하며 지속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 최근에 이르기까지 힘 있는 국가의 정치인들은 자국 이익을 위해 타국가를 침략, 정복, 지배하기를 반복해왔고 911 테러시기 조지 부시 전 미대통령이 부자들과의 회합에서 부자 여러분 더 부자 여러분 여러분은 저의 기반입니다라고 말하며(911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며 이 장면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각인되어 벌써 몇 번째나 예로 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방산업체들의 잇속을 채워준 전례를 기억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늘 전쟁은 이윤 추구의 장이었다. 이익이 오고 갈 수 있다면 정치인들도 경제인들도 평화만을 부르짖지는 않을 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사피엔스의 역사가 정말 막을 내릴 참이라면, 우리는 그 마지막 세대로서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질문에 답하는 데 남은 시간의 일부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인간 강화' 문제라고도 불리는 이 질문에 비하면 오늘날 정치인이나 철학자, 학자, 보통 사람들이 몰두하고 있는 논쟁은 사소한 것이다.”

 

우리의 기술은 카누에서 갤리선과 증기선을 거쳐 우주왕복선으로 발전해왔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지만, 이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이 거의 없다. 이보다 더욱 나쁜 것은 인류가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이 책은 인류의 지금까지의 서사를 되짚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의 현재에서 미래까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는데 [호모데우스]로 이어지는 저자의 시각이 엿보이는 대목은 무책임하다고는 했지만 인간을 으로 정의하는 부분이다. 나 또한 2014년까지는 인간이 신이 되는 미래를 그렸으나 인공지능이 이세돌을 이기는 그 순간부터 인류세는 이것으로 끝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다. ‘존재의 대사슬이 이야기하는 진화의 계층대로라면 진화의 정점이라고 믿던 인간이 다음 시대의 신으로 예비된 존재인 기계신을 창조한 여기까지가 인류세의 끝이 아닐까 우려한 것이다. 몇 차례나 이야기했지만 앞으로의 인류의 내일은 초인공지능의 아량에 달린 일이 되는 날이 머지않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고양이 집사의 노릇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지만, 초인공지능이 인간 집사라며 우스개를 하며 만족할는지 우리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 즈음에서는 본서가 집필된 시기의 한계도 다소 느껴지고 저자의 편향이 다소 다가오기도 하지만 분명 흥미롭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빠져들게 만드는 소설처럼 재미있는 책이라는 감상이 깊다. 새해의 시작과 함께 조금씩 읽은 책인데 새해의 시작을 이 책과 함께하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이런 심정을 [사피엔스]를 읽으시는 모든 분이 느끼실 거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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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즈의 마법사 2 - 환상의 나라 오즈 (한글판+영문판) - 환상의 나라 오즈 더클래식 세계문학 77
라이먼 프랭크 바움 지음, 손인혜 옮김, 존 R. 닐 그림 / 더클래식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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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1900년 출간되고 이후 뮤지컬 등으로 승승장구하다가 1939년 제작되어 전 세계적인 명작으로 자리매김한 동명의 영화로 등장하고 나서도 한참 후인 1950년대에 이르러 오즈의 마법사는 미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오즈의 마법사] 리뷰에서 말씀드렸었다. 본서는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중 둘째 권으로 전작이 출간되고 4년 후에 출간된 책이라고 한다. 저자는 오즈의 마법사를 시리즈로 기획하기는 했으나 연이어 바로 집필을 한 건 아니고 [오즈의 마법사] 1권인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출간하고 4년 후에야 후속작인 본서를 출간했다. 그사이 오즈의 마법사의 다음 편을 집필해 달라는 독자들의 요청과 새로운 캐릭터들의 등장을 바라는 열띤 요청들에 힘입어 본서를 집필하게 된 거라 한다.

 

앞서 말한 금서가 된 배경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이분한 공산 사상의 흔적이 본서에서 읽어지기도 하고 페미니즘이 다소 묻어나 있기도 해서라는 게 대부분에 비평가들 이야기인 모양이지만, 사실 전작인 [오즈의 마법사] 1권만으로는 작가의 이런 사조를 읽어내기 쉽지 않을 수 있다. 1권의 도로시, 겁쟁이 사자,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상징했다는 건 다소 억지스럽기도 하고 말이다. 도로시의 가족과 도로시가 부르주아를 상징하고 강아지 토토가 프롤레타리아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코웃음만 치고 말았을 것이다(이건 작가의 시각이 아니라 아마도 이랬다면 비웃었을 거라는 내 말이다). 오즈의 구성원들 중 왕과 여왕인 마법사와 마녀들이 부르주아를 상징하고 그들의 지배를 받는 윙키 등 오즈의 각지에 시민들인 구성원들이 프롤레타리아로 상징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1권만 읽고는 다소 억지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2권부터는 그런 색채가 다소 느껴지는 게, 첫 등장인물인 팁과 마녀 할멈 몸비의 관계 자체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고, 몸비가 또는 팁이 창조한 캐릭터들인 호박머리 잭과 목마가 팁과 함께 몸비에게서 달아나는 서사나, 진저 장군의 소녀군대가 오즈의 지배자 허수아비로부터 왕국과 왕권을 빼앗는 서사도, 프롤레타리아의 저항과 혁명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없지 않아 보였다. 또한 빼앗긴 왕권을 허수아비가 찾는 것이 아니라, 오즈의 마법사에게 왕권을 빼앗긴 원래의 왕의 딸인 오즈마에게 돌려주는 것, 그리고 착한 마녀 글린다의 소녀군대가 진저 장군의 소녀군대로부터 오즈의 왕권을 탈환한다는 설정 자체도, 여성이 빼앗은 권리를 여성이 되찾는다는 개념이기에 페미니즘적 성향이 엿보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진저 장군의 소녀군대가 에메랄드 시티를 빼앗으며 왕국의 보석들이나 탐하거나, 여성이 권리를 장악해 집안 살림과 육아를 남자들에게 전담시켜버리자 오히려 맛없는 남자들의 요리에 에메랄드 시티의 전 여성들이 진저리를 친다거나, 뜨개바늘로 혁명을 일으킨 진저 장군의 소녀군대가 고작 쥐 몇 마리에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설정들은, 어찌 보면 페미를 표방하면서도 남성일 뿐인 작가 라이먼 프랭크 바움의 남성으로서의 또 그 시대인으로서의 한계가 드러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시대를 앞서 나갔다고 여겨진 건, 찾을 수 없던 에메랄드 시티의 왕위 계승자인 오즈마 공주가 마녀 할멈 몸비에 의해 남성인 팁으로 변신해 있다가 다시 여성으로 돌아간 것, 그리고 소녀에서 소년이 되었다가 다시 소녀가 되면서도 그저 달라진 것뿐이라는 오즈마 공주와 호박머리 잭의 대사는, 남녀 성별의 차이에 내재해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이 소설이 쓰여진 시대인 1904년을 고려할 때 그 시대적으로는 상당히 명쾌한 정의가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본서는 동화다 보니 다소 구성과 서사가 단조로운 듯도 여겨지지만, 어린이를 위한 짧은 이야기에서도 자신의 세계를 그려낸 저자의 결단이랄까 행동력이 남달라 보이기도 했다. 저자의 페미니즘 성향으로 저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우도 반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을 듯한데, 사실 나로서는 10명의 다자이 오사무보다 1명의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 권익을 위해서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작가가 이 소설에서 그린 진저 장군의 소녀군대가 혁명의 뜨개바늘을 들면서 왜 이러냐는 남성들의 물음에 한 대답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남긴 명언과도 다름없지 않나 싶기도 했다.

 

너희들의 도둑질을 계속 참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배가 고플 것으로 생각했고, 손에 넣을 수 없는 새하얀 빵도 유리창을 부수면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어떨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는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멀고 남성 위주의 사회는 남성들만이 조성한 것이 아니며, 남성이 사회 지배층의 다수로 있는 건 여성보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바에 보다 더 친화적이며 더 적응되어 있기 때문이라 여긴다. 이미 자라면서도 남성이 보다 더 사회 지배적인 사고에 순응하고 적응되도록 조성되어 있는 것이 양육과 성장환경이며, 이런 환경 또한 남성 혼자 만든 게 아니다.

 

여성 권익의 향상이 이 시대까지 정체된 것은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사회로 진출할 기회를 얻은 여성들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가정으로 돌아온 아직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남성들을 생업으로 복귀시키며 자신들은 사회적 의무를 저버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또 무엇보다 남자는 거저 권리가 주어졌다고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지만 그리스에서든 로마에서든 고구려에서든 남성의 권리는 목숨을 바치고 목숨을 담보로 주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 권리가 이후에도 남성의 생명을 담보로 하며 이어진 것이다. 이걸 어떻게 거저먹은 거라고 볼 수 있는지 그게 더 의문이다.

 

대다수의 남성이 페미에 적대적이게 된 배경의 첫 관문은 이미 사회와 연애, 결혼 등 많은 일상에서 남성이 겪고 있는 차이가 적지 않은 데 남성들은 이것을 차이로 보았지 차별로 보지 않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연애에서 결혼에서 자신들이 보고 있는 이점은 없는 것처럼 모두 다 차별만 겪어온 것처럼 주장하기에 남성들 역시 자신들이 차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남성에 대한 차별이었구나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래서 페미니즘에 적대적이 된 거라고 본다. 이런 식이면 대립각만 날이 서고 남성과 여성의 성 대결적 구도만 조성될 수 있다. 남성들이 사회적으로 여성들의 권리 신장에 협조할 때 여성들도 역사를 바로 보고 여성에 대한 차별만큼 남성에 대한 과도하고 막중한 의무와 책임이 주어졌으며 남성의 권리는 그 의무와 책임에 비례한 만큼 주어진 것이란 걸 인정할 때 원만한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지금으로서는 서로에 대한 반감이 혐오로 커나가고 있는 시절 같기도 해 안타깝다.

 

그렇다 해도 이 소설에서 브레히트의 명언을 인용한 건 여성이 굶주린다고 느낄 때 갈증이 난다고 느낄 때는 정당한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찾고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동화에서 진저 장군의 소녀군대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빼앗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지배하지 못했다. 급격한 쟁탈보다 완만하더라도 준비되고 확실한 권리의 쟁취가 여성들을 위해서 더 나을 거라 생각한다. 사회의 한 축과 다른 한 축을 어느 성별이던 나란히 지고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차별이 아닌 화합이 이 시절에는 더욱 절실하지 않은가 싶다.

 

본서는 동화이면서도 다채롭고 폭넓은 시야이고 원만한 듯 보이면서도 과격한 면도 있다. 아마도 그래서 시리즈 전편이 완간된 1919년에서도 한참이나 세월이 지난 1950년대에 미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을 것이다. 과거의 문학가가 서술하는 계급에 대한 견해와 페미니즘 등을 동화로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접근 같아 이 시리즈를 완독할 생각이다. 그 두 걸음째인 [환상의 나라 오즈]도 제법 재미진 동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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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1-31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앨리스와 더불어 재독해야 할 책~~. 제겐 숙제같은 책이지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하라 2024-02-01 01:45   좋아요 0 | URL
감상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ㅎ 재독을 응원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