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최호영 옮김 / 생각연구소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감정은 지문과 같이 타고나거나 고정된 것(고전적 견해, 본질주의)이 아니라 경험과 학습으로 갖추어지는 것(구성된 감정이론)이라는 내용이다. 서술이 대중적이라기에는 지루한 감이 있고 전문적인 이야기이다 보니 재미없기는 하지만 주제가 흥미롭고 관심을 끌만한 내용이다. 유익한 반면 지루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학습법 - 허무를 이겨 내는 메타 학습
혜온 지음 / 좋은땅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서를 즐기기 위한 목적보다는 정보습득을 의도하고 지속하는 편이라 독서 자체를 학습과 다름없이 생각해 왔다. 그래서 평소 학습 능률과도 다름없는 암기와 회상, 논리 등 기억과 사고력에 대해 관심이 깊었고 학습 자체에 대한 필요성과 성취를 주지시키는 정보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본서의 출간을 알고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학습법]이라니 인간에게 배움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익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리라 생각했다. 부제인 [허무를 이겨내는 메타 학습]이라는 문장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삶의 공허를 걷히게 하고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과정이라 이야기해주는 거라 생각해 관심이 더욱 깊어졌다.

 

이 책은 철학자이거나 교육학자가 저술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컴퓨터와 환경을 전공한 23년차 변리사인 분께서 저술했다고 한다. 저자 소개와 책 소개에서 보이는 인간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에게 학습은 어떤 의미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 진정한 성장을 도울 수 있는지를 규명하고 있다는 본서의 주제에 대한 소개로도 무척이나 철학적이고 교육학적인 논지를 전개하는 책이리라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책에 대한 기대도 학습법이라지만 학습 기술에 국한되지 않은 철학적 영역일 거라 독서 기대가 확장됐다.

 

책을 읽으며 본서가 참 깊은 데를 지적하고 저자 나름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주제라고 생각됐다. 본서의 키워드는 존재의 이유에서 시작해 고유 역량, 메타 역량, 메타 사이클, 메타 학습, 반교육, 발명 등에 이르고 있다.

 

학습에서 존재 이유가 등장하기에 의아하기도 했지만 인과 관계로 얽힌 세계에서 결과로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필연적으로 존재 이유에서 기인하는 삶의 법칙 내지는 방향성이 있으며’, ‘자연의 존재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고유 역량인 자신만의 특기로써 드러내고 실현한다는 첫 장에서의 저자에 말에 학습과 교육이 존재 이유를 실현하도록 하는 근간이구나 생각되기도 했다. 저자는 각자의 고유역량에는 존재 이유가 투영되어 존재 이유에 실재성을 주는 것이며 고유 역량을 발휘하며 자신만의 변화를 실현해 간다면 그것이 곧 존재 실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타고난 고유 역량은 완성된 게 아니고 학습을 통해 성장해 나간다고 말이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학습은 결국 존재 실현이라는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우리는 학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고유 역량지적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사물의 인과 관계의 흐름을 역행하는 초월적인 정신작용으로 정의한다. 문제와 답을 보며 그 과정을 되돌아 사려하며 문제의 원인을 궁구하여 문제의 문제를 인식해 진정한 문제 해결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인간의 고유 역량이며 이를 초월적인 차원의 역량으로 보아 메타 역량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메타 역량은 이 시대에 위기에 놓여 있으며 그건 문제를 찾아내는 게 천성인 인간에게 문제의 답만을 요구하는 현재의 지식 주입식 교육과 답만을 요구하는 그 자체가 인간의 메타 역량의 실현 곧 존재 실현을 차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그래서 현재의 교육을 반교육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반교육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창의성을 요구한다는 유럽식 교육과 시험 방식도 결국 정해진 양식의 교육을 통해 갖게 된 사고를 풀어나가는 논술 방식이라며 유럽식 교육도 비판하고 있다. 답이 아닌 문제를 찾아내어냐 진정한 문제 해결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 우리의 범죄율과 유럽 각국의 범죄율을 비교하며 교육이 문제라 그렇다는 결론을 가져오는데 그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을 것 같다. 유럽의 범죄율은 난민 등의 이민자들 폭증으로 인한 이유와 그로 인한 원 거주민들과의 갈등 문제로도 양산되는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프랑스만 해도 수감자의 절대 다수가 이민자들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거듭 [호모 데우스]를 인용하며 유발 하라리의 견해를 비판하고 고유 역량을 설명하거나 논지를 전개하며 쾌락을 언급하는데 이런 저자의 견해들에 대해서는 이론을 갖는 분들이 많을 수 있어 보인다.)

 

저자는 메타 역량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학습을 메타 학습이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지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기존 학습과 구분해 부르기 위함이다. 메타 학습은 메타 사이클이라는 사고 과정을 기반으로 문제를 찾는 데에 집중하는 것을 이른다. 메타 사이클은 문제 정의, 원인 분석, 방향성 축적이 순환하여 문제 해결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사이클을 말한다. 저자는 메타 학습을 위해 필요한 기초 지식을 전하기에 기존 학습은 병행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메타 학습은 알고리즘이며 데이터는 기존 학습으로 수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율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메타 학습 자체가 문제를 정의하는 과정이기에 그 과정에서 필요한 데이터와 사유는 스스로가 주도하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공교육 자체가 자기 주도적인 학습을 위한 지원 정도의 역할만 하면 된다고 보고 있다. 메타 학습에서도 암기는 사유의 전제가 되는데 이는 뇌과학자들도 공언하듯 창의성도 사고도 기억하고 있는 소스가 전제되지 않고는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을 인풋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유를 통한 아웃풋은 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는 글쓰기를 강조하고 있다. 글쓰기 자체가 학습 자체이며 학습을 강화한다고 보는 것이다. 각 주제에 맞는 글의 얼개를 지니고 학습을 하게 되면 능률적으로 학습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리고 메타 학습은 발명과 연계해 설명 가능하고 발명의 과정이 메타 학습의 과정과 같으며 그가 가장 제대로 구현되는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발명적 학습의 과정인 해법의 선택, 문제 원인 분석, 인과적 맥락 파악, 글쓰기에 이르는 과정도 발명의 과정과 같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리고 메타 학습의 정점인 글쓰기에서 글의 얼개도 특허 작성 포맷을 수용하는 것을 장려하고 있다. 이것을 표준화하여 저자는 CORE 양식을 제시하는데 C: CAUSE(원인 분석), O: OBJECTIVE (목표제시), R: REALIZATION(실현 방안), E: EFFECT(효과)의 체계적 서술을 제시한다.

 

이렇게 문제를 찾고 원인을 분석하고 방향성을 축적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결국에는 자신과 이웃 그리고 모든 대상의 존재 이유에 기인한 법칙이나 방향성을 찾도록 돕고 서로의 존재 실현으로 이끈다는 게 저자가 말하는 인간에게 학습이 미치는 영향이며 그 필요성이라 하겠다. 저자는 교육 개혁을 주장하고 교육 개혁은 인간이 자신의 고유 역량을 인식하는 내면 변화가 그 시작이 되며, 사회 전체가 인간의 학습을 위해 협력할 때 교육 개혁이 완성된다고 보고 있다.

 

이런 저자의 교육관, 학습관, 인간관, 존재에 대한 관점은 배우는 인간이라는 인간에 대한 관점에서 중요한 관점이 아닌가 싶고 독서하고 학습하면서도 목적의식이랄까 의미 찾기에서 모호하고 해이해질 때 좋은 채찍질이자 당근이 되어 주리라 생각되기도 한다. 의미 찾기가 생의 모든 가치이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의미를 찾을 때 생이 더 확연해지고 활기를 찾는 것은 사실이니까 한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인디캣 블로그를 통해 [좋은땅]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리뷰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체 시장 - 생명공학시대 인체조직의 상품화를 파헤친다
로리 앤드루스.도로시 넬킨 지음, 김명진.김병수 옮김 / 궁리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본문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의 주제에 대한 다소의 오해가 있었다. 3 국가부터 선진국에 이르기까지 범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장기매매에 관한 내용이기만 한 줄 알고 독서를 시작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깨달았다. 단지 장기밀매의 현실만을 고발하는 책이 아니라, 자기 신체와 유전자에 대한 권리에 관한 책이란 것임을 말이다. 이건 비단 프라이버시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인권과 주권, 자기 자신에 대한 권한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본서는 서문부터 병원에 방문해 검진을 받고 나서 의사의 권유로 주기적인 검진을 받게 된 인물이, (자신도 모르는 자기 인체의 화학물질이 남다르다는 이유로) 주기적으로 인체에서 채취한 물질들을 동의없이 실험에 이용당하고, 결국 생명공학회사에서 그의 몸에서 생성되는 물질에 특허권까지 취득한 것을 알게 되어, 소송을 진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소송은 어떤 결과에 닿았을 것 같은가? 법원은 그의 동의 없이 인체 생성물질을 채취한 것은 부주의했으나, 그의 인체에서 생성된 물질에 특허를 받고 수익을 남기고 있는 의사와 연구자와 생명공학회사(제약사)에게, 그의 인체 생성물질에 대한 권리가 귀속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임신을 기대하는 여성에게 배란촉진제를 주입하고, 생성된 여러 난자 중 일부는 해당 여성에게 착상했으나, 여성은 임신에 실패했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해당 여성의 동의 없이 그 여성의 난자를 다른 여성들에게 착상하여, 다른 여성이 임신하게 되었고, 난자를 도둑맞은 이 여성은 사실을 모른 채 8년을 보내고서야, 자신의 난자로 아이가 태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앓는 질환들의 유전적 변이에도 각각을 선점하는 회사에게 특허권을 주어 뇌 질환, 간 질환, 신장질환 등에 각기 다른 회사가 특허권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유전적 질환들 외에도 천식 같은 일반적인 질환에까지 특허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런 특허권을 취득하기 위한 연구들에 자신의 유전자가 이용당한 것을 해당 질환에 관한 연구 대상이 된 개인들은 모르고 있다.

 

우리 인체에 대한 권리, 우리 자신의 유전자에 대한 주권이 전혀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체의 주권에 대한 쟁점으로 법적 논의가 있으면 과학자들은 인류의 미래와 의학 발전의 가능성이 차단당한다며 반발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올리는 막대한 수익을 생각할 때 이것이 과연 인류의 미래를 위해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건가 의문이 남기만 한다. 사실 예전에도 논의되었다는 유전자에 대한 저작권 인정을 하고서 연구를 지속한다고 해도, 인류의 미래나 의학 발전에 전혀 저해될 소지는 없다. 일부 희귀 난치병 치료제의 가격이 20~30억이라는 기사도 있었는데, 인간이 자신의 인체에 대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 순수하게 인류의 미래와 의학 발전만의 문제가 아닌 건 아닐까 의심한다고 해서 모난 시각만은 아니란 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비정상적으로 왜곡되어, 극부 중에서도 초극부층의 부만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존속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정상적인 자본주의의 시각이라면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하는 것이 아닐까? 미국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퇴색되었다고는 하지만 공정한 발전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또 한 국가에서 내재한 자원을 다른 국가에서 자신들에게만 기술력이 있다는 이유로 아무런 비용지불 없이 강제로 채취해 간다면, 분명 이건 국제적인 지탄과 분쟁을 불러오고 국제 재판소에 국제적 소송으로 비화하거나 전쟁의 빌미마저 될 수 있을 사안이다. 그에 근거해 다음 예를 보자면 (우리는 우리의 2차적인 자원인 작곡이나 문학 또는 미술 창작 등에 대해 지적 재산권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우리의 유전자 체계는 우리 자신의 가장 1차적인 자원인 것이 분명하고, 이는 어느 각도의 시각으로 본다 해도 분명 보호받아야 할 개인의 주권이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마땅히 주장해야 하고 보호 받아야 할 우리의 주권을 침탈당하고도, 거대 제약사의 특허권 주장에 주저앉고 말아야 하는가? 참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17, 18세기와 19세기에는 의학 발전을 위해서나 과학자들의 실험을 위해 또 미술가들의 인체 연구를 위해 시신이 매매되어 해부되고 난자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족이 없는 부랑자들은 자신의 인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기회도 없이 사망과 동시에 시신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저자는 1998년 있었다는 독일의 인체 해부 전시전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전시전을 개최한 인물에게 시신에 대한 권리가 누구에게 있냐고 묻자, 플라스티네이션을 시작해 인체를 설정한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서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21세기의 중국에서도 인체 해부 전시회는 열렸었고, 유투브에 의하면 이때의 시신에 대한 음모론에 가까운 괴담이 돌고 있기도 하다. 과연 17세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친지의 권리에 발전이 없었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본서에서는 이런 우리 자신에 대한 권리를 이야기하며, 사망자의 뇌하수체에서 채취한 배란촉진제를 주입받고 유전적 질환에 걸려 일부는 사망하기까지 한 사례, 인공수정을 하며 의사로부터 정자 세척이란 것에 동의하냐는 질문에 대답했다가, 타인의 혈액으로 그녀 남편의 정자를 세척해 그녀의 난자에 수정해 착상되는 과정에서 간염에 걸린 여성의 사례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의학적으로 충분한 고지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인체에 일어나는 일들에 거의 배제되다시피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아기들의 탯줄이, 사산한 아기가, 사망자의 인체 일부가, 동의 없이 누구나의 세포 일부가 연구 실험에 쓰이고 그에서 제약으로 탈바꿈되어 매매되는 현실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시신을 매매하던 17세기부터 인체와 유전자 체계가 거래되고 있는 현재까지의 모습이 그다지 변화가 없어 보인다. 인류는 과연 발전하여 온 것인가 의심이 들 뿐이다.

 

이제 기술 위주의 세계상에 접어들어 뇌에 칩을 심어 외부에 대상들을 제어하고 기억과 사유의 일부를 클라우드 서비스나 데이터 전송 등의 기술을 기반으로 외부 컴퓨터와 AI에 도움을 받는 시대가 코앞이라고 한다. 하지만 왜 BCI 기술이 인간이 컴퓨터를 제어하기만 하고, 역으로 AI가 인간을 제어하는 방식으로 쓰일 거라고는 우려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미 기술은 인간의 생각을 AI가 읽고 해석하고 문자와 영상으로 제시할 수도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각 기지국에서 전파되는 주파수 대역들을 이용해 낱낱의 사람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까지 파악 가능한 시대이기도 하고 말이다. 넛지 같은 행동경제학이나 콜드리딩이나 다크아트 같은 최면과 사회공학 데이터까지 접근 가능한 AI가 향후 발전한다면 인간에게 어떠한 미래가 펼쳐질지는 충분히 예견 가능한 경우의 수가 아닌가?

 

그래서 더욱 일부 식자층은 발전한 AGI가 범죄국가에서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 해당하는 사안이 있는 국가에 대한 침공과 지도부 교체가 가능한 강력한 권한이 있는 제도를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세계미래보고서 2024-2034]에서 인터뷰에 참여한 전직 OECD 관계자) 벤 괴르첼은 [1984]와 같은 파시스트 체제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이 역시 [세계미래보고서 2024-2034]에서의 발언)

 

기후위기설이라는 종말론적 환경주의로 각국과 각국의 국민에게 불안을 조장하며, 통제사회에 접어 들어가는 형국에서, 이젠 AI의 발전으로 위협과 불안 심리를 갖는 대중의 심리를 이용해, 대놓고 통제사회, 전체주의 사회로 나아가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부가 정점으로 흐르기 위해 대중이 희생되고 노예가 되던 과정은 멈춘 적이 없다. 이제는 그 과정이 정점으로 향하며 인권이랄까 자기 주권에 대한 그리고 자유에 대한 파국에 다다라가는 것이다. 그저 약간의 편리와 배부름에 만족하며 대중은 그에 대해 고려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본서에서 이야기하는 인체에 대한 주권이란 것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권리인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걸 제한받고 침탈당하면서도 얼마나 손쉽게 순응하고 살아왔는지에 대해,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보며 거의 모든 시대에 다르지 않은 양상이 이어져 왔다는 걸 직시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저항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위정자들은 생각이 다를 것이다. 속아서도, 무턱대고 순응하는 데 익숙해져서도 아니라, 아마도 다수에 위정자들은 그들의 이익과 합치되는 바가 있어서이지 않을까?

 

미래를 보면 암담한데 현실을 봐도 그와 별로 다를 바가 없어 참 막막할 뿐이다. 그래도 현실을 역사를 더더욱 알아야 할 일이기에 본서를 권하고 싶다. 품절 내지는 절판된 책이지만 도서관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른의 문답법 - 개싸움을 지적 토론의 장으로 만드는
피터 버고지언.제임스 린지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기기 위한 논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미게 만드는 메시지 전달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답법이다. 메시지 전달이 강하다 보면 저항과 반발이 그만큼 클 수 있기에 논쟁보다는 완만한 대화에 가까운 의사교류를 다루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각의 거짓말 감각은 당신을 어떻게 속이는가 - 저명 신경과 의사가 감각 이상에서 발견한 삶의 진실
기 레슈차이너 지음, 양진성 옮김 / 프리렉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감각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를 인식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사유하기 위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다섯 감각과 그 대상과 사유와 그 대상]인 십이처는 불교만이 아니라 어느 세계에서든 인간에게는 세상을 인식하는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감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그토록 절대적이지만, 비교 대상이 될 가상의 경우(인간과는 다를지도 모를 외계인의 감각 영역)를 가정한다거나 동물들이나 곤충들의 감각과 비교한다면, 과연 우리의 감각은 세상을 인식하는 절대적인 도구이기만 한 것인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동물들의 가청영역과 인간의 가청영역의 차이는 우리의 감각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이야기해 주고 박쥐가 세상을 보는 방식, 돌고래나 코끼리의 소통방식은 우리의 감각은 세상의 부분만을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도 만든다. 하물며 예전 [스펀지]라는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은 백열전등의 필라멘트에 전기가 교차하는 소리를 듣지만, 성인은 들을 수 없다는 것에서도 동일한 사람에게서도 감각의 한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감각에 관한 최신 연구로는, 내가 파란색을 눈으로 보고 뇌에서 접수되는 주파수 대역과 다른 사람들이 파란색을 보는 주파수 영역이 모두 다른 양상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내가 파란색을 보고 뇌에 접수되는 주파수가 있고 보라색을 보고 뇌에 접수되는 주파수가 있다면 다른 사람은 나와 똑같이 파란색을 보면서도 뇌에 접수되는 주파수가 나의 경우에서는 보라색을 볼 때의 주파수로 뇌에서 접수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의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이 말은 우리가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서로 수긍하고 있다지만 서로가 인식하는 세계는 전혀 다른 양상일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각자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담론은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철학적 화두였지만 이제는 과학까지도 대중을 그런 화두에 들어서게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경험하는 공감의 세계도 분명 있기는 하다, 그것이 현실 세계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동시에 똑같은 루시드 드림을 꾸고 그 꿈속에서의 사소한 하나하나의 체험들까지 공유하는 경우는 자아초월 심리학자들이 흔히 보고 하고 있다. 그리고 영국 킹스 컬리지에서는 DMT라는 마약을 이용해 다수에 피험자들을 통한 이세계 경험을 유도해서 기록하고 있으며, 그들의 기록이 모이면서 이들이 경험하는 세계의 지도를 그리게 되었는데 이미 거대한 한 세계의 지도가 거의 다 완성되고 있다고 한다. 과연 우리가 공유하는 감각이나 인식은 뭐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일기도 하는 실제상황의 이야기다.

 

이런 의문과 호기심이 본서에 관한 관심이 일어나게 했고 도서관 도서 목록에 있는 이 책을 놓치지 않게 했다. 본서에서는 다양한 감각 이상과 해당 감각의 체계와 원리를 설명하며 어떤 질병이나 상태가 이상 현상을 불러오는지 뇌과학적이며 생물학적으로 분석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몰입하게 하는 것은 과학적인 원리 이전에 인간의 감각이 확고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사람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표준에서 벗어난 경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후각수용체 유전자 이상부터 일차 후각피질 이상까지 어느 영역에서의 다른 이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지 명백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일반적이라 정의하는 경우와 다른 냄새를 맡는 경우 또 다른 맛을 느끼는 경우가 오히려 보편인 세계가 있다면 어떨까? 시체꽃에서 우리가 바닐라 향이라고 느끼는 향기를 맡고 홍어회에서 딸기향이 느껴지는 세계라면. 또 땀 냄새가 코코아 향이 난다면. 반면에 아기에서 비린내가 나고 샤넬 NO. 5에서 방귀 냄새가 나는 세계라면. 우리가 과연 그 세계의 사람과 같은 정서를 공유할 수 있을까? 초미녀에게 청소할 시기가 다된 정화조 냄새가 나는 걸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가 참아주려 해도 그 세계에서 방문한 방문자가 있다면 방문자인 그녀 자신이 우리 세계의 악취에 이미 우울증에 걸려 버릴 것이다.

 

세상이 도는 현기증으로 걷지도 못하고, 디디는 걸음마다 발이 늘 불타고 있다면, 맛 나는 무엇도 구토가 일게 하는 맛이 나고, 보고 있는 무엇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루라도 견딜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와 공유하는 세계가 동일한 세계라는 걸 확신할 수 없다 해도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감각이 우리 스스로에게 괴롭지 않을 때 살아갈 수 있을 여력이 있을 것이다. 공유할 수 없는 세계라 해도 괴롭지 않는 것이 그보다 우선하는 바탕이 아닌가 싶다. 본서에서 오감 각각과 균형 감각 등에 대한 이상 감각을 하나하나 예를 들다가, 이 모든 감각 이상이, 우리가 보통이라고 하는 상태가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보편적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고통과 괴로움을 불러오는 상태는 아니어야 한다는 감상을 불러올 때쯤, 공감각의 예를 든다. 본서의 영문 제목과도 같은 들리거나 말하거나 생각하는 단어들의 맛을 느끼는 단어의 맛을 보는 남자의 사례나 모든 발음 자체가 시각화되고 음가의 선율 하나하나가 색채로 감각되는 여성의 사례는 우리에게 감각이란 것이 확고하다고만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게도 했다.

 

세상을 인식하는 도구라거나 시스템이기도 하지만 분명 우리에게 우주 인식의 기준인 감각이 이토록 유동적이고 비고정적인 것인가 하는 감상과 그럼에도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어찌 분별하며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동시에 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책에는 다채로운 감각 이상의 경우가 해당 증상자 낱낱의 이름과 함께 등장한다. 각 감각이 이루어지는 체계와 이상 증상의 원리를 밝혀주기도 하는데 한 명 한 명의 사례와 함께 다가와 제법 밀접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원제가 감각의 거짓말보다는 더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대중적인 관심을 끄는 제목으로 독자에게 선보이기보다 문제의식을 지닌 책처럼 제목을 정하다 보니 대중성이 다소 떨어진 경향은 있지만 진지한 문제의식만큼이나 재미도 있는 책이다. 감각과 감정이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을 자각하는 일진일 테니 스스로가 궁금한 대다수에 사람들이 감각이나 감정에서부터 알음알이를 시작하고 싶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행이 실천이라면 이론은 감각과 감정을 알아가는 데서 시작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런 분들께서 읽어 보실 만하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