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시장 - 생명공학시대 인체조직의 상품화를 파헤친다
로리 앤드루스.도로시 넬킨 지음, 김명진.김병수 옮김 / 궁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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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문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의 주제에 대한 다소의 오해가 있었다. 3 국가부터 선진국에 이르기까지 범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장기매매에 관한 내용이기만 한 줄 알고 독서를 시작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깨달았다. 단지 장기밀매의 현실만을 고발하는 책이 아니라, 자기 신체와 유전자에 대한 권리에 관한 책이란 것임을 말이다. 이건 비단 프라이버시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인권과 주권, 자기 자신에 대한 권한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본서는 서문부터 병원에 방문해 검진을 받고 나서 의사의 권유로 주기적인 검진을 받게 된 인물이, (자신도 모르는 자기 인체의 화학물질이 남다르다는 이유로) 주기적으로 인체에서 채취한 물질들을 동의없이 실험에 이용당하고, 결국 생명공학회사에서 그의 몸에서 생성되는 물질에 특허권까지 취득한 것을 알게 되어, 소송을 진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소송은 어떤 결과에 닿았을 것 같은가? 법원은 그의 동의 없이 인체 생성물질을 채취한 것은 부주의했으나, 그의 인체에서 생성된 물질에 특허를 받고 수익을 남기고 있는 의사와 연구자와 생명공학회사(제약사)에게, 그의 인체 생성물질에 대한 권리가 귀속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임신을 기대하는 여성에게 배란촉진제를 주입하고, 생성된 여러 난자 중 일부는 해당 여성에게 착상했으나, 여성은 임신에 실패했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해당 여성의 동의 없이 그 여성의 난자를 다른 여성들에게 착상하여, 다른 여성이 임신하게 되었고, 난자를 도둑맞은 이 여성은 사실을 모른 채 8년을 보내고서야, 자신의 난자로 아이가 태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앓는 질환들의 유전적 변이에도 각각을 선점하는 회사에게 특허권을 주어 뇌 질환, 간 질환, 신장질환 등에 각기 다른 회사가 특허권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유전적 질환들 외에도 천식 같은 일반적인 질환에까지 특허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런 특허권을 취득하기 위한 연구들에 자신의 유전자가 이용당한 것을 해당 질환에 관한 연구 대상이 된 개인들은 모르고 있다.

 

우리 인체에 대한 권리, 우리 자신의 유전자에 대한 주권이 전혀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체의 주권에 대한 쟁점으로 법적 논의가 있으면 과학자들은 인류의 미래와 의학 발전의 가능성이 차단당한다며 반발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올리는 막대한 수익을 생각할 때 이것이 과연 인류의 미래를 위해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건가 의문이 남기만 한다. 사실 예전에도 논의되었다는 유전자에 대한 저작권 인정을 하고서 연구를 지속한다고 해도, 인류의 미래나 의학 발전에 전혀 저해될 소지는 없다. 일부 희귀 난치병 치료제의 가격이 20~30억이라는 기사도 있었는데, 인간이 자신의 인체에 대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 순수하게 인류의 미래와 의학 발전만의 문제가 아닌 건 아닐까 의심한다고 해서 모난 시각만은 아니란 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비정상적으로 왜곡되어, 극부 중에서도 초극부층의 부만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존속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정상적인 자본주의의 시각이라면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하는 것이 아닐까? 미국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퇴색되었다고는 하지만 공정한 발전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또 한 국가에서 내재한 자원을 다른 국가에서 자신들에게만 기술력이 있다는 이유로 아무런 비용지불 없이 강제로 채취해 간다면, 분명 이건 국제적인 지탄과 분쟁을 불러오고 국제 재판소에 국제적 소송으로 비화하거나 전쟁의 빌미마저 될 수 있을 사안이다. 그에 근거해 다음 예를 보자면 (우리는 우리의 2차적인 자원인 작곡이나 문학 또는 미술 창작 등에 대해 지적 재산권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우리의 유전자 체계는 우리 자신의 가장 1차적인 자원인 것이 분명하고, 이는 어느 각도의 시각으로 본다 해도 분명 보호받아야 할 개인의 주권이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마땅히 주장해야 하고 보호 받아야 할 우리의 주권을 침탈당하고도, 거대 제약사의 특허권 주장에 주저앉고 말아야 하는가? 참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17, 18세기와 19세기에는 의학 발전을 위해서나 과학자들의 실험을 위해 또 미술가들의 인체 연구를 위해 시신이 매매되어 해부되고 난자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족이 없는 부랑자들은 자신의 인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기회도 없이 사망과 동시에 시신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저자는 1998년 있었다는 독일의 인체 해부 전시전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전시전을 개최한 인물에게 시신에 대한 권리가 누구에게 있냐고 묻자, 플라스티네이션을 시작해 인체를 설정한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서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21세기의 중국에서도 인체 해부 전시회는 열렸었고, 유투브에 의하면 이때의 시신에 대한 음모론에 가까운 괴담이 돌고 있기도 하다. 과연 17세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친지의 권리에 발전이 없었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본서에서는 이런 우리 자신에 대한 권리를 이야기하며, 사망자의 뇌하수체에서 채취한 배란촉진제를 주입받고 유전적 질환에 걸려 일부는 사망하기까지 한 사례, 인공수정을 하며 의사로부터 정자 세척이란 것에 동의하냐는 질문에 대답했다가, 타인의 혈액으로 그녀 남편의 정자를 세척해 그녀의 난자에 수정해 착상되는 과정에서 간염에 걸린 여성의 사례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의학적으로 충분한 고지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인체에 일어나는 일들에 거의 배제되다시피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아기들의 탯줄이, 사산한 아기가, 사망자의 인체 일부가, 동의 없이 누구나의 세포 일부가 연구 실험에 쓰이고 그에서 제약으로 탈바꿈되어 매매되는 현실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시신을 매매하던 17세기부터 인체와 유전자 체계가 거래되고 있는 현재까지의 모습이 그다지 변화가 없어 보인다. 인류는 과연 발전하여 온 것인가 의심이 들 뿐이다.

 

이제 기술 위주의 세계상에 접어들어 뇌에 칩을 심어 외부에 대상들을 제어하고 기억과 사유의 일부를 클라우드 서비스나 데이터 전송 등의 기술을 기반으로 외부 컴퓨터와 AI에 도움을 받는 시대가 코앞이라고 한다. 하지만 왜 BCI 기술이 인간이 컴퓨터를 제어하기만 하고, 역으로 AI가 인간을 제어하는 방식으로 쓰일 거라고는 우려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미 기술은 인간의 생각을 AI가 읽고 해석하고 문자와 영상으로 제시할 수도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각 기지국에서 전파되는 주파수 대역들을 이용해 낱낱의 사람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까지 파악 가능한 시대이기도 하고 말이다. 넛지 같은 행동경제학이나 콜드리딩이나 다크아트 같은 최면과 사회공학 데이터까지 접근 가능한 AI가 향후 발전한다면 인간에게 어떠한 미래가 펼쳐질지는 충분히 예견 가능한 경우의 수가 아닌가?

 

그래서 더욱 일부 식자층은 발전한 AGI가 범죄국가에서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 해당하는 사안이 있는 국가에 대한 침공과 지도부 교체가 가능한 강력한 권한이 있는 제도를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세계미래보고서 2024-2034]에서 인터뷰에 참여한 전직 OECD 관계자) 벤 괴르첼은 [1984]와 같은 파시스트 체제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이 역시 [세계미래보고서 2024-2034]에서의 발언)

 

기후위기설이라는 종말론적 환경주의로 각국과 각국의 국민에게 불안을 조장하며, 통제사회에 접어 들어가는 형국에서, 이젠 AI의 발전으로 위협과 불안 심리를 갖는 대중의 심리를 이용해, 대놓고 통제사회, 전체주의 사회로 나아가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부가 정점으로 흐르기 위해 대중이 희생되고 노예가 되던 과정은 멈춘 적이 없다. 이제는 그 과정이 정점으로 향하며 인권이랄까 자기 주권에 대한 그리고 자유에 대한 파국에 다다라가는 것이다. 그저 약간의 편리와 배부름에 만족하며 대중은 그에 대해 고려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본서에서 이야기하는 인체에 대한 주권이란 것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권리인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걸 제한받고 침탈당하면서도 얼마나 손쉽게 순응하고 살아왔는지에 대해,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보며 거의 모든 시대에 다르지 않은 양상이 이어져 왔다는 걸 직시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저항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위정자들은 생각이 다를 것이다. 속아서도, 무턱대고 순응하는 데 익숙해져서도 아니라, 아마도 다수에 위정자들은 그들의 이익과 합치되는 바가 있어서이지 않을까?

 

미래를 보면 암담한데 현실을 봐도 그와 별로 다를 바가 없어 참 막막할 뿐이다. 그래도 현실을 역사를 더더욱 알아야 할 일이기에 본서를 권하고 싶다. 품절 내지는 절판된 책이지만 도서관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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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문답법 - 개싸움을 지적 토론의 장으로 만드는
피터 버고지언.제임스 린지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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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기 위한 논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미게 만드는 메시지 전달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답법이다. 메시지 전달이 강하다 보면 저항과 반발이 그만큼 클 수 있기에 논쟁보다는 완만한 대화에 가까운 의사교류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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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거짓말 감각은 당신을 어떻게 속이는가 - 저명 신경과 의사가 감각 이상에서 발견한 삶의 진실
기 레슈차이너 지음, 양진성 옮김 / 프리렉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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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를 인식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사유하기 위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다섯 감각과 그 대상과 사유와 그 대상]인 십이처는 불교만이 아니라 어느 세계에서든 인간에게는 세상을 인식하는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감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그토록 절대적이지만, 비교 대상이 될 가상의 경우(인간과는 다를지도 모를 외계인의 감각 영역)를 가정한다거나 동물들이나 곤충들의 감각과 비교한다면, 과연 우리의 감각은 세상을 인식하는 절대적인 도구이기만 한 것인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동물들의 가청영역과 인간의 가청영역의 차이는 우리의 감각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이야기해 주고 박쥐가 세상을 보는 방식, 돌고래나 코끼리의 소통방식은 우리의 감각은 세상의 부분만을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도 만든다. 하물며 예전 [스펀지]라는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은 백열전등의 필라멘트에 전기가 교차하는 소리를 듣지만, 성인은 들을 수 없다는 것에서도 동일한 사람에게서도 감각의 한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감각에 관한 최신 연구로는, 내가 파란색을 눈으로 보고 뇌에서 접수되는 주파수 대역과 다른 사람들이 파란색을 보는 주파수 영역이 모두 다른 양상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내가 파란색을 보고 뇌에 접수되는 주파수가 있고 보라색을 보고 뇌에 접수되는 주파수가 있다면 다른 사람은 나와 똑같이 파란색을 보면서도 뇌에 접수되는 주파수가 나의 경우에서는 보라색을 볼 때의 주파수로 뇌에서 접수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의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이 말은 우리가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서로 수긍하고 있다지만 서로가 인식하는 세계는 전혀 다른 양상일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각자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담론은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철학적 화두였지만 이제는 과학까지도 대중을 그런 화두에 들어서게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경험하는 공감의 세계도 분명 있기는 하다, 그것이 현실 세계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동시에 똑같은 루시드 드림을 꾸고 그 꿈속에서의 사소한 하나하나의 체험들까지 공유하는 경우는 자아초월 심리학자들이 흔히 보고 하고 있다. 그리고 영국 킹스 컬리지에서는 DMT라는 마약을 이용해 다수에 피험자들을 통한 이세계 경험을 유도해서 기록하고 있으며, 그들의 기록이 모이면서 이들이 경험하는 세계의 지도를 그리게 되었는데 이미 거대한 한 세계의 지도가 거의 다 완성되고 있다고 한다. 과연 우리가 공유하는 감각이나 인식은 뭐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일기도 하는 실제상황의 이야기다.

 

이런 의문과 호기심이 본서에 관한 관심이 일어나게 했고 도서관 도서 목록에 있는 이 책을 놓치지 않게 했다. 본서에서는 다양한 감각 이상과 해당 감각의 체계와 원리를 설명하며 어떤 질병이나 상태가 이상 현상을 불러오는지 뇌과학적이며 생물학적으로 분석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몰입하게 하는 것은 과학적인 원리 이전에 인간의 감각이 확고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사람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표준에서 벗어난 경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후각수용체 유전자 이상부터 일차 후각피질 이상까지 어느 영역에서의 다른 이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지 명백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일반적이라 정의하는 경우와 다른 냄새를 맡는 경우 또 다른 맛을 느끼는 경우가 오히려 보편인 세계가 있다면 어떨까? 시체꽃에서 우리가 바닐라 향이라고 느끼는 향기를 맡고 홍어회에서 딸기향이 느껴지는 세계라면. 또 땀 냄새가 코코아 향이 난다면. 반면에 아기에서 비린내가 나고 샤넬 NO. 5에서 방귀 냄새가 나는 세계라면. 우리가 과연 그 세계의 사람과 같은 정서를 공유할 수 있을까? 초미녀에게 청소할 시기가 다된 정화조 냄새가 나는 걸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가 참아주려 해도 그 세계에서 방문한 방문자가 있다면 방문자인 그녀 자신이 우리 세계의 악취에 이미 우울증에 걸려 버릴 것이다.

 

세상이 도는 현기증으로 걷지도 못하고, 디디는 걸음마다 발이 늘 불타고 있다면, 맛 나는 무엇도 구토가 일게 하는 맛이 나고, 보고 있는 무엇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루라도 견딜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와 공유하는 세계가 동일한 세계라는 걸 확신할 수 없다 해도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감각이 우리 스스로에게 괴롭지 않을 때 살아갈 수 있을 여력이 있을 것이다. 공유할 수 없는 세계라 해도 괴롭지 않는 것이 그보다 우선하는 바탕이 아닌가 싶다. 본서에서 오감 각각과 균형 감각 등에 대한 이상 감각을 하나하나 예를 들다가, 이 모든 감각 이상이, 우리가 보통이라고 하는 상태가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보편적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고통과 괴로움을 불러오는 상태는 아니어야 한다는 감상을 불러올 때쯤, 공감각의 예를 든다. 본서의 영문 제목과도 같은 들리거나 말하거나 생각하는 단어들의 맛을 느끼는 단어의 맛을 보는 남자의 사례나 모든 발음 자체가 시각화되고 음가의 선율 하나하나가 색채로 감각되는 여성의 사례는 우리에게 감각이란 것이 확고하다고만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게도 했다.

 

세상을 인식하는 도구라거나 시스템이기도 하지만 분명 우리에게 우주 인식의 기준인 감각이 이토록 유동적이고 비고정적인 것인가 하는 감상과 그럼에도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어찌 분별하며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동시에 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책에는 다채로운 감각 이상의 경우가 해당 증상자 낱낱의 이름과 함께 등장한다. 각 감각이 이루어지는 체계와 이상 증상의 원리를 밝혀주기도 하는데 한 명 한 명의 사례와 함께 다가와 제법 밀접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원제가 감각의 거짓말보다는 더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대중적인 관심을 끄는 제목으로 독자에게 선보이기보다 문제의식을 지닌 책처럼 제목을 정하다 보니 대중성이 다소 떨어진 경향은 있지만 진지한 문제의식만큼이나 재미도 있는 책이다. 감각과 감정이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을 자각하는 일진일 테니 스스로가 궁금한 대다수에 사람들이 감각이나 감정에서부터 알음알이를 시작하고 싶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행이 실천이라면 이론은 감각과 감정을 알아가는 데서 시작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런 분들께서 읽어 보실 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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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치료에서의 문학작품 활용
임성관 지음 / 시간의물레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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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치료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내적 치유에 합당할 텍스트들이 제시된 자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본서를 읽었다. 기대와는 다르게 다양한 매체가 활용될 수 있다는 방편은 알게 되었지만 치료에 적용할 만한 문학이나 영화 등에 자료들이 제시된 저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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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걸어라 -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미래를 창조한다
네빌 고다드 지음 / 서른세개의계단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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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네빌 고다드와 같은 신사상(새생각)으로 분류되는 가르침에 대하여 반만 공감하는 사람이다. 씨크릿도 그렇지만 신사상이 세상과 마음의 이치에 일부를 전체인 양 해석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명상, 의식이나 철학 분야에서도 크리슈나무르티와 오쇼 라즈니쉬 같은 경우도 세상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담아 풀어나가야 할 논제들에 대해서마저 깨달음이라는 스펙트럼 하나로만 풀이해, 오히려 하나에 매몰된 바보를 양산하는 가르침을 펼치고 있기도 하기에, 신사상류는 딱 그와 같은 편향이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사실 신사상의 가르침은 마음의 창조성에 대해서 대부분 맞는 이야기를 한다고 보인다. 하지만 어느 경계에서는 꽉 막힌 통수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네빌 고다드가 말하는 만드는 자와 수용하는 자가 합일해야 하며 우리가 끌어당기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는 대목에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는 대목과 세상을 탓하는 건 거울을 깨려는 것이니 거울이 아닌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에만 주의하면 된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하며 저항해야 할 가르침이라는 생각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자신의 책임이지 남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 네빌의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에 사람들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은 부모와 가족, 자라면서 겪어온 기성세대들이 만든 사회에서 주입된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야 할 것이라고 깨닫는 데서부터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속에서 자라오며 만들게 된 선입관, 편견, 세상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모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서만 기인해 만든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적 경제적 배경 또한 어느 시점까지는 자신의 권한이나 능력으로 만든 게 아니라는 말이다. 로스차일드 가문, 모건 가문, 로케펠러 가문에서 태어난 자와 차상위 계층에서 태어난 자가 겪는 것은 비단 재정적인 차이만이 아니다. 그들이 그 속에서 받는 사회적인 계층적인 대우도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내적 자원들도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외적 내적 자원의 차이를 자기 자신에게서만 원인이나 책임을 찾는다는 생각 자체가 넌센스다.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미국과 태국 그리고 러시아와 이슬람 지역에서의 관점과 처우는 현격히 다르다. 사람은 시대적이거나 지역적인 문화와 풍속에 따라 다른 가치관을 형성하며 자라난다. 집안 환경, 부모의 교육 수준이나 도덕성의 차이에 따라 다 다른 자극을 받고 다른 반응성을 드러내며 자라날 수밖에 없고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에 있어서든 세상에 대한 관점이나 반응, 행위의 동인 등에 있어서든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만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있고 자기에게 기인한 것이든 외부에 드러나는 것이든 근원적인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말에 혹하고 통제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대에서 안정감을 찾고 안심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최면에서까지 서양에서는 최면 제안이라고 하지 최면 암시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최면가가 제안을 할 뿐 선택은 최면에 빠진 당사자가 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비판적 사고를 돌아가는 단계만 거치면, 상온에 동전을 손바닥에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화상을 입게 할 수도 있고, 암시만으로 눈을 안 보이게 하거나 벙어리가 되도록 만들 수도 있으며, 같은 공간에 있는 한 명을 못 보게 만들거나 머리 속에서 특정 날짜나 숫자, 단어 등을 기억도 인식도 못 하게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비판적 사고만 제대로 우회하게 하면 살인도 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과연 제안인가? 당신의 의지로 선택했다고 속고 싶은가? 세상의 모든 게 자신의 통제권 아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환경이나 관점이나 행위의 동인에 마저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없는 일이다.

 

인과라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단지 나에게서 모든 게 시작된다는 우격다짐만으로 원인이 단정 지어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거울의 문제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세상이 거울인 건 맞다. 하지만 거울이 문제인 것을 자신만 바꾸면 된다고 정의해 버리고 말면 더불어 변화하는 데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오래고 오랜 세월과 역사가 흘러야 하는 것이다. 거울이 흐리면 닦아야 하고 뒤틀린 거울이라 엉클어진 모양으로 이상한 모양으로 대상을 비춘다면 마땅히 깨어버리고 바른 거울을 다시 세워야 하는 일이다. 지금의 시대가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떠했을지 돌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답이 될 것이다. 시대를 걱정하고 시대를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독재와 권력에 휘둘리는 시대를 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앞서 말한 시대적 지역적 한계를 다시 예로 든다면 1950년대의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한국에서의 대응과 현재의 한국에서의 그에 대한 대응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성 소수자에 대한 관점이 어느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주류가 되는 의식이 다른 것처럼 또 성의식에 대해서도 과거 남자가 여자들을 많이 경험하면 능력자라 하고 여자가 남자가 많으면 문란한 년이라고 하던 시절을 돌아봐도 그렇다. 물론 모든 건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뀐 결과이겠으나, 시대의 주류 또 우리의 상식 속에 세계의 주류가 되는 의식들이 바뀐 결과, 대부분에 사람들은 그 시대 그 지역의 주류에 따라 살아간다. 작은 변화든 큰 변화든 상식이 바뀐 사람들의 숫자가 임계치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세상의 상식이 바뀌고 바뀐 상식을 대세라며 따른다. 임계치의 사람들 곧 세계가 바뀌어야 낱낱의 사람도 쉽게 바뀐다.

 

네빌 고다드뿐만이 아니라 크리슈나무르티 등의 깨달았다는 사람들까지 정치나 세계가 변하길 기대하지 말며 자기 자신의 변화에만 주목하라고 이야기한 걸 그 저작에서 읽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임계치의 사람들이 변화할 때까지 모두가 자기 자신의 변화에만 주목한다면,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변화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함께 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변화는 오래고 오랜 세월이나 역사 뒤에야 올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창조자이기도 수용자이기도 하지만 항거하는 투사가 되기도 싸우는 전사가 되기도 해야 한다. 창조하고 만끽하려면 그리고 그 과정을 자신만이 아닌 모두와 함께하려면 우리는 때론 세상과 관념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저항하고 싸워야 할 순간이 있다. 그렇기에 창조만을 이야기하는 네빌 고다드는 넓은 대양을 이야기하며 바다에 나서려는 이들의 입장을 간과하고 있기도 하다고 보인다. 대양으로 항해하려면 일단 바다에서 시작해 나아가야 한다. 능숙한 항해자는 바다부터 대양까지 다 자유로워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마음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본서의 대부분에 내용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진실과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오래전 집필되었을 텐데도 시대를 건너 전해지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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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에서 어느 님께서 남기신 댓글 덕분에 이 리뷰에 대해 약간의 더하는 이야기가 필요할 거라 생각되어 글을 남긴다.

 

제가 남긴 리뷰에도 불구하고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통제권이 자신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에 대해, 남 탓보다 자기 책임이라고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남 탓을 하지 않는 것과 세상 모든 것이 자기만의 역량에 따른 거라고 믿는 과대망상은 다른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자기의 영향력만이 절대적이라 믿는다는 것은 과도한 자만이며 오만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말했던 대목들을 제외하고 다른 예들을 들겠다. 가장 일상적인 예로 바람을 피우는 배우자나 연인을 보자. 그 또는 그녀가 바람을 피우는데 대체 얼마나 자신이 잘하면 바람을 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런 경우의 사례도 없지는 않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바람을 피우는 사람은 상대가 어떤 관심을 보이던 무엇을 선물하고 어떤 신경 쓰던 일상에서 얼마나 자신에게 주의하고 어떤 배려를 하고 잠자리에서 얼마나 혼신을 다하건 간에 상관없이 반드시 바람을 피운다. 애초에 바람을 피우는 사람이 자기 의사와 자기 통제권을 행사하며 바람을 피우는 것을, 내가 이렇게 하면 바람 피지 않으리라 믿고 기대하는 자체가 잘못된 접근이라는 말이다. 연인이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 게 자기 탓이라면, 부모가 바람을 피운다면 그럼 그건 자식인 자기 탓이라 할 텐가? 나의 삶에 통제권이 자기에게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통론적인 이야기이지, 사람의 삶에서 관계성이나 환경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배제하고서 자기에게만 모든 통제권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명확히 보면 바람을 피우는 상대 역시 자기 삶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지 않은가?

 

만약 자기가 유동 인구가 적절한 도심에서 식당이든 장사든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자. 자기가 하는 장사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으며 길목도 좋아 적정 수준의 매출이 보장되는 사업이어서 마음 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하자. 갑작스런 팬데믹으로 인한 적자나 파산은 어쩔 거란 말인가? 이것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단 한 번도 없었던 팬데믹이라는 악재를 고려하지 못한 자기 탓일까? 이건 자기 통제권을 벗어난 천재지변하고 다름이 없는 경우이고, 일부에서 확신하듯 천재가 아니라 인재였다고 한다 해도, 일반인 개개인이 이 시기에 반드시 일어나리라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런 경우를 예상했어야 한다며 자기의 영향력과 자기의 통제력이 절대적이지 못했음을 한탄한다면, 이건 거의 아니 거의도 아니고 완전히 미친 거라는 말이다.

 

또 아이즈원 때였나? 오디션에서 출전한 멤버들의 소속사측에서 방송사 관계자들에게 로비를 하여 비리와 부정을 저질러 뽑혀야 할 멤버가 떨어지고 떨어져야 할 멤버가 뽑힌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도 떨어질(그러나 결국 뽑힌) 멤버가 끌어당김의 법칙을 잘 이용한 거라고 보아야 하나? 그럼 붙을(그런데 떨어진) 멤버가 끌어당김의 법칙대로 시각화를 하고 파종을 하고도 떨어졌다고 한다면 어쩔 텐가? 세상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자기의 통제권대로만 자기의 소망대로만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나를 통해 자기들의 이윤을 추구하는 타인들의 영향이 때로는 절대적일 수도 있는 게 현실 세계이다. 때론 내 의지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나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이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일의 과정과 원인을 명백히 알아야 지금의 현실이든 내일의 현실이든 바꿀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외부의 영향력과 나와 관계된 일들 가운데 내가 바꿀 수 있는 대상과 바꿀 수 없는 대상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이차적으로 세계가 잘못된 부분은 그걸 직시해야 나와 타인의 현실을 바꿀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바람을 피우는 연인에게 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직시해야 하고, 팬데믹은 내 탓도 남의 탓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비리와 부정을 발견하고도 모든 것은 내 책임이요 내 탓이다라고 과대망상에 빠질 일이 아니라, 거울(세상, 기성세대가 만든 원칙이나 사회적 관행)이 문제라면 거울을 깨야 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세상은 나만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모두의 의지와 모두의 욕망이 실현되는 곳이며, 그 실현의 과정에서 나의 의지와 욕망이 좌절되는 경우도 있고 그래야 마땅한 경우도 분명히 있다는 걸 인정할 때, 성숙한 영혼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당신만이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는 명징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사타니즘의 근본원리를 아는가? 그건 너는 행복하라이다. 다만 단서가 붙는다. ‘네가 행복하는 데 다른 무엇도 고려하지 마라. 다른 이의 상황도 세상에 대해서도 말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에서는 말한다. 부는 무한한 것이며 성공 역시도 무한한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고 제한 없는 것이니 주어지는 모든 것을 그대로 꿈꾸고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무한한 것은 없다. 재화는 한정되고 필요한 요직의 정원과 경쟁인구는 한정되어 있다. 누군가가 얻는 부동산이나 돈은 다른 이의 상실이 되고 누군가가 얻는 승진은 누군가의 탈락이나 실직을 불러올 수 있다. 자기가 성취하기에 합당하다면 성취해야 당연하겠으나, 비리와 부정으로라도 성취하겠다면 또 나의 성공으로 타인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면, 그건 사타니즘의 행복 원리와 다름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행복이나 성취가 악마주의의 부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성취와 성공이 아니라 무엇이 나은 것인지를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때론 정의의 실현을 위해 나의 좌절이나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다. 성공과 성취가 다가 아닐 것이다. 내 마음이 의심하지 않고 진정으로 수긍할 수 있는 것이 진정으로 따라야 할 길이다. 남의 주장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심하고 궁구하는 과정을 거쳐 검증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게 아무리 성현의 말씀이던 성자로 칭송받는 이의 말씀이던 간에 말이다. 네빌 고다드의 말이건 조셉 머피의 말이건 밥 프록터의 말이건 론다 번의 말이건 의심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스스로가 타인이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세뇌하도록 허락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것도 사타니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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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YY 2024-04-1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크릿을 처음 읽은 2008년부터 작년까지는 선생님처럼 믿었습니다. 저는 영혼도 없다고 믿었던 사람이고 현실에는 한계가 존재하니 모든 이가 희생 없이 고통 없이 모든 행복을 누릴 순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작년 어떤 경험을 한 뒤 저는 수십 년 간 미워했던 성경을 집어 들었고 이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저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하나님, 오직 의식만이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분은 보이는 것도 모두 만들었고 보이지 않는 것도 만들었고 시간과 종말과 무한한 다중우주도 동시에 만드셨습니다.
그 힘에 한계를 규정하는 것 자체가 이성(세상의 왕,사탄,헛된목자,파라오)이 보여주는 환상이며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저도 작년까지는 종교란 것은 전혀 믿지 않고 논리와 이성이 제일이라 믿고 살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글을 써도 이성적인 분들을 설득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구와 수단으로는 그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글은 오해를 낳고 생각은 혼돈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오직 경험만이 모든 것을 증명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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