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칭 2 Watching 2 - 시야를 넓힐수록 마법처럼 이루어진다 왓칭 시리즈
김상운 지음 / 정신세계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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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키워드로 수렴되는 내용이다.

셀프1, 셀프2, ( 동시에 공간)

 

셀프1은 물질적 육체의 나로 자신을 육신에 한정시킬 때 육신으로 수렴되는 한정된 자아상으로 드러난다. 셀프2는 여러 차원의 중첩된 몸이기도 하고 동시에 모든 공간으로 확산되어 가는 무한의 자아상이다. 셀프1을 개체아, 셀프2를 섭리나 신(신과 합일함)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셀프1은 구체화되어 물질적이거나 상세한 사고와 폭이 좁은 한정된 사고를 할 때 유익하고 셀프2는 발상하고 상식을 깨는 창의적 사고에 유익을 준다.

 

수학적이고 물질적 대상을 떠올릴 때는 자신의 몸을 의식하는 과정이 유리하고 창의적 발상에서는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유리하다.

 

창의적 문제 해결에서도 공간상의 또는 시간상의 거리를 큰 폭으로 잡고 바라보면 문제 해결에 유익하다. 학습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두는 학습도 효과적이다. 높고 넓은 공간과 좁은 공간에서 번갈아 공부하는 것도 학습 능률향상에 좋다.

 

(넓거나 높은 천정 등) 공간이 확보되는 것은 정신이던 육체던 질환이 있는 환자의 회복에도 유익하다. 그리고 통증도 내 몸을 떠나 공간 속으로 흩어져 사라진다고 의념할 때 완화되고 사라진다.

 

그뿐만 아니라 공간을 인식하는 것은 슬픔과 분노, 좌절 등과 트라우마, 그리고 현재의 무거움이나 현재의 상태를 그에서 물러나 바라보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 현실에 매몰되어 버릴 때 시간상의 공간인 오랜 세월 후의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또는 제3자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관찰하는 게 효과적이다.

 

몸 밖이나 몸 안의 공간을 인식하는 것은 마음 수행과 변성의식을 가져오는 모든 수행에서도 유익하다. 그렇게 공간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뇌파가 바뀌고 의식이 변환된다.

 

그 외에 인상적인 건 샘 해리스의 [자유의지는 없다]에서 주목하던 실험과 같은 예를 들며, 우리가 행동을 결정하기 전에(뇌에서 결정하기 전이나 지시사항을 전달받기도 전에) 우리 뇌가 이미 행동을 결정 내리는 작동을 한다는 내용을 근거로, 우리는 육체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저자는 더 나아가 뇌나 육체가 진정한 자신이 아니며 우리는 무한한 공간에 존재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주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과학적 사실과 여러 학자의 연구 그리고 여러 인물의 실례가 제시되고 있다. 그로 해서 상당히 설득력 있게 주제를 수긍하게 한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과 저자를 통해 새로이 주목하게 된 내용들까지 모두 관심 분야이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맥락 지어보니 좀 더 개인적인 과거의 잔재와 현실과 수행에 있어서 보다 나아간 시각을 갖게 된다. 안 읽었더라면 후회도 못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니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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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칭 2 Watching 2 - 시야를 넓힐수록 마법처럼 이루어진다 왓칭 시리즈
김상운 지음 / 정신세계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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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과 저자를 통해 새로이 주목하게 된 내용들까지 모두 관심 분야이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맥락지어보니 좀 더 개인적인 과거의 잔재와 현실과 수행에 있어 보다 나아간 시각을 갖게 된다. 안 읽었더라면 후회도 못했을 텐데 생각이 드니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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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붓다
민희식 지음 / 블루리본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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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과 신약성서]의 전반부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상세히 서술되어있다. [법화경과 신약성서]에서는 논조 자체가 신약성서가 불경을 베낀 것이라는 투를 내어 보이는데 본서는 그런 면이 다소 적다. 아마 저자분이 본서를 집필한 이후(본서를 전 세계 25개국에서 이미 각국 언어로 출간한 상황 이후)[법화경과 신약성서]를 집필하고 [성서의 뿌리] 시리즈 중 신약편을 이후에 집필하신 모양이다. 본서에서부터 저자 민희식 님께서 아주 약간의 문제의식을 갖게 되어 갔던 게 아닌가 싶은 대목들이 있다.

 

이런 문제의식이 성서를 연구하면 할수록 깊어져서 세계적으로 성서 연구로 저명해지는 과정에서도 [성서의 뿌리 구약편]에서는 하나님을 악마로 치부하기도 하고 구약이 날조되고 조작된 것이다라고 결론 짓기도 하며 [성서의 뿌리 신약편][법화경과 신약성서]에서는 신약성서가 이전의 종교들의 교리와 기록을 참조해 짜깁기한 것이며 예수는 실존하지 않았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본서의 11장 계보와 족보편에서는 예수의 계보(족보)와 부처님의 계보를 비교 대조하는데 기독교인들도 이미 아실 것이듯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계보는 판이하게 다르다. 마태와 누가 두 명 중 한 명 또는 둘 다의 기록이 날조가 아니라면 예수라는 한 인물의 계보가 이렇게 다를 수 없을 것이다.

 

12장 수태고지와 탄생편을 보면 마태와 누가는 예수의 탄생지를 베들레헴이라고 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갈릴리의 나사렛을 탄생지로 기록하고 있다. 다수(마태와 누가)가 맞겠거니 하려 해도 1부 중반의 기록을 보니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은 예수의 이종사촌 동생이다. 그렇다면 그저 생판 남인 마태누가보다 예수의 엄마에 여동생(이거나 언니)의 아들인 요한이 기록한 내용이 더 맞으리라는 판단은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마태와 누가는 왜 예수의 탄생지를 베들레헴이라고 했을까?

 

그건 당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에서 나오며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거라는 전승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런 전승이 있다 보니 이 틀에 예수를 합치시켜야 그가 구세주라는 대중의 믿음을 확고히 할 수 있으리라 판단해 예수의 양부 요셉의 계보와 예수의 탄생지를 조작한 것일 거라는 논리적 귀결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분이 이미 [성서의 뿌리 신약편]에서 먼저 언급했었듯 요셉의 자식이 아닌 예수에게서 요셉의 계보가 이어진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누군가가 너의 후손 중에서 미래의 어떤 인물이 태어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걸 듣고 자신의 후손 중에서가 아닌 미래의 후손이 입양한 자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판단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이는 하나님이 하셨다기엔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만약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그가 메시아로 올 거라면 먼 훗날 어느 시기 나의 아들이 인간으로 임해서 너희 모두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명백하게 이야기하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말도 안 되게 다윗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했겠는가? 게다가 다윗의 후손도 아니고 태어난 곳도 하나님이 말씀한 곳이 아니라면 더더군다나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성서와 불경을 대조해 기독교와 불교의 유사함을 이야기해 보고자 했던 저자는 이런 사소한 문제들을 인식하면서 시작된 의문이 증폭되는 과정을 거치며 끝내 기독교와 예수 더 나아가 유일신을 부정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종교도 신앙도 하나하나의 믿어 마지않던 바들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 수 있는 문제인 것도 사실이다. 성서 연구가들은 동방박사라는 세 사람의 예수 탄생 경배를 위한 왕림(브라만교의 성자 크리슈나의 역사를 마태가 차용하여 날조한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동방박사 왕림도 헤롯왕의 유아 살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예수의 성스러움과 남다름을 증거하는 내용인데도 말이다)도 실제가 아니라고 결론 지었다고 한다. 자신의 동복이부 형제들과 이종사촌 형제들까지 신도였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아마도 예수라는 존재가 실제했던 것은 맞으나 그를 구세주라는 신앙의 대상으로 만든 것은 과장과 조작도 한몫 제대로 했지 않나 싶다.

 

물론 본서의 대부분에 내용은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두 종교 사이의 유사성을 주목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책 같다. 기독교인과 불교인의 화합과 이해를 위한 책이 아닌가 싶지만, 본서를 통해서 아니 꼭 본서를 통하지 않더라도 기독교의 역사와 기록을 사실과 대조하면서 실상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기독교인일 수 없을 것이다.

 

붓다께서는 예수보다 560년 이상 먼저 태어나셨고 예수 당시 중동과 유럽 전역에는 불교가 전파된 이후이다. 유럽에는 예수 이전 세대에 만들어진 불상들이 출토되기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예수의 탄생부터 사망까지의 평생에 대한 역사와 그의 가르침 전반이 불교 경전의 내용과 동일하다면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거의 대부분이 불교라는 원본을 복사하고 짜깁기한 표절이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해도 상식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비교종교학이나 종교연구가들은 아마도 이미 그와 같은 결론에 거의 이르지 않았나 싶다. 저자가 인용하거나 언급하는 내용들과 저자가 천착하여 파헤친 내용들이 그에 대해 증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종교가 마음의 안정을 준다면 다행이지만 오히려 혼란과 동요를 주고 분열과 충돌을 야기한다면 그 종교의 실상도 바로 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더라도 믿겠다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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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크래프트 - 자유로운 영혼의 삶
박한진.박기주 지음 / 성숙한삶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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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에 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깊었어서 [모던 매직]이라던가 [마법 입문]은 탐독해 보기도 했고 [헤르메스학 입문]1년에 걸쳐 실행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 변화라는 면에서 보면 실제적 변화를 체감한 적은 없다. [헤르메스학 입문] 자체가 의념이랄까 응념이랄까로 실행하는 것이고 다른 차원을 여행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에 이와 같은 수행 체계는 분석 심리학의 적극적 명상(적극적 심상화)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되신 도널드 마이클 크레이그 씨는 [모던 매직]에서 현실 세계에서 실제적 변화를 가져오는 체계가 마법이라고 말씀하고 있기에 세레모니얼 매직 계열의 의식 마법과는 다른 마법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찾아보는 건 오히려 [에노키안 매직] 같은 더욱더 의식 변화로만 가능한 마법이었다. 그러다가 [위치크래프트]라는 본서를 알게 되었고 관심이 갔기에 읽어보게 되었다.

 

본서에서 박한진 저자는 세레모니얼 매직 계열을 다소 폄하하기도 하는데 그 사상 체계 자체가 하나의 종교적인 도그마이상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위치는 위치, 위카, 위칸 등으로 세분화하기도 하지만 페건과 함께 자연의 힘을 중시하는 자연주의이고 실천 마법이지만, 마법사로 분류되는 세레모니얼 매직 수행자는 이론과 이론의 강화에 집중하는 의식적 마법을 중시한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헤르메스든 에노키안이든 마음에 따른 것이라 위치들의 마법보다 못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박한진 저자의 다른 책인 [아우토겐 트레이닝]을 보면 에노키안 매직을 빠르게 실행하는 방식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아우토겐 트레이닝]은 작년 초부터 실행을 하고 있었는데 작년에 부상을 심하게 입고 회복하기까지 기간이 오래 걸려 올해부터 다시 실행하고 있다)

 

저자의 말을 되짚어 보면 세레모니얼 매직은 내적 변화와 내적 여행에 힘을 키우는 마법이고 위치크래프트는 현실 변화를 더 지향한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본서를 읽고 보면 의식, 의례를 중시하는 데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세레모니얼 매직에 대한 책인 [모던 매직][마법 입문]에서도 현실에 영향을 주는 마법 체계들은 익히 보았었다. 아마도 저자가 두 마법 체계를 두 개의 차별적인 맥락으로 분류하기 위해 이렇게 분별해서 서술하지 않았나 싶다.

 

본서를 실제 수행하고자 하는 각도에서 보면 [헤르메스학 입문]과 다름없어 보이는 차원에서 접근한 서술도 보이고 마법에 관해 책으로만 다가서려 한 나의 경우에서는 세레모니얼 매직과의 큰 차이를 잘 모르겠다. 마법원을 불러오고 향과 자연석을 이용한다던가 하는 게 무슨 큰 차이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마법도구가 필요하거나 다른 원소 대응물로 대신할 수도 있다는 건 같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두 마법계열이 다 아스트랄 프로젝션을 부정하거나 배제하지는 않지 않나 싶기도 했다.

 

여기까지 관심은 깊지만 정규 체계로는 비입문인 입장에서 생소한 면을 적어본 것이고, 독자로서 적자면 실제로 해보자고 한다면 상당히 필수적인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서술해준 입문서가 아닌가 싶다. 본서로 입문해서 스스로 이니시에이션을 하며 스스로 공부하고 경험을 쌓아가는 솔리터리 위치가 된다면 이후 전문적인 위치, 위카, 위칸들과 그룹을 이루는 코번 위치로 가는 길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독자적인 수행자가 아니라 그룹의 힘을 믿는 사람들은 검색해보면 국내에도 마법사와 위치들이 적지 않으며 국제적인 승인을 받은 위칸도 간혹 보이는 상황이다. 모두 J.K. 롤링의 해리 포터호그와트의 영향으로 이런 사례가 많은 것 같은데 이쪽으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전문적인 도움을 받을 길도 있으니 처음으로 들어서는 솔리터리 위치의 길은 본서로 입문하셔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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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과 성배
마이클 베이전트 외 지음, 정미나 외 옮김 / 자음과모음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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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를 읽기 전 본서에 관한 검색을 하고 예비지식이라고 배경 정보를 갖고 있었다. 방송작가와 PD가 미스터리를 추적하다가 예수가 죽지 않고 프랑스로 이주했으며 막달라 마리아와 2세를 낳아 지금까지 후손들이 이어졌고 카톨릭 교회에서도 이 비밀을 알고 있으며 그 후손들에게 지속적인 지원금을 후원해 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정보는 일부 맥락은 맞지만 잘못된 정보였다. 저자들이 방송작가이거나 PD인 건 사실이 아니었고 로마 카톨릭에서도 예수의 후손들에게 후원금을 지급해왔다는 얘기는 낭설이었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며 죽지 않았고 프랑스로 이주했으며 막달라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아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는 부분은 본서의 주장이 확실하다. 이게 본서의 핵심 주장이다. 이 주장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추적을 초반부터 보여주며 미스터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서술해 가고 있기도 하다.

 

본서의 주장이 추적으로 이어지는 과정 대로의 키워드를 보자면 렌르샤토, 소니에르, 카타리파, 성당기사단, 시온수도회, 장미십자회, 메로빙거 왕조, 로렌 공작, 성배, 성경, 외경, 바실리데스, 라자로,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아의 마리아, 십자가 처형 사기 등으로 흐름이 이어진다. 하지만 몇몇 대목은 특히나 성배에 관한 대목은 영화의 속임수인 맥거핀 급이라고 할 수 있을 지경이다. 성당기사단과 성배에 관한 내용으로 전개되며 시온수도회를 소개하는 것은 프랑스 왕조와 시온수도회를 연계 지으며 프랑스 왕조의 비밀과 진짜 성배인 왕조의 혈통에 대한 부분을 시온수도회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결론으로 이를 수 있기는 하지만 그에 부수적인 연결점들에 과도하게 주목하게 만드는 대목은 맥거핀과 다름없었다고 본다.

 

본서는 이 책을 117일에 출간하려다 그러지 못했다고 117일을 중요한 날짜인 양 주지시킨다. 렌르샤토에서 하나의 비밀을 알아내고 교황청과 프랑스 왕조로부터 지속적인 지원을 받은 소니에르라는 인물에 대한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그도 117일에 사망했다. 이후 또 한 번의 117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도 그것으로 끝이다. 이 또한 맥거핀이다.

 

어찌되었든 소니에르는 렌르샤토의 성당에서 어떤 비밀에 접근하였기에 교황청과 프랑스 왕조로부터 지속적인 지원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에서 저자들은 그것이 보물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유형의 보물이 아닌 비밀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 과정에 예수의 신성과 십자가형 죽음을 부인하는 고대 보밀파의 유파인 카타리파 이야기가 등장하고 이들과 성당기사단의 이야기가 전개되며 성배에 관한 궁금증을 증폭시켜나간다. 그리고 성당기사단의 기원을 시온수도회라고 보며 시온수도회의 성립에 프랑스 왕조가 개입하였으며 중요하지는 않지만 장미십자회 등 비밀단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여정에서 귀결되는 것은 성배라는 것의 진짜 의미는 해당 어휘를 풀어나가면 성스러운 왕족, 성스러운 혈통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메로빙거 왕조가 등장한다. 메로빙거의 선조인 종족의 상징은 곰이었고 이는 그들 왕조의 인물들에 우르수스라는 명칭이 이어졌다는 것, 그리고 곰이 웨일즈어로 arth인데 그로 인해 아서왕과도 연계된다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프랑크 왕조의 초기 왕조의 혈통은 이후 그들의 후예인 로렌 공작의 등장과 함께 다음 왕조와 로렌 가의 정략 결합으로 메로빙거의 혈통이 이후 프랑스 왕조로 대대로 이어져 왔다고 한다.

 

성배는 성스러운 혈통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성스러운 혈통은 결국 메로빙거 왕조의 혈통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혈통이 도대체 왜 성스럽다는 것일까?

 

이후 이야기는 성경과 외경들을 근거로 해서 전개되는 데 이전 이야기들이 아마도‘~일 수 있다’ , ‘~ 일 것이다등 가정형 화법과 억측과 비약과 단정이 이어졌던 것과 같이 가정과 억측과 비약과 단정이 어우러져 있다.

 

본서 후반부의 핵심 내용은 바실리데스(서기 120~130년의 저술가)의 주장이 [나그함마디 문서] 중 하나인 [위대한 셋에 관한 두 번째 논문] 사본에서도 발견되며 다른 외경인 [빌립보 복음]에도 등장하듯이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으며 키레네의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 대신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말이다. 또 다른 외경인 [베드로 복음]에 의하면 예수가 사랑한 제자라는 아리마태아의 요셉이라는 인물과 본디오 빌라도는 지인이었다고 한다. 저자들은 그를 근거로 빌라도가 예수와 짜고 그의 십자가형을 사기로 실행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경과 외경을 두루 보면 예수의 십자가형을 받은 처형장이 골고다 언덕이 아니며 무덤 하나가 있는 한적한 언덕이었다고 하며 그렇기에 사기를 치기에 적당했다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이유는 예수가 당시 사회를 전복하려는 과격단체 열심당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만 해도 예수의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칼을 주러 왔다며 칼을 갖추라고 명령했고 칼이 없는 자는 칼을 사라고 종용했으며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제자들이 칼을 지닌 걸 보고는 흡족해했다는 내용들이 신약의 복음서들에도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자들도 도둑이 아니라 열심당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목이 마르다고 하자 해융(스펀지)에 신 포도주를 적셔주었는데 그건 의식을 잃을 때 의식을 차리게 하는 고문용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 기록대로면 그 의식이 깨어나게 한다는 신 포도주를 입에 적시고 예수는 오히려 사망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게 마취약으로 죽은 것처럼 만들어 처형된 것처럼 사기를 쳤던 것이라 단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형벌과 처형을 감당한 건 예수가 아니며 키레네의 시몬이었고 예수는 숨어서 그 과정을 훔쳐보기만 했다는 주장이다. 예수에 대한 기독교의 기본 주장과는 대치되지만 많은 기독교 고대 종파와 외경들에서 언급되는 내용이기에 무조건 배척할만한 내용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아내인 막달라 마리아와 프랑스로 이주해 대를 이어 프랑스 왕조로 자신들의 혈통을 이어나갔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아내라는 주장의 근거를 저자들은 예수의 물을 포도주로 바꾼 첫 이적에서도 찾는데 당시 예수가 만든 분량의 포도주는 600리터로 포도주 800병에 이르는 것으로 이만큼이면 큰 잔치에서 쓰이는 양이고 당시에 참석자들이 신랑을 불러 칭찬하는데 그 시대에는 결혼식 이후 잔치를 주관하는 것은 신랑으로 예수가 포도주를 대접했다면 바로 예수 자신의 결혼이라는 주장이다. 또 당시 예수는 랍비라고 불렸는데 유대교 율법서를 보면 결혼해야만 랍비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의 이동 경로가 굉장히 먼 거리인데도 성경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연이어 등장했다고 하는데 당시 남편과 동행하지 않고는 여성에게 이동의 자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부활시킨 라자로의 여동생인데 예수에게 사망 소식을 알리고 예수가 당도했을 때 상복을 입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도착 후에도 나오지 않다가 예수가 불러서 나왔다고 한다. 그에 대해 저자들은 당시 관습으로는 상복 입은 여자는 밖에 나올 수 없고 오직 남편의 부름에 의해서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혼인한 상태였다는 것이 저자들 주장이다. 라자로의 여동생과 막달라 마리아와 향유로 예수의 발을 씻어준 베다니아의 마리아를 저자들은 모두 한 인물로 보고 있는데 그에 대한 근거가 명확한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예수가 자신은 독신주의자라고 언급한 적이 없으며 언제나 결혼에 대해서 중요하고 반드시 치러야 하는 중대사로 언급했으며 결혼한 사람만이 될 수 있는 랍비가 된 것만으로도 그가 결혼했다는 증거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예수에게 후손이 있었다는 건 빌립보 복음서라는 외경에서 인자의 아들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는 걸 근거 삼고 있다.

 

나로서는 예수가 살아남았다는 건 믿어지는데 그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것과 프랑스로 이주해 메로빙거 왕조의 선조가 되었다는 건 억측이라고 생각된다. 살아남았다는 것에 관해서는 예수 시기와 예수 사후로 일컬어지는 시기의 초기 기독교 분파들과 아포크리파들이 그의 십자가형 사망을 부정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예수의 신성마저 부정하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예수의 사망과 부활을 믿지 않았거나 사실이 아닌 걸 알고 있던 대중이 많았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이런 판단에 사실적 배경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많은 크리스찬들이 본서를 욕하면서도 본서의 내용처럼 예수님께서 살아서 행복한 삶을 사셨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할 것 같다. 본서는 학술서나 연구서라기보다는 소설이라고 생각되지만 읽어보기에 나름 흥미진진하고 재미지다. 기독교인들도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만한 소설 같은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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