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머피 잠재의식의 힘 - 삶의 기적을 일으키는 내면의 보물창고
조셉 머피 지음, 조율리 옮김 / 다산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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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의식의 기능과 잠재의식에 새긴 관념이 자신에게 역효과를 내지 않기 위한 방법들이 1부에서 소개되고 2부에서는 그 활용으로 부와 성공, 문제해결, 결혼생활, 인간관계, 자기조절, 용서, 노화방지 등에서 활용하는 법들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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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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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것이 되고 싶어.”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어.”

하나도 빠짐없이 네 것이 되고 싶어.”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 정말이야

 

와 너가 남긴 이 말은 라는 사람이 를 잃고 현실 세계에서 그냥저냥 도리에 맞춰 살아가다가 벽 안의 도시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의 삶으로 이양해 가게 된 원인이 된다. 상실이 있고 상실을 받아들이고도 현실은 지속되지만, 그 상실이란 것이 현실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게 만든다. 열다섯 열여섯의 에 입술을 통해 열여섯 열일곱의 에게 처음 윤곽을 드러낸 벽 안의 도시가 그렇게 중년으로 접어드는 세월 동안 조금씩 구축되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 어느 순간 벽 안의 도시는 너를 잃고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를 집어삼킨다.

 

앞서 처음 작성했던 리뷰에서 말했듯 나는 이 소설이 상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감상으로는 상실에서 회복으로 가는 여정과 그 여정의 끝으로 마무리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소설의 1부에서 보여주는 벽, 벽 안의 도시, 본체에서 떼어내어지는 그림자, 짐승들, 꿈 읽는 자, 너를 닮은 소녀, 그 도시에 이르는 맑은 강물과 탁류, 모든 것을 빨아들여 배출하는 웅덩이 등등 여러 상징은 알 것 같으면서도 모호하기도 했다.

 

아마도 벽 안의 도시는 세상과 나, 타인과 나를 또 나 자신의 본능과 바람과 정서와 이성과 의지 등등을 각각으로 분별하고 나누어 고집스레 그 분열을 지켜나가려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헛수고를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저자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듯 도시도 벽도 불완전할 뿐이다. 타자와 나를 분리하려는 것도 내 안의 나에 구성요소들을 분리하여 타자화하는 것도 어찌 보면 굉장히 수고스러운 헛수고인지 모르니까 말이다.

 

의 그림자는 에게 이 벽 안의 이 도시가 실제이고 현실세계라는 바깥세상이 가상이며, 본체라고 불리는 것이 그림자이고 벽 안의 도시에 머무는 그림자가 본체인지 모른다는 말을 한다. 가설에 가설을 더하는 거란 말을 덧붙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말마따나 우리는 자신과 타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구성요소들을 본능과 욕망과 정서와 이성, 의지 등등으로 분리하여 어느 것이 나이고 어느 것은 타자라고 독재자적인 정의를 하고 있고 또 그렇다고 해도 사실 그 중 어느 것이 나인지 확실하지 않다. 도시와 벽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 불확실함을 주장하는 듯이 작가 하루키 씨는 그 도시에서 를 보살피기도 하던 한 노인이 옛이야기를 꺼내게 만든다. 너무도 욕망하게 만들던 꿈 속의 가상의 여자에 한쪽 얼굴만을 보다가 반대쪽 얼굴을 보고 싶다고 열망하게 되었고 반대쪽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그런 순간을 결코 만들어선 안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에게 그런 순간은 결단코 피하라는 말을 진지하게 남기면서하지만 사실 노인이 말한 그 여성은 노인 자신의 꿈 속에 등장하는 허상이 아닌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서건 벽 안의 도시에서건 우리 자신이 그러하듯 타인에 대한 상도 하나의 허상일뿐이 아닐까 싶다. 자신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판단 역시 우리의 오해나 기대가 만들어내는 허구일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벽 안의 도시에 대해 벽의 의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벽 안의 도시구조를 장기(臟器)의 내벽 같다고 묘사하기도 하며 신장을 닮았다고 하거나 뇌의 모양을 빌려 설명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하나 같이 사람과 사람의 정신 작용들을 상징하는 것이 벽과 그 안의 도시임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직설하는 것이리라. 그림자도 짐승도 그 사람 안의 타자화된 본능과 욕망과 정서와 이성과 의지 중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반대쪽 얼굴을 결코 보려 해서는 안된다는 노인의 말은 자신의 대극에서든 타인의 대극에서든 한측면의 반대편을 직시하지 말라는 말 같기도 하다.

 

그렇게 자신의 대극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과정을 거치던 는 자신의 그림자가 죽음을 맞이할 것만 같자 그림자를 벽 안의 도시 세상 밖으로 다시 말해 현실세계로 탈출시킨다. 여기까지가 1부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씨가 43년만에 다시 완성했다는 그 이야기는 이렇게 1부까지에서 처음 마무리 되었었다고 한다. 그러다 부족하다고 느끼고는 2부와 3부를 더해 완성한 소설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다.

 

사실 1부만으로는 상실과 그 상실로 인한 몽환적 여정이라는 감상만을 남겼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소설이 남다른 점도 처음 꼽을 것은 그 몽환성이다. 작가 자신이 소설 속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을 언급하며 매직 리얼리즘이라고 자평하다시피 하고 있기도 하다. 매직 리얼리즘, 가상과 현실이 넘나드는 이야기를 쓰고자 했음을 독자에게 토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완성도는 몽환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고 상실과 그 상실로 인한 여정이 결국에는 회복에 이르도록 한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완전하고 완벽한 회복은 아닐런지도 모른다. 도시와 벽이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듯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겠지만 그럼에도 엄연한 복귀이자 회복에 이를 것임을 이 소설의 대미는 은유하고 있다.

 

감각되는 영혼인 고야쓰 씨와 를 계승하고 마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등장하고 나서 출현하는 카페 여주인과의 시작되는 이야기는 결국에는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더라도 를 현실로 복귀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벽 안의 도시에서 를 닮은 소녀 곁에서 잃어버린 시절의 가 못 이룬 꿈과 가 함께 만들어가지 못했던 꿈을 대신하듯 도서관의 꿈들을 읽으며 영원을 보내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은 영원이지는 않아야 했다는 듯 고야쓰 씨와의 이야기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운명으로서 등장했고 카페 여주인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는 결국 를 계승하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통해 현실세계로 귀환한다.

 

2부와 3부는 분명 상실 이후 회복의 여정이자 회복할 것임을 알리는 귀환으로 완성되고 있다. 때론 몰입하게 하고 때론 지루한 숙고의 시간을 주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이 의미 있는 감상을 주는 구간은 상실과 상실의 여정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실의 여정이 동시에 회복의 여정이기도 하며 끝내 회복하고 귀환할 것임을 상징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상실의 이야기가 의미로울 수 있는 것은 그 상실이 상실만으로 끝날 것이 아님을 독자가 알기 때문이다. 상실은 다시 회복으로 이끌며 여정은 귀환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실과 여정과 회복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 우리를 감상과 함께 성장으로 이끈다. 성장하기 위해서 살아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주어지는 모든 것을 느끼며 격동하기 위해 삶이 있다고 믿는다. 그럼 상실과 여정과 회복이 주는 격동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격동의 기회가 아닌가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번 작품을 통해 새삼 다시 남은, 삶에 대한 감상이다. 깊은 곳에서 무언가 누군가를 잃은 동요가 큰 사람들에게 어쩌면 깊은 감상을 줄지 모르는 소설이다. 한 주 동안 이 소설을 읽으며 아련하고 몽근했다. 나와 같을 이가 있다면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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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주신경 이론 - 내 삶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
뎁 다나 지음, 박도현 옮김 / 불광출판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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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주신경 이론]이란 본서는 책의 제목과는 다르게 다미주신경에 대한 이론을 소개한 책이 아니다. 다미주신경의 작용과 기전을 바탕으로 일상에서 안전감과 안락감, 평온을 가져오도록 한 일종의 명상법이자 심리 요법에 관한 책이다.

 

다미주신경의 기능과 작용을 알고 싶다거나 실례를 통한 배움을 얻고 싶다는 분들은 스티븐 W. 포지스 님의 저작인 [다미주 이론]을 찾아야 할 거다. [다미주신경 이론]은 일상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기법들을 배우고 싶다는 분들이 찾을 만한 책이다. 명상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읽어보실 만할지 모르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하리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도 같다.

 

본서는 아주 대략적 아니 대략적이지도 않은 수준의 몇 마디 정도로 다미주 신경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는 그다음부터 바로 이 이론을 바탕으로 평안을 찾는 기법들을 나열하고 있다. 사실 이 때문에 이런 형식이라면 구태여 다미주신경 이론이라는 제목이나 배경이 필요했을까 싶을 정도로 다미주신경에 대한 내용은 베이스일 뿐이다. 기법 전체가 그를 바탕으로 짜여져 있다고는 하지만 경락 경혈 강의라고 강의 주제를 던져 놓고는 별 설명 없이 온종일 기체조를 가르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분명 유용한 양식들의 명상법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심리기법으로서 역할도 제법 잘할 것 같기도 하기에 출판사측이 장르에 대한 기대 방향에 노선을 불명확하게 제시한 것이 문제인가 싶기도 했다. 분명 시각화, 마음챙김, 재정의 등의 방식들이 더 나아가 사회공동체에서의 쓰임까지 고려한 대미까지 총체적으로 다미주신경 이론이 적용된 책이기도 하다.

 

교감신경의 작용을 투쟁-도피 반응으로 설명하고 그를 다시 생존 모드로 분류하면서 이러한 긴장과 불안의 상태를 배 쪽 미주신경과 등 쪽 미주신경과의 조화로 안정화 시키는 방법들을 제시한 게 상당히 유효할 거라 짐작되고 이해가 쉽기도 했다.

 

책 전반의 내용이 이들 다미주신경 간의 안정을 유도하는 방법들을 체계화하여 전하는 것이며, 대미에서 나에게 그러한 것처럼 타인의 신경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파악하고 타인을 안정화시킴으로써, 사회공동체의 조화를 가져온다는 대목은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와 대승불교의 보살행이 떠오르게도 하는 체계였다.

 

다미주신경에 대한 상식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대중적인 명상이나 심리치유를 위한 기법으로 활용하기에 손색없는 저작이라고 생각된다. [다미주신경 이론]이라는 제목이기는 하지만 주제는 신경이론에 대한 이해가 아니고 또 그걸 이해하라는 장이 할애되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그걸 기반으로 한 명상법과 심리치유 기법인데, 그렇다고는 해도 신경이론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도 안정화를 가져왔을 법하다고 느껴졌다.

 

본서를 읽다가 처음에는 [다미주신경 이론]이라면서도 그 신경이론에 대한 해설이 너무도 할애된 바가 없고 명상법이 주제이기에 독서를 중단할까도 싶었지만, 슐츠의 자율훈련법이나 다양한 최면기법과 계통이 명확한 명상법과는 다르게, 온건하고 유연한 명상기법들을 보면서, 최근의 명상과 심리기법들이 어떠한 분위기인지 알수 있는 기회였던 것도 같고, 새로운 체계를 접하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좀 더 유연한 명상체계나 마음을 다스리는 체계를 접해 보고 싶은 분들께는 권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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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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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입술로부터 태어난 그림자가 만든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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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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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학 입문의 과정을 마치며 4원소의 세계를 여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 과정이 마치 칼 융의 적극적 명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내친김에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창조한 그 대륙과 섬들과 그 세계에 만든 피조물들을 가끔씩 돌아봤다. 명확하게는 피조물들을 돌아봤다기보다는 내가 만든 세계를 유람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나의 피조물들이 모여든 자리에서 나는 고백했다. “내가 너희의 신이다라고. 피조물들은 분개해서 일어났으며 창을 들어 모두가 내게 저항하려 했다. 나는 그들을 제압하기보다는 내가 만든 피조물들을 해치기 싫다는 심정이 들어 그 자리에서 날아올라 그 대륙과 섬의 창공을 날아 다시 유람을 떠났다. 그 이후로는 나의 피조물들에게 내가 너희의 신이다라는 고백이자 선언을 하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적극적 심상화이기도 한데 세계를 내가 창조했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 헤르메스학 입문에서 원소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나 흔히 백마법이라고 불리는 에노키안 매직의 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페어리 웨이까지 마법 대부분이 또 다른 세계와 조우하며 그 세계와 그 세계의 존재들을 체험하는 여정이다. 이런 일련의 익숙한 세계로 인해 나로서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등장하는 세계와 그곳을 여행하고 그림자가 빠져나와 살아가고 또 노란잠수함 소년이 의 역할을 계승하는 내용들이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세계의 구성과 양식이 단조로워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상상이자 명상이 담박하다는 감상이 들었다. 40년이 넘어 구축된 세계임에도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가 만든 세계 다시 말해 소설 속의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 함께 창조해낸 그 세계에 대해 나름 체감 아닌 체감을 하며 소설을 완성한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작가적 상상력이라고 할까 식자적인 상식이 그가 만든 세계를 보다 지적으로 풍부히 서술하게 했구나 생각되었다. 벽 속의 세계를 화자이자 주인공은 벽의 의지를 말하며 의식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고 그곳(벽 안의 도시)을 장기의 내벽과 같다며 되뇌이기도 하며 다음에는 뇌의 모양을 빌려 설명하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벽, 도시, 그림자, 짐승들, 도서관과 소녀, 꿈 읽는 이, 웅덩이 등 나름 나열할만한 상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뇌와 의지가 언급되었음에 분명 의식과 무의식, 칼 융이 말하는 인간의 그림자를 상징할 것이다, 이 모든 건 인간과 영혼을 상징하고 있다고 단정 지으려 해도 마지막까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그걸 가늠하려는 것보다는 그저 이 소설이 주는 서사와 화자인 가 느낀 1부에서 마지막까지 흐르는 간절함과 그리움 그리고 끝내 현실을 인정하고 수긍하게 되는 대미에서 무언가 감상이 담겨야 할 것만 같았다. ‘가 경험하게 된 그 세계는 그리움이 간절함과 마찰하며, 그녀와의 설계대로 건축된 것이고, 2부에서 고야쓰 씨를 만나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만난 것은 문학적 운명이었다고 해도, 현실세계로 돌아온 그림자일까 본체일까가 카페 여주인을 만나고야 가 그 도시에서 현실세계로 다시 돌아올 정서가 불러일으켜진 것은 수긍할 법했다.

 

이 신비한 이야기는 때론 몰입하게 하고 때론 그만큼 지루한 구간이 있지만 분명 상실만큼 회복과 그 회복의 여정이 담겨있지 않나 싶다. 상징들에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알게 모르게 이 상실과 회복의 여정이 내 안에서 나를 일으켜 세운다. ‘너의 것이 되고 싶다고 어떻게든 온전히 너의 것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너무도 닭살 돋고 부끄러운 대사 같았지만 한 남자가 무언가 자신의 전부를 상실한 채 살아가게 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술을 빌려 한 말처럼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를 데리고 살지만 이런 기억의 그림자는 이 소설 속 벽 안의 도시와 같은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로 떠나버리기에 충분한 힘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 말이 의 그림자에 깊은 암영을 드리우게 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입술을 통해 태어난 의 그림자는 그 도시를 갈망하고 는 이 여정을 마치지 않고서는 다시 재생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나 역시 간절함과 외로움이, 앞서 말한 내가 창조한 세계를 만들게 했고, 안타깝게도 그 세계를 유람하는 중에도 본체의 세계에서 내가 박탈되고 있었던 것처럼, 그 세계의 나도 나의 피조물들로부터 배제되고 말았다. 아마도 나는 내가 만든 세계에서 다시 한번 그들과의 마주침을 조심히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세계에서의 여정이 현실세계의 여정과 만나 내게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빛깔을 만들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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