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다영은 뭔가 따듯하면서도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이불 속 같았지만 자기방 이불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하지만 자기방이 분명했고 이불도 3년째 덮고 있는 자기 이불이 분명했다.


-아! 머리야.


다영은 숙취보다도 머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무슨 머리가 이렇게 아파?


다영은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혼잣말을 하며 일어났다.


-엄마.


다영이 거실로 나서며 엄마를 찾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엄마 방으로도 가봤지만 방에도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다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아침에 일어나 엄마가 없었던 적은 없었어서 더 더 걱정이 됐다. 


다영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베란다 쪽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다영 엄마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베란다에 쓰러져 있었다.


-엄마! 괜찮아! 엄마 어떡해.


다영은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를 안고 흐느끼다가 달려 나와 집 전화 버튼에 119 번호를 눌렀다. 



8


병원 응급실에 다영 엄마가 누워있고 다영이가 옆에서 아빠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아빠, 언제 오는 거야. 이럴 때 아빠가 없으니까 더 무서워. 의사 선생님은 검사할게 많다는데 엄마 의식도 돌아오지 않았어.


-아빠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네가 침착하게 엄마 옆에서 보살피고 있어. 우리 딸 다 컸으니까. 할 수 있지.


-알았어. 근데 엄마 아직도 눈을 안 뜨셔. 엄마 이러다...


-불길한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엄마 괜찮을 거야. 니가 잘 보살피고 있으면 아빠가 가면 엄마 곧 일어날 거야. 아니 그전에도 일어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았지. 


-응.


-아빠가 이런 때 곁에 못 있어줘서 미안하다.  


-흐헝~


다영은 걱정과 서러움이 북받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전화를 끊고 엄마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다영은 오른손으로 왼손으로 번갈아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엄마 깨어나, 어서. 나 엄마 없으면 못 산단 말이야.


-엄마도. 엄마는 우리 딸 없으면 못 살아. 일어나야지, 이제. 


어느새 다영 엄마가 눈을 뜨고는 다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괜찮아?


-다영아 괜찮니?


-내가 무슨 문제야. 엄마가 이렇게 다쳤는데.


-이제 일어나야 해. 이러고 더 있으면 위험하대.


-무슨 소리야. 누가 위험하대. 


-어서 일어나야 해. 집에 가자.


머리에 붕대를 하고서도 자리에서 일어난 다영 엄마는 왼팔에 링거를 연결한 바늘을 뽑고는 피가 흐르는 팔을 꾹 누르며 다리를 내려 신발을 되는대로 구겨 신었다.


-엄마. 안 돼. 의사선생님이 검사받을 게 많댔어.


-검사가 다 무슨 소용이니 아무리 받아도 나아지질 않는데.


-엄마 어디 아팠던 거야. 검사받고 그랬어?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야. 다 이겨낼 수 있어.


-다친 게 나아야 이겨내는 거지.


-다영아 집에 가자, 제발. 여기가 견딜 수 없이 괴로워.


엄마가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다영인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엄마 말에 홀린 듯이 엄마를 따라나섰다.



9


-엄마 다 됐어. 간은 안 해도 되는 거래. 김치하고 먹으면 될 것 같아.


다영이는 생전 처음 우유죽을 끓여봤다. 늘 엄마가 해주는 것만 먹어봤지 요리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우유죽이라는 건 정말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였다.


-어머, 고소하네. 너 요리 솜씨 타고난 거 같아, 다영아. 


-엄마, 나 일어과가 아니라 조리학과를 진학할 걸 그랬다, 그치?


엄마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우유죽을 드셨다. 


-엄마 근데 머리는 베란다에서 어쩌다 다친 거야. 구급대원 아저씨들은 아무 특이점이 없다고 하던데. 상처로 봐서는 넘어져서 다쳤다기 보다 뭔가 떨어진 건가 싶은데 베란다에 흔적도 없대.


-글쎄 나도 모르겠다. 어쩌다 모든 게 이렇게 된 건지.


-엄마, 정말 무슨 다른 일 있어? 아까 병원에서도 검사 아무리 받아도 나아지질 않는다 그러고. 엄마 하는 말이 다 비관적이야. 


-살다 보면 많은 일들이 있지만 때론 겪고 싶지 않은 일들도 겪게 되고. 그런가 보다.


다영이는 엄마 말씀을 듣고 있다가 문득 창문을 바라봤다. 대낮인데도 뭔가 푸른빛이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엄마 저게 뭐야?


-뭐 말이야?


다영의 놀란 목소리에 다영 엄마도 다영의 눈길을 따라 베란다 창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라도 지나갔나? 


-새는 아닌 것 같던데. 빛이 났어, 파란빛.


-멀리서 비행기라도 지나갔나 보다. 


다영 엄마가 다영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하던 순간 마침 그 빛이 다시 아른 거렸다. 


-엄마, 잠깐만.


다영은 호기심과 함께 긴장감도 느껴졌지만 베란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0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나서자 파란 후광이 비치는 한 남자가 공중에 서있었다. 17층 높이에 말이다.


-너.. 너.. 도대체 누구세요.


-너 도대체 누구세요는 반말인 거야 존댓말인 거야? 족보에도 없는 말투나 쓰는 그러는 넌 누군데?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처음 만난 여자한테 이름 물을 땐 자기 이름부터 먼저 밝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처음이 아니지 않나?


'우리?' 다영은 그가 그냥 하는 우리라는 말에도 조금 남다른 정서를 느꼈다.


-처음이던 아니던 왜 내 곁을 맴도는 건데요?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나 미행해요?


-내가 왜 널 미행해. 난 그냥 너의 세상을 돌아보고 있는 중일뿐이야.


-나의 세상이라고요. 맞아 그때도 그랬죠 날 만나러 지구로 온 거라고.


-내가 그런 말을 언제 해. 지구를 떠돌고 있긴 하지만 그게 널 만나려고 그런 건 아닐 거야.


-언제 했냐니? 이 남자 딱 잡아떼네. 그랬잖아요. '니가 있는 초신성은 어떤가 구경왔다'구.


-너 초신성이 뭔지 모르지? 초신성이 지구로 변신할 정도면 니 얼굴 위에는 있는 건 뇌가 아니라 깡통인 거야.


-뭐라구요?


다영은 발끈했지만 정말 초신성이 지군지 알았어서 그게 아니었구나 싶으니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뭐 그런 건 모를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어쨌든 내가 있는 곳을 구경 왔다는 거잖아요.


-그렇다 치자.


-그렇다 치는 게 뭐예요. 수퍼히어로면 단가? 뭐든 자기 좋을 대로 넘어가고.


-덕분에 수퍼히어로도 돼 보고 괜찮은 마진이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에요.


-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서 와본 거뿐이야.


-내가요?


=이 남자 무시하다 걱정해주다 날 아주 가지고 노는 거야 뭐야 


다영은 푸른 후광의 이 남자의 말투가 거슬리긴 했지만 마치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다소 설레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이 남자에게 물어보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여기 오가다가 우리 엄마 다치는 거 목격하지 않았나요? 혹시라도 말이에요.


-밝은 생각을 해, 뭐든. 그럼 니 세상에서 아무도 아프거나 다칠 일은 없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럼 내가 우리 엄마 다칠 일을 생각하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그럼 내가 나으라고 생각하면 우리 엄마가 바로 나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아니 니 엄마는 다친 적이 없다는 걸 니가 수긍하기만 하면 돼.


-무슨...


남자가 다영의 엄마가 다친 걸 마치 다영이 탓인 듯 이야기하는 투라 다영은 많이 발끈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슈퍼히어로잖아? 이 남자 말대로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집중했다.


=엄마는 낫는다. 아니 나았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엄마를 돌아봤는데 엄마는 여전히 머리에 붕대를 감고 천천히 죽을 드시고 있었다.


-접근이 다르잖아. 낫는다나 나았다가 아니라 다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으라구.


=다친 적이 없다고 생각하라는 거야?


다영은 다시 한번 집중해 오늘 아침을 떠올리며 엄마가 다치지 않은 현실을 그리면서 몰입했다. 그러자 순간 머릿속이 밝아지는 듯하며 자기 스스로 수긍하는 듯하게 되었다. 


=맞아. 엄마는 다치지 않았어.


그런 확신과 함께 엄마를 돌아다봤다. 엄마는 아직도 죽을 드시고 계셨지만 머리에 붕대가 보이지 않았다. 


다영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 것이다. 다영은 그리 믿으며 이 놀라운 힘을 일깨워준 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언제 갔는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지 또 말해 주지도 않고 갔네. 정말 수퍼히어로면 단가? 뭐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아 놓고는.


다영은 아쉬운 마음에 구시렁대며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그 남자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 분명 또 나타날 거야. 내가 필요할 땐 나타났으니까.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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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교에 들어서는 다영은 고등학교와 다를 것 같던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가 조금 김이 새는 것 같았다.

교양 과목 중 '여성과 미래' '내일의 여성'이 도대체 뭐가 다르다고 선택하라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펌을 한 단발머리의 여자애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난 루다야. 이루다. 너 학교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 들지 않아.


-내 친구 이름도 루단데. 난 임다영이야. 근데 학교가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첫 질문부터가 이상한 루다라는 애가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영은 되물었다.


-건물 외관을 제외하고는 실내 디자인부터 뭔가 고딩교실 연장선 같잖아.


-글쎄... 그런가?


다영은 그러고 보니 TV에서 본 대학교 강의실 실내의 특징, 이를테면 강단을 제외하고는 모든 실내 디자인이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 교실과 같은 점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이 학교 아마도 고등학교를 건립하려다가 대학으로 전향한 게 아닌가 싶어. 아니면 고등학교 외벽만 그럴싸하게 인테리어하고는 대학교로 전환한 거던가.


-그래? 


다영은 애써 들어온 (물론 시험 점수 문제로 간신히 들어온 대학이긴 했지만) 대학이 고등학교 건립하려다 대학이 된 거면 너무 짜증 난다는 생각을 했다.


-이거 학비 환불받고 재수할까도 생각했다니까.


-그래도 재수는 좀 지나친 거 아니야? 시험을 또 준비하고 싶니, 넌?


-고딩 건립하려던 학교면 내가 고딩에서 고딩되려고 시험공부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잖아.


-그건 그렇긴 하네. 그래도 명색이 대학인데 대학생활이 좀 다르진 않을까? 신생대라도 몇 년은 됐으니까 선배들도 있고.


-선배는 무슨 선배. 대학에선 다 무슨 무슨 씨야. 우리 엄마 대학 다닐 때나 선배가 있었지.


하긴 엄마한테 듣던 대학 시절 얘기들로는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가 생겼지만 요즘 대학은 그저 취업을 위한 스펙 쌓을 경험치 쌓는 곳 정도의 이미지가 다 이긴 했다.


-하긴 대학생활이 별로 기대되지 않기도 했어. 아이유나 유승호도 대학 안 갔다고 엄마가 나 대학 떨어져도 기죽지 말라고 그러시긴 했거든.


-너도 어지간히 공부 안 했구나?


-너는 공부 잘해서 이 대학 왔니?


다영은 루다라는 얘가 좀 사람 언짢게 하는 게 자기 친구 루다랑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많이 닮아 보였다.


-니들 시끄러 좀. 여기 공부 잘해서 온 애도 서울 근교 대학엔 원서도 못 넣을 성적이었을 거야. 공부 잘한 애면 애초에 여기 없다.


-이런 게 팩트 사살인가? 난 이루다야.


-알아. 얜 다영이고. 니들 떠드는 소리 다 들었어.


뒷자리에서 긴 머릿결에 컬을 준 여자애가 루다랑 다영이 티격태격하는 소리에 짜증이 났는지 나무랐다. 루다와 함께 돌아본 다영이 그녀에게 물었다.


-넌 이름이 뭐니?


-난 손주연이야. 강의실 실내 디자인이나 학교 빻았다고 할 시간에 좀 더 건설적인 거 생각하자고 우리.


-이를테면?


-저기 좀 봐.


주연이가 턱짓을 한 곳을 돌아보자 키가 184에서 187까지 되어 보이는 패션 감각이 제법 남다른 남자애들 몇몇이 보였다. 


-최면연애라는 책을 봤어. 저런 애들을 다 사로잡으면서 대학생활을 알차게 보낼 거야 난.


남자 애들 뒤로 후광이 보이나 싶을 때쯤 주연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루다가 두 손을 맞잡으면 맞장구를 쳤다.


-나두 나두.



5


아까 그 남자 애들 세명과 루다, 주연, 다영은 술자리를 가졌다. 저녁시간쯤 학교 인근 '이계' 호프에서 아이들이 모였다. 다른 테이블들도 학생들로 붐볐다. 남자 애들 중 안경 낀 좀 고지식하게 생긴 앤 진우라고 했고 아까부터 아빠한테 배웠는지 아재 개그를 밀고 있는 지루한 애는 상연이라고 했다. 다영이 좀 마음이 가는 헤어스타일이 깔끔한 애는 희찬이라고 한다. 


-볶이


-쑥


-개


-오메기


-떡 


다영, 상연, 루다, 희찬, 주연, 진우 순으로 떡볶이 쑥떡 개떡 오메기떡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주연이 자꾸만 틀렸다. 이번에도 떡을 외치며 머리를 쳤다. 같은 실수를 자꾸 하자. 아이들이 모두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다영이가 맘에 들어 하는 희찬이 주연이 너무 귀여워 죽겠다는 듯 뚫어져라 주연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 화장 좀 고치고 올게. 


다영이는 기분이 상해서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자리를 비우려 했다. 


-그래, 빨리 갔다 와.


진우가 그런 다영을 보고 말했다. 진우의 빨리 갔다 오라고 말하니 다영은 조금 맘이 풀리는 듯했다. '이쁜 건 알아가지고' 이렇게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희찬이가 주연이만 쳐다보는 것이 짐짓 기분이 나빴다. 화장실로 향하는 통로 옆 빈 테이블에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고 다영이 지나쳐가자 그 남자의 의상이 오징어 게임 트레이닝복에서 블루벨벳 정장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다영은 화장실에서 파운데이션을 고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오려 걸음을 옮겼다. 자기들이 있던 테이블 근처로 오다가 다영은 눈을 의심할 상황과 마주쳤다. 루다가 졸린지 상연의 어깨에 기대 있었고 주연이가 희찬이와 대화하는 새 진우가 주연의 잔과 다영의 잔에 무슨 가루약 같은 걸 넣고 있었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니들 다 한 패니?


-다영아. 왜 그래?


다영이가 소리치자 주연이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물었다. 


-쟤가 우리 잔에다 약을 타고 있잖아.


-뭐라고? 


-루다가 갑자기 저러는 것도 이상하잖아, 나 화장 고치러 가기 전만 해도 쌩쌩하던 애가 갑자기 왜 저러고 있어. 


-니들 저 말이 정말이야.



6


다영과 주연은 루다를 둘러메고 호프에서 나와 택시를 잡으려 도로를 찾아 나오고 있었다.


-야. 니들 잠깐 기다려 봐. 오해는 풀고 가야지.


다급히 가고 있는데 희찬, 상연, 진우가 뒤따라 왔다. 


-오해는 무슨 오해.


-그거 그냥 비타민이야. 비타민. 니들 술 깨라고 넣은 것뿐이야.


-웃기지 마. 누굴 바보로 아니.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다영아. 


주연이가 다영이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사실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며 놀다 보니 늦은 시간이 다 되었고 지금 이 골목엔 어떻게 된 건지 대학가인데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주연이가 눈치를 주는 의미를 깨닫고 다영이도 갑자기 겁이 났다.


-그러니까 우리 말은 니들이 오늘 꼭 집에 가야 할 이유가 있냐는 말이야.


진우가 가운뎃손가락으로 안경을 고쳐 올리면서 말하자. 그 뒤에서 블루벨벳의 정장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세상은 니가 생각하듯 그렇게 더럽기만 한 곳은 아닐 거야.


정장을 한 남자가 말했다. 그 남자가 나타나자. 상연이 갑자기 머리 위에 외뿔이 솟아나며 악어가죽같이 피부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외뿔 괴물로 변한 상연이 그 남자를 돌아보며 외쳤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먼 거리였는데도 단숨에 몸을 날려 오른손 수도로 상연의 허리를 쳤다. 상연이 픽셀 조각으로 변하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는 픽셀 조각들이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걸 본 희찬은 용의 형상을 한 두 머리의 괴물로 변하고 진우는 익룡 같은 날개가 돋아나며 얼굴이 험상궂은 밀랍인형처럼 변해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남자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공중으로부터 급강하하던 진우를 주먹으로 치고 번개처럼 떨어져 내리며 희찬의 두 머리 사이를 수도로 내려쳤다. 희찬의 몸통이 두 동강이 났다. 둘 다 상연처럼 픽셀이 쏟아져 내리더니 사라졌다.


놀란 다영과 주연이 바라보고 있자 남자는 다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 꼴페미지? 


다영은 지금 있었던 상황이 놀라웠지만 저런 차별적 발언을 듣고 있자니 그것도 가관이다 싶었다.


-여혐이 판치는 더러운 세상.


다영이 하고 싶은 말을 주연이 소리쳤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다영이 맞장구를 치자 남자는 아까처럼 다영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말했다.


-네가 있는 초신성은 어떤가 구경 왔는데 나이답지 않게 고루하고 차별적인 세계야! 여혐이 아니라 남혐으로 말이야.


=저 남자 날 보러 지구에 왔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다영은 맥락 없는 남자의 말에도 뭔가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근데 왜 여혐이 아니라 남혐이라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나 하는 말이에요.


-맞아. 얘가 왜 이렇게 됐는데.


다영이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을 때 주연이 남자에게 물었다. 다영도 정신을 차리고 주연과 둘이서 들쳐 맨 루다를 가리키며 맞장구를 쳤다.


-말을 해준대도 지금의 너로서는 알 수 없겠구나. 그냥 너의 안식처를 찾아. 애먼 괴물들 만들지 말고.


그렇게 말하고는 남자는 하늘 높이 급상승하더니 날아가 버렸다.


-이봐요. 누군지는 알려주고 가야죠. 당신 누구냐구요?


다영이 소리쳤지만 남자는 이미 아주 멀리 날아가고 난 뒤였다. 다영인 저 까탈스러운 말투의 남자가 그날 자신의 눈을 바라보던 바로 그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날 구해줬을까? 내가 있는 초신성을 구경 왔단 말은 뭘까? 왜 내 곁에서 맴돌고 있을까?'


-다시 또 만날 수 있겠지?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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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뭐야, 이렇게 집으로 그냥 돌아가라는 거야? 


-그러게 말이다. 신생대라도 너무 간소한 거 아닌가 싶네.


강당에서 OT를 마치고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줄 알았는데 교수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했다. 다영인 발끈했지만 코로나라는 환경적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는 엄마 말씀에 수그러들고 말았다. 엄마도 외동딸의 대학 입학식이랄 수 있는 자리가 너무도 단촐해서 실망하시는 눈치였다. 


-우리 딸 오늘은 엄마랑 한잔해야겠다.


-무슨 소리야. 엄마 음주운전은 안돼.


-차야 대리기사님 부르면 되는 거야. 우리 딸 입학 기념으로 대학생활에 앞서 주도도 가르쳐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주도는 무슨 주도. 엄마가 기분 내려 거지 뭐.


-그래도 첫술은 부모에게 배워야 한다잖아. 그래야 윗사람들과의 자리에서 실수를 안 한 대.


다영인 조금 찔리는듯했다.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여태 몇 번이나 맥주, 소주, 폭탄주 다 마셔 봤는데 엄마는 첫술은 부모에게 배워야 한다잖은가?


어쨌든 음주 경력이 딱 걸리기 전에 처음 술 마시는 척하기로 했다. 



2


다영이와 다영이 엄마는 엄마 취향대로 고추장 양념 불고깃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테이블을 한 칸씩 건너 띄어 손님을 받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손님이 꽤 되는 것 같았다. 


-다영아. 처음 마시는 술인데 적당히 해야지.


-응. 엄마 오늘은 좀 취하네.


-오늘은?


-그러니까 대학 입학한 첫날이라 좀 취한다고.


다영이가 처음 마시는 척을 한다고 하다가 술이 들어가자 조금씩 주량이 드러났다. 다영이 엄마는 '얘가 술고래가 될 상이요' 생각하면서 다영일 말렸다. 하마터면 다영인 술이 첫경험인 척을 하는 걸 들킬 뻔했다. 


-엄마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


다영이는 순간을 모면하려고 화장실 간다고 나오긴 했다. 하지만 사실 술도 좀 깨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 집은 엄마 단골집이라고 하는데 화장실이 식당 건물 밖으로 나가야 있있다. 


건물 밖으로 나와 골목 쪽에서 4차선 도로 방향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차를 세어봤다. 아직 시야도 의식도 또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팍!'


그때 다영이 앞으로 머리 위에서 화분이 떨어지며 깨졌다. '아! 깜짝아' 다영인 깨진 화분을 쳐다봤다가 도로에서 지나가는 차들 위로 무언가 하얀 섬광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걸 보았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바라보자. 하얀 옷을 입은 남자 아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아니 갈색 옷을 입은 남자 아니 노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가 ... 있는 그대로 표현하자면 옷의 디자인과 재질과 색상이 무수히 변하고 있는 한 남자가 지나가는 차들을 건너뛰며 자기 앞으로 다가오려는 게 보였다. 다영인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졌다. 


=저 남자는 뭐지. 귀신인가? 천사인가? 초능력자인가? 


남자가 자기 앞으로 다가와 키를 낮추며 고개를 숙여 다영이 눈높이로 얼굴을 가져오더니 다영이 눈을 빤히 쳐다봤다. 남자는 제법 잘생겼다. 귀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온 방식이 다영일 두렵고 경직되게 만들었다. 다영인 점점 현기증이 심해지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엄마 목소리가 그때 아련하게 들렸다. 


-다영아! 다영아!



3


다영이는 포근하다고 느낄 때쯤 자기 침대에서 잠이 깨었다. 식탁에서 엄마가 요리하는 소리에 들려왔다. 다영인 꾸무적대며 일어나 엄마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엄마! 나 어제 어떻게 집에 온 거야?


-아니 이기지도 못할 술을 처음 먹는 애가 뭘 그렇게 마셔대.


-엄마는. 나 어떻게 집에 왔는데.


-취한 너 부축하며 차에 끌고 와서 대리기사님 불러왔지.


다영인 아련히 어제 그 남자가 생각나 물었다.


-그때 내 앞에 있던 남자는. 그 남자는 뭐래?


-무슨 남자?


-그 남자 가고 엄마가 온 거야?


-마침 내가 나올 때 니가 쓰러지기에 바로 너 데리고 온 거야. 꿈이라도 꿨니? 무슨 남자 얘기야?


다영이는 그 남자의 하얗고 귀엽게 생긴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지만 엄마에게 더는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수를 하며 다영인 계속 그 남자가 아른 거렸다.


-누굴까? 초능력자 같던 그 남자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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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지브릴은 새벽녘까지 자밀라와 무자히드를 가둬 둔 막사 앞에서 서성이다가 다른 대원들에게 무자히드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고 말하고는 어렵사리 막사에 들어갔다.


묵여진 채 쓰러져 있던 자밀라와 무자히드는 진이 빠진 듯 지친 기색은 역력했지만 맑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브릴은 상의 안쪽에서 숨겨온 가죽 부대를 꺼내 부대 안에 물을 자밀라부터 목을 축이게 하고는 무자히드에게 마시게 가죽 부대를 기울여 주었다.


-우린 살 수 없을 거야! 너도 알지.


자밀라의 말에 지브릴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 주변은 온통 IZ 대원들의 참호와 막사가 깔려 있다. 이젠 대원들 대다수가 살상을 위해 훈련된 전사들이었기에 이들을 따돌리고 도망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밀라, 생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 마지막으로 우리를 기억해 줄 이의 얼굴을 보고 죽으니 다행이야. 고마워, 지브릴.


무자히드는 고맙다고 말했다. 무엇이 고마울까? 그들을 구할 수도 자밀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 고맙다는 말이 마치 저주만 같았다. 죽음을 앞둔 이들 심정 같을 수는 없겠지만 지브릴의 지금 심정은 지옥을 걷는 듯했다.

 


18 


지브릴은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매일과 같은 일정이 지나가고 정오 기도를 하고 나서 나씨르가 대원들을 소집했다. 배도자들을 처형하기 좋을만한 사막 한가운데서 대원들은 도열하고 섰다. 


-지금 이 시간 지하드를 저버리고 알라의 뜻을 배반한 배도자 둘을 참수할 것이다. 형집행은 우마르와 지브릴이 맡는다.


-왜 접니까?


지브릴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럼 누군가 다른 전사가 처형하면 다르다는 말인가?


나씨르 보다도 우마르가 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러면서 우마르는 눈 빼고는 얼굴을 모두 가리는 복면을 착용했다. 지브릴은 뭔가 넋 나간 듯 그를 따라 복면을 썼다.


대원들이 트럭에서 자밀라와 무자히드를 끌어내리더니 대원들이 도열한 곳으로 끌고 왔다. 


자밀라는 이미 복면을 한 지브릴을 알아본 것 같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에게는 말할 자격도 없겠으나 마지막 말을 남길 기회를 주겠다. 너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냐?


나씨르가 무자히드부터 유언을 남길 기회를 주었다.


-이슬람의 시대정신 그것이 나를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질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서 더욱 홀가분해 보이는 무자히드는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지겠다는 말도 안 될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빛나는 눈을 볼 때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아 보였다.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 


나씨르가 자밀라에게도 물었다.


자밀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고는 말했다.


-나는 늘 새로운 날을 꿈꿨어.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날이 없을 거란 걸 알았어. 그래서 난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자유로워질 기회라고 생각해. 너희를 원망하지 않아. 너희는 그냥 호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일 뿐이니까. 언젠가 너희도 자유로워질 기회가 있을 거야. 그럴 거야, 반드시.


우마르가 무자히드의 뒤에서 그의 목에 칼을 꽂았다. 지브릴은 고개를 돌렸다. 슬겅슬겅 살과 뼈가 썰리는 소리가 들리고 무지히드의 고통에 찬 신음이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새어 나왔다.


지브릴은 두렵고 서럽고 참담했다. 


-뭐하는 거야?


지브릴이 망설이고 있자 우마르가 재촉했다. 


넋이 나간 지브릴의 귓가로 자밀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브릴, 망설이지 마! 그럼 내게 고통만 더해질 거야. 고통 없게 보내줘. 나를.



19


-이제 결전만이 남았다. 오늘의 공격으로 아탈라의 탈환이 임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적들에게 타격을 주고 동요하게 할 폭탄 테러가 있어야 한다. 이번 테러는 아탈라 도심 내부까지 침투해 번화가에서 폭파해야 한다. 자! 누가 지원하겠느냐?


아부바르크가 연설하는 사이 어느새 들어왔는지 라일라와 모나가 나섰다.


-저희가 지원하겠습니다. 


아부바르크가 순간 당황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다가 그들을 다시 자세히 보았다.


-너희가 말이냐?


-저희 남편도 지하드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이제 저희도 지하드에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또 IZ의 대원들이 아탈라 도심 한복판까지 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 미망인들이 차도르 안에 폭탄 재킷을 입고 침투한다면 도심 한복판까지 진입하는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아부바르크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바로 승낙했다. 


-너희 검은 미망인들이 남편의 유지를 받들고 지하드에서 한 역할을 하겠다니 갸륵하구나. 너희와 너희의 남편 그리고 너희의 가문 모두에 영광이 있을 것이다.



20


그녀들이 침투하여 아탈라 도심에서 폭탄 테러를 성공시키면 전 부대가 정부군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소식이 들려오자 아부바르크는 상당히 애석해 했다.


-쓸모없는 것들. 여자란 것들은 정말이지 제대로 하는 것이 없구나. 


정찰병은 라일라와 모나가 번화가에 못 미쳐 자그마한 폐가에서 자살 폭탄 재킷의 스위치를 잘못 누른 듯 폭파되어 죽었다고 전했다. 그녀들은 실수로 자유로워진 것일까?



21


전 부대원은 지프차와 트럭을 타고 아탈라의 진입로 인근으로 향했다.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 하룬이 조용하고 낮은 소리로 속삭이듯 지브릴에게 말했다.


-이 전투는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미국에서 온 신참 하나가 그러는데 미국방성과 정보부가 우리 훈련소 위치들을 다 파악하고 있다는군.


-그런데도 폭격을 안 하는 이유가 뭐래?


-미국 뉴스에서는 전략적인 이유가 있을 거라고 한다는데 전략적으로 적의 유닛 생산시설을 그대로 둔 채 생산해내는 유닛들만 상대한다는 게 제정신으로 할 전략도 전술도 아니지. 


-그럼 왜 미군이 정부군과 함께 우리에게 제대로 된 공격도 하지 않고 우리를 섬멸하려 하지 않는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이것들은 이 전쟁이 장기화되기를 노리고 있는 거야. 이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중동지역과 중앙아시아에서 보호의 명분으로 지들 입지를 높이고 지들 나라 내에서 군사비용을 확대하고 그러면서도 지네 국민들로부터 저항을 받지 않을 테니까. 또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내정에도 간섭하면서 원유를 제어할 수 있으니까.


-정말 악의 화신 다운 나라구나.


-이 전투는 짜고 두는 체스판 같은 거야. 체스를 두는 놈들이 원하는 대로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게임 말이야.


저멀리 정부군과 그들의 장갑차들이 보였다. IZ대원들이 진격하자 모래바람이 스쳐지났다. 모래바람이 그치니 그 많던 정부군이 모두 사라지고 장갑차 두 대만 덩그러니 보였다. 모두 가까이 다가가서는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이 겁쟁이 녀석들. 죽음이 두렵다고 장갑차들과 소총, 탄창, 화염방사기, 대전차 직사화기와 탄환들을 모두 두고 도망간 거야.


-우리는 알라의 전사들이니 저들은 명분도 없고 두려움 밖에는 일지 않았겠지.



22


-우리는 이제 알라의 뜻과 지하드 전사들의 용맹과 병기까지 모두 갖추었다. 더 이상 우리를 막을 그 무엇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전면전을 벌이는 동안 아탈라 내부에서 적들을 혼란에 빠뜨릴 폭발이 있어야 한다. 누가 지원하겠느냐?


=그래, 또 이런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 


지브릴은 아부바르크의 물음에 바로 지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23


지브릴은 아탈라 도심을 걷고 있었다. 그가 입은 토브 아래로는 폭탄 재킷이 있었다. 그는 차분히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라일라와 모나가 쓸모없는 것들이라 빈 폐가에서 자폭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무자히드처럼 자밀라처럼 자유를 향한 것이다. 다만 그 방식이 그들보다는 자유로웠을 뿐.. 아니 그들도 자밀라도 무자히드도 결코 자유롭게 자유를 찾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슬람의 시대정신이 그들에게 자유를 향할 수밖에 없는 압박을 더한 것일 테니 말이다.


지브릴은 이슬람의 시대정신 IZ 전사들이 나타나자 모든 중화기들을 버려두고 정부군이 도망간 그 순간 알아버렸다. 하룬의 말이 맞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이 시대는 모두가 짜고 두는 체스판 같은 것이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이미 모두 결정 나 있는 것이다. 저항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이 그렇게.


지브릴은 빈 공터가 보이자 그곳 중앙으로 가 자신의 토브를 툭툭 털고 앉았다. 지브릴은 자밀라가 새로운 날을 찾아떠나자던 그날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밀라도 깨달았을 것이다. 더는 새로운 날이 없으리라는 것을. 이곳을 완전히 떠나버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를 찾을 기회이다. 


-그래, 고통 없게 가자.


공터에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화염이 솟구쳤다. 그렇게 지브릴은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카림처럼 라니아처럼 라일라처럼 모나처럼 무자히드처럼 자밀라처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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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부군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폭탄 테러를 할 것이다. 누가 이 성전(지하드)을 위해 용맹히 산화하겠느냐? 지원자는 나서 거라.


자살폭탄 테러를 계획한 아부바르크의 물음에 서로 눈치를 보며 잠시 머뭇거렸으나 금세 지원자들이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라일라의 남편 이스마일과 모나의 남편 무스타파가 나섰다. 그 외의 지원자들도 나서려 했으나 그보다 앞서 아부바르크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래, 너희 둘이 가거라. 너희에게 각자 72알의 포도알을 품은 포도송이가 주어질 것이다.


72 알의 포도알을 품은 포도송이는 무슬림 전사가 용맹히 전사하였을 때 무슬림들의 천국에서 주어지는 72명의 처녀를 의미했다. 그것은 죽음을 달갑게 맞이하라는 부추김 같은 그런 말이었다. 결혼을 한지 이틀 만에 이스마일과 무스타파는 자살폭탄 테러를 위해 아탈라로 떠나 사망했고 라일라와 모나는 미망인이 되었다. 



12


와합 마을의 주변 사막은 온통 IZ의 훈련소가 되었다. 아부바르크가 전세계 무슬림들에게 지하드에 뛰어들어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지하드 전사가 되기를 촉구하는 동영상을 촬영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정말 말 그대로 전세계 각지에서 무슬림 청년들이 와합 마을로 찾아들었다.


-자! 자! 단도를 그 높이로 찌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혈관을 절단하는 거야.


영국에서 온 SAS 출신 전사인 파델이 신참들에게 근접전을 가르치고 있다. 


무자히드도 그 가르침을 받고 있었지만 지브릴은 요즘 들어 무자히드가 어떠한 표정이라도 얼굴로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밀라와 신혼이었는데도 전혀 행복이 무언지 모르는 것만 같았다. 지브릴은 그를 보며 원망과 시샘을 가질 틈을 찾지 못했다. 이슬람의 시대정신을 거치며 하나 둘 행복을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3


오후가 되자 신참들과 기존 전사들 중 결혼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결혼식이 있었다. 미망인들도 참가하라는 말을 듣고 라일라와 모나 역시 찾아왔다. 


라일라는 모나가 라일라의 차도르 소매자락을 끌어당기는데도 불구하고 아부바르크에게 물었다.


-지도자님, 저희는 미망인이 된지 이제 3일이 됐을 뿐이에요. 죽은 남편을 애도할 시간도 없는 건가요?


-애도는 필요 없다. 그들은 이미 천국에서 천국에서의 삶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너희는 무슬림으로서 지하드를 다하며 죽어갈 전사들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위로하고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면 될 뿐이다.


망설여지는데도 불구하고 말을 꺼냈던 라일라 덕분에 라일라와 모나 둘 다 자신의 처지를 선명히 알게 되었다. '이 시절에 태어난 우리는 그저 소모품일 뿐이구나' 라일라도 모나도 그리 깨달았다. 그리고 아무 저항 없이 라일라는 기존의 전사 하싼과 모나는 신참인 하림과 짝 지어졌다.


하싼은 라일라가 무표정한 것을 보고도 이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게 되었다며 너무나도 만족해했다. 대개의 신참과 기존의 전사들 중 이번 결혼에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하싼만큼 흡족해하는 사람도 흔치는 않았을 것이다.



14


전사들은 아탈라의 근교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정부군이 줄행랑을 칠뿐 전사자는 한 명이라도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루하루가 가면 갈수록 지하드에 지원하는 유럽과 미국,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지원자들이 넘쳐나게 들어왔다. 동아시아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까지 청소년 한 명이 지원해 왔을 정도다. 심지어 유럽과 미국에서도 중앙아시아에서도 소녀들이 전사들을 위한 아내가 되어 헌신하겠노라며 지원해 오는 경우들도 허다해졌다. 모두가 이슬람의 시대정신에 열광했다. 


와합 마을을 시찰하면 이젠 거리를 메운 모든 남성들이 검은색 전사들이었고 모든 여성들은 차도르를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전사가 아니면 전사의 아내들이 되고자 태어난 사람들 인양 그리 믿고 와합 마을로 모여든 것이다.


마을 소년 하싼이 거리를 다니다 차도르를 걸친 라일라와 마주쳤다. 


-라일라 굉장히 오랜만에 외출했나 봐요. 요즘 통 볼 수가 없던데.


-하싼 너는 절대로 죽을 일은 하지 말거라. 절대로 죽지 마라, 하싼!


라일라는 자신의 남편과 이름이 같은 이 소년에게 맥락도 없이 죽지 말라고 죽어선 안된다고 말하고는 눈물이 그렁해져서 돌아섰다.



15 


-자! 우리는 아탈라라는 요충지를 획득할 것이다. 이곳은 본래 우리 무슬림들의 땅이니 이교도이자 악의 화신인 미국 군대와 결탁한 저 배도자 무리에게는 정당성도 알라의 뜻도 함께 하지 않는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아부바르크의 연설로 전사들은 이제는 전투를 할만한 의욕이 깃들 제대로 된 전쟁을 하게 되었다며 만족한 듯이 웃었다. 지브릴은 무자히드도 웃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뭔가 허탈한 듯한 웃음이었다.


아부바르크는 다시 한번 폭탄 테러를 지시했다. 이번에도 자밀라의 남편 하싼과 모나의 남편 하림이 지원했다. 아부바르크는 하싼이 지원한 것에서는 못마땅한 무언가가 있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잠시 고심하는 듯하다가 허락했다. 


하싼과 하림은 지프차에 폭탄을 싣고 아탈라 인근 정부군 집결지 부근에서 자폭했다. 이들도 결혼 며칠 만에 자살 폭탄 테러에 자원한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라일라의 울음소리가 그녀의 대문 밖까지 울려 퍼졌다고 한다. 라일라도 모나도 두 번째 미망인 생활이 되었지만 그들도 그 기간이 그리 길거라 짐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 며칠 사이 그녀가 잃을 건 남편만이 아니었다.



16


야심한 시간에 아부바르크가 소집을 했다. 지브릴을 비롯한 대원들은 하나둘 본부 막사로 모였다. 


지브릴이 대원들 틈에 끼어 막사로 들어서자 막사 중앙에 피투성이의 무자히드와 자밀라가 보였다. 


-이들은 배도자들이다. 성전을 위해 죽음도 불사해야 할 전사와 그를 내조해야 할 그의 아내가 함께 탈영을 하려 했다. 이들은 알라의 뜻을 배반한 것이다.


무자히드와 자밀라는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듯 아무 말도 없었다. 아니면 탈영 중 잡혀 모진 폭행을 당하다 지쳐 말할 기운도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지브릴은 답답하고 암담했다. 


=이들을 어찌해야 하나? 어찌할 수 있나? 도대체 난 어찌해야만 하는 걸까?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그가 자괴감에 빠져있는 동안 아부바르크는 간명하게 지시했다.


-이들은 내일 오전에 처형할 것이다. 그때까지 가둬두고 물 한 모금 주지 말거라.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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