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찾아서 (보급판, 반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절대적 의미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완전한 실패를 영웅적인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솔직히 위의 문장은 완전히 수긍이 가는 말은 아니다. 완전한 실패는 완전한 실패일뿐이지 않은가? 완전한 실패를 영웅적인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은 그저 정신 승리 할 수 있다는 말 밖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씨가 그의 로고테라피에서나 인생관으로나 삶에 있어서의 의미찾기와 삶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얼마나 깊은 믿음 그러니까 인간과 삶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던가를 말해 주는 문장이라고는 생각된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본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그의 저서에서 언급된 로고테라피에 대한 이론 전반이 이해하기 쉽게 서술된 대중적 학술서랄 수 있을 저작이다. 많지도 않은 페이지에 확실히 그의 이론적 체계를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모호한 행복보다 확실한 의미 찾기가 분명 삶을 풍요롭게 하리라는 생각은 들게 한다.  


언젠가 부터 내게는 행복을 느끼는 감각이 사라진듯 했고 그래서 그 반향인지 더욱 행복하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행복하고 싶다" "행복해 보고 싶다" 이런 막연하지만 끈질긴 욕구가 말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과잉 반사 , 지나친 주의 집중이 오히려 행복을 가로막을 수 있겠다는 이해가 들었다. 


목표의 성취가 행복을 느낄 이유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하자면 만약 행복할 이유가 있다면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행복을 동기의 목표로 삼으면 필연적으로 그것을 관심의 목표로 삼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행복할 이유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고, 그러면 행복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의 이런 말에 자연스러운 삶의 목표를 성취해 나아가는 과정 중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지 행복만을 추구하는 무턱대는 행동은 오히려 행복을 멀어지게 만들고 마는 것이구나 하고 납득해 버렸다. 


그리고 내 삶에서 끊임이 없던 시련들에 매몰되어 가던 내 영혼이 이런 삶에서도 의미를 찾아야 겠다는 자성을 하게 하는 저자의 말들이 울림이 깊다.


시련의 경우에 있어서, 인간은 실제로 자기 운명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련이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바뀔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운명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을 바꿀 수는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다. 


지나온 생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의 고난에 대한 태도를 달리 갖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주었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 자신에게만 주의 집중하는 것도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빅터 프랭클씨는 일깨워줬다.


과잉 반사란 지나친 주의 집중을 의미한다. ... 집단적 과잉 반사......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자신에 대한 해석과 자아 실현이 지고의 가치를 지닌 행위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풍토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심하게 훼손된 과거가 운명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은 실제로 무능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자신에 대한 해석, 자신의 삶에 대한 집요한 집중과 해석, 자기 실현을 지나치게 주요한 일로 치부하는 것 등이 오히려 자신을 망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게는 이러한 경향이 짙었기에 더더욱이나 필요한 일깨움이 아니었나 싶다. 


저서에 등장하는 저자의 동료(?)인가가 구소련의 모스크바를 다녀오고는 그곳에서는 신경증 환자가 드물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공산사회에서는 주기별로 완수해야 할 목표가 주어지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을 하던데. 그 대목을 보며 생각했다. 삶에서 주어지는 시련이나 고난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변화시키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막연한 의미 찾기를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삶을 관통하는 인생 전체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 그때 그때 다가오는 목표들을 의미로 생각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인간은 세계 안으로 들어가 어떤 행동을 하는 존재, 하이데거의 말을 빌자면 '세계 내의 존재' being-in-the-world이며,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인간이 그것을 향해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다른 존재와 의미들로 충만해 있는 곳이다.


한정된 자기를 초월하고 희미하고 막연한 삶의 의미를 뚜렷히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빅터 프랭클씨의 인간관 세계관의 깊이도 적지 않은 감상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아직은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너무도 모호하고 막연하지만 "우리는 반신반의하는 동시에 전심전력할 수도 있다."는 고든 W. 알포트씨의 말을 곱씹으며 빅터 프랭클씨가 말하는 의미 찾기를 바탕으로 살아가 봐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정의 심리학 - 우리는 어떻게 감정을 드러내는가?
폴 에크먼 지음, 허우성.허주형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외부 대상을 감상하고 간파하는데 만 활용하려 한다해도 유용할 저서지만 그와 함께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0-10-14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책인 것 같습니다. 심리학, 이란 말이 들어간 책은 무조건 구미가 당깁니다.

이하라 2020-10-15 09:44   좋아요 1 | URL
읽어볼만한 책인 건 분명합니다. 심리학서이면서도 마음챙김 명상에 대한 열의가 생기게도 하는 책입니다.
 
범죄 심리의 재구성 - 연쇄살인사건 프로파일러가 들려주는
고준채 지음 / 다른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긴박감이 느껴지는 범죄와 프로파일링을 통한 검거에 대한 언급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역사와 원인, 예방에 대한 연구성과를 언급하는 부분이 특히나 인상 깊었다. 그리고 범죄와 그 예방에 대한 저자 소신도 너무도 공감이 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나 10초 안에 살인자가 될 수 있다 - 착한 사람을 괴물로 뒤바꾸고, 평범한 일상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인간 심리의 비밀
폴 발렌트 지음, 허수연 옮김 / 생각연구소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저자 폴 발렌트는 정신과 의사다. 또한 홀로코스트 어린이 생존자이기도 하다. 트라우마를 치료하기도, 자기 자신이 트라우마의 피해자이기도 한 대극의 면을 다 지니고 있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런 그의 입을 통해 듣는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경계선이 느껴지는 의사가 말하는 트라우마가 아니라 트라우마를 앓아 본 사람 극복한 사람 그러면서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사람이 하는 말로 받아들여지기에 다른 트라우마 저작의 저자들의 말 보다는 더 피부 깊숙히 다가오는 듯 했다.


1. 챕터 1은 과거의 트라우마가 잠재해 있다가 언제 어느 때 어떤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불러올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다. 트라우마란 것이 얼마나 인간의 생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타격인지를 알 수 있었다.


챕터 2는 집단 재해의 상황에서 인간이 보이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같은 감정 등이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일어날 수 있는 합리적인 증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나 자신이 피해를 덜보게 되어 다행이라는 심리까지 다양한 심정들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인간의 윤리적 의지적 취약성을 보여 주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심정이 전파되는 과정 중 변이할 수 있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리고 챕터 3의 경우 인간은 사랑 받지 못할 거라는 심정과 사랑 받는다는 감정의 선상에서 얼마나 극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가를 느꼈다. 최근 [심리학자는 왜 차크라를 공부할까]를 읽었는데 활성화된 차크라의 범주에 따라 심리적 영향력이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챕터3는 그에 해당되는 이야기 같았다.


2. 챕터 4,5,6은 모두 유아기와 어린시절의 트라우마가 그러니까 가족이라는 사람들의 학대와 악대어린 행위들이 한 사람의 일생을 얼마나 압도하고 파괴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있다. 여기서 예로 나온 사례들도 인상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은 사례들일지는 몰라도 이런 사례들만으로 인간은 총제적으로 파괴될 수 있는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챕터6의 루시의 사례처럼 유년시절에 성적 학대를 겪는 경우는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을만큼의 특수한 상황이겠으나 챕터4,5의 샤론이나 프랭크의 경우는 그 보다는 나은 사례일 것임에도 어린시절 부터 그들의 정신의 한부분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일상을 파탄내고 말았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유년시절과 어린시절 청소년기 청년시절을 돌아보았다. 단계적으로 총체적으로 내 정신을 낭자하고 몇 동강을 낼 정도로 생의 고난만을 경험했지 않았나? 나는 그 시절들을 거치며 원래 망가져 버릴 정신적 상황으로 떠밀려 온 것이란 걸 알았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안배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탓해야 할 문제겠지만 감당과 해결은 내 몫이란 걸 안다. 유년시절과 어린시절 삶의 고난과 짐 부터 감당해야 했고 학대와 방치와 굶주림 말고는 경험했다 할만 것도 없다. 기껏해야 강릉에 살 때 겨울에 포대자루를 타고 비탈길에서 놀던 몇 시간의 하루가 어린시절의 한가한 한 때이자 그 시절에 위안삼을 수 있는 유일한 기억이다. 


이런 황폐한 심정만을 갖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지 않는 사회를 구성해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강력 범죄 예방책이자 자살 예방책이란 걸 정부는 알아야만 한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모든 아이들에게 상처없는 유년시절과 어린시절을 만들어 주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것을 정부의 기능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부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국민 자신이 행복할 일은 국민 각자가 선택하겠지만 무엇이 행복한건지도 느낄 수 없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방치하며 그것은 정부 역할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행복한 사람으로 자라나는데는 정부의 역할이 가장 크다부모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심각한 트라우마를 갖은 인물로 자라지 않았을 때에 한정되므로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의 정부는 갈 길이 멀었다. 트라우마 문제에 대한 이해가 있는 위정자가 절실하다.


3. 챕터7은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추행과 강간을 당한 여자변호사의 사례다. 여기서 영어 원제가 왜 [In Two Minds] 인지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두가지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이 삶에서 지니게 되었던 마음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그렇게 유년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삶을 연기하듯이 그렇게 살았었다. 하지만 내 마음의 다른 영역은 무너지고 부서지고 파괴되고 붕괴되고 훼손되어 황폐한 그대로 아니 나날이 더 황폐해져만 갔다. 세월을 오래 겪으면서도 와해되는 과정은 더해져만 갔지 완화되지 않았다. 전쟁 시의 난리를 겪거나 전쟁에 강제 동원되었더라도 유년시절부터 줄곧 이어져온 고통들을 감당했을 때 보다 폐해가 더 크지는 않을 것만 같았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난 이 조용한 나라 안에서 나만의 전쟁 속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챕터8은 홀로코스트 어린이 생존자 모임에 저자가 의사 자격이 아닌 피해자로서 참가하며 다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상을 인정하고 어떤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세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두가 자신의 이상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각한다는 것 인정한다는 것 그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유년시절의 고통에 대해 어른이 되어서 어른다운 대응을 하려고 할 수있다. 다들 문제는 하나씩 안고 살아가는 거라며 자신의 이상은 남의 일 보다 못하게 무시하고 넘기려 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은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아니 간과하는 그것이 잠재해 있다가 챕터1의 파파도풀로스의 경우처럼 심각하면 살인과 같은 범죄를 불러와 타인과 자신 모두를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챕터9는 이제까지 환자들을 치료하고 상담하던 닥터 폴 발렌트가 자신의 홀로코스트 시절을 이야기하며 그 속에 담긴 아픔과 성찰을 깨닫는 내용이다. 누군가가 인식해 준다는 것이 누군가의 연민과 눈길이 주어진다는 것이 자각할 수도 없이 뿌리 깊은 아픔을 어떻게 인식하고 치유케 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어른들은 또 그외의 어른들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이제는 안전하다" 고 어른이 된 자신의 자녀나 친지, 청자인 누구나에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두개의 마음이 되어 하나의 마음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윤택하게 살아가고 있는 양 보일 수는 있지만 다른 마음은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죽어가고 있는 마음은 적절한 처방이 없다면 자신의 다른 한 마음도 죽일 수 있고 그러한 죽음은 다른 이 또는 다른 이들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게 아픔은 숨기지 않는 것이 좋다. 누군가에게는 털어놓아야 한다. 자신이든 누구에게든 인식되어야 한다. 그것이 상처가 흉터가 되는 길이다. 마음에 흉터는 분명 남겠지만 상처가 지속되며 아픔을 이어가지 않게 하려면 자각하고 마주 볼수 있어야 한다. 초판 1쇄 본으로 읽다보니 탈자도 있고 따옴표를 잘못 이어간 부분도 있었지만 내용만은 이제까지 읽은 어느 트라우마서에도 뒤지지 않았다. 트라우마에 대한 정신생리학적인 원인이나 다양한 치료법이 제시되거나 하지는 않지만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또 나를 조금 더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 좋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의 수용소에서 - 개정보급판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내 유년기부터 어린이 시절을 온통 지배했던 심정들이 나치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느꼈던 심정과 일치한다는 것을... 그 시절들에 겪었던 고통과 괴로움들은 트라우마가 되어 청소년기의 정신적 고통을 더욱 배가했고, 청년기에는 그런 트라우마가 나에겐 없는 듯 일상을 연기했지만 미쳐버리기까지 나를 압도했다. 


돌아보면 일생에 있어서야 기한을 정할 수 있는 나날이었을 테지만 (강제 수용소에서의 삶을 '일시적인 삶'이라 정의한 사람들에게 빅터 프랭클이 그건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이라고 했듯) 나에게는 언제 끝날지도 모를 나날들이었다. 하루하루가 천년 같은 나날이었다. 언제 이 고통이 끝날지 짐작도 기대도 할 수 없는 나날... 그러다 1년에 하루 이틀 잠시 그 고통스러운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날에는 (사이가 있는 지옥 속에서 나에 잠시 온 이 사이가...) 이것이 꿈인지 실제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인증을 겪었다. 나는 그 시절들에서 벗어난 시기 이후 모든 걸 떠올리지 않으려 했고 기억을 억압하려 했지만 아버지 역할을 하던 그를 볼 때마다 한없는 허기와 분노가 일었다. 


그 시절은 지났다는 걸 깨닫고 대중을 위해 살아가고 대중의 인정을 받는 미래를 그리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려던 즈음 17살에 나는 알지 않았더라면 더 좋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는 난 인생은 끝났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누군가를 구해내고자 했으나 그럴 수 없었고 그 현실과 함께 내 미래는 끝짱난 거라, 난 모든 것을 잃은 거라 패배감에 절어버렸다. 그 이후의 생은 그저 흘러가는 데로 내면의 고통이 날 불사르는 것을 막으려 만취한 채 보내버렸다. 체념한 것이다. 인생을 포기한 것이다. 그 당시 나를 짓누르던 압박감과 절망감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17살에 모든 것을 잃은 채 살아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심정 속으로 던져졌고, 그때 나의 유년시절부터 어린 시절의 고통과 괴로움의 시절들의 기억들이 나의 붕괴를 더욱 사납게 몰아쳤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 가지 방식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두 번째는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세 번째는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두 번째의 경우를 두고 빅터 프랭클은 사랑의 경험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방식이라고 했다. 로고테라피라고 하는 정의대로 라면 사랑으로 치유된다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경험으로 안다. 진정 사랑하는 대상이 나타나 주었을 때도 그런 고통스러운 트라우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자신의 고통의 늪 속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는 것을... 


그런 때는 사랑으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 방식을 권한다. 삶을 그냥 아직 끝나지 않은 시련의 과정으로 인정하고 그 시련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낫다. 나의 경우는 그랬던 것 같다. 그 오랜 나날을 거치고 이제서야 트라우마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은데 이런 상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삶에 대한 나의 태도의 변화에 있었다. 사랑을 하더라도 이렇게 트라우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야 정상적인 태도로 사랑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 고통은 사랑 속에서도 또 다른 고통을 잉태한다. 


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애쓰지도 않았다. 그런 날들도 과거에는 있었지만 그러한 무리한 노력이라고 트라우마를 감소케 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는 그저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하려 했던 것이, 그렇게 규칙적인 매일이 흘러가며 "이제는 무던한 일상이지 더이상은 나는 고통 속에 있지 않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 트라우마를 벗어나도록 해준 것 같다. 아니 애초에 나는 천애고아였고 고통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트라우마를 치유해가는 과정에 들어선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과거 어느 시점에 내가 나를 망쳐버린 현실도 더는 수치와 괴로움 속으로만 나를 몰아넣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정서를 놓치고 싶지 않다.


특별한 조우나 계기가 있지 않더라도 일상이 더이상 나를 고통 속으로 괴로움 속으로 밀어 넣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트라우마 치료에는 이상적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과정과 함께(에서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삶 속에서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