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에 숨은 사이코패스 - 정상의 가면을 쓴 그들의 이야기
이윤호 지음, 박진숙 그림 / 도도(도서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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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흔히 반사회적 인격장애라 불리는 이들은 어쩌면 인간의 원형에서 선성과 악한 면모 중 한 축을 그려내는 대극의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원형 중 이제까지 한 측면만을 부각해 오고 그러한 모습으로 사회화되어 왔지만 그것도 선성은 아니었습니다. 승자독식, 약육강식, 인간의 이기성에 주목하는 관점이 과연 인간의 선성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이제까지 아마도 인간의 악성을 부각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근간에 [휴먼카인드]라던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저작들로 보아 인간의 선성에 주목하고 그러한 면을 보편화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한 측으로 기울어진 주장이다 보니 인간의 악성을 경험하거나 역사를 통해 인간의 악한 면모를 인식하고 있는 대중들을 설득하기에는 다소 우스운 설득방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에 이르면 인간 원형의 대극에서 악한 측면으로 그 극성이 극한에 이른 것이 아닌가도 싶네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범죄로 드러나고 있고 정치인들 일부의 양상에서도 그런 면모가 찾아집니다. 근래까지도 정권의 교체기마다 관련인들의 자살로 알려진 죽음들과 의문사가 만연해 왔었던 것도 그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나 특정 정치인의 경우 그의 비리 의혹과 관련한 사람들이 4명이나 자살하거나 의문사한 통계적으로 말이 안되는 사례가 있으며 최근 그의 비리의혹과 관련한 또 한 명이 자살시도를 했다는 뉴스가 연일 방송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권력의 정점에 이러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들이 자리한다면 어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으로 그들과 같은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지닌 이들이 권력욕을 추구할 때 이 사회는 너무도 스산하고 잔혹하게 변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됩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을 알고 그들을 치유하거나 그들과의 거리를 지키며 사는 법을 대중이 알아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는 반드시 대중교양서로 널리 읽혀져야 할 책이 아닌가 합니다.

 

살아오면서 보거나 경험한 것들의 누적으로는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같은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는 사람들은 태생적이고 유전적이기도 하지만 환경과 사회적 풍토의 영향도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 사회가 인간의 이기성에만 주목하고 그것을 장려하는 사회상을 띠고 있기에 자라나며 교육에서부터 승자독식주의를 답습하게 되는데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더는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아니라 현대인 일부의 상식으로 자리잡는 것도 이상하지 않고 말입니다.

 

저자 역시 프롤로그부터 [유전성과 개인적 환경뿐만 아니라 사회도 친사회적 혹은 반사회적 인성을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점과 범죄학자의 정의가 같은 데 딱히 놀랍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사회 속에 만연하고 범람하는 반사회적 인성이 타고나기만 하는 거란 결론을 갖기는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이코패스는 미국 인구 중 1%를 차지하고 소시오패스는 미국 인구의 3~5%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비율은 재소자 중에서는 더욱 높게 나타나는데 전체 재소자의 25%가 반사회적 인격장애 범주에 속한다고 하네요. 전체 미국 인구 중 1%라고 한다면 33십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사이코패스이고 전체 미국 인구의 3~5%라고 한다면 99십만 명에서 165십만 명이 소시오패스라는 것이니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인구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군대나 직장 등에서 이런 범주의 특징을 보이는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범주의 선임이나 상사를 만나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강제적으로 반강제적으로 비슷한 성향을 보이게 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라는 것은 알고 보면 하나의 마인드 바이러스이고 재프로그래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영향이 어떠한지 어떻게 종용되고 어떠한 조직이 이런 성향을 강제하거나 유포하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종용한다 강제하거나 유포한다고 하니 설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실제로 영국 공군의 특수부대에서는 이러한 반사회적 특질을 목표로 삼고 그러한 특질을 보이도록 훈련하고 있으며 영국의 은행들은 직원을 뽑을 때 이러한 성향을 보이는지 조사하는데 그건 반사회적 인성을 보이는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고용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사회가 반사회적 인성을 장려하고 추구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기업의 임원들은 반사회적 인격장애 기질을 가질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높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언론에서는 월가 임원들 중 10%는 사이코패스에 해당한다는 기사를 내보낸 적도 있다고 하는군요.

 

사회가 요구하는 성향이니 사회 내에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지며 자라나는 것은 특이하지도 정상을 벗어난 것이지도 않은 일상적인 상황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회가 과연 권할만 하거나 이대로 유지되어도 좋은 사회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시대입니다.

 

사이코패스가 가장 많이 분포한 직업군을 살펴보면 10위가 공직자, 9위가 요리사, 8위는 성직자, 7위는 경찰, 6위는 언론인, 5위는 외과의사, 4위는 영업사원, 3위는 방송인, 2위는 법조인, 1위는 기업가라고 합니다. 대부분 미디어를 통해 영웅화되고 이상화되는 직업군으로 이런 직업을 가진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는 인물들이 연애하는 로맨스 장르의 TV드라마는 흔히 몇 번이고 보셨을 겁니다. 이들의 직업군과 이들이 드라마에서 보이는 성향이 이상화되어 표현되다 보니 청소년들은 이런 성향을 보이면서 해당 직업군을 가지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을 띠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더욱이 [권력의 심리학]에서 브라이언 클라스가 지적했듯 부패한 권력의 자리는 부패한 인간들을 끌어모으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저 위치의 인간들은 저래야 한다는 상식을 지니게 되면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지닌 이들은 그러한 자리를 추구하게 될 가능성이 다른 경우보다 현격히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가 조성하여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모으고 유지하고 길러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서에서는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정의를 확인할 수 있고 사이코패스의 뇌과학적 특질도 보여주며 타고나는 성향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여러 사례에서 알수 있듯 본서를 읽고 보면 타고나는 것이 육성되는 것보다 결코 비중이 높지 않다고 결론지어집니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사회가 문제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적절한 대응안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자의 말처럼 사이코패스든 소시오패스든 양육의 방식 곧 사랑이 치료법이 됩니다.

 

승자독식과 황금 만능주의가 결합하고 이기성에만 주목하는 사회상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대물림 하지 않을 때 사회에서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감소하고 그런 성향을 띠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어느 범죄자가 출소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거주를 할 수 없도록 만들자고 하고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위한 나라니 하는 말이 확산되는 건 그러한 범죄자로 자라난 이들을 방치하고 수감 기간에도 치료하지 못한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태어나는 사람도 양육자와 환경에 따라 사회에 기여하는 인물로 자라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나지 않는 사람도 성장 과정의 문제로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건 그들을 범죄자로 자라나게 하는 사회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고 치유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은 더더욱 문제입니다.

 

수감기간 동안 어떠한 범죄자라도 다 치유되어서 나오는 사회라면 누가 출소한 범죄자의 거주처가 어디가 되느냐로 반발하겠습니까? 상처를 만들지 않는 사회, 상처를 지속하지 않는 사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라면 누구도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뉘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한 벽돌 하나의 역할을 이 책이 해주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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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의자 (10주년 기념 특별판) - 숨겨진 나와 마주하는 정신분석 이야기
정도언 지음 / 지와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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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소장만 하다가 드디어 읽었다.

프로이트에 관한 기억이라면 중2 병이 말기이던 중3 방학 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입문과 꿈의 해석을 읽었다는 것이다.

 

초자아 자아 이드의 개념과

프로이트가 야릇하게 해석하는 어느 여자아이의 꿈 해석 정도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프로이트 저작에 대한 기억의 다이다. 

 

그 책을 읽을 때 즈음 고래잡이 수술을 자진해서 받았다. 

수술 시기의 기억이 융이 말하는 성인식 의례를 해석하는 대목과 

상당히 닮아 있고 수술 후 좀 전에 이야기 한 

그 여자아이의 꿈을 프로이트가 해석하는 대목에서 

너무 어딘가가 극도로 고통스러워 책을 던져 버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하지만 머릿속을 헤집어 봐도 프로이트의 두 저작에 대한 내용은 

거의 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읽기에는 그 저작들이 너무도 지루하고 어려웠던 기억이 있어 

좀더 대중적이고 쉽게 풀이해준 책들을 검색하다가 

정신분석과 관련한 책을 세 권 구하게 됐다. 이 책이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세 권 다 읽지 않은 장기 소장용이었다가 

이 책에 대한 3일 간의 독서를 어제 마쳤다.

 

본서는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영역 중 

무의식과 방어기제에 대해 보다 쉽게 풀어내어 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방어기제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좀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

무의식에 대해 할애된 장들이 많지만 

정신분석학의 내용을 학문적으로 풀이해 준다기 보다는

정신분석의의 입장에서 심리상담을 해주 듯 자상히

특정상황들을 상정하여 분석해주고 있다. 

 

심리적인 도움을 받기 위한 목적에서는 적절하다고 생각되고 

정신분석학을 지적으로 다가서려

학술적인 정의들을 알고 싶어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안 맞을 수 있다.

 

심리 상담을 책값을 제외한 거의 무료로 받고 싶은 분들이라면

최적의 저작이 아닌가 싶다. 

 

나에게는 그 많던 심리적 문제들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고 

지금 이 순간은 

그런 문제들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나날들이구나 하는 감상을 주었다.

 

프로이트 보다는 융을 더 신뢰하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의식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분명 있기에

정신분석의들을 찾는 내담자들도 그리 많지 않을까... 

그러니 알아두어도 좋은 분야가 아닐까 싶다.

 

참! 그리고 이 책의 부록란에 수록된 심리학 저작들은

상당히 흥미롭다. 꼭 읽어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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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최면세뇌술 - 마음을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
박한진.손인균 지음 / 성숙한삶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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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며 1980년대~1990년대에 출간된 최면 서적들에서의 내용이 줴다 구버전이 되어버린 걸 알았다. 이젠 최면에 대한 학자들과 치료가들의 시각이 "최면은 일상 속 의식에 자연스레 개입하는 것이다" 란 식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맨 위 부터 읽어 보면 "최면을 통한 의식의 통제로 기억이 없이 행동하게 하는 것과 자신은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행동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이야기 하고 있다. 아마도 이건 비판적 사고라고 말한, 검열을 거치는 체계를 무력화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야 한국에서 쓰이는 최면 암시라는 말이 일본을 통해서 최면이 들어오며 통용되던 용어이고 서양에서는 최면 제안이라고 하는 줄 알게 되었다. 암시는 어두운 지시를 말하는 것이니 "피최면자가 자신도 모르게 최면자의 의도 하에 놓일 수 있다" 는 의미 전달일 것이다. 또 제안이란 표현은 "인간은 의지가 있기에 자기의지에 반하는 지시나 명령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우는 없다. 그저 인간의 의지를 향해 하나의 제안을 할 뿐이다" 라는 관점이 담긴 용어인듯하다.


그러나 본서에서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는 최면 제안을 통해서, 받아들일만한 사고를 구축하면(선택된 사고를 확립하면), 의지(의도)를 조작해 살인도 할 수 있다고 도입부분의 부록란에서 이미 저자가 언급했었다. 자신이나 타인의 취향과 도덕성을 최면 제안으로 왜곡(우회)하여 의지(의도)를 조작할 수 있다고 저자 역시 인정한 것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은 왜곡(비판적 사고를 우회)하여 의도를 조작했기에 그런 것이지, 결국은 최면 제안은 하나의 제안일뿐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다" 라는 식의 사실호도는 어떤 의도가 있어서일까? 이건 최면의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간과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밈MEEM이 아닐까? "최면은 위험하지 않고 인간의 의지는 강력하다. 최면도 그저 하나의 제안일뿐, 결국 너희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으로 저항할 수 있으니 최면이 악용되는 것에 우려할 필요는 없다" 는 대중적 기만을 펼치기 위한 것일듯 싶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집단자살을 한 과거 이단종파들이 각국 마다 적지 않았다. 또 한번 1000년의 끝을 앞두고 무언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심리의 연약함이 사이비교주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이비교주에 대한 무한신뢰가 결국 교주의 말과 행동에 따라 대량학살과도 다를 바 없는 집단자살을 불러오기까지 한 것이다. 최면은 그저 제안일 뿐이라기엔 과거 팔극권 서적에서 보았던 이서문 권사의 일화가 떠오른다. 제자 한명과 타지역으로 떠나신 권사를 어느 부호가 알아보고서 절대극강 권사로 알려진 이서문 권사에 대한 호의를 보이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했다고 한다. 그의 집에서 환대를 받은 이서문 권사께서 그에게 호의에 대한 답례로 팔극권을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헌데 "이렇게 출수하라" 며 그의 몸에 권을 타격하는 자세를 취하자 그 부호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호의를 보이고 대접한 부호를 타격해 죽였을리도 없고 만일 실제 이서문 권사께서 타격하여 죽은 것이라면 아마도 생사장을 쓰고 대결한 결투가 아니었기에 분명 이서문 권사께서 법적 판결을 받고 수감된 고사가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사망한 이가 타격을 받아 죽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그 부호는 도대체 왜 죽은 것일까? 그저 추측일지라도 해보자면 그 시대 이서문 권사가 절대강자임은 전중국에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 이름난 영웅들을 우상시 하는 중국문화에서 그 부호는 이서문 권사에 대한 존경과 동경이 하나의 최면 작용을 하여 이서문 권사가 자신을 타격하는 동작을 취하기만 했는데도 놀라서 죽은게 아닌가 싶다. 


다른 예로는 과거 사형수에게 사형집행 방식이 손목의 동맥을 잘라 출혈과다로 죽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며 의자에 묶고 눈을 가린 채 손목에 작은 생채기 정도를 내고는 손목 위에 링거를 설치해서 거기서 조금씩 손목으로 물이 흐르게 했다고 한다. 사형수는 몇십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고 한다. 링거에서 떨어져 흐르는 물을 자신의 피라고 생각하고는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는 상상만으로 죽고만 것이다. 이 두 경우는 모두 실화이고 인간심리가 그저 믿기만 하면 죽음 마저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번에는 실화는 아니지만 누구라도 수긍할 법한 그럴싸한 예를 하나 만들어 보자. 밤 늦게 시골집에 홀로 있는 심장질환을 앓는 노인이 있다고 하자. 이 노인이 하얀 잠옷 원피스를 입은 동네 광녀 하나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치자. 밤이라 누군지 못알아 보고 놀라 겁을 먹고 있는데 이 정신 이상한 여자가 입가엔 빨간 립스틱이 눈가엔 눈화장이 번진 채 다가온다면 노인은 더 놀라지 않겠나? 그 때 그 여자가 "죽어버려!" 라고 소리쳤고 이 노인이 심장 마비로 죽었다면 이 심장마비의 원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심장이 약해서?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심장이 약한 것도 하나의 조건일테고 그 노인이 그 정신이상한 여인을 귀신으로 보았다는 것과 그 귀신이 자신에게 죽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 그리고 귀신의 말에는 힘이 있을 것이라는 밈MEME까지 모든 오해가 심장질환에 더해져 일어난 현상일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최면 제안이 비판적 사고의 검열 과정을 피하기 위한 딱히 치밀한 체계나 구성 없이도 개인이나 집단에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신념(MEME)에 따라 별다른 저항없이 강력히 작용하여 신속한 결론에 이르게 한다는 증거일 수 있다. 팔극권 이서문 권사의 일화에서는 이서문 권사에 대한 존경과 동경이 최면 제안(타격하는 시늉)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고, 출혈과다 사형집행 설정으로 사형수가 사망한 경우는 눈을 가리고 손목의 작은 생채기를 내고 물을 손목으로 떨어뜨리는 설정을 통해 자신의 손목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착각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사망에 이르렀다. 단지 동맥을 끊어 출혈과다로 사망하도록 사형집행방식이 결정되었다는 최면 제안이 인지판단오류를 가져오고 위에서 언급한 설정이 극도의 정서 동요를 불러왔다는 것만으로 사망한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심장마비 사례는 비판적 사고의 우회를 거칠 수 없을 직설적이기만 한 "죽어버려!" 라는 말이 최면 제안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 광녀의 차림을 보고 심장병이 있던 노인이 귀신으로 착각을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심장병이 일차조건이라면 귀신으로 오해해 공포를 느낀 것은 충분조건이 되었다 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신념이나 의도적 비의도적 환경 왜곡(설정, 착각)만으로 별다른 최면 제안의 구조화없이도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도입부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저자는 '기억없이' 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지각없는 사람" 등의 표현으로 쓰는 "지각" 을 적용해 보자면 "최면으로 과연 지각없이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의도와는 다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게 가능한 것일까?"


나로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고 생각한다. 정규 최면 교육과정을 거친 사람들에게 최면학회에선 아마도 "최면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은 착오이며 미신일뿐이다. 최면은 인간이 인간의 의지와는 다른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주술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의사를 통해서야 실현되는 것이다" 라고 가르칠듯 싶다. 


이 시대는 "인간의 의지는 강력하다. 인간의 의지로는 못할 것이 없다. 정신력만 강하다면 자신의 의지로 극복 못할 것이 없다" 는 인간의 자기만족적 관점을 명분삼아 자기확신과 함께 "삶을 살아가면서 하는 자신의 모든 태도와 판단과 행위에 있어서 자신만이 스스로의 의식과 의사와 행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모든 것은 자신만의 책임이다" 라는 오류에 가까울 논리를 대중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며 모든 대상과 자기자신에 대해 분석과 판단과 행위를 함에 있어... 다시 말해 개인 스스로의 의식과 의사와 행동에서 자기통제력만이 절대적으로 강력히 작용하는 것일까? 


이 시대에는 인간의 자기만족과 매체들의 대중적 심리조작 유도가 더해져 그런 관점과 논리를 대중화 하고 있다. "모든 것은 그저 제안이며 판단은 각각의 개인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해당 개인에게 있다" 이런 논리와 관점은 대중을 통제하면서도 책임은 회피하기 위해 만든 또 다른 최면 제안이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오히려 심리학이론을 마케팅과 대중심리통제에 적용해 대중을 기만하고 이용해 쳐먹는 얍삽한 시대이다.


이 시대는 자기 확신은 강화하여 자기만족감은 충족시키지만 오히려 서로에게 서로가 행할 수 있는 의사결정 유도 또 특정집단이 개인이나 대중에게 의도를 지닌채 의사결정에 개입할 수 있음을... 바로 그 원리의 대중심리통제를 이용해 간과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개인과 집단의 분석과 판단과 행동에 타자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이 하나의 학문으로까지 완성되어 있는데도 대중들은 자신과 집단이 통제 받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위의 마지막 포토의 내용에선 이미 저자가 처음 최면에 대해 정의한 "최면은 자기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지각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내용을 저자 스스로 반박하고 있지 않나? "최면 제안을 따르면 현실세계에 대한 반응성이나 현실성이 떨어지고 최면가가 체험하도록 한 가상의 세계에 대한 반응성과 현실성이 높아진다" 고 말이다. 한마디로 "실제 사실 보다 오히려 최면으로 유도하는 가상의 것들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는 말이다.


실제 사례 하나를 들자면 타인(여기서는 절친)에 대한 신뢰가 이차적인 인지판단오류를 띠게 되는 경우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여자문제에 있어 그리고 항상 판단에 있어 신뢰감을 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오래 전 사진 두장을 보여주며 이런 여자랑 사귀다가 이런 여자랑 결혼하고 싶다고 했던 적이 있다. 아직 어린시절이라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아니었고 그 이후에도 그 친구는 늘 다른 여성과만 사귀었었지 결혼하겠다던 여성과 사귄적이 없었기에 지나가는 말이었나 보다 했었다. 그러다 두번째 사진 속 여자와 교제하게 되었다. 친구는 이 두번째 사진 속 여성에 대해 순진하고 자기관리 잘하고 단정하다고 칭찬만 했었다. 이런 말들이 그 친구에 대한 신뢰도로 인해 뇌리 깊숙히 새겨져서는 이 여성과 교제하고 얼마 안되어 바지 속으로 손이 들어오는데도 불구하고 "아! 얘는 너무 순진해서 남자 몸이 궁금해서 이러는 거야" 라는 말도 안되는 해석을 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일종의 확증편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에 대한 믿음과 친구가 여성을 보는 관점에 대한 신뢰가 어우러져 친구가 그녀에 대해 내린 단정이 최면 제안이 되어 나 자신의 지각을 상실한 채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불러온 것이다. 세상에(적어도 대한민국 내에서라도) 만난지 며칠만에 남자 바지 속으로 손을 넣는 순진한 여자는 없을테니 말이다. 


이것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단정지은 확증편향이었지만 이와는 반대로 부정적 확증편향이 있을 수 있다. 외모와 말투만 보고 어린소년과 손을 잡고 가는 아저씨를 보고 아동성애가 있는 게이인가로 오해 할 수도 있다. 그 이후 뭘해도 나쁘게 해석했는데 알고 보면 정신지체아동을 돌봐 주고 있었던 것을 오해한 상황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처음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본 직후 누군가가 오해의 소지가 될 언급을 거듭 한다면 이런 경우 좀처럼 그 오해는 풀릴 수 없을 것이다. 풀리기 보다 오해가 더더욱 커져가고 골이 깊어져 갈 수 있다. 여기까지는 개인에게 최면이 악용될 수 있는 경우였고, 이제 사회불안 가중 차원에서 보자.


최면을 통해 "'너는 선택 받은 인간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높히 쓰려고 네게 고난과 시련을 주시며 이 모든 것은 네가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끝내 예언과 이적을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라는 최면 제안을 지속적으로 말과 그러한 정서적 동요를 불러오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거듭한다" 면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예언의 완성이라 믿으며 비판적 사고(검열 작용)와 지각을 상실한 채 행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이와 유사한 각도의 최면 제안이 종교적 신념이나 투철한 사상적 신념과 더해지면 몇백명이 집단자살을 하기도 하고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와 학살이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히틀러를 통해 세뇌된 인간들이 선동되어 홀로코스트를 자행하면서도 일말의 동요도 하지 않던 것도 군중심리와 최면 암시가 더해질 때의 폐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심규선씨의 《너의 존재 위에》 란 노래 마따나 누구든 "나의 존재 위에 나의 의지를 넘어서는 이를 두어선 안될 일이다" 그런 존재에게 언제든 통제권을 넘겨주고 압도 당하는데 자유의지를 사용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말이다.


최면은 고도로 집중한 상태이며 의식과 의지가 명료한 상태라 저자는 말했다. 이 『요가수트라』의 "요가는 의식을 통제하는 것이다" 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도 간과한 것이 있다. 요가에서도 "요가수행 과정에서 '아나하타차크라' 였던가(?)가 각성되면 '상상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며 각별한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는 것이다. 인간의 믿음은 세상을 바꾸기도 파괴하기도 하지만 자기자신에게 있어서는 그 보다 더 신속하고 총체적인 파괴력을 행사할 수 있다. 게다가 "비판적 사고를 우회(왜곡) 해서 없던 신념과 신앙 마저 심어줄 수 있다" 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다면 "개인뿐만이 아니라 집단의 의지(자기통제권)도 얼마든지 누군가의 마음대로 제어될 수 있다" 는 것도 수긍해야 할 일이다. 
 
 

 

 
특히나 인간의 안정과 안전을 추구하고 행복을 바라는 바람에다 사람들 내면의 원형상까지 이용한 최면 제안들은 꼭 말이 아니라 사회환경 변화와 영화와 드라마 등 매체를 통해서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형성된 신념(프로그래밍된 MEME)이랄까 행동을 유도하는 강제유입 자원들은 현실과 정보를 해석하는 하나의 필터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필터링을 거치면 결국 누군가가 의도한 바대로의 행동(결과)을 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와 목적을 띠고 언제든 지속적으로 개인과 대중에게 악용될 수 있다. 1930년대 부터 미국은 대중심리통제부서를 두었었다. 독일에서는 2차세계대전 당시 괴벨스라는 대중심리통제의 귀재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후 서양에서는 근래까지도 공식적으로 LSD라는 향정신성 의약품까지 동원해 사람의 심리를 통제하는 연구에 투자를 적지않게 해 왔다. 이제는 미국과 영국을 시작으로 대중심리통제부서를 신설해 행동경제학자들에게 지휘권을 주어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중심리통제의 필요성과 그 파급력을 충분히 실감하고 검증해 본 서양세력이 끝내 국민들의 저항도 받지 않을 학문적 근거를 바탕으로 합법적 조직으로서의 대중심리통제기구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향후엔 유럽과 북미를 너머 세계 각국 정부에서 너나할 것없이 대대적으로 대중심리통제부서를 신설하여 운영할 것이다. 세계 각국 정부가 대중의 의사결정에 개입하여 판단을 유도하는 것을 연구하는 행동경제학을 동원해 합법적인 대중심리통제를 하면서 저항도 받지 않을 것이다. 
 

 

 
환경과 정서를 유도하며 최면 제안과도 같을 신념이랄까가 자신의 해석인양 솟아나오도록 치밀하게 유도해 가면 사람은 최면을 당했는지도 모른 채 타인과 타집단에 대한 공격성향을 띠게 된다. 또 정의라는 얼토당토 않은 역설적 주장을 내세우며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도 서슴치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우리는 일상과 일상 속 매체들에서 의도를 지닌 최면 제안들이 거듭되고 있지는 않은지 늘 숙고하며 살아가야 할 일이다.


※ "최면은 인지능력이 흐려지는 상태가 아니며 오히려 내적인 현상에 대해 명료하고 강력하게 인지할 수 있는 상태다." "최면은 고도의 집중 상태다. 의식와 의지가 명료한 상태다. 의식의 초점이 내부로 향하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반응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보다 더 높은 상태" 라는 맨 위에서 두번째 세번째 포토를 보자. 최면과 명상의 차이를 찾을 수 없는 문장이다. 과거 부터 "명상은 최면과 다르다" 는 주장이 늘 있어 왔다. 


하지만 명상, 기도, 최면을 볼 때 어느 노선까지는 동행을 하고 있다가 세갈래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 갈래 길에서 깨달음이나 사마디를 추구하면 명상이고, 하나님을 향하면 기도이고, 제안(의도)을 통한 결과 도출을 향해 가면 최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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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힘 (프레더릭 레이턴 에디션) - 최상의 리듬을 찾는 내 안의 새로운 변화 그림의 힘 시리즈 1
김선현 지음 / 세계사 / 2022년 6월
평점 :
품절




꽃밭의 기사 / 조르주 로슈그로스


매화초옥도 / 전기 


봄 / 장프랑수아 밀레


수확하는 농부 / 빈센트 반 고흐


속임수를 쓰는 사람 /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 /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Work, Relationship, Money, Time, Myself 

이렇게 다섯 장으로 나누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고 힘을 주는

그림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한 명의 독자로서의 감상으로는 

저자의 감상이나 치유하려는 방면으로 힘이 되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사람에 따라 저자의 의도와는 다른 감상이 드는 경우도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랬던 나의 경우 두 가지만 예를 들자면

위의 그림 중 카라바조의 속임수를 쓰는 사람의 경우  

저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문제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바탕에 따라

마음에 다른 무게로 작용하게 된다는 식으로 그림을 해석하고 있지만 

정작 나에게는 작은 수작에는 흔들림 없을 재정 상태 대단한 양반이 

카드게임을 즐기고는 있지만 수작질 하는 저들 패거리에 의해

크게 잃게 되는 건 사실이잖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대수롭지 않게 대하려고 해도

당한 것은 당한 것이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디에고 리베라의 꽃 노점상 경우에도 

저자는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눈을 이야기 하는 식이지만 

나에게는 여린 소녀에게 짐을 지우는 거대한 이가 있구나 하고 느껴지면서 

피상적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짐이라고 해도

감당하기 버거운 짐을 자의와는 상관없이 감당해야 하는 이도 있구나 

벗어버릴 수 없는 짐들을 강제로 감당해야 하는 삶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이 책에서 접하게 되는 저자의 글들은 저자가 독자의 감상에 방해가 될까 봐

최대한 상세한 해석은 자제하는 것이 느껴지면서도 

무언가 그림으로 힘이 된다는 것은

부분에 부분이지 않은가 하고 생각되었다. 

 

그림으로 힘이 된다기 보다 

지금의 내 마음 상태를 반영하는 그림들에

끌리는 정도를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나로서는 그림들에서 큰 반향은 얻지 못했지만 

그림 치유는 케바케 일테니 다른 분들께는 

도움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이 책에 끌리는 자체가 자신을 치유하고 싶다는

내면의 바램을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는 것이지 싶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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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 넘치는 생각 때문에 삶이 피곤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 처방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크리스텔 프티콜랭 지음, 이세진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 자신의 상태를 알기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다루는 책들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책 2 권이 [자꾸 이상한 생각이 달라붙어요]와 본서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였다.


작년 10월 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달라붙어요]를 읽었는데 그 책이 말하는 증상과 나는 분류가 다르다고 생각됐다. 그러다 본서가 정신적 과잉활동인에 대한 내용임을 알게 되었고 이 책이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임을 첫 장을 읽으면서 부터 알수 있었다.


저자의 정신적 과잉활동인에 대한 애정까지도 느껴지는 본서를 읽으며 무엇보다 나 자신의 특징과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점을 알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오랫 세월을 정신적 과잉활동인으로 살아온 당사자로서 저자가 간과한 것은 정신적 과잉활동인도 언제까지나 그 순수성을 유지하고만 살아가진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보호할 여지는 생긴다. 그것이 사회와의 단절이든 자폐적인 양상을 띠는 것이든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든 보호막을 갖게 된다. 순수가 아니라 되려 고슴도치처럼 까칠해 질 수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방식에 더해 정신적 과잉활동을 지닌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지키는 법을 알려주자면 여러 인격을 가지라는 것이다. 언젠가 다중인격과 관련한 책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 책의 저자는 성숙한 인간은 여러 인격을 보유하고 때에 따라 그에 맞는 인격을 띠고는 한다는 말을 했다. 이를테면 페르소나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우리가 각기의 때와 장소에 따라 격식에 따른 다른 의복을 입듯 그렇게 각기 다른 인격을 구사하라는 말이다. 가면극에서 연기자가 가면에 따른 다른 연기를 보여주듯 우리는 그렇게 각 역할에 맞는 인격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말을 했지만 그가 간과한 것은 껍질을 깨고 나오기 전 그안의 아기새로 성장하기까지 그 생명체를 보호해주고 성숙할 기회를 주는 것 또한 그 껍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그 껍질 달리 말해 가면이라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다. 우리는 부모로서의 가면, 배우자로서의 가면, 자식으로서의 가면, 직장 상사로서의 가면, 부하직원으로서의 가면, 친구로서의 가면, 이웃으로서의 가면, 시민으로서의 가면 등등등 사회에서 무수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그 가면은 모두 가치 있고 쓸모 있는 것이다. 부모로서의 가면을 써야 할 때, 친구로서의 가면을 써야 할 때 이성으로서의 가면을 쓴다거나 자식으로서의 가면을 써야 할 때 사회일탈자로서의 가면을 쓴다거나 하는 사람들도 간혹 뉴스를 통해 접하기에 더더군다나 그 상황에 맞는 가면 즉 역할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알게 될 때가 있다. 상황과 격식에 맞는 가면은 중요한 것이다. 때론 그 가면이 자신에게 너무 무거워 버티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가면의 역할 속에서 안정감과 의미를 찾게 된다. 충분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가면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를 통해 알수 있다. 


정신적 과잉활동인은 이러한 가면의 형식을 거북해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가면의 효용성은 자신을 지키는데도 있기에 정신적 과잉활동인 누군가에게는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면을 쓰라고 말이다. 자신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고려해 만든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설정한 다양한 역할의 가면을 써봤고 그럴 때도 상처 받을 때가 많았다. 지금도 난 나만의 가면을 쓴다. 그리고 때론 상처 받는다. 하지만 이런 가면들이 없었더라면 난 아마도 상처가 낭자한 채 죽어있을 것이다. 


깊이 설명하지 않아도 정식적 과잉활동인이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정신적 과잉활동인임을 자각하고 자신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이들이라면 또 어떻게 사회와 벽을 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를 걱정해본 이라면 이 책부터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가면이든 옷이든 연기든 뭐라고 말해도 좋을 나의 조언을 고려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방탄복이든 방패든 필요하다고 느껴본적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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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2mars 2023-03-28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이신가요.. 리뷰에서 울림을 받고 갑니다.. ㅎㅎ

이하라 2023-03-28 11:38   좋아요 0 | URL
피드백이 있을 리뷰라고는 깊이 생각지 못했는데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