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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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학 입문의 과정을 마치며 4원소의 세계를 여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 과정이 마치 칼 융의 적극적 명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내친김에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창조한 그 대륙과 섬들과 그 세계에 만든 피조물들을 가끔씩 돌아봤다. 명확하게는 피조물들을 돌아봤다기보다는 내가 만든 세계를 유람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나의 피조물들이 모여든 자리에서 나는 고백했다. “내가 너희의 신이다라고. 피조물들은 분개해서 일어났으며 창을 들어 모두가 내게 저항하려 했다. 나는 그들을 제압하기보다는 내가 만든 피조물들을 해치기 싫다는 심정이 들어 그 자리에서 날아올라 그 대륙과 섬의 창공을 날아 다시 유람을 떠났다. 그 이후로는 나의 피조물들에게 내가 너희의 신이다라는 고백이자 선언을 하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적극적 심상화이기도 한데 세계를 내가 창조했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 헤르메스학 입문에서 원소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나 흔히 백마법이라고 불리는 에노키안 매직의 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페어리 웨이까지 마법 대부분이 또 다른 세계와 조우하며 그 세계와 그 세계의 존재들을 체험하는 여정이다. 이런 일련의 익숙한 세계로 인해 나로서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등장하는 세계와 그곳을 여행하고 그림자가 빠져나와 살아가고 또 노란잠수함 소년이 의 역할을 계승하는 내용들이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세계의 구성과 양식이 단조로워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상상이자 명상이 담박하다는 감상이 들었다. 40년이 넘어 구축된 세계임에도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가 만든 세계 다시 말해 소설 속의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 함께 창조해낸 그 세계에 대해 나름 체감 아닌 체감을 하며 소설을 완성한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작가적 상상력이라고 할까 식자적인 상식이 그가 만든 세계를 보다 지적으로 풍부히 서술하게 했구나 생각되었다. 벽 속의 세계를 화자이자 주인공은 벽의 의지를 말하며 의식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고 그곳(벽 안의 도시)을 장기의 내벽과 같다며 되뇌이기도 하며 다음에는 뇌의 모양을 빌려 설명하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벽, 도시, 그림자, 짐승들, 도서관과 소녀, 꿈 읽는 이, 웅덩이 등 나름 나열할만한 상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뇌와 의지가 언급되었음에 분명 의식과 무의식, 칼 융이 말하는 인간의 그림자를 상징할 것이다, 이 모든 건 인간과 영혼을 상징하고 있다고 단정 지으려 해도 마지막까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그걸 가늠하려는 것보다는 그저 이 소설이 주는 서사와 화자인 가 느낀 1부에서 마지막까지 흐르는 간절함과 그리움 그리고 끝내 현실을 인정하고 수긍하게 되는 대미에서 무언가 감상이 담겨야 할 것만 같았다. ‘가 경험하게 된 그 세계는 그리움이 간절함과 마찰하며, 그녀와의 설계대로 건축된 것이고, 2부에서 고야쓰 씨를 만나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만난 것은 문학적 운명이었다고 해도, 현실세계로 돌아온 그림자일까 본체일까가 카페 여주인을 만나고야 가 그 도시에서 현실세계로 다시 돌아올 정서가 불러일으켜진 것은 수긍할 법했다.

 

이 신비한 이야기는 때론 몰입하게 하고 때론 그만큼 지루한 구간이 있지만 분명 상실만큼 회복과 그 회복의 여정이 담겨있지 않나 싶다. 상징들에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알게 모르게 이 상실과 회복의 여정이 내 안에서 나를 일으켜 세운다. ‘너의 것이 되고 싶다고 어떻게든 온전히 너의 것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너무도 닭살 돋고 부끄러운 대사 같았지만 한 남자가 무언가 자신의 전부를 상실한 채 살아가게 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술을 빌려 한 말처럼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를 데리고 살지만 이런 기억의 그림자는 이 소설 속 벽 안의 도시와 같은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로 떠나버리기에 충분한 힘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 말이 의 그림자에 깊은 암영을 드리우게 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입술을 통해 태어난 의 그림자는 그 도시를 갈망하고 는 이 여정을 마치지 않고서는 다시 재생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나 역시 간절함과 외로움이, 앞서 말한 내가 창조한 세계를 만들게 했고, 안타깝게도 그 세계를 유람하는 중에도 본체의 세계에서 내가 박탈되고 있었던 것처럼, 그 세계의 나도 나의 피조물들로부터 배제되고 말았다. 아마도 나는 내가 만든 세계에서 다시 한번 그들과의 마주침을 조심히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세계에서의 여정이 현실세계의 여정과 만나 내게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빛깔을 만들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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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열림원 세계문학 1
헤르만 헤세 지음, 김연신 옮김 / 열림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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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처음 읽었던 건 중학 2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 즈음에는 무협지와 문학 소설과 시도 나름 좋아했었다. 언젠간 시를 다소 읽을 때는 아마도 그 시절의 향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문학은 소시민이 향유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풍요로운 대상이기도 하고 말이다.

 

오랜만에 데미안을 다시 읽고 든 첫 감상은 내가 이 소설을 정말 읽었던 적이 있는 걸까하는 자기 의심 같은 것이었다. 소설 전반이 기억나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친구의 엄마에게 사랑을 느낀다거나 전쟁이 일어나 군에 징집되는 내용까지 청소년이 느끼기에 임팩트가 없지 않는 단락들 마저 전혀 기억에 없어서 더 그렇게 느꼈다. 내게 데미안은 그저 이번에 처음 경험한 것과 전혀 다름이 없다.

 

본서의 부록으로 작품해설이 있는데 데미안에 대해 문명 비판으로서의 기능을 논하고 있기도 했다. 천박한 물질 문명의 부상과 진정한 삶의 무산을 비판하기 위한 소설이라고 말이다. 그렇게까지 문학 비평가적으로 바라보지 않더라도 청소년부터 청년, 중년, 장년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든 의미로운 감상을 남길 소설이라는 감상이 깊다.

 

유년기의 아이가 청년기에 이르기까지의 역동들을 헤세 특유의 감성어린 필체로 그리고 있는 소설이 데미안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을 깨는 새의 이미지로 상징적 감상을 갖을 데미안이지만 나로서는 몇몇 상징만이 아니라 소설 속 등장인물 한 명 한 명과 배경묘사 하나하나까지 무엇 하나 상징적이지 않은 것이 없게 다가왔다.

 

청소년 싱클레어의 아니마인 베아트리체와 에바 부인 그리고 그의 롤 모델인 막스 데미안만이 아니라 프란츠 크로머, 알폰스 벡, 피스토리우스, 크나우어, 그리고 싱클레어의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등장인물 모두의 상징성이 다가왔고 낱낱의 장면까지 이 함의적인 소설에서 안배된 배치들이 아마도 다시 읽고 다시 읽는다면 읽을 때마다 달리 다가올 것만 같다.

 

유년기에 마주친 크로머는 그의 부정적 행위를 약점으로 잡아 싱클레어를 통제하며 그를 점점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존재였지만 그가 아니고서는 싱클레어는 자신의 그림자를 경험해 볼 수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인 것과 같은 오이디프스적이며 자기방어기제와도 같은 양상을 자신이 보이는 상황을 경험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대극 중 하나를 경험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였기에 크로머도 트릭스터의 외양을 띤 한명의 인도자였는지 모른다고 생각된다.

 

청소년기의 알폰스 벡은 싱클레어의 이성과 영성과는 상반되는 욕동을 자각하게 해준 존재라 여겨졌다. 데미안이나 피스토리우스와는 다르지만 벡 역시 크로머보다는 온건한 모습의 인도자였다고 생각된다. 크나우어는 그 누구보다 현실에 뿌리내린 인도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싱클레어 자신이 자신에게 갖는 심경 전반이 통합된 기대와 평가를 크나우어를 통해 다시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데미안과 에바 부인이 보이는 변성의식 상태의 양상을 청년이 된 싱클레어도 보이는데 이들 간의 교감과 영성적 소통이 크게 의아스럽게 보이지도 않는 건 오랜 세월 동안 이와 같은 류의 가르침들과 가까워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싱클레어의 정신을 성장시킨 건 크로머와 벡이 한 축이고 데미안, 에바 부인, 피스토리우스가 반대편 축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크나우어와 싱클레어의 부모는 그사이 경계에 있는 인물들이고 말이다.

 

그들에게 찾아온 전쟁은 사람이 자성하고 자각하고 성장한다고 해도 결국 세상이라는 변화는 주도해서 막거나 혁신시킬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깨웠다. 자신의 깨달음과 깨우침이 전 우주적인 가치를 갖는 것만 같겠지만, 소수가 다수의 집단무의식을 자극해 가져온 인류적 차원의 변화나 재앙은 단 한 사람 또는 몇몇의 깨달음만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데미안을 통해 인류의 연대기나 자신의 역사를 돌아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자기 나름의 남다른 통찰을 갖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문학 비평가들이 무슨 수식어를 가져다 붙인다고 해도 데미안은 사람에게 성장이란 무엇인가 성숙이란 어떤 가치일 수 있는가를 인물의 성장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감상이 가장 먼저 든다. 청소년기에 한 번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 또 한 번쯤 다시 읽어볼 만한 소설이 아닐까 싶다.

 

여기까지 성장소설이란 방향에서 다소의 얕은 감상만 남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 사이의 카인과 아벨에 대한 대화에서 시작되는 긴 여정에 주목한 감상을 남기자면 너무도 장황한 언변들이 이어져야 할 것 같기에 성장소설과 심리에 대한 짧은 감상만을 남긴다.



[밑줄 긋기] 

-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면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양, 그래서 어떤 인간사를 훤히 꿰뚫어보고 이해하며, 신이 자기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라도 하듯 그렇게, 아무것도 은폐하지 않고 어디서나 의미있게 서술할 수 있는 것처럼 굴곤 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작가들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어떤 작가에게 자신의 얘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내게는 내 이야기가 중요하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이자,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자, 그 길로 가고자 하는 시도이며, 어느 좁은 길에 대한 암시라고 하겠다. 일찍이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누구나 그렇게 되려고 애를 쓴다. 누군가는 막연하게, 누군가는 보다 확실하게,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애를 쓴다.

 

새는 힘들게 싸워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숴야만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데미안이 남긴 쪽지에

 

“... 만일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다면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선 안 되겠죠. ...” - 피스토리우스

 

지금 우리가 아브락사스라는 이름을 붙여준 우리의 새로운 신앙은 아름다워요. 친구여, 그 신은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이라오. 그런데 그 신은 아직 젖먹이죠!. ...” - 피스토리우스

 

그래, 넌 내게 멋진 성자지! 네게도 죄악이 있다는 걸 난 알아! 현자처럼 행동하지만 나와 모든 사람처럼 똑같은 오물에 비밀스레 매달려 있지! 넌 돼지야. 나 같은 돼지라고, 우린 모두 돼지라고!” - 크나우어

 

나는 전에 자주 미래의 형상들과 유희했었다. 어쩌면 시인이나 예언자로서 또는 화가나 다른 어떤 것으로서 내게 배정되어 있을 역할들을 꿈꿨었다. 그런 건 모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거나 설교를 하려고, 그림을 그리려고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건 모두 부수적인 결과로 생겨날 뿐이었다. 각자에게 진짜 소명은 단 하나였다. 그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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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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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즐거운 크리켓터스]에서 시트 하나를 가져와서 그를 덮었고, 사람들은 가게 안으로 그를 옮겼다. 그리고 거기엔 모든 인간 중 처음으로 자신을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었던 그리핀이, 불도 켜지 않은 침실의 지저분하고 허름한 침대 위에, 무지하고 흥분한 사람들 무리에 둘러싸여, 깨어지고 상처 입고, 배신당하고 동정받지 못한 채로 놓여 있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재능 있는 물리학자 그리핀은 자신의 이상하고 가공할 생애를 끝없는 참사로 끝마쳤던 것이다. :

 

후기를 제외하고 그리핀의 잔혹사가 끝나는 대미는 위와 같다. 기존의 [투명인간]에 대한 번역서들은 원작인 영국판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미국판을 번역한 것으로 이 대목의 대미가 이정서 번역가님의 번역과는 다르다. 본서의 말미에 짧게 대조해 보여주는데 H.G. 웰스 작가가 주인공 그리핀의 생애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는 것과는 다르게 미국판은 삭막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하지만 원작의 대미가 이런데도 불구하고 그리핀의 정서와 행동에는 공감이나 안타까움이 일지 않기도 한다.

 

본서의 줄거리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후반부를 제외하고 스포일러 하자면,

 

: 한 방문객이 아이핑이라는 영국의 시골 마을에 방문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숙박업체 주인에게 자신을 실험 연구자라고 하기는 했지만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다. 그의 뒤늦게 도착하는 화물들은 실험관들로 사람들은 아마도 그는 진짜 실험 연구가일 거라고 판단하지만 두문불출하는 그의 신상에 대한 억측들이 쏟아진다. 그러다가 마치 보이지 않는 도둑이 든 것 같은 기이한 도둑질을 당하는 목사 부부의 일을 시작으로 그를 추적하며 방문객이 투명인간인 것이 드러난다. 투명인간은 [역마차]라는 숙박업체에 연구일지를 두고 나왔기에 그걸 회수하고 생존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랑자를 협박해 부하처럼 쓰려고 한다. 하지만 연구일지는 부랑자의 손으로 들어가고 투명인간은 우연히 과거 인연이 있던 과학자 캠프를 만나게 되어 그에게 투명인간이 되고 아이핑으로 오기까지의 과정과 그 이후의 사건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털어놓는다. :

 

여기까지도 주인공 그리핀의 폭주가 시작되었지만 이 이후부터 그리핀은 저지할 수 없을 지경으로 폭주한다. 그는 자신이 공포 정치’(라고 역자는 번역하였지만 공포의 통치라고 해도 될 것 같다)를 하겠다고 공표하였다지만 나로서는 그의 폭주가 뜬끔없이 느껴지기에 과거를 발언할 때 그의 아버지의 죽음과 그리핀 자신이 관계는 없는 건지 의혹을 갖고 읽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라고 확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핀은 원래부터 난폭하고 잔인한 자였을까 아니면 투명인간이 되는 과정에서 심리적 격변을 겪게 된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들기도 했다. 원래 대중에게는 자신의 과오에는 이유와 원인을 찾지만 타인의 과오는 당사자의 내재적 문제에 기인했을 거라고 보는 편향이 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더욱 그런 편향적인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 그리핀의 내면에 주의하며 읽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핀이 원래부터 백색증을 앓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도 작가는 자신의 피조물에 내재적 문제를 안겨줄 마음이 있었지 않나 짐작된다.

 

: “나는 실수를 했소, 캠프, 정말이지 큰 실수, 이 일을 혼자 해내려는. 나는 힘과 시간, 기회를 낭비한 거요. 혼자... 한 사람이 혼자 할 수 있는게 얼마나 하찮은가 알면 놀랄 정도요! 조금 훔치고 조금 상처 입히고, 그게 다였소. ... ...” :

 

사실 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세상을 바꾸는 규모의 일은 결코 한 사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에게는 사도들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성립할 수 있었고 히틀러에게는 지지기반과 추종자들과 침묵하는 이들이 함께였기에 대살육이 있을 수 있었다. 그리핀에게도 그런 무리가 있었다면 이 이야기는 보다 방대한 규모의 서사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공포 정치의 확장은 아마도 더 기괴하고 훨씬 끔찍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말 그대로 혼자였고 그래서 작가가 그려낸 대미가 있었던 것 같다.

 

본서는 사실 다소 따분하고 서사도 그리 규모 있거나 다채로운 흥미꺼리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로서는 큰 즐거움을 느낀 독서는 아니었다. 작가가 그리는 그리핀의 말로에 문장에는 공감할 구석이 있었지만 그리핀의 생애까지 보면 공감이 되지 않았다. 동명의 서양 영화들에서 큰 흥미를 못 느꼈기에 본서가 그만 못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치밀했거나 규모가 더 확장되었거나 다채로운 역동에 힘을 주었거나 했다면 더 재밌는 이야기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중학시절 읽었던 [타임머신] 이후로 오랜만에 즐기는 웰스님의 작품이라 그 자체로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조지 오웰은 웰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세계와 사상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과연 그의 작품에 어떤 면이 있기에 이런 말이 있는 건지 그리고 그 웰스의 영향은 과연 인류에게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생각하며 웰스의 작품들에 들어서거나 다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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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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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형식이 당시 기존의 형식과 달리 참신하고 혁신적이라 부조리극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모양이다. 주제전달 방식은 부조리하다기보다 너무도 정연하게 조리있다. 전혀 어렵거나 무겁기만한 희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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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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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희곡이 부조리극의 시작이었다고 하는데 부조리하다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조리있게 다가왔다. 그 시대에는 기존 희곡의 형식을 탈피했다고 하니 부조리극으로 불렸는지 모르겠으나 주제의 전달에 있어서 상당히 일목요연해 보인다. 고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의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창작자 자신이 나서서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걸 내가 알았다면 작품에 바로 썼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니까 말이다. 작가는 기대로든 희망으로든 구원으로든 구세주로든 신으로든 각자가 정의하기를 시도하도록 바란 게 아닐까 싶다.

 

모자와 구두로 영 또는 지성과 육 또는 행위나 미천함 등을 상징하려 한 건 일차원적인 상징이기도 하고 기다림과 나무(상징하는 바는 모든 걸 끝내는 것일 수도 구원일 수도 있다), 포조와 럭키(계층이나 지배와 피지배일 수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관계성일 수도 있다), 소년(가장 중의적이며 함의가 큰 상징 같다) 등 상징체계들이 고도라는 대상에게서 그리고 그를 기다린다는 상징 속에서 비단 기대와 희망으로 상징되는 그 이상을 그려내 보고자 시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대사의 반복 등으로 그저 부조리만으로 다인 이야기를 전하려 한 희곡이 아니라는 감상이 들었다.

 

삶에서 세상의 눈물이 일정해 누군가가 울면 누군가가 웃고 누군가가 웃으면 누군가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도 되지만 우리는 다음 순간 나는 눈이 멀고 타자는 귀가 먼 순간이 같지만 그 순간이 언제였는지 잊어버린다. 고작 어제 만난 서로에 대해서도 희미할 뿐이다. 그렇게 고작 어제 일이 희미할 정도로 우리는 고단하고 막막하게 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희망하고 기대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우리는 무엇인지 어떤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듯, 모른 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세상의 누구나가, 오늘이 처음 만나는 거고 처음 말하는 거라며 고도는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오신다고 했다는 메시지를 전하듯, 그렇게 우리에게 낯설게 희망을 품게 한다. 우리는 모든 걸 오늘 끝장낼 수도 있지만 기다림의 결실을 기대하며 끝낼 순간을 미룬다. 막연한 기대만으로 막막한 삶을 억지스럽게 감당하고 있는 거다. 고도가 신이건 구세주건 기대건 희망이건 간에 우리는 그 또는 그것이 무언지 알고 기다린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수염이 하얗다는 말을 듣고 놀라리만치, 그는 미지의 대상일 뿐이다. 그 미지의 대상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매정하고 가혹하며 서로에게 의지한다. 타자가 없으면 서운하면서도 좋다는 건,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 타인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혼자만의 시간을 바람하는 것에서도 엿보이는 성향일 것이다. 타인은 필요악이면서 동시에 지옥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 희곡을 정의하면 '부조리극이다' '의미보다 대사의 반복이다'는 말들이 많던데 대사의 반복에도 의미가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살아가며 그런 의미가 명료하지 않은 반복들을 행하고 경험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말이다.

 

이 희곡은 부조리극의 효시였다지만 읽으며 느낀 건 너무도 정연하게 조리있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아마 다시 읽는다면 다른 감상이 더 깊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하는 희곡이다. 극이 주는 감상과는 다르게 또 하나 기대하며 오늘도 이 삶을 감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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