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고양이 시점 - 고양이는 어떻게 인간을 매혹하는가
세라 브라운 지음, 고현석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캣이라는 제목의 SF 장르의 웹소설을 구상하고 있는데 그 소설 속 프롤로그에 고양이가 등장하는 장면을 넣으려다 보니 고양이의 생태가 궁금해졌다. 아직 그 웹소설은 구상 중이기만 한 터라 그사이 고양이의 생태를 그리고 있는 책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타 출판사의 책이 종전까지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유일한 책인 걸 알게 됐는데 때마침 본서가 출간되었다. 기회다 싶어 서평단에 응모했고 다행스레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본서를 읽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고양이 집사 출신이 아닌 터라 본서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고양이의 특징이 적지 않았고 인간의 특징과 비교하는 대목들도 있어서 사이사이 인간의 생물로서의 입장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본서는 표지부터 강렬한 고양이 사진인데 뿔이 난 고양이 사진 같은 이 사진이 본서를 읽고 나면 고양이가 사회적 교류를 허가하거나 허가받기 위한 표정이란 걸 알 수 있다. 본서는 정보 전달이 목적인 책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에세이풍의 필체이기도 한데 고양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가 고양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해 주는 듯한 분위기로 딱딱한 문체보다는 자상하고 자연스러운 대화와 같은 설명이라고 여겨지는 문체다.

 

우리는 고양이의 언어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또한 고양이는 우리의 언어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고양이는 우리를 어떻게 인식할까?’를 프롤로그에서 언급하는데 이게 본서의 색깔을 그대로 담고 있는 문장이 아닌가 싶다. 원제도 고양이들의 숨겨진 언어라는 의미이기에 본서를 통해 고양이를 이해하고 고양이의 시각에서 세상은 어떠할지 말해주고자 하는 게 저자의 집필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고양이의 생태에 대한 것이 본론이지만 첫 장에서는 현재 집고양이들의 기원을 찾기도 하고 이집트에서 신적 존재의 하나로 여겨지며 고양이를 해치면 사형이 선고되기도 했던 과거와 유럽으로 온 고양이들이 마녀사냥 당시 악마적 존재로 여겨지며 마녀들과 함께 화형당하던 역사까지 고양이 이야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신기한 역사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고양잇과 야생동물들이 많이 가축화가 시도되기는 했으나 사냥을 위해 길들인 치타 역시도 번식을 시키는 게 난제가 되어 현재는 북아프리카 들고양이가 전 세계의 집고양이들의 선조가 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북아프라카에서 유럽으로 간 이 고양이들은 다시 유럽에서 배를 훔쳐 타고 선원들과 공생하며 미대륙까지 가게 된 거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전 세계 고양이들의 선조는 북아프리카 들고양이라는 말인데 인간에 대해서도 아프리카 흑인이 모든 인종의 기원이라는 진화론적 시각과 전혀 다르지 않은 해석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고양이의 생태가 그것도 일상에서의 습성이 궁금하던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알로그루밍과 알로러빙이었다.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다양한 동물들의 행태와 다르지 않은 알로그루밍과 자신의 체취와 상대 체취를 섞는 듯 몸을 부비는 알로러빙은 인간에서는 쓰다듬은 행동과 악수나 어깨동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고양이는 혀에 돌기 같은 게 있어서 핥는 동작만으로 털을 고르게 할 수 있다. 또 몸의 곳곳과 뺨과 광대, 입술 주변에 분비선이 있어 왁스 물질 같은 게 나와서 타 대상에게 몸을 부비는 행동으로 자신의 체취를 전할 수 있다고 한다. 체취를 옮겨 자신과의 연결성을 갖게 하는 것이 알로러빙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날수록 알로러빙을 한다고 한다.)그리고 고양이는 선채로 꼬리를 들고 뒤로 소변을 뿜어 영역 표시를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영역을 나타내는 것이라 타 동물들의 침입을 막는 목적이기도 하지만, 수컷 고양이의 경우에는 소변에서 단백질 성분 중 일부가 진한 냄새를 띠게 하는데, 이것이 단백질로 이뤄지는 거라 해당 수컷 고양이가 사냥을 잘하는 고양이인지 어떤지의 정보도 전달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외부의 침입만을 막는 게 아니라 이성에게 어필하는 용도로 소변을 뿜는 것이기도 하다고 하니 동물의 세계에서 정보 전달법이 참 별나게도 보였다.

 

그리고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에게는 흔하게 보는 경우이겠기에 책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익숙하겠지만 고양이는 사회친화적인 태도 말하자면 상대에게 악의가 없다는 걸 표시하기 위해 꼬리를 치켜들고 다가가기도 한다고 하니 사람이 멀리서 친한 사람을 마주쳤을 때 손을 들어 자신을 어필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꼬리를 치켜들고 다가가서는 냥이 펀치를 날리는 경우도 있는가 본데 악수를 청하는 척하다가 공격하는 미국 프로레슬링 방송 속의 프로레슬러들에게서도 엿볼 수 있는 경우가 아닌가 싶었다.

 

또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반쯤 게슴츠레 뜨는 동작은 고양이에게 안부를 묻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한다. 이 책의 표지 사진 속 고양이의 눈과 같은 것이 아닌가 싶은데 새끼 고양이에게도 이와 같은 행동을 사람이 하면 고양이가 따라하기도 한다고 한다. 대체로 고양이들 사이에 마주쳐서 서로가 이러한 눈짓을 번갈아 하면 이런 경우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고양이가 나무나 벽지 등을 긁는 행위는 새로 발톱이 자라나며 그 발톱 위층의 다른 겹 헌 발톱을 분리해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발톱 사이의 분비선에서 나오는 냄새를 옮기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건 좀 새로운 정보가 아닌가 싶다. 또 새끼 고양이의 조난 발성을 듣고 그러니까 집 잃은 새끼 고양이의 울음을 듣고 다른 어른 고양이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고 하는 것도 이채로우면서 고양이가 얼마나 사회적인 동물인지 알게 해주는 에피소드 같았다.

 

이 책에서 가장 상식적인 정보는 고양이 울음소리와 아기 울음소리의 주파수 대역이 유사하다는 것일 거다. 아기 울음소리는 400~600Hz의 주파수이고 고양이 울음소리는 609Hz의 주파수라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하기 쉽지 않은 것도 상식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가장 이채로운 본서만의 기록이라면 중세 이후의 어느 시기 나폴리의 한 신부님이 고양이 언어를 분석했다는 것과 이후에도 고양이의 언어를 인간의 어휘인 발음을 빌려 표기하고 뜻을 전하는 책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인용된 발성과 뜻을 보고 그런가 싶지도 않았지만 혹하는 독자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근래까지도 동물에게서 성격(personality)이라는 분류를 하지 않으려 했다는데 그냥 행태의 차이로 보려고 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저자는 영어의 의미에서 찾는데 성격을 뜻하는 영어의 어원이 person이라는 말에서 나왔기에 동물에게서 성격을 논하는 자체가 서양에서는 수용되기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기질이라고 하건 독자적 습성이라고 하건 성격이라고 하건 생물들은 모두 자기만의 독특함을 갖고 있다는 걸 사람들 누구나가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모든 생물에게서 공유된다고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각각의 생물에게 독자적인 무엇이 있다고 분별하는 부분도 분명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고양이를 얼마나 특별하게 여기는지 모든 동물 중에 가축화되었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면 야생화되는 유일한 동물이 고양이다라고까지 선언하는데 버려져서 들개화 된 개떼들은 흔하고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도축장으로 데려가려다가 탈출해 나간 소가 야생에서 잘만 지내던 기록도 있다. 하다못해 인간이란 동물의 서너 살 아기를 숲에서 잃어버렸는데 한 달인가 그 이상의 기간 만에 찾았으나 아기가 영양실조도 안 걸리고 건강하게 구조된 사례가 해외토픽에 오르기도 했다. 아기는 엄마 아빠가 숲에서 야생 열매 등을 따 먹는 걸 보아두었다가 실종기간 동안 기억 속의 그 행동을 따라 하며 한 달 가까인가 그 이상을 야생 생활을 한 것이다. 고양이나 개 그리고 인간이란 동물만이 아니라 가축화한 어느 동물도 야생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야생화가 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싶다. 자연으로 돌아간 어느 세월 후에 자신보다 강력한 동물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지만 잡아먹힌다고 야생화가 되지 않아서라고 볼 수도 없다고 본다. 야생동물도 분명 천적에게 잡아먹히는 게 일상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 리뷰에서 언급한 사례는 몇 가지 안 되지만 본서의 성격을 논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과 고양이가 궁금한 많은 분이 호감 가질 만한 책이고 분명 독자적인 매력이 있는 책이 아닐까 한다. 고양이의 언어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리고 자신의 언어를 고양이가 알아듣게 번역해주고 싶다면 꼭 한 번은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고 권해 드릴 수 있을 만한 책이다.

 

 

메디치미디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오즈의 마법사 2 - 환상의 나라 오즈 (한글판+영문판) - 환상의 나라 오즈 더클래식 세계문학 77
라이먼 프랭크 바움 지음, 손인혜 옮김, 존 R. 닐 그림 / 더클래식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즈의 마법사]1900년 출간되고 이후 뮤지컬 등으로 승승장구하다가 1939년 제작되어 전 세계적인 명작으로 자리매김한 동명의 영화로 등장하고 나서도 한참 후인 1950년대에 이르러 오즈의 마법사는 미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오즈의 마법사] 리뷰에서 말씀드렸었다. 본서는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중 둘째 권으로 전작이 출간되고 4년 후에 출간된 책이라고 한다. 저자는 오즈의 마법사를 시리즈로 기획하기는 했으나 연이어 바로 집필을 한 건 아니고 [오즈의 마법사] 1권인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출간하고 4년 후에야 후속작인 본서를 출간했다. 그사이 오즈의 마법사의 다음 편을 집필해 달라는 독자들의 요청과 새로운 캐릭터들의 등장을 바라는 열띤 요청들에 힘입어 본서를 집필하게 된 거라 한다.

 

앞서 말한 금서가 된 배경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이분한 공산 사상의 흔적이 본서에서 읽어지기도 하고 페미니즘이 다소 묻어나 있기도 해서라는 게 대부분에 비평가들 이야기인 모양이지만, 사실 전작인 [오즈의 마법사] 1권만으로는 작가의 이런 사조를 읽어내기 쉽지 않을 수 있다. 1권의 도로시, 겁쟁이 사자,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상징했다는 건 다소 억지스럽기도 하고 말이다. 도로시의 가족과 도로시가 부르주아를 상징하고 강아지 토토가 프롤레타리아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코웃음만 치고 말았을 것이다(이건 작가의 시각이 아니라 아마도 이랬다면 비웃었을 거라는 내 말이다). 오즈의 구성원들 중 왕과 여왕인 마법사와 마녀들이 부르주아를 상징하고 그들의 지배를 받는 윙키 등 오즈의 각지에 시민들인 구성원들이 프롤레타리아로 상징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1권만 읽고는 다소 억지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2권부터는 그런 색채가 다소 느껴지는 게, 첫 등장인물인 팁과 마녀 할멈 몸비의 관계 자체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고, 몸비가 또는 팁이 창조한 캐릭터들인 호박머리 잭과 목마가 팁과 함께 몸비에게서 달아나는 서사나, 진저 장군의 소녀군대가 오즈의 지배자 허수아비로부터 왕국과 왕권을 빼앗는 서사도, 프롤레타리아의 저항과 혁명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없지 않아 보였다. 또한 빼앗긴 왕권을 허수아비가 찾는 것이 아니라, 오즈의 마법사에게 왕권을 빼앗긴 원래의 왕의 딸인 오즈마에게 돌려주는 것, 그리고 착한 마녀 글린다의 소녀군대가 진저 장군의 소녀군대로부터 오즈의 왕권을 탈환한다는 설정 자체도, 여성이 빼앗은 권리를 여성이 되찾는다는 개념이기에 페미니즘적 성향이 엿보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진저 장군의 소녀군대가 에메랄드 시티를 빼앗으며 왕국의 보석들이나 탐하거나, 여성이 권리를 장악해 집안 살림과 육아를 남자들에게 전담시켜버리자 오히려 맛없는 남자들의 요리에 에메랄드 시티의 전 여성들이 진저리를 친다거나, 뜨개바늘로 혁명을 일으킨 진저 장군의 소녀군대가 고작 쥐 몇 마리에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설정들은, 어찌 보면 페미를 표방하면서도 남성일 뿐인 작가 라이먼 프랭크 바움의 남성으로서의 또 그 시대인으로서의 한계가 드러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시대를 앞서 나갔다고 여겨진 건, 찾을 수 없던 에메랄드 시티의 왕위 계승자인 오즈마 공주가 마녀 할멈 몸비에 의해 남성인 팁으로 변신해 있다가 다시 여성으로 돌아간 것, 그리고 소녀에서 소년이 되었다가 다시 소녀가 되면서도 그저 달라진 것뿐이라는 오즈마 공주와 호박머리 잭의 대사는, 남녀 성별의 차이에 내재해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이 소설이 쓰여진 시대인 1904년을 고려할 때 그 시대적으로는 상당히 명쾌한 정의가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본서는 동화다 보니 다소 구성과 서사가 단조로운 듯도 여겨지지만, 어린이를 위한 짧은 이야기에서도 자신의 세계를 그려낸 저자의 결단이랄까 행동력이 남달라 보이기도 했다. 저자의 페미니즘 성향으로 저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우도 반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을 듯한데, 사실 나로서는 10명의 다자이 오사무보다 1명의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 권익을 위해서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작가가 이 소설에서 그린 진저 장군의 소녀군대가 혁명의 뜨개바늘을 들면서 왜 이러냐는 남성들의 물음에 한 대답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남긴 명언과도 다름없지 않나 싶기도 했다.

 

너희들의 도둑질을 계속 참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배가 고플 것으로 생각했고, 손에 넣을 수 없는 새하얀 빵도 유리창을 부수면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어떨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는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멀고 남성 위주의 사회는 남성들만이 조성한 것이 아니며, 남성이 사회 지배층의 다수로 있는 건 여성보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바에 보다 더 친화적이며 더 적응되어 있기 때문이라 여긴다. 이미 자라면서도 남성이 보다 더 사회 지배적인 사고에 순응하고 적응되도록 조성되어 있는 것이 양육과 성장환경이며, 이런 환경 또한 남성 혼자 만든 게 아니다.

 

여성 권익의 향상이 이 시대까지 정체된 것은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사회로 진출할 기회를 얻은 여성들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가정으로 돌아온 아직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남성들을 생업으로 복귀시키며 자신들은 사회적 의무를 저버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또 무엇보다 남자는 거저 권리가 주어졌다고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지만 그리스에서든 로마에서든 고구려에서든 남성의 권리는 목숨을 바치고 목숨을 담보로 주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 권리가 이후에도 남성의 생명을 담보로 하며 이어진 것이다. 이걸 어떻게 거저먹은 거라고 볼 수 있는지 그게 더 의문이다.

 

대다수의 남성이 페미에 적대적이게 된 배경의 첫 관문은 이미 사회와 연애, 결혼 등 많은 일상에서 남성이 겪고 있는 차이가 적지 않은 데 남성들은 이것을 차이로 보았지 차별로 보지 않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연애에서 결혼에서 자신들이 보고 있는 이점은 없는 것처럼 모두 다 차별만 겪어온 것처럼 주장하기에 남성들 역시 자신들이 차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남성에 대한 차별이었구나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래서 페미니즘에 적대적이 된 거라고 본다. 이런 식이면 대립각만 날이 서고 남성과 여성의 성 대결적 구도만 조성될 수 있다. 남성들이 사회적으로 여성들의 권리 신장에 협조할 때 여성들도 역사를 바로 보고 여성에 대한 차별만큼 남성에 대한 과도하고 막중한 의무와 책임이 주어졌으며 남성의 권리는 그 의무와 책임에 비례한 만큼 주어진 것이란 걸 인정할 때 원만한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지금으로서는 서로에 대한 반감이 혐오로 커나가고 있는 시절 같기도 해 안타깝다.

 

그렇다 해도 이 소설에서 브레히트의 명언을 인용한 건 여성이 굶주린다고 느낄 때 갈증이 난다고 느낄 때는 정당한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찾고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동화에서 진저 장군의 소녀군대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빼앗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지배하지 못했다. 급격한 쟁탈보다 완만하더라도 준비되고 확실한 권리의 쟁취가 여성들을 위해서 더 나을 거라 생각한다. 사회의 한 축과 다른 한 축을 어느 성별이던 나란히 지고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차별이 아닌 화합이 이 시절에는 더욱 절실하지 않은가 싶다.

 

본서는 동화이면서도 다채롭고 폭넓은 시야이고 원만한 듯 보이면서도 과격한 면도 있다. 아마도 그래서 시리즈 전편이 완간된 1919년에서도 한참이나 세월이 지난 1950년대에 미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을 것이다. 과거의 문학가가 서술하는 계급에 대한 견해와 페미니즘 등을 동화로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접근 같아 이 시리즈를 완독할 생각이다. 그 두 걸음째인 [환상의 나라 오즈]도 제법 재미진 동화라고 생각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젤소민아 2024-01-31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앨리스와 더불어 재독해야 할 책~~. 제겐 숙제같은 책이지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하라 2024-02-01 01:45   좋아요 0 | URL
감상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ㅎ 재독을 응원드리겠습니다.^^
 
스토리 창작자를 위한 빌런 작법서 - 당신의 이야기를 빛내줄 악당 키워드 17
차무진 지음 / 요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국민대학교 게임교육원, 계원예술대학교에서 이 책의 작가가 10년간 [주적론]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한 작가의 개인 노트를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의 작가 차무진은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면서 동시에 위에 언급한 교육처들에서 강의를 해온 강의자이다.

 

본서는 스톨 창작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빌런이라는 인물들의 속성과 심리를 이해하면서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 선택한 책이다. 읽고 난 감상은 본서는 창작과 감상의 폭을 넓혀주며 다양한 인간군상과 영향력들에 대한 알음알이가 넓어질 기회는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심리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하기에는 작품들에서의 빌런의 역할과 영웅에 관한 그들의 입장, 영향력과 인과, 그로 생각해볼 의의 등 창작과 감상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인간을 이해한다는 목적으로는 쉽게 얻음을 갖기 쉽지 않은 책이라는 감상이 들었다.

 

하지만 빌런, 반영웅, 반동인물 등에 대해 명료히 이해할 기회가 될 수 있으며 본서에서 예로 든 숱한 소설과 영화, 드라마들을 통해 이해와 체감이 쉬운 책이다. 작법서로서만이 아니라 깊고 폭넓은 감상을 위한 안내서 역할도 톡톡히 한다.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을 깊게 감상하고 싶거나 글쓰기에 전념하는 분이라면 다채로운 인물을 그려내기 위해 읽어볼 만한 책이지 않은가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캐모마일 2024-01-17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빌런에 대한 이해가 창작자에겐 당연한 소양이고 감상자도 작품을 보고 해석하는 데 필요한 요소인 거 같습니다.

이하라 2024-01-17 10:39   좋아요 1 | URL
주인공의 내면을 표현해내는 것 만큼 반동인물과 상황에 대한 구조를 이해하고 설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됐습니다.
 
[eBook] 오즈의 마법사 (한글+영문) -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 더클래식 세계문학 76
라이먼 프랭크 바움 지음, 손인혜 옮김, 윌리엄 월리스 덴슬로우 그림 / 더클래식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장 중인 이북 중에 웬일인지 오즈의 마법사에 뜬금없이 관심이 가 독서하게 되었다. 도대체 느닺없이 오즈의 마법사에 왜 꽂힌 건지 모르겠지만 읽고 나서의 감상은 원작자의 14권 시리즈를 다 읽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오즈의 마법사는 미국의 대표적인 동화로 출간 이후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과 요구로 14권까지 이르게 된 작품이다. 작가는 14번째 작품을 출간하며 돌아가셨다는데 출간은 못 보고 사망했다는 것 같기도 하다. 독자들이 작가에게 편지로 양철나무꾼은 왜 다시 먼치킨 소녀에게 돌아가지 않는가 등 세세하게 집필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소설 속 작품 소개에 보면 한국의 드라마 촬영에 팬들이 댓글로 영향을 끼치는 것과 비교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골수팬들이 많은 동화로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으로 신승훈 씨가 도로시의 열렬한 팬으로 자신 회사의 소속가수 이름을 도로시에서 도를 빼고 로시로 짓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 중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미국에서는 1900년 초판이 출간되고 이후 뮤지컬과 영화로 승승장구하던 이 동화를 공산주의와 연관 지으며 1950년대에는 금서로 지정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도로시와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겁쟁이 사자 등을 노동자로 은유해 동화를 빙자한 체제 저항으로 인식했다는 이야기다. 그 시절에 금서 목록에 오른 저작들을 몇몇 듣기는 했지만 이미 1930년대까지 브로드웨이를 거쳐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되기까지 한 미국을 대표하는 이 작품을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금서로 지정했다는 게 자못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책의 작품 소개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종교계에서까지 반발이 심했다는 설도 들은 적이 있는데 종교인들의 주장은 이 동화의 배경과 서사 그리고 설정 하나하나를 들어 설명하며 이 동화가 오컬티즘과 비교철학에 기반한 사타니즘을 퍼트리는 책이라는 것이었다. 세부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석심리학에서라면 집단무의식에 담긴 원형을 이야기하며 넘길 듯한데 종교인들 눈에는 이 작품에 담긴 함의나 은유가 반기독교적이라는 것이니 신기하기도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역시 주목하게 된 대목은 이 작품에 페미니즘적 색채가 짙다는 것이다. 나도 설정의 4 대목에서 의문이 들었는데 읽고 나서 시간이 흐르니 다 잊게 되었지만 기억나는 하나는 허수아비와 만나 시간을 보내던 도로시가 자신만 먹은 빵의 바구니를 다 먹고 나자 당연하다는 듯 허수아비에서 건네어 그가 들게 하고는 길을 나서는 장면이었다. 허수아비를 남성으로 본다면 남성이라면 당연히 무슨 수고든 여성을 대신해 해야 한다는 성차별적인 장면이고 허수아비를 도로시와는 다른 종으로 봤다면 엄연한 인종 차별로 인식될 수도 있는 장면이다. 도로시와는 다른 인종은 당연히 도로시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해석이 가능한데 이런 사안들이 문제인 건 동화를 읽으며 아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이런 태도를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의 장모는 페미니스트이고 작가가 그녀의 영향을 무척이나 받아 그의 작품들에서 페미니즘적 성향이 짙게 드러나고 있다고 작품 소개에서도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일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상심리를 가진 여성들의 태도와 사고와 행동에는 공감하지 않지만, 어느 성별이나 인종이든 자신들에게 필요한 바는 자신이 가장 잘 알며 자신들의 권리는 스스로가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기에, 페미니즘이 이상야릇하게 변질되지만 않는다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성의 권리를 여성이 주장하고 찾아야 하듯 남성도 남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불합리한 충돌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본서에서 얼마간의 페미니즘 빛깔이 드러난다 해도 문제될 것도 비판될 사항도 아니라고 본다. 다만 한 작품을 볼 때 그 작품이 어떠한 빛깔인지는 인식할 수 있도록 제시되는 것 역시 당연할 것이다.

 

나는 남성 인권을 남성이 지키고 찾아야 한다는 주의지만 내가 쓴 단편들을 보면 페미니즘적인 빛깔이 완연하다. 왜냐하면 등장 인물이 여성인 경우 그 여성이 건강하고 바른 의식을 지녔다면 여성의 권리는 자기 스스로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기에 그런 빛깔이 나의 소설에서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바람직한 페미니즘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에 나의 단편 속 주인공들은 페미니스트이지만 반페미주의자들에게도 거부감이 없는 성향을 보이도록 설정했다.

 

앞으로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를 조금씩 들어서 볼 작정인데 작가의 페미니즘 성향도 제발 거북하지 않은 선까지이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오즈의 마법사는 여러 비판과 지적이 있는 동화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독자를 사로잡는 동화임에는 분명하다. 이런저런 이 동화에 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모르고 또는 알고 본다 해도 아주 재미있는 시간을 약속하는 작품이다. 권할 만한 동화가 아닌가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젤소민아 2023-12-31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멋진 리뷰에 저도 꼭 읽어볼랍니다, 하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하라 2023-12-31 22:42   좋아요 0 | URL
칭찬 너무 감사합니다.^^ 젤소민아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루피닷 2024-01-01 0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하라 2024-01-01 08:2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루피닷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 것이 되고 싶어.”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어.”

하나도 빠짐없이 네 것이 되고 싶어.”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 정말이야

 

와 너가 남긴 이 말은 라는 사람이 를 잃고 현실 세계에서 그냥저냥 도리에 맞춰 살아가다가 벽 안의 도시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의 삶으로 이양해 가게 된 원인이 된다. 상실이 있고 상실을 받아들이고도 현실은 지속되지만, 그 상실이란 것이 현실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게 만든다. 열다섯 열여섯의 에 입술을 통해 열여섯 열일곱의 에게 처음 윤곽을 드러낸 벽 안의 도시가 그렇게 중년으로 접어드는 세월 동안 조금씩 구축되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 어느 순간 벽 안의 도시는 너를 잃고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를 집어삼킨다.

 

앞서 처음 작성했던 리뷰에서 말했듯 나는 이 소설이 상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감상으로는 상실에서 회복으로 가는 여정과 그 여정의 끝으로 마무리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소설의 1부에서 보여주는 벽, 벽 안의 도시, 본체에서 떼어내어지는 그림자, 짐승들, 꿈 읽는 자, 너를 닮은 소녀, 그 도시에 이르는 맑은 강물과 탁류, 모든 것을 빨아들여 배출하는 웅덩이 등등 여러 상징은 알 것 같으면서도 모호하기도 했다.

 

아마도 벽 안의 도시는 세상과 나, 타인과 나를 또 나 자신의 본능과 바람과 정서와 이성과 의지 등등을 각각으로 분별하고 나누어 고집스레 그 분열을 지켜나가려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헛수고를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저자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듯 도시도 벽도 불완전할 뿐이다. 타자와 나를 분리하려는 것도 내 안의 나에 구성요소들을 분리하여 타자화하는 것도 어찌 보면 굉장히 수고스러운 헛수고인지 모르니까 말이다.

 

의 그림자는 에게 이 벽 안의 이 도시가 실제이고 현실세계라는 바깥세상이 가상이며, 본체라고 불리는 것이 그림자이고 벽 안의 도시에 머무는 그림자가 본체인지 모른다는 말을 한다. 가설에 가설을 더하는 거란 말을 덧붙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말마따나 우리는 자신과 타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구성요소들을 본능과 욕망과 정서와 이성, 의지 등등으로 분리하여 어느 것이 나이고 어느 것은 타자라고 독재자적인 정의를 하고 있고 또 그렇다고 해도 사실 그 중 어느 것이 나인지 확실하지 않다. 도시와 벽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 불확실함을 주장하는 듯이 작가 하루키 씨는 그 도시에서 를 보살피기도 하던 한 노인이 옛이야기를 꺼내게 만든다. 너무도 욕망하게 만들던 꿈 속의 가상의 여자에 한쪽 얼굴만을 보다가 반대쪽 얼굴을 보고 싶다고 열망하게 되었고 반대쪽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그런 순간을 결코 만들어선 안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에게 그런 순간은 결단코 피하라는 말을 진지하게 남기면서하지만 사실 노인이 말한 그 여성은 노인 자신의 꿈 속에 등장하는 허상이 아닌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서건 벽 안의 도시에서건 우리 자신이 그러하듯 타인에 대한 상도 하나의 허상일뿐이 아닐까 싶다. 자신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판단 역시 우리의 오해나 기대가 만들어내는 허구일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벽 안의 도시에 대해 벽의 의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벽 안의 도시구조를 장기(臟器)의 내벽 같다고 묘사하기도 하며 신장을 닮았다고 하거나 뇌의 모양을 빌려 설명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하나 같이 사람과 사람의 정신 작용들을 상징하는 것이 벽과 그 안의 도시임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직설하는 것이리라. 그림자도 짐승도 그 사람 안의 타자화된 본능과 욕망과 정서와 이성과 의지 중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반대쪽 얼굴을 결코 보려 해서는 안된다는 노인의 말은 자신의 대극에서든 타인의 대극에서든 한측면의 반대편을 직시하지 말라는 말 같기도 하다.

 

그렇게 자신의 대극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과정을 거치던 는 자신의 그림자가 죽음을 맞이할 것만 같자 그림자를 벽 안의 도시 세상 밖으로 다시 말해 현실세계로 탈출시킨다. 여기까지가 1부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씨가 43년만에 다시 완성했다는 그 이야기는 이렇게 1부까지에서 처음 마무리 되었었다고 한다. 그러다 부족하다고 느끼고는 2부와 3부를 더해 완성한 소설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다.

 

사실 1부만으로는 상실과 그 상실로 인한 몽환적 여정이라는 감상만을 남겼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소설이 남다른 점도 처음 꼽을 것은 그 몽환성이다. 작가 자신이 소설 속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을 언급하며 매직 리얼리즘이라고 자평하다시피 하고 있기도 하다. 매직 리얼리즘, 가상과 현실이 넘나드는 이야기를 쓰고자 했음을 독자에게 토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완성도는 몽환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고 상실과 그 상실로 인한 여정이 결국에는 회복에 이르도록 한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완전하고 완벽한 회복은 아닐런지도 모른다. 도시와 벽이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듯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겠지만 그럼에도 엄연한 복귀이자 회복에 이를 것임을 이 소설의 대미는 은유하고 있다.

 

감각되는 영혼인 고야쓰 씨와 를 계승하고 마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등장하고 나서 출현하는 카페 여주인과의 시작되는 이야기는 결국에는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더라도 를 현실로 복귀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벽 안의 도시에서 를 닮은 소녀 곁에서 잃어버린 시절의 가 못 이룬 꿈과 가 함께 만들어가지 못했던 꿈을 대신하듯 도서관의 꿈들을 읽으며 영원을 보내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은 영원이지는 않아야 했다는 듯 고야쓰 씨와의 이야기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운명으로서 등장했고 카페 여주인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는 결국 를 계승하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통해 현실세계로 귀환한다.

 

2부와 3부는 분명 상실 이후 회복의 여정이자 회복할 것임을 알리는 귀환으로 완성되고 있다. 때론 몰입하게 하고 때론 지루한 숙고의 시간을 주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이 의미 있는 감상을 주는 구간은 상실과 상실의 여정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실의 여정이 동시에 회복의 여정이기도 하며 끝내 회복하고 귀환할 것임을 상징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상실의 이야기가 의미로울 수 있는 것은 그 상실이 상실만으로 끝날 것이 아님을 독자가 알기 때문이다. 상실은 다시 회복으로 이끌며 여정은 귀환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실과 여정과 회복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 우리를 감상과 함께 성장으로 이끈다. 성장하기 위해서 살아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주어지는 모든 것을 느끼며 격동하기 위해 삶이 있다고 믿는다. 그럼 상실과 여정과 회복이 주는 격동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격동의 기회가 아닌가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번 작품을 통해 새삼 다시 남은, 삶에 대한 감상이다. 깊은 곳에서 무언가 누군가를 잃은 동요가 큰 사람들에게 어쩌면 깊은 감상을 줄지 모르는 소설이다. 한 주 동안 이 소설을 읽으며 아련하고 몽근했다. 나와 같을 이가 있다면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