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이유 -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10가지 원리
노엄 촘스키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데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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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유도되고 조성되어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 촘스키님의 주장이다. 

근거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학문의 길에 대중 모두가 아닌 특권층이 편입되기 쉽도록 유지되고 있으며

미국회에 기업가들의 로비스트들이 해마다 20억달러 이상을

로비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대중이 국가나 대중 자신들의 문제에 등한히하도록 하기위해

말단적인 소비를 유도하는 광고에 매년 수억달러가 투입되고 있음을 근거로 들고 있다.

 

광고부문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기에 당연히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할 수 있지만

언급되는 전분야를 거시적으로 보자면

기업과 엘리트층이 다수의 계층 상승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을 것임을

계층의 와해를 두고 보려하지 않을 것임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불평등이나 자본주의의 문제점, 민주주의의 위기 등을 다룬 저작들은 거의 대다수가

음모론적인 시선을 거둘 수 없도록 만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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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4-13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촘스키의 다른 책을 가지고 있는데 완독하지 않은 것 같아요.
촘스키의 책은 새겨들을 만한 글이 많을 듯합니다.

이하라 2021-04-13 10:47   좋아요 0 | URL
저도 촘스키님 저작을 몇 권 정도 읽었는데 사회비판 미정부에 대한 비판에서는 가장 신랄한 것 같더라구요.
 
휴먼카인드 -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조현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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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이제까지 대중적 상식이 되어온 인간은 폭력적이며 이해타산적이고 이기적 본성에 압도되는 악한 존재라는 정의에 정면 반박하는 저작이다. 물론 그러한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에 편향적으로 여겨지는 면도 없지는 않으나 이제까지 인간의 폭력성과 이해타산적인 면모, 이기적인 성향 등에 너무나도 치우친 주장들이 상식으로 대중화되어 왔기에 이런 인간의 선한 면모에 주목하는 저작이 신선하게도 다가왔다. 


다만 인간의 선함과 악함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간의 악함에 주목하는 대중화된 상식들도 본서의 저자처럼 인간의 선함에만 주목하는 신선한 주장들도 너무 한쪽 면만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저작이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전기충격)실험과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 모두가 외면했다는 주택가 대로에서의 살인인 캐서린 제노비스의 죽음 또 깨진 유리창 이론까지 그간의 정설로 굳어져 전해온 상식이 되어버린 심리 실험들과 이론 그리고 사건에 대해 저자는 모두가 편향된 조작이 있었다거나 오보였다고 부정하고 있다. 더욱이 전쟁터에서 총격을 안한 군인들이 30%가 넘는다는 전 세계 군사기관들이 염려할만한 정보도 사례로 들고 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그간의 인간의 악한 본성에 주목하던 상식들을 편향적인 오류로 단언하며 그 증거를 제시한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그리 악하지 않다는 그의 근거는 과거 러시아에서 여우를 브리딩 하여 가축인 개처럼 인간에게 친화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 과정을 연구한 결과를 인간에 대입하며 인간은 그 여우처럼 좀 더 자신이 속한 집단에 친절하고 배려하는 친화적인 존재로 진화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건 기본적인 그의 주장의 과학적인 결론의 하나이나 이 외에도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근거라는 주장들을 세세히 들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인간은 원시사회에서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 친화적이기 위해 집단 내 소속 동료에게 해를 끼친 이기적인 존재들에게는 너나 할 것 없이 화살을 쏘아 고슴도치 같은 모습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역사적 사실도 달리 생각하면 인간의 폭력성이 달리 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과연 저자의 말처럼 인간은 이타적이며 친절하고 배려하는 존재일까? 

그렇다면 역사로 남아있는 인간 잔인성과 야만적인 학살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국의 진나라 시대 백기라는 장군은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했으며 루마니아 발라히아의 영주 블라드 3세 드라쿨레아가 보인 잔인성이나 중세시대 흑사병보다도 더욱 잔인했던 50만 명을 재판이라는 명분으로 학살한 마녀사냥의 사례 등은 이미 인간의 악한 본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20세기에만 보더라도 홀로코스트, 난징 대학살, 관동(간토)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일본 종군 위안부(라는 이름의 일본군의 여성 성노예 사건), 인간을 마루타라며 나무토막으로 보며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일본군 731부대의 사례,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에서의 인종청소라 불리던 민족 대학살 등 인간의 사라지지 않은 야만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21세기라고 다른가? 미얀마의 로힝야족 학살과 자하드를 외치는 이슬람 급진주의 테러단체들이 자행하던 학살과 참수 등은 한국인 피해자도 있기에 많은 국민들이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그에 대해서 저자는 무엇이라 할까? 저자는 분명 이런 반론이 나올 것을 예상했던지 인간이 정치적 집단과 같은 권위에 의해서 선한 본성이 왜곡될 때가 있다는 식으로 발언하고 있다.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과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을 부정했으나 그런 경향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저자 자신도 인간의 예외적 경우로 상정하여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1,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군과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군인들이 보여준 너무도 인간적인(?) 사례를 들기도 하지만 이미 위에서 예를 든 인간의 야만성을 보여준 사례들과 함께 보자면 어느 쪽이 더 예외적인 경우일까? 그리고 군사적인 충돌 같은 피치 못할 (군대에 징집되거나 전쟁으로 내몰려 적을 죽이지 않을 수 없도록 권력자가 명령해 벌어지는) 권력의 압제 속에서 야기되는 인간의 잔인성 외에는 인간의 이런 부정적 성향이 더는 없는 것일까? 


19세기 영국의 잭 더 리퍼, 20세기 미국의 테드 번디 같은 살인자들 등 해외에서도 셀 수도 없는 연쇄살인이 일어났으며 20세기 한국만 하더라도 인육을 먹었다는 지존파 사건, 정두영, 유영철, 강호순, 그리고 그렇게나 알려진 이춘재 등의 연쇄살인범들이 있다. 살인은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근거로 들기에는 유별난 예외의 경우이니 제외해야 한다고 한다면... 인간이 남의 나라 땅에서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을 위해 죽어가는 그런 유별난 예외의 경우는 인간의 선함을 증거하는 사례로 들지 못해야 한다는 것인가? 어느 경우나 인간이 한 행동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악함을 조우하는 순간에 일상적인 친절을 경험하는 순간 보다 더욱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살인자들과 직면해 피해자가 되어 죽어가는 순간에 "어제 고기집에서 소스가 떨어졌는데 '그거 좀 주실래요'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에 옆 테이블에 손님이 소스통을 건네줬어. 인간은 선한 존재야!" 이러고 죽을 희생자가 있을까? 인간의 선함을 확신하더라도 처참하게 유린 당하며 죽어가면서도 가해자를 동정하며 인간은 선하다고 할 이들이 몇이나 될까?


정, 이런 유별난 경우를 제외하자면 한국 스포츠계에 만연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군대 내 구타 등의 폭력 등은 어떡할 것인가? 몇 해전까지도 전투경찰들에게 자행되던 군 가혹행위가 문제시되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이것 역시 집단 내에서의 예외적인 경우라는 말인가? 그럼 요즘 그토록 문제시되고 있는 학폭이나 왕따 같은 문제들은 어떤가? 이것이 집단 내의 권위에 의해 자행되는 것일까? 물론 소위 짱이라는 아이들이 주도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집단에서의 권위에 의한 폭력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선한 본성이 내재하고 있듯 악한 본성도 동시에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게임처럼 해보고 싶었다며 초등학생 친동생을 침대 위에서 난자해서 죽인 중학생 형에 대한 21세기 초반 보았던 뉴스 기사가 난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아이는 만기 출소를 했더라도 진작에 출소했을 것이고 평범한 소시민들 사이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본서는 인간의 선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인간의 그늘진 부분을 예외시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인간이 악하다고 아니다 인간은 선하다. 이런 논리가 아니라 인간은 물론 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선함도 내재해 있다. 이런 주장이었더라면 더욱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인간의 선함을 증명하고 인간의 집단 이기주의나 잔인성, 집단에서 누군가를 배격하고자 하는 심리를 완화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노르웨이의 감옥과 미국의 감옥의 운영 사례를 보여주며 예를 들고 있다. 자유롭고 평화롭고 편안한 감옥 생활을 하는 노르웨이의 감옥과 폭력과 규율만을 강조하는 미국의 감옥 생활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감옥은 수감자 1인당 7000의 비용이 든다면 미국의 경우 수감자 1인당 5000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수감자들이 재범을 하고 다시 재수감되는 경우가 대다수인 미국에 비해 노르웨이는 재범율이 그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노르웨이는 미국보다 두 배 가까운 비용을 절감하고 있고 출소한 사람들이 취업을 해서 내는 세금까지 계산하면 사회적으로 절감되는 비용이 상당하다고 한다. 강압과 제도를 이용해 행사하는 폭력이 아니라 수감자가 자연스럽게 치유받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게 할 때 사회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변화하는 것이다.


또 넬슨 만델라와 인종차별 노선의 남아프리카 전직 장군의 만남을 예로 들며 저자는 접촉이 국면을 전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원양 선박에서 인종 간의 접촉이 없는 운항을 했을 때와 인종 간의 접촉이 있는 상태 즉, 타 인종과 함께 운항을 했을 때의 인종차별 수치를 비교하며 그는 접촉이란 것이 차별에 대한 대안인 듯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 견해에 대해 반은 수긍하지만 반은 공감할 수 없다. 


인종 백화점이라는 미국에서 해마다 헤아리기 쉽지 않을 만큼 일어나는 인종차별적 범죄와 혐오 범죄들을 보며 접촉만으로 해답일 수 있다는 것이냐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름 이 책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편향적인 정의에 다른 대안을 내놓기 위해 선방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건 틀렸다 이것이 맞다가 아니라 그런 면과 함께 이런 면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되새겨야 하며 이런 면에 대한 상식도 대중화해야 할 것이다라는 주장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신의 아이를 때려죽이는 부모도 있고 입양아에게 그러는 양부모도 있다. 자신의 손주로 속이고 자신이 낳은 딸을 2층에 다 놓고 1층에 살면서도 굶겨 죽이는 엄마도 있다. 반면에 안타깝게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은 자기 아이가 눈에 밟혀 해외 봉사활동을 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이광기씨 같은 아버지도 있다. 사람은 그렇다. 악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다. 악한 사람도 있고 선한 사람도 있으며 한 개인을 봐도 악할 때도 선한 선택을 할 때도 누구에게나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다.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이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둘 다 부정할 수 없다는 것 하나만 수긍해선 안된다는 것 그것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나 싶다. 


이 책은 이것이 정답이니 그저 수긍하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 자신도 사랑의 호르몬이라는 옥시토신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는 우호적으로 외부자에게는 배격하는 성향을 강화한다고 짚고 있으니 말이다. 또 인간이 자신과 닮은 사람에게 더욱 우호적이고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배격하고 공격적이 된다고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본서를 통해 정답은 이것이다라고 수긍하려고 선택하는 분들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한 쪽으로 기울어진 인지적 오류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선택하는 분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러니 저자의 어투가 맞는 건지도 모른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나무는 반대쪽으로 기울여 바로잡아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잠시지만 본서가 말하는 이런 주장들이 상식이 되는 세상, 행위의 동인이 되고 신념의 내적 근거가 되는 세상을 꿈꿔 봤다. 지금의 세계보다는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그럼 AOA 민아나 에이프릴 현주 같은 왕따 피해자들도 없는 그런 세상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지민이나 나은이, 진솔이가 왕따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친절한 미소를 민아와 현주에게 건넸을 테니... 세상의 많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상식으로 전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 지금보다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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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역사 - 세계 경제를 결정하는 5대 머니게임
우야마 다쿠에이 지음, 신은주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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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의 저자 우야마 다쿠에이씨는 게이오 대학교에서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세계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양한 매체에서 시사와 역사를 접목한 콘텐츠로 인기가 많다고 하며 국내에도 그의 책이 여러 권 소개된 작가이기도 하다고 한다. 경제학부와 세계사 강의라는 타이틀로 보아도 [세계 경제를 결정하는 5대 머니게임 부의 역사]라는 본서를 집필하기에 최적화된 사람이 아닌가 싶다.


다만 [신은 어떻게 인간을 탐욕의 노예로 만들었는가]라는 카피와 [2021년 부의 흐름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이라는 카피는 본서의 주제를 조금 벗어났다고 생각된다. 신 즉 본서에서 담론하는 종교가 인간을 탐욕의 노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어떻게 종교를 이용했는가]가 더 맞는 시각이며 본서만으로 2021년의 부의 흐름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마케팅에 이용하려 담은 자극적인 카피가 아니라 [시작하는 글]에서 짚고 있는 저자의 관점이 더 본서를 이해하기에 알맞은 관점이라고 본다. 


- 한 종교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국민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 종교는 근원적 의식이고, 다른 문화를 접할 때 우리 앞에 나타나는 최초의 벽입니다. 다른 문화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종교를 이해해야 합니다.


- 종교는 다른 문화의 국민성, 사회성, 문화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해당 국가 국민들의 국민성을 이해하는 데이터로 종교를 이해한다면 납득이 가는 접근법이라고 생각된다. 저자가 말하듯 본서는 추상적인 종교를 경제라는 구체적인 실체에 비춰 역사를 해설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 속 경제와 종교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며 동시에 해당 국가 국민들의 국민 정서와 관점, 의지를 수긍하는 데 유익한 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종교의 발생 원인과 존재 양식과 존재 이유를 종교의 가치를 너무도 경제적 관점에서 단순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책을 처음 펼치면서부터 들었는데 그것은 너무도 직설적인 저자의 화법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은 서로 용서하고 도우면 복리 후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비와 인간애를 말하지만 어떤 종교든 최종 목적은 후생 경제입니다. 공리적 이해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 더 많은 풍요를 찾아서 경제 활동 규모를 크게 만들려고 할 때 광범위한 집단을 구성하기 위한 공통 이념으로 종교가 필요합니다. 국가라는 근대 개념이 없던 시대에 종교가 초창기 집단의 구성 이념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 종교는 경제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생겨났고 경제 활동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념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경제의 일환이고 본질적으로 세속 생활 그 자체인 것입니다.


​크리스트교를 우선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모든 종교는 경제의 일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저자다. 너무 단순화한 시각이 아닌가 하는 것은 위와 같은 저자의 주장 때문이다. 아이는 섹스의 결과물일 뿐이라던가 인간은 아이를 낳고 양육하기 위해서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던가 하는 관점과 무엇이 다른가 생각되었다. 단순화만이 아니라 편협한 관점인 것이 사실이다. 작용과 기능을 존재 이유나 발생 원인으로 놓고 보는 것은 단순화를 넘은 시각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본서를 읽으며 기능과 작용, 결과를 이해하는 데 편리한 시각이기도 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 같은 종교 내 집단끼리 한정된 부를 둘러싸고 다툼이 생겨납니다. 집단은 분열하고 파벌이 발생하고 부를 쟁탈하기 시작합니다....중략... 이렇게 해서 같은 종교 안에서 종파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 부의 분배를 둘러싼 이권 다툼은 다양한 형태의 종교전쟁으로 나타났습니다. 


교리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종교전쟁은 본질적으로 역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현실적인 시점을 종교에도 적용해야 하고 어떤 종교든 간에 세속의 모든 사회 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Part 0에서의 관점이고 이러한 관점에서 Part 1에서 Part 5에 이르기까지 세계사를 해석하고 있다. 본서는 5대 머니게임이라고 하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와 불교, 유교에서의 경제 여파를 논하고 있지만 유교는 비중이 너무 적고 불교와 힌두교도 지나가며 살짝 짚고 있는 정도이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역사와 역사적 충돌을 주로 논하고 있다.


- 법치국가가 없었던 시대에 유대교는 율법과 율령으로 시장에서의 신용과 여신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중략... 전근대시대에 성과 속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대 이후를 사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융화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은 종교와 경제를 하나로 보아야만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초기 종교의 기능적인 면을 저자는 위와 같이 논하고 있다. 본서의 주제대로 경제라는 한 분야에 포커스를 맞추어 유대교의 기능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최초 통일 왕조들에서도 불교를 공인 한 것을 불살생의 불교 교리가 폭동, 반란, 전쟁 등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었고 살생 없는 평화의 시기에 상인들이 안심하고 상업을 할 수 있었기에 상인계급도 환영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교단과 왕권이 깊은 유착관계를 맺고 재정적 지원 아래 상업 인프라가 정리되어 각지에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를 놓고 해석하는 것이며 결과를 원인으로 도치하는 격이다. 유대교 초기에도 성서에서 보이듯 이미 여타 종교들이 존재했다. 그러한 때에 유대교만이 경제적 역할을 하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도 최초 왕조가 불교를 공인한 것 역시 동시대에 불살생을 논하던 자이나교가 있었는데 자이나교가 아닌 불교를 공인한 것은 어찌 답할 것인가? 효용이 있었다고 그 효용만을 위해 해당 종교가 입지를 굳힌 것이라 설명하는 것은 커다란 우가 아닌가 싶다. 다만 해당 종교가 융성한 결과 이러한 효용이 있었다고 인식하는 것이 더 바른 접근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효용 때문에 해당 종교가 융성했다는 접근 보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슬람의 융성에 무함마드가 속한 쿠시라이족이 지배층에 대한 약자의 증오심과 복수심을 뜻하는 르산티망을 이용해 대중을 선동했다는 것은 본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수긍이 가는 논리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통해 이슬람의 복지와 기부라고 할 수 있는 자카트와 와크프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는데 이슬람도 성전이라며 교리를 전략적으로 악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사회적으로 역할을 하는 종교인 거라는 여겨졌다. 더욱이 기존에 이교도는 죽이라거나 이교도는 내버려두라는 이율배반적인 교리가 둘다 있는 종교라고만 알았었는데 이교도에게는 세금을 부과하고 내버려두라는 교리는 과거 시대에 타 종교에 대한 무관용적이었던 유대교나 기독교 같은 종교들 보다는 평화로울 수 있는 종교였구나 하는 감상도 들었다.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어지고 비잔틴 제국으로 전승되어 간 카톨릭의 역사도 경제적 시각으로 해석될 수 있음도 새삼스러웠고 무엇보다 본서에서는 종교전쟁을 이미 앞서 보았듯 경제 논리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러한 편이 역사를 이해하는 데 더 편리하다는 감상도 들었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격돌도 기득권과 보수파의 결합, 혁명파와의 전란 등도 경제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해하기가 한층 쉬웠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 건축 과정에 주도층들이 경제적 이유로 연합하고 경제적 이익이 창출되는 과정은 그리 색다를 것도 없는 해석이긴 했다.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 등에 경제적 이해관계들도 그다지 주목할만한 새로운 해석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사실 종교가 존재하는 동안 인간에게 순기능만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순교, 십자군 전쟁, 종교전쟁, 마녀사냥, 사제들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등 기독교만 해도 큰 것만 담론하자해도 어마어마한 인구에게 피해를 끼친 종교가 아닌가? 


오히려 순기능은 부의 순환을 이룸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논리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는 종교의 순기능을 이야기하는 서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본서의 장점이라면 세계사의 흐름을 종교라는 프레임으로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점이라면 그러한 해석의 틀을 구조화하기 위해 너무도 종교라는 복합적으로 접근해야 할 대상을 단순화해서 우겨 넣고 있다는 것일 거다. 그럼에도 전개가 이어지는 내내 저자의 해설에 수긍이 되는 면이 적지 않았다는 것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물론 후반부로 가며 저자의 주장을 담은 해석들이 다소 줄어가며 일반적인 서술이 자주 일어남도 약간은 애석함을 주기는 한다. 


경제 예측이라던가 경제 흐름을 읽기 위해 본서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조금은 섣부른 선택이라고 말씀드려야 할 듯하고 역사를 이해하는 폭넓은 관점, 다양한 해석의 틀을 알아가고 싶다는 분들에게라면 망설임 없이 권해도 될 책이 아닌가 싶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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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9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돈의 흐름으로 보는 세계사 - 역사는 화폐가 지배한다
미야자키 마사카쓰 지음, 송은애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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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란 개념의 탄생부터 주화와 지폐 등 화폐의 발명과 보급, 그로 인한 부의 축적과 이동, 경제의 발달로 인한 세계사적 변화들 더나아가 가상 화폐의 등장에 이르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돈이라는 주제로 세계사의 흐름을 재조명하고 있다. 명쾌한 해설로 지루할 새가 없으며 흥미를 끌기에도 충분한 주제이지만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기에도 충실한 저술이다 싶다. 경제를 기반으로 세계사를 다룬 저작 중 두번째로 읽어 본 저작인데 길지 않은 분량임도 유익한 정보와 재미를 둘 다 전해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경제사에 대한 상식이 충분한 분들에게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경제 문외한인 내게는 이만큼 재미나게 돈의 흐름과 세계사를 유려히 서술한 저작이 또 있을까 싶었다. 간략히라도 경제사의 흐름을 알고 싶은 경제 문외한인 분이나 세계사에 좀더 재미있고 쉽게 접근하고 싶은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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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선택 - 세계 경제사 주요 사건으로 읽는 부의 지도
한진수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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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의 경제사를 다루는 본서를 통해 경기가 어떻게 호황과 불황을 거듭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요인으로 변화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현재의 이슈들과 미래예측서들이 말하는 변화의 요인들이 어떻게 부의 변화를 야기할지 가늠하는 데 보다 유익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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