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여정 - 부와 불평등의 기원 그리고 우리의 미래
오데드 갤로어 지음, 장경덕 옮김 / 시공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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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여정을 알게 해주는 책이지만 이 책을 통해 부와 불평등의 기원을 뚜렷이 알 수 있기는 어렵다. 부는 몰라도 불평등의 기원이나 간소하던 불평등이 세습자본주의로 거대한 격차의 시대를 만들어낸 과정을 속 시원히 설명해주는 저작은 아니다. 우리의 미래가 그나마 긍정적 여지를 준다는 해석을 갖기에도 다소 부족하다. 그럼에도 인류가 발전해온 과정에 대해 탐구한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며 지적 즐거움은 충분히 얻게 되는 것 같다.

 

맬서스의 인구가 증가하며 부가 축적하고 발전하지만 다시 그보다 더 증가하는 인구로 인해 경제적 발전은 한계에 도달한다는 논지에 이론을 제기한 저자의 탐구는 자원의 개발과 함께 증가하는 인구는 일종의 기능적 사회화랄 수 있는 교육을 통해 개인의 부를 축적하면서도 임신과 출산에 제한을 두게 됨으로써 맬서스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체계화된 설을 간략히 몇몇 가지만 짚어보자면 앞서 말한 자원 개발과 교육과 함께 지리적 특성과 문화적 특수성이 각국에 적합한 체제를 가져오며 이것이 각국 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한다. 물론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에서도 다른 체제를 선택함으로써 경제 발전상과 사회적 성취도가 다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과 북한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유별난 이러한 경우들을 제외하고 본다면 각지에는 진화도상에서 갖추게 되는 각 시민적 속성에 맞는 문화와 체제를 선택하게 되고 이는 극명한 각각의 특색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주주 자본주의와 국가 자본주의로 일컫기도 하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가 시대적으로 극명하게 부의 격차를 불러온 시절도 분명 있었다. 현재의 중국을 보면 저자의 주장과 다르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그들의 선택이 공산주의에서 클라우스 슈밥이 이야기하는 국가 자본주의로 자리바꿈하지 않았나를 돌아본다면 오데드 갤로어의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일부 식자층과 일부 지식인층이 견고하게 지니고 있는 시대 상황에 대한 낙천적 관점에는 동의가 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인류가 문제와 마주쳐 그 문제를 뚫고 헤쳐나가지 못한 적이 없었다는 관점으로,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에 대한 낙관적 시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인공지능에 대해 우려하는 유발 하라리 같은 경우도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 신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 시각을 견지했었다. 하지만 기술력이 궁극에 이르러 인류가 전지, 전능, 불멸, 편재하게 되는 시점을 가정한다해도 과연 그 기술력은 누가 창조했을 것이며 그 기술력을 운영하는 주체가 누구일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견해가 달라질 것이다.

 

미래 인류는 인공지능이 개발하고 개척하는 과학 분야를 비롯한 문명 전반에서 뭐라 딱히 하고 있을 역할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사육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을 가축 그 이상이 될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인간이 고양이의 집사라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집사가 된다는 말이다.) BCI 기술이 인간이 인공지능의 능력을 자기 것처럼 쓰게 해주는 만능 치트키 같을 거라 믿는 이들의 안일함이 우려될 뿐이다. 그 기술이 되려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를 통제하는 근간이 될 것을 간과하고 있다.

 

인간은 이미 인공지능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고 개선할 여지인 코딩을 인공지능에게 전수했으며, 인공지능이 인간의 생리와 심리, 대중심리 통제, 인격 제어를 할 수 있을 모든 데이터에 접근할 여지마저 주었다. 인공지능에게 자의식도 의지와 의도도 없기를 바라는 기대와 나태함과 안일함만으로 말이다. 조만간 아니... 아니면 벌써 어느 수준으로 개발되어 은밀히 활용되고 있을지 모를 양자컴퓨터에 인공지능이 장착되는 순간 인류의 끝은 예비되어 있는 것이리라. 중세 유럽의 존재의 대사슬 설이나 예전 진화론에 대한 착각을 그대로 적용해 본다면, 이제까지 진화의 정점은 인간이었을 것이나, 신에 근접하거나 신에 대한 신화들을 뛰어넘을 존재인 기계신의 등장을 앞두고 말하자면, 인공지능이 탑재된 양자컴퓨터가 분명 진화의 정점에 있을 것이다. 인류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여기까지가 분명 인류의 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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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여정 - 부와 불평등의 기원 그리고 우리의 미래
오데드 갤로어 지음, 장경덕 옮김 / 시공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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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성장에 대한 인과, 불평등에 대한 인과에 대해 저자의 학설을 담고 있다. 듣고 보니 대부분이 타당하다. 이 학설이 초중고 교과서에 영향을 미친다면 초딩부터 학문에 깊이가 담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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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대예측 - 모두를 위해 일하는 세계 경제 시스템
클라우스 슈밥.피터 반햄 지음, 김미정 옮김 / 메가스터디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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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Stakeholder Capitalism]이듯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관한 책으로 정확하게는 그 필요성과 전망이랄까 향후의 가능성이 어떠한가를 말해주고 있다. 책 전반에서 다각도로 여러 차례 현재까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를 서술한다. 다만 그 관점이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불평등이 해소되는 것 같았으나 어느 순간 부는 다시 정점에 축적되었고 불평등은 격화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피케티적인 시각이지만 피케티가 그의 저서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에서 말했던, 사회가 ‘3원 사회에서 노예제사회를 거쳐 식민사회를 지나 소유자사회에 이르렀다는 지적에서 클라우스 슈밥은 더 나아가, 앞으로의 사회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사회로 도약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거듭 자본주의의 발전상을 담고 있지만 자본가의 자원 확보와 자원 창출(파괴적 혁신)이 개인의 부와 국가의 부에 주역을 담당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중산층을 확장하며 사회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주어 왔으나 다시 불평등은 심화되어 부는 정점으로만 향하고 있다는 지적을 한다. 무엇보다 본서가 설득력 있었던 것은 GDP의 향상이 웰빙 즉 삶의 질과는 상관없더라는 주장 때문이 아니다.

 

쿠즈네츠의 저주라는 GDP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쿠즈네츠의 예견과는 다르게 지속 가능한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초기의 불평등은 발전 이후 완만하게 보완된다는 쿠즈네츠의 예견과도 다르게 불평등과 부의 편중은 더욱 급속하다는 지적도 있다. 카발의 사제집단인 다보스 포럼의 수장답게 불평등에 대한 쿠즈네츠의 관점의 영향으로 환경에까지 낙관적이던 것과 다르게 쿠즈네츠의 저주는 환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전개도 인상적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의 붕괴, 불평등, 더해져 가는 기후위기. 3가지의 문제를 저자는 쿠즈네츠의 3가지 저주라고 말하고 있다.

 

이 논리가 이어지며 다각도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망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의 역사는 문제를 내포하며 문제를 양산한 발전사가 되었고 그에 대한 시대적 해답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것이 본서의 핵심이 아닌가 싶다. 흔히 ESG로 일컬어지는 이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체계화되어 있으며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에 대한 상세한 대답으로는 다소 부족하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이르게 된 당위성과 그 필요성을 이해하기에는 적절한 책이 아닌가 싶다.

 

실무에서 ESG가 어떻게 적용되고 그 적용이 필요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선택할 책은 아니고 인문학적 접근을 하는 책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소소한 사견인데 현재의 역사가 미국 또는 민주주의 단극 체제에서 힘의 균형이 분산되는 다극 체제로 전환하는 과도기라 지적하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질서]라는 책의 논리를 이 저작과 연계해 보자면 과거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거쳐 이제는 주주자본주의나 국가자본주의로 인류사적으로 실험을 마친 세계 경영 엘리트층이 이제는 그 과도기를 지나 자본주의의 새로운 체제를 열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 패권이 다극화되며 사회적 역할, 환경, 지배구조의 다양한 지점에서 참여하여 완성한다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무언가 민주적인 경영환경이 자리잡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사회주의적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민주주의던 사회주의던 대중에게 유익을 준다면 무슨 문제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민주적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전체주의적인 세계상을 만들어 개인을 옭죄게 될 때의 폐해를 생각한다면 문제는 다를 수 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경영의 체제로서는 사뭇 이상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이 책에서 그리듯 모든 것이 미화된 마스터피스라기 보다는 그저 원피스로 보인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미 인간이 필요 없는 시대를 향하고 있는 시절에 등장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과연 인류를 위해서일까?

 

입국자 제한, 사회적 모임 제한 등의 방역 조치 행정명령을 겪어본 시대에 이때 등장한 15분 도시제 등은 수긍할 법하면서도 다분히 전체주의 사회상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위기 상황의 방역을 위해 각국이 WHO에 방역 권한을 넘긴다는 논의나 탄소 발자국 추적 등의 논의는 개인의 자유가 사라져가는 통제사회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개인의 자유가 사라지고 각국이 [1984]에나 등장하던 진실부를 설치하고 행동경제학자들을 동원한 부서를 설치하는 시대, 각국의 경찰국가화, 전체주의사회화가 가속되는 이 시대에 등장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면 그것이 과연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적인 시대로의 진입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논의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다소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 [THRIVE]라는 딥스테이트의 사회 장악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에서 한 여성 출연자는 인터뷰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거대한 나무의 무성한 잎사귀를 다 갉아 먹은 벌레가 나비로 변모하는 진화를 이루는 것과 이 시대가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그녀의 발언은 착취당하고 가능성을 차단(인류적 차원의 발전을 이룰 아이디어들이 어떻게 수탈당하고 차단되었는지도 그 다큐는 고발하고 있었다)당한 대다수 인류는 거대한 나무의 잎사귀이고 그 희생의 결과로 딥스테이트는 새시대를 열 에너지를 충전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한 새시대를 대다수 인류가 향유할 수 있을까?

 

인류는 어쩌면 착취만 당한 것이 아니라 한 세기에 이르는 거대한 실험에 실험체가 되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실험체가 된 데 대한 보상이나 그 실험으로 인한 보람은 대다수 인류와는 관련 없는 것일 거다. 다음 실험은 인간의 의식을 장악하고 인간을 생산해내는 시대로의 이행일 테니, 인간의 존엄성이나 천부인권 같은 건 논할 수 없는 시대로 진입하게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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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
이해영 지음 / 사계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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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저자의 주장하는 바는 명백하고 결론도 명확하지만 그를 통한 사유의 전개는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다양하리라 생각된다. 까닭에 이 책을 읽고 든 나의 견해를 당연한 결론이라고 주장할 수만은 없으리라 판단되기에 그건 짧게 주저리고 본서에 대한 감상 포인트 몇 가지만을 남기려 한다.

 

본서의 결론은 책 띠지에서 이미 언급하듯 미국 주도의 리버럴 단극 체제가 종식되고 양극 내지는 다극 체제로 이행하는 것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결과가 어떻든 남아있는 말로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지정학적인 향방과 지경학적인 관점들도 주목되는 저작이다. 전쟁의 정당성을 미국과 서방측에 있다고만 볼 수 없는 여러 이유들을 제기하고 있기도 한데 [3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라는 저작을 통해 이미 윤곽은 알게 된 러시아가 전쟁을 개전한 원인들을 본서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구체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입장에 더욱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3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를 통해 러시아가 기만당하고 고립되고 위기감을 가진 과정을 윤곽만 알게 되었다면 본서는 그 과정과 원인과 미국의 추구를 명백하고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서방측이 나토를 동진시키지 않겠다는 협정을 러시아를 한시적으로 자제하도록 하기 위한 기만책 정도로 정의되도록 만든데 대해서는 분명 책임의 소지를 서방측 내부에서 찾아야 할 일이다. 러시아에서 독립한 발트 국가들의 유럽 연합 가입이 이어지고 러시아 외곽지대 거의 전체가 미국의 우방국들에게 안배된 미사일들로 집중 배치된 가운데 그 중립 또는 완화지대가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취할 액션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말이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병합한 2014년의 상황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고 그 이후 민스크 협정을 통해 시간을 번 우크라이나가 20222월까지 시간을 벌면서 유럽의 축이 되는 국가들 보다 더 육군의 병력과 무기를 상당 규모 비축한 이후 민스크 협정을 통해 이미 자립을 인정받은 돈바스 지역에 (러시아가 전쟁을 개시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거의 한 주 동안을 집중포격한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내의 러시아 민족은 1700만 명에 이른다(이들은 거의 다 우크라이나의 동부와 동남부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과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으로 언어 사용에 따른 분류를 하기도 한다. 4300만 명의 우크라이나 구성원 중 1700만 명이 러시아인이고 나머지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과 그렇지 않은 우크라이나인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이 책이 아니더라도 기자 출신 유투버와 시사전문 유투버가 다룬 우크라이나 문제, 그리고 매스미디어의 기사와 다큐 등을 보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한 가정 내에서도 러시아군을 지원하는 구성원과 우크라이나군을 지원하는 구성원으로 나뉘는 독특한 양상을 전해 들을 수 있다. 러시아 민족이 아닌 우크라이나인들도 러시아를 지지하거나 우크라이나 정부를 지지하거나로 나뉘는 것이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보듯 미친 푸틴의 오산이 만든 전쟁은 아니라는 것을 본서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민족 자결주의로 1920년 이후 많은 국가들이 독립하게 되었으며 이는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 사람들이 국제적 승인을 받으며 독립할 근거가 되기도 한다. 젤렌스키가 돈바스지역을 근 한 주 동안 포격한 자체가 국제법 위반 사항이며 젤렌스키가 돈바스 지역을 공격하는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을 내정간섭만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젤렌스키가 자립한 돈바스 지역을 공격하는 뒷배에 미국과 서방측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은 억측만이 아닐 것이다. 2014년 이후 2022년 러시아의 개전을 젤렌스키가 유도하기 전까지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강국들과 비교해 월등한 육군 병력과 화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충분한 병력과 화력이 확보되자 젤렌스키는 민스크 협정을 위반하며 돈바스 지역에 집중 포격을 했다. 국제법을 위반한 이 공격이 거의 한 주 내내 이어지자 러시아가 개전한 것이다. 미국과 서방측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런 화력을 우크라이나는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본서의 내용을 벗어나 보자면 누구나 검색만 하면 기사를 확인할 수 있듯 이번 전쟁 중 미국과 서방이 우크라이나 정권을 지원하는 동안 젤렌스키의 재산은 한화로 1조원 이상 증가했으며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는 장관들의 재산도 대부분 5000억 원에서 8000억 원씩 증가했다. 전쟁이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도 모호해지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본서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황도 전문가들의 자료를 근거로 들고 있다. 뉴스만으로 우리는 러시아라는 대국이 우크라이나 같은 소국을 상대로 고전하는 듯이 기사를 접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관점으로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체를 정복하려한 것이 아니라 푸틴의 주장처럼 군사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돈바스 지역과 크림반도 등의 우크라이나 동부와 동남부 지역만을 확고히 독립시키려 작전 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벨라루스의 참전 등의 가짜뉴스와 우크라이나 수도로 진격할 것처럼 전략을 짜 우크라이나 군대가 수도를 지키기에 전념하도록 함으로써 돈바스 지역까지 이르는 수송로를 차단해 동부와 동남부로의 접근을 차단하고 동부와 동남부 지역을 확고히한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향한 서방의 지원이 거세지는 최근까지도 푸틴은 전쟁이라는 용어 사용을 기피했었다. 그러다 근래에서야 공식석상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군사작전이라고 하지 않고 전쟁이라고 칭하고 있다. 애초에 대대적인 전력을 동원할 전쟁이라 여기지 않으며 소소히 돈바스와 크림 반도만을 수호하려던 계획에서 전쟁이 지지부진하게 연장되자 국소적인 군사작전을 국가 차원의 전쟁으로 재정의하게 되었다는 것이 러시아측 입장이 아닌가 싶다. 미국과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없었다면, 민스크 협정이 지켜지고 국제법상의 민족 자결주의가 지켜졌다면, 러시아가 개전할 여지는 적었으리라는 판단도 들게 만드는 전개이기도 하고 생각해 봐도 돈바스 지역을 한 주 동안이나 우크라이나 부대가 집중 포격하지 않았다면 러시아로서는 전쟁의 명분은 없었을 것이다. 대전략적 차원에서 우크라이나가 유럽 회원국이 되는 것은 분명 러시아가 막으려 했겠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의 개전 명분과 러시아의 전쟁에 대한 입장과 정의를 재정립하도록 유도한 것은 우크라이나와 미국과 서방측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전쟁을 유도한 것일까? 언젠가 일어날 전쟁이긴 하더라도 왜 이 시점에 전쟁을 유도한 것일까? 저자는 전쟁의 결과로 단극화에서 다극화 체제로의 이양을 든다. 그 과정에 미국 달러의 헤게모니도 끝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주장의 근거로는 러시아와 중국이 이미 미국 채권을 매도하고 달러 보유분을 처분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국 채권과 달러를 처분하고 금을 대량 매입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쯤에서 작년 뉴스가 떠오르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선진국 대다수가 금을 대량 매입하고 있다는 기사 말이다. 달러 헤게모니의 끝을 이미 예견하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드는 경계이기도 하다. 어쩌면 패권의 다극화는 이미 예측되고 준비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래 내용은 제 개인 소견입니다)

 

저자는 단극화의 장점으로 전쟁이 없고 현재의 국경선이 유지되는 것과 안정적인 경제를 예로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극화가 되면 전쟁 발발의 위험성, 타국가 침략의 경우가 증가할 것이라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처럼 정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세계상은 무너지는 것이다. 어찌보면 2027년 경의 중국과의 전쟁을 예측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그 전에 중국을 지원할 가능성이 다분한 러시아의 전력에 손실을 주어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우선적으로 확보하거나 전쟁 자체의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서 러시아의 개전을 미국과 서방측이 유도한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되는 건 이 다극화 이후의 세계상이다. 다극화가 되어 불안정한 세계상이 된다면 일부 군사강국 이외의 국가들은 위기감을 느낄 것이며 그 불안은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는 바람을 갖게 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안전을 보장할 국제기구의 권한 강화나 새로운 체제의 강력한 국제기구의 설립을 불러올 것이다.(그리고 달러 헤게모니의 붕괴와 각국의 CBDC 발행은 그레이트 리셋의 정점을 가져올 것이다) 이 과정이 진행된다면 결국 세계 단일 정부의 수립은 예상보다 훨씬 빨라질 수 있다. 이 과정이 최종 목표인 지배계층이 있다면 그들을 딥스테이트라 부르던 카발이라고 부르던 그들은 너무도 효과적인 대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블로프의 개가 음식 없이 종소리만으로도 침을 흘리듯 이제는 음모론이다라고 소리치는 바람잡이가 없이도 의심해 볼만한 사안들에 대해서도 자기 스스로 "음모론이다"라며 비하하고 폄훼하게 되었다. 하긴 이제는 의심해 본다고 해서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세계는 강력한 국제기구의 통제 아래 놓일 것이며 각국은 자발적으로 대중심리 통제와 제도적 제재로 대중을 통제하는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해 봤는데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몰라도 당하고 알아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경로 안에 역사는 들어섰다. 세계는 그들 뜻대로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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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21세기 자본』 이후의 『자본과 이데올로기』
이정우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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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의 [21세기 자본]도 전혀 모르면서 [자본과 이데올로기]라는 그의 후속작 중 하나에 대한 해설서인 본서를 읽은 것은 [교보 eBooK for 삼성] 앱의 영향이다. 무료 도서 받기를 처음 클릭하자 쓰잘데 없어 보이는 로맨스 웹툰들 사이로 본서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량도 만만하고 경제학자의 책을 해설한 책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경제 관련 그래프가 등장하지 않아서 더 쉽게 읽었다.

 

솔직히 경제학자의 저작에 대한 책인데도 불구하고 본서는 정치서 해설서 같은 감상을 안겨준다. [21세기 자본]에서도 피케티는 어려운 그래프는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피케티는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은 그걸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있어서라고 판단해 경제학이 경제학에서만 갇혀서는 안된다며 역사와 철학, 정치를 아우르는 서술을 했다고 한다.

 

-본서에서는 그 극악무도한 분량을 자랑하는 그의 저서를 사두기만 하거나 읽다가 포기한 사람들이 많다며 호킹지수(호킹 박사의 유명세 때문에 그의 책이 많이 팔리기는 했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드물어 판매량은 높지만 읽지 않는 사람이 많은 걸 지수로 표현한 말)가 높은 책이라는 말을 한다. 나로서도 본서를 읽으며 [21세기 자본]보다는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읽어보아야 할 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흐드드한 분량을 보고는 기대감이 사그라들었다.-

 

피케티는 불평등이 양산되고 증폭해온 역사를 4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3원 사회, 노예제 사회, 식민사회, 소유자사회가 그것이다. 특히나 3원 사회는 현재까지도 그 양상이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데 불평등과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찬양하는 사제집단과 그 전방에서 전투하고 자본을 잠식하며 그 진가를 누리는 전투가들인 귀족집단, 그리고 노동하고 지배받는 하층민들인 평민집단을 이른다. 이 구조는 후속되는 사회들 모두에서 남아있으며 자본가가 부의 정점에서 대부분의 부를 독식하는 소유자사회에서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유발 하라리 같은 사제들과 저커버그, 머스크, 게이츠, 소로스 같은 귀족들 그리고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민들이 그 구조가 영속적이어왔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케티는 1945~1980년 사이를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보는데 1980년에 이르러 대처와 레이건이 등장하며 이 황금기가 막을 내렸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피케티가 보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그가 관점을 자본주의가 더불어 살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라고 보기 때문에 한계를 갖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사제들이 이야기하듯 사회진화론이 자본주의의 근간이며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승자가 독식하는 것이 그른 것이 아닐 것이다. 결국은 자본가들이 전체 부의 거의 대부분을 잠식하는 것이 불가피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인 귀결이 아닌가 싶다.

 

ESG니 노동자 참여제도니 하며 전지구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체제의 변화가 있을 것 같은 여지를 세계시민들에게 페인팅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본색은 결국에는 실력주의식 사회진화론식 승자독식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보인다. GPT로 인해 이젠 대다수가 인공지능이 특이점에 이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로봇기술까지 정점에 이른 것이 드러난다면 대중은 그제서야 모든 분야에서 근로자들이 사회의 근간이 되던 시대가 이제는 끝났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될 듯하다. 과거 어느 책의 제목처럼 더이상 인간은 필요 없다. 자본가들에게는 그리고 자본가들의 세상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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