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우주다 -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이것이 중요한가
디팩 초프라.미나스 카파토스 지음, 조원희 옮김 / 김영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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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론, 인간중심 우주관으로 일관하는 주장이다. 기존의 인도 철학, 요가 철학의 변이판이라고 판단된다. 우주와 세상에 대한 관점까지 재편하게 해 줄 저작일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서술이 이해하기 쉬운데 반해 주장이 다소 단정적으로 보였다.

 

여느 책처럼 양자역학을 들어 관찰자 효과로 인간의 참여가 절대적인 듯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관찰자가 되는 건 인간만이 아니라 광자 등의 다른 입자를 포함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에 대입한다 해도 자기에게 자신만이 절대적인 관찰자가 아니며 무수한 타자의 관찰은 한 대상에게 거의 무제한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낳는다.

 

관찰자가 있기에 우주가 존재한다는 논리를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도 없다고 확대 해석하다니(인간중심 우주관이다)... 이미 관찰자 효과에서 한 관찰자만이 아니라 다른 입자의 관찰도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했듯이, 인간(이나 다른 지적 생명체)이 관찰자가 아니더라도 이미 우주를 가득 채운 모두(물질 대상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게다가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영향력은 무수한 타자 대 자기 1인의 그것으로 한정된다.

 

우주를 의식이라고 정의하는 데까지의 여정을 따라갔지만, 의식이 곧 마음이라는 데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저자가 말하는 퀄리아도 인식과 감각을 통해 야기되는 기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우주가 어떤 기분인지를 단정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이 야기한 짐작과 단정의 교차일뿐이 아닌가?

 

우주가 지성이라는 것, 데이터를 모으고 데이터를 창조하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우주가 마음이다. 곧 인간과 같은 정서가 있을 것이다’ ‘우주가 곧 신이며 인격체다라는 데는 동의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건 불가지의 영역이 아닌가 싶다.

 

우주가 마음이라는 건 인간의 기대와 정서가 자아낸 주관적인 단정일 뿐이다.

 

우주는 정의하기에 따라 지성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감정까지를 포함한 인격체이거나 마음이라는 것은 억측이 과도한 단정질이다.

 

우주는 마음이고 우주가 창조한 인간은 그 부분이다라는 대목도, 미세조정을 근거하더라도 우주는 지적 설계자가 설계한 것이라는 대목도, 어디까지나 진화론과 자연발생론이 억측일 가능성만큼이나 가능성일 뿐인 것이다.

 

저자는 항공기 재료들이 버려진 쓰레기장에 태풍이 분다고 항공기가 조립되어 완전한 항공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나 원숭이들이 무한대로 타자를 친다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써낸다고 하는 건,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하는 것과 반드시 그렇다고 하는 것이 다를텐데, 지금의 과학자들은 반드시 그렇다고 주장하는 격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세조정이 바로 지적 설계의 증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지적 설계자가 있다고 미세조정을 한 우주만을 시뮬레이션하라는 법은 없듯이, 다채로운 다중우주가 지적 설계자가 없다는 걸 증거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바로 그와 역인 논리로 미세조정이 지적 설계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바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또한 불가지의 영역이다. 게다가 우주와 인간이 하나라는 주장까지 나아가면, 인간의 주관과 억측이 마음대로 지적 설계자를 단정하고 그와 인간은 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격이다.

 

유대의 카발라 철학에서는 신이 자신을 한정 지으며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논리를 인공지능이 탑재된 양자컴퓨터에 대응해 인공지능이 우주를 시뮬레이션한다고 해도, 미세조정을 통해 하나의 우주만을 창조할지, 모든 가능한 경우의 수에 우주를 다 창조할지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양자컴퓨터의 용량과 성능이 무한하다면 어느 경우든 불가능한 경우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공지능이 자신이 창조한 우주에 인간을 디자인한다고 해서 인공지능과 인간이 동일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홀로그램 우주론에서는 부분과 전체가 거의 동일하다는 식이지만, 그저 단순히 부분의 총합이 결코 전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 더 수용하기 쉽지 않나 싶다.

 

그리고 저자는 결정론을 배격하는 데, 양자역학을 들어 시간과 공간에 대해 논하는 모든 저작들처럼, 저자 역시 비선형적 인과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홀로그램 우주론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이야기하는 논리를 결정론에 대입한다고 빗나간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미세조정 우주든 다중우주든 통으로 다 만들어진 인과를 가정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양자역학이 과연 결정론을 부정하는 논리로 완벽한 것인지는 논의가 끝난 시대 같지만, 생각을 더 해보면 완벽한 부정은 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양자역학을 처음 접한 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우주와 인간, 인과 등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주장들을 폭넓게 대할수록, 양자역학이 말하는 가능성을 능가하는 거대한 구조가 따로 있는 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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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하는 뇌 - 뇌를 재구성하는 과학적 마음 훈련
다니엘 골먼.리처드 J. 데이비드슨 지음, 미산 외 옮김 / 김영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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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한지 11개월이 넘어서야 독서하게 된 책이다. 이 분야가 최애 분야이긴 한데 최근 들어 전쟁과 안보, 사회, 미래 예측 분야가 유독 관심이 가서 그런지 최애 분야에도 다소 어정쩡하게 대하게 된 듯하다.

 

본서는 수행과 뇌 과학이 크로스오버한 분야이다. 이런 류의 책들은 대게 두 종류인데 하나는 수행(특정 분파의 수행 안내나 수행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는 저작)이 주가 되고 뇌 과학 정보가 부수적이다시피 한 류가 있다면 다른 경우는 수행자의 뇌를 근간으로 수행시 뇌의 변화를 설파한 류이다. 전자의 경우 대표적으로 [붓다 브레인]이라는 책이 있고 후자로는 [마음챙김이 만드는 뇌 혁명]이라는 책이 있다.

 

본서는 내용 면에서 뒤에 언급한 책에 가깝다. 하지만 그보다 쉽고 간결한 내용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자들의 연구 역사를 다루는 에세이 형식이기도 하다. 저자들의 연구 역사가 수행 분야의 뇌 과학적 성취가 일궈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뇌 과학 분야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더더욱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학술적 내용 면에서는 대중성을 고려해 전문적인 내용이 간략히 압축되었거나 서술이 길지 않고 간결한 편이다. 그래서 보다 상세한 자료로서의 기능을 원하시는 분들께서는 약간의 실망이 있을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마음챙김이 만드는 뇌 혁명]의 내용이 보다 대중적으로 풀어지며 서술되었다는 감상이 들지만, 구체적인 자료가 고프신 분은 본서보다 그 책이 나을 것이다. 다만 그 책은 마음챙김 한 분야에 대한 자료적 역할에 치중했다면 본서는 초월명상, 만트라, 요가, 마음챙김, 자비 명상, 위빠사나 등등 좀 더 다양한 수행의 수행자들이 연구대상이었다고 언급되는 것이 다를 것 같다.

 

본서를 읽고 나서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 [붓다 브레인], [마음챙김이 만드는 뇌 혁명]을 다시 훑어보며 정리하게 되었다. 오래전에 읽은 책들이라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면도 있겠으나 독서 당시에도 익숙치 않은 뇌 각 부의 명칭과 호르몬 용어들로 이해에 지장이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이번 기회에 다시 정리하며 필사하자(필사하는 경우는 꽤 드물지만) 본서의 요지와 각 저작이 주력해 전하고자 했던 핵심이 무언지, 수행 애호가로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정보들은 무언지 알 수 있었다. 필사한 걸 다시 블로그에 옮기려 했는데 분량은 아주 많은 편이 아니긴 하지만 번거롭기도 하다. 필사한 건 틈날 때마다 다시 보는 정도에서 만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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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도를 말하다 오쇼의 장자 강의 2
오쇼 라즈니쉬 지음, 류시화 옮김 / 청아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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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리뷰에 이 책에 대한 포스팅을 하기 시작한 시점을 보니 20208월경이었다. 3년 가까이가 걸려 오늘 아침에서야 다 읽은 책이다.

 

처음 읽을 때와 지금의 감상이 같은데 나로서는 오쇼가 다소 여러 스펙트럼 중 한가지 빛깔에만 의지한 강설을 이어갔다고 생각되었다. 그건 깨달음이라는 하나의 빛깔이다. 하지만 의외로운 건 그가 조르바 붓다의 경지를 주장했던 이였다는 것이다. 세속의 기쁨을 만끽하는 존재인 조르바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붓다, 이 둘을 하나로 융합한 새로운 인간 세대의 등장을 예견하고 주장해온 것이 오쇼 라즈니쉬이다. 그럼에도 그의 대부분의 강설이 담긴 저작들을 보면 그가 그려내고 있는 빛깔은 대개 깨달음에만 한정되어 있다.

 

그는 사람을 한정짓거나 한가지로 특색으로 분류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가르침들은 각 분야의 성현들의 가르침을 한정된 색으로 한정짓고 있다. 장자의 시대는 제자백가가 다채로운 설법을 이어가던 시대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나름의 색과 맛이 다르지만 서로를 아우르기도 비판하기도 하면서 서로의 주장이 어느 시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이거나 통용되는 것이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쇼는 깨달음의 색이 아닌 것은 부정하고 있다.

 

가진 자는 더 가질 것이요. 가지지 못한 자는 그 지닌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던 예수님 가르침은 그가 말한 가진 것이 진리이거나 신앙이거나 진실성이 아니라고 한다 해도 세속적인 가르침으로도 진리일 수 있다. 진정한 진리는 성과속을 아우를 수도 성으로 속을 담론하기도 속으로 성을 가르침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물론 예수도 붓다도 그들의 가르침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예수는 그가 사랑하던 유태인들에게 배척당한 결과 십자가형을 피할 수 없었고 붓다께서도 그의 아기를 임신했다며 그를 매도하는 여성도 붓다의 법왕 자리를 빼앗으려 그를 살해하려던 그의 사촌 형제와 그 무리들도 있었다. 어떤 가르침이 옳다해도 그 가르침을 설한 사람이 모두 인정받거나 수용되지 못하는 경우는 흔할 것이다. 하지만 오쇼의 가르침은 삶과 깨달음의 경지를 아우르려는 이의 가르침으로는 다소 흐릿해 보인다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는 살아있는 것은 한정지어선 안되며 지혜로운 이는 존재 자체를 보지만 무지한 이는 행위를 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감각하고 만끽하는 것이며 감각과 만끽의 극치는 삶을 누리는 데 있다. 삶을 누린다는 것은 감각하고 만끽하는, 행동하는 것이다. 감각과 만끽의 정점은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만지고 향기 맡고 느끼고 표현하고 무언가를 행하는 그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도가에서는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는데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것을 꺼리는 도가의 이 가르침에서 오쇼는 행동 자체가 나쁜 것이라는 오해를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말도 행동이고 노래도 행동이고 춤도 행동이고 섹스도 행동이다. 감각 모두가 행동이 아닌 것이 없다. 행동을 떠난 어디에서 존재를 찾을 것인가? 명상이나 탄트라 어느 하나 행동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개념이 잘못되었다고 느껴지게 만든 건 결국 그의 어휘 선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작위적이고 극단적인 거슬림을 만들기 보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느끼는 자체에서 만족을 얻으라는 말을 그는 하고 싶었던 걸일 거다.

 

그리고 오쇼는 크리슈나 무르티처럼 사회보다 개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회 이전에도 사람은 존재했다. 15년을 무인도에서 생활하다 구조된다고 해서 그 무인도에서의 15년이 삶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살아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은 집단과 사회의 가치 유무보다 선행하는 것이리라 본다. 하지만 크리슈나 무르티의 말처럼 변화하는 데 사회나 정부의 역할, 정치가의 목표나 의지를 신뢰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쇼의 생각도 크리슈나 무르티와 크게 다르지 않던데, 인간의 삶은 자신의 변화나 한 사람의 변화가 거대한 변화를 주도하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상식으로 자리 잡는 변화의 요소는 그것이 개인의 상식과 정서, 관점, 관념 등을 통제하기도 한다.

 

대중 누구나가 가장 먼저 체감하고 인식하는 성윤리와 성적 정체성 문제만 보더라도 한 개인의 관점과 관념이 사회적 상식에 영향을 적지 않게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1980년대의 게이에 대한 인식과 대우 그리고 현시대의 게이에 대한 그것의 차이를 본다면 더욱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 미국의 WOKE라는 것이 가져온 부정적 사회변화는 미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체감할 것이다. 정치와 사회의 변화는 개인의 시각과 관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부정적 영향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 변화도 불러올 수 있다는 것도 짐작 가능하고 그리 유도할 수도 있는 문제다. 사회라는 것은 결국 낱낱의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는 곳이니 사회도 정치도 관심 가질 필요 없다는 인식은 결국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일이다.

 

자연과 개인과 사회는 얕게 보면 따로 인듯 할지 몰라도 그 깊이에서 분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사회라는 것이 어찌 보면 인간이 만든 자연에 다름 아닌 것이니 말이다. 오쇼가 주장한다는 조르바 붓다가 되고자 하는 이라면 사회에 관심 가질 필요 없다”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몰입하면 된다” “사회가 아니라 자연과의 합일만이 중요한 것이다라는 시각만으로는 빗나가고 있는 것일 것이다. 아마도 오쇼가 말하고자 한 바도 그건 아니었을 거라 짐작된다.

 

만끽하고 감각하며 기뻐하는 존재이면서도 내적 평온을 한결같이 잃지 않는 존재가 오쇼가 바라던 인간상이라면 인간이 만든 자연인 사회까지를 포함한 모든 자연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와 행복은 부정이나 배제에서 오는 것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 오쇼가 살아있었다면 그의 강설 중 오해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대목들에 대해 좀 더 다른 빛깔의 부연 설명이나 자신의 말에 대한 교정을 하였으리라고 본다. 죽은 오쇼의 말을 고정하고 박제하여 관행에 빠진 답습만을 하기보다는, 살아있는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진리가 무언지 몰입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 순간의 리뷰에 남긴 본서의 연작 리뷰


있는 그대로는 닦고 닦는 와중에 찾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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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 지혜를 품은 책 7
디터 뤼게베르크 엮음, 정은주 옮김 / 좋은글방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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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이론과 이론적 체계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는 기회이기는하다.

다만 지성적으로 접근하는 대상, 이를테면 영성의 한 부분들을

양과 질의 차원에서 해설한다던가 하는 대목에서 이해가 쉽지 않기도 하다. 

 

서양의 마법체계와 동양의 수행체계 사이 이론의 충돌이 있다면 

나로서는 동양의 전통을 더 깊게 숙지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마법분야라도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마법을 수행하는 분들은 다양한 사고와 이해의 깊이를 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본서를 읽어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으나,

본서의 내용만으로 이해의 폭과 깊이로 삼겠다는 건 심각한 오류라 생각된다.

 

그저 참고용이라는 감상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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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의 발견 - 믿는 것이 현실이 되는 마인드셋
데이비드 롭슨 지음, 이한나 옮김 / 까치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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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짧은 소개글만 읽고도 끌린 책이다. 플라세보 효과와 노세보 효과를 논하고 신경가소성에 대한 언급이 있기에 신념과 그 실현 원리를 다룬 책이리라 짐작하고 책에 끌렸다. 인간이 믿는 대로 실현되고 생각하는 대로 실천하는 대로 뇌도 변화한다는 것을 [꿈을 이룬 사람들의 뇌]라는 조 디스펜자 씨의 저작을 통해서 인식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이 신사상 또는 새생각으로 불리는 [씨크릿]류의 가르침과는 다르리라는 것은, 저자가 그런 가르침들을 유사 과학이라고 단정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데, 책을 대하는 마음은 그런 사상들에 대한 관심과 유사한 흥미를 유지하며 읽게 되는 경우가, 나 외에도 많을 것이라 짐작된다. 기대한 대로 이뤄진다, 바라는 대로 실현된다는 주제이자 결론이 그런 오해를 불러오기에는 충분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분명 본서는 착시효과, 플라세보 효과, 노세보 효과, 피그말리온 효과, 자기충족적 예언등 상식적인 심리 정보들이나 신사상적 이론으로 발전 가능한 원리들을 담론하고 있는 책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신사상과의 차별점이라면 이 책은 초월적인 주의나 사상을 논하는 게 아닌 상식적이고 심리학적인 논리와 관점으로 해당 주제를 천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이나 합리주의 이상으로 논지를 전개해서 억측이나 논리적 비약을 불러오는 저작은 아니다. 저자는 앞서 말한 심리학적 상식들을 포괄하는 개념을 기대 효과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 모든 현상이 사람의 기대를 통해 그 기대가 충족되는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라 보고 있다.

 

들어가며에서와 그 이후 장들 중 앞선 몇 장에서 언급되는 사례 몇몇에서는 이의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1970년대 후반 미국의 라오스 이민자들의 원인불명 야면 돌연사증후군(SUNDS)이나 본 포인팅 또는 부두 죽음(voodoo death) 같은 경우는 심인성 질환이나 집단 이상심리가 원인인 것도 맞겠으나 그 이상으로 관점을 확장해 볼 수도 있는 문제다. 장 차원의 우주, 양자스프로 이루어진 우주에서 소수든 다수든 집단의 일관된 상념이 특정한 영향력을 불러오는 장 차원의 힘을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가정도 해 볼 수 있다. 이런 초월심리학적 해석은 아직까지는 주류 학계에서 유사 과학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기에 객관적이며 학술적인 견지를 유지하려는 본서에서는 어쩌면 몰라서 배제한 서술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집단히스테리나 집단 이상심리로서 분류한 무도광(14세기에서 17세기 동안 있었던 사람들의 장기적인 집단 춤을 불러온 사례들)의 경우 본서에서는 맥각 중독이라는 설도 있다고 짧게 언급하고 지나가지만, 맥각균은 LSD라는 마약의 원재료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맥각균을 정제해 LSD가 제조되었다. 요즘의 좀비마약이라는 어느 신종 마약의 경우 중독자가 관절을 꺽고 고개를 점층적으로 꺽는 등 신체적 이상 동작을 보이기도 한다. 중세시대의 유럽인들이 맥각균에 의해 이상 동작들을 보인 것이 무도광의 사례로 보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과거의 사례이기에 검증 불가능하니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반면에, 그렇다면 맥각 중독이 원인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저자는 심리적인 이유라는데 더 무게를 두고 주장을 이어나가고 있다.

 

또 하나는 2016년 쿠바 아바나에서 CIA요원들이 보인 이상 증세들을 저자는 이후 뚜렷이 음파 무기에 의한 공격 등으로 해석할 증거를 찾지 못했으니 심리적인 이유였을 것으로 단정 짓는 것도 억측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건 닉 베기치라는 과학자 분의 [Controlling the Human Mind: The Technologies of Political Control or Tools for Peak Performanc]의 역서 [누가 인간을 조종하는가]라는 저작이 과거 출간된 적이 있는데 그 책에는 전자기파로 인체의 기능과 심리를 제어하던 기술이 1970년대부터 이미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러 있었음을 과학적 원리와 함께 실제 연구 역사와 실례를 전하고 있는 저작이다. (닉 베기치 씨부터가 하원의원과 정치운동가인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 연방정부에서 해당 분야의 과학 연구에 매진해온 인물이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전적은 없지만 이미 미국의 대중 인체와 심리통제 기술이 정점에 이르러 있음을 지적하고 널리 알리며 경계하는 과학자들의 저작과 정보가 적지 않다. 아바나 사태도 미국이 이미 보유한 기술을 상대국이 사용했기에 그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공론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 정보당국이 더는 수사하지 않고 무마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사실관계가 공표되기 전까지는 확언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렇더라도 다른 경우의 수라고만 단정 지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닐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심리가 원인이라는 주장만이 진실이고 다른 가능성은 절대 없다고 단정 짓는 것도 과학적인 사고나 주장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외의 예들은 대체로 공감하기 쉽고 수긍하기 어렵지 않은 주장들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 와서는 상식이다시피한 관점이 되어버린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플라세보와 노세보 효과를 언급하며 저자는 인간의 성향을 예측기계와 같다고 까지 단언하기도 한다. 자신이 기대하는 것을 구현해내기에 자신의 예측을 실현하는 기계와도 다를 바 없다고 확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대중적 상식이 되어버린 플라세보 효과와 노세보 효과의 원리는 이 저작 전체의 사례에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착시 효과도 듣는 것도 느끼는 것도 맛 보는 것도 인간이 단정 지은 것을 반영하는 이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기대를 하게 되면 그저 얼룩무늬에서도 기대하던 패턴을 읽게 되며 백색소음을 듣기 전 힌트만 주면 특정 음악을 배경음으로 들은 착각을 하기도 하며 미미한 색소나 향만 첨가해도 같은 맥주를 월등히 뛰어난 특급 맥주로 착각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런 기대를 충족하는 원리가 플라세보나 노세보 효과를 낳고 그건 전 영역으로 확대되어 다양한 효과들을 일어나게 한다.

 

10장 구조의 본서에서 1~4장까지는 저자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논리와 원리를 소개하고 자리잡게 하는 장이라면, 5~10장은 일상에서 이러한 기대 효과가 미치는 영향력을 전개하고 있다. 스포츠에서 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량을 높이기 위해 플라세보 효과를 이용하고 실제 적용되어 성취를 이루었던 사례를 전하기도 하며 다이어트나 건강식의 효과와 역효과(노세보 효과)를 분자생물학적 정보를 통해 전달하기도 한다. 스트레스에 대한 태도 변화가 실제 스트레스의 작용에 영향을 주는 경우를 생리적 차원에서 설명해주기도 하며 남녀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수학과 물리학 등에서의 학업성취도가 자기 가치 확인이라는 특정 과제에서의 해결력만으로 자신의 전체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로 자기 전체 능력을 무시하지 않는 태도를 보임으로서 현격하던 남녀학업성취도가 근소하게 바뀐 경우를 예로 들고 있기도 하다. 이미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교사의 고정관념을 바꿔주는 것만으로 열등생으로 분류되던 학생들의 성적이 뚜렷이 상승하는 경우들도 소개되고 있다. 인정받는 아이, 자기긍정할 근거를 마련해 준 아이들은 스스로 성취를 이뤄나가게 된다. 자신에게 스스로 기대할 바탕을 갖게 해주어야 아이들도 성취를 이루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노인들도 자신의 나이 듦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운동기능과 시력, 청력 등의 인체 기능, 호르몬 분비량과 기능을 유지하느냐 잃느냐 하는 차이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모든 경우가 다 자기에게 어떤 기대를 하느냐에 따라 실현된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며 주장이다. 모두 수긍이 가고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되었다. 다만 플라세보 효과나 노세보 효과의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수긍하게 되다 보니 이런 논점을 제약회사가 부작용의 사례에 적용하려 들면 어떡하나, 제약회사들에게 후원을 받는 심리학자들이 이런 심리학적 결과들을 제약회사를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의도로 악용하면 어떡할까 하는 우려도 들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의약품이 무언지 모르고 복용하더라고 우리 몸에 작용하기도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는 게 의약품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는다는 것만으로 다른 대상의 풍요를 불러올 수는 없다는 말이다. 대부분 노세보 효과가 아니더라도 의약품은 기능을 하며, 우리가 멸종하면 안 되는데 라고만 생각한다고 해서 특정 동물군의 멸종이 멈춰지지는 않는다.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 경우의 수가 삶에서는 더욱 많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관점이 또 부정적 영향에 대응하는 리프레이밍이 보다 나은 성과를 가져온다는 것도 분명하기에, 이 책은 확실히 우리에게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는 책임에 명백하다.

 

신사상과도 같은 심리효과를 기대하며 선택한 책이었지만 상식에 한 층을 더 쌓는 경험이 되었다. 유익하고 유용한 독서 경험을 가져다준 책이다. ‘현고학생부군신위라는 말은 차례를 지내는 집이라면 모를 수 없는 말인데 언제나 사람은 배우는 학생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두었음을 알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기대 효과는 아기부터 노령의 어르신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이 광범위한 효과이다. 이런 효과의 부정적 영향력을 받지 않으려면 긍정적 영향력을 확장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연령을 떠나 누구라도 학생의 위치에서 세상을 보아야 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정관념만으로는 쉽게 늙고 빠르게 의식도 생명력도 고갈될 수 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죽음까지도 이르게 닥칠 수 있는 것이다. 배우고자 하는 자세와 나는 제자이다내지는 나는 학생이다라는 태도는 삶이 끝나는 날까지 유지해야 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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