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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겐 거울상 뉴런이 있어 남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할 수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삶 속에서 만나는 누구나가 공감능력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건 조금만 인생을 살아보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사람에게 베인 상처는 당사자 자신에게도 절반의 책임은 있다고도 말들 한다. 그런 말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이상적인 인생이 설계되어 살아온 사람이거나 유년기에 충분히 홀로설 수 있을 에너지를 충전 받고도 자신은 자각 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 부터 몇년 사이는 아기가 자신의 자력으로 마주할 사람을 선택할 수 있거나 자신의 성장에 유익할 보살핌만을 골라서 누릴 수 있을 그런 여건이 되지 못한다. 그러고 치명적인 것은 바로 이 시기에 우리가 인생의 대부분을 이겨내고 버텨내고 누릴 근원적 바탕을 이루는 시기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 절망적인 인간들을 접하게 되고 절망적인 방치의 시간들을 보내게 되어버리면 그걸 어찌 아기에게 탓을 물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 시기의 폐해들에 노출되고 나면 그걸 상쇄해버릴만한 인간관계와 보살핌을 다시 겪지 못하면 당시의 트라우마로 부터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게 인간이다.


사람들은 생의 기쁨과 선물만이 아니라 절정의 고난에 까지도 자신에게서 책임과 원인이 있는 거라고 세뇌를 하려고들 든다. 하지만 한사람의 생은 그와 마주친 무수한 사람들과 환경들의 영향, 교류등에서도 원인과 책임이 있는 것이지 온전히 그 모든 것을 취사선택하지 못한 개인에게만 탓이 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이 시작되는 아기의 예에서 들었듯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만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에 던져지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 친척만이 아니라 아기 때는 자신의 이웃마저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으며 일반적인 경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남자라면 군대에서 동기와 선후임들도 사회인이 되어서는 직장 동료와 상사등도 스스로의 선택만으로 달라질 수 있는 방향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에 피해자가 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을 아기나 아이 학생이나 군인에게 직장인에게 그러한 탓을 100% 온전히 물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사회는 이상하리만치 개인의 역량과 책임에 무게를 지나치게 부여한다. 모든 것은 너의 탓이다. 더 나아가 종교나 미신에 따라 하다하다 전생의 니 잘못 탓이라는 탓까지 등장한다. 


이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내 책임이라고 하고서야 안도할 수 있는 심리가 더 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세상 모든 것이 나의 탓만도 남의 탓만도 아니라 하나의 인연의 탓일 수 있다. 


내 생의 초창기에 그런 부모, 그런 친척, 그런 이웃, 그런 보모를 만나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겪었다면 그들 역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바탕을 지니게 된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나와 그가 만나 내가 피해자가 되었듯 그와 그의 어떤 원인이 만나 그도 그런 인간이 된 것이리라.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과 하와가 있을지 천지인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불완전함은 세대를 거치며 전승된 것이지 싶다. 


하고싶은 말은 사건에 사고에 피해자가 된 자신에게서 피해자가 된 원인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나를 가해한 가해자 또한 그의 생에서는 그가 피해자인 순간이 그를 그리 만들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저 그와 당신의 인연... 만난 것이 원인이요 주어진 바탕들이 조건이었을 그런 것이 사고 사건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세상 모두를 이해하고 포용하라는 말이 아니다. 어찌 납득 불가한 모두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겠나? 그냥 자기 탓을 멈추고 남의 탓이라면 남이 원망스러운 순간들이 끝나기까지 원망하고 원망이 사그라질 때 쯤에는 그 또는 그들도 피해자인 순간이 있었고 그런 순간이 그들을 그리 만든 거란 걸 수긍할 수 있게 되는 순간에 수긍해 버리고 잊으라는 말이다.


그것이 한결 당신의 마음 건강에 나을테니 말이다. 자신을 탓하는 것도 남을 원망하는 것도 세상 속에 펼쳐진 지옥 중 하나에 들어서는 일일 수 있으니 벗어날 수 있다면 벗어나야 한다. 


당신 탓이 아니다 원망해야할 순간에 한없이 원망해도 좋다. 하지만 그런 원망이 말라가는 날이 온다면 가해자도 이해해 버려라..... 그것이 당신을 지옥에서 자유롭게 하는 길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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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법을 11월인가 12월에 발의하겠다는데 설리법이라는 인터넷실명제가 제정이 된다해도 과거 인터넷실명제를 실행했을 때의 전적으로 보아 악플 감소의 효과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실명제이기에 네티즌 개인들의 정치성향 행적 등을 손쉽게 빅데이터화해 대중통제 감시를 합법적으로 하는 구실만 될 뿐이다. 


정말 자살자를 막고자 하는 거라면 해당 기사나 글에 댓글을 달 때 자음 모음 마다나 글자수 대로나 요금을 부과해서 할 일 없는 인간들이 쓸데없는 목적의 악성댓글을 올리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편이 나은지도 모른다. 굳이 실명제가 아니더라도 현재 악플에 소송을 걸고 있는 상황인데 실명제로 굳이 바꿀 이유가 없지 않나? 


그보다는 댓글의 글자수 대로 요금 부과하여 악플감소를 유도하고, 공감 비공감에 대한 아이디 추적 가능하게 바꿔서 악플로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이 손쉽게 소송을 걸 수 있도록 바탕을 깔아 주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다. 악플러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송과 구속이 이어지기 시작하면 그제야 악플이 감소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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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의 삶도 비애와 고통만으로 낭자해서는 안될 일이다. 

누구라도 슬픔과 아픔만이 아닌 질펀한 기쁨과 즐거움의 삶도 맛보아야 한다. 

하지만 아픔만이 한가득일 때는 이런 꿈도 꿀 수가 없다. 

아픔이 상처가 그저 흉터로 남는 그런 순간이 와야지만 오늘도 내일도 향기를 띨 수 있게 된다. 

당장 아파하는 사람에게 섣부른 충고는 그의 아픔이 참담한 지경일 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세월이 흐른다고만 그 상처가 여려지는 것도 아니다. 

아픔 속에서도 아픔을 뚫고 흐르는 동안에 아픔이 흉터로 아물어 갈 수 있을 계기가 와주지 않는다면 

세월만으로는 부족하다. 

너무 아픈 동안에는 자신의 아픔에만 몰입되어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할만한 여력도 남지 않게 된다. 

아파 본 사람은 남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지만 당장 아프고 있는 사람은 공감할만한 남은 힘이 없다. 

내 상처에 환부에 칼을 찔러 넣는 동안에는 다른 이의 상처가 보일 수는 있어도 공감되지 않는다. 

상처가 도려내어질 계기 상처가 아물어 갈 계기 그런 계기가 없이는 그저 폐인일뿐이다. 

그런 계기는 결코 내가 만들지 못한다. 사람이 신이 운명이 연기처럼 흩뿌리고 가는 그런 순간이 있지 않고는 아무리 아파도 나을 수가 없다. 

음악이 그림이 시가 영화가 연극이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경험 상 아는데 자신이 참여자라면 모를까? 청취자나 관람객이나 독자나 시청자나 관객이기만 해서는 아물지 못하는 깊은 상처들이 더 많다. 


그러니 사람과의 대화와 신의 은총 같은 운명 같은 계기가 찾아들 때까지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대상에는 참여해 나가는 편이 낫다. 폐인이 되어 그 상태로 머물러 있으려고 해서는 상처는 흉터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견딜 수 없어도 살아내야 한다. 죽음이 안식이 될지 지옥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기에 살아있는 순간을 굳이 죽어있는다거나 죽어버리는 상태로 상전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살아라 살면서 대화할 수 있을 사람들이랑은 대화하고 해볼 수 있을 일들은 해보고 그리고 꿈꿀 수 있다면 어느사이엔가 상처는 흉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어디 즈음 너를 치유할 계기가 숨어 있는지 다시 살아나게 할 운명이 흩뿌려져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니 살아라!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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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브레이커블과 연작이라고는 하지만 딱히 전작을 먼저 볼 필요는 없다. 

전작과의 이어짐은 납득하기 싫은 종류의 세계관이랄까 인간관 밖에는 없으니까...


언브레이커블의 글래스는 자신과 대극을 이루는 수퍼히어로를 찾는 빌런이었고

23아이덴티티의 비스트는 고통 상처 순결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갖는 광기의 빌런이다.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이 위대함은 성취된다거나 상처입은 자만이 더 진화된 존재라는 일장연설은

그다지 신뢰도 가지 않는 광기일뿐이다.


고통과 상처가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그 밀도가 인간이 버틸 수 있을 선 만큼에서 일뿐이다. 

선을 넘은 고통과 상처는 인간을 정체시키거나 퇴행시킨다. 

더 짙은 고통과 상처는 인간의 육신과 의식을 고갈시키다가 종래에는 자신에게서 주변인들로 고통이 전파되거나 자신 또는 자신을 포함해 자신과 관련있거나 관련없는 다수의 죽음을 불러오는 극단적인 상황도 가져올 수 있다. 


감독은 아마도 상처받은 이들의 특이함과 광기 둘다에 매료되어 있는듯 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만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의 대사가 직설적으로 해석하라고 주어지는 것은 아니리라고 생각된다. 


성난 파도가 유능한 뱃사람을 만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버텨낼 수 있을 한계치를 넘어선 파도는 배를 침몰시킬 수 있다. 인간은 소소한 행복 속에서 차츰 성장해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성장의 길이 아닌가 한다. 성장... 그것은 또 무엇이 별다른 짓이겠나 인간은 성장만큼이나 행복하려고 살아가는 것이다.



23 아이덴티티 (Split,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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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7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7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 장르를 액션과 SF라고 분류하여 네이버에서 평점 테러 당하고 있는 그 영화다. 

이 영화를 괴수출현 치정극이라 말하는 사람까지 있던데 정말 영화도 입장객 많이 받으려고 장르 분류를 막해버리면 제대로 만든 영화도 망작으로 찍힐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 영화는 여성의 개성화 과정과 홀로서기를 그리고 있는 영화로 나름 秀作이라고 생각된다. 

괴수 출몰지를 일본으로 가정하고 작업을 했다가 일본에서 협조를 거절하자 한국으로 옮겼다는 낭설인지가 있던데 출연자들이 서울을 소울이라고이라고 발음할 때 부터 더욱 괴수출몰지의 선정이 바르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전남친 팀과 오스카는 그녀의 이드와 아니무스를 상징하는 존재들이라 생각되고 그녀의 정체성의 혼란을 설명하는 상징이리라 여겨진다. 그녀의 불안정한 일상을 그녀의 이드(남친 팀)가 검열하고나서 그녀는 그녀의 의식(고향)으로 향하게 된다. 그후 그녀가 가장 처음 만난 것은 오스카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그림자인 괴수를 자각하게 된다. 이후 오스카와 팀의 만남으로 그녀 영혼의 연금술적인 흑화는 정점을 이루게 되고 오스카 역시 그녀를 통제하려하는 부정적 아니무스임을 깨닫게 된다. 그녀가 그녀의 심층의식인 서울(soul)을 향해 그녀의 영혼 내부(서울)에서 또다른 그녀인 그녀의 그림자(괴수)를 제어하는 것(합일한 것)과 자아의 부정적 측면인 오스카를 처리하는 과정으로 개성화를 이루는 것을 상징했다고 보인다. 여성의 내적 홀로서기를 그리는 상징으로서도 발군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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