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나무 아래 - 시체가 묻혀 있다
가지이 모토지로 지음, 이현욱 외 옮김 / 위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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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란 결코 학교의 행군처럼 견딜 수 없는 약한 사람을 행군에서 제외시켜주지 않는다. 마지막 죽음의 골로 갈 때까지는 어떤 호걸이든 겁쟁이든 모두 같은 줄에 서서 마지 못해 질질 끌려가는 것이다."

- 가지이 모토지로의 <벚꽃나무 아래> '태평스러운 환자' 가운데 -



사물이나 사실을 가지이 모토지로(梶井基次郎)처럼 세심하고 다정스럽게, 한편으로는 냉정하고 괴기스럽게 바라볼 수 있을까. 온힘을 다해 감정을 담아 가까이 다가선다. 그 다음에 소화가 되건 말건 내면 깊숙이 끝까지 밀어넣어 글로 토해낸다.


가지이 모토지로의 <벚꽃나무 아래>는 12개의 단편으로 구성됐다. 결핵으로 요절한 자신의 이야기로 비치는 '태평스러운 환자'부터 '레몬', 'K의 죽음'을 거쳐 '게이키치'까지 우울, 허탈, 빈궁, 집착, 분노, 포기, 좌절과 같은 심리와 현상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출판사의 말대로 '섬뜩하리만큼 아름답고 눈부신' 단편소설의 모음집이다.



'칠엽수꽃'에 등장하는 짧은 이야기다. 어린 여자아이를 태운 당나귀가 길을 가던 중 멈춰 서더니 오줌을 누기 시작한다. 주위에는 폭소가 터지고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당황한다. 그저 '귀엽고 웃긴 일'로 지나치지 않는다. 당나귀의 어린애같은 무례, 그리고 그 무례의 희생양이 된 아이의 귀여운 당혹 속에서 저자는 불쾌와 불안,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탓한다.


파리와 일광욕을 하면서도 태양을 증오하는 남자. '겨울파리'는 온천여관에서 요양중인 남자의 사연을 그렸다. 아무 이유없이 여관에서 벗어나 깊은 밤 산길을 해메게 된 남자는 "걸어라, 걸어라.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걸어라."며 잔혹할 정도로 자신을 채찍질한다.  자신의 방황 탓에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버린 파리를 보고 우울함을 느낀다. 죽음이 슬퍼서가 아니라 자신에게도 삶과 죽음을 두고 변덕스러운 조건이 있을 것 같아서.


황금색으로 빛나는 무시무시한 폭탄이 된 '레몬', 그림자에 자신의 생명을 옮겨 달과 이어지고자 했던 'K의 죽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진 벚꽃의 비밀을 알아낸 '벚꽃나무 아래' 등 금세 터질 것만 같은 이야기가 아무런 동요없이 흘러간다. '벚꽃나무 아래'의 첫 문장 "벚꽃나무 아래 시체가 묻혀 있다(桜の樹の下には屍体が埋まつてゐる)"는 정말 강렬하다.



'눈 내린 뒤'는 묘한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짐수레를 끄는 소가 목적지에 도달하자마자 새끼를 낳아 버린다. 어미 소는 저녁 무렵까지 오랫동안 휴식을 취한다. 나중에 가만 보니 멍석을 깐 짐수레에 새끼가 타고 있었고, 어미 소는 짐수레에 매여 있었다. 그리고 어미 소는 다시 짐수레를 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남자는 만삭이 된 아내가 머물고 있는 골목길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길 수밖에. 


<벚꽃나무 아래>에 담긴 단편들은 우울하고 불안하다. 놓여진 단어와 문장은 두어 차례 다시 확인하게끔 한다.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잘될 거야." 무심코 툭 던지듯 그렇다. 가지이 모토지로는, <벚꽃나무 아래>는 독특하다.(*)


* 컬처블룸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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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왕 - 정치꾼 총리와 바보 아들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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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리가 대학생 아들과 몸이 뒤바뀐다. 총리의 몸속에 들어간 철부지 아들의 좌충우돌, 졸지에 대학생이 되어버린 총리의 '세상 알아가기'가 시작된다. 황당한 설정을 통해 이끌어내는 현실 정치를 대한 신랄한 풍자가 통쾌하다. '정치꾼'과 '정치가'를 확실히 구분지어 준다. 이케이도 준(池井戸潤)의 <민왕(民王)>, 민의가 왕이다.


내각지지율이 바닥을 헤매는 가운데 현직 총리가 갑작스레 사의를 표명하고, 정치 9단 무토 다이잔은 자신에게 일생일대의 기회이자 위기가 다가왔음을 직감한다.  '화재는 최초의 5분, 선거는 최후의 5분이 승부의 갈림길'이라는 정치권 속설처럼 보좌관 가이바라와 치열한 작업끝에 민정당 총재에 당선, 총리 자리에 오르는 다이잔. 



"애초에 너 같은 사람은 정치가가 될 수 있는 그릇이 아니고... 웃기는 소리 작작해.... 너처럼 머리가 텅빈 사람이 정치를 하면 우리 국민이 불행해지거든." 당 지지율상승과 정권 유지를 위한 걸음을 떼려는 찰나 환청과 같은 소리와 함께 아들과 몸이 바뀌어 버린다.


어이없기는 아들 무토 쇼도 마찬가지. 정치인의 길을 거부하고 '월급쟁이'를 선택했지만, 한순간 '총리님'이라 불리며 야당의 공격에 맞서야 하는 몸이 된다. 쇼가 의회연설에서 한자를 제대로 읽지못하는 장면은 실제 일본의 92대 총리 아소 다로(麻生太郞)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당시 이케이도 준은 "일본에 1억 수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는데, 왜 한자도 못 읽는 사람이 총리가 되어야 하는가!"라고 생각했다는 것. 현재 부총리 자리에 있는 아소는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옹호하는 소리를 내고 있다.


본의아니게 아버지의 '카게무샤(影武者)'가 된 쇼의 예상치 못한 활약은 일본 정치판에 충격을 주게 된다. '나가타초(永田町)-일본 국회와 주요 정당이 위치한 우리나라의 여의도와 같은 지역'의 낡은 모습과 다른 신선한 쇼의 등장은 유쾌발랄, 그 자체다.



'뇌파 교환' 테러라는 독특한 설정, 그리고 개성있는 캐릭터가 쏟아내는 블랙 유머는 <민왕>에 더욱 빠져들게 한다. 매력적인 딸과 몸이 뒤바뀌는 다이잔의 정적 구라모토, 변태적인 스캔들에 허우적거리는 맹우(盟友) 가리야, 쇼의 친구이자 사업가 마이 등 각 캐릭터가 가진 배경과 비밀은 책이 드라마 <민왕>으로 다시 제작되는 배경이 됐을 것이다.


유치하고 막무가내로 진심으로 세상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올바른 마음으로 살면서 모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가는 정신을 가진 정치인. 그리고 정계의 논리에 칭칭 얽매어 '정치를 위한 정치만을 하는 직업 정치꾼'. 이 둘을 구분지어주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가장 존엄한 그것, 본질적인 따뜻함'임을 <민왕>은 강조한다.



"지금의 나는 총리대신일지 모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까." 다이잔의 자성은 비단 책 속에서만 존재할 수 없다. 자타가 인정하게 된 우리네 '내로남불', 국민 앞에 부끄러운줄 모르는 꾼들이 판치는 그림은 현실이다. <민왕>이 정치꾼을 겨냥한 경고로 읽히는 까닭이다.(*)


* 컬처블룸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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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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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와 구조 거리에 대한 아만다와 다비드의 대화, 마지막까지 우리는 집중하게 된다. 특이한 구조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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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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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르헨티나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 과학과 의술을 믿기보다 주술과 신념에 의존하는 그 마을에서 이해하기 힘든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오리가, 말이 뻗뻗하게 굳어 죽어나가고 있으며,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수십 명의 기형아가 탄생하고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사만타 슈웨블린의 <피버 드림>은 독특한 기법으로 이 마을의 이야기를 풀어 낸다. 중남미소설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어린 딸 니나와 함께 시골로 휴가를 떠난 아만다는 마을에 살고 있는 이웃 카를라와 그녀의 아들 다비드를 만나면서 마을에서 풍겨나오는 원인모를 두려움 속으로 빠져든다. 매력적인 카를라로부터 '아들의 비밀'을 전해 들은 뒤부터 아만다는 의문스러운 일을 거듭 경험하게 되고, 현실과 환상 사이에 방황을 시작한다.


<피버 드림>은 병원에 누운 아만다와 다비드의 대화로 전체가 구성돼있다. 책 제목처럼 열병에 걸린 아만다가 병원에 오기까지 과정이 처음부터 둘 만의 대화로 진행된다. 독자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그리고 '아만다의 딸 니나는 어디에 있는지' 대화를 통해 풀어간다.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조차 모르겠어." - 아만다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 맞아요." - 다비드


둘의 대화를 관통하는 단어는 '벌레'와 '구조 거리'다. 아만다를 병원에 있게 하고 마을에서 번지고 있는 질병의 원인이 된 '벌레'가 무엇인지, 정확히 언제부터 나타나게 된 건지 다비드는 아만다의 기억 속에서 답을 찾아 간다. 또 아만다가 가진 유일한 의문인 니나의 현재 위치와 상태에 대한 추리는 독자의 몫이다.



<피버 드림>이 여타 미스터리물과 다른 점은 정확한 증명과 해설, 사실에 대한 묘사없이 정황과 대화만으로 독자가 상상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오리와 말의 죽음, 마켓에서 만난 아이의 울부짖음, 마을의 기(氣) 치료사인 녹색 집의 여인, 카를라가 다니는 농장, 트럭에서 내려진 무수한 드럼통, 니나가 뛰놀던 우물가와 이슬 등 충분한 정보를 저자는 대화를 통해 독자에게 전한다.


책은 아르헨티나가 안고 있는 환경 오염 문제를 가족 단위로 끌어내 더 큰 두려움으로 풀어낸다. "'곧 나쁜 일이 일어날 거야.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때 네가 가까이 있으면 좋겠어."라는 아만다가 전한 어머니의 말씀은 무경험의 공포가 닥쳤을 때의 '구조 거리'를 정확히 설명한다. 책의 원제역시 <구조 거리(Distancia de rescate)'라고 한다. 




두려움, 상실, 고독, 불통 등 다양한 면에 대한 두려움이 <피버 드림>에 나타난 대화 속에 가득하다. 가족 구성원, 특히 부모와 자식간에 느끼는 두려움이 전반에 흐른다. 옮긴이가 전한 슈웨블린은 "가족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환경"이라며 "그래서 기묘한 것, 비정상적인 것, 위험한 것이 우리의 가장 작은 사회적 단위인 가족을 덮칠 때 모든 것이 훨씬 더 무시무시해진다"고 밝혔다고 역자는 전했다.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아만다와 다비드는 서로 목적이 다르다. 아만다는 '구조 거리', 다비드는 '벌레'. 둘이 알고 싶어하는 것이 다르듯 "이건 중요해요",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서로 이야기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나뉘어 갈라져있는 대화의 마지막까지 우리는 집중하게 된다.(*)


* 리뷰어스클럽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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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을 봐! 라임 청소년 문학 48
안드레우 마르틴 지음, 김지애 옮김 / 라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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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로봇처럼, 어쩌면 영혼 없는 좀비처럼 가상의 세상에서 길을 잃은 복제 인간이 돼버린 아이들이 진짜 세상을 향한 탈출을 시작한다. 안드레우 마르틴의 <내 눈을 봐!>는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첨단 과학 문명에 중독된 사회, 그 안락함에 세뇌된 사람들을 통해 미래사회에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경고하고 있다. 책은 사람의 눈과 스마트기기의 스크린을 대조함으로써 '진짜'와 '가짜'를 구분한다.



스마트폰을 통한 네트워크로 '빅 브라더' 사회를 구축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고 있는 기업 트리플우베는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도시 그란우르베의 핵심 기업이다. 보다 많은 아이들을 통제하고 스마트폰의 노예로 길들이기 위한 음모를 펼친다. 무관심과 무감각, 복제와 반복에 갇힌 자신을 감정과 창조가 존재하는 세계로 이끌기 위한 비밀결사대를 꾸린 아이들은 트리플우베와 맞서 '자신'을 찾는 모험을 강행한다.


닐과 조르드는 스마트폰에 중독된 친구 아르다를 구출해 아이들을 치료하는 센터로 이끈다. 킴 박사를 중심으로 종이책을 읽고 열띤 토론으로 자아를 발견하게 하는 학교는 '기계로부터의 해방'이 힘들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인지 잘 설명하고 있다.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지?"

"상대방에게 직접 말을 해야죠."


스마트폰이 없으면 도무지 소통을 할 수 없을거라 여기는 그들에게 아이들은 너무나 당연한 답을 해준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있어 자신이 경험한 모든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법을 다시 깨닫게 한다. 스크린 속 하얀 바탕에 나열된 검은 글자들과의 대화에 빠진 인간, 너무나 쉽게 하면서도 한편으로 쉽게 깨버리는 약속이 난무하는 가짜 세상은 지나치게 비인간적이라는 점도 함께 알려 준다.



"내 눈을 봐

스크린의 포로가 되어 버리기 전에

널 다시 찾고 싶어

그 작은 스크린으로 넌 거짓 세상을 만나지

고통도, 기쁨도, 입맞춤도, 통곡도

탄식도, 아픔도 없는 세상을


내 눈을 봐

기회는 지금뿐

그 거짓 세상에 우리를 위한 자리는 없으니까"


책은 너무나 빠르게 사라져가는 '진짜 소통'에 대한 우려와 동시에, 인간과 사회에 진정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보여 준다. '스크린'이 아닌 '눈'을 통해 조금은 더딜지라도, 조금은 두려울지라도 '진짜 관계'를 형성하는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어른이 아닌 아이들을 통해. 


<내 눈을 봐!>에 등장하는 거대자본의 초연결도시 그란우르베, 가난하지만 인간미가 살아있는 도시 바리오 데 아바호, 그리고 그 경계에 있는 라프론테라 등 가상 도시에 대한 표현도 흥미롭다. 스마트폰에 파묻혀 고개숙여 걷는 사람들, '소통에 왜 말이 필요해, 말을 통해 침이 튀고, 침을 통해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거야'라는 캠페인이 작동하는 사회. 그 두려움을 잠시 느끼게 된다.(*)



* 컬처블룸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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