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포스트 모더니즘은 지난 20세기에 걸쳐 서구의 문화와 예술, 삶과 사고를 지배해온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기 모더니즘은 하나의 통일된 사조나 운동은 아니지만, 그 중심적 동기는 모더니즘을 통해 수립된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엄격한 구분, 예술의 각 장르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건축 비평가들이었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 유행하던 엄격한 사각형 형태의 양식에 대한 반발로 나온 건축물에 대해 쓴 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스트 모던'적 경향이 분화되지 않은 과거의 예술을 소생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시대, 다른 문화로부터 양식과 이미지를 차용하는 예술은 모두 '포스트 모던'의 자격을 얻는다.

모든 예술영역 중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영역이 건축이다.
포스트 모던 건축에 있어 가장 주된 테마는 과거로의 복귀와 건축에서의 의미 추구이다. 이것은 기능, 구조, 신기술의 결과물 정도로만 생각하던 건축의 형태가 건축에 있어서 주된 관심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인간성의 회복을 가져왔다.

포스트 모던 건축의 '이중부호'양식은 과거의 다양한 생활양식에 대한 향수를 강조함으로써 전통이나 역사성에의 복귀를 주장한다. 즉, 건물의 웅장함, 비례, 통일 등을 건축가의 입장에서만 감지하려던 단일코드적인(univalent code) 모더니즘에 비해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은, 주거자의 감각을 중시하고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해, 역사와 전통에서 모티브를 얻어옴으로써 의미와 상징성이 풍부하고, 인간적인 도시환경을 만드는데 이때 건축가는 주거자와 상호의사소통을 통해 주거자의 감흥을 최대한 수용하는 이중코드(dual code)적 경향을 지님. 이러한 이중약호성은 혼성모방 등 양식의 다양성을 낳고, 여러 갈래로 해석됨으로써 다원성을 지향하는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킨다.

<=================================================================

제가 생각하기론... 건축에 있어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장 큰 역할은 건축가 입장을 중시하던 건축을 주거자와 자연환경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인간성 회복'이란 표현을 쓰는거겠지요... ^^;

아까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자유스럽고 해체적인 성격에 대해 잠깐 언급하신 것 같은데...
시멘트의 질감을 그대로 놔둔 벽이나... 천장 위로 지나가는 파이프를 그대로 보이도록 놔두는 것(왜 요즘 장식으로 많이 하잖아요..)....
이런 것들이 그런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수업시간 중에 생각했었습니다...^^;;

포스트 모던 건축물 사진을 찾아보았는데... 몇개만 올립니다...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생각하면서 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

 

비인간성을 극복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의..

포스트 모더니즘... 모더니즘을 겪고 나서..거기에서

더 발전된 모습의 형태.... 하류 문화쪽에 가깝고도..

상류문화와 그다지 멀지 않는 것..

이많은 말들중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딱 뭐라고 정의

를 내릴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어느 하나의

특정한 유파가 아닌것 같다... 다채로운.. 문화의 움직임이

있었다.. 1960년대 유럽부터... 건축에서 이중부호(dual code)

문학에서의 패러디(parady) 음악에서의 반복(repeat)....

이렇듯.. 포스트 모더니즘은. 유파가 아니라. 부분 부분들의

문화의 흐름인 것이다.. 더 부치자면 형태를 중시하던..

모더니즘을 벗어난 기능+형태를 중시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더욱더 인간적이고.. 더욱더.. 편안함을 중요시한..

인간적인 조류... 그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인 것 같다..



참고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작가와 작품을 감상할 사이트

여기를 클릭하세염!!

 

포스트 모더니즘의 성격...그리고 앞으로의 문화..

과연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가 어떤 것일까..하는 의문속에 떠오른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이더군요..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에 관한 자료를 보던중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정리하자면 20세기 전반까지 뿌리깊게 퍼져있던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된 정형화를 벗어난 감각과 다양성을 중시하는...일탈적인 문화더군요..

포스트모더니즘은 다른 예전의 어떤 다른 문화양식처럼 특정한 유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지금까지의 문화(모더니즘)에 대한 저항 내지는 반발로 시작된 움직임이죠..그래서 문득 떠오른 것이 정반합의 논리인 '변증법'이 생각났습니다..

변증법이란 어떤 현상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반발..충돌로 저항적인 현상을 주장하고 또 그 충돌 속에서 좀더 발전적이고 새로운..현상을 지향하는 논리입니다.

20세기 전반까지의 모더니즘 을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 모더니즘이 생겨났다면..모더니즘은 '정'이고 포스트 모더니즘은 '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속에서 더욱 신선한 '합'의 문화가 다가오지 않을까 합니다. 모더니즘 문화를 바라본 느낌은 약간 정형적이더군요.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은 거기에 반하는 감각적이고요. 정형화가 올바르다 할 수 없고 감각적인 것이 올바르다 할 수 없습니다. 각기 다른 문화를 두고 서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래도 어제의 문화를 거부하고 좀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변증법적인 행동 속에서...모두가 선호하고 향유할 수 있는 그런 문화가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철학으로?...

철학하구 연관을 지어 생각한다는게
좀 새롭게도 햇고 어려웠다...
철학 자체만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데..
집에 와서 포스트 모더니즘과 철학에 관해서 자료를 찾아 보니까 ..포스트 모더니즘을 철학 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관점이나예술사상적 관점에서 본것도 잇더라고요...

포스트 모더니즘의 개념에 관해서 알아보니..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Post-modernism이라는 이름의 도깨비가 20c말을 휘젓고 있다." 보수적이기 이를 데 없는 우리 나라 예술계원로가 기고한 예술시평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도깨비라는 흉물스런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미 Post-modernism은 20c를 마무리지을 거대한 Global phenomena로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다. 체계성을 거부하고 절대이성의 아성을 비웃으며 단편성과 비논리성, 주관성을 앞에 건 채 모더니즘의 고상하고 권력 지향적인 사자들의 엉덩이를 깨물어간 Post-modernism은 이제 사자의 생명을 거의 끊어놓을 정도로 그 몸을 먹어 들어가며 공룡같이 성장했다. 그러나 Post-modernism이라는 괴물은 아직 그 형태도 정확히 구성하지 못하고, 정체 또한 제대로 파악 될 수 없는 아리송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것이 새로운 현상인지, 아니면 역사적으로 언제나 계속되어오던 보편적 현상인지 미처 알 수 없는 것이 현재의 우리모습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합리화시킬 구실이 있는 것이 모더니즘의 논리적, 과학적, 이성적, 권력 지향적 잣대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에게 온통 미스터리와 부정확성으로 가득한 비논리적인 이 현상을 이해한다는 자체가 그 메타포 적인 면에서 문제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기야, 다 똑같이 우리의 사고, 행동에 의해 생겨나는 현상인데 그러한 현상의 이해를 주체로서 하지 못한다는 것은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조차 그 특성으로 가지고 있는 Post-modernism은 이렇게 논리적 이성적 메타포로 자체를 밝히려 달려든다는 자체를 비웃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도 Post-modernism의 극히 단편적 현상만을 볼 수밖에 도리 없을 것이다.

먼저, Post-modernism이란 용어는 어디에서부터 등장한 것인가? 이 용어가 처음 쓰여진 것은 스페인의 문학평론가 페데리코 데 오니스에서이다. 피들러도 그의 시선집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고, 역사학자 토인비도 그 이전에 이 용어를 썼으나 그것들은 모두 자기자신의 고유한 정의에 따라 사용한 개별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에 있어서도 Post-modernism이란 용어자체는 기존의 체계와 뚜렷이 구분되는 반작용현상을 지칭했다는 일치점을 가진다. 이러한 산발적이고 상관성 없는 용어사용이 간헐적으로 계속되던 차 1960년대에 이르러 문화비평가들이 이 용어를 문화와 그 현상을 나타내는데 도입하게 된다. 이 용어는 단순히 단일하고 일관성 있는 사상체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고, 낭만주의니 리얼리즘이니 하는 특정한 사상이나 예술의 유파는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다양한 예술적, 일상적, 사상적 경향을 지칭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한 것이다.Post-modernism의 존재를 가장 대표적으로 제시한 이합합산의 말과 같이 Post-modernism이란 Modern 이후의 모든 것을 지칭하는 지구 중심적 사고전체를 말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Post-modernism개념의 불분명을 Post-modernism양상을 설명하는데 큰 제약을 준다. 이 개념의 정체성규정, 정의구축이 Post-modernism 논의의 기본이 된다.

Post-modernism의 역사는 어떠한가? 역사는 최소한 1950년대까지 올라가지만, 그 개념은 최근에 나온 연구물을 보더라도 [지금까지도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에 대한 의미에 일치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이 고작이다. 이 용어가 널리 파급되어 학계, 예술계의 주목거리가 된 것은 문학, 건축, 무용, 회화, 영화,TV, Pop music, Video, Fashion등 다양한 영역에서 논쟁이 불붙은 1970년대 후반부터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 개념이 어떻게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전이되었는지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것은 다시 말해 Post-modernism 예술이 지닌 기본적 성격이 확고한 고정범주에 머물러있기보다는 극도로 탄력적 속성, 흡사 가족적 유사성을 띠면서 각 영역사이를 왕복운동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는 철학적 관점이다. 철학적 차원에서의 Post-modernism에 관한 해석-특별히 Post-구조주의라는 현대 철학사조를 통해 Post-modernism 의 탄생배경과 그 인식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둘째는 경제, 사회적 관점이다.post-modernism이라는 초체적 사회현상을 인식함에 있어 사회학이론의 관점과 경제적, 사회적 환경을 분석한 환경 영향적 관점에서의 Post-modernism을 이해해본다.

셋째는 에술사상적 관점이다. 여기에선 특히 회화를 중심으로 그 역사적 발달과정에 따른 현상으로서의 Post-modernism을 이론적으로 설명한다. 이 장은 특별히 Post-modernism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후기 모더니즘, 탈모더니즘, 절충적 모더니즘의 세 경향을 자세히 분석해 볼 것이다.

철학의 관점에서 본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에서의 Post-modernism 경향에서 post 구조주의가 논의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1979 Lyotard가 이라는 책을 출판한 이후, 1980, 9월, 하버마스의 [Modernity-미완의 계획]이라는 제목의 리오따르 비판이 이루어지면서 그 유명한 Post-modernism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Post-구조주의자들은 Post-modernism을 자의든 타의든 옹호하고 웅변케 한다.

개인적 특성보다 전체적 맥락을 중요시하는 방법론을 가진 구조주의가 <집합적 구조>라는 개념 속에서 개체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잘못을 깨닫자, 이에 대한 비판으로, 전반적인 것보다는 국분 적인 것. 총체적인 것보다는 파편 적인 것. 그리고 거대한 것보다는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Post-구조주의는 그 기원을 대륙합리철학의 아성인 칸트, 데카르트, 헤겔의 벽을 부수기 시작한 감정적 철학가 니체에서 찾는다. 권력에의 의지, 초인정신의 철학을 가진 니체는 이미 합리적 이성이 설명할 수 있는 인식의 발판이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 감정에 충실하고 이성을 탈출하는 방법론을 제창했다. 이후, 이성의 해체경향을 발달시키는 하이데거, 데리다의 계보를 지나 라캉, 푸코, 들로우즈, 리요타르까지 이어졌고 이들의 Post-구조주의는 Modernity의 정형이었던 이성중심주의,근원주의,역사주의,체계화,총체성 대신 파편화,불연속성,다원화,분산화,탈정형화의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일반적 특징은...
첫째,Post-구조주의는 데카르트이래 근대정신을 지배해온 이성의 창조에 강하게 반발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지향하는 인간과학의 목표는 인간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으로 이해되어온 주체성의 개념을 철저히 파괴하려 한다. 따라서 그들로부터 중심성을 벗어난 개인이다. Post-구조주의자들은 그런 이유에서 인간의 의식세계보다 무의식세계를 선호한다.

둘째,Post-구조주의는 언어의 [의미성]을 부정한다. 낱말들의 음성적 속성을 시니피앙이라 하고, 그 낱말의 속뜻을 시니치에라고 하는데, 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그 구조를 통해"언어"라는 기호를 구성한다. 그러나 Post-구조주의는 그 언어기호의 개념표현에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긴 불균형이 존재한다고 인식한다. 즉, 그들은 시니피에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시니피앙의 지위를 지배적인 것으로 설정한다. 이것은 즉 언어기호의 명제성과 실재하는 것의 실재성사이 일대일 대응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즉, 포스트구조주의는 언어의 음성적 속성을 중시, 그 속뜻보다 표현자체의 느낌을 중시하는 기호학의 의미 창조능력, 영상매체의 역할을 논의한다.

셋째, Post-구조주의는 友역사주의의 성격을 가진다. 그들은 역사에 지배적인 일정한 흐름이 있다는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를 반발한다. 즉, 역사에 있어 인과서이나 연속성을 인정치 않는다. 그 대신 역사에서의 불연속성과 단절, 비정규성을 중시한다.

넷째, Post-구조주의는 체계화, 총체화에 반대한다.Post-구조주의의 관점에서 체계화는 닫혀진 정신구조의 산물이다. 그들은 일체의 거대구조에도 반대한다. 거대구조는 곧 총체성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푸코의 권력분석에 있어서의 미시물리학적 분석, 리오따르의 헤겔(절대정신),마르크스(인간해방)비판은 이것을 잘 증명한다.

다섯째, 포스트구조주의는 과학주의를 비판한다. 마르크스, 프로이드 등의 과학적(자연과학적)지식을 푸코는 맹렬히 비판하고, 대신 계보를 추적하여 위치설정과 관련된 예추의 형식으로부터 지식을 해방시킨다는 가치적 방법을 추구한다.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의 관점-절대적이고 확실한 근거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 입장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본질주의를 신봉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는-은 결국 Post-modernism과 관련을 맺는다. 이제까지 어느 한 핵심적 이론에 기초하여 삶을 총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거대이론에 깊은 회의나 불신을 나타내며 미시적이고 반총체적이며,이질적이고,다원적이며,편린적인 특성을 가진 Post-modernism 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Post-modernism과 Post-구조주의는 따라서 존재로 중심의 형이상학을 인식론위주의 형이하학적으로 끌어내리고 주체의 상실, 주체의 죽음, 휴머니즘의 죽음 등을 모토로 가지게 된다.

 

다원주의적 사고 방식을 가진다는 것은........

지난 번 교수님의 강의 잘 들었습니다.
특히 1950 년대에 나타난 추상 표현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특히...이 부분.....
추상이든... 구상이든.....
탈질료적인 것이던..... 탈형상적인 것이던.....
모두 각각의 독특한 시각과 표현 방식을 가지는 예술이기 때문에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어샤 한다는 점!!!

지금의 세상은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화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교수님 말씀대로.....
예술 뿐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사회 전반에 걸쳐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와 좀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들을 알 수 있고, 우리의 생각들을 그를 통해 보완해 나가면서 살아 갈 수 있을테니깐은요. 갈등이나 대립도 더 적어질 것이고 서로가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발전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도 등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처음 포스트 모더니즘이 등장했을 때에는 외계인을 보는양 눈길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지만 지금은 예술 뿐만이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포스트 모더니즘 적 경향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쉽게 접하고 있는 대중문화만 하더라도 좀 더 색다르고 좀 더 독특한 것들을 원하고 있으니깐은요....

이렇게 세상의 흐름을 따르기 위해서도.........
우리의 발전을위해서도....
다원적이고 다중적인 사고방식이 정말로 필요할 것입니다.....^^

제가 정리한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은 지난 20세기에 걸쳐 서구의 문화와 예술, 삶과 사고를 지배해온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기 모더니즘은 하나의 통일된 사조나 운동은 아니지만, 그 중심적 동기는 모더니즘을 통해 수립된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엄격한 구분, 예술의 각 장르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었다.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들은 작품의 유기적 통일성을 부정한다. 그들은 통일성이나 일관성보다는 오히려 편리성이나 임의성 또는 유희성을 더욱 설득력 있는 예술적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작품은 '잘 빚어진 항아리'가 아니라 오히려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항아리'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거들의 복귀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매우 적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가부장적인 모더니즘의 권위 아래에서 주변적인 위치밖에는 차지하지 못하면서 억압되었거나 무시되어 온 것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인정 받으면서 부상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무엇보다도 주변적인 것들의 부상이라는 점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모더니즘을 잘 알아야 포스트 모더니즘을 일으킬수 있고, 모더니즘의 단일된 사고들을 깨려고 하는 입장의 사람들이 주창하는 것이다.

 

 1시간의 강의를 듣고서...

1시간 남짓 포스트 모더니즘의 이론들과 그 실제들을 논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 한 일이라 본다. 문제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단어가 내포한 광범위한 개념 자체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포스트 모더니즘에는 부정적인 문구가 늘 따라다니는 것같다.

불연속성, 파괴 , 전위, 탈구심화, 방향의 상실, 불확정성, 반미

학, 반총체성, 일관성의 상실, 不, 反, 失 ...

어쩌면 세기말 현상이라 불러도 될 듯..기독교가 지배하는

서구 사회엔 세기 1000년은 반그리스도의 출현이라 하여 악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군..

포스트 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경계 또한 모호하다고 생각이 든

다. <현대미술 세기의 전환>이란 책을 읽다보니..포스트 모더니

즘을 하나의 새로운 양식이 아니라 단지 모더니즘의 헤게모니에

종식을 고하기 위해서였다는데..결국 이 말은 전통의 단절과

종전의 정형화된 이념의 종말을 뜻하는 것같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출현하는 시기에 사회 경제적 전반에 걸쳐

전환의 바람이 불게 된다. 즉 다국적 기업들은 정보테크놀로지

와 대중 매체의 생산조직망을 지배하게 되었고 국가간의 경계를

모호케 만들었다. 그에 대한 예로 미술 작품이 잡지 등을 통해

대중화의 바람을 타게 된 것을 들 수 있겠다.

모더니즘=산업시대

포스트 모더니즘= 정보 테크놀로지 시대

란 도식이 성립될 수 있을 거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이 " 이게 무슨 위대한 작품이냥?

나두 만들겠다" 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들이 상당한데

이걸 책에 보니 전용 미학이라 부르고 있다. 모더니즘아방가르

드 독창성의 개념에 도전해 의도적으로 대중매체나 미술사들

형상을 베껴 새롭게 병치 혼성한다는 것이다. 극도로 개방주의

란 생각이 들고 speed시대에 맞추는 건지..넘 즉각적이구

단순하지 않나? 쩝...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은 동양과 좀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괜시리 부풀려서 지구촌의 국제적 문화 현상으로 과대 포

장 묘사하는 것이 아닐까..미국 문화 식민 속국이라고 우리나라

를 표현하는데 언제나 수용자적 입장을 취하면서 정체감이 상실

되어가는 현상이 안타깝다.

 

추상과 포스트 모더니즘

고등학교 때도 그랬고.. 대학 들어오고 나서도.. 어느 수업시간에든지 듣는 이야기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관한 담론들이었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여지껏의 이미지는'경계의 해체' 'Anti의 논리' '정반합의 과정' 등 이었습니다.

이번 수업시간을 통해서는 회화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 '추상'에 대한 제 반응은 '저게 머지?' 정도였는데요 -_-a 교수님 말씀을 듣다보니.. 아.. 그런 생각이 들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이슨 폴록이나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해체의 과정이 구상과 추상 사이의 '힘'을 표현한 것이라든지.. 공대출신의 한 철학자가 설명한 추상에 대한 설명은 나름대로 '이것이 추상이다'라는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밑에 분들이 써주신 글들을 읽다보니.. 포스트 모더니즘도 역시나 '正-反-合'의 과정에서 오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말씀은.. 제게는 새로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제가 미술을 제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미술을 '미술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좋지 못한 태도인데요. 그게 참.. 쉽지 않더군요. 솔직히.. 밑의 작품들 보면서도 '저것이 무슨 말인지'하고 넘겨버리고 말았습니다. -_-a

제 짧은 사견인지는 모르지만.. 미술이든지.. 음악이든지.. 소설이든지.. 여러가지 문화적 Text를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다원주의성을 이해하듯이 다른이의 표현을 수용하는 것 역시 특히 주관적인 예술계에 있어서는 매우 필요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F.Bacon의 그림 역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트랜스 아방가르드

지난 시간에 여러가지 사조들을 건드려 주신듯 해서요
그냥 트랜스 아방가르드에 대해서만 조금 찾아봤어요.

"탈(脫)또는 초 전위(超前衛)라 굳이 번역할 수 있는 트랜스아방가르드란 문자 그대로 전 위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고 그 대열 에서 떨어져 나와 후방도 둘러볼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70년대 후반 에 구체화된 모더니즘의 폐쇠성과 아 방가르드의 위기는 이제까지 형식 적 쇄신을 향해 달려온 미술의 직선적인 행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예를 들어 수공예 적이라 하여 비하되었던 손작업에로의 복귀라든지, 이미지를 가진 회화 본래 의 모습으로의 환원, 새로운 스타일의 창조, 그리고 잊혀져온 역사와 문화, 개인의 삶과 꿈을 내용으로 도입하는 것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복고주의 적 성향은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현대 미술계에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제시 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문화 식민주의와도 흡사하게 전세계가 동일 한 미술형식을 추종해야 했던 모더니즘 의 국제주의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였 다. 그러므로 트랜스 아방가르드란 독 일이나 미국의 신표현주의와 프랑스의 자유구상과 비견되는 이태리판 표현주 의적 구상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트랜스 아방가르드란 건 이탈리아의 작품에서만 발견되어지는 모습인가요?...사실 요즘의 예술은 저 위에 글에서두 말했듯이 문화 식민주의와도 흡사한 동일한 미술 형태를 전 세계에서 발견 할수 있잖아요.
저희 교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이건 미술과는 관련이 없지만 현대 건축의 오류는 그 지방의 기후같은 것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거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세계 어디를 가던지 똑같은 스타일에 건물들을 찾을 수 있다구요.
사실은 그렇게 되면 에너지 다 소비형 건축물들이 나올수 밖에 없고 설비 의존도가 높아져서 결코 효율적이지 않은데도 말이죠.
그렇다면 이탈리아나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자기만의 예술 형태가 나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건지도 조금 궁금하네요...

 

포스트 모더니즘과 해체주의...그리고 한국은...

포스트 모던 디자인과 해체주의, 그리고 한국의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이야기한 글인데요..
중간중간에 좀 어려운 말들도 나오지만
우리가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들이 나오거든요..
그게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는 많은 상품과 광고들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모습들을 발견한다는게 참 흥미있네요..
재미있게 보세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의 차이가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건축이다. 현대 모더니즘 건축의 특징은 다분히 기능적이다.

그리고 육각형의 보편성을 지닌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의 그러한 특징 하나하나에 반기를 들면서 일어났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전원적이며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다. 국제적인 건축과는 달리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탈서구, 탈중심, 탈제국주의적이다.

제인 제이콥스는 모던 건축을 "엄청난 따분함의 폐해"라는 말로 혹평했다. 육중한 이데올로기를 받치고 있는 듯한 건물의 단조로움 그 단조로움은 결국 기계에게는 어울렸을지 모르나 인간에게는 지루함 외에는 안겨준 것이 없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특색을 드러내는 것은 광고이다. 여기서 또다른 포스트모더니즘디자인의 특질을 본다. 그것은 이미지의 혼재- 경우에 따라서는 광고 대상이 생략되기도 하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이너스의 꼼빠니아 광고중에 영화 "The God Father"의 주제곡으로 쓴 "Parles plus bas"가 잔잔히 흘렀던 적이 있었다.


이것이 전 시대 광고와 확연히 다른 점은 "Parles plus bas"는 조이너스의 의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전 시대의 "∼껌이라면 역시 롯데껌", "맛을보고 맛을아는 샘표간장"과는 달리 로고송에 대상이 없으면서도 "Parles plus bas"를 듣고 조이너스의 의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디자인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상주의로부터의 탈피이다. 모더니즘 이후의 디자이너들은 이성의 보편성에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후기산업사회라는 사회적 형태의 변화는 디자인 양상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 놓았다.


후기산업자본은 용도에 의해 결정되는 디자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있지도 않은" 상품의 디자인을 요구한다. 일본 SONY사에서 세계 시장의 80%정도를 소화하고 있는 캠코더를 디자인한 경우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그 "용도가 아주 모호"한 경우 기능은 무엇으로 보야야 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부닥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개인용 컴퓨 터이다. 도데체 이 기계의 용도는 무엇인가?


디자이너의 스케치북인가, 글 쓰는 도구인가, 아이들의 오락기인가, 통신용 단말기인가, 책인가, 작곡가의 피아노인가, 노래방 기계, 오디오 시스템, TV, 비디오, 자명종, 전화자동응답기, 팩시밀리, 디스켓 선반 등등 이 기계의 모던적 관점에서의 기능적 본질과 이상은 너무나 혼재되어 있고 그 혼잡성은 앞으로 더해질 것이라 예상된다.

포스트모던디자인은 상호텍스트적이다. 즉 디자인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극단적인 예는 광고디자인에서 디자인과 상관없이 하나의 드라마를 추구하는 것이다.훼미리 쥬스의 광고 같은 경우 김혜수와 한석규가 만나는 과정을 드라마적으로 서술하여 훼미리쥬스에 대한 관심을 두 사람의 만남으로부터 가져오도록 한다.


상호텍스트적이란 것은 연쇄적 signifiant 의 강조로 볼 수 있다. 그것의 내면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극단적인 예는 내면을 보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전자제품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자동차의 신차 Avanté의 경우 고려청자에서 응용한 곡선디자인을 이용하고, 尾燈은 호랑이눈 형상을 하고 있다. 쌍용의 무쏘가 가진 이미지는 돌고래이다. 디자이너는 청자, 호랑이눈 등등의 기존에 잘 알고 있는 대상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그것들을 혼용해서 시각적 내재 언어화함으로 새로운 물체인 자동차를 이야기해 주려 한다. 이런 상호텍스트성은 "용도가 아주 모호"한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다. 현대는 기존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던 사물이 그 용도가 엉뚱한 예로 전용되는 것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포스트모던디자인이 모던디자인을 반대하고 나온 측면이 많다고 하지만 그 표현 형식은 모던 디자인의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광고 디자인에서는 콜라주, 데칼코마니, 마블링 등등의 우연성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디자인이 추구하는 것은 모던에서처럼 우연성을 통한 이데아의 실현이 아니다.


반대로 그러한 우연성 자체를 찾는 것이다.

- 해체주의 디자인

해체주의 디자인의 가장 큰 특징은 광고디자인에서 나타난다. 파편화된 이미지광고, 서술구조의 해체-시공간의 해체, 언어 메시지의 실종 등등의 경향으로 보여진다. 현대 광고는 광고 대상의 실체와는 무관한 형상들이 뒤덮힌 광고들을 본다.


특히 성적인 표현을 광고에 표현하는 것이 잦아지며 이는 신제품 런칭 광고와 열세에 처한 기업의 광고에 많이 쓰인다.

해체주의 디자인은 크게 두 가지 형상으로 다가온다. 첫째는 기존의 관념이나 사물을 깨뜨려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여성 생리대 광고를 하고 있는 남성모델이나 속옷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겉옷 등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다음으로 나열된 파편적 이미지로 대상물을 형상화(이 경우 대상물은 부재하다)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범주는 큐비즘 때부터 있었다.


조르쥬 브라크의 1913년의 일련의 작품들 '클럽 에스의 콤포지션', '클라리넷', '병과 컵 바이올린'등을 보면 신문지 조각, 나뭇결, 포도송이 문양 등의 대상물과 상관없는 이미지들의 나열이 있다. 현대에 이러한 이미지나열은 주로 광고에서 보인다.

엘칸토의 부부부부부∼로 시작하는 광고, 메르꼴레디의 갈색빛 영사기가 나오는 광고 등이 있다. 양자의 차이는 전자는 작가가
'이것을 클라리넷으로 보아라'식으로 강요를 한 것과 마찬가지였고 후자는 부재의 이미지 나열 속에서 감상자가 '아 그것이구나'를 알아채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해체주의 디자인의 대표적 예는 베네통 사의 광고가 꼽힌다. 베네통 광고는 첨예한 세계적인 문제를(즉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들을) 광고디자인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으로 소비자에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베네통 사의 이러한 일련의 광고는 몇 가지 인식의 혼용과 재창출이다. 베네통 사의 광고는 일차적으로 보는 사람의 시각을 끌도록 한다.

이것은 성적 과다노출로 인해 얻어지는 광고이미지와 비슷하다. 일단 광고를 보게 되었으면 대중들은 그 광고가 자신들의 (비극적인)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이미지는 기업이 마치 현실 참여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성수대교가 붕괴했을 때 재빨리 성금을 내어 자기 기업이 자선 사업의 선구자인 양 선전하는 기업처럼-이미지를 주게 된다. 그 다음 그 위에 찍혀진 녹색의 베네통 사 문구에 의해 그것이 베네통과 연관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파편적인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융화되고 다시 혼합되어 세계적인 베네통을 실감하게 한다.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던 디자인

1985 년 이후, 해커그룹이 작성한 GNU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GNU 는 다음 이니셜을 딴 것이다. Gnu's Not Unix, 얼핏 들으면 장난기어린 발상이기도 하나 이는 프로그래머들로부터 상당히 진지한 소리로 통하고 있다.


이 이니셜 자체도 해체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볼 수 있다. 해체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상당한 연관을 가진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연관은 GNU의 약어와 비슷하게 짜여져 있다.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이 공유하는 것은 The Others 에 있다. 파편적이고 미완성적으로 행해지는 디자인은 그것을 보는 자아에게 이미지의 합성을 요구하고 있다. 모던 디자인처럼 '다 된' 완성품 장난감 공룡을 주어 지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레고블록 한 상자와 공룡의 이미지를 주고 공룡을 직접 만들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발상을 한 디자인 역시 자아에게 그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있다.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한국과 같은 제 3 세계에서는 바우하우스나 울름의 모더니즘적 고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서구에서 들어온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이 유입시기에 있어 큰 시간적 차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한국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해야만 할 개연성을 반감시킨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한국사회에 마치 모더니즘적 시기가 존재했다는 듯이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건축물이나 광고적 측면에 있어서 상당히 뚜렷한 양상을 보인다.


1990 년대 지어지는 가정집은 이어령의 '한국의 담장'에 나오는 옛 모습을 연상시키듯, 낮아지고 내부가 훤히 보이는 양식으로 10 여전 전의 건축과는 달리 변하였다.


최근 세워지고 있는 여의도의 증권가 건물은 네모꼴의 형상보다는 포스트모던적이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포스트모던적 사고방식은 결국 절망감을 처절하게 맛본 서구 철학이 동양 철학으로 이행하고 있는 현상이며, 이것은 서구적 문물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한국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실마리가 된다고 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획일적, 탈제국주의적 신념이 강하여, 전체주의보다는 지역주의 세계주의보다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으며 한국 사회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 때문에 이것을 기존 모더니즘의 산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수용하고있다고 보아야 한다.한국은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공존하며 점차 포스트모던적 수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수용에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제문제는 불교의 禪宗, 도교의 道德經에 씌여진 문제들과 상호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고 우리의 것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 모더니즘은 대안인가

김민수 선생님의 '모던디자인비평'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 일탈은 모던 디자인으로부터 파생된 제문제에 대한 '반성적 인식의 성찰'이라고 귀결을 짓고 있다. 그렇다면 모더니즘은 후기산업사회의 철학적 대안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는 과감히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모더니즘이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이행한 동기가 반성이었다고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표피성과 경박성, 그리고 민감한 상업적 성격을 배제할 수 없다는 약점을 지닌다.

그러나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은 '자라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던의 제문제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한동안 '모던 기피증'의 편집적 요소를 보여 주는 과도기적 체제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요즈음은 M.Safdie 의 말"포스트모던-그거 이제 싫증납니다.!" 처럼 포스트모던이 다른 형태로 변신할 가능성을 보여 주는 시대이다(물론 아직 서구에 한정되지만). 시행과 착오로 이루어진 인류 역사처럼 앞으로 디자인의 여러 제문제에 있어서 새롭고, 더욱 인간적이고, 올바른 방향의 이념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관한 자료입니다.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어서였는지 수업시간에 듣는것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먼가 틀을깨는 혁신적인것
이라는 느낌만 들뿐 체계적인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요.

아래 자료를 읽어보고서 어느정도 개념을 잡을수 있었습니다.
단지 예술분야를 떠나서도 사회전반에 자리잡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것
같아 올립니다^^

아래 클릭 하세요.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한 생각

프랑스의 철학 교수인 Jean Francois Lyotard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포스트모던이란 모던에 의해 표상될 수 없는 것을 표상 그 자체로 나타내는 것이며,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을 집단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좋은 형식의 즐거움이나 취미의 합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표상될 수 없는 것의 보다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표상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고 정의하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반기를 들고 이를 극복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수업시간에 들었는데 역사적으로 볼때 하나의 사상이 성하면 결국 그 사상이 쇠퇴하게 되고 그에 반대되는 사상이 다시 성하게 된다는 것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넓은 의미로는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인간중심적 사고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데 문화에 대한 반작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좁은 의미로 말하자면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 대한 반발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 모더니즘이 자기 중심적이고 다른 사상을 배척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역시 포스트 모더니즘의 핵심은 상대주의, 즉 , 다원주의에 있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사상들이 집결해 있는 이 현대 사회에 적용되려면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도 자신만의 생각을 주장한다면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포스트 모더니즘은 여러 예술의 영역들을 하나의 순수하고 자율적인 예술의 영역으로 여기려고 합니다. 모든것에 동등한 보편성보다는 개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특수성을 추구합니다. 하나같이 사각형에 회색일변도인 근대 건축물 같은 경우에 포스트 모더니즘을 적용하여 여러 다양한 건축물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개별적인 것을 강조한다고 해도 주변과의 조화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변과의 조화를 고려한 상황에서 각각의 특수성을 추구한다면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과 포스트 모더니즘

권력이란 말이 여기서  정치인들이 휘두르는 그런 권력이 아님을 우선 밝힘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권력은 미셸 푸코가 말하는 인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입니다.

미셸 푸코는 대표적 구조주의자입니다.(스스로는 구조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후기로 가면 푸코의 주장을 스스로 바꾸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근데 왜 포스트 모더니즘을 말하는 자리에서 푸코를 말했냐고요? 모더니즘이 권력지향적인건 아시죠?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에 대한 반향으로 일어난거고.. 우선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것은 교수님이 말씀하신

철학 - 예술을 언어적으로 보는것
예술 - 철학을 기호화하여 보는것

입니다. 자 이제 이해가 가시나요? 여러분께 감시와 처벌이라는 푸코의 책을 권합니다. 푸코의 저작중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요.. 그 이유는 푸코의 의견 중에 계열화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똥을 보고 더럽다라고 생각하는 거나 쭉쭉빵빵한 여자 또는 늘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를 이쁘다 또는 멋지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 구조에 의한 지식 유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있고 그것들은 사회 구조에 의해 주어진 것이죠... 언어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제 말은 포스트 모더니즘 또한 사회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있긴하죠.. 하지만 그것 또한 사회 구조에 의한 계열화의 산물이라고 보았을 때 과연 정말 순수한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구조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저로써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나 모더니즘이나 모두 권력에 의한 산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해체주의

해체주의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건축 사조 중 대표적인 한 가지가 해체주의 건축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터 아이젠만'의 작품에 대해 아래 누군가가 미리 올려주셨는데, 그의 작품도 이러한 경향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저도 관심은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어서 (말들이...참 어렵죠?) 쉽게 설명하지는 못하겠네요...

저 아래 링크된 아이젠만의 작품을 보시고,
여기(해체주의 건축) 에 가보시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 사이트에서 설명해 놓은 '해체'의 의미입니다.

<해체는 단순히 떼어내거나 또는 파괴하는 행위만 외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유지하는 힘 즉, 어떤것들을 더불어 있게하는, 긍정적인 행위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참다운 창조는 해체에 기댄다>


해체주의 건축의 성격

해체주의 건축이 다른 건축운동과 구별되는 점은 철저하게 포스트 모던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해체주의 건축은 '포스트 모던적 사고'를 건축적으로 표현하는 운동이며 그 중에서 데리다의 해체이론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 인해 비판적, 해체적 성격을 갖게 된다.

해체주의 건축의 디자인 작업은 포스트 모던의 한 특성인 해체적 사고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디자인 개념, 또는 방법에서 다른 건축운동과 뚜렷히 구분되며, 형태표현 방법이나 결과로서의 형태는 그러한 개념을 표현하는 매개체 또는 容器(container) 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 경향은 동시대의 새로운 흐름으로서 아직 형성과정에 있기에 개념이 애매성을 가지며, 내부에 많은 모순을 담고 있다. 결국 해체주의 건축은 '포스트 모던적 사고'로 인해 가능성을 지니는 동시에 한계를 갖게 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계

글쎄..많은 분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대한 대안으로서 적절히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으신 것 같군요. 제생각은 조금 다릅니다만.

예를 들어보지요 모더니즘적인 컵을 생각해 봅시다.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손잡이는 잡기 가장 간단하도록 알맞은 각도로 휘어져야 할 것이며 질감은 손과 입술에 닿았을 때 편안한 느낌을 주어야 하며 재료는 씻을 때 금방 씻겨져야 하고 온도가 잘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눈에 가장 이상적으로 자극을 주지 않는 색이어야 하며 마시기 편하도록 입에 닿는 부분이 설계되어 있어야 하고 형태는 안정적이고 어떤 장식도 없는 심플한 것이어야 합니다.(뭐~대충 이렇지 않을까..하고^^)

하지만 이런 컵 많이 보셨나요? 제가 본 바에 의하면 그다지 그렇지 않은데요. 대개 컵은 그 기능보다 장식을 중요시 합니다. 이런저런 장식들, 과거 왕실의 문장이었던 백합 장식, 스칸디나비아 공예품에서 모방한 과일 무늬 등등~~에서부터 캐릭터 상품까지 제가 본 것만 해도 다양합니다. 식당에서 쓰는 싸구려 컵 정도 아니라면 장식 없는 컵 보기 드물죠.

(전에 쓴 글에서 모더니즘의 폐해 중 하나로 일상 용품의 키치화라는 말을 쓴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런 종류의 것이지요. 키치란 1700-1800년무렵 시민 계급이 형성되면서 그들이 왕족이나 귀족들을 모방하면서 생긴 단어입니다. 싸구려이지만 고급문화를 모방해서 기능과 관계없이 화려한 것을 지칭하지요.)

(사실 아직도 최고급 하이테크 제품들은 철저하게 모더니즘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쓰는 워크맨은 기능과 관계없이 눈을 끌게 생겼지요. 이럴 때 제 워크맨은 키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런 키치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요. 실제로 멤피스 디자인 그룹같은 경우는 대리석과 유사하게 보이는 라미네이트 등을 사용해서 정직해야 한다는 모더니즘의 신조에 저항하기도 했고요. )

(자~~각설하고 본론으로~~~)

실제로 우리의 디자인은 모던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리처드 로저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너무 모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모던하지 못하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겠지요.사실 우리는 어설프게 모더니즘을 흉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하지요. 도올 선생이 말했듯이 '우리는 모던했던 일이 없었으므로 우리에게는 포스트 모더니즘도 필요없다.'일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현대의 디자인이 직면한 큰 문제점의 하나가 역사주의와 모더니즘 사이의 갈등인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완전히 모던해지지도 않았는데 (일부분에서는 지나치게 근대적이고 어떤 부분에서 지나치게 모던하고) 그에 대한 어설픈 대안이 나와버린 것입니다. 이 또한 필연적인 것이겠지만. 지금 저의 주위만 둘러보아도 어설픈 모더니즘 모방 물건들과 키치가 가득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반해서 생겨났지만 모더니즘을 흉내내고 있다는 것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이 그다지 확실한 대안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포스트 모더니즘...광고...

우리 주위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을 보이는 것들이
많지만 광고를 떠올리면 그것을 더 쉽게 느끼게 되는것같다..
TTL이란 이동통신 서비스가 큰 인기를 얻게 만든건
무엇보다 광고의 힘이 컸다...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리고 얼굴을 물 속에 집어넣는 10대 소녀, 나뭇가지를 움켜잡는 손가락, 손 안에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올챙이, 이어 소녀가 굴을 입안에 밀어 넣는 장면, 마지막으로 왼쪽 뺨에 새겨지는 TTL. 화제를 불러일으킨 SK텔레콤의 TTL 론칭광고다.
이것 뿐아니라 그로테스크한 가면의 아이가 등장하는 마이크로 아이, ‘파란 피’가 흐르는 나우누리, “내 혈액형은 I”를 읊조리는 물갈퀴 여인의 터치 아이, 스타크래프트 영웅 ‘쌈장’이 등장하는 코넷, 제 5원소의 분위기를 차용한 움직이는(mobile) 인터넷 한솔 엠 닷 컴, 조지 오웰의 1984를 연상케 하는 카이(khai) 등.
이러한 광고들은 짧은 시간안에 충격적인 이미지와 낯선 서사구조로 현란한 잔상을 남기고 사라진다..
솔직히 이러한 이미지 광고가 예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 광고들이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는것은...
이러한 이미지 광고들이 포스트 모더니즘 양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틀을 빌어 살펴보면, 그 특성은 현실과 허구의 뒤섞임, 서술구조의 해체, 공간과 시간의 해체, 예술장르의 혼합, 페미니즘적 시선, 카메라와 시청자간의 시선일치 파괴, 전통적 색채조화의 파괴 등에 있다고 한다..
솔직히 이러한 광고를 보면 황당하기도 하지만 내게 남겨진
느낌은 굉장히 강렬해서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그리고 그것의
의미는 무얼까..하고 계속 생각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이러한 광고들이 먹히고 있다는 얘긴 우리 사회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이 인정받고 있다는 것일게다...적어도 젊은사람들
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사회전반으로 퍼져 다양한 사고방식이
통용되고 인정받는 사회 분위기가 되었음 한다..

Post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꽃집에서 장식용 조화를 고르고 있을때였다.
" 얘, 이 두가지 중에 뭐가 더 예뻐?"
" 음...글쎄요.. 이쪽건 좀 화려하고..장식이 많고... 저쪽건 단순하면서두.. 깔끔하네요. 둘다 예뻐요."
" 그래? 하지만 이쪽게 더 modern하지 않니?"
결국 그 언니의 결정은 modern한 조화였다.

Modern이란 말을 굳이 한국말로 옮기기엔 그 의미가 너무 넓지만, 적어도 내가 인식하고 있었던 그 단어의 뜻은 부정적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모더니즘이라는 사조가 유행했을 당시의 사람들 또한 그러하지 않았을까? 자신들이 타고 있는 조류가 가장 세련되고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시대는 언제나 Post-를 요구한다. 어떤 것이든 개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역시 그 전 사조의 탈(Post)이념적인 측면이 있었을테고, 그렇게 생각하는 나의 방식대로라면 분명 Post modernism시대 뒤의 사조는 Post-post-modernism이다. 굳이 이름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원화, 개성, 자유로움... 시대가 이런것들을 요구할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는 긍정적이다. 많은 글들이 밝혔듯이 어떤 사조를 그리고 그 기간을 확고히 지정해서 묶어버리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동시대가 원하는 것은 다르고, 그 평가는 시간이 더 지난후에 자신들이 '탈~'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문화는 단절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는 사조는 존재 할 수도 없고, 완벽한 문화도 탄생하지 않을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관해 생각해보면서 개인적으로는 결국 문화는 돌아갈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현대가 전통을 그리워하고 정형화된 것을 깨려는 시도가 다시 식상해질때 결국 'Post'는 회귀라는 또다른 뜻을 가지게 되는게 아닐까...?

 

http://www.paintseoul.com/Report-21c-09.htm

http://www.sfi.co.kr/Virtual_Libraries/ArtHistory/post-modernism/conpm.ht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세계를 담은 ‘초대형 그릇’
이집트 콘크리트 개량해 건축 재료로 사용… 기술의 승리 상징하는 기념비적 축조물

유럽을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로마를 찾고 싶어한다. 그곳에는 꼭 보아야 할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아서다. 그러다가 운이 좋아 로마 시내를 거닐게 되면 거대한 건축물들이 빚어내는 웅장함에 놀라고 만다. 그때 십중팔구 파리나 런던 또는 빈에선 결코 느끼지 못했던 그 무엇을 느끼게 된다. 아니, 느낄 수밖에 없다. ‘역사의 무게’가 바로 그것인데, 그 중에서도 콜로세움이 특히 그러하다. 아무리 고층건물에 눈에 익었다 하더라도 콜로세움 앞에선 그 거대함에 압도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만큼 콜로세움은 ‘영원한 도시’ 로마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원래 지상 4층 구조였으나 오랜 세월 3층 또는 2층으로 내려앉은 부분이 많지만 아치형 문틀, 문틀 양쪽에 세워진 원주, 층과 층 사이를 나누는 백색의 선은 아직 남아있어 여전히 볼 만하다. 장경(長徑) 188m, 단경 150m, 둘레 527m의 타원형 공간인 콜로세움의 명칭은 ‘거대하다’는 뜻의 라틴어 ‘콜로수스’에서 유래됐다. 최대 5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니까, 전체 인구의 20분의 1이 동시에 이곳을 찾았다고 하니 당시의 로마 인구는 100만명 정도로 짐작된다.(전성기인 3세기엔 150만명)

콜로세움(정식 명칭은 ‘엠피테아트룸 플라비움’)은 원형투기장으로 플라비스 왕가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에 판 황금궁전의 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로마 시민의 오락공간을 마련한다’며 세운 것이라 성격상 공공건축물이다. 고대 로마에는 이러한 공공건축물이 콜로세움 외에도 많았다. 로마제국이 다신(多神)을 섬겼음을 보여주는 판테온(만신전), 한꺼번에 1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카라칼라 대욕장, 광장의 기능을 수행했던 포로 로마노(로마광장), 개선문, 수도교(水道橋) 등이 그것이었다. 로마는 서구문명의 모태가 되는 그리스를 정복한 이후 그곳의 신전과 아고라(광장), 노천극장 등을 모델로 하여 이를 세운 것이다. 동양에선 좀처럼 보기 어려운 다양한 공적 건축물을 선보임으로써 로마는 일찍이 공화제(res publicus)를 탄생시켜 민주주의 발전 도정에 커다란 이정표를 세웠다.

공적 건축물이란 공적 자금이 투입돼 건설된 것인 만큼 그 용도 또한 다중을 위한 것이다. 로마라는 체제가 시민을 배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물증으로 이를 앞서는 것은 없다. 그들에겐 공과 사는 분명했고, 황제라도 그걸 혼동해서는 안됐다.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지만 공익을 키우면 사익도 따라 커지고 또 보호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을 것이고, 이 점이 로마가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원형투기장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여느 문처럼 아치형이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육중한 벽 사이를 뚫고 좌우 양쪽으로 통로가 나타난다. 통로 역시 아치형 구조다. 옛날에는 이 통로를 따라 입장객이 자기 좌석을 찾아갔다. 관중석의 위치는 신분에 따라 달랐다. 지금 타원형의 아레나(라틴어로 ‘모래’란 뜻이나 여기선 ‘무대’)는 앙상한 몰골만 드러내놓고 있다. 원래 마루였던 바닥은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지고 그 아래 맹수들을 가두었던 우리만이 그대로다. 관람석 또한 허물어진 채 붉은 벽면을 노출하고 있어 거칠고 투박하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2000년의 세월을 이기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콘크리트 구조물이란 사실이다.

○ 대리석·벽돌로는 못만들어
당시 주된 건축재료는 대리석이었다. 하지만 대리석은 너무 값이 비싸 귀족의 저택에서나 사용됐다. 일반인은 돌이나 벽돌로 만족했다. 그렇다고 해서 콜로세움 같은 대형 축조물을 돌과 벽돌로 쌓을 수는 없었다. 우선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술적인 데 있었다. 2만~3만명에 이르는 노동자는 그렇다 하더라도 수천 명의 숙련 기술자를 확보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아치형 통로와 원형의 관중석을 설치하는 일은 벽돌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다행히 이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콘크리트 공법이었다.

콘크리트는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인이 피라미드를 축조하면서 돌과 돌 사이를 때우는 접착제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로마인은 이미 이집트를 다녀왔기에 그걸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익힌 바 있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건축기술의 보조적 지위에 머물던 콘크리트를 개량하여 이른바 ‘로마식 콘크리트’를 개발했고, 또 건축의 주재료로 격상시켰다. 콘크리트는 서기 72년에 시작된 콜로세움 공사에 대대적으로 사용돼 빛을 발했다. 콘크리트 시대는 그렇게 열렸던 것이다.

로마식 콘크리트는 ‘포졸란(pozzolan)’이라 부르는 화산회(火山恢)와 석회석을 2 대 1의 비율로 섞되 여기에 물을 전체의 15~20%가 되도록 하여 만든 것이다. 때로는 물대신 동물의 기름이나 석류의 열매즙, 피 등을 쓰기도 했다. 화산회는 폼페이를 잿더미로 만든 베수비오 화산에서 나온 것을 썼다. 콘크리트로 벽을 쌓고 지붕을 덮었으나 목재는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강도는 현대의 것에 뒤지지 않아 다양하게 쓰였다. ‘건축의 혁명’이라 일컫는 볼트(궁륭)와 반구형의 돔은 물론 심지어는 해상 부두시설에서도 강점을 발휘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콜로세움으로 들어가기 전에 만나게 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기술의 승리를 상징하는 기념비 같다.

콘크리트란 특정 물질이 화학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나타내는 응집력을 이용한 기술이다. 로마는 카르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후로 대제국을 지향했다. 대제국은 그 속에 다양한 요소를 담아내야 한다. 로마는 먼저 아피아 가도라는 커다란 그물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로마식 콘크리트를 개발해 이질적인 요소를 하나로 단단히 묶어냈다. 얼핏 보기엔 형이하학적인 작업 같으나 그들의 정신세계가 그렇지 못했다면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다. 길을 따라 로마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라면 그 원산지가 어딘지 따지지 않고 로마의 것으로 대우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콘크리트가 아닌 것이다.

○ 돈 없는 사람도 입장할 기회 마련
로마식 콘크리트의 최대 걸작품으로는 판테온이 꼽힌다. 볼트와 돔이라는 로마의 2대 건축기술을 이용하여 125년에 완공된 신전이다. 16개의 콘크리트 원기둥이 받혀주는 돔 지붕은 벽돌과 응회암, 경석(輕石), 콘크리트 등으로 축조됐다. 돔 안쪽은 반구형이라 하늘을 닮았는데 거기엔 별과 태양을 그려놓아 이곳이 세계의 중심임을 나타냈다. 로마인이 섬기는 신들이 사는 곳이 세계의 중심이라면 콘크리트 구조물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카라칼라 대욕장도 판테온에 못지 않다. 그리스에선 자유시민에게만 아고라나 신전의 출입 자격을 부여했지만 로마의 공공시설물에선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 소정의 입장료만 내면 누구든지 가능했다. 신분의 고하나 남녀 성별, 피부색을 가리지 않았으며 황제도 시민과 함께 즐겼다. 때로는 부자가 하루치 입장료 전액을 지불하여 돈 없는 사람도 입장할 수 있도록 했을 정도였다. 로마가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한 데는 이러한 개방성과 포용성이 큰 몫을 했다.

내부로 들어간 입장객은 먼저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한 바닥과 벽에 걸린 그림, 통로나 회랑에 설치한 조각들을 감상한다. 그런 다음 순환입욕이라 부르는 코스에 따라 한 바퀴 도는데, 첫 코스는 현대식 ‘피트니스 센터’에 해당되는 체력단련실이다. 거기서 레슬링으로 땀을 흠뻑 빼고는 탈의실로 간다. 온욕실에서 몸을 담그고 사우나실을 거쳐 다시 온욕실로 갔다가 냉욕실에 들러 몸을 식힌다. 그 사이 도서실에 들러 책을 읽기도 하고 정원을 산보하기도 한다. 그것도 싫증나면 체스를 즐긴다. 부유층 인사들은 마사지를 받기도 한다.

시간과 돈이 있는 사람은 스낵바와 바, 레스토랑, 숍, 라운지, 타베르나(간이주점), 박물관, 극장 등을 다녔으며, 노래에 자신 있는 이는 노래를 불렀고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장사꾼들은 사람들 사이로 다니며 “소시지 있습니다” “맛있는 케이크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마지막으로 옥상의 풀장으로 가 수영을 즐겼다. 로마 시대 공중욕탕은 심신의 피로를 푸는 곳일 뿐 아니라 사교장 역할도 했다. 콘크리트 공법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이런 대형 공적 공간이 과연 지어질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콘크리트의 위력이 크게 느껴진다.
 
[자료출처: 주간조선(권삼윤 역사여행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야간비행 2005-05-05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로마에 가면 꼭 콜로세움이랑,포로 로마노에 가보고 싶어요^ ^

키노 2005-05-0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번에 동생이 로마엘 갔다왔던데 역시 좋더군요..저두 언제나 가보려나 ㅎㅎㅎㅎ
야간비행님도 다녀오고 저두 다녀오고 해야 할텐데^^
 

○ 가장 긴 축조물이자 가장 큰 무덤
‘발해만~타클라마칸 사막’7200㎞ 대장성… 담 위에 도로 구축해 전투·보급력 높여
1969년 어느 날 영국 소년 윌리엄 린드세이(11)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마치 누군가가 땅바닥에 그린 것 같은 오렌지색 띠가 보였다. 잠시 후에 그 가늘고 긴 띠가 ‘만리장성’(The Great Wall of China)이라는 설명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우주선이 보내온 지구표면 사진 속에 나타난 만리장성의 모습이었다.


호기심이 많았던 린드세이는 즉시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만리장성의 위치를 찾았다. “음, 이거란 말이지….” 만리장성을 처음 본 그날 린드세이는 자신이 갈 길을 결정했다. “언젠가는 저 놀라운 고대 성벽을 두 발로 밟아 보고야 말겠어!”라고 결심했던 그는 대학에서 지리학과 지질학을 전공하여 1987년에 드디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었다. 그것도 제 발로 그저 밟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만리장성 2470㎞를 걸으며 그 실체를 속속들이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그와 같은 도전을 시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린드세이는 자신의 만리장성 답사기 ‘혼자서 만리장성을 거닐다’라는 책에서 “그때의 체험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했다. 800일 이상을 만리장성에서 보낸 그는 ‘만리장성 국제우호협회’를 창설한 데 이어 보존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만리장성(이하 장성)은 보하이만(渤海灣)의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시작하여 중국 대륙 북쪽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봉우리를 따라 실크로드의 동쪽 끝 타클라마칸 사막에 위치한 자위관까지 이른다. 총 길이는 6700㎞로 알려져 있으나 2001년에 500㎞가 추가로 발견되어 7200㎞라고 고쳐 부르기도 한다.

만리장성은 인공위성에서 보면 하나의 선으로 나타난다. 선은 강조와 경계를 뜻한다. 피아(彼我)를 가르는 경계선은 빈틈이 없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흉노나 몽골, 거란, 여진 등 북방민족과 국경을 맞대었던 역대 한족 왕조는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말 그대로 장성(長城)을 축조하고 손질해왔다. 따라서 장성은 한족이 최고의 정성을 바쳐 축조한 중국, 아니 세계 역사상 최고·최대의 토목구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장성을 보면 인간의 측량할 수 없는 에너지에 놀란다. 마오쩌둥도 “장성을 보지 않은 자는 사나이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현재 전세계 네티즌의 투표로 ‘신(新) 세계 7대 불가사의’ 선정 작업이 진행 중(4월 30일 마감)인데, 장성은 현재 수위(총득표율 10.93%)에 올라있다. 2위도 중국의 포탈라 궁전인데, 득표율은 8.40%다. 이는 중국 네티즌의 적극적인 참여(전체 투표자의 40.64%)의 결과겠지만 장성이 장대하지 않다면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 교류 추구했던 로마와 달라
아피아 가도와 만리장성! 이 둘은 다같이 동서양의 고대문명이 남긴 축조물이다. 그런데도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로마와 중국은 당시 모두 이민족을 상대했으나 로마는 가도를 건설해 그들과 교류를 추구했다. 이에 반해 중국은 그들 사이에 방벽을 세워 차단을 지향했다. 보잘 것 없는 가운데 출발한 로마는 살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비옥하고 너른 황허(黃河) 들판을 가졌던 중국은 ‘현재’를 지키는 게 사는 길이라 생각했다. 로마는 후일 제국이 되어 시민에게는 자유를, 속지인에겐 자율을 주었으나 중국은 통일을 이룬 직후 분권형 국가에서 고도의 중앙집권제 국가로 나아갔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춘추전국시대부터 존재했던 성벽 가운데 헐 것은 헐고 증축할 것은 증축해 그 모두를 하나로 연결한 진시황은 무엇보다도 먼저 군현제를 실시했던 것이다. 그는 ‘일시동인(一視同人)’을 치국의 주요 방침으로 삼았다. 수비형 국가 중국은 중화사상을 개발하여 중심지향적으로 나아갔다면, 노마드(유목)형의 로마는 대외지향적인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구축했다. 소유의 차이가 행동의 차이를 낳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허물어진 장성을 대폭 수리하고 그것도 모자라 2700㎞를 다시 쌓아 지금과 같은 모습을 남긴 명(明) 왕조 또한 북방민족과 적대관계를 유지했기에 왕도 베이징을 지키기 위해 산하이관과 쥐용관(居傭關) 사이의 성벽을 가장 견고하게 또 높게 건설했다. 명 왕조는 장성의 제2의 건설자였다. 거기다 그들은 자금성과 역대 황제의 능묘인 명십삼릉을 축조하였으니 토목공사에 들인 인력과 공력은 엄청났다. 수비형 국가의 대표자격인 명의 경제력을 가볍게 볼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조세의 기준을 인두(人頭)에 두었다. 농토와 물산이 아니었다. 그게 경제력의 쇠퇴를 막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명은 어느 날 장성을 넘어온 청(淸)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말았다.

능선을 따라 깎아지른 듯한 벼랑의 바위 위에 축조된 장성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그렇다면 그 일에 직접 참여했던 이들의 고통은 과연 어떠했을까. 흙을 다져 한 켜씩 쌓아올려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다듬어 성벽과 돈대, 봉화대, 계단과 같은 구조물을 올리는 작업을 수천 리에 걸쳐 했으니 말이다. 길이도 무려 6000㎞나 이른다. 어떤 곳에선 두 겹, 세 겹으로 쌓기도 했다.

이 장대한 구조물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장성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공동묘지라는 얘기도 있다. 결혼한 지 얼마 안돼 장성의 공사판으로 끌려간 남편을 찾아나섰다가 그의 시신을 보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맹강녀의 슬픈 이야기.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두룩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부를 돌로 쌓지 않고 상당 부분을 판축기법(떡시루처럼 흙을 차곡차곡 다져 쌓는 방법)을 동원하여 수고를 다소 덜게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할 수 있으리라.

○ 바다링 근처가 장관 감상에 좋아
장성의 장관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은 베이징 북쪽 80㎞에 거리에 있는 바다링(八達嶺)이다. 책이나 그림엽서에서 흔히 보는 사진은 대부분 이 바다링 일대에서 찍은 것이다. 바다링에는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어 해발 853m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장성이 가진 멋과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힘이 들더라도 린드세이처럼 두 다리로 걷는 것이 좋다.

장성은 두 개의 벽으로 구성된다. 그 사이로 말 두 필이 동시에 달릴 수 있는 이동통로가 나 있다. 남벽보다 높은 북벽은 여장(女牆: 낮은 담)으로 꾸몄고 그 속에 총안(銃眼)까지 두어 북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한 군사시설물임을 일깨워준다. 거기에 서면 모래바람이 이는 몽골고원이 다가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120m 간격마다 돈대(敦臺: 높게 축조한 포대)를 세웠다. 보통 2층 구조로 된 돈대는 위층을 적의 동향을 살피는 데 사용했고 아래층은 병사들이 먹을 식량과 말에게 먹일 사료, 장비와 화약 등을 보관하는 창고 겸 병사의 숙소로 썼다. 또 적의 침입과 전쟁 상황을 알릴 수 있도록 봉화대도 설치했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꽃으로 군사 정보를 알리는 통신방법이다. 불을 피울 때에는 가축의 배설물을 태웠다. 사람의 출입이 많은 곳에는 ‘관(關)’을 두어, 출입하는 자의 신분과 휴대품을 철저히 확인했다. 그 중 제일 동쪽에 있는 산하이관은 조선 사신이 제일 많이 사용했던 곳이다.

이제 만리장성은 더 이상 군사시설이 아니다. 매년 1000만명이 찾는 중국 제일의 관광자원이다. 중국인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만리장성 기념비’가 서 있는 해발 888m까지 오른다. 글씨는 마오쩌둥의 것이라 특이한데, 이 기념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다. 만리장성 기념비를 굳이 해발 888m에 세운 것은 돈을 번다는 뜻을 가진 ‘발(發)’자와 숫자 ‘8’의 발음이 같아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숫자 8이 들어가는 전화번호나 차량번호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인기가 많다.
 
[자료출처: 주간조선(권삼윤 역사여행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로마로 통하는 ‘모든 길’의 모체
문명은 인류가 정착단계에 진입하면서 창조됐다. 그게 농경의 시작이었다. 인류는 정착에 성공하자 행동반경을 점차 확대했고, 이(異)문화와의 교류 폭도 넓혀갔다. 이러한 대단위 공간이동은 문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문명은 점이 아니라 선으로 확장됐던 것이다.

공간이동은 바퀴의 발명과 길의 건설이라는 기술의 발전에 따른 것이다. 바퀴는 문명의 발상과 궤를 거의 같이 하지만 길, 보다 정확히 말해서 간선도로의 건설은 기원전 6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길은 사람들이 반복해서 다니면 생겨난다. 길은 자연발생적이다. 그러나 간선도로는 인공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르단의 ‘왕의 길(King's Highway)’과 페르시아제국이 왕도(王都) 수사(Susa)에서 소아시아의 서쪽 끝인 사르데스까지 닦은 장장 2600㎞의 포장도로다. 요르단의 ‘왕의 길’이 아카바에서 암만을 잇는 남북 간 도로라면 페르시아의 길은 동서 간 이동로였다.

길과 길을 서로 연결시켜 마치 인체에 피를 돌게 하듯 광대한 영역을 유기적으로 묶는 도로망(길의 네트워크)은 로마인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다.

길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로마제국 최초의 간선도로는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디우스 카우쿠스의 명에 따라 기원전 312년에 완공된 ‘비아 아피아(Via Appia, 아피아 가도)’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던 로마는 처음에는 로마에서 카실리움(지금의 카푸아)까지 50㎞만 닦았으나 점차 연장하여 기원전 240년에는 아드리아해의 항구도시 브린디시움(지금의 브린디시)까지 540㎞ 길이의 간선도로를 완공했다. 완주하는 데만 무려 13일이 걸렸다고 한다.

길이로만 보면 로마의 아피아 가도(街道)가 페르시아의 ‘왕의 길’보다 훨씬 짧다. 그런데도 아피아 가도가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이 훨씬 심대했다. 그것은 길의 건설에 동원된 공학적 기술이 월등히 뛰어난 데다, 그 길을 통해 도모하고자 한 목표가 그 이전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차라리 정용(政用)도로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다.

○ 속도·시야확보 위해 ‘곧은 길’ 닦아
로마인도 지금의 현대인처럼 길을 건설하기에 앞서 먼저 노선을 확정했다. 도로건설에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됐기에 원로원의 의결을 거쳤으며 가능한 한 곧게 닦았다. 43㎞를 일직선으로 닦은 구간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도시 한복판을 지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곳 주민도 길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결과였다. 물론 속력을 내는 데도 좋았다.

노폭은 마차 두 대가 지날 정도(4m 정도)였지만 동원된 공법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땅을 1~1.5m 깊이로 파고 그 바닥에 주먹만한 돌을 깔았다. 그런 다음 모래와 자갈, 잘게 부순 돌로 채웠다. 마지막으로 돌을 잘라서 서로 물리게 하여 움직이지 않도록 짜맞추되 가운데를 볼록하게 했다. 길 양쪽으로 도랑을 내 물이 잘 빠지도록 했고, 일정한 거리마다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페르시아와는 달리 가로수는 심지 않았다. 군용도로의 목적상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 길이었기에 그들이 대량수송을 위해 개발한 사륜마차도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었다.

또 페르시아의 예에 따라 일정한 거리마다 말을 바꾸어 타거나 쉬어갈 수 있는 역참을 두었다. 그걸 ‘스타치오네스(stationes)’라 불렀는데, 영어의 ‘스테이션(station:역)’은 여기서 나왔다. 한창 때는 한 스타치오에 말 40필을 준비해두었다고 하니 그들이 가도를 얼마나 중시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로마의 역사는 작은 영토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그후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성장했다. 제국에는 문화와 관습, 풍속이 서로 다른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았다. 이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인이 즐겼던 사변(思辨)철학이나 순수과학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것, 다시 말해 도로나 수도교를 짓는 토목기술, 건축이나 무기와 같은 응용과학, 그리고 행정제도와 법률, 교육, 의료 서비스, 우편제도 등과 같은 소프트 인프라를 더 필요로 했다. 그들은 끝까지 시민의 생활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는 그리스인이 미학에 관심을 쏟은 것과 좋은 대비가 된다. 그런 만큼 독창적인 문화를 이뤄내는 데는 이렇다할 성과를 보이진 못했다.

길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익명의 다중을 위한 것이라 하여 사회간접자본, 즉 인프라라 부른다. 하지만 ‘인프라의 아버지’라는 로마는 인프라 대신 ‘몰레스 네케사리에’란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은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대사업’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토목공학 또는 토목기술은 요즘 유행하는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수준은 한 국가가 대국이 되느냐 못되느냐의 여부까지 결정한다.

아피아 가도는 로마인이 최고의 토목공학 기술로 만든 성과물이다. 로마에서 그리스나 이집트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아피아 가도를 지나야만 했다. 아우구스투스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멸한 후 로마로 입성할 때 이 길을 통과했다. 그 후 꾸준한 유지·보수를 받았다고는 하나 2000년 넘게 그 모습을 유지하며 유럽 도로건설의 모델이 되어 주었으니 로마인이 이 길을 통해 얻고자 한 견고함과 편리함과 아름다움은 모두 성취했다고 볼 수 있겠다.

길은 사람과 물자의 통행을 위해 만든 물적 시설이다.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닦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 길을 통해 적이 쳐들어올 수도 있으므로 길을 지킬 자신이 있는 자만이 길을 건설할 수 있다. 로마는 그런 자신이 있었다. 아피아 가도가 지나는 지역은 한때 적이었던 민족이 살던 땅이었다. 그 길을 닦으면서 로마인은 그들을 포용하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구상을 한다. 따라서 아피아 가도를 건설하지 못했다면 ‘팍스 로마노’(로마제국에 의한 평화체제)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피아 가도가 완성됐을 때에는 지중해도 그들의 영역이 됐다. 이는 지중해를 일러 ‘마레 노스트룸(우리들의 바다)’이라 부른 것으로도 증명된다. 지상의 길과 바다의 길, 이 모두를 손에 넣은 그들은 당시 선진 문화권인 서아시아와 그리스, 이집트를 자기네 영역으로 삼았다.

○ 대제국 수도이자 모든 길의 중심
동양의 강자 한(漢)왕조와는 실크로드를 통해 인적·물적·문화적 교류를 이루었다. 실크로드는 장건(張騫)이 기원전 139년 흉노를 제압하려던 한무제의 명에 의거, 대월지국(大月氏國)을 설득해 뚫은 길. 로마는 대제국의 수도이자 명실공히 모든 길의 중심, 요즘 말로 허브(hub)였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길에는 고정된 주인이 없다. 이용하는 자가 곧 주인이다. 로마가 융성할 때는 로마가 당연히 아피아 가도의 주인이었다. 서기 60년경 바울과 베드로가 유대 땅에서 일어난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겠다며 아피아 가도를 이용해 로마에 당도했다. 처음에는 복음이 로마 상류층의 이해와 상충되어 심한 박해를 받았다. 로마 남쪽의 연도에는 그 당시 박해받던 기독교의 흔적인 도미네 쿼바디스 교회(베드로가 환영 중에 예수를 만났다는 장소에 세웠다)와 성 세바스티아 교회(로마 황제의 친위대 장교였다 순교한 세바스티아를 기려 세웠다), 카타콤베(기독교도의 예배장소이자 공동묘지) 등이 남아있다. 이들의 피가 헛되지 않았는지 로마는 313년 기독교를 공인했다. 길은 이처럼 이용하는 자가 주인이다.

반도 내에만 동서남북으로 29개의 간선도로를 건설하는 등 길에 의해 발전을 거듭한 로마제국은 말기에 이르러선 총 8만㎞에 달하는 간선도로와 7만㎞의 지방도로를 보유하게 됐다. 속주(屬州)에 깐 도로까지 합하면 실로 엄청났다. 길은 로마인의 지배영역을 확장한 것만 아니라 사고의 지평까지 넓혔다. 대제국이란 군사력만 갖춘다고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비견되는 비전을 가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곳에선 그 옛날 지축을 흔들었던 수레바퀴와 말발굽 소리, 군사들의 함성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습만은 남아있어 로마인이 추구했던 바가 무엇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그들이 닦은 길의 네트워크(오프라인 인프라)는 지금에 와선 정보통신(IT) 네트워크(온라인 인프라)로 발전하여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고 있다. 그것도 실시간대로. 로마제국이 남긴 유산은 실로 엄청나다.
 
[자료출처: 주간조선(권삼윤 역사여행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Taipei 101
높이 : 509m
층수 : 101
준공연도 : 2004
장소 : 타이페이
설계자 : C.Y. Lee & Partners.




2. Petronas Tower 1, Petronas Tower 2
높이 : 452m
층수 : 88
준공연도 : 1998
장소 : 콸라룸푸르
설계자 : Cesar Pelli and Associates Inc. (USA)




3. Sears Tower
높이 : 442m
층수 : 108
준공연도 : 1974
장소 : 시카고
설계자 : 미국 SOM(Skidmore, Owings and Merrill)




4. Jin Mao Tower
높이 : 421m
층수 : 88
준공연도 : 1998
장소 : 상하이
설계자 : ?




5. Two International Finance
높이 : 415m
층수 : 88
준공연도 : 2003
장소 : 홍콩
설계자 : ?




6. Citic Plaza
높이 : 391m
층수 : 80
준공연도 : 1997
장소 : 광저우
설계자 : Dennis Lau & Ng Chun Man Architects & Engineers (H.K.) Ltd.




7. Shun Hing Square
높이 : 384m
층수 : 69
준공연도 : 1996
장소 : 선전
설계자 : ?




8. Empire State Building
높이 : 381m
층수 : 102
준공연도 : 1931
장소 : 뉴욕
설계자 : 슈립 람하먼




9. Central Plaza
높이 : 374m
층수 : 78
준공연도 : 1992
장소 : 홍콩
설계자 : Ng Chun Man




10. Bank of China Tower
높이 : 367m
층수 : 72
준공연도 : 1990
장소 : 홍콩
설계자 : ?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



 타워펠리스
높이 : 267.3m
층수 : 75층
준공연도 : 2003
장소 : 서울 도곡동
설계자 : ?



북한에서 가장 높은 건물

 류경호텔
높이 : 332m
층수 : 105층
준공연도 : 1992년
장소 : 평양
설계자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