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안의 인사동이라 불리는 쌈지길입니다. 설계자는 최문규와 미국인 Gabriel Kroiz

인데 정확하게 누가 어느 부분을 어떻게 담당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안으로 들어가보지는 못해서 약간 아쉽긴 합니다.

다음번엔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어봐야 겠네요^^

내부에 마당을 가진 'ㅁ'자 형이라고 하는데 중간이 뻥뚫린 건물과 비슷할 것 같네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루(春) 2005-05-0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중간이 뚫려있고, 계속 경사로로 걸어가면 꼭대기가 나옵니다. 길을 따라서 가게가 죽 있구요.

키노 2005-05-1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엔 꼭 안엘 들어가봐야 겠어요^^ 밤에 더 보기 좋은 것 같던데..
 





인사동에 있는 전시공간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들중의 하나가 위 건물이더군요.

건축사사무소 아뜰리에십칠의 권문성씨가 설계한 건축물로 2004 한국건축문화대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덕원갤러리에 대한 좋다는 느낌을 글로 잘 표현할 수 없어서 다른 글을 인용합니다^^;;

<덕원갤러리>의 기존건물은 인사동보다 종로통에 어울릴 듯한 규모와 외양을 갖고 있었으나 이제 인사동에 어울리는 건물로 계획하게 되었다.

인사동 길가로 새롭게 들어서거나 고쳐지은 건물들이 그렇듯 첨단의 현대건축을 옮겨놓은 모습으로 인사동의 옛집들을 위축시키지 않는 방법도 찾아야 했으며 오랫동안 전통거리로서 시민의 가슴에 남을 인사동과 우리 문화와 정서를 담아내는 집이 가져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다. 시민들은 인사동 길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가 될 이곳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집이 들어서기를 기대하리라 생각했다. 인사동을 찾은 사람의 흐름에 무심한 듯 서있던 모습, 주변에 비해 너무 큰 덩치로 느껴지던 모습은 시민들에게 친근한 느낌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인사동의 명소로 바뀌어야 했다.

인사동 네거리 남동쪽 모서리에 위치한 기존건물은 지상 5층, 연면적 5백평 이상의 규모로 지어진지 40년이 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60 ~ 1970년대에는 극동방송국, TBC방송국으로 사용되었으며 1층은 은행으로, 위층은 모두 전시실로 사용되어 왔다. 뒤편 건물 출입구 부근과 중앙에 두개의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위치하였고, 길 쪽으로는 오랫동안 자리잡았던 은행의 1층의 출입만이 고려된 건물이었다. 2층부터 대관 위주의 화랑으로, 지하는 전통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내부구조와 기능간의 어색함과 불편한 시설들로 오히려 지난 시간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오래된 도심의 건물이었다.

종로에서 올라오면 <덕원갤러리>의 부지 오른편으로 좁은 골목길이 있고, 회색 베이스패널 마감한 3층 높이의 공화랑이 있다. 북쪽 면은 삼일로 쪽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나며 바로 옆에는 붉는 벽돌 느낌의 타일로 전면을 감싼 오래된 5층 건물이 있다. 건물은 두세 번 정도 덧 짓거나 혹은 신축 중에 계획이 바뀐 것을 정리가 덜된 채 마무리 한 듯 보였다.


새롭게 고쳐 짓는 작업은 인사동 네거리와 맞닿은 모서리로 사람들이 건물로 드나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되었다. 5개 층과 옥상으로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모서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건물을 가로질러 작은 골목길을 만들어 건물 오른쪽의 골목으로 이어지도록 하였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건물내부의 골목길 옆에 위치시켜 수직동선 자체도 언덕의 골목길처럼 느껴지도록 계획하였다. 계단을 통해 외부에서 각 층으로 직접 진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옥상의 야외정원, 옥외카페까지 이어지도록 하였다.

건물 전면은 2개 층을 잘라내어 오른쪽 공화랑과 비슷한 높이의 건물로 계획하여 낮은 건물이 이어지는 인사동 가로의 느낌이 유지되도록 스케일을 조정하였으며 옥상은 올라가는 언덕길 계단의 넉넉한 휴식처로 계획하였다. 1층, 2층에는 인사동 거리와 어울리는 전통 공예품 판매점으로 계획되었고 3층, 4층, 5층은 화랑으로 구성되었다. 4층의 옥상정원은 화랑들의 중앙부분에서 휴식과 옥외전시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3, 4층은 회화중심의 일상적인 전시공간으로 이용되고, 5층은 이벤트와 퍼포먼스 등 다양한 방식의 전시가 이뤄지는 공간으로 변화 있는 천정이 계획되었다. 내부 마감도 아래층 화랑과 다르게 거친 느낌이 들도록 하였다. 변화된 천정의 구조로 인하여 옥상정원의 언덕 계단길이 계속 이어지는 모습이 가능하였다.

건물 외부마감은 전통사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파기와를 회벽과 함께 쌓아올려 담장과 같이 계획하였다. 검은색 기와편들은 인사동 바닥에 사용된 전돌의 색과 질감에서 일치하여, 인사동 길의 느낌이 건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정면에서는 기와 마구리가 이어지는 수평선이 쌓아 올려진 모습으로 모던한 느낌을 주며, 옆에서 보거나 사선으로 보면 흰색의 회벽 부분이 돌출된 기와로 가려져 보는 위치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한다. 최근에 완성한 출판사 사옥인 <열림원> 건물에서 한 번 시도되어 그 가능성을 살펴본 재료이기도 하다. 건물은 계단에 의해 둘로 분리되며 드러난 뒤편의 건물의 외피는 수평 목재널의 커튼월로 인하여 건물 바깥쪽에 사용된 검은 기와벽과 대조적으로 마치 속살이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였다. 이는 서향 빛을 조절하는 기능과 건물내부에서 인사동길의 전망을 즐길 수 있게 고려된 장치이다.

<덕원갤러리>는 <현암사>로 시작되어 <청담동 일신빌딩>, <열림원 사옥>에 이어지는 건물 리노베이션의 연속 작업이다.

모두 이전 건물의 구조가 새롭게 사용될 기능에 적절하지 않아 상당한 조정이 요구된 작업들이었다. 건물이 들어선 주위환경과 어울리고, 기존의 구조가 새로운 기능에 적합하도록 계획하는 작업은 많은 제약조건들이 있지만 소중한 과거의 기억들을 조심스레 감싸 안으며 우리의 현재 모습과 미래의 삶을 담아내는 집을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당연한 건강함이라 생각된다. 끊임없이 새롭게 드러날 크고 작은 현장의 문제들을 조심스레 해결하며 완성될 덕원갤러리가 인사동을 찾는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집으로 완성되기를 기대한다.

<펌: 월간플러스건축>

보통사람은 한번쯤은 인사동거리 왔다갔다거리면서 봤음직한 건축물이겠지만  잡지에 발표도 하고 했던   리노베이션건축물이다..
실제로 보면 상당히 외부마감에 공을 들인 느낌이 든다. 자재보다는 인건비가 상당히 들었음직한 건물. 다만 입면상 인사동의 이미지에는 절대

해가 되지않기 위해 노력했음직한  건축가의 고뇌가 느껴지는 건물이라

생각된다. 전체적인 입면의 느낌은 좋지만 곳곳의 계단의 난간이  그흔한 스틸파이프라는 점에서 조금 아쉬운거같다. 더 괜찮은 디자인이 가능하질 않았을까..원목에 스틸파이프는 웬지 궁합이 맞질않는거같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지역·지구: 일반상업지역, 문화지구
주요용도: 전시장, 상업시설
대지면적: 418.60㎡
건축면적: 348.95㎡
연면적: 1,633.07㎡
건폐율: 83.36%
용적률: 369.25%
규모: 지하 1층, 지상 5층
구조: 철근콘크리트
내부마감: 벽 - 합판 위 수성페인트
천장 - 퍼라이트 뿜칠(전시장), 석고보드 위 수성페인트
바닥 - 중보행용 온돌마루, 내구성에폭시 코팅, 도장(전시장), 우드타일
외부마감: 벽 - 한식기와쌓기(전면), 적삼목커튼월(전면), 드라이비트뿜칠(후면)
바닥 - 바닥전돌(진입부), 고흥석 버너구이, 멀바우데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5-05-09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의 둔탁하고 네모나다 못해 멋대가리라고는 하나도 없던 상자같던 건물이
저리 변했군요....주로 서양화 전시가 많이 열렸었죠...
특히 계단올라가는 옆댕이가 멋지구리 합니다.

키노 2005-05-1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구리하다는 표현이 더 멋지군요^^
 

예전에 국세청이 이 건물을 사용하였다지요.

현재는 삼성fn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원래 건물주가 삼성생명이고 국세청이 새청사로 이주

하기전까지 잠시 사용한 건물이라고 하더군요.

건물이름은 종로타워라고 하죠..

돈과 관련된 건물이라 그런지 무척 차가운 느낌입니다.

세기말을 다루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건물같지 않나요^^



아래 글과 사진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겁니다. 제가 찍은 사진이랑 글이 넘 허접해서^^


 
알루미늄 시트를 입고 종로에 나타난 이방인 종로타워
 
경복궁에서 남대문까지,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대로변 건물들은 대부분 길을 향하여 얌전히 도열해 있는 편이다. 그런데 유독 길을 비껴 축을 틀고 서 있는 건물이 종로 네거리에 있는 종로타워이다.
 
서 있는 모양새도 삐딱하지만, 외관 또한 보행인의 눈길을 끈다. 투명유리와 알루미늄 시트(AL Sheet)로 치장된 종로타워는 정도 6백년의 서울 도심에 나타난 외계의 우주선 같아도 보인다. 마치 SF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을 보는 듯하다.
 
또한 밤이면 하이테크한 이미지에 노랑과 보라색의 조명으로 더욱 휘황찬란한 자태를 뽐낸다. 6백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겠다는 듯 독불장군처럼 서 있는 종로타워의 현재 건물 이름은  밀레니엄 플라자 내지는 국세청 건물로 불린다.
 
서울 종로2가 보신각이 있고, 영풍빌딩과 제일은행 본점 그리고 종로타워가 사거리를 중심으로 위치해 있는 곳이 종로 네거리이다. 이곳은 정도 6백년 서울의 도시 1번지에 해당된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졌다면, 종로 네거리는 상업의 요충지에 속한다. 종로타워가 건립되기 전 이 터에는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한국의 근대건축 1세대인 박길룡(1898~1943) 건축가가 설계한 화신백화점은 우리 나라  근대건축물의 대명사로 불렸다. 국내 처음으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던 건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경복궁이나 한때 동물원이었던 창경궁, 남산 등과 더불어 꼭 둘러보아야 할 서울의 명소였던 곳이다.
 
일제시대에도 종로 네거리는 이곳을 중심으로 극장과 야시장이 불야성을 이루던 상업의 중심지였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일본인들도 감히 함부로 넘보지 못했던 민족 자긍심의 장소가 바로 종로 네거리였다.
 
그런데 자본의 힘은 실로 대단하여, 아무 거리낌 없이 외국 건축가의 힘을 빌린 종로타워는 종로 네거리에서 삐딱하게 서서 종로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모습에서 정도 6백년 서울의 상업중심지며, 민족의 자긍심 따위는 읽혀지지 않는다.  6백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종로라는 도시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홀로 독불장군처럼 서 있는 종로타워가 한국건축가들의 비난을 받는 이유이다.
           
 
백화점이 국세청 건물로 불려지기까지
종로타워는 삼성생명 소유다. 현재의 업무시설인 국세청으로 불려지기까지 설계와 시공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건물이기도 하다.처음 공사는 1990년 시작되었다. 그 당시 설계는 미국의 건축가가 맡았는데, 지하 6층, 지상 18층, 높이 90미터 규모였다. 1993년 골조공사가 완료되고, 마감공사가 착수될 시점에서 설계변경 방침이 결정되는 바람에 공사가 전면 중단되었다.
 
이를 새로 개축하는 형태로 건축설계 경기가 이루어졌고, 뉴욕에서 활동중인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의 설계안이 당선되어 공사가 재개되었다. 종로타워의 개축설계를 맡은 라파엘 비뇰리는 입지전적인 건축가다. 남미의 우루과이 태생으로 아르헨티나를 거쳐 지금은 미국에서 활동중이다. 일본 동경의 ‘동경포럼’이라는 건물의 국제현상설계 공모에 당선되어 일약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건축가다.
 
종로타워 현상설계에 참여할 당시에도, 그는 일본에서 동경포럼 건물의 건축작업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동경포럼과 종로타워는 설계수법이나 쓰여진 재료가 흡사하다. 유리와 알루미늄의 재료도 비슷하지만, 종로타워 배면의 갑옷처럼 같은 형태로 접혀진 외부마감 공조시설 또한 동경포럼의 서쪽 측면과 흡사하다.개축은 백화점으로 건축계획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97년 한국의 IMF로 건물의 용도가 업무시설로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의 발길을 적극적으로 끌어당겨야 하는 판매시설이 용도가 바뀌어, 어떤 연유에서인지 국세청이 입주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수선한 정국과 맞물려 심심찮게 세인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물로 비춰지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건물형태와 국세청과는 썩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한 풍수지리가의 말로는 터가 워낙 센 곳이라서 건축재료로 쓰여진 철과, 막강한 권력기관인 국세청과는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하니, 건물도 다 자기 운명을 타고 나는 모양이다.                                  
 


 
 
종로타워의 건축적인 장치와 디자인 수법
지상 18층 90미터 규모의 골조까지 마무리된 공사를 새로 33층 135미터의 초고층 건물로 증축하도록 설계변경이 이루어졌다. 그로 인하여 엄청난 해체 보강작업이 진행되었다. 차라리 건축 구조적으로 볼 때는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유리했지만, 건축주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던지, 그 상태로 설계가 새롭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보와 기둥의 기초공사 확대보강을 위해 3개의 돌출한 둥근 실린더 형태의 구조물이 고안된 것이다. 건물의 전면 좌우와 배면의 둥근 기둥형태로 건물구조의 뼈대인 셈이다. 엘리베이터로 쓰이는 곳들이다. 또한 이 3개의 기둥이 조형감각을 살리며 건물의 성격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그리고 건물 전면 중간에 난간처럼 철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루버(Louver)라고 한다. 이 루버는 15톤 정도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설치되었는데, 백화점 행사시 선전물을 걸도록 고안된 것이다. 이는 바람에 움직이는 대형 선전물로 인하여 건물에 활기찬 표정을 연출하려는 의도였는데, 건물 용도가 바뀌어 용도 폐기된 장치가 되었다. 그리고 종로타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건물 상층부가 뻥 뚫려 있다는 것이다.
 
건물 중간에 옥상정원이 있고, 30미터 가량의 공간을 두고, 그 위에 탑 클라우드(Top Cloud)라는 시설물을 얹었다. 이 뚫린 공간으로 인하여 도심 빌딩 속에서 수직적인 체험을 오히려 더 강하게 느낄 수가 있다. 이는 모두 건물에 강한 역동성을 부여하려는 건축가의 건축 의도이다.
 
탑 클라우드는 리프트 업(Lift Up) 공법에 의해 설치된 것이 또한 이 건물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23층 지상 100미터 지점인 옥상정원에서 길이 64미터, 높이 11.5미터, 폭 40미터, 전체 중량 4,300톤의 철골구조물을 설치 완료하여 정상 134미터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1998년 6월 30일 오후부터 시간당 1~3미터씩의 속도로 3일간에 걸쳐 30여 미터를 유압식 잭을 이용한 리프트 업 공법으로 끌어올려 설치 완료한 것이다.
 
탑 클라우드는 현재 고급 스카이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있다. 기존 도시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때마다 찬사와 함께 우려도 쏟아진다. 이러한 상황은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미묘한 대립으로 그 장소에 새로운 긴장감을 불어 넣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새로 지어진 건축은 기존 주어진 환경에 적극 참여하여 도시의 건축문맥을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된다.건축이 다국적으로 변한 지 이미 오래다.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의 도시를 어떻게 지키고, 가꾸어갈 것인지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안아야 될 숙제이기도 하다.
·서경원(월간 건축세계 편집장) I 사진·박완순(건축전문 사진작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울 소공동의 롯데백화점 본점은 전형적인 근대 건축물로서 21세기의 다양성에서오는

느낌보다는 발전과 이성을 주제로한 듯한 냄새가 강하게 풍겨져옵니다.

상업적인 건물이라 그러한 감정은 더더욱 진하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미달 2005-05-07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 롯데백화점과는 건물이 많이 다르군요.

키노 2005-05-07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달님이 계신곳이 어디신지??? 이건 건물의 측면을 찍은 겁니다. 아마 롯데의 앞면은 거의 대동소이할 겁니다^^
 

○ 모든 과학은 피라미드로 통한다
인류의 발전 단계는 흔히 사용된 도구의 소재를 기준하여 석기·청동기·철기 시대로 구분한다. 이들 소재는 도구로서뿐 아니라 건축과 토목의 재료로도 사용됐는데 이 경우에도 돌의 사용이 가장 빨랐다. 이는 세계 곳곳에 남아있는 피라미드와 스톤헨지, 고인돌과 같은 거석(巨石) 축조물로 증명된다.


인류 최초의 건축 재료가 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주위에 흔한 것을 이용해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적절하게, 때로는 교묘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어진 것을 욕구에 맞게 쓸 줄 아는 존재이기에 건축과 토목작업을 벌일 수 있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돌 가운데서도 거석을 이용한 거석 축조물은 권력을 상징한다. 오직 권력자만이 거석을 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석은 지극히 물질적인 것이지만 그것으로 만든 축조물은 희한하게도 추상성을 띤다. 대지를 딛고 우뚝 솟아있는 피라미드를 보면 고딕 첨탑에서처럼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의 염원을 느끼게 된다. 권력자는 자신이 하늘의 자식(天子)이며, 자신이 죽으면 하늘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거석 축조물 모두가 권력자의 무덤으로 사용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추상 형태는 그 속에 뭇 상징을 담고 있다. 그래서 신비스레 보이며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다. 삼각법을 고안한 피타고라스(기원전 582~497)는 고대 이집트의 척도를 일러 “자연에서 구한 것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했고, 영국의 존 그리브스(1602~1652)는 피라미드의 계단 수와 밑변의 길이를 실측한 공으로 옥스퍼드대학 천문학 교수가 됐으며,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1642~1727)은 피라미드 축조 당시의 길이 단위인 큐빗(cubit)에 관심을 갖고 지구의 둘레 등을 계산하려 했다. 또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 중 피라미드 내부로 수행원 없이 혼자 들어가 한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 운명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

실로 수많은 학자, 군인이 피라미드에 다가가 신비한 축조물의 길이와 경사각, 내부의 중력 등을 측량했고 또 내부 구조를 샅샅이 살폈다. 그 결과 ‘피라미드학(Pyramidology)’이란 학문이 태어났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피라미드에 관한 지식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도 아니고, 한두 사람이 연구하고 실측해 나온 결과도 아니다. 오랜 세월 많은 사람이 현장이나 연구실에서 노력한 결과다.

○ 동서남북 4방향 정확히 가리켜
생소하게 들리는 피라미드학에는 천문학과 지리학, 측지학, 지질학, 수학, 기하학, 건축학, 토목공학, 점성학, 물리학, 도량형학, 유전학, 연대학, 원주율, 황금분할 등 온갖 과학과 기술이 포함된다. 심지어 현대의 미터(m)법도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미터법의 종주국은 프랑스다. 프랑스혁명 직후 새로운 국제계측단위를 만들자는 주장이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당시 유럽에선 메소포타미아 원산의 인체를 기준으로 한 야드·파운드가 통용되고 있었고, 동양에선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정비한 척관법(尺貫法)을 사용하고 있었다. 탈레랑 페리고르는 “이런 것으로는 정밀성에 문제가 있다”면서 1790년 지구의 크기를 기준으로 한 미터법을 제정할 것을 주창했다.

그는 이를 위해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길이를 구한 다음 그 1000만분의 1을 1미터로 한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가까스로 합의는 얻어냈으나 시행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875년에야 국제미터조약이 체결됐고 백금제 미터 원기(原器)는 1889년에 제작됐다. 그러나 미터법의 수리체계와 그 바탕이 되는 십진법은 고대 이집트에서 따왔다.

근대 유럽이 계측 단위로, 또 셈법의 하나로 채택한 십진법은 고대 이집트인이 가졌던 지식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만큼 그들의 지식은 대단했다. 무한한 영생을 유한한 정밀함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카이로 교외의 황량한 기자(Giza) 대지 위에 서 있는 피라미드는 정사각형의 밑면에 네 개의 삼각형이 에워싼 사각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삼각형은 고대 이집트인에겐 우주질서를 상징했다. 그런 만큼 피라미드는 거대하다. 피라미드의 어원이 되는 ‘퓨라미스’(‘본받는다’는 뜻)는 고대 그리스인이 부르던 이름이고 정작 고대 이집트인은 ‘높은 곳’이란 의미로 ‘메르(mer)’라 불렀다.

셀 수 없이 많은 돌(약 230만개)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지은 피라미드는 밑면 한 변이 230m, 높이가 146.5m에 이르는 하나의 산이다. 경사각은 51도52분이라 안정감이 있으며 밑면의 각 변은 동서남북 네 방위를 정확히 가리킨다. 거기다 서로간의 오차도 0.1% 미만이라 정밀함에 있어선 현대 건축물을 뛰어넘는 완벽을 과시한다.

이런 이유로 대니켄 같은 일부 학자는 외계인 축조설을 주장했다. 크레인과 드릴, 헬리콥터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가 없던 시절이라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피라미드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란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몇 백 년 전부터 마스타바 분묘(탁자 모양의 무덤), 굴절식 피라미드(상부와 하부의 경사각이 서로 다른 것), 계단식 피라미드 등 단계적으로 발전해오다 기원전 2500년경 쿠푸 왕 때 지금의 대피라미드가 탄생됐다. 기자 대지에는 대피라미드 외에도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 등이 남아 있지만 쿠푸 왕의 것이 가장 크다.

피라미드 작업에 동원된 천문학과 수학, 기하학, 토목공학 등은 물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매년 반복되는 나일강의 범람에 대비하여 토목과 관개기술을 숙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건 생존방안이었다. 예로부터 대피라미드는 홍수 등 지구에 다대한 영향을 미치는 천체의 변동을 기록하기 위해 축조됐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파라오(이집트의 왕)는 그걸 위해서라도 권좌에 오르면 피라미드 축조부터 서둘렀다. 토목공사야말로 인간 지혜의 총화가 아니던가.

그들은 길이 단위인 큐빗의 사용에 앞서 저울을 만들어 신전에 바칠 봉납품의 무게를 달았고, 1년을 365일로 하는 달력도 사용하고 있었다. 단위와 측량 면에선 그 어느 민족보다도 앞섰다.

○ 노동자 무덤들도 눈여겨 살펴야
피라미드학에 있어 현재 최고의 권위자라 평가받고 있는 미국 시카고 대학의 마크 레너 교수는 “이집트인이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피라미드가 이집트를 건설했다”고 말할 정도다. 파라오는 인력을 적절히 배치하고 시간을 철저히 관리했으며 다친 사람이 생기면 즉각 치료해주는 응급 의료서비스 체제를 갖추었고 필요한 자재를 확보·동원하는 데도 빈틈이 없었기에 무사히 완성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파라오는 고대 세계 최고의 CEO였다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이를 두고 피라미드 축조는 절대 강제노동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가 많다. 모두가 고루 잘 살기 위한 작업이었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설령 파라오의 개인 무덤을 축조하는 작업이었다 해도 그랬을 것이다. 파라오는 영생한다고 믿었으니 영혼은 육신의 죽음과는 관계없이 영원할 것이다. 그건 파라오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었기에 문명을 창조하고 또 기쁜 마음으로 이승에서의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보다 더 큰 사람의 에너지를 어디서 달리 찾을 수 있겠는가. 기계적 정밀함까지 갖춘 피라미드는 그래서 탄생되었다.

경제학자들은 한 나라의 경제가 이륙단계에 접어들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경제만이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전환하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까. 인류는 그 에너지를 영혼불멸의 신앙에서 얻었다고 하면 너무 자의적인 해석일까?

피라미드를 방문할 때 잊지말아야 할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피라미드만 보지 말고 주위에 흩어져 있는 장제전(葬祭殿)과 하안(河岸)신전, 스핑크스, 복원시켜 놓은 ‘태양의 배’와 노동자의 무덤도 눈여겨 살펴야 한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피라미드 내부에까지 들어가(별도의 입장권이 필요하다) 대회랑과 텅 빈 석관만 남아있는 ‘왕의 방’, 그리고 그 방 상부에 양쪽으로 난 환기구멍도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피라미드가 담고 있는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함께 볼 수 있다.
 
[자료출처: 주간조선(권삼윤 역사여행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