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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ogobook.net

알지에 올린 라주미힌님의 글을 퍼왔습니다

중고책 검색엔진이랍니다.

유용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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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8일, 유네스코는 세계 최다 번역서를 발표했다. 1위는 디즈니의 동화책들이었고, 2위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들이었다. 우연히도, 올해는 크리스티가 사망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크리스티는 1976년 1월12일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55년간 거의 쉬지 않고 장편 66편, 단편 20편, 희곡 18편, 추리소설이 아닌 일반 소설 6편과 시집, 중동에서의 체험담, 자서전을 써냈다. 그녀의 책은 20억부가 넘게 팔렸으며, 1년에 벌어들이는 로열티가 여전히 370만달러에 이른다. 그녀가 쓴 동명 작품을 희곡으로 옮겨 연극무대에서 공연 중인 <쥐덫>은 1952년 11월25일 초연된 뒤, 2000년 12월16일, 2만 번째 공연을 기록했고, 지금까지도 런던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이 시대를 초월해 인기를 얻는 이유가 무엇일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녀의 삶을 통해 그녀의 작품세계를 다시 읽어보았다(크리스티의 생애에 대한 자료는 해문출판사의 홈페이지와 해외 팬사이트의 도움을 얻었다).

‘범죄의 여왕’, ‘죽음의 공작부인’이라고 불리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생애는 그녀의 책이 흔히 그렇듯 평온한 영국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1890년 토케이라는 영국 중산층 집안 밀러 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초년기를 지배하는 단어는 놀랍고도 당연하게도 ‘조용함’이다. 어린 애거사는 홈스가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좋아했고, 수줍어하는 성격 때문에 그리고 교육이 어린이의 두뇌를 파괴한다는 어머니의 생각에 따라, 언니나 오빠와 달리 집에서 부모님의 교육을 받았다. 집과 가까운 곳에 이든 필포츠(<어둠의 소리>)라는 유명한 추리소설가가 살았는데, 그녀는 십대 중반에 쓴 소설을 필포츠에게 가져가 보여주었고, 필포츠는 소녀 애거사를 격려해주었다. 그녀는 수줍음을 많이 탔고, 말수가 적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집트 여행을 기점으로 사교 생활에도 적극성을 띠며 뭇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다.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을 지닌 그녀는 1차대전이 일어난 해에 외모가 출중했던 아치볼드와 결혼을 하고 크리스티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1916년, 전쟁의 포화는 세계를 뒤덮고 있었다. 1차대전 중에 크리스티는 간호사로 일했고 그 뒤 약사로 일했는데, 이때의 경험으로 크리스티는 “책 속 수십명의 희생자들을 깨끗하고 더럽지 않은 방식으로 죽일 수 있게 되었다”. 짧은 휴가 동안 크리스티는 추리소설을 쓰는데, 이 작품이 바로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이었다. 크리스티의 소설이 시대의 산물이라는 평은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 전쟁에서 회복되고 있던 영국의 사회상이 그대로 녹아 있는 이 책에는 간호사로 일하면서 습득한 지식과 그녀가 유년기를 보낸 소도시 토케이의 풍경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등장인물들의 삶에는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는 고요한, 내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살인에 특기가 있다”고 밝힌 크리스티의 장점은 데뷔작에서부터 두드러진다. 명탐정 포와로의 데뷔작인 이 책은 출판사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1920년에 빛을 보게 되었다.

살인사건을 일상의 크로스워드 퍼즐처럼

크리스티를 스타로 만든 사건은 1926년에 일어났다. <런던 이브닝 뉴스>에 연재된 그녀의 일곱 번째 작품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 ‘반칙 논란’에 휩싸인 게 첫 번째였다. 영국 추리작가들의 모임인 ‘탐정 클럽’은 책과 독자 사이의 공정한 게임을 규칙으로 삼고 있었다. 작가가 충분한 단서를 독자에게 제공해 함께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규칙의 요지였는데, 이 책은 교묘한 서술 방식으로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영국의 유명한 여류 추리소설가인 도로시 L. 세이어스가 이 책에 대해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을 의심해보는 것은 독자들의 임무”인 건 사실이지만, 크리스티는 동료 작가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그로부터 머지않은 12월3일,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난다. 크리스티가 실종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크리스티의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신경과민 상태이던 크리스티는 이후로도 계획적인지 그렇지 않은지 모호한 채로 남은 실종사건에 휘말린다. 특별한 말없이 외출한 크리스티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차는 버려진 채로 발견되었고, 차 주인을 알 수 있는 옷과 신분증이 발견되었다. 크리스티가 소설에 등장시킨, 살인사건의 무대가 된 인근 호수에서 자살한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다.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그녀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크리스티는 해로게이트 하이드로패틱 호텔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때 크리스티는 기억상실을 호소했다. 의심쩍은 면은 여전히 많았다. 남편의 정부 이름을 살짝 바꾼 닐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투숙한 점, 호텔 투숙 기간 중에 기억상실을 포함한 신변의 불편을 호소한 일이 없는 점, 애초에 보도된 액수로는 불가능한 돈을 그녀가 쓰고 다녔다는 점은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크리스티는 죽을 때까지 당시의 일에 대해서는 정확한 해명을 하지 않았지만, 이후 그녀의 책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던 이혼 역시 1928년, 남편의 부정을 이유로 해냈다.

이혼 뒤 여행과 집필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크리스티는 1930년, 두 번째 남편이 된 맥스 맬로원을 만났다. 크리스티가 죽을 때까지 46년간 지속된 결혼 생활의 상대가 된 맬로원은 그녀보다 14살이나 적은 고고학자였다. 결혼증명서를 작성하면서 두 사람은 나이를 속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애거사 크리스티는 3살을 줄여 신고하고, 맬로원은 5살을 늘려 신고해, 서류상으로 나이 차를 6살로 줄인 것이다. “고고학자만큼 좋은 남편은 없다. 아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많은 관심을 가지므로”라는 크리스티의 유명한 말은 맬로원과의 만족스런 결혼 생활을 방증한다. 이후 크리스티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0시를 향하여> <예고 살인>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전성기를 누렸고, 죽기 1년 전인 1975년, “헤이스팅스, 모두가 에르큘 포와로 같을 수야 없지! 난 그 점을 잘 아네”라며 회색빛 뇌세포의 능력을 자신하던 포와로가 죽는 작품인 <커튼>을 발표했다. <커튼>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중반에 쓴 작품이었다. 포와로를 죽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자신이 죽은 뒤 다른 작가가 포와로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 “포와로는 너무 귀엽기 때문에 내가 죽은 뒤에 다른 사람이 그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는 건 싫다.” 이 작품에서 포와로는 다시 첫 번째 책의 무대가 된 스타일즈 저택으로 불려가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 책은 크리스티의 지시에 따라 1975년이 될 때까지 출간되지 않았다. 크리스티는 1971년, 여성에게 주는 기사 작위인 데임 작위를 받았으며, 20억권이 넘는 책 판매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1976년 1월12일, 위중하지 않은 감기를 앓은 뒤 그녀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내면까지 꿰뚫는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시사회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2세와 EMI 사장 냇 코헨, 애거사 크리스티(왼쪽부터)

평생에 걸쳐 다작을 한 크리스티의 작품 중에는 태작이 없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추리단편집인 <흑거미 클럽>의 서문에 “쓸 만한 트릭은 크리스티가 다 써먹었다”고 투덜거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국의 추리소설가인 P. D. 제임스(<검은 탑>)가 “크리스티의 업적은 정말 대단하다”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 크리스티는 작품명만으로도 트릭의 내용이나 소설의 분위기를 간파할 수 있는 서명과도 같은 추리소설을 여러 권 써내기도 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같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같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같다는 말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관용어구다. 이후 많은 작품들이 그녀의 트릭에서 영감을 얻어 씌여졌다. <친절한 금자씨> <고스포드 파크> <스위밍 풀>에서 ‘크리스티 적’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기수인 아야쓰지 유키토가 쓴 <십각관의 살인>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바치는 노골적인 오마주다. <십각관의 살인>에 등장하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사용한 독자 대 명탐정, 독자 대 작가의 자극적인 논리 게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라는 말은 크리스티의 작품이 왜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랑받는지를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설명 중 하나일 것이다.

크리스티의 작품들은 여성을 그리는 방식에서도 추가점을 얻었다. 크리스티의 가장 잘 알려진 탐정 중 한 사람인 미스 마플은 당대에 드물었던 여자- 안락의자 탐정이며, 게다가 나이 든 독신녀다. 피해자나 범인이나 남녀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았다. 크리스티의 책에서 여자들은 평범하다. 젊고 사랑스러운 여성일 수도 있고, 나이 든 독신녀일 수도 있다. 크리스티의 전성기에 미국 탐정물을 주도했던 하드보일드 작가들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명백하다. “레이먼드 챈들러나 미키 스필레인, 대시엘 해밋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는 금발의 팜므파탈에 매혹된다. 그에 비해 크리스티의 책에서 남녀 인물들이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거의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크리스티의 여성들은 지적이고 활발하다”는 게 <애거사 크리스티와 그녀의 미스터리>를 쓴 문학박사 질리언 질의 지적이다.

독자에게 기대감을 던지는 충격적인 결말

“책을 구상하는 최고의 시간은 접시를 닦을 때”라고 말했던 애거사 크리스티는 실제로 길을 걷거나 좋아하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보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플롯을 머릿속에서 풍성하게 만든 뒤 글로 옮기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등장인물들의 얼굴이 그려지는 순간이 크리스티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열성 독자들은 크리스티에게 편지를 보내 소재가 될 법한 이야기들을 제보하곤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혼자 영감을 얻었다. 수많은 공책들에 수없는 이야기들을, 인물들을 끼적였다. 모든 세부사항이 자리를 잡은 뒤에야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지킨 한 가지 원칙은 모르는 얘기를 억지로 이야기에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무대가 영국의 소도시라는 점(남편과 여행 다니면서 영감을 얻은 <나일강의 죽음>과 같은 예외가 있지만), 등장인물들이 대개 평범한 사람이며, 살인 수법으로 총기를 난사하는 대신 독극물이나 칼을 사용해 살인을 저지른다는 점은 그래서 납득할 수 있다.

<나일강의 죽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은 한결같은 비판을 비껴가지 못한다. 영국 중산층의 시각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외국인들을 그릴 때는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유명한 트릭들은 반칙 논란에 휩싸일 때가 많으며(공정하지 않거나, 너무 인위적이거나), 그 책이 그 책 같아서 서너권을 연속으로 읽고 나면 다른 책으로 입가심을 하지 않고는 계속 읽기가 힘들다. 하지만 크리스티가 쓴 추리소설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애드거 앨런 포가 퍼즐 미스터리를 만들었다면 크리스티는 퍼즐 미스터리 장르를 완성했다”(듀나, <한겨레21> 별책부록 <비밀의 백화점>)는 말대로, 크리스티가 추구한 것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인공성으로 규칙을 세워 살인을 저지르고 또 그 범죄를 폭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에는 많은 악이 숨어 있다”고 주장하며 늘 “내가 전에 정원사였던 키팅씨의 조카 이야기를 해줬었니?” 하는 식으로 잡담하듯 사건을 풀어가는 미스 마플의 인간 내면을 궤뚫는 심미안은 바로 크리스티의 것이다. “모든 살인자는 다른 어떤 이에겐 오랜 친구이다”라는 사실을 크리스티의 책에서는 언제나 체감할 수 있다. 누구의 안에나 살고 있는 살인에의 충동이 우연한(혹은 필연적인) 계기로 인해 폭발하는 일을 ‘인간적으로’ 대단히 그럴듯하게 그리는 동시에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묘사하는 크리스티의 재능은 추리소설의 유행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에도 그 장점이 바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전이 온다. “안이하게 끝을 맺는 순간, 글을 읽는 독자들은 미쳐버릴 것이다”라는 자신의 말대로, 크리스티는 반칙 논란에 휩싸이면서도 인상적인 반전을 만들었다. 반전의 충격으로 독자들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크리스티의 재능은, 그래서 사후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영국의 여류 추리소설가들

도로시 L. 세이어스부터 미네트 월터스까지

원래는 이 자리에 ‘애거사 크리스티가 꼽은 베스트 10’을 소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인터넷 지식 검색만으로 리스트를 얻을 수 있는 정보보다는 매력적인 이야깃거리를 찾아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애거사 크리스티가 꼽은 베스트 10’을 검색하기 귀찮을 독자를 위해 일단 그 리스트를 먼저 소개한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화요일 클럽의 살인> <오리엔트 특급살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움직이는 손가락> <0시를 향하여> <비뚤어진 집> <예고살인> <누명> <끝없는 밤>. 본론으로 들어가면, 아마도 영국 공기에는 여성을 자극하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다(그 맛없는 영국 음식에 영혼이 깃들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영국 여류 추리소설가들의 활약은 그 어느 나라에서보다 눈부시기 때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를 이미 자세하게 소개했지만, 그 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훌륭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그 중 놓쳐서는 안 될 작가들의 국내 출간작들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도로시 L. 세이어스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선배격이다. 매력적 귀족 탐정인 피터 윔지 경이 등장하는 시리즈를 썼는데, 대표작인 <나인 테일러스>는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읽은 사람에게 보람을 안겨주는 명작이다. 단편집인 <의혹>도 있다. P. D. 제임스는 크리스티의 계승자로 불리는데, <검은 탑>과 <나이팅게일의 비밀>이 나와 있다. 다소 평이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기본에 충실한 미스터리물. 엘리스 피터스는 움베르토 에코에게 영향을 준 작가로 ‘케스펠 수사 시리즈’가 모두 번역되었다. 중세 살인극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 <99번째 주검> <성녀의 유골>이 대표적이다. <도버4/절단>을 쓴 조이스 포터도 영국 중산층의 얌전한 아줌마다. 마흔이 넘어 추리소설에 투신한 포터는 추리소설 사상 가장 못생기고 지저분하며 게으른, 매력은 없고 개성은 확실한 도버 경감을 탄생시켰다. 조세핀 테이의 <시간의 딸>은 장미전쟁을 소재로 한 지적이고 ‘안 무서운’ 작품이다. 골드 대거 상을 4번, 미국의 추리 작가 협회상인 에드거 상을 3번이나 수상한 루스 렌들의 <내 눈에는 악마가>는 사소한 오해가 낳는 비극을 소름끼치게 포착해낸 작품이다. <여류 조각가>로 미국 애드거 앨런 포 상을, <냉동창고>로 영국 추리작가협회의 존 크리시 상을, 2003년 <폭스 이블>로 영국 황금단도상을 수상한 미네트 월터스 역시 주목할 만하다. <폭스 이블>은 더없이 영국적인 분위기에서 펼쳐지는 살인극을 그리는데, 그 어떤 추리소설에서보다 조용한 죽음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숨가쁘고 인상적이 되어간다.

글: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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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생 백전노장 임재영 조명기사부터 스물다섯살 터울의 1978년생 강동균 현장편집기사까지 현장영화인 스무명이 마음에 품었던 책을 꺼냈다. 경험과 연령차는 있지만 이들은 공히 장편영화 3편 이상을 작업한 각자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노련한 기사급 스탭이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작업하고 있거나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는 그들에게 책을 추천받고 자필 원고를 청탁했다. 그 결과 영화작업에 실용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전문도서에서 예술적 영감을 주는 화집이나 산문집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맞은 다양한 책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현장영화인 20인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직접 써내려간 추천사와 함께 그들이 오랫동안 탐독했던 책 스무권의 첫 페이지를 이제 넘겨본다.

오감으로 그려낸 인간의 얼굴

<존 버거의 글로 쓰는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열화당 펴냄

류성희/ 미술감독

수전 손탁은 이렇게 존 버거를 치켜세웠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의 작가들 중에서 존 버거에 견줄 만한 작가는 없다. 로렌스 이후로 양심의 명령에 따르는 책임감과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배려를 동시에 보여주는 데 존 버거만큼 성공한 작가는 없었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재능을 꼽을 때 그를 빼놓을 수 없다. 저명한 미술평론가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 사진이론가, 좌파 정치 이론가 등 모든 분야에서 최상급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는 논쟁할 때 열정과 사나움을 가지고 분노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동시에 그의 글은 섬세하고 직관적이며 문장이 지닌 음악성은 울림을 남긴다.

<존 버거의 글로 쓰는 사진>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는 존 버거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시각적인 문체로 그려져 있다. 작가는 그를 분석하지 않는다. 그렇다. 관찰하는 눈이 있을 뿐이다. 너무도 순수하고 성실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인물과 상황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데 모든 시각적, 음악적, 후각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에피소드, 인물들을 대할 때마다 한장의 사진에서 얻는 감흥과 비슷한 무엇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읽는 이가 각자 자신만의 한장의 흑백사진을 찍어내게 만든다. 때로 그것은 그들의 주름과 한숨, 조롱이 담긴 표정의 클로즈업일 때도 있고, 런던광장에서 병든 비둘기를 돌보고 있는 미국산 운동화를 신은 노숙자 여인의 풀숏이기도 하다. 읽는 이는 그 모습에 감춰진 비밀을 탐구하는 데 동참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가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의 근심어린 행복한 시선이 너무도 따뜻해서 종종 눈물이 난다. 마치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비밀스러운 제안을 하는 듯하다.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을 연민하고 사랑하고 안타까워하지만, 결코 직접적으로 그런 투로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모든 문장, 조화, 묘사 속에서 그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진실을 갈구하는 젊은 관찰자의 열정, 그리고 세상의 숨겨진 구조를 파악해내려는 지식인의 예리함을 동시에 지닌 훌륭한 작가다. 그의 이런 시선과 방식을 진정 배우고 싶다.

비틀어 보기의 매력에 제대로 빠지다

<르네 마그리트>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시공사 펴냄

신보경/ 미술감독

어릴 적 대가족의 품에서 자랐지만 유난히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항아리 아줌마가 나에게 걸어와 말을 건네거나 요술봉을 흔들면 방 안이 궁전으로 변한다는 등의 상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요술쟁이로 분한 내가 골목 어귀에 앉아 즐기던 마법은 사람을 난쟁이로 만드는 일이었다. 한쪽 눈을 감고 손을 들어 감지 않은 눈 가까이로 당겨서 지나가는 사람의 발바닥 높이와 잘 맞추면 행인은 금세 난쟁이로 변했다. 같은 방법으로 돌멩이 위에 집을 얹거나 먹던 사과 위로 똥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게 했다. 이런 유치한 장난은 시간이 흘러 친구와 노는 즐거움을 알게 된 뒤에는 자연스레 잊혀졌다. 그런데 사춘기를 막 지날 무렵 미대를 다니던 언니의 책상 위에서 어릴 적 내가 즐기던 그 유치한 놀이를 그림으로 그려낸 책을 발견했다. 표지에는 르네 마그리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처음 만난 마그리트 화집은 장난 같은 그림투성이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장난을 하거나 비슷한 스케치를 늘어놓고는 이름만 다르게 붙이는 등 그것은 엉성한 화집의 전형이었다. 다만 바다 위 허공에 떠 있는 커다란 바위성을 표현한 그림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고흐의 불꽃 같은 그림 옆에는 나란히 놓일 수도 없고 다시 펼쳐보지 않아도 될 책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마그리트와의 인연은 오래 지속됐다. 미대에 입학한 뒤 미술사 시간에 초현실주의를 강변하던 선생님이 보여준 슬라이드 화면에는 바로 그 유치한 그림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여전히 마그리트의 그림은 나에게는 에곤 실러나 구스타프 클림트보다는 별반 매력없이 느껴졌다. 달라진 것은 예전보다는 훨씬 묘사력이 있다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그 묘사력을 왜 저렇게 쓸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가까운 자리에 마그리트의 화집을 두고 심심할 때마다 펼쳐보게 됐다. 몇년 뒤 르네 마그리트를 다시 떠올린 건 <매트릭스>를 보고 나서였다. <매트릭스>와 마그리트의 그림은 왠지 모르게 닮았다. <매트릭스>를 보며 느낀 현재와 실재성에 대한 화두는 내던졌던 마그리트의 화집을 진지하게 다시 집어들게 했다. 그리고 발칙한 비틀어 보기와 삶의 고정관념에 대한 무한한 반문을 제기하는 마그리트 그림의 매력에 나는 제대로 빠져들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지금은 그의 그림을 탐닉한다.

가슴을 찌르는 선배 프로듀서의 말씀

<만추, 이만희> 우리 영화를 위한 대화 모임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이진숙/ 엔젤 언더그라운드 대표

영화감독과 프로듀서들이 영화제작 체험에 관하여 직접 쓴 책들에 관심이 많았다. 프랑수아 트뤼포, 로저 코먼, 로버트 로드리게즈, 시드니 루멧, 크리스틴 바숑 등이 직접 쓴 책들이 그것이다. 요즘은 거의 모든 DVD에 메이킹 비디오들이 수록되어 있어 이런 유의 책들을 대신하는 자료들이 많아졌지만,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이들이 제작현장과 비즈니스계에서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뇌에 찬 글들의 가치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지난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구하게 된 <만추, 이만희>는 이런 맥락에서 나를 사로잡았으며, 게다가 ‘앞으로 영화로 나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었다. 물론 해답까지 주지는 않는다.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한국 영화사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문헌상으로 복원하는 의미에서 출간된 이 책은 제작자 호현찬, 촬영감독 서정민, 시나리오 작가 김지헌과 백결, 배우 신성일과 문정숙, 윤정희, 그리고 이만희 감독의 딸인 영화배우 이혜영 등의 인터뷰와 젊은 영화평론가들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이만희 감독에 관한 회고전적 책이라기보다 그 시대에 영화를 만들었던 제작자, 스탭, 배우들이 회상하며 함께 쓰는 제작일지 성격을 띠고 있다. ‘제작자 킬러’로 정평이 난 이만희 감독의 성깔과 실력을 존중하며, 가산을 탕진해가면서까지 만들어내고야 마는 제작자 호현찬 선생의 집념에 감동받게 되고, ‘대사가 없는 영화 한번 만들어보자’며 의기투합했던 시나리오 작가 김지헌 선생의 창의적 연대감에 감탄하게 된다. 실패한 가장이었지만 성공한 영화감독이었던 아버지를 재해석하는 배우 이혜영의 인터뷰도 묘한 감흥을 준다.

“저의 제작자로서의 신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 영화는 실패하지 않는다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가 좋으면 관객이 든다는 거죠”라는 호현찬 선생의 말씀이 비수가 되어 꽂힌다.

잊을 수 없는 캐릭터들의 향연

<대부> 완역본 마리오 푸조 지음/ 이은정 옮김/ 늘봄 펴냄

심산/ 시나리오작가

영화 <대부>를 극장에서 본 것은 아마도 중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 그 영화를 속속들이 이해했다고 말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라는 것이 있고, 그곳에서는 매우 멋지면서도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리라는 느낌에 압도당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 다시 본 <대부>는 전율할 만한 영화였다. 그것은 ‘비우호적인 진실’을 지그시 응시하는 영화였다. <대부>가 유행시킨 관용어를 그대로 차용한다면 ‘거절할 수 없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이 영화는 마리오 푸조의 밀리언셀러를 각색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 원작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있던가? 내 기억 속의 소설 <대부>는 전부 날라리 번역 아니면 제멋대로 편집되고 윤색을 덧붙인 불량품들뿐이다. 지금도 나는 어느 유수한 출판사에서 펴낸 <대부2>라는 소설을 보유하고 있는데, 어이없게도 영화 <대부2>를 그저 ‘소설적 문체’로 바꾸어 얼기설기 엮어놓은 책이다. 이쯤 되면 ‘해적판’도 아니고 ‘해괴한 변종 창작품’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최근에나마 길벗출판사에서 저작권자인 마리오 푸조의 유족과 정식계약을 맺고 펴낸 완역본 <대부>의 출간은 실로 경하할 만한 일이다.

완역본 <대부>는 내가 아마도 서른번 정도는 보았을 영화 <대부>의 관극 체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각색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소설 <대부>를 탐독해보라. 캐릭터들의 백과사전을 가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소설 <대부>를 품에 안으라. <대부>는 서양 범죄학의 <삼국지>이며 잊을 수 없는 캐릭터들의 각축장이다. 나는 <대부>를 보면서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웠고 <대부>를 읽으면서 비로소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지독한 슬픔의 대사는 이것이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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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1-27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노님, 이 기사 저도 보고 퍼올까 했었는데......
덕분에 편하게 퍼갑니다.
전부 추천 잊지 않을게요.^^
 

영화 소재의 보물 창고

<미궁에 빠진 세계사의 100대 음모론> 데이비드 사우스웰 저/ 이종인 역/ 이마고 펴냄

이원재/ 시나리오작가

혹시 <9시 뉴스> 도중 갑자기 나타나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라고 외친 남자가, 정부나 모 비밀단체에 의해 귀 속에 도청장치가 심어진 채 철저한 감시 속에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지. 또 혹시 몸에 해롭지 않거나 혹은 보약이 될 수도 있는 담배가 이미 발명된 지 오래지만, 각종 금연 보조제 생산업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실용화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지.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말도 안 돼!’ 하고 치부해버릴 만한 이런 황당한 상상을 단 한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다면, 이 책 <미궁에 빠진 세계사의 100대 음모론>을 권한다.

케네디 암살 사건이건, 프리메이슨의 실체건, 로스웰 외계인 해부실험이건, 음모론이라는 것이 주로 권력과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저항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많고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마이너의 목소리인 만큼 작가인 나에겐 매력적인 영화 소재의 보물 창고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게다가 이야기 발상의 시작이, 모든 것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는 평범하지만 잊기 쉬운 진리를 늘 일깨워주기도 하니,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남에게 보여주는 일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분들, 한번쯤 읽어봐도 손해는 아닐 듯싶다.

물론 100가지나 되는 음모론을 담고 있기에 진실을 향해 깊숙이 파고들지 못하고 머뭇대는 느낌이 있는데다가, 각 음모론에 대한 반대 의견과 반박 자료들까지 담고 있어 이 책을 읽고 ‘그래서 뭐가 진짜라고?’ 볼멘소리로 불평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긴가민가 알쏭달쏭한 것이 음모론이지, ‘이건 사실이야!’ 확실하게 외칠 수 있으면 뭐 그런 걸 음모론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근 10년간 폭스 멀더가 뇌까렸던 것처럼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법이니까.

촬영감독들의 땀에 경배를 바치다

<영화 100년사를 빛낸 세계의 영화촬영감독> 데니스 쉐이퍼·래리 살바토 공저/ 이민주 옮김/ 책과길 펴냄

김우형/ 촬영감독

1995년 여름, 런던에서 영화유학 중이던 나는 학교 근처의 유명한 서점가에서 책 구경(!)을 하곤 했다. 없는 유학생 살림에 책이 너무 비싸 살 엄두를 내진 못하고, 필요한 부분만 보고 꽂아두기를 반복했으니 구경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게다. 영화 코너에서 <Masters of Light>를 무심코 집어들었을 때에도 그냥 그렇게 구경 좀 하다가 다시 꽂아놓을 생각이었다. 나는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어떤 발견과 만남의 순간이었음을 그땐 미처 몰랐다. 아무 생각없이 몇줄 읽어나가는데 잠시 뒤 나는 이 책 속에서 거론되는 모든 것들과 마술처럼 교감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내 가슴속에서는 더이상 글로 적힌 단순한 이름들이 아니라, 잡힐 듯 가까이 있는 살아 있는 인물이었고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생생한 영화의 현장이었다. 말 그대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큰맘 먹고 책을 구입하여 반복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말들이 가슴을 쳤다. 그 당시 고민했던 온갖 것들- 영화는 예술인가? 영화학교에선 뭘 배워야 하나? 이 수많은 기술적 데이터들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촬영감독은 뭘하는 사람인가? 나는 촬영감독이 될 수 있을까? 된다면 뭘 어떻게 하여 영화를 만드는 것인가?- 에 대한 다양한 해답들이 책 속에 녹아 있었다. 그 뒤 나는 이 책을 저만의 ‘성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방 촬영의 숙소에서 지치고 잠이 부족한 촬영부원들을 모아놓고 ‘몇 페이지 몇째 줄의 말씀’이라며 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촬영부원들의 반응이 시큰둥해서 그 ‘전도’ 행위가 오래 지속되진 못했지만 나는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그 구절들을 읽어나갔다. 이 책은 골치 아픈 이론서적도 속 빈 기술서적도 아니며 화려하기만한 화보집도 아니다. 이 책은 끊임없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그 끊임없는 노동이 이루어놓은 고도의 기술적 성취에 대한 경배이다.

한글 번역판이 <영화 100년사를 빛낸 세계의 영화촬영감독>이라는 제목으로 2000년 말에 나왔다. 이상한 것은 원서의 15명 촬영감독 중 8명만이 번역판에 실려 있다는 점이고, 참기 힘든 것은 거의 모든 페이지에 웃어넘길 수 없는 오역이 눈에 보인다는 점이다. 서글픈 일은 나의 ‘성경’ 봉독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촬영부원이 그 번역판을 구입했다는 것이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번역판이 얼마 전 절판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통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책

<신화의 힘>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대담/ 이윤기 역/ 이끌리오 펴냄

황기석/ 촬영감독

나는 수년 전 이 책을 DVD로 먼저 보았다. 드라마 구조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신화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 신화집을 즐겨 읽었던 터라, DVD숍에서 우연히 발견한 영화 <신화의 힘>의 겉표지는 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표지에는 제목과 함께 붉은색으로 그리스 신화에 관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영화 <신화의 힘>은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유명한 빌 모이어스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좌담을 담고 있다. 캠벨은 우리가 재미로 읽어온 신화를 인간의 공통된 의식구조 안의 연결체로 설명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문화와 인종을 떠나 우리는 신화적인 드라마의 테두리 속에 산다. 종교적인 신화와 고대 신화, 그리고 도시신화(Urban Myth)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공통된 의식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일을 할 때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공통언어는 영어가 아니라 우정이다.” 아무리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해도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통적인 기반을 가졌기 때문이다. 문화의 차이가 극심한 오늘날 세계에서도 서로의 문화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 내면적으로 “집단 무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설명한다. 단군신화라든가 예수, 석가모니, 그리고 수많은 창조 신화들이 유사한 부분을 갖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캠벨은 이런 예를 든다. 만약 두 사람이 벼랑 끝에 서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균형을 잃어 벼랑으로 떨어지려고 하면 나머지 한 사람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를 구하려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무의식”은 문화와 지형에 따라 서로 연결된다. 내가 이 책을 권하는 이유는 드라마 구조를 단순한 기-승-전-결에 의존해 만드는 방식의 탈피를 원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힘은 인위적인 짜임새에 있지 않다. 인간에게는 서로를 연결하는 혼이 잠재한다. 이 혼을 일깨웠을 때 만인이 공감하는 힘도 나온다. 인간 모두가 한 신화 속의 주인공이라 생각하면 우린 모두 어떤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험을 일생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빛의 비밀을 파헤친 거장들

<명화의 비밀: 호크니가 파헤친 거장들의 비법> 데이비드 호크니 지음/ 남경태 옮김/ 한길아트 펴냄

강성훈/ 조명감독

2년 전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여선생 vs 여제자>를 끝내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상업영화 한편을 끝낼 때마다 어떤 공허함이 생긴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려 하지만 쉬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그때 촬영하는 친구와 우연히 통화를 했다. “<명화의 비밀> 알아?” “응 알아. 얼마 전에 케이블에서 하는 걸 봤는데 재밌더라.” “아니, 책 말야.”

케이블 채널에서 봤던 비슷한 제목의 미스터리영화를 생각했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미술 연구서였다. 바로 시내 서점에 들러서 거금 6만원을 주고 책을 구입했다. 난 원래 책이나 영화를 나눠 보는 편이 아니다. <명화의 비밀: 호크니가 파헤친 거장들의 비법>도 사자마자 그 자리에서 읽어버렸다. 처음 조명을 시작할 때는 막연히 ‘이 일을 하면 굶지 않고 영화를 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조명은 곧 밥이었고 영화를 계속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문제는 조명은 하면 할수록 더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조명은 어렵기보다는 이해하기엔 너무 넓은 세계였다. 다른 영화를 볼 때마다 방법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좋은 조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겨났다. 그때부터 조명과 관련된 기술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대부분 역서였던 그 책들은 렘브란트, 베르메르, 홀바인, 카라바초를 공통적으로 언급했다. 조명의 기본인 하이 콘트라스트, 로 콘트라스트의 텍스트로 그들의 그림은 되살아났다.

<명화의 비밀…>은 그들의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알려주는 보고서다. 내가 읽어낸 결론은 빛이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의 빛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어린 시절 시립도서관에서 문고판으로 간행된 작가별 화보집으로 그들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어떻게 저렇게 그렸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던 화가들의 그림이 조명의 기본이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 원래 존재하던 빛의 존재를 살려낸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명화의 비밀…>은 나에게 과거의 의문을 해소시킨 동시에 빛에 대한 사고를 다시 하게끔 만들었다. 적정한 광량과 시간이 그림을 생성하고 그 그림은 다시 시간이 흘러 사진을 창조하며 영화를 만들어낸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중반부에 베르메르가 카메라 옵스큐라로 작업하는 것처럼. 나에게 <명화의 비밀…>은 내가 보는 빛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든 책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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