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문학과 파괴적인 비평으로 인도 사회를 휘젓는 아룬다티 로이와의 만남
사진/ 프라풀 비드와이(Praful Bidwai) 전 <타임 오브 인디아> 편집장·핵 전문 칼럼니스트
왜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 ·42)는 찬양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가? 어떻게 그이는 문학적 귀재가 되었고 동시에 공공연한 마녀가 되었는가?
지난 6월18일, 마디아 프라데시주의 보팔에서 동료 4명과 29일간 단식을 막 끝낸 그를 보면 해답이 나올까? 단식은 정부가 나르마다댐의 보조용으로 마안강에 댐을 짓기 전에 수몰주민들에게 보상을 하고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하라는 요구였다(나르마다강은 마디아 푸라데시주와 마하라 슈트라주, 그리고 구자라주를 통과하는 인도에서 가장 긴 강 가운데 하나로, 1947년부터 강 본류와 지류에 30개 대형댐과 135개 중형댐, 3천개 소형댐을 짓겠다는 정부 계획에 따라 100만명이 넘는 수몰민이 발생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편집자). 각 신문들은 주민들의 주장을 완강하게 거부한 정부를 비난하며 ‘나르마다의 치욕’이란 머리글을 뽑아들었고, “멍청한 장관은 아룬다티가 단식을 했으니, 이제 정책을 바꿀 일만 남았는가”라고 비꼬았다. 이 일로 정부는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엄청나게 비난받았다.
“이 정부는 모욕적이에요”
사진/ 감옥에서 풀려난 뒤 동료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는 아룬다티. 그는 인도 문학과 사회운동의 보물이다. (Asia Network Documentary)
나는 오랜만에 델리로 돌아온 아룬다티를 찾아갔다. 마안댐, 나르마다, 문학, 핵무기, 섹스, 도덕 같은 여러 복잡한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그동안 주로 철야 농성장이나 시위대 속 아니면 군비축소나 신파시즘 힌두주의를 주제로 삼은 회의장에서 우리가 만난 걸 생각해보면, 그를 집에서 만난다는 건 어쩐지 생경스런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약간 어색해하는 나를 아룬다티는 서부 인도 주민의 전통 차림인 녹색의 긴 치마에 낙타색 윗도리를 걸치고 편안하게 맞아주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2층 서재에 올라가니, 테라스 정원과 절묘하게 어울린 색감들이 우러나는 실내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한때 건축가가 되겠다고 공부하던 아룬다티의 빛감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풍경이었다.
아룬다티는 기다렸다는 듯이 묻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할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모욕적이에요. 이 정부는 댐 철거민뿐 아니라 정의를 믿고 민주적 권리를 믿는 모든 이들을 능욕했어요. 간디의 그 유명한 무기인 단식도 21일을 넘긴 적이 없었잖아요? 악독한 영국 식민정부도 21일 전에 모든 사태를 풀었다는 뜻이죠. 단식까지 하며 항의할 때는 적어도 귀기울이는 것이 사람 모습이고, 또 정부가 할 일 아닌가요?”
아룬다티는 보팔에서 돌아온 바로 뒤였고, 다시 시위자들과 연대해 마안강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라며 가시가 돋친 말들로 정부를 질타했다. “현장에 가보니 논쟁거리랄 것도 없었어요. 철거민들은 ‘찍’ 소리 한번 질러보지 못한 형편이었는데, 정부 놈들이 기득권과 편견만으로 모든 걸 결정하고 말았으니….”
아룬다티의 독설을 듣고 있자니, 그의 오직 한편뿐인 소설 <변변찮은 것들의 신>(The God of Small thing·한국판 번역제목은 ‘작은 것들의 신’)이 풍성한 상징과 은유에 살아 꿈틀대는 표현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창조적인 묘사- 로 문단을 발칵 뒤집어놓은 기억이 슬금슬금 되살아났다.
<변변찮은 것들의 신>은 위대한 소설들이 그런 것처럼, 글을 읽고 있으면 저절로 그 ‘아름다움’에 빨려들었다. 특수한 조건을 지닌 카스트 제도에 뿌리박은 케랄라의 절박한 사랑을 그린 이 소설은 따지고 보면, 별난 것도 없이 세상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일반적 시대상과 인물군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모든 인물들이 독특한 관계로 규정되었지만 사실은 세상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는 점인데, 그게 바로 이 소설의 특징이었다. 또 델리 독자가 읽어도 뉴욕이나 서울 독자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그 ‘승부처’였던 셈이다.
상상과 은유로 핵무장 비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글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멋진 체험을 한 기억이 났다. 그의 글은 케랄라, 그 자체였다. 싱싱하고 풍부한 열대, 어디든 녹음이 드리워져 있고 수백 가지 색깔이 어우러진 케랄라가 그 소설에 은은히 배어 있었으니 말이다.
케랄라는 인도 최초의 ‘빨갱이주’로 자주 공산당이 집권한 탓에 이상향을 꿈꾸는 제3세계 시민들이 열렬히 지지를 보낸 곳이었다. 게다가 1세기께부터 보금자리를 꾸민 기독교도들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변변찮은 것들의 신>을 좋아한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케랄라주의자’들 사이에선 아룬다티가 기독교도와 공산주의자들을 너무 거칠게 다루었다고 불만이 많은 걸 보면…. 또 호사가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소설을 문학적 체계가 빈약한 터무니없는 공상이라고 무시해버리기도 했다.
아무튼 문학적으로 아룬다티가 ‘무서운 아이’로 평가를 받는다면, 그의 정치적 비평은 ‘무책임하고 지식 없는 분석가’, ‘도락 비평가’ 같은 더 험한 소리를 듣는 것도 사실이다.
국가 건설이 최우선이라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인도 사회에서 아룬다티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여자”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더라도 분명한 건, 사회운동 분야에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룬다티의 정치 비평들이 사회상을 반영하고 영감을 불러내는 원천 노릇을 해왔으니, 어이 하리오!
한번 보자. 아룬다티 이전에는 감히 누구도 핵무장을 비판하는 논리로 ‘상상’과 ‘은유’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98년 인도-파키스탄이 핵실험을 끝내자, 맞받아치듯 써낸 <상상의 끝>(The End of Imagination)이라는 수필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핵무기를 이용해 ‘공포문학’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글은 핵개발론자들의 부도덕성을 속시원히 고발했다. “괴팍한 힌두광신주의자들과 주전론자들이 요구하는 폭탄의 동굴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1인공화국을 세우는 게 더 행복한 일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죠.” 아룬다티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예쁘게 웃었다.
짓궂은 생각에 넌지시 한마디 던져보았다. “근데, 왜 최근 인도-파키스탄 사이에 핵전쟁이 현실로 다가왔는데도 델리를 떠나 멀리 도망치지 않았죠?” 그는 이내 겁먹은 아이처럼 심각해졌다. “우리가 어디로 도망칠 수 있나요? 내가 도망치면 모든 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친구들도 나무도 집도 강아지도 다람쥐도 새도 모조리 재로 변할 텐데, 내가 뭘 사랑하며 누가 날 사랑하며, 그래서 어디서 살 수 있겠어요?”
통계자료를 독자들의 감정 속으로
사진/ 나르마다강 현장을 시찰하는 아룬다티 로이(오른쪽)와 환경운동가 메다 파트칼. 그는 마안강 댐의 주민보상을 요구하며 동료들과 29일간의 단식을 했다. (Asia Network Documentary)
나는 평소 사회운동가 아룬다티를 ‘아룬다티답게’ 하는 건, 모든 이들이 식상해하고 보기 귀찮아하는 사회 통계자료를 글쓰기의 밑감으로 삼아 독자들의 감정 속으로 고스란히 실어다줄 수 있는 능력 덕이란 생각을 자주 해왔다. 그 대상이 핵폭탄이건 댐이건 철거민 문제건 또 엘리트개발주의의 폐해건 간에, 그이는 인권단체나 환경운동가, 근본주의 경제학자들과 늘 교통하면서 개발한 통계를 현실 속에 또박또박 박아넣는 기막힌 재주가 있는 글쟁이였다. 그 동력으로 <위대한 공동의 선>(The Greater Common God) 같은 수필도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 운동판에 어슬렁거리며 아룬다티를 사랑해온 이들이 좀 안타깝게 여긴 점이 있었다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아룬다티의 논리가 다른 분야보다 정확도와 전망 면에서 좀 처진다는 것이었는데, 지난해 ‘9월11일 공격’ 뒤에 아룬다티는 <무한한 정의의 대수>(The Algebra of Infinite Justice)라는 수필 하나를 던지며 모든 비판의 종지부를 찍었다. 대 테러전쟁과 무장철학을 앞세운 부시 독트린에 대한 그야말로 파괴적인 비평은 아룬다티를 다시 보게 했고, 모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델리의 여름을 상징하는 뇌우가 아룬다티의 창을 흔들자, 그의 네 마리 강아지 가운데 두 마리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나는 언젠가 그이가 내게 한 말뜻을 깨달았다. “나는 운동가이고 나는 행동하지만 나는 조직만을 좇는 운동가는 아니다.” 아룬다티는 학창시절부터 정치선동가였고, 결국 가족과 충돌하면서 케랄라를 떠났다. 그 뒤로 수많은 논쟁과 투쟁에 휩쓸렸지만 단 한번도 조직이나 정당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자유로운 정신 속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 탓이었을까? 무엇에 참여했든 또는 참여하지 않았든 간에 그에 대한 비난과 논쟁을 거둘 시간이 왔다. 아룬다티는 비범한 인물로, 사회운동의 보물로 반역적인 세력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는 인도 사회 속에 누구보다 깊숙이 참여해왔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