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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ERVIEW 제 522호 2002.3.27

 'A Fearfulness in the Air'

“무슬림도 인도의 일부다”




작은 것들의 神’(The God of Small Things)으로 영국의 부커賞을 수상한 인도의 저명한 여류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42)가 2주 전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녀는 세계적으로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인도 중부 나르마다江의 초대형 댐 건설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법정모독죄로 대법원으로부터 ‘상징적인’ 24시간刑을 언도받고 수감됐었다.

그녀가 델리의 아파트에서 이언 매키넌 뉴스위크 기자의 인터뷰에 응했다. 로이는 힌두 민족주의 정당인 바라티야자나타黨(BJP) 정권을 통렬히 비난했다. 아요디아 소요사태(10년 전 파괴된 이슬람사원 터에 힌두교도들이 힌두사원 건립을 추진하면서 야기된 폭력사태)와 구자라트州에서 5일간 5백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종교분쟁을 정부가 막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구자라트州 방화 사건을 본 느낌은?

가장 나쁜 것은 뉴 델리와 구자라트의 BJP 정권이 그 사건을 제때에 군경(軍警)을 투입하지 못한 행정상의 문제로 치부하려 드는 태도다. 그러나 실상은 BJP 정권이 다년간 주도면밀하게 이같은 추악한 감정(이슬람교도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겨 왔다는 것이다. 만일 당국이 사태를 통제할 의향만 있다면 한시간만에 그렇게 할 수 있다. 경찰이나 州당국과 싸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곳에서 주민집단 간 긴장이 있었던 것도 사실 아닌가?

고드라에서 열차 방화 사건(힌두교도 승객 58명 사망)을 일으킨 사람들, 그리고 구자라트에서 사람들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 사람들은 모두 神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그것을 단순히 주민들간의 집단 폭력사태로 간주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증오의 씨앗이 (의도적으로) 뿌려진 것이다.
어떻게?

BJP 정권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벼랑끝 정치’를 하고 있다. 극단적인 힌두 민족주의를 조장하고는 아요디아에 가서 폭도를 그러모은다. 구자라트에서는 늘 주민들 간에 긴장이 고조돼 있었고, 그 이면에는 파시즘이 도사리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무슬림 상점을 배척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가 나돌기도 했다. 마치 나치독일이 유대인들에게 했던 짓거리와 비슷하다. 오늘날 인도에서는 무슬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공포스러운 일이다. 여기에는 교육받은 중산층과 권력자들이 공범으로 가담하고 있다.


인도가 내리막길을 위태롭게 질주하고 있는 것인가?

집권 전의 BJP는 훨씬 더 미쳐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제정신이기 때문에 BJP로서는 권력을 얻기 위해 그같은 광기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 어떤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국민 대다수가 폭력사태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난 몇주간이 BJP의 최후를 알리는 조종(弔鐘)이었기를 바란다. 국민들은 BJP의 행동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번 폭력사태에 좀더 광범한 원인이 있다면?

기업들의 세계화 추세, 국유기업의 민영화 등으로 삶의 터전이나 생계수단을 잃은 사람들이 양산되는 현상과 힌두 민족주의가 발호하는 현상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좌절감과 분노를 분출하기 위해 종교쪽으로 돌아선다. 빈곤의 심화와 분노의 증대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종교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종교의 영역으로 편입될 수가 있다.


파키스탄과의 갈등도 원인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자국 내부의 목적을 위해 국경 긴장을 이용해 왔다. 파키스탄의 군부 독재자인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자국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통제하고 있다. 반면 인도 정부는 힌두 원리주의를 조장하고 있다. 파키스탄을 악마로 규정함으로써 국민적 단결을 도모하고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과 영혼 속에서 무슬림은 우리의 일부이며 따라서 사랑받아야 한다는 점을 인도는 깨달아야 한다.


이번 폭력사태와 2주 전 당신이 체험한 상황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 사회에 공포감이 감돌고 있다. 대법원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내게 판결을 내린 것이었다. 집단적 광기는 많은 사람들이 생계수단을 박탈당하는 상황과 연관돼 있다. 인프라를 민영화한다는 것은 일반대중을 위한 공적 자산을 팔아치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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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평론》제56호 2001년 1-2월호    

 

  홍수 앞에서

  아룬다티 로이

 

  편집자의 말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인도의 케랄라주의 시골에서 태어나 심각한 빈곤과 계급 및 남녀차별적 환경 속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도시로 나와 고학으로 건축교육을 받았다. 나중에 건축가, 프로덕션 디자이너, 영화작가로서 활동하다가 30대 중반에 첫 소설《작은 것들의 신(神)(The God of Small Things)》을 썼다. 인도의 기층사회의 오랜 가부장적 전통의 압력 밑에서 희생되어온 사람들의 운명을 그린 이 소설은 1997년 미국의 랜덤 하우스를 통해 출판되면서 세계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곧이어 영국의 부커상 수상작이 되기도 하였다. 무명의 건축가에서 세계적인 작가가 된 저자는 출판사의 주선으로 1년여에 걸친 세계여행 끝에 인도로 귀환한 후 얼마 안되어 인도의 핵무기 개발의 어리석음을 가열하게 비판하는 글 ―〈상상력의 종언(The End of Imagination)〉― 을 발표한 데 이어 세계적으로 논란거리가 되어온 나르마다 강 대형 댐 건설 문제에 눈을 돌려 다시 근본적인 비판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보다 큰 공공선(The Greater Common Good)〉이라는 긴 에세이가 집필되었고, 이것은 핵문제에 관한 에세이와 함께 엮어져《삶의 비용(The Cost of Living)》(1999년)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러한 새롭고도 노골적인 반체제적 활동으로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 주류사회로부터 지금까지의 찬사와 존경 대신에 비난과 냉대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이른바 '국익'이 아니라 풀뿌리 민중의 삶과 생명의 서식처를 보호하는 데 겨냥된, 근원적인 의미의 정치적 투쟁이 작가의 임무라고 하는 믿음에 아직 굽힘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이 작가가 1999년 11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 교수의 초청으로, 같은 대학에서 열린 '네루 기념강연'에서 행한 연설을 발췌, 번역한 것인데, 원문은 인도 잡지 Frontline 2000년 2월호에 전문이 실렸고, 이어서 미국의 환경잡지 The Amicus Journal 2000년 가을호에 발췌문이 실렸다.


  많은 사람들이《작은 것들의 신(神)》의 출판을 둘러싼 이야기에 이미 친숙해 있다. 그것은《리더스 다이제스트》류의 낡아빠진 이야기 ― 한 무명 작가가 여러해에 걸쳐 은밀히 자신의 첫 소설을 썼고, 그것이 나중에 40개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수백만부가 팔렸으며, 부커상까지 수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소설을 쓴 사람의 사적인 이야기는 그렇게 행복한 것이 아니다.
  처음《작은 것들의 신》이 출간되었을 때, 나는 그 소설과 동반하여 이루어진 세계여행을 진심으로 즐겼다. 나로서는 전성기였다. 과거에는 내가 가볼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도 못한 곳들을 여행하는 데 1년을 보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쓴 이야기가 여러 문화와 언어와 대륙을 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무척 고무되었다.
  1년 뒤 나는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로 판명되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 나의 예전 생활은 짐을 싸들고 멀리 떠나버렸던 것이다. 인도정부가 핵무기에다가 수백만달러를 쏟아부어넣는 동안 그 무기로 지키려는 땅은 썩어가고 있다. 강이 죽고, 숲이 사라지고, 공기는 숨쉬기가 불가능하게 되어가고 있다.
  내가 사는 도시 델리는 바로 내 눈앞에서 변해가고 있다. 자동차들은 더욱 미끈해지고, 담장은 더욱 높아지고, 늙고 병든 야경꾼들 대신에 젊은 무장 경비원들이 순찰을 돌고 있다. 그러나 하수도, 철로 주변, 공터 같은 음습한 곳에는 어디서나 마치 이처럼 빈민들이 들끓고 있다. 그 빈민들의 아이들은 산란한 마음으로 거리를 헤매고, 선글라스를 쓴 특권층들은 그들을 외면한다. 특권층 사람들의 아이들에게는 선글라스도 필요 없다. 그 아이들은 외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지 않는 법을 이미 터득하였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쉽게 외면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저주받은 운명이다.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날마다 창문 유리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어야 하고, 날마다 추악한 모습들의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낡아빠진 뻔한 것들을 새롭게 이야기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사랑과 탐욕, 정치와 지배, 권력과 권력의 결여 ― 이런 것들에 대해서 되풀이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보면서,《작은 것들의 신》을 쓰면서 여러해 동안 누렸던 즐거움에 대한 기억이 시들기 시작했다. 책의 판매를 통한 금전적 이익이 몰려들어왔다. 내 은행계좌는 급격히 불어났다. 나는 내가 우연하게도 이미 가진자들 사이에 세계의 부를 순환시키고 있는 거대한 파이프에 구멍을 뚫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파이프에서 어마어마한 속도와 힘으로 돈이 쏟아져 나오면서 내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나는《작은 것들의 신》속의 모든 감정, 모든 작은 느낌이 모조리 은화(銀貨)로 교환되어버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조심하지 않는다면, 어느날 나 자신이 은으로 된 심장을 가진 은색의 형체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내 주변의 폐허화된 풍경은 그저 나 자신의 번쩍임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데 이바지할 뿐일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이 이런 상태에 있을 때였다. 1999년 2월 인도 대법원이 중부 인도의 '나르마다' 강에서 반쯤 지어진 상태에서 논란을 빚고 있는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에 대해 4년간 계속되어온 법적 건설중단조치를 무효화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뉴스가 신문들에 보도되었다. 대법원의 명령은 독립투쟁 이래 가장 괄목할 만한 비폭력 저항운동의 하나인 '나르마다 바차오 안돌란(NBA)' ― 나르마다 강을 살리기 위한 풀뿌리 운동조직 ― 에게 큰 타격이었다.
  나는 나르마다 강 유역에서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나르마다에서 여러해 동안 활동해온 사람들 몇몇을 만났다. 내가 알게 된 것은 나를 변화시키고, 매혹시켰다. 그것은 한 정부가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국가이익이라는 이름 밑에서 어떻게 교묘한 방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있는가를 가차없이 폭로하고 있었다. 인도는 물론 티베트가 아니며, 아프가니스탄도, 동티모르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1999년 3월 나는 나르마다 강 계곡으로 갔다. 나는 나르마다 강 계곡이 한사람의 작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돌아왔다. 단순히 작가가 아니라 소설가가 필요하였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소설의 소재로서는 지나치게 품격이 없는 것으로 보여도, 소설가다운 솜씨와 열정으로 여러 분리된 부분들을 통합하여 일관된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소설가 말이다. 나는 나르마다 강의 이야기는 바로 현대 인도의 이야기라고 믿는다.
  '나르마다 유역 개발계획'은 세계에서 가장 야심적인 강 개발계획으로 여겨지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나르마다 강에는 3,200개의 댐이 들어서게 되고, 그 결과 나르마다 강과 그 41개의 지류들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가득 들어차 거대한 물의 계단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댐들 중에서 30개가 대형댐이고, 135개는 중형의 댐, 그리고 나머지는 소형댐들이다. 이 개발계획은 그 유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2,500만명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고, 강과 주변 전체 생태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나르마다 개발계획은 위대한 네루 시대의 꿈에 굳게 뿌리박고 있다. 반세기 내내 네루의 보병(步兵)들은 댐건설과 국가건설을 동일시해왔다. 오늘날 인도는 세계 제3의 거대 댐 건설국이다. '중앙 수자원위원회'에 의하면, 인도에는 대형댐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 3,600개이며, 그중 3,300개가 독립 이후에 건설된 것이다. 또 1,000개 이상이 지금 건설중에 있다.
  댐이 곧 현대 인도의 사원이라고 말한 네루의 연설은 인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모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다. 어린시절부터의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인도 사람들에게 대형댐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옹호되어야 하며, 결코 의심해서는 안되는 하나의 신앙이 되었다. 아이들은 거대한 댐들이 인도 사람들을 굶주림과 빈곤으로부터 구제해줄 것이라고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그러했던가? 댐들이 정말 인도의 식량안보의 열쇠인가?
  오늘날 인도에는 세계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관개지가 있다. 지난 50년 동안 관개지는 140%나 증가했다. 1951년에 우리가 5,600만톤의 곡물을 생산했지만, 지금은 매년 2억 2천만톤 정도를 생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엄청난 진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이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이러한 증산이 모두 대형댐 덕분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증산은 대부분 기계를 동원한 지하수의 이용, 다수확 혼성품종과 화학비료의 사용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총 곡물생산량 중에서 대형댐에 의한 관개지에서 수확된 곡물의 비율을 가리키는 아무런 공식적인 통계가 없다는 점이다. 내가 아는 유일한 조사결과는 '세계 댐 회의'에 히만슈 타케르가 제출한 자료이다. 그 자료는 인도의 총 곡물생산에서 대형댐의 기여도는 겨우 12%라고 추정하고 있다.
  '식품 및 생활필수품 공급부'에 의하면, 총 곡물생산량의 10%, 즉 2,200만톤(오스트레일리아의 총생산량에 해당하는)이 설치류 동물과 곤충들의 먹이로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쥐들을 먹이기 위해 댐을 건설하고, 마을공동체들을 뿌리뽑아버리고, 숲을 물에 잠기게 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임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긴급히 필요한 것은 댐이 아니라 좀더 개선된 식량저장고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전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발 입안자들은 인도의 전력소비가 50년 전보다 20배에 달한다는 사실을 들먹인다. 그런데 아직 70% 이상의 농촌 가구가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가장 가난한 지역들 ― 비하르, 우타르 프라데시, 오리사, 라자스탄 ― 에서는 아디바시(빈민)와 달리트(한때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린) 가구의 80% 이상이 전기 없이 살고 있다. 가난한 자들의 이름으로 생산되는 전력은 끝없이 탐욕적인 부유한 자들에 의해 소비되고 있다.
  공식적으로도, 생산된 전력의 22%가 송전과정과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통해 소실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존 댐들은 급속히 쌓이는 침니(沈泥)로 인해, 댐의 수명이 원래 계획된 것의 절반 때로는 4분의 1로 단축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정부는 새로운 댐 건설을 결정하기 전에 기존 시스템의 효율성을 유지, 증가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이다.
  댐이 건설되고, 사람들은 뿌리뽑혀지고, 숲은 물에 잠긴다. 그리고는 애초에 계획된 것들이 방기되어버린다. 운하는 완성되지 않으며, 댐으로 인한 혜택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득은 건설에 관계된 정치가, 관료, 건설업자들에게만 돌아갈 뿐이다.) 나르마다 강에 건설되었던 최초의 댐이 그 좋은 예가 된다. '마드하야 파라데시'주의 '바르지' 댐은 1990년에 완공되었다. 그 댐의 건설에는 원래 예산보다 10배나 많은 돈이 들었고, 그로 인해 수몰된 지역은 기술자들이 예상한 넓이의 3배에 달했다. 162개 마을의 11만4천명의 사람들이 쫓겨났지만, 그들을 위한 아무런 재정착 프로그램도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형편없는 보상금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일부는 굶어 죽었고, 또 일부는 '자발푸르'의 빈민가로 옮겨갔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무엇인가? 완공 후 10년이 지난 현재, '바르지' 댐으로 관개가 가능하게 된 땅은 수몰된 지역의 넓이에 불과하다. 이 면적은 입안자들이 댐이 건설되면 관개가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땅의 5%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정부는 운하를 건설할 돈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다시 그 하류에 초대형의 '나르마다 사가르' 댐과 '마헤슈와르' 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들이 도대체 왜, 어떻게 일어나고 있을까? 그것은 대형댐들이 곧 부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상상을 넘어서는 규모의 국제적 부패가 여기에 작용한다. 은행가, 정치가, 관료, 환경전문가, 원조기관들 ― 이들이 모두 한통속이다. 그들로 인해 희생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가장 가난하고,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람으로서 취급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대형댐의 건설로 인한 인간적 희생은 비용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기록에도 기재되지 않는다. 속담 그대로, "가난한 자들에게는 뺏아먹을 만한 것이 많다."
  내가 나르마다 프로젝트의 재앙에 대한 글〈보다 큰 공공선〉을 쓸 때, 무엇보다 내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주어진 통계가 아니라 당연히 있어야 할 통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인도정부는 댐 건설로 쫓겨나야 했던 사람들의 수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은 가장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인도 국가도 용서받을 수 없지만, 인도의 지식인 공동체도 용서받을 수 없다.
  비공식적인 추정은 2백만에서 5천만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다. '인도 공공행정 연구소'의 보수적인 자료에 근거한 나의 주먹구구식 계산으로는 3,300만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최근 '기획위원회'의 위원장 N.C. 삭세나는 자기로서는 이주민이 4천만명쯤 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4천만명 ― .
  이렇게 쫓겨나는 사람들의 약 60%는 달리트 또는 아디바시들이다. 인도 전체 인구 중 달리트는 15%, 아디바시는 겨우 8%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가 된다. 이들 희생자들의 인종적 '타자성(他者性)'은 국가건설자들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쫓겨난 수백만명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무도 실상을 모른다. 역사가 기록될 때, 그들은 통계수치로서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인도는 국가적 재정착 정책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쫓겨난 사람들은 서푼도 안되는 보상금을 받게 되어있을 뿐이다. 그중 가장 가난한 달리트와 아디바시들은 애초에 자신들 이름으로 된 땅이 없이, 전적으로 강에 의지해서 생계를 꾸려왔으므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쫓겨난 사람들의 일부는 한번 쫓겨나면 나중에 서너차례나 더 쫓겨난다. 댐 건설로 쫓겨나고, 군대의 사격연습장으로 쫓겨나고, 또다른 댐 건설로 쫓겨나고, 우라늄 광산 때문에 쫓겨난다.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멈추어 쉴 곳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수몰민은 결국 거대 도시의 변두리 슬럼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거기서 그들은 값싼 노동력의 방대한 풀을 형성한다. (그 노동력은 또 보다 많은 사람들을 내쫓는 거대 건설 프로젝트에 동원된다.) ?? 그러나, 악몽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도시 변두리의 지옥 같은 구멍집으로부터도 뿌리뽑혀 내쫓기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는 날이 오는데, 그것은 선거철이 되고, 도시의 부유한 자들이 위생에 대해 까다롭게 굴기 때문이다. 흔히 슬럼의 주민들이 그렇게 하듯이, 그들은 델리와 같은 도시의 공공장소에서 똥을 누다가 총을 맞기도 한다. 실제로 2년 전쯤 그런 일이 있었다.
  이처럼 비자발적인 이주를 강요하는 정치에 대해서 인도사회는 전체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민주적 체제의 피할 수 없는 티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의 차오르는 물 때문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으로부터 강제퇴거를 당하고 있을 때, 인도 육군은 파키스탄 침입자들에 의해 점령된 영토를 하나도 빠짐없이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전선의 병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온 나라가 궐기했다. 중산층 주부들은 모금을 위해 요리 페스티발을 벌였고, 많은 사람들이 헌혈을 위해 줄을 섰고, 음식과 옷과 구급약품을 수집했다. 배우, 스포츠맨, 저명인사들이 군대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국경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나르마다 강 주민에게는 그러한 도움의 손길이 주어지지 않았다.
  주민들의 일부는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집에서 몇날 며칠이든 버티어 서서,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의 높이를 더 올릴 것을 허락한 대법원의 결정에 항의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의 진보를 위해서 대가를 치르기를 꺼리는 사람들로 비쳐지고 있다. 그들은 민족의 이익에 반하고, 발전에 반대하는 사람들로 딱지가 붙여지고, 감옥으로 끌려간다. "물론 슬픈 일이지요. 하지만 가혹한 결정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발전을 위해서는 누군가 대가를 치러야지요" 하는 것이 일반적인 합의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가끔 생각해본다. 만일 정부가 이들 매머드 댐의 완성에 필요한 자금을 위해서 국민 중 가장 부유한 사람들 수십만명의 재산과 은행계좌를 징발하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틀림없이, 그것은 국제적 스캔들이 될 것이다. 신문에는 톱으로 민주주의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가 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거대 댐으로 인한 생태적, 인간적 손상이라는 문제가 돌연히 제1면의 톱뉴스가 될 것이다.
  거대한 댐들이 초래하는 환경재해는 어떠한 것일까? 수몰된 숲, 망가진 생태계, 파괴된 강, 침니로 인해 기능을 상실한 저수체계, 위험에 처해진 야생생물들, 사라지는 생명다양성, 침수 또는 염분 때문에 쓸모없이 된 수백만에이커의 땅 ― 이런 것들은 대차대조표에 나타나 있지 않다. 대규모 댐들이 환경에 미치는 누적적 영향에 대한 아무런 평가조사도 없다.
  300개 댐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한 전문위원회의 조사연구는 전체 프로젝트의 89%가 환경부가 정한 환경지침을 어겼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환경부는 단 하나의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행동을 취하거나 허가취소를 결정하지 않았다.
  이제 지금 건설중에 있는 것 가운데서 가장 거대한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 ― 계획된 댐들 중의 단 하나에 불과하지만 ― 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 건설로 이주해야 할 사람들은, 공식적인 통계로만 40,000 내지 42,000세대, 즉 20만여명에 달한다. NBA에 의하면 실질적인 영향을 받게 될 실제 세대수는 85,000이다. 백만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인 것이다.
  정부의 공식적인 집계와 NBA의 집계 사이의 커다란 격차는 개발에 따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는 데 대한 해석에 관계되어 있다. 정부에 의하면, 댐 건설로 집과 땅이 수몰되는 사람들만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땅과 강, 숲에 삶을 의존하고 있는 오래된 농촌공동체라는 피륙을 찢어놓을 때 그 실밥이 갖가지 방향으로 풀려나갈 것이라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이다. 정부가 간단히 무시하고 있지만, 수몰의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보자. 물에 잠기게 될 32,000에이커의 숲에 대한 보상으로 정부는 댐 근처의 '슐파네쉬와르 야생지 보호지역'의 범위를 확장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이 보호지역의 경계 내로 편입될 숲속의 101개 마을 40,000여명의 아디바시들이 자신들의 삶터를 떠나도록 '설득당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댐 건설 프로젝트로 인한 피해를 입는 사람들로 계산되고 있지 않다.
  수몰될 숲에 대한 보상으로 보호지역을 확대한다는 계획 이외에, 정부가 제안하는 또다른 조처는 땅을 확보하여 사라진 숲의 3배에 달하는 새로운 숲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새로운 숲의 조성 때문에 내쫓겨야 될 사람들은 댐 건설의 피해자로 계산되지 않는다.
  나르마다 강 유역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구자라트' 주정부는 댐이 건설되면 물을 댐 하류로 공급하지 않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건기에는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110마일의 하류 지역에 전혀 물이 없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댐 건설은 하구(河口)의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며, 힐사(아마 인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생선인)와 민물 새우의 산란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다. 강의 하류에는 4만여명의 어민들이 강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도 댐 건설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로 계산되고 있지 않다.
  댐 건설로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일생동안 사실상 돈이나 현대세계와는 아무런 접촉 없이 숲속 깊은 곳에서 살아왔다.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굶어죽거나 아니면 가장 가까운 인접 도시까지 몇킬로나 걸어가서 시장바닥에 앉아 자신들을 상품처럼 싸구려 노동력으로 팔거나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숲속에서 삶에 필요한 모든 것 ― 음식, 땔감, 가축의 먹이, 밧줄, 고무, 담배, 치분(齒紛), 약초, 건축재료 ― 을 얻어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하루 10 내지 20루피의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부터는 강물이 아니라 펌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들이 살던 마을에서 확실히 그들은 가난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삶은 절대적인 재앙으로부터 늘 보호되어 있었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숲이 있었다.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강이 있었다. 가축은 그들의 고정된 저축이었다.
  재정착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은 새로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다. 작거나 크거나 모든 것 ― 똥누는 일에서 오줌누는 일에 이르기까지, 버스표를 사는 일에서 새로운 언어와 돈을 이해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 이 그렇다. 무엇보다 나쁜 것은, 복종해야 하는 법을 배우고, 주인을 섬기는 일을 배워야 하고, 아무에게나 말대답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자급자족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던 존재에서 더욱 가난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의 변덕에 매달려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된다는 것 ― 그 느낌이 어떤 것이겠는가?
  1994년 5월 NBA는 댐 건설 프로젝트의 재고를 요청하는 청원을 대법원에 제출했다. 1995년 초, 수몰지역 주민들의 재정착 계획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한가지 이유로 ― 다른 모든 요인은 무시한 채 ― 법원은 공사중지를 명했다. 1999년 2월, 재정착 문제에 아무런 근본적인 변화도 없고, 재정착한 것으로 되어있었던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자기들이 원래 살던 마을로 되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공사중지 명령을 철회하고, 공사재개를 허가하였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터로부터 내쫓기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다고 선언하면서 여기에 응답했다. 법원은 법원의 명령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NBA는 이 조치를 거부했다. 언론에 보낸 성명에서 NBA를 이끌어온 메다 파트카르는 만약 법원이 더이상의 공사를 허락한다면 그녀 스스로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구자라트' 주정부는 NBA가 법원을 모독했기 때문에 청원자로서의 자격을 박탈해달라는 청원을 제출하였다. 또한, 주정부는 내가〈보다 큰 공공선〉을 집필함으로써 법정의 존엄성을 훼손하였으므로 범죄행위로 다스려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1999년 7월과 8월, 몬순 기후가 계속되는 동안 나르마다 강의 수위가 높아지고, 마을 사람들이 법원의 결정에 저항하여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 속에서 집을 떠나지 않고 버티고, 농작물이 물에 잠기고 있는 상황에서, NBA가 정부 관리들이 실제 있지도 않은 재정착이 진행중이라는 허위 서류에 서명했음을 폭로하고 있을 때, 대법원의 세 대법관은 세 차례 회의를 가졌다.
  그들이 논의한 유일한 문제는 법원의 존엄성이 훼손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1999년 10월, 법원은 나와 NBA를 처벌해달라고 구자라트 주정부가 제출한 청원에 대한 답변을 내놓았다. 판사들은 "악랄한 비난과 속악한 폭로주의로 정의의 물결이 오염되어서는 안된다"고 밝히면서도 우리들을 상대로 법정 모독에 따른 절차를 개시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면서 판사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아룬다티 로이씨가 국가의 사법부에 관련하여 혐오스러운 글을 계속 써왔다는 것을 보여줄 만한 어떠한 증거도 우리의 눈에 포착되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도 지금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경고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해왔던 방식대로 나갈 것인가?
  경고를 따르는 게 신중한 처신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예술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이 될 것이다. 강이 작가를 필요로 하듯이, 작가는 강을 필요로 한다고 나는 믿는다. 작가만이 아니라, 시인, 화가, 춤꾼, 배우, 영화제작자 ― 모든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계속 살아있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계속 일을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너무도 쉽게 포기해버린 정치적 투쟁을 다시 우리의 것으로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이 지점에서 현실을 외면해버린다면, 우리의 예술은 별로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될지 모른다. 나는 우리 모두가 큰 소리로 정치적 성명서를 발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마티스를 지지하고, 창턱에 금붕어가 걸쳐져 있는 그의 그림에 대해 전혀 유감이 없다. 내가 뜻하는 것은 다만 우리가 때때로 책에서 눈을 들어 우리 둘레의 세상 형편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위치를 켜서 불을 밝히고, 냉방을 하고, 목욕을 즐길 수 있도록, 누군가가, 먼 곳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의 높이는 289피트이다. 이로 인해 물에 잠긴 곳은 댐이 453피트의 높이로 완공될 경우 수몰될 전체 지역의 단 4분의 1밖에 안된다.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은 채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법원의 허가 이후에도 주정부는 아직 댐 공사를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 올해 들어서, 대법원은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 건설이 환경부의 공식 허가를 받은 바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시 공사를 중지시켰다. 어쩌면 이것이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댐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전면적 재고를 요청한 NBA의 청원은 아직 대법원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물론 정부가 이미 이 프로젝트에 엄청난 돈을 사용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업을 더 계속한다면 이미 쓴 것의 여섯배에 달하는 돈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멀쩡한 돈을 헛되이 내버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지금 현재의 높이로 댐을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상세한 기술적 제안도 마련되어 있다. 지금처럼 낮은 높이의 댐으로 프로젝트를 재조정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확실한 비참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수천에이커에 달하는 숲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며,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농토의 일부를 수몰로부터 건지는 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비폭력과 민주주의 원칙의 승리를 의미하고, 우리에게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함으로써 나는 인도에서 매우 인기없는 인물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선거에 출마할 사람이 아니다. 나는 국가가 아니라 강과 계곡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언제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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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평론》제61호 2001년 11-12월호    

 

  왜 미국은 당장 전쟁을 중지해야 하는가

  아룬다티 로이

 

  2001년 10월 7일 일요일 아프가니스탄에 어둠이 깊어지자, '테러에 맞서는 국제연대'(새로운 고분고분한 유엔 대체기구)의 뒷받침을 받아, 미국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였다. 텔레비젼들은 크루즈 미사일, 스텔스 폭격기, 토마호크, '참호분쇄' 미사일, M-82폭탄이 난무하는 컴퓨터 동영상을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세계 전역에서, 어린아이들은 눈이 동그랗게 화면을 보면서, 새 비디오게임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을 멈추었다.

  이제 이름뿐인 유엔은 공습을 합법화해달라는 요청도 받지 않았다. (한때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말했듯이, "우리는 다자적으로 할 수 있을 때는 다자적으로, 단독으로 해야 할 때는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증거'는 '국제연대'에 참여한 친구들 사이에 공유되었다.

  그들은 '증거'가 법정에서 효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어떤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수세기 동안 유지되어온 법의 원칙이 간단히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종교적 근본주의자, 민병대, 또는 민중의 저항운동에 의한 것이든, 공인된 정부에 의한 보복전쟁이든, 테러행위는 변호될 수도, 정당화될 수도 없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폭격은 뉴욕과 워싱턴을 위한 복수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민중에 대한 또하나의 테러행위이다.

  무고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모두가 뉴욕과 워싱턴에서 끔찍하게 죽은 민간인 희생자 수에 포함되어야 하며, 제외되어서는 안된다.

  민중이 전쟁의 승리자가 되는 일은 거의 없고, 정부가 전쟁의 패배자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민중은 죽임을 당한다.

  정부는 껍질을 벗고, 재편된다. 정부는 머리가 아홉 달린 죽지 않는 괴물이다. 그들은 국기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여, 생각하지 못하도록 마비시킨 다음, 그리고는 그 국기를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수의로 사용한다. 양측 모두, 미국이든 아프가니스탄이든 민중은 이제 정부가 저지르는 행동에 볼모가 되었다.

  부지중에, 두 나라 민중은 공통의 운명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맹목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테러 현상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에 투하되는 폭탄 하나하나는 탄저균, 추가적인 하이재킹, 기타 테러에 대해 증폭하는 미국인의 집단 히스테리와 짝을 이룬다.

  오늘날의 세계가 직면한 테러와 야만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쉬운 길은 없다. 지금은 인류가 멈추어 서서, 고금을 막론한 집단적인 지혜의 샘을 팔 때이다. 9월 11일에 일어난 일은 세계를 영구히 바꾸어놓았다.

  자유, 진보, 부, 테크놀로지, 전쟁 ― 이러한 낱말들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정부들은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고, 조금은 정직하고 겸허하게 그들의 새로운 과제에 접근해야 한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국제적 연대의 지도자들의 내적 성찰을 암시하는 아무런 신호가 없다. 탈레반도 마찬가지다.

  공습을 발표하면서, 조지 부시 대통령은 말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이다." 미국이 총애하는 대사(大使) 토니 블레어(영국 수상의 직책도 갖고 있는)도 되뇌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제 안다. 돼지가 말이고, 소녀가 소년이며, 전쟁이 평화라는 것을.

  며칠 후, FBI 본부에서 연설하면서, 대통령 부시는 말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소명이다. 이것은 미합중국의 소명이고, 세계 자유국가 대부분의 소명이다. 증오를 거부하고, 악을 거부하는 근본가치 위에 세워진 국가는 살인자를 거부하고 악을 거부한다. 우리는 지치지 않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교전을 했던 ― 그리고 폭격을 했던 ― 나라들의 목록을 보자. 중국(1945-46, 1950-53), 한국(1950-53), 과테말라(1954, 1967-69), 인도네시아(1958), 쿠바(1959-60), 벨기에령 콩고(1964), 페루(1965), 라오스(1964-73), 베트남(1961-73), 캄보디아(1969-70), 그레나다(1983), 리비아(1986), 엘살바도르(1980년대), 니카라과(1980년대), 파나마(1989), 이라크(1991-99), 보스니아(1995), 수단(1998), 유고슬라비아(1999), 그리고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확실히 미국은 지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인 미국은 말이다.

  미국이 떠받치고 있는 자유는 어떤 자유인가? 미국 국경 내에서는,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 예술표현의 자유, 식습관의 자유, 성적 자유(어느 정도까지는), 그리고 그밖의 많은 모범적이고 멋진 것들의 자유가 있다.

  미국 국경 바깥에서는, 지배하고, 굴욕을 주고, 굴복시키는 자유이다. 이 자유는 보통 미국의 진정한 종교 즉, '자유시장'에 봉사하기 위해서 행사된다. 그래서, 미국정부가 "무한한 정의를 위한 작전"이니 "항구적 자유를 위한 작전" 등으로 전쟁에 이름을 붙일 때, 제3세계의 우리들은 두려움보다 더 큰 공포를 느낀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무한한 정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무한한 불의가 되며,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항구적 자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항구적 굴종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테러에 맞서는 국제연대'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로 된 비밀결사이다. 그들은 세계의 무기를 거의 다 제조·판매하고, 그들은 대량살상 무기 ― 화학무기, 생물학무기, 핵무기 ― 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현대사에 있어서 대부분의 민족학살, 정복, 인종청소, 인권침해에 책임이 있는 전쟁을 해왔고, 수많은 독재자와 폭군들을 지원하고, 무장시키고, 그들에게 돈을 주었다. 그들은 폭력과 전쟁의 신을 섬겨왔다. 탈레반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탈레반은 냉전의 뒤치다꺼리 마당에 널린 쓰레기, 마약, 지뢰들로 된 어지러운 잡동사니 속에서 태어났다. 탈레반의 가장 나이 많은 지도자들이 40대 초반이다. 그들 가운데는 한쪽 눈이 없고, 한쪽 팔 또는 다리가 없는 불구자가 많다. 그들은 전쟁으로 찢겨지고 황폐화된 사회에서 자랐다.

  소련과 미국은 지난 20년간 약 450억달러(300억파운드)어치의 무기와 탄약을 아프가니스탄에 쏟아부었다. 철저히 중세적인 사회가 맛본 유일한 근대성은 최신 무기였다.

  그 시기에 성장한 소년들 ― 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잃었다 ― 은 장난감 대신 총을 가졌고, 가정생활의 안전과 안락을 전혀 알지 못했고, 여성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제, 어른이 되고, 지배자가 된 탈레반은 여자들을 때리고, 돌을 던지고, 강간하고, 잔인하게 다룬다. 그들은 달리 어떻게 여자들을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오랜 전쟁은 그들에게서 부드러움을 제거해버렸고, 친절과 인간적 자비심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야만성을 자신의 동포들을 괴롭히는 데 사용해왔다.

  그들은 그들 주변에 빗발치듯 퍼부어 내리는 폭탄의 폭발 리듬에 맞춰 춤을 춘다.

  부시 대통령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세계의 민중은 탈레반과 미국정부 중에서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 인류 문명의 모든 아름다움 ― 미술, 음악, 문학 ― 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양극에 있는 이 두 근본주의자들 너머에 있다. 세계의 민중이 모두 중산층 소비자가 된다는 것은, 그들이 전부 어떤 특정 종교의 신자가 될 수 없듯이,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선과 악, 또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이 아니다. 어떻게 다양성을 수용하는가, 어떻게 헤게모니 ― 경제, 군사, 언어, 종교, 문화 등 모든 종류의 헤게모니 ― 를 장악하고자 하는 충동을 억제하는가가 문제이다.

  단작(單作)이 얼마나 위험하고 취약한지는 에콜로지스트는 누구나 알고 있다. 누군가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계는 건강한 야당이 없는 정부를 갖고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일종의 독재체제가 된다. 그것은 세계에 하나의 비닐봉지를 씌우고 숨을 못 쉬게 하는 것과 같다. 언젠가는 그 비닐봉지는 찢겨질 것이다.

  이 새로운 전쟁 이전에 20년간의 전투로 150만명의 아프간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프가니스탄은 다 부서졌는데, 지금 그 잔해들이 더 작은 먼지로 부서지고 있다. 공습 이틀째, 미국 조종사들은 할당된 탑재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고 기지로 돌아오고 있었다. 한 조종사의 표현대로, 아프가니스탄은 목표물이 많은 환경이 아니다. 펜타곤에서의 기자회견에서, 미국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미국은 이제 목표물이 다 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첫째, 우리는 목표물들을 다시 폭격할 것이고, 둘째, 목표물이 떨어져가는 건 우리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회견장에 폭소를 자아냈다.

  공습 3일째, 미 국방부는 "아프가니스탄의 제공권을 장악"했다고 큰소리쳤다. (그들이 아프가니스탄 비행기를 2대 파괴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16대 모두를 파괴했다는 말인가?)

  아프가니스탄 지상에서는 북부동맹군 ― 탈레반의 숙적이고, 따라서 '국제적 연대'의 새로운 우방인 ― 이 카불 점령을 위해 진격을 하고 있다. (기록을 위해 하는 말인데, 북부동맹군의 전적은 탈레반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불편하기 때문에 세부적인 것은 얼버무린 채 지나가고 있다.) 잘 알려진, 온건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북부동맹군의 지도자 마메드 샤 마수드는 9월 초 자살폭탄 공격으로 죽었다. 나머지 북부동맹군은 잔인한 군사령관들과 공산주의자 출신들과 고집센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부서지기 쉬운 연합체이다. 그들은 종족적 혈통에 따라 나누어진 이질적 집단이며, 그 가운데에는 과거 아프가니스탄에서 권력의 맛을 본 사람들도 있다.

  미국의 공습이 있기 전, 북부동맹군은 아프가니스탄의 약 5퍼센트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국제연대'의 도움과 '공중엄호'를 받으며 탈레반을 무너뜨릴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한편, 탈레반 병사들은 임박한 패배를 감지하고 동맹군으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전투병력이 진영을 바꾸고 군복을 갈아입느라 바쁘다. 그러나 이 시니컬한 상황은 지금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사랑이 증오이고, 북이 남이고, 평화가 전쟁이다.

  세계의 강대국들 사이에는 아프가니스탄에 '대의제(代議制) 정부'를 세워준다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1973년부터 로마에서 망명해 살고 있는 89살의 아프가니스탄 전 국왕 자히르 샤의 복위를 운위하고 있다. 그것이 게임이 진행되는 방식이다.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다가는 축출해버리고, 모자헤딘에게 재정지원을 해주다가는 폭격하여 산산조각 내버리듯이, 자히르 샤를 세우고는 그가 말을 잘 듣는지 보자는 것이다. (대의제 정부를 '세워주는' 것이 가능한가? 당신은 민주주의를 '주문'할 수 있는가? 엑스트라 치즈와 잘라페노 후추와 함께?)

  민간인 희생자들에 관한 보고, 아프간 민간인들이 폐쇄된 국경으로 몰려들어 텅비어버린 도시들에 관한 보고가 조금씩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주요 간선도로는 폭파되거나 봉쇄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11월 초가 되면, 이번 겨울 동안 굶어죽을지 모르는 아주 실제적인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 수백만명의 아프간 사람들(유엔에 따르면 750만명)에게 식량수송차가 다가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겨울이 시작될 때까지 남은 기간에,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전해주기 위한 시도가 있든지 아니면 전쟁이 있든지 둘 중 하나일 거라고 그들은 말한다. 둘다 동시에 가능할 수는 없다.

  인도주의적 지원의 제스처로서 미국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비상식량 37,000꾸러미를 공중투하하였다. 그들은 모두 50만꾸러미를 투하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절박하게 식량이 필요한 수백만명 중에서 50만명의 단 한끼 식사밖에 되지 않는다.

  구호요원들은 그것을 냉소적이고 위험한 홍보전략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공중투하 식량꾸러미가 단지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우선, 식량이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 손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위험한 것은, 식량꾸러미를 집어오려고 달려나가다가 지뢰에 날려가버릴 위험이다. 구호품을 받기 위한 비극적인 경주를 해야 한다.

  그런데도, 식량꾸러미는 사진 기사거리가 되었다. 그 내용물들이 주요 신문들에 열거되었다. 이슬람교도의 식사법에 따라 채식주의 식단으로 했다는 것이다! 미국 국기로 장식된 노란색 꾸러미에는 쌀, 땅콩버터, 콩 샐러드, 딸기잼, 크래커, 건포도, 납작 빵, 애플푸르트 바, 양념, 성냥, 플라스틱 포크와 나이프 한벌, 냅킨, 그림으로 된 사용설명서가 들어있다.

  3년 동안 무자비한 가뭄이 계속된 잘랄라바드에 공중투하되는 비행기 기내식사라니! 문화적 무감각, 몇달이나 계속된 혹독한 굶주림과 지독한 가난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에 대한 몰이해, 이 엄청난 비참까지도 자기 이미지를 드높이는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미국정부의 시도 ― 차마 말이 안 나온다.

  잠깐 시나리오를 뒤집어보자. 탈레반 정부가 뉴욕 시를 폭격하면서 줄곧 폭격의 실제 목표물은 미국정부와 그 정책들이라고 말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폭격을 하는 사이사이 탈레반이 아프간 국기를 꽂은 난과 케밥이 들어있는 봉지를 몇천개 투하했다고 가정해보자. 뉴욕의 선량한 사람들이 아프간 정부를 용서할 마음이 생길까? 그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식량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것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들이 그 수모와 그 깔보는 태도를 잊을 수 있을까? 루디 줄리아니 뉴욕 시장은 사우디 왕자가 준 선물 1천만달러를 되돌려보냈다. 왜냐하면 그 선물이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한 우정어린 충고 몇마디와 함께 전해졌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부자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인가?

  이런 종류의 분노를 진압하기는커녕 불을 붙이는 것이 테러리즘을 만들어낸다. 증오와 보복은 일단 드러나면 돌이킬 수가 없다. '테러리스트'나 그 '지지자' 한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수백명의 죄없는 사람들 또한 죽이게 된다. 백명이 죄없이 죽을 때마다 미래의 테러리스트 몇명이 태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어떻게 될까?

  수사는 잠시 접어두고, 세계는 아직 '테러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정할 만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였다. 한 나라의 테러리스트는 종종 다른 나라의 애국투사이다. 문제의 핵심에는, 폭력에 대한 세계의 뿌리깊은 양면적 태도가 있다.

  일단 폭력이 합법적인 정치적 수단으로서 받아들여지면, 테러리스트(폭도이든 애국투사이든)의 도덕성과 정치적 용인 여부가 시끄러운 논쟁거리가 된다. 미국정부 자신은 전세계의 수많은 반역자와 폭도에게 자금과 무기를 대주고 은신처를 제공해왔다.

  CIA와 파키스탄의 ISI는 80년대 소련점령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테러리스트로 보았던 모자헤딘을 훈련시켰고 무장시켰다. 오늘날, 파키스탄 ― 이 새로운 전쟁에서 미국의 동맹국인 ― 은 국경을 넘어 인도의 카슈미르로 들어간 폭도들을 후원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그들을 '자유의 투사'라고 찬양하지만, 인도는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 인도정부는 테러리즘을 후원하고 부추기는 나라들을 비난하지만, 인도 군대는 과거 스리랑카에 자치국 건설을 요구하는 분리파 타밀 반란군 ― 수많은 유혈 테러행위에 책임이 있는 LTTE ― 을 훈련시킨 적이 있다.

  (CIA가 자기들의 목적에 이용하고 나서 모자헤딘을 버린 것처럼, 인도는 여러 정치적 이유로 갑자기 LTTE에 등을 돌렸다. 1989년 인도 수상 라지브 간디를 암살한 것은 분개한 LTTE의 자살 폭파범이었다.)

  정부와 정치가는 자신의 좁은 목적을 위해 거대하고 격렬한 인간의 감정을 조작하는 것이 당장의 성과는 거둘 수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가차없이 재난을 초래하는 결과를 맞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적 편의를 이유로 종교적 감정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행태는 정부나 정치가들이 사람들 ― 자신을 포함하여 ― 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유산이다.

  종교적 . 민족적 편협성이 난무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종교 텍스트 ― 성경에서 바가바드기타에 이르기까지 ― 가 핵전쟁에서 민족학살과 기업 세계화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라도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9월 11일의 폭거를 저지른 테러리스트들을 추적해서 붙잡아 벌을 주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전쟁이 그들을 추적하는 최상의 방법인가? 건초더미를 불태운다고 바늘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이 분노를 증폭시키고, 우리 모두의 세계를 생지옥으로 만들지 않을까?

  결국,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얼마나 많은 은행계좌를 동결하고, 얼마나 많은 대화를 도청하고, 얼마나 많은 이메일을 가로채고, 얼마나 많은 편지를 열어보고, 얼마나 많은 전화를 도청할 수 있는가? 9월 11일 이전에도, CIA는 사람으로서는 다 처리할 수도 없는 많은 정보를 모았다. (때로는 너무 많은 자료가 첩보활동을 방해할 수 있어서, 미국 첩보위성이 1998년 인도 핵실험의 사전준비를 완전히 놓쳤다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감시의 규모만으로도 어머어마한 병참문제를 일으키고, 윤리와 시민적 권리에 악몽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모두 미쳐버리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자유 ― 그 소중하고도 소중한 것 ― 가 제일 먼저 희생될 것이다. 자유는 이미 상처를 입었고, 위험할 정도로 피를 흘리고 있다.

  매일 전쟁이 계속되면서, 분노의 감정이 세계에 확산되고 있다. 언론이 교전지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이 거의 또는 전혀 불가능하다. 어쨌든, 특히 미국의 주류언론은 군당국과 정부관리가 배포해준 발표문을 가지고 놀면서 만족해 하고 있다. 아프간의 라디오 방송국들은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탈레반은 언제나 언론을 철저히 의심해왔다. 이 프로파갠다 전쟁에서,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얼마나 파괴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추정은 전혀 없다. 믿을 만한 정보의 부재 속에서 터무니없는 루머가 퍼지고 있다.

  세계의 이쪽에서 땅에 귀를 대보면, 두드리는 소리, 무시무시한 분노의 북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제발, 제발, 이제 전쟁은 그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고성능의 스마트 미사일들은 그리 똑똑하지가 않다. 그것들은 억눌린 분노의 창고들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최근 큰소리를 쳤다. "나는 전쟁을 시작하면, 200만달러짜리 미사일을 가지고, 10달러짜리 텅빈 천막을 때려 낙타의 엉덩이나 맞추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그의 미사일에 값할 만한 목표물이 아프가니스탄에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마도, 회계장부의 수지를 맞추려면, 그는 세계의 가난한 나라의 값싼 목표물과 값싼 생명에 사용할 값싼 미사일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국제연대' 국가의 무기 제조업자들에게는 사업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다. 그것은, 예를 들어 '칼라일 그룹' ―《산업표준(Industrial Standard)》이 운용자금 130억달러의 세계 최대 민간기업이라고 묘사하는 ― 에게는 도무지 말이 안될 것이다.

  칼라일은 방위 부문에 투자하고 있고, 군사적 충돌과 무기 소비로 돈을 벌고 있다.

  칼라일은 나무랄 데 없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경영하고 있다. 프랭크 칼루치 전 미국 국방장관이 칼라일의 회장 겸 관리이사이다.(그는 도널드 럼스펠드의 대학시절 룸메이트였다.) 칼라일의 다른 파트너들은 제임스 A. 베이커 3세 전 미국 국무장관, 조지 소로스, 프레드 멀렉(아버지 조지 부시의 선거운동 참모였던)을 포함한다. 한 미국 신문 ―《볼티모어 크로니클 앤드 센티넬》― 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아시아 시장에서 칼라일 그룹의 투자대상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었다고 한다.

  그는 아시아의 잠재적인 정부-고객에게 '선물'을 주기 위한 적지않은 액수의 돈을 받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아 ― 진부한 말이지만, 완전히 한통속이다.

  그런가 하면, 전통적인 가족사업의 다른 부분, 바로 석유가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아들)과 딕 체니 부통령이 모두 미국 석유산업에서 큰돈을 번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 북서쪽과 접경해 있는 투르크메니스탄은 세계에서 세째가는 가스 매장량과 60억배럴로 추정되는 석유 매장량의 보유국이다. 그것은 앞으로 30년간 미국의 에너지 필요량(또는 한 개발도상국의 약 200년간의 에너지 요구량)을 충족시키에 충분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미국은 항상 석유를 안보문제로 보았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켰다. 미국의 걸프지역 군대주둔이 인권에 대한 염려와는 별 관계가 없고, 거의 전적으로 석유에 대한 전략적 이해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카스피해 지역의 석유와 가스는 현재 북쪽으로 이동하여 유럽시장으로 가고 있다. 지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란과 러시아가 미국의 이익에 주요 장애물이다. 1998년, 딕 체니 ― 당시 석유산업계의 거물이었던 '할리버튼'의 최고 경영자로서 ― 는 이렇게 말했다. "카스피해 지역처럼 갑자기 전략적으로 중요해진 지역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마치 기회가 밤사이에 생겨난 것이나 다름없다." 정말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수년 동안, '유노칼'이라는 미국의 거대 석유회사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통과하여 아라비아해로 가는 송유관 건설 허가를 얻기 위해 탈레반과 협상을 해왔다. 아라비아해로부터 유노칼은 돈이 되는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신흥시장'에 접근하기를 희망한다. 1997년 12월, 탈레반 대표단이 미국으로 갔고, 휴스턴에서 미국 국무성 관리들과 유노칼사 중역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때는 탈레반의 공개처형 취미와 아프간 여성들에 대한 처우가 지금처럼 비인도적인 범죄라고 주장되지 않았다.

  그후 6개월에 걸쳐서, 수백개의 격분한 미국 여성단체가 클린턴 행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그 협상을 결렬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 석유산업에게 큰 기회가 오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무기산업, 석유산업, 주요 미디어 네트워크, 그리고 사실상의 미국의 대외정책은 모두 똑같은 미국 기업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총과 석유와 무기거래에 대한 이런 얘기를 언론에서 사실적으로 다루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어쨌든, 이제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했고, 아직 생생한 분노를 느끼고 있는, 마음이 헝클어진 사람들에게 '문명의 충돌'이니 '선과 악의 대결'이니 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 그냥 먹혀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날마다 복용하는 비타민이나 항우울제처럼 정부 대변인들에 의하여 조금씩 분배되고 있다. 규칙적인 약물투여로 인하여 미국 본토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수수께끼 ― 병적으로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정부의 통치를 받는, 기묘하게도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 ― 로 남아있게 될 것이 확실하다.

  이 터무니없는 프로파갠다의 공격을 무감각하게 받고 있는 우리는 무엇인가? 그 노란 식량꾸러미처럼 공중으로부터 우리 정신 속으로 떨어뜨려지는, 땅콩버터와 딸기잼이 발린 거짓말과 잔인성의 소비자들인 우리는? 배가 고프니까 시선을 돌리고 먹어야 할까? 아니면 아프가니스탄에 펼쳐지고 있는 냉혹한 현실을 눈 부릅뜨고 지켜보면서 집단적으로 토해내고, 한 목소리로 이제는 못 참겠다고 말할 것인가?  

  새천년의 첫해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나는 궁금한 생각이 든다. ― 우리는 꿈꿀 권리를 빼앗겼는가? 우리가 다시금 아름다움을 그려보는 게 가능할까?

  햇빛 속에서 갓 태어난 도마뱀이 놀란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 것을 보거나, 방금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인 다람쥐에게 낮은 소리로 대답을 해주는 일이 ― 세계무역센터나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 없이 ― 다시 가능해질 수 있을까?


  아룬다티 로이 (Arundhati Roy) ― 소설《작은 것들의 신(The God of Small Things)》(1997)으로 부커상을 받은 인도의 작가. 인도의 핵실험을 비판하고, 대형 댐건설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친 글을 모은 책 The Cost of Living(1999) 등이 있다.《녹색평론》2001년 1-2월호에〈홍수 앞에서〉라는 그의 연설문이 소개된 바 있다.
  이 글은 영국신문〈가디언〉2001년 10월 23일자에 실린 것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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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평론》제67호 2002년 11-12월호    

 

  9윌이여, 오라

  아룬다티 로이

 

  작가들은 자기가 이 세계 속에서 이야기를 고른다고 상상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허영심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는 정반대로, 이야기가 작가를 골라냅니다. 이야기는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공적인 이야기든, 사적인 이야기든, 이야기는 우리를 지배합니다. 이야기 자신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라고 명령합니다. 넌픽션과 픽션은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기법의 차이일 뿐입니다.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픽션은 내게서 춤추듯 흘러나오고, 논픽션은 내가 매일 아침 일어나 맞이하는 이 고통스럽고 깨진 세계가 비틀어 짜듯이 내보냅니다.

  넌픽션이건, 픽션이건, 내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권력과 권력 없는 자들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끝없는 순환적인 갈등입니다. 저 뛰어난 작가, 존 버저는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라도 그것이 마치 유일한 이야기인 것처럼 말해지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하나뿐인 이야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물을 보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다른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하나의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자 하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사물을 보는 자기 나름의 방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기를 원하는 한 이야기꾼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설령 달리 보일 경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쓰는 글은 국가와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력, 권력의 편집증과 잔인함에 관한 얘기이며, 권력의 물리학에 관한 얘기입니다. 나는, 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한 국가나 나라, 한 기업이나 기관 ― 또는 심지어, 한 개인이나 배우자, 친구, 형제자매라도 ― 이 제어되지 않은 방대한 권력을 축적할 때, 그 결과는 내가 아래에서 열거하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사태들이 된다고 믿습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도 및 파키스탄 정부가 그들의 세뇌된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약속해온 핵 재앙의 공포 속에서 살면서, 그리고 '테러에 맞서는 전쟁' ― 부시 대통령이 "결코 중단되지 않을 과업"이라고 비장하게 부르는 ― 이 수행되고 있는 곳 가까이 살면서 나는 시민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에서, 핵폭탄, 대형댐, 기업 세계화, 힌두 파시즘의 증가하는 위협에 관해 독자적인 견해 ― 인도 정부의 견해와 상충되는 ― 를 밝혀온 우리들에게는 '반민족적'이라는 낙인이 찍힙니다. 나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별로 분개하지 않습니다. '반민족적'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일과 내 사고방식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반민족적'인 사람이란 자기 민족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이며, 따라서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어떤 민족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민족주의를 깊이 의심스러워하고 반민족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반민족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저런 종류의 민족주의는 20세기에 일어난 대부분의 집단학살의 원인이었습니다. 국기(國旗)라는 것은 정부가 처음에는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데 사용하고, 그 다음에는 죽은 자들을 위한 수의(壽衣)로 사용하는 색깔있는 천 조각입니다. [박수]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 나는 여기에 언론기업은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 국기 아래로 몰려들고, 작가, 화가, 음악가, 영화제작자들이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하면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 그들의 예술에 올가미를 씌울 때, 그 순간은 우리 모두가 벌떡 일어나 앉아 근심해야 할 때입니다. 인도에서는 이런 일이 1998년 핵실험 직후와 1999년 파키스탄과의 전쟁 기간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을 우리는 걸프전쟁 때 목격했고, 지금 '테러에 맞서는 전쟁'에서 또 목격하고 있습니다. 저 중국산(産) 미국 국기의 눈보라 말입니다. [웃음]

  최근에, 미국 정부의 행동을 비판해온 사람들은 ― 나 자신을 포함해서 ― '반미적'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반미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신성화되고 있습니다.

  '반미적'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기성 체제가 비판자들을 깎아내리고, 그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정확하게 ― 사용하는 말입니다. 일단 누군가가 반미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의 발언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시되며, 논리는 상처받은 국가적 자존심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나, '반미적'이라는 용어는 무슨 뜻입니까? 재즈에 반대한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언론자유에 반대한다는 뜻입니까? 토니 모리슨이나 존 업다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거대한 미국산 삼나무를 싫어한다는 것인가요? 핵무기에 반대하여 행진한 수십만 미국 시민들이나, 그들의 정부가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도록 압력을 넣은 수많은 반전 운동가들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반미적'이란 모든 미국인들을 미워한다는 뜻인가요?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여기에 대해서는 미국의 '자유언론' 덕분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슬프게도 거의 아는 바가 없는데)을 미국의 문화, 음악, 문학, 숨막히게 아름다운 땅,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즐거움에 대한 비판으로 혼동하게 하는 것은 고의적이며, 극히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이것은 마치 퇴각하는 군대가, 적(敵)이 민간인을 향해 포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인구가 밀집된 도시 속에 숨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정책과 자신이 연관되는 것에 대해 모욕을 느끼는 미국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정부의 정책의 모순과 위선에 대한 가장 학문적이고, 신랄하고, 예리하며, 통쾌한 비판은 미국 시민들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미국 정부의 속셈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면,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사이드, 하워드 진, 에드 허만, 에이미 굿맨, 마이클 앨버트, 찰머스 존슨, 윌리엄 블럼, 그리고 앤서니 에이무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됩니다. [박수]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수백이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테러리즘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카시미르 계곡에서 자행된 국가적 테러리즘은 논외로 치더라도, 구자라트 주정부의 감독 아래 무슬림들에 대해 저질러진 최근의 학살만행에 대하여 눈을 감고 있는 현재의 인도 정부의 파시스트적인 정책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 심히 부끄럽게 여기고 매우 분개할 것입니다. 인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반인도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우스꽝스러울 것입니다. 물론 인도 정부 자신은 주저없이 그렇게 나갈 것이지만 말입니다. '인도'나 '미국'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다거나,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밝힐 권리를 인도 정부나 미국 정부 혹은 그 누구에게라도 양도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반미적'이라고(또는 '반인도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인종주의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상력의 결핍입니다. 기성 체제가 제시해준 것 이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없는 무능력입니다. 부시가 아니면 탈레반이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가 아니면 악마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테러리스트들과 한패다. 이런 식입니다.

  작년에,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9 . 11 이후의 수사(修辭)에 대해 그것을 어리석고 교만한 것으로 무시하면서 비웃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전혀 어리석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잘못된, 위험한 전쟁을 위한 모병 작전이었습니다. 날마다 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반대가 곧 테러리즘을 지원하고, 탈레반을 지지하는 것과 같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는 사실에 경악하곤 합니다. 이 전쟁의 애초의 목표 ― 오사마 빈 라덴의 체포(산 채로든 시체로든) ― 가 좌절된 것으로 보이는 지금, 과녁은 이미 다른 데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 아프간 여성들을 '부르카'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전쟁의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합중국 해병대가 페미니즘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우리더러 믿으라고 합니다. [웃음, 박수] (만약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미국의 군사동맹국 사우디 아라비아입니까?) [웃음]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인도에는 '불가촉 천민',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그리고 여성들을 억압하는 혐오스러운 사회적 관행들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는 소수집단과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더욱 혹심합니다. 그러니, 거기에도 폭격을 해야 합니까? 델리와 이슬라마바드, 다카도 파괴해야 합니까? 인도의 저 완고한 관행을 폭격으로 퇴치할 수 있을까요? 폭격을 통해서 우리가 여성해방의 낙원으로 갈 수 있을까요? [웃음] 그런 식으로 미국에서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었습니까? 노예제는 어떻게 없어졌습니까? 미국은 수백만의 토착 아메리카인들을 학살하여, 그 시체 위에 건국을 하였습니다. 지금 산타페를 폭격함으로써 그 인종학살이 보상될 수 있을까요? [박수]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끔찍한 기념일이 있는 달, 9월에, 여기 미국 땅에 서 있게 된 것은 다만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물론, 특히 여기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억은 9 . 11이라고 알려진 끔찍한 사건입니다. 저 치명적인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거의 3천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 인한 슬픔은 아직 깊고, 분노는 아직 날카롭고,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상스러운 죽음의 전쟁이 세계 전역에 걸쳐 날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전쟁도, 어떠한 복수행위도, 다른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그 아이들에게로 투하되는 어떠한 폭탄도, 자기의 고통을 덜어주거나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되살려낼 수는 없다는 것을, 내밀히, 깊이, 틀림없이 알고 있습니다. 전쟁은 이미 죽은 사람들의 원수를 갚지 못합니다. 전쟁은 단지 그들에 대한 기억을 욕되게 할 뿐입니다.

  또다른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 이번에는 이라크를 상대로 ― 사람들의 슬픔을 냉소적으로 조작하고, 세제(洗劑)와 조깅화(靴)를 파는 기업들이 후원하는 텔레비전 특집 프로를 위해 그 슬픔을 포장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슬픔을 싸구려로 만들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짓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슬픔의 상품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인간의 가장 사적인 감정까지도 가차없이 약탈하는 야만주의입니다. 한 국가가 국민들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은 끔찍한 폭력입니다. [박수]

  공개된 단상에서 이런 주제를 건드린다는 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한 일이지만, 그러나 정말 내가 여러분께 말하고 싶은 것은 상실감에 대해서입니다. 상실과 잃어버림. 슬픔, 실패, 망가짐, 감각의 마비, 불확실성, 두려움, 감정의 죽음, 꿈의 죽음. 절대적으로 냉혹하고, 끝없이, 습관처럼 반복되는 이 세계의 불공정함. 이러한 상실감이 개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전체 문화, 언제나 그것을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로 삼고 살아온 사람들 전부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는 9월 11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날짜는 작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미국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세계의 어떤 지역 사람들에게도 바로 이 날짜는 오랫동안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과연 9월 11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기억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반추는 비난이나 선동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역사의 아픔을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짙은 안개를 조금 걷어보자는 거지요. 이것은 미국 시민들에게 가장 예의바르게,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세계로 나오시기를" 부탁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박수]

  29년 전 칠레에서, 피노체트 장군은 1973년 9월 11일에 CIA의 지원 아래 감행된 쿠데타를 통해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켰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그 국민들이 무책임한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칠레가 맑스주의 국가가 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쿠데타가 끝난 뒤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궁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살해당한 것인지, 자살한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쿠데타에 이은 공포정치하에서 수천명이 죽었습니다. 그보다 훨씬더 많은 사람들은 '실종'되었습니다. 총살대가 공개처형을 행하였습니다. 집단수용소와 고문실이 나라 전역에 설치되었습니다. 사망한 사람들은 탄광의 갱도와 표지도 없는 무덤에 매장되었습니다. 17년 동안 칠레 사람들은, 한밤중의 노크소리, 일상화된 '실종', 갑작스런 체포와 고문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산티아고 공연장의 청중들이 보는 앞에서 음악가 빅토르 하라의 두 손이 어떻게 잘렸는지 칠레인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피노체트의 부하들은 그에게 총을 쏘기 전에, 기타를 던져주고는 연주를 해보라고 놀리기까지 했습니다.

  1999년 피노체트 장군이 영국에서 체포된 데 이어, 미국 정부에 의해 수천건의 문서가 기밀문건에서 해제되었습니다. 이 문서들에는 CIA의 쿠데타 연루에 대한 명백한 증거 이외에 피노체트 치하 칠레의 상황에 관해서 미국 정부가 소상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키신저는 피노체트에게 지지를 확약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미국의 우리들은 당신이 애쓰는 일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정부에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아무리 결함 많은 민주주의라 해도, 오로지 민주주의 사회에서만 살아온 사람들로서는 독재 치하에서 살면서, 자유의 절대적인 상실을 견딘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피노체트가 죽인 사람들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그가 빼앗아 간 삶이기도 합니다.

  슬프게도, 남아메리카에서 미국 정부의 주목을 끈 것은 칠레만이 아닙니다.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에콰도르, 브라질, 페루, 도미니카 공화국, 볼리비아, 니카라과, 온두라스, 파나마, 엘살바도르, 멕시코, 그리고 콜롬비아, 이들은 모두 CIA의 은밀하거나 공공연한 놀이터입니다. 수십만의 라틴아메리카인들이 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되거나, 고문당하거나, 또는 간단히 실종되었습니다. 이런 모욕으로 충분치 않다는 듯이, 남아메리카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실천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 마치 쿠데타나 학살이 이들에게는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처럼 ― 낙인 찍히는 형벌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 목록은 미군의 간섭으로 고통받아온 아프리카 또는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포함시킨 것이 아닙니다. 베트남, 한반도, 인도네시아,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수백만의 아시아인들이 폭격을 당하고, 불에 타고, 학살되어온 수십년간 얼마나 많은 9월이 지나갔습니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의해 수십만의 평범한 일본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1945년 8월 이후 얼마나 많은 9월이 지나갔습니까? 불운하게도, 그 폭격에서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 땅과 하늘과 물과 바람, 그리고 헤엄치고, 걷고, 기고, 날아다니는 모든 피조물에게 닥친 지옥의 상황을 견디면서 보내야 했던 9월은 모두 얼마입니까?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알부커크에는 '국립원자박물관'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뚱보 아저씨'와 '어린 소년'(이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의 애칭입니다)이 기념 귀걸이로 팔리고 있습니다. 젊은 펑크족들이 그것을 달고 다닙니다. 양쪽 귀에 하나씩 대학살의 표지를 걸고 다닙니다. 얘기가 옆길로 빠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제는 8월이 아니라 9월인데 말입니다.

  9월 11일은 중동에서도 비극적인 기억이 있는 날입니다. 1922년 9월 11일, 영국 정부는 아랍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영제국이 1917년에 발표했던 '발포어 선언'의 후속조처였습니다. '발포어 선언'은 유럽의 유태 민족주의자들 ― 시오니스트 ― 에게 유태인의 국가를 건설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그 무렵,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학교에서 싸움대장이 아이들에게 마음대로 구슬을 나눠주듯이 남의 땅을 제멋대로 낚아채서 나눠주고 했습니다.)

  아무런 조심성도 없이, 제국주의 권력은 세계의 오래된 문명을 갈갈이 찢어놓았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카시미르는 제국주의 국가 영국이 현대세계에 가져다준 저주의 선물입니다. 두 지역은 모두 오늘날 들끓는 국제적 갈등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1937년에 윈스턴 처칠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로 인용해보겠습니다. "나는 아무리 오랫동안 개가 여물통에 누워있었다 하더라도 그 여물통을 차지할 최종적인 권리가 그 개한테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아메리카의 홍인(紅人)들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흑인들에게 큰 잘못이 저질러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강한 인종, 더 수준 높은 인종, 그리고 더 세상일에 밝은 인종이 와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나는 이들에게 어떤 잘못이 행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해서 이스라엘 국가가 취할 기본적 자세를 정해주었습니다. 1969년에, 이스라엘 수상 골다 메이어는 말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후임자 레비 에스콜 수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팔레스타인인이란 말인가? 내가 여기에(팔레스타인) 왔을 때, 주로 아랍인과 베두인으로 된 25만의 비유태인이 있었을 뿐이다. 이곳은 사막이었다. 저개발 이하의 상태였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메나헴 베긴 수상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두발 달린 짐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츠하크 샤미르 수상은 그들을 '메뚜기떼'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모두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국가 원수들이 사용한 말들입니다.

  1947년에 유엔은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을 분할하여, 팔레스타인 영토의 55퍼센트를 유태 민족주의자들에게 할당하였습니다. 1년 내에 그들은 76퍼센트를 점령하였습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었습니다. 선포 몇분 후에 미국은 이스라엘을 승인하였습니다. 서안(西岸) 지구는 요르단에 병합되었습니다. '가자' 지구는 이집트 군대의 통제하에 들어갔습니다. 이리하여, 난민으로 전락한 수십만 팔레스타인인들의 마음과 가슴속 이외에 팔레스타인은 공식적으로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967년에 이스라엘은 '서안'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습니다.

  수십년 동안 봉기와 전쟁과 '인티파다'가 있었습니다.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협정과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휴전이 선포되고, 깨졌습니다. 그러나 유혈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불법적으로 점령된 상태입니다. 팔레스타인 민중은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집단적 처벌을 당하고, 24시간 통행금지 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모욕을 당하고, 짐승처럼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 집이 파괴될지, 언제 자기 아이들이 총에 맞을지, 언제 그들이 아끼는 나무가 잘려질지, 언제 도로가 폐쇄될지, 그리고 언제 식품과 약을 사러 시장까지 걸어가는 게 허용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인간다운 존엄성은 아무것도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의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삽니다. 그들은 자기자신의 땅, 자기자신의 안전, 이동, 커뮤니케이션, 식수공급에 대해 아무런 통제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협정이 체결되고, '자치'니, 심지어 '국가로서의 인정' 등의 말들이 나올 때,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자치? 어떤 종류의 국가? 어떤 종류의 권리를 그 시민들이 갖게 될 것이란 말인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인간폭탄이 되어, 이스라엘의 거리와 공공장소에서 자신을 날려보내고, 보통 사람들을 죽이고, 일상생활 속에 테러를 주입하고, 그 결과로 양쪽 사회 사이의 불신과 상호 미움이 더욱 강화됩니다. 폭파는 매번 잔인한 보복을 부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더 가혹한 역경을 불러들입니다. 자살 폭파는 개인적 절망의 행동이지, 혁명적인 전술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공격이 이스라엘 시민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스라엘 정부에게 팔레스타인 영토를 날마다 침범할 수 있는 완벽한 구실을 제공합니다. 21세기식 '전쟁'이라는 새로운 유행복을 걸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실체는 낡은 19세기식 식민주의에 불과한 행동에 완벽한 구실을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충실한 정치적, 군사적 동맹군은 언제나 미국이고, 미국이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스라엘과 함께, 평화적이고 공정한 갈등 해소책을 모색하는 거의 모든 유엔 결의를 방해해왔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스라엘이 일으킨 거의 모든 전쟁을 지원해왔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할 때 팔레스타인 가정을 날려버리는 것은 바로 미국제 미사일입니다. 그리고, 매년 이스라엘은 미국으로부터, 미국인 납세자들의 돈 수십억달러를 지원 받습니다.

  우리는 이런 비극적인 대립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내야 할까요? 자기자신 엄청난 고통을 겪은 ― 아마도 역사상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잔혹하게 ― 유태인들이 자신들과 입장이 바뀐 사람들의 고통과 갈망을 이해하는 게 정말 불가능할까요? 극단적인 고통의 경험은 늘 오히려 잔인성에 불을 붙이는 걸까요? 그렇다면 인간에겐 어떤 희망이 남을까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승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국가 없는 민족이 국가를 선포할 때, 그것은 어떤 국가가 될까요? 그 국가의 깃발 밑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자행될까요? 우리가 싸워 얻어야 할 것은 하나의 분리된 국가일까요, 아니면 종족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권리일까요?

  팔레스타인은 한때 중동에서 세속적 가치가 존중받는 성채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허약하고 비민주적이며, 모든 점에서 부패했으나, 명백히 비당파적인 PLO가, 노골적으로 당파적인 이데올로기를 견지한 채 이슬람의 이름으로 싸우는 '하마스'에게 입지를 빼앗기고 있는 중입니다. '하마스'의 선언문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슬람의 병사가 되고, 적들을 불태울 성화(聖火)를 위한 장작이 될 것이다."

  세계는 자살 폭파범을 비난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걸어온 긴 여정을 우리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1922년 9월 11일에서 2002년 9월 11일에 이르는 80년 동안의 전쟁은 너무도 긴 기간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세계가 줄 수 있는 조언이 있을까요? 그들은 그냥 골다 메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여, 존재하기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중동의 또다른 지역에서 9월 11일은 좀더 최근의 기억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 1세가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양원 합동회의에서 밝힌 것은 1990년 9월 11일이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사담 후세인이 전범(戰犯)이며, 자신의 국민을 상대로 인종학살을 자행해온 잔인한 군사 독재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인물에 대한 꽤 정확한 묘사입니다. 1988년에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북부의 수백개 촌락을 유린하였고, 쿠르드족 수천명을 죽이기 위해 화학무기와 기관총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그 해에 미국이 후세인에게 미국산 농산물을 구입하도록 5억달러의 지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듬해, 후세인의 인종학살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 미국 정부는 지원금을 두배로 늘려 10억달러를 주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또한 후세인에게 고품질의 탄저병균과 헬리콥터 이외에, 화학 및 생물무기 제조에 이용될 수 있는 이중 용도의 물질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담 후세인이 가장 잔인한 악행을 자행하는 동안 미국과 영국 정부는 그의 가까운 동맹자였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요? 1990년에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공했습니다. 그의 죄는 전쟁을 일으킨 데 있다기보다는 주인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독자적인 행동은 걸프만에서의 힘의 균형을 뒤집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사담 후세인은 제거되어야 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사랑을 더이상 받을 수 없게 된 애완동물 신세가 된 것이지요.

  이라크에 대한 최초의 연합군측 공격은 1991년 1월에 시작되었습니다. 세계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전쟁을 황금 시간대에 지켜보았습니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CNN 방송을 보기 위해 별 다섯개짜리 호텔 로비로 가야 했습니다.) 수만명이 한달간 계속된 폭격 속에서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이 전쟁이 그때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분노에 찬 처음의 반전(反戰) 목소리는 베트남전 이후 한 국가에 대해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는 공중 포격 속에서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과 영국 군대는 이라크에 대해 수많은 미사일과 폭탄을 퍼부었습니다. 전쟁 이후 10년 이상 계속되어온 경제봉쇄 속에서 이라크 시민들에게는 식량과 의약품, 병원 장비, 구급차, 깨끗한 식수 등 기초적인 필수품들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약 50만의 이라크 아이들이 경제봉쇄의 결과로 죽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유엔주재 미국 대사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매우 어려운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한 대가는 치를 만하다고 생각한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배격하는 데 사용된 용어가 바로 '도덕적 등가(等價)'였습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도덕적 등가' 때문에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노골적인 산수(算數)를 말했을 뿐입니다.

  10년간의 폭격도 '바그다드의 짐승',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12년이 지난 지금 조지 부시 2세 대통령은 다시 한번 같은 수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면전을 제안하고 있고, 그 목표는 명백히 이라크의 정권교체입니다.〈뉴욕타임즈〉는, 부시 행정부가 "사담 후세인의 위협에 대처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 미국 국민과 의회, 그리고 동맹국들을 설득하기 위한 치밀하게 짜여진 전략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백악관의 참모장 앤드류 H. 카드 2세는 부시 행정부가 이번 가을을 목표로 전쟁계획을 어떻게 차근차근 밟아왔는지 묘사했습니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보면, 8월에는 새로운 상품을 내놓지 않는 게 좋다"고 그는 말합니다. 워싱턴의 '새로운 상품'은 곤경에 처해 있는 쿠웨이트 국민들이 아니라, 이라크가 대량파괴 무기를 가졌다는 주장입니다. 부시 대통령의 전 자문관 리처드 펄은 "평화 운운하는 도덕적 설교 따위는 무시하라. 그가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썼습니다.

  무기사찰을 수행한 사람들은 이라크의 대량파괴 무기의 실상에 대해서 엇갈린 보고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라크의 무기고는 해체되었고, 이라크가 대량파괴 무기체계를 재건할 능력은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얼마나 많은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혼란이 없습니다. 미국 정부가 무기사찰단의 방문을 환영할까요? 영국은 어떨까요? 이스라엘은?

  만약 이라크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그 때문에 미국의 선제공격이 정당화될까요?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핵무기고를 가지고 있고, 또 무고한 민간인들을 상대로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한 바 있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만약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이 정당화된다면, 어떤 핵국가라도 다른 핵국가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할 수 있고,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인도는 파키스탄을 공격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인도 수상이 미국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면, 미국은 선제공격으로 그를 '몰아낼' 수 있을까요?

  최근에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 발발 직전에 물러서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자신은 바로 그러한 충고를 받아들이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요? 누가 도덕적 설교를 하고 있습니까? 전쟁을 일으키면서 평화에 대해 설교하고 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조지 부시가 "지구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라고 한 미국은 지난 50년 동안 단 한해도 빠짐없이 이 나라 저 나라와 전쟁을 해왔습니다.

  전쟁은 이타적인 이유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쟁은 대개 주도권 다툼이나 비즈니스 때문에 일어납니다. 물론, 전쟁 장사라는 것도 존재합니다.

  세계의 석유에 대한 통제권 확보는 미국 외교정책에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발칸 지역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최근의 무력개입은 석유와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이 앉혀놓은 아프가니스탄의 꼭두각시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는 미국의 석유회사 '유노칼'의 전직 직원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이 중동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은 이곳에 세계 석유의 3분의 2가 매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석유는 미국의 엔진이 부드럽게 돌아가게 합니다. 석유는 자유시장이 돌아가도록 해줍니다. 누구든 세계의 석유를 통제하는 자가 세계시장을 통제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석유를 통제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뉴욕타임즈〉의 논설위원 토마스 프리드먼만큼 우아하게 언급한 사람은 없습니다. "미친 짓도 괜찮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미국은 이라크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미국인은 협상이나 망설임 없이, 혹은 유엔의 승인 없이도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충고는 잘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뿐만 아니라, 유엔에 대해 미국이 거의 일상적으로 가하는 모욕을 보십시오. 세계화에 대한 그의 책《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맥도날드는 맥도넬 더글러스 없이는 번성할 수 없으며 ?? 실리콘 밸리의 기술이 번창하도록 세계를 안전하게 유지해주는 보이지 않는 주먹은 미합중국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라고 일컬어진다." 아마도 이것은 예민한 순간에 씌어진 것이겠지만, 프리드먼의 이 말은 내가 지금껏 읽어본 기업 주도의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한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묘사임이 틀림없습니다.

  2001년 9월 11일과 '테러에 맞서는 전쟁' 이후, 보이지 않는 손과 주먹은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를 악문 채 거짓 미소를 지으면서 '개발도상국들'을 억압하는 미국의 또다른 무기 ― 자유시장 ― 를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결코 중단되지 않을 과업'은 미국의 완벽한 전쟁이자, 미 제국주의의 끝없는 확장을 위한 완벽한 수단입니다.

  지난 10년간의 고삐 풀린 '세계화' 속에서, 세계의 총소득은 연간 평균적으로 2.5퍼센트 증가해왔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빈민은 1억명이 더 늘어났습니다. 상위 100개 거대 경제 중에서 51개 경제는 국가가 아니라 기업입니다. 세계의 상위 1퍼센트가 보유한 부는 하위 57퍼센트의 부를 합한 것과 맞먹고, 이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테러에 맞서는 전쟁'이 확대되면서, 이 과정은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 정장을 입은 신사들이 볼썽사납게 서두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폭탄이 퍼부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크루즈 미사일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동안에도, 또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핵무기가 쌓이고 있는 동안에도, 계약서가 만들어지고, 특허가 등록되고, 송유관이 설치되고, 자연자원이 약탈되고, 물이 사유화되고, 민주주의의 기반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기업 세계화' 프로젝트의 '구조조정'이라는 목표가 사람들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습니다. '개발' 프로젝트, 대대적인 민영화, 노동 '개혁'들이 사람들을 자신의 땅과 일터로부터 내쫓고, 그 결과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야만적인 강탈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전역에 걸쳐 '자유시장'이 서방(西方)의 시장은 뻔뻔스럽게 보호하면서, 개발도상국가들에게는 무역장벽의 철폐를 강요함에 따라,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있습니다. 민중적 소요(騷擾)가 지구촌 각처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볼리비아, 인도 같은 나라에서 '기업 세계화'에 대한 저항운동이 커가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정부는 통제의 고삐를 더욱 세게 죄고 있습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테러분자'라고 낙인 찍히고, 또 그렇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적 소요는 시위행진이나 데모, 세계화에 대한 항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또한 범죄와 혼돈, 그리고 온갖 종류의 절망과 환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리고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서 보듯이), 점차적으로 문화적 민족주의, 종교적 완고성, 파시즘,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테러리즘과 같은 끔찍한 것들을 낳는 비옥한 온상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세계화'와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자유시장'이 국가간의 장벽을 허물고, '세계화'의 궁극적 목적지가 일종의 히피 낙원 ― 여권도 필요 없고, 우리 모두가 존 레논의 노래("국가 없는 세상 ?? ")처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 ― 이라고 하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위입니다.

  '자유시장'이 훼손하고 있는 것은 국가의 주권이 아니라 민주주의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저 보이지 않는 주먹이 더욱 큰 역할을 합니다.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줄 '달콤한 거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다국적기업들은 관련 개발도상국의 국가기구 ― 경찰, 법원, 때로는 군대 ― 로부터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이러한 거래를 추진하거나 프로젝트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계화'는 가난한 국가에서 인기 없는 구조개혁을 밀어붙이고,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충성스럽고, 부패하고, 가급적 권위주의적인 정부들로 구성된 국제적 연합체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자유로운 척하는 언론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화'는 정의를 실현하는 척하는 법원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화'는 핵무기, 상비군, 보다 엄격한 이민법, 그리고 삼엄한 해안경비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세계화란 오직 돈과 상품과 특허와 서비스에 관한 것이지, 결코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이나 인권존중에 관한 것도, 인종차별이나 화학 및 핵무기, 또는 온실효과와 기후변화, 또는 정의에 관한 국제적 협약에 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제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약간의 제스처라도 있으면 '세계화'라는 사업 전체가 망할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테러에 맞선 전쟁'이 아프가니스탄의 폐허 속에서 공식적으로 깃발을 내린 지 일년 가까운 사이에 나라마다 차례차례로 자유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자유가 제한되고,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미명하에 시민적 권리가 유보되고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반론은 '테러리즘'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반론을 다스리기 위해 온갖 법안이 통과되고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공중으로 사라져버린 듯합니다. 물라 오마르는 오토바이를 타고 도피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탈레반은 사라져버렸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의 정신과 그들의 약식재판 제도는 뜻밖의 곳에서 부상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형태의 폭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미국, 중앙아시아의 모든 공화국,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북부동맹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는 동안 대형매장(mall)에서는 계절에 맞추어 바겐세일이 한창입니다. 모든 게 할인되고 있습니다 ― 바다, 강, 석유, 유전자, 무화과 말벌, 꽃, 어린시절, 알루미늄 공장, 전화 회사, 지혜, 야생지, 시민적 권리, 생태계, 공기 등, 46억년의 진화를 거쳐온 이 모든 것들이 싸구려로 팔리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포장되고, 밀봉되고, 상표가 붙고, 값이 매겨지고, 선반에 진열됩니다. (반품사절.) 정의(正義)도 이 매장에 출시되어 있다는 얘기를 나는 들었습니다. 돈이 있으면 아마 제일 좋은 것을 살 수 있겠지요.

  도날드 럼스펠드는 '테러에 맞선 전쟁'에서 자신이 맡은 임무는, 미국인이 미국식 생활방식을 계속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세계를 상대로 설득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화난 임금이 미친 듯이 설칠 때에는 노예들은 꼼짝도 못하고 덜덜 떱니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여기에 서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즉, '미국식 생활방식'은, 간단히 말해서, 지속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국 바깥에 있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수]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권력은 수명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아마 이 막강한 제국도, 앞선 여러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비대해진 나머지 결국 안으로부터 폭발하게 될지 모릅니다. 벌써 구조적인 균열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테러에 맞선 전쟁'이 그 범위를 넓혀감에 따라, 미국 기업의 심장부는 대량출혈을 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공허한 지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계는 세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세 기관, 즉 IMF,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TO)의 통치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기관은 모두 미국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리는 결정은 비밀리에 이루어집니다. 이 기관들의 수장은 밀실에서 임명됩니다. 이들 수장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의 정치적 입장, 신념, 의도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이들을 선출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들이 우리들을 대신해서 결정권을 행사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없습니다. 그 누구에 의해서도 선출된 바가 없는 이러한 극소수의 탐욕스러운 은행가와 최고경영자(CEO)들이 지배하는 세계가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소비에트식 공산주의는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실패한 것은 거기에 어떤 근본적인 악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극소수의 인간이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독점하도록 허용했던 결과입니다. 21세기의 미국식 시장자본주의도 똑같은 이유로 실패할 것입니다. 두 제도 모두 인간의 지성에 의해 구축되었지만, 인간본성에 맞지 않아 결국 와해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태는 더 나빠졌다가 조금씩 나아질지 모릅니다. 아마도 하늘에 작은 신(神)이 있어서 우리에게 올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과 다른 세계는 가능할 뿐 아니라, 이미 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은 이 여신을 맞이하기 위해 여기에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고요한 날, 주의깊이 귀기울이면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오는 게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신문을 보고, 텔레비전을 보면 ― 물론, 인도에서 본 것은 폭스(Fox) 뉴스입니다만 ― 마치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조지 부시의 복제인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웃음] 나는 미국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여기서 뵙고, 토마토가 내게 날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인간에 대한 저의 믿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박혜영 옮김)


  아룬다티 로이 (Arundhati Roy) ― 인도 작가. 이 글은 Lannan Foundation 주최로 2002년 9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페에서 열린 초청강연의 원고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글의 원문은 인터넷(www.zmag.org)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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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네트워크 ] 2002년08월21일 제423호 

천재인가 마녀인가

매혹적인 문학과 파괴적인 비평으로 인도 사회를 휘젓는 아룬다티 로이와의 만남


사진/ 프라풀 비드와이(Praful Bidwai) 전 <타임 오브 인디아> 편집장·핵 전문 칼럼니스트


왜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 ·42)는 찬양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가? 어떻게 그이는 문학적 귀재가 되었고 동시에 공공연한 마녀가 되었는가?

지난 6월18일, 마디아 프라데시주의 보팔에서 동료 4명과 29일간 단식을 막 끝낸 그를 보면 해답이 나올까? 단식은 정부가 나르마다댐의 보조용으로 마안강에 댐을 짓기 전에 수몰주민들에게 보상을 하고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하라는 요구였다(나르마다강은 마디아 푸라데시주와 마하라 슈트라주, 그리고 구자라주를 통과하는 인도에서 가장 긴 강 가운데 하나로, 1947년부터 강 본류와 지류에 30개 대형댐과 135개 중형댐, 3천개 소형댐을 짓겠다는 정부 계획에 따라 100만명이 넘는 수몰민이 발생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편집자). 각 신문들은 주민들의 주장을 완강하게 거부한 정부를 비난하며 ‘나르마다의 치욕’이란 머리글을 뽑아들었고, “멍청한 장관은 아룬다티가 단식을 했으니, 이제 정책을 바꿀 일만 남았는가”라고 비꼬았다. 이 일로 정부는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엄청나게 비난받았다.

“이 정부는 모욕적이에요”


사진/ 감옥에서 풀려난 뒤 동료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는 아룬다티. 그는 인도 문학과 사회운동의 보물이다. (Asia Network Documentary)


나는 오랜만에 델리로 돌아온 아룬다티를 찾아갔다. 마안댐, 나르마다, 문학, 핵무기, 섹스, 도덕 같은 여러 복잡한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그동안 주로 철야 농성장이나 시위대 속 아니면 군비축소나 신파시즘 힌두주의를 주제로 삼은 회의장에서 우리가 만난 걸 생각해보면, 그를 집에서 만난다는 건 어쩐지 생경스런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약간 어색해하는 나를 아룬다티는 서부 인도 주민의 전통 차림인 녹색의 긴 치마에 낙타색 윗도리를 걸치고 편안하게 맞아주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2층 서재에 올라가니, 테라스 정원과 절묘하게 어울린 색감들이 우러나는 실내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한때 건축가가 되겠다고 공부하던 아룬다티의 빛감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풍경이었다.

아룬다티는 기다렸다는 듯이 묻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할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모욕적이에요. 이 정부는 댐 철거민뿐 아니라 정의를 믿고 민주적 권리를 믿는 모든 이들을 능욕했어요. 간디의 그 유명한 무기인 단식도 21일을 넘긴 적이 없었잖아요? 악독한 영국 식민정부도 21일 전에 모든 사태를 풀었다는 뜻이죠. 단식까지 하며 항의할 때는 적어도 귀기울이는 것이 사람 모습이고, 또 정부가 할 일 아닌가요?”

아룬다티는 보팔에서 돌아온 바로 뒤였고, 다시 시위자들과 연대해 마안강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라며 가시가 돋친 말들로 정부를 질타했다. “현장에 가보니 논쟁거리랄 것도 없었어요. 철거민들은 ‘찍’ 소리 한번 질러보지 못한 형편이었는데, 정부 놈들이 기득권과 편견만으로 모든 걸 결정하고 말았으니….”

아룬다티의 독설을 듣고 있자니, 그의 오직 한편뿐인 소설 <변변찮은 것들의 신>(The God of Small thing·한국판 번역제목은 ‘작은 것들의 신’)이 풍성한 상징과 은유에 살아 꿈틀대는 표현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창조적인 묘사- 로 문단을 발칵 뒤집어놓은 기억이 슬금슬금 되살아났다.

<변변찮은 것들의 신>은 위대한 소설들이 그런 것처럼, 글을 읽고 있으면 저절로 그 ‘아름다움’에 빨려들었다. 특수한 조건을 지닌 카스트 제도에 뿌리박은 케랄라의 절박한 사랑을 그린 이 소설은 따지고 보면, 별난 것도 없이 세상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일반적 시대상과 인물군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모든 인물들이 독특한 관계로 규정되었지만 사실은 세상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는 점인데, 그게 바로 이 소설의 특징이었다. 또 델리 독자가 읽어도 뉴욕이나 서울 독자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그 ‘승부처’였던 셈이다.

상상과 은유로 핵무장 비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글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멋진 체험을 한 기억이 났다. 그의 글은 케랄라, 그 자체였다. 싱싱하고 풍부한 열대, 어디든 녹음이 드리워져 있고 수백 가지 색깔이 어우러진 케랄라가 그 소설에 은은히 배어 있었으니 말이다.

케랄라는 인도 최초의 ‘빨갱이주’로 자주 공산당이 집권한 탓에 이상향을 꿈꾸는 제3세계 시민들이 열렬히 지지를 보낸 곳이었다. 게다가 1세기께부터 보금자리를 꾸민 기독교도들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변변찮은 것들의 신>을 좋아한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케랄라주의자’들 사이에선 아룬다티가 기독교도와 공산주의자들을 너무 거칠게 다루었다고 불만이 많은 걸 보면…. 또 호사가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소설을 문학적 체계가 빈약한 터무니없는 공상이라고 무시해버리기도 했다.

아무튼 문학적으로 아룬다티가 ‘무서운 아이’로 평가를 받는다면, 그의 정치적 비평은 ‘무책임하고 지식 없는 분석가’, ‘도락 비평가’ 같은 더 험한 소리를 듣는 것도 사실이다.

국가 건설이 최우선이라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인도 사회에서 아룬다티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여자”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더라도 분명한 건, 사회운동 분야에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룬다티의 정치 비평들이 사회상을 반영하고 영감을 불러내는 원천 노릇을 해왔으니, 어이 하리오!

한번 보자. 아룬다티 이전에는 감히 누구도 핵무장을 비판하는 논리로 ‘상상’과 ‘은유’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98년 인도-파키스탄이 핵실험을 끝내자, 맞받아치듯 써낸 <상상의 끝>(The End of Imagination)이라는 수필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핵무기를 이용해 ‘공포문학’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글은 핵개발론자들의 부도덕성을 속시원히 고발했다. “괴팍한 힌두광신주의자들과 주전론자들이 요구하는 폭탄의 동굴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1인공화국을 세우는 게 더 행복한 일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죠.” 아룬다티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예쁘게 웃었다.

짓궂은 생각에 넌지시 한마디 던져보았다. “근데, 왜 최근 인도-파키스탄 사이에 핵전쟁이 현실로 다가왔는데도 델리를 떠나 멀리 도망치지 않았죠?” 그는 이내 겁먹은 아이처럼 심각해졌다. “우리가 어디로 도망칠 수 있나요? 내가 도망치면 모든 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친구들도 나무도 집도 강아지도 다람쥐도 새도 모조리 재로 변할 텐데, 내가 뭘 사랑하며 누가 날 사랑하며, 그래서 어디서 살 수 있겠어요?”

통계자료를 독자들의 감정 속으로


사진/ 나르마다강 현장을 시찰하는 아룬다티 로이(오른쪽)와 환경운동가 메다 파트칼. 그는 마안강 댐의 주민보상을 요구하며 동료들과 29일간의 단식을 했다. (Asia Network Documentary)


나는 평소 사회운동가 아룬다티를 ‘아룬다티답게’ 하는 건, 모든 이들이 식상해하고 보기 귀찮아하는 사회 통계자료를 글쓰기의 밑감으로 삼아 독자들의 감정 속으로 고스란히 실어다줄 수 있는 능력 덕이란 생각을 자주 해왔다. 그 대상이 핵폭탄이건 댐이건 철거민 문제건 또 엘리트개발주의의 폐해건 간에, 그이는 인권단체나 환경운동가, 근본주의 경제학자들과 늘 교통하면서 개발한 통계를 현실 속에 또박또박 박아넣는 기막힌 재주가 있는 글쟁이였다. 그 동력으로 <위대한 공동의 선>(The Greater Common God) 같은 수필도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 운동판에 어슬렁거리며 아룬다티를 사랑해온 이들이 좀 안타깝게 여긴 점이 있었다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아룬다티의 논리가 다른 분야보다 정확도와 전망 면에서 좀 처진다는 것이었는데, 지난해 ‘9월11일 공격’ 뒤에 아룬다티는 <무한한 정의의 대수>(The Algebra of Infinite Justice)라는 수필 하나를 던지며 모든 비판의 종지부를 찍었다. 대 테러전쟁과 무장철학을 앞세운 부시 독트린에 대한 그야말로 파괴적인 비평은 아룬다티를 다시 보게 했고, 모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델리의 여름을 상징하는 뇌우가 아룬다티의 창을 흔들자, 그의 네 마리 강아지 가운데 두 마리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나는 언젠가 그이가 내게 한 말뜻을 깨달았다. “나는 운동가이고 나는 행동하지만 나는 조직만을 좇는 운동가는 아니다.” 아룬다티는 학창시절부터 정치선동가였고, 결국 가족과 충돌하면서 케랄라를 떠났다. 그 뒤로 수많은 논쟁과 투쟁에 휩쓸렸지만 단 한번도 조직이나 정당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자유로운 정신 속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 탓이었을까? 무엇에 참여했든 또는 참여하지 않았든 간에 그에 대한 비난과 논쟁을 거둘 시간이 왔다. 아룬다티는 비범한 인물로, 사회운동의 보물로 반역적인 세력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는 인도 사회 속에 누구보다 깊숙이 참여해왔으니.


[ 아시아 네트워크 ] 2002년08월21일 제423호 

“격렬한 운동이 사악한 것을 쫓는다”


사진/ (Asia Network Documentary)


아룬다티의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그가 자신의 개성적인 부분이라 표현한 욕실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그 개인적 공간을 스스럼없이 공개했다. 샴푸를 눈여겨봤더니 카디였다(카디: 유기농법을 중심으로 전통방식에 따라 집에서 만드는 옷감을 비롯해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환경상품 이름).



요즘 어떤 화두를 잡고 있나요.

사람들과 교통하기 위한 어떤 운명적인 인력(引力) 같은 것이에요. 그게 날 움직이는 동력이기도 해요.

설교 같은데.

아니.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누구와 교감하겠다는 뜻이지, 누구를 깔보며 말하겠다는 건 아니죠. 내겐 사실과 감각이 다를 수 없어요. 가령 내 글을 통해 정치적 사안을 다른 이들의 감각기관으로 실어나른다는 뜻이죠. 궁극적으로 얼마나 정직하게 말하느냐가 문제인데, 난 정직하지 않은 예술은 영속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없다고 믿어요.

그 정직함을 판단하기 위해 당신은 세속적인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하는데, 달걀값과 쌀값이 얼마인지 알고 있나요.

물론 확실히 알고 있죠. 어떤 상표로 대답해드릴까? 내 수익은 주로 ‘변변찮은 것들’- <변변찮은 것들의 신>이라는 소설 제목을 아룬다티는 이렇게 줄여 불렀다- 에서 나오는데, 그전에는 참 힘들었어요. 가난이란 내가 ‘내가’ 되는 걸 막는 심각한 장애 같은 것이었죠.

자유는 성취하기 힘든 건데, 특히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제로 삼아보면 어떨까요. 당신은 개고기를 먹나요.

(몹시 놀라 당황하며)아니요. 무슨 질문이 갑자기 그래요. 난 개고기 안 먹어요.

왜, 그게 애완동물이라서. 아니면 또 다른 깊은 사연이라도 있어서.

애완동물이라는 점을 떠나서, 난 오랫동안 우리 삶에 뿌리내려온 금기나 금지 같은 걸 쉽사리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아요. 그래도 개나 뱀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하진 않아요. (호쾌하게 웃으며)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만 아니라면 다 먹읍시다. 됐죠?

윤리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란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보편적인 윤리의 기준은 없다고.

아뇨. 분명 있죠. 인종이나 문화 또는 민족과 상관없이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가치로서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 같은 건데, 대량살상 무기나 인종학살의 공포 없이 살아야 하는 것 따위는 타협할 수 없겠죠.

그럼 개인의 윤리는. 당신은 얼마만한 자유를 개인에게 주고 있나. 가장 친한 친구가 동성애자로 변한다면.

성의 자유는 근본 중의 근본이죠. 누구도, 누구의 그 자유를 침해할 수 없어요.

어떤 글에서 당신은 날마다 한두 시간을 헬스클럽에서 보낼 정도로 지독히 육체적 건강에 몰입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건 당신이 정신의 자유를 좇는 해방된 사람으로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격렬한 운동이 내 속에 잠재된 사악한 것들을 몰아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난 늘 운동하고 육체를 건강하게 만들려고 해요. 이건 무슨 의무라기보다 놀이예요. 전 재미없는 일은 죽어도 못해요.

아직 못다 한 것 중에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나요. 소설 쓰는 일말고.

뭐 별달리…. 정치적인 글을 계속 쓰겠다는 것말고는. 분명한 건 ‘선전’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어요. 다국적 기업과 컴퓨터 지배라든지 개발우선주의를 조장하고 있는 세계화 같은 걸 깨부수는 적극적인 선전 같은 것을. 우리 모두가 이런 일을 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요? 델리에서도 서울에서도!

프라풀 비드와이(Praful Bidwai) 전 <타임 오브 인디아> 편집장·핵 전문 칼럼니스트


[ 아시아 네트워크 ] 2002년08월21일 제423호 

사방에서 물어뜯기

누가 아룬다티를 ‘몹쓸년’이라고 했는가?

아룬다티는 <변변찮은 것들의 신>을 써내기 3년 전부터 이미 논쟁에 휘말렸다. <밴디트퀸>으로 더 유명한 풀란 데위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셰칼 가풀스 필름’에 맞서 심한 싸움을 한 탓이었다. “풀란 데위의 경험을 섹스와 난동에만 초점을 맞춘 흥밋거리로 전락시켰다. 풀란에 대한 배반이다.” 아룬다티의 말에 귀기울이는 이들은 적었고, 추악한 법적 논쟁이 벌어지면서 아룬다티는 많은 이들을 잃었다. 결국 영화만 떼돈을 벌었다.

그로부터 아룬다티는 온갖 부류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먼저 힌둣와(Hindutva) 지원자들은 아룬다티를 “빨갱이 허섭스레기 같은 년”이라고 했다. 아룬다티가 바지파이 총리의 집권당을 ‘힌두광신주의자’, ‘군국주의자’, ‘남성우월주의자’ 집단이라 비판해온 탓이다. 아룬다티가 반쪽 기독교 가문 출신이란 것도 비난거리가 되었다.

자본주의 지배계급에 해당하는 개발주의자들은 아룬다티를 ‘러다이트’(산업혁명 때 실직을 염려해 기계파괴운동을 벌인 직공단)에 비유하며 ‘발전의 적’으로 몰아붙였다. 이들은 아룬다티가 지식 부족으로 개발에 따른 이익을 계산할 줄도 모르면서 “오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했다.

기득권이 있는 일부 권력자들은 아룬다티를 평화·환경·인권운동가로 인정하면서도, 그런 윤리적인 것들이 결코 국가의 이익을 창조하지는 못한다며 점잖게 타이르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폭탄이 필요하다. 개발은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다. 결국 가난한 이들은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을 늘 품고 다니는 무리들이다.

“아룬다티는 계급과 상관없는 인물이니 가식적으로 참여하지 말라”는 운동권 주변의 비판도 있다. “아룬다티가 선정적으로 사안을 과장하는 탓에 오히려 운동에 지장이 있다.” 대개 아룬다티의 유명세나 개인 스타일에 비난의 초점을 맞춘 것들이었다.

환경역사가 라마찬드라 구하 같은 이는 지난해 아룬다티를 이렇게 모욕하기도 했다. “아룬다티는 쇼우리의 왼쪽이다.” 쇼우리란 자는 한때 개혁운동가였는데, 사회가 붙여준 도덕성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며 집권당에 붙은 인물로 사회운동 진영에서 크게 비난받았다. 라마찬드라는 아룬다티를 “무책임한 여자”라고 했다. 아룬다티가 나르마다댐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비판한 걸 꼬집으며 “대법원과 헌법만은 비판할 수 없다”고 우겼다. 심지어 자신도 핵무장 반대를 외치면서, 유독 아룬다티가 핵무기를 반대하는 건 눈뜨고 볼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간디주의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마땅한 무기가 없었는지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온 ‘전통’이라는 이빨을 들이대며 으르렁거렸다. “아룬다티는 지나치게 현대주의자”라는 것이다.

프라풀 비드와이(Proful Bidwai) 전 <타임 오드 인디아> 편집장·핵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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