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75쪽)
우리는 2000년 이래로 (...) 대표하는 시인이 김행숙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녀의 시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새로운 나를 촉발한다. 그녀는 '시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런 부류의 신느 본질적으로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감응'의 대상이다. 그녀의 시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지 말고 그녀의 시와 더불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일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해설. 174쪽)
참으로 어려운 시집이었다. 이 해설을 읽기 전까지는 참으로 어려운 시, 이해가 안 되는 시들이 <이별의 능력>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주 나자빠지고 걸려넘어지기도 자주였다. 그렇다고 속시원히 감상할 만한 능력은 물론 완비하지 못했다. 다만 시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그것에 대한 화두를 얻었다는 것. 그것으로 우선은 족하다.
나와 남, 我와 他의 관계는 쓴다는 행위에서, 그 표현 아래에서 구별되는 인칭이다. 그러나 시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내남은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라고 믿기 어려운 나는 역시 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나,를 너인 듯, 그대인듯 그러한 표현을 마주친다. 아무래도 우리가 시를 어렵게 여기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단계인 인칭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의 난해성은 '나'가 놓인 상황, '나'와 맞서 있는 대상을 찾지 못하는 데에 있다. 시 한편은 길어도 소설을 넘기지 않는다. 거대 서사시의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시는 그렇다. 그렇지만 김행숙 시인의 시집 <이별의 능력>은 이러한 기초 지식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음 인용시는 <이별의 능력>에서 서시격인 "발"이다.
발이 미운 남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나의 무용수들. 나의 자랑.
발끝에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 나는 기도할 때 그들의 힘줄을 떠올린다.
그들은 길다. 쓰러질 때 손은 발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
무용은 일순간 자신의 몸을 곧추세우는 동작이 있다. 보는 사람의 눈에도 위태해 보인다. 그들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발은 많은 노력과 단련으로 그 전체적인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흉물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아름다움은 발끝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그 힘줄을 떠올리며 기도를 한다. 그만큰 나는 간절하다. 그리고 '그들이 길다'는 것은 나와 견주어서 그렇겠지만, 그렇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림자'를 연상하게 된다.
신비한 일
낮에 자는 사람과
밤에 자는 사람은
언제 만날까
사람들이 만나는 시간은 신비해
낮에도 자고 밤에도 자는 사람에게도 약속은 생기지
12시
13시
내 그림자도 시간에 대해 말하지
나는 지금 길어지고 있어
어디까지? 나는 지금 걸어가고 있어
낮에 자는 사람과
밤에 자는 사람이
만나는 시간 가까이
더 가깝게
사람들이 앞만 보고 걸어다녀
뒤통수는 까맣고 까매
누구일까
김행숙 시인의 시집 <이별의 능력>은 적어도 나에게는 '시로써 무엇을'이라는 질문을 주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역시 사람삶이라는 것, 단지 표현방식의 변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우선은 확고하다. 조금 더 배우고 익혀야만 김행숙 시인의 시집 <이별의 능력>에 가까워지리라 예상한다.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해설부에서 <이별의 능력>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많은 부분 할애하고 있지만 나는 친절하게 제시해준 독법을 무시하고 만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꺼운 무지개
당신은 3분 동안 군화 끈을 매고, 나는 조여지는 발처럼 몰입해요. 전쟁은 언제 끈나나요? 왜 나의 믿음은 퇴폐에 바쳐지나요? 당신은 언제 죽고,, 나는 또 언제 죽나요?
그녀의 눈꺼풀엔 매일 두꺼운 무지개가 뜨죠. 그녀를 믿을 수 잇겠어요? 전쟁터는 그녀의 테마 카프, 화장대는 그녀가 늘 쓰러지고 일어나는 곳이에요. 그녀의 남자들은 모두 군화를 신고 출근했어요.
어느 날 군화를 벗고 내 곁을 떠났어요. 용서할 수 없어요. 여긴 전장에서 겨우 2km 떨어진 곳이라구요. 아이들이 총소리를 들으면서 봄소풍을 간다구요. 왜 개나리는 놀하고 진달래는 핑크빛인가요? 왜 당신은 발간 액체를 토하고, 왜 나는 검은 물을 흘리나요? 하늘에선 자주 흰 가루가 뿌려지고 도시 전체가 화학적으로 반응했어요. 색체와 향기를 믿을 수 없고
그녀의 확신은 알략이 녹으면서 형상을 얻죠. 그녀를 성급하게 믿진 마세요. 그녀가 보이는 화학적 반응 수준은 현실을 초과해요. 미래적인 것은 퇴폐적인 것이에요. 그녀의 눈동자엔 파편과 흙먼지만 찍혀요.
당신은 언제 죽었고, 나는 또 언제 죽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