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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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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시절 제일 가깝게 지냈지만 어느날 갑자기 내 곁에서 종적을 감춰버린 내 친구 제이는 이 소설을 무척 좋아했다. 책을 워낙 많이 읽던 친구였는데... 가끔 그 친구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면서 그리운 감정을 느낀다. 말못할 사정이 있었던 걸까.
  지금은 잘 살고 있을까. 이제 볼 수 없지만 나는 현재 그 친구의 모습을 어쩐지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왜냐면 내가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처럼 그 친구도 그대로일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가 좋아하던 소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이제서야 이 소설을 읽었다. 중학생 때 '제인에어' 를 읽다가 지루함에 못이겨 결국 중간에 포기했던 기억이 있어서 (아직도 안읽음) 같은 시대를 다룬데다 샬롯 브론테의 자매가 쓴 이 작품도 이상하게 끌리지 않았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 은 '제인에어' 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고, 나는 한동안 이 소설에 푹 빠져 잠도 제대로 안자며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에밀리 브론테는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인 '폭풍의 언덕'을 남기고 병에 걸려 30살에 죽었다고 한다. 어두컴컴한 집에서 불꽃같은 열정으로 남은 생명을 쥐어짜내가며 소설을 썼을 작가를 떠올리니 눈물이 고였다.
 작가가 생명을 단축시키면서까지 써내려간 소설이라 그런지 이 소설은 내가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 어둡고 우울했다.

  서로 깊은 상처를 주기만 하는 캐서린 언쇼와 히스클리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했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나마 그 둘은 불행하게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중학생 때 '제인에어' 대신 '폭풍의 언덕' 을 읽었다면, 이런 처절하고 비극적인 사랑을 꿈꿨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캐서린 언쇼가 죽고난 뒤에도 엄청나게 남아있는 책의 남은 페이지를 보며 대체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더 써져 있는 것일까?! 란 생각에 의아했는데 그 뒤는 헤어튼 언쇼와 캐서린 린튼의 또 다른 사랑이야기가 있었다.

 이 소설에서 제일 내 맘에 드는 인물은 의외로 헤어튼이다. 캐서린을 사랑하면서도 조금만 수가 틀어지면 거친 욕설을 내뱉고, 자기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결국 캐서린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어 몰래 글을 배우는 그는 히스클리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귀족적 품위를 희미하게나마 간직한 남자다. 나는 마지막에 캐서린과 헤어튼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부분이 어찌나 좋든지 그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어느새 캐서린 앞에서 순한 양이 되어 애정 표현도 거리낌 없이 하는 헤어튼이 귀여웠다.

  거리의 아이로 고된 학대를 견디고, 삶의 유일한 이유였던 캐서린 마저 잃은 히스클리프의 심정을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캐서린 언쇼가 죽은 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행하는 악행은 계속 읽기 괴로웠다. 야만스럽지만 숙명처럼 끌릴 수 밖에 없는 악마적 매력을 가진 남자 주인공의 전형인 히스클리프는 분명 문학 역사에서도 기념비적 인물 중 하나겠지만, 글쎄.. 히스클리프에게 사로잡히기에는 이제 내 나이가 너무 많나보다. 더 어렸을 때 읽었다면 내 친구 제이처럼 히스클리프를 사랑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야 당신이 얼마나 잔인하고 위선적이었는지 알겠어. 왜 나를 경멸했지? 왜 당신 마음을 배반했어. 캐시? 나로선 위로할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없어. 당신에게는 그래 마땅해. 당신은 자기 마음을 죽인 거야. 그래, 나에게 입맞추고 울려면 울어도 좋아. 나의 입맞춤과 눈물을 빼앗으려면 빼앗아도 좋아. 그러면 당신은 더욱 시들 것이고, 자신을 저주하게 될 거야. 당신은 나를 사랑했어. 그러면서도 무슨 권리로 나를 버리고 간 거지? 무슨 권리로. 대답해봐. 린튼에 대한 어리석인 생각 때문이었어?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 사이를 떼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나를 버린 거야.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놓은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건강한 만큼 나는 불리하지. 내가 살고 싶은 줄 알아? 당신이 죽은 뒤에 내 삶이 어떨 것 같아? 아, 당신 같으면 마음속 애인을 무덤 속에 묻고도 살고 싶겠어?"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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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폭풍의 언덕」 잡담
    from 케이의 책꽂이 2017-09-25 17:03 
    감상 외 잡생각들. 1. 등장인물들의 가족관계* Wuthering Heights 저택 (언쇼 집안) : 힌들리 언쇼(오빠) - 캐서린 언쇼(여동생) 남매 / 입양한 히스클리프 * Thrushcross 저택 (린튼 집안) : 에드거 린튼(오빠) - 이자벨라 린튼(여동생) 남매2. 등장인물들의 혼인 및 자녀 * 힌들리 언쇼 - 프랜시스 혼인 : 아들 헤어튼 언쇼 * 에드거 린튼 - 캐서린 언쇼 혼인 : 딸 캐서린 린튼 * 히스클리프 - 이자벨라 린튼 혼
 
 
2017-09-26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6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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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첫 직장에서 힘든 겨울을 보내면서,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를 읽었다. 그때도 감상문을 쓰긴 썼다. 당시 내 상태가 형편 없었기 때문에 그때 쓴 감상문은 읽어보고 싶지 않다. 아마 끔찍한 내용일 것이다.

  직장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당시 나는 히라오카를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부자집에서 태어나서 평생 직업을 가져본 적 없이 우아하게 사는 다이스케가 절대 미치요를 택할 리 없다고 확신하며 책을 읽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30대하고도 중반이 된 지금 다시 읽으니, 히라오카 같은 놈에게는 아무런 동정이 가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딱한 사람은 바로 미치요다. 대학시절 미치요와 다이스케는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다이스케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친구인 히라오카와 미치요의 결혼을 적극 돕는다. 오빠도 엄마도 갑자기 죽어 의지할 곳 없던 미치요는 결국 사랑하지도 않는 히라오카와 결혼하고 불행한 삶을 산다. 몇년이 지나 도쿄에서 다시 만난 미치요와 다이스케는 함께하기로 하지만, 이미 미치요는 몸이 약할대로 약해진 상태이고, 다이스케는 가족에게 의절당하고, 히라오카는 아픈 자기의 부인 미치요를 다이스케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과거에는 불륜에 빠지는 사람들을 혐오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남녀가 서로 오랜 기간 사랑하다, 어느 한쪽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 헤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실연한 사람을 보며 안타까워하며 동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심하여 이별을 통보한 사람을 죄인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 사람의 감정에 벌을 주고, 상을 줄 순 없으니까 말이다. 사람이 평생 옳은 선택을 할 수 없고, 언제나 마음이 한결같을 순 없을 것이다. 설령 사회적으로 큰 도덕적 의무가 요구되는 결혼을 한 후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혐오하는 작가의 태도가 소설 군데군데 드러나서, 나쓰메 소세키가 평생 얼마나 외롭게 살았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래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나쓰메 소세키 뿐이구나. 하는 생각도 이 소설을 읽으며 자주 했다. 다만, 난 나쓰메 소세키 처럼 쓰지 못한다. 이렇게 대신 내 마음을 표현해주는 작가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아마도 이게 내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나도 표현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읽고, 생각할 기회를 갖는 것 만으로도 내 인생은 훨씬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분명히 이 소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편소설 중 하나인데, 다시 읽으니 처음 읽는 것 처럼 새로웠다. 특히 다이스케가 마침내 미치요에게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내 기억에는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 장면이었다. 처음 읽을 때는, 다이스케가 자신이 가진 특권 전부를 포기할지 안할지 그 부분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오히려 다른 부분에는 집중을 안했던 것 같다. 이렇게 대충 읽어놓고, 제일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가 '그 후' 라고 자부했던 내가 좀 부끄러웠다. 

그는 스스로가 정당한 길을 걸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그걸로 만족했다. 그 만족을 이해해 줄 사람은 미치요뿐이었다. 미치요 이외에는 아버지도 형도, 그리고 사회도 세상 사람들도 전부 적이었다. 그들은 시뻘건 불꽃 속으로 두 사람을 밀어 넣고 태워 죽이려 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말없이 미치요를 부둥켜안고 그 불길이 빨리 자신을 태워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p.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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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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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출퇴근길과 집에서 자못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속으로는 아이돌팬의 심정이었다. 마음 속으로는 조지가 너무 멋있어서 비명을 꺅꺅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직전에 읽었던'폭풍의 언덕' 이 지나치게 우울한 사랑 이야기라, 좀 경쾌하고 귀여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전망좋은 방' 은 이러한 목적에 완벽히 부합하는 책이었다.


  사람들이 나한테 많이 하는 이야기 중 남자는 처음에 별로 호감이 안가도 만나다보면 좋아진다. 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호감이 없었던 남자가 만나면서 좋아진 경우가 없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그런 말을 할때마다 다른 여자들은 다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라고 말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항상 넌 노력도 안해보고 그런다고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을 열과 성을 다해 좋아하기로 마음을 먹는 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나는 아무리 좋아도 내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사랑 이런 거 안 믿는 낭만 없는 사람...) 그것도 어느 정도 나와 맞고, 끌리는 사람에게나 가능한거지, 같이 문자 몇 번 주고 받는 것 조차 괴로움의 연속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난 오히려 처음에는 싫었는데 계속 만나면 상대방이 좋아진다는 사람들이 더더욱 신기하다.


  어떻게든 세실과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애처로운 루시를 보며 그 마음이 뭔지 너무 잘 아는 나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거깃다 앞뒤 꽉 막히고 루시의 앞날을 방해만 하는 샬럿 때문에 더 답답했다. 조지같이 인생의 빛과 소금되는 남자를 내버려두고 로마로 떠나버리다니! 떠나는 밤에 조지가 문 앞에서 비를 철철맞고 있는데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루시를 보며 내 가슴 또한 찢어졌다. 이외에 조지와 루시가 피묻은 엽서를 강에 떠내려 보내는 다리 위 데이트 장면도 무척 다정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어 읽는 내내 좋았다. 유명한 키스 장면이야 뭐 말할 필요도 없다.


  루시와 조지의 사랑이 가장 큰 뼈대긴 하지만 루시가 피렌체에서 여행을 하며 영국에서 전혀 못 만나던 종류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인간적으로 성숙해나가고,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 또한 '전망 좋은 방'의 큰 주제이다. 이러한 주제는 당시 남자 소설가가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쓴 이야기 치고는 굉장히 선진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E.M 포스터가 당시 미덕에 부합하지 않는 동성애자 였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서도 열린 견해를 갖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역시 소설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E.M 포스터는 좋다. 


  기회가 되면 영화도 찾아서 보려고 한다. 이미 제비 꽃밭 키스신은 찾아서 봤지만, 영화 속 장면이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예뻐서 보고 싶어졌다. 근데 의외로 영화에서는 세실이 꽤 멋있나보다. 감상한 사람 중 조지보다 세실이 낫다는 사람도 다수 있는 걸 보고 의아했다. 책만 봐선 절대 세실을 더 좋아할 수가 없는데. 하긴 책에서도 거만한 세실이 꼴보기 싫다가, 루시가 파혼 통보하니 군말없이 신사적으로 물러나서 좀 불쌍하긴 했다.


  이 소설 맨 앞장에 'H.O.M 에게 이 소설을 바칩니다.' 라고 적혀 있는데, 이 H.O.M  은 바로 소설 '모리스'에서 클라이브의 모델이었던 휴 메러디스 다. '전망좋은 방' 출간 년도를 보니 이미 휴 메러디스가 결혼한 뒤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 메러디스에게 이 소설을 바치다니.. 순정파 E.M 포스터 같으니라고.

조지는 그녀가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는 기쁨을 보았고, 꽃들이 그녀의 드레스로 밀려들어 푸른 파도를 일이키며 부딪치는 것을 보았다. 위쪽의 덤불숲이 닫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p.102

「네, 맞습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진이 빠진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도 근본적으로 똑같은 종류의 짐승입니다. 여자를 지배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내 속에도 깊게 흐르죠. 그건 여자와 남자가 함께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힘을 합쳐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보다는 제 사랑의 방식이 더 낫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맞아요...... 제 방식이 더 낫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품에 안겨서도 당신 자신의 생각을 하기를 원합니다.」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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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망‘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을!
    from 지상의 다락방 2017-09-19 11:16 
    고전 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좀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다. 너무 길다 싶을 정도로 불필요한 세부 묘사라든지 시대적 배경이 현대와 동떨어지기 때문에 소설에 몰입이 덜 된다든지 하는 것들. 그런데 E.M 포스터의 작품은 그 배경이 현대와 살짝 동떨어져 있어도 흥미진진하고 무척 재미있다. <전망 좋은 방> 역시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시대 배경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무척이나 흥미롭다. 이 책은 ‘로맨스’ 소설이다. 책 표지에 있는 남녀를 보면
 
 
2017-09-19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9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리스 E. M. 포스터 전집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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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모리스'에 감명받아 읽게 된 E.M 포스터 '모리스'는 무척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E.M 포스터의 책은 처음이지만, 앞으로 그의 소설을 시간 되는대로 많이 읽고 싶다. 모리스가 대학 시절 E.M 포스터의 분신과 같은 인물이다보니 책을 읽다보면 작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한데, 결과적으로 난 작가 포스터도, 인간 포스터도 좋아하게 되었다.

  또 영화에서는 모리스를 버리는 클라이브가 원망스럽고 미웠지만 책을 읽으니 클라이브에게도 동정심이 생겼다. 특히 아래 구절을 읽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너무도 반듯해서 난 너의 평범한 우정을 오해했지. 네가 나한테 아주 다정하게 대했을 때, 특히 내가 학교로 돌아왔던 날...... 난 그게 뭔가 다른 것인 줄 알았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미안해. 난 역시 책과 음악 밖으로 걸어나올 권리가 없었어. 널 만나기 전까지 난 그렇게 살았거든. 사과든 뭐든 내게서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겠지만, 홀, 진심으로 사과한다. 네게 모욕감을 준 일은 영원토록 나를 슬프게 할거야.」

p. 90


  내가 이 구절을 읽으며 가슴이 찢어졌던 건, 밑줄을 그은 클라이브의 말에서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난 아직도 책과 음악 밖으로 걸어나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클라이브가 타고난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여자를 택하는데 소설에서는 갑자기 남자가 아닌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모리스와 헤어진다는 점이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클라이브의 모델이자 대학시절 포스터가 사랑했던 실존 인물 '휴 매러디스' 도 실제로 이성애자가 되어 여성과 결혼했던건지 궁금하다. 


  남들과 다른 사람들을 흔히 '특별한' 사람 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특별함'이 거대한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 모리스 역시 특별한 사람이었고, 그로 인한 두려움에 학창시절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괴로워하며,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혼자 발버둥 친다. 남들처럼 혹은 남들만큼 살고 싶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여 좌절하고 때때로 자신에게 실망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모리스의 외로운 분투에 공감하며 진심으로 그를 응원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모리스가 마침내 진정한 사랑인 '알렉 스커더'로 인해 스스로 특별함을 인정하며 누구도 속이지 않고 살기로 다짐하는 결말은  나에게 그 어떤 연애 소설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벅차게 다가왔다.


「클라이브, 넌 참 바보구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난 너야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해.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들 중에 아름다운 사람은 너뿐이야. 나는 네 목소리를 사랑하고, 너와 관련된 건 무엇이든 사랑해. 네가 입은 옷, 네가 있는 방까지, 나는 너를 흠모해」

p. 113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건 어떨까?」

이런 말을 내뱉은 뒤 그는 자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도 없었고, 죽음 너머의 세계도 알지 못했으며, 집안 망신 같은 것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외로움의 독기에 취해 나날이 더 불행해질 뿐 아니라 더 깊이 타락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죽어도 되지 않을까? 그는 자살하는 방법들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고, 실제로 뜻밖의 사건만 없었다면 권총 자살을 감행했을 것이다.

p. 171

그러나 모리스한테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 말고는 아무도 중요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아주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철저히 혼자인데, 왜 살아가야 하는가? 그럴 이유가 아무 데도 없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은 암울한 예감이 들었다. 죽음도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음도 사랑처럼 그를 힐끗 한 번 바라보고는 그가 <분투하도록> 남겨 두고 돌아섰다. 그는 어쩌면 할아버지만큼이나 오래 분투하고, 또 그만큼 우스꽝스럽게 은퇴해야 할지도 몰랐다.

P. 177

그들의 과거의 책은 책장으로 돌아가야 했고, 여기, 어둠과 죽어 가는 꽃들에 감싸인 여기가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알렉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했다. 그는 새것과 옛것이 섞이는 고통을 겪을 수 없었다. 모든 타협은 속임수고 그러므로 위험하다.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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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리스」 잡담
    from 케이의 가지 못한 길 2017-09-06 15:45 
    마지막 지은이 E.M 포스터 의 후기에서 이때부터 클라이브는 점차 타락의 길을 걷고, 그에 대한 나의 태도도 차가워진다. 그는 나를 화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괴롭히고, 그의 메마름과 정치인 같은 태도와 벗겨지는 머리를 강조했다. p. 316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혼자 깔깔깔 웃고 말았다. 외국에서도 남자가 대머리 되는 건 최악의 저주 중 하나인가보다. 지은이의 말을 보고 E.M 포스터 작가의 사진을 찾아보니 머리카락이 아주 까맣고, 숱도 많으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20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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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 때 민음사에서 나온 '베니스에서의 죽음' 을 읽으며, 세상에 이렇게 재미 없는 소설들이 있을까 싶었다. 억지로 읽어서 그런지 끝까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니스에서 죽음' 외 다른 단편 소설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거의 새책과 다름없는 열린책들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중고서점에서 발견하였고, 정말로 이 책이 내 기억대로 재미없는 소설인지, 아니면 이제와서 읽으면 꽤 재밌는 소설일지 궁금해서 다시 읽었다.

  대학생 때 보다는 재밌게 읽었지만, 역시 토마스 만의 중단편 소설은 재미에서 가치를 찾기는 어렵단 결론을 내렸다. 이 책에는 토마스 만이 작가로서 조금씩 인정을 받던 시기의 소설 8편이 실려있다. 「굶주리는 사람들-토니오 크뢰거-힘든시간-베네치아에서의 죽음」 까지 무려 책의 절반인 4편의 소설 주인공이 속세와 거리가 멀고,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만 외로운 예술가, 즉 토마스 만 자신을 투영한 사람인 건 좀 아쉬웠다. 또 소설들 대부분이 바그너의 음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바그너 음악이라곤 '발퀴리의 비행' 과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 밖에 모르는 나는 그의 소설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 그래도 이번 열린책들 버전에서는 바그너에 대해 주석으로 꽤 많은 설명이 되어있어서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


  제일 좋았던 소설은 대학생 때도 좋아했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이고, 그 다음으로는 이번에 처음 읽은 '굶주리는 사람들' 이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베네치아에서 휴가를 보내던 소설가 '아센바흐'가  아름다운 소년 '타지오'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그 곳에서 죽는 이야기다. 이 소설을 다시 읽으니,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베네치아를 어딘지 모르게 병들고 광기어린 곳으로 묘사한 것 자체가 대단하단 생각을 했다. 아센바흐가 사랑하는 타지오도 단지 미와 젊음의 상징이 아닌, 불길함과 타락의 상징이지 않은가. 이러한 역설적 상징과 소설 전반의 어두운 분위기에 매혹될 수 밖에 없었다.

  '굶주리는 사람들' 에서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는 이가 느끼는 고립감과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조롱과 선망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 너무 절절하게 서술되어 있어 읽다 좀 울었다. 이 소설이 좋았던 건, 제목이 그냥 '굶주리는 사람' 이 아니라 '굶주리는 사람들' 인 것이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나와 비슷한 누군가를 발견하고, 자기와 닮은 그를 깊이 동정하면서도 동질감을 느끼는데 그 장면마저 없었다면 이 소설 역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만큼 우울한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토마스 만의 가장 유명한 소설 중 하나인 '토니오 크뢰거' 도 다시 읽으니 새로웠다.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람과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누가 토마스 만 처럼 잘 쓸 수 있을까 라고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여행에서 돌아온 토니오가 자기 애인에게 본인의 예술관을 설교하는 부분은 좀 지루했다. 그 설교가 아예 의미가 없다고 보진 않는다. 토니오가 굳이 그렇게 반복 설명을 한 이유는 아마도 토마스 만 본인이 예술가로서의 사명감과 가치관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근친상간을 소재로 한 '벨중족의 혈통' 은 다 읽고나서 너무나 찝찝했다. 남녀 이란성 쌍둥이였던 토마스 만의 아내에게서 소재를 가져와 쓴 소설이고 그 때문에 소송에 휘말릴까봐 한동안 출판을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이 신기한 게 이 소설이 쓰여진 후 태어난  토마스 만의 자녀 중 첫째인 딸 에리카와 둘째인 아들 클라우스도 남매보다는 연인에 가까운 관계 였다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이 소설이 자녀들의 미래를 예언한 꼴이 되고 말았다니.. 좀 끔찍하다. 소설에 베를린의 '티어가르텐'이 언급되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갔던 곳이 독일 소설에 나오다니?!


토니오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고, 그의 두 눈은 우울한 빛을 띠며 흐려졌다. 둘이서 오늘 오후에 같이 가볍게 산보를 하기로 한 사실을 한스는 잊어버렸단 말인가? 이제야 그것이 생각났단 말인가? 자신은 그 약속을 한 이후 거의 한시도 잊지 않고 이 순간을 손꼽아 기다려 오지 않았던가!

- 「토니오 크뢰거」 중

그래서 그는 해맑고 순결한 자신의 사랑의 불꽃이 불타오르는 제단 주위를 조심스럽게 맴돌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변치 않는 마음을 간직하려고 불을 휘저으며 어떻게 해서든 그 불씨를 되살리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 소문도 없이 그 불꽃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이 지상에선 변치 않는 마음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움과 환멸감으로 가득 찬 채, 불꺼진 차가운 제단 앞에 아직 한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제 갈길을 갔다.
- 「토니오 크뢰거」 중

아센바흐는 소년의 외모가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창백하고 우아하며 내성적으로 보이는 그 소년의 얼굴은 벌꿀 색 머리칼에 에워싸여 있었다. 곧게 뻗은 코와 사랑스런 입, 감미롭고 신적인 진지한 표정은 가장 고귀한 시대의 그리스 조각품을 생각나게 했다. 더없이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바라보는 자가 자연에서도 조형 예술품에서도 그만한 성공작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유일무이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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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에 관한 잡담
    from 케이의 가지 못한 길 2017-09-07 13:12 
    P.S 1. 단편 소설집 독후감 제대로 쓰려고 맘 먹은 건 처음인데 너무나 어렵다.. 7월에 읽어놓고 이제서 쓰는 이유도 도저히 어떻게 써야할 지 감이 안잡혔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구려 구려.P.S 2. 요즘 구글에서 작가들의 실제 삶에 대해 찾아보고, 사진 보는 데 재미가 들렸다. '벨중족의 혈통' 을 읽고 너무나 큰 충격에 토마스 만의 가족들에 대해 찾아봤는데, 토마스 만의 누나 둘은 자살했고, 토마스 만의 첫째, 둘째 아들도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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