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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그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지음 / 진실의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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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4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대학원을 다닐 때였다. 창원에서 살고 대학원이 천안이라 수업을 하고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수업도 일찍 마무리하고 카풀을 해서 내려가는 길, 근데 눈이 너무 내렸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지독함으로 바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부고속도로가 막혔다. 오르막에서 차가 멎더니만 차가 움직이질 않는다. 1시간, 2시간...라디오에선 눈사태를 방송하고 있었다. 그러면 조만간 교통체증이 해결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오전에 출발한 차량은 고속도로에서 가다가 서다가 반복하다가 아예 멈춰서버렸다. 게중에는 사람들은 차를 놔두고 도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탈출이었다.


눈이 엄청 내렸다. 사방이 눈천지였다. 배가 너무 고파서 교통체증에 멈춰버린 과자운반차량은 과자를 박스 채로 팔기 시작했다. 우린 그걸 운좋게 샀다. 나중에 어떤 친구는 인근의 마을에 내려가 주먹밥을 얻어먹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때 느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재난에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구나! 카풀한 사촌 형은 차에서 밤을 지새워야하기 때문에 기름을 아껴야 한다고 히터도 자주 켜주지 않았다. 배도 고픈데, 춥기도 추웠다.


그때 정부가 우리에게 해준 것은 헬기로 빵과 우유봉지를 중앙분리대 쪽에 떨어뜨려주는 것뿐이었다. 고속도로에서 하루를 꼬박 새웠다. 도로에서 기다린 24시간을 지나 우린 기다림에 지쳤다. 결국 참다못한 누군가가 앞쪽에서 시멘트로 된 중앙분리대를 옮겨 길을 텄다. 우린 유턴을 해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다행히 반대쪽엔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서, 차를 내버려두고 KTX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나라는 재난에 대해 구조적으로 굉장히 취약하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다. 후에 어떤 이들은 변호사를 구해 보상금을 받는 카페에 가입을 해서 보상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도 정부는 ‘가만히 있으라’였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겨주지 않는다. 눈 오는 날, 뼈저리게 느낀 시간!


<세월호>이야기를 다시 한다는 것, 그것을 거의 7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굉장한 부담이었다. 하지만, 나는 읽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사항이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다. 똑같은 실수의 번복과 무책임한 사람들, 자신의 책임을 무마하려고 변명과 핑계를 일삼는 사람들, 애꿎게 죽은 303명의 생명들, 그리고 단원고의 푸르디 푸른 아이들, 그리고 피눈물 흘리는 유족들...읽는 동안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더 내려놓고 싶었다. 우울해진다. 서글퍼진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나라가 이토록 무기력하다는 생각.


예전에 지인의 친구였던 ‘김선일씨 살인사건’이나 나의 ‘고속도로 눈사태’사건, 그리고 뉴스에서 알려졌던 수많은 재앙과 재난 사건들...그에 대한 진정한 책임자는 늘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세월호사건을 둘러싼 수많은 관계기관들, 구조팀들의 발빼기는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1심과는 달리 2심에서 형량이 줄어들었고, 무죄판결도 많았다. 죽어간 생명들만 원통할 뿐이다. 너무 답답했다.


가카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리더십들이 너무 재난에 취약한 구조를 가진 나라!


나의 개인적인 독서의 여정 가운데 한국사의 어두운 면들, 친일, 친미, 반미, 종북, 권력비리, 대통령들의 추악한 역사, 그리고 식민주의적 사관의 교육 등을 재발견하면서 너무 우울했다. 근데 세월호의 이야기는 더 나를 낙담하게 만들었다.


르몽드의 창간자 위베르 뵈브메리는
“바보같은 진실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고, 슬픈 진실은 슬프게 말하라”고 했다.


책을 다 읽고 던져 버렸다!
너무 힘들었다. 텍스트를 읽는 것은 감정도 같이 개입되는 것이기에 더 그러했을 것이다. 고작 텍스트 읽기도 이처럼 힘겨운데, 당사자들의 슬픔과 아픔은 어떻겠는가!


하지만, 아직도 세월호의 진실은 불투명할 따름이다. 책을 읽어도 마찬가지이다.


선장과 선원들이 도주하지 않고 다시 배로 돌아가고, 승객들에게 퇴선을 지시하고, 승객들이 밖으로 나오기만 했어도, 이 만큼의 저주같은 재앙은 없었을 것이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세월호 사건’ 앞에 원통하게 죽어가는 승객들과 유족들의 아픔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이 역사적인 비극이 우리 후손들에게 발생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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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내 마음을 가지는 일이다(p.246)”


이 문장이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저자는 삶의 밑바닥까지 간 인물이다. 채무관계 때문에 결국 감옥까지 갔다.
그리고 출옥후에 무일푼 막노동꾼, 즉 노가다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런 그가, 무슨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한단 말인가?

아니다.

저자 이은대의 글은 굉장히 쉽다. 잘 읽힌다.
그리고 엄청난 에너지와 힘이 있다. 그 힘이 책장을 덮을 때까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게 이 책의 대단함이다! 디테일한 자기 경험도 없고, 유명인사의 이야기도 거의 인용이 없다. 이런 책이 어디 있는가? 근데 힘이 있다.

그건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힘이다!!!

나는 누워서 조금 읽다가 자야지 했는데, 다 읽어버렸다.
인용문장을 보라.

‘마음을 가지는 일‘이라 한다.

얼마나 쉬운 문장인가?
‘이오덕의 우리말 바로쓰기‘에 딱 맞는 문장이지 않는가!
‘-마음을 지킨다, -마음을 다스린다, -마음을 소유한다‘ 이런 말보다 훨씬 더 다가온다.
이 문장을 보고서 심쿵했다.

이 책의 주제는 주구장창, 시종일관 ‘글을 쓰라!‘란 말이다. 근데 지겹지가 않다. 그것은 저자가 삶으로 체험해낸 고백을 해서 그렇다.
삶의 냄새가 난다. 새벽에 일어나 몇분 동안 글을 적고, 노가다를 하루종일 하고 얼마나 피곤한가! 그런데 돌아와 다시 몇시간씩 글을 쓴다.

왜 쓰는가?
생존의 글쓰기이다. 감옥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빚쟁이의 죄수로 남겨졌다.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래서, 글을 썼다. 그게, 그것이 저자를 살렸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뻔한 레퍼토리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이야기하는 글쓰기는 자기 영혼과의 독대이다. 영혼의 맨얼굴과의 직면이다.

영화 ‘히말라야‘에 보면, 엄홍길(황정민)과 박무택(정우)이 나온다. 남자들이 왜 미친듯이 산, 히말라야를 오르려고 하는가? 라고 질문할 때, 답은 이것이다.
˝영혼의 맨얼굴을 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거대한 히말라야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다. 생사를 결정할 권리도, 힘도, 자격도 없는 인간, 그 히말라야 앞에서 등반가들은 생사의 기로 앞에서 자기 인생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영혼의 맨얼굴‘을 본다는 것이다. 군더더기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을 수도 있는 등정에서 자기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할 수 밖에 없다.

˝영혼의 맨얼굴˝


책의 목차중에 몇개만 소개한다.


-‘보이는 것을 구체적으로 써라. 보이지 않는 것에 닿을 수 있다.‘
-‘솔직해져야 진정한 나와 마주하게 된다.‘
-‘찌꺼기를 남기면서 치유되길 바라는가‘
-‘결국 배설은 나만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


단순히 손 끝으로 적는 것, 글을 쓰는 것, 글을 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 마음을 가지는 일이다‘ .


저자의 재밌는 표현이 있다.

‘펜은 귓구멍을 파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p.202)

(푸하하하!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여기까지 너무 싱겁다.
나는 책을 한 번 읽고 저자에 대해 검색해 봤다. 저자가 어느새 책을 몇 권 더 낸 것이다.
근데, 게중에 유독 눈에 들어온 책 제목이 있다.
제목인즉,

‘최고다 내 인생!‘....

생판 처음 대하는 저자가 글쓰기를 통해 감옥에서 마음정리 했다 치자. 직장을 얻고자 해도, 전과자이고, 나이도 많고 결국 ‘노가다‘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가 글쓰기를 좀 했다고, 마음을 가졌다고, 책 몇권 썼다고 ‘내 인생 최고‘란 말을 하다니.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최고다 내 인생‘


난 이 표현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러면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이 책이 더 감동적이게 느껴졌다.
자기 영혼의 모든 껍질과 각질을 벗고서 자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글쓰기를 통해 독대한 저자이다.
그가 스스로 ‘최고다 내 인생!‘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우리중에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만족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SOSO한 수준이 아니라, ‘내 인생 최고‘라고 했단다.


난 그게 부러웠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깊은 어루만짐이 있었기에, 정신적 무장이 되었기에 그런 제목을 취했을까?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완전하게 용납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성취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난 그런 그의 글쓰기가 부러웠다!


글쓰기가 ‘내 인생 최고이지 않느냐‘라고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면서
인기와 좋아요를 갈구하는(나도 찔린다), 더 나아가 대중적인 지지와 명성과 경제력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내가 거침이 없다는 게 말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이다.
<버스데이걸>리뷰에서도 밝혔듯이, 인생의 문제는 자기 존재, 자아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 오는 것이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에서 보면, 현대인의 가속성, 너무 빠르고, 너무 분주하고, 너무 할 일 많은 이 세상에선 시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현대의 생명은 속도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랑하는 속도 속에 시간은 쉽게 사라지고 휘발되어간다. 그 시간은 향기가 없다. 이유인즉, 하이데거는 ‘머무르지 못하는 산만함‘ 또는 ‘머무름의 부재‘로 표현했다(p.104),
시간의 ‘진행은 어디론가를 향한 전진이 아니라 단순히 끝없는 현재의 사라짐 일 뿐이다‘(p,8). 그러면서 대안을 ‘사색적 삶(vita contemplative)을 되살려야 한다‘(p.17)고 했다.


글쓰기는 내 마음을 가지는 일이다. 우직하게 자신의 영혼의 맨얼굴에 머무르면서 사색하는 삶이다. 거기에 ‘내 인생 최고‘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근데, ‘내 인생 최고‘란 문구가 들어간 책이 진짜 많네! 헉!)


아이들과 에코랜드를 갔다. 숲체험프로그램이 있어 참여했는데, 가이드가 인솔해서 숲을 돌다가 문득 눈을 감고 조용히 숲의 소리를 들어보라고 했다. 새소리, 물소리, 숲이 주는 미세한 고요함...아, 그런 경험은 또 처음이네! 나는 왜 숲을 잘 몰랐지? 세상이 줄 수 없는 잔잔한 고요함이 내 마음을 감싸안는 듯 했다. 숲의 향기였다. 그 짧은 찰나적인 머무름이 내 존재를 상쾌하게 했다.

우리의 글쓰기가 머무름의 시간을 통해 향기가 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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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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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봐?”
-소녀시대의 노래제목이 생각난다.


이 짧은 하루키의 단편에 분노를 발하는 분들이 있던데, 책이 너무 얇은데 그에 비해 가격이 쎄다고, 그런데 스토리까지 실망하여 분노하는.


신영복의 <담론>에서 그런 이야길 한다. 책 즉 텍스트는 만들어지면 작가의 손을 떠나 따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루키가 쓴 이 단편이 아무리 비평가들이 찬사를 해도 내게 의미없는 맛이라면 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하지만 기억하자!
일본인 베스트셀러작가와 유럽쪽 화가(일러스트레이터인가?)가 만나 글과 그림을 만들어 책이 나온 것은 합리적인 가격이란 점(난 절대 출판사 종사자 아닙니다). 그게 너무 싫으면 나처럼 대출해서 보면 됩니다. 일빠 새책으로!


난 하루키 팬인데, 내가 하루키 책을 안 사도 하루키의 생업은 번성할 것이기에 난 하루키 책은 안 사는 걸로(이래적어놓고 또 변할 듯 <반딧불이> 사야할 것 같은 느낌!).


<상실의 시대>가 너무 좋아서 두번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용이 좋다기 보다 거기 등장인물이 너무 맘에 들어서. 그건 20대의 객기였고.


그에 비하면 ‘버스데이걸’은 뭐냐? 뭐냐고?

<스포 들어갑니다! 참고>


20살 생일에, 남친과 열나게 싸워 연락도 안 와, 대타알바해준다던 딸내미가 머피의법칙처럼 아파서 대타도 못 뛰어, 결국 하기 싫지만 알바를 하는 여자!


그에게 그 큰 레스토랑 노사장이 자기 저녁식사 심부름을 해줬다고, “소원을 말해봐!”라고 묻는다.


하루키의 말은 굉장히 철학적이다.


“인간이란 어떤 것을 원하든, 어디까지 가든 자신 이외의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구나, 라는 것. 단지 그것 뿐이야.”(p.57)


우리가 소원을 말할 때 ‘무언가’를 원한다. 근데 버스데이걸은 그 소원의 무언가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왜 자기가 소원이 이뤄지면, 자신의 별볼일 없는, 20살 생일날도 알바를 해야하는 그 우울하지만 그 평범이 깨어진다고 거절한다.


우리가 로또당첨이 되어 당첨자가 자손대대로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특이한 이야기는 있다. 로또당첨되었는데, 그 돈을 다 사회에 환원한 사람은 자손대대로 잘 살았다는 이야기.


자기 소원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다. 무엇을 지킬려고 하다가 ‘자기 존재’가 거덜난다. 버스데이걸은 소원의 “무엇”이 자기를 망치게 하거나 변화되게 하거나 상처주는 것을 거절한다.


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인생은 평범이 젤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버스데이걸은 그걸 알았던 것이다.


그게 버스데이걸의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스무살, 성인식의 가장 심장 뛰고 설레는 생일날, 누구와도 바꾸지 않는, 자신의 삶을 그 무엇과도 바꾸어 자신이 다치지 않겠다고 과감한 소원을 이야기한 버스데이걸이 갑자기 멋있어진다. 이거 쓰면서 별점 만점으로 바꿨네!


버스데이걸의 소원은 뭔지 모른다. 하루키는 안 가르쳐준다. 스무살이 훨씬 지나 누군가 “그 소원을 이뤘냐?”고 물을 때, “yes이기도 하고 no이기도 하다” 라는 답을 한다. 그 말은 그 소원은 지금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이다.


문득 그녀의 소원이 뭔지 한 가지 번뜩 떠오르는 게 있다. 근데 말하진 않겠다. 소설은 상상력이 생명이다. 이 하루키의 단편은 나만의 프레임으로 가져가 버리면 당신의 프레임은 없으니.


역시 하루키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리뷰 쓰면서 감동이 막 밀려오는 버스데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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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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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역시, 정유정이구나!
구덩이 속에 스토리를 왜 이토록 절절하게 쳐박아 놓았는지 나중에 알게끔 하는 정유정!

이전에 읽은 자기계발서에 가슴에 박힌 명문장이 생각난다.

“맨홀 뚜껑을 열고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문득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가 생각난다. 남자 둘이서 생쑈(?)를 하는 장면이 정유정의 두 주인공과 비슷해 보인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정유정 버전이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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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은 정말 제네바의 학살자인가? - 칼뱅이 제네바의 독재자이자 학살자였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팩트 체크 시리즈 1
정요한 지음 / 세움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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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났다
칼뱅은 기독교, 개혁주의의 토대를 놓은 필수적인 인물이다


독서를 하는 와중에 스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에서 이런 이야길 하는거다 칼뱅의 잔혹성, 폭력성, 권력성...그 책을 읽어볼 요량으로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를 구매했다. 츠바이크는 이전에 <에라스무스평전>으로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친근하게 다가왔다


종교는 진실을 토대로 세워진다 아무리 칼뱅이라도, 기독교의 뿌리의 근저에는 그가 있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 혹자는 칼뱅의 잔혹한 제네바 행태(?)에 대해 ‘칼빈의 신학은 yes, 그의 사역은 no’라고까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과연?


그 때 이 책이 나왔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신학연구자이다 칼뱅은 프랑스출신, 츠바이크도 프랑스에서 살긴 살았던데...왜 이런 지적, 역사적인 균열의 틈이 생기는걸까?


저자는 원인을 “사료의 선택의 (우선순위)문제”였다고 한다 츠바이크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제롬 볼섹까지 거슬러간다 츠바이크는 제롬 볼섹의 자료들을 근거했을 것이다 근데 제롬 볼섹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칼빈의 예정설을 부인했고 종교개혁 자체를 부인한 인물이다 결국 그는 카톨릭으로 개종한 인물이다 그에게서 무슨 칼빈의 좋은 이야길 듣겠는가? 여기서 오해의 틈이 생긴다


저자는 츠바이크가 1차 사료를 사용하지 않고, 2차, 3차 자료를 사용했기에 칼빈에 대한 오해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또한 츠바이크의 저서는 전기소설군에 속한다 역사의 팩트가 아닌 상상력의 픽션이 가미된 거다 여기서 역사적인 균열, 팩트의 균열이 생긴다


또 하나, 칼빈이 정말 폭력적인 학살을 감행했나? 이다 신학이 권력이 될때 종교는 타락한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가 그런 헤게모니를 가지고 율법을 모르는, 신학을 모르는 자들을 ‘땅의 사람들’이라고 폄하하고 무시했다 그건 정말 ‘종교’이지 ‘참된 신앙’은 아닌 것이다 기독교가 개독교의 오명을 받는 것은 기독교가 종교의 냄새가 너무 나버렸기 때문이다 믿음의 냄새가 나야하는데(여기서 ‘종교’란 단어가 다시 부정적으로 쓰였다 양해해주시길).


저자는 시대배경적인 측면에서 칼빈이 제네바에서 그만한 권력의 위치에 있지 않았음을 밝힌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이 그 당시 제네바가 신정정치 제도라 생각하는데, 그 당시 제네바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칼빈은 제네바 사역 시절 거의 대부분 난민 신세로 살았고, 1559년에서야 제네바 시민권을 비로소 얻었다 그것도 공직에 나설 수 있는 피선거권은 없는 2등 시민권을 받았다 그리고 불과 5년 후인 1564년에 죽었다 그런 그가 공권력을 통해 학살자가 되었다? 그건 어불성설이다


제네바교회(칼빈)와 제네바 시의회는 명백히 다르다 당시 제네바는 혼란의 시기였고 칼빈을 이를 계도하기 위해 도덕적인 질서를 바로 잡고자 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오히려 칼빈의 개혁을 거부했고 심지어 밤에 칼빈의 집 근처에서 총질을 하거나 칼뱅의 이름을 자기 개이름으로 붙이기도 하고 개가 칼빈을 물게끔 했다


또한 칼빈이 속한 제네바교회의 최고 기관은 치리회이다 교인들의 잘못과 범죄를 질책하고 벌주는 기관이다 벌이라 해봐야 사법기관이 아니기에 ‘출교’, ‘수찬정지’ 이다 사람을 사형시키거나 고문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칼빈 자체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일례로, 삼위일체론을 부인한 세르베투스는 화형선고를 받는다 칼빈은 그 전날까지도 그를 찾아가 설득하고 회개를 권했다


칼빈을 흔히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한다 20대에 기독교의 고전인 <기독교강요>를 집대성했으니 그가 얼마나 공부광이었겠는가! 그것이 일평생 칼빈에게 다양한 병을 제공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게 교리적으로 강력한 인물이 자신에게 육체적인 연약함을 발견했다면, 그가 설사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다 해도 생명을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신앙은 인격과 같이 가는 것이다 종교와 신앙, 믿음은 인격과 같이 간다 예수님은 능력 따로 인격 따로 아니었다 그분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인격’이었다 하나님을 육화한 성자 그리스도이셨다


만약 칼빈이 학살자였다면 그의 저서는 신뢰도가 떨어진다 삶은 신앙이고, 종교도 삶이기에. 우린 누군가에 대해, 무언가에 대해 위증해선 아니된다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거짓 위에 세워질 수 없다 종교는 가설 위에 세워질 수 없다 종교는 사실fact위에 세워질 때 영향력이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사 족:

1.미루다 미루다 결국 이제야 리뷰를 썼는데, 이렇게 긴 글이 되어버렸다 책보다 덜 길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2.글을 쓰다 보니 칼뱅과 칼빈을 혼용했다 양해해주시길. 마침표도 생략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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