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 그는 나의 영원한 멘토이다!

카이사르의 이야기를 시오노 나나미는 4-5권, 이렇게 두 권에 할애하였다. 시오노 나나미가 그토록 사랑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였기에 그런 맘을 이해한다. 또한 카이사르에게는 그러한 탁월하고도 영명한 자질들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의 영웅에 대해선 과잉적인 찬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카이사르에 대한 거품이 없을 순 없지만-‘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란 책이 나왔는데 그 책은 인물에 대한 거품은 조금 뺐다고 하더라고...-흥미만점인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에이드리언 골즈워디가 쓴, <카이사르>
이 책은 시오노 나나미의 카이사르에 대한 거품을 조금 뺐다고 한다. 당대 배경이나 분위기 기술이 좋다고 하는데... 
꼭 읽어볼 개인적인 필독서!


‘로마인 이야기에서 수 없이 반복되지만 듣기 싫지 않은 대목의 글이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사를 쓴 독일 역사가 몸젠은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

라고 평했다고 한다.’


그만큼 카이사르는 최고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처음부터 그러하진 못했다. 로마의 성공적인 정치가들을 보면 보통 30대가 되면 자신의 정치적인 면모나 군사적인 실력, 소위 말하는 될성 싶은 떡잎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 폼페이우스는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카이사르는 30대에 되어도 그리 변변찮은 정치적인 입지, 변변치 않은 계급...그랬다. 카이사르는 출신조차 돈이 많은 집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탁월한 정치적인 백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학자출신의 귀족 출신이긴 했지만 돈 되는 집안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이 귀족출신이라는 것을 반영하는데,

➊가이우스 ❷율리우스 ❸카이사르

귀족들은 이름이 이렇게 3개의 문구로 구성된다. 하지만 평민들은 2개 혹은 1개의 이름으로만 구성된다.

나는 카이사르가 너무나 인간적인 매력으로 똘똘 뭉쳐져 있어서 시오노 나나미가 반해버렸다고 생각한다. 남자인 나도 카이사르의 매력을 발견했는데 지적인 작업을 하던 그녀도 그런 끌림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카이사르는 머릿속이 텅 빈 인간이 아니라 수많은 저작들을 남겼던 문필가이기도 하지 않은가? 물론 지금은 그의 작품들 중 아우구스투스가 대다수 불태워버렸고 남은 것은 ‘갈리아전쟁기’,‘내전기’ 등 몇 안 되는 작품들이 남아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를 신격화시켰고 그런 신의 자리에 걸맞지 않은 카이사르의 사소한 연애편지와 다수의 저작들을 불태운 것이다. 이것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인 전략이었다.

나는 솔직히 ‘카이사르 지음’이라고 내 서재에 꽂힌 갈리아전쟁기와 내전기를 보면서 가슴이 뛴다. 그 유명하고도 탁월하고도 인간적인 매력이 가득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지은 저작이 내 서재에 꽂혀 있다는 만으로도, ‘카이사르 지음’이라는 그 문구를 보면서 흥분되기까지 한다. 그의 일생이 드라마처럼, 파노라마처럼 내 머리를 휘젖고 있다.

그리하여,
카이사르의 일생,
즉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4,5권-율리우스 카이사르‘ 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인상적인 점을 몇 가지 를

적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카이사르는 빚쟁이였다.

카이사르는 30대가 되기 전까지 엄청난 액수의 빚을 졌다고 한다. 당시 로마의 정치인들은 무급 봉사자들이었기에 요즘처럼 정치인을 하면 엄청난 액수의 비자금이나 물질을 거머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스스로에게 굉장히 정직했던 카이사르가 비자금이나 로비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집안 자체도 그리 부유한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군대는 정부에서 무조건 지원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사비로 군대를 편성하여 군인들의 봉급도, 보너스도 주었기 때문에 빚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돈이 꽤 많았던 폼페이우스나 안토니쿠스 경우와는 다르게 카이사르는 빚쟁이였다. 30대가 지나서 그가 로마의 집정관이 된 50대전후에서는 다소 빚이 청산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른 정치인들처럼 부유하다고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카이사르가 변호사활동을 했던 20대나 변호사 활동을 그만두고 로도스 섬으로 유학 갈 비용조차도 다 빚을 내어 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이러한 빚의 노예가 되지 않은 것은 그 만이 가진 굉장한 자신감과 적극적인 사고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만약 지금 정치판에 있었더라면 엄청난 부채와 카드값으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겠지만 카이사르 특유의 인간관계의 방식으로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덜미가 되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

  빚을 지고 있는 여러분, 카이사르를 보면서 위로를 받으라!!!


두 번째, 좀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카이사르 특유의 자신감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가 어떠한 환경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용기를 뿜어낼 수 있었던 것은 카이사르가 가진 탁월한 자신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것의 원인은 어머니의 충분하고도 넘치는, 충만한 사랑의 관계에서 찾고 있다. 카이사르는 변호사 사업에서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하고 나서 유학길에 오른다. 로도스 섬으로 가는 도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적을 만난다. 해적들을 카이사르의 몸값으로 엄청난 액수를 부른다. 당시 로마인들은 개인 비서와 같은 노예들이 주인과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노예들이 카이사르가 해적들에게 풀려나기 위해서는 몸값을 빌려서라도 지불해야만 했다. 카이사르는 여기서 대뜸 자신의 몸값을 2.5배로 올리면서

 ‘너희들이 붙잡고 있는 내가 누군지 알기는 아느냐?’

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심리적인 전술이다. 그는 해적의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 오히려 몸값을 턱없이 올림으로써 해적들로부터 어떠한 해도 받지 않으려는 몸짓이었던 것이다. 노예들이 돈을 빌리러 간 사이에 카이사르는 연극 비슷한 것을 해적들과 같이 하면서 우스갯소리로

‘내가 너희로부터 풀려나면 반드시 너희들을 다 죽여 버릴 것이다’

고 했다. 해적들은 그 말을 농담으로 여기면서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뻥치는 이런 베짱과 여유는 그 자신의 특유한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지만 로도스 섬으로 와서는 사람들을 사서 해적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다 섬멸하고 자신을 괴롭혔던 해적들을 다 죽여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서 해적들의 보물과 자신의 몸값도 도로 찾았다는 일화가 있다. 현대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은

“카이사르는 휴먼 코미디를 능숙하게 연기한 희극배우였다.”

고 할 정도였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기도 하였지만 그 자신만의 특유의 자신감, 물론 그것은 그가 갈리아 전쟁에서 터득하고 일평생동안 전쟁터에서 갈고 닦은 전쟁의 기술, 전략, 전술의 노하우에서 나온 것이지만, 을 발휘하여 군사들을 독려하고 그럼으로써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라는 말을 남기면서 로마의 내전기의 전쟁의 승리자로 군림하기에 이르른다.

셋째, 카이사르는 바람둥이playboy였다.

카이사르가 타프수스 회전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반대파였던, 소(少) 카토의 죽음으로 인해 내전기의 승리를 자축하는 개선식 때였다. 그의 휘하의 군단병들이 외친 구호는 카이사르의 이러한 여성편력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시민들이여! 마누라를 숨겨라. 대머리 난봉꾼이 나가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사들조차도 바람둥이였음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아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자신의 암살의 주동인물로 떠오른 브루투스의 어머니이기도 한 세르빌리아와 평생 애인관계를 유지했고, 자신의 빚보증을 끊임없이 서 주었던 인물의 아내와 염분을 뿌리기도 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카이사르는 다양한 여인들의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다.

심지어 이집트의 여왕이기를 고집했던 클레오파트라와도 썸씽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태어난 아들이 바로 ‘카이사리온’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이 아들, 카이사리온에 대한 언급을 일부러 피했는데 그것은 클레오파트라와 그 아들에 대한 배려였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의도적인 카이사르의 무관심에 상처를 받았고 후에는 안토니우스와 붙게 된다. 결국 카이사르의 심중을 정확하게 꿰뚫지 못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자살하기 직전에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왕으로 발탁해 달라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부탁한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후계자는 비록 종손자이긴 하나 옥타비아누스 한 사람이어야만 하기에 카이사르의 혈육인 카이사리온은 훗날 또 다른 권력승계의 불씨가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옥타비아누스는 17세의 카이사리온을 살해하고야 만다.

 

 

 
카이사르가 바람둥이였다는 것은 굉장한 호기심을 유발하게 한다. 어찌 그것이 가능했는가? 카이사르는 여자에게 완전히 푹 빠지는 안토니우스 같은 스타일의 남자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여자에 대해서도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여인들에게서 젊었을 때부터 호감을 갖게 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가 그토록 많은 빚을 진 이유도 여인들에게 선물공세로 여자들의 환심과 부러움을 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바람둥이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의 친혈육인 아들은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카이사리온도 그러했고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던 딸 율리아도 그렇고. 그런 것을 보면 바람둥이의 후계자는 친혈육이 될 가능성이 적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누나의 손자였긴 하다. 하지만 아들이나 친손자는 아니지 않는가?

넷째, 카이사르가 가진 특유의 균형감각이다.

이러한 균형감각은 정치판에서 뿐만 아니라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보통 여자들과 문어발식 연애를 하게 되면 여자들끼리의 질투와 시기는 당연한 현상이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글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여자들은 그러한 질투심이 없었다고 한다. 모든 여자들이 있는 그대로의 카이사르를 좋아했고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와 결혼을 요구하지 않았고 평생 애인관계로 지냈다고 한다. 로마의 고위층에서는 카이사르의 이러한 여성편력을 다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바람둥이’가 무슨 정치를 하느냐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고 한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바람둥이가 정치판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면 유교사상이 가득한 우리 기성세대가 과연 용납하고 허용할 수 있을까? 카이사르의 여성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대를 타고 났고, 그 장소가 로마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카이사르의 이러한 균형감각은 정치판에서 ‘관용정치’로 일관되었다. 로마를 쿠데타로 이끈 후 반대파들의 살생부를 만들어 모조리 숙청했던 술라와는 달리,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등을 돌렸던 인물들을 다시 포용하고 껴안는 ‘관용정치’를 폈다. 전쟁에서 포로가 된 자들을 석방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거나 자신의 휘하에 부하로 흡수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경우도 다른 장군들에게서 보이긴 하지만 카이사르만큼 이러한 선대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직속부대이자 친위대라고 불릴 수 있는 로마의 제 10군단이 있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전쟁을 통해 제 10군단이 카이사르에게 보이콧을 감행했다. 그것은 일종의 ‘어리광’이었다. 카이사르는 돈이 있었지만 돈이 없는 것처럼 장교들의 지갑을 빌려 사병들에게 봉급과 보너스를 줄 정도로 심리전에 능한 지휘관이었다. 이것은 옥타비아누스가 보여주는 위선과는 굉장히 주도면밀한 심리적인 전략이었다. 제 10군단의 이러한 ‘어리광’에 대해 카이사르는 어르고 달래는 과거의 처세술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대들의 제대를 허락한다.”

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자 군단병들은 오히려 의기소침해하면서 자신들의 실수와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하면서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게 달라고 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의 부탁을 못 이기는 척 들어주면서 그들에게 형벌-당시에 군법은 이런 전쟁거부자들에게 체벌을 내리는, 심지어 태형으로 사형에 처하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을 대신 보류한다고 했지만 그것도 흐지부지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치밀한 심리적인 균형감각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아닌가?

카이사르의 균형감각은 전쟁터에서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속국이나 식민지 정책에 대해서 굉장한 균형감을 유지한다. 세금문제나 지배자문제 등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예를 들어,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65세의 나이로 기원전 51년에 죽었다. 선왕의 유언장에는 맏공주와 맏왕자가 공동으로 나라를 통치할 것과 이집트 왕실은 앞으로도 계속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자’로 남을 것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것은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심취한 나머지 그러한 것이 아니라-안토니우스는 그러했다-정치적인 판도와 정서를 고려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맏왕자는 아무리 반대파이지만 폼페이우스를 살해한, 같은 동족인인 로마인을 살해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같은 동족을 살해한 인간을 용서치 않는다. 더군다나 폼페이우스는 전직 집정관의 지위를 가진 어엿한 공인이었고, 이집트 왕실의 ‘파트로네스’이기도 했다. 이러한 로마인들의 정서가 존재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살해를 모의한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카이사르가 굉장히 정치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대의명분은 무엇인가? 자신이 태어난, 자기가 사랑하는 로마의 중흥이며 안정이며 평화였다. 로마 제국을 위해선 무엇이 옳은지를 제대로 분별할 줄 아는 정치적인, 천재적 감각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매력에 압도된 카이사르인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될 때 클레오파트라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또한 ‘갈리아전쟁기’에서는 이민족, 타민족과의 전쟁이야기였기 때문에 세세하게 전략이나 전술,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과 느낌의 세부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내전기’에서는 그러한 개인적인 감정을 노출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아래의 문장을 보라!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았다.”

자신의 사위이기도 했고 ‘삼두정치’의 같은 동지이기도 했던 폼페이우스, 하지만 이제는 반대파의 주인공으로 앞장서다가 결국은 살해당한 폼페이우스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을 절제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가 지금 ‘내전기’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내전기가 무엇인가? 바로 로마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전쟁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 글을 읽는 독자가 로마인, 동족인이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먼훗날의 모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기에 자신이 로마의 지도자로 일할 때에 반대파까지 흡수하고 껴안고 가야하기 때문에 폼페이우스파에 섰던 반대파의 정서까지도 고려하는 철저한 균형감각을 그의 글에서도 보여주었던 것이다.

다섯째, 카이사르의 지성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카이사르는 갈리아전쟁기와 내전기를 통해 자신의 문필을 과시했다. 다른 저작들도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카이사르의 비서이거나 전쟁터에서 옮겨 받아 적은 비서들의 기록이었다. 카이사르의 지성은 당대 최고의 변호사요, 언론으로 대변될 수 있는 키케로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면서 내전기를 마무리 지을 단계에서 키케로는 소카토가 자살한 것에 대해서 카토를 찬양하는 “카토”를 발표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읽어본 카이사르는 “안티 카토”를 발표할 정도였다고 한다.


번역된 카이사르의 저작물, 갈리아전쟁기와 내전기

보통 정치인들이 판도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왔을 때는 물리적인 힘, 권력의 힘으로 제압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우리나라의 전두환 정권 당시가 그러했지 않은가? 하지만 카이사르는 오히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자신의 속내를 지성적인 면으로 터트릴 줄 아는 문인이었던 것이다. 일개의 키케로가 문인에 불과했지만 카이사르는 무인이자 문인이었다. 그는 로마에 대한 거시적인 비전, 제국주의적인 비전을 가슴에 품었던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던 것이다.

여섯 번째, 카이사르의 용기이다.

이 대목은 카이사르의 젊은 시절, 그가 막 결혼을 하였을 때였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파에 속한 평민계급 진형에 속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귀족정치의 대표주자이자 귀족계급, 원로원정치의 주창자인 술라가 군사적인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반대파인 평민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살생부’에 올랐고 대대적인 숙청이 가해졌다. 카이사르의 아내이자 킨나의 딸인 코르넬리아 또한 평민계급과 얼키고 설켰기 때문에 술라는 카이사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술라는 아마도 젊은 나이의 카이사르에게 비전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그러했을까? 카이사르 또한 ‘살생부’에 이름이 올랐던 인물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단순하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자기가 그런 대답을 하면 자기에게 닥칠 위기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술라의 눈을 피해 로마 밖에서 ‘도망자’신세로 20대 초반을 지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카이사르의 정치적인 이념과 용기와 확신이 상황과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한결같은 자신만의 정치적인 스타일을 풀어헤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카이사르의 영향력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44년 3월 15일에 암살당했다. 카이사르가 집정관으로 머무르면서 그가 총체적으로 로마에 개혁의 선두주자로 섰던 것을 로마인들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암살세력들은 카이사르를 제거하고 그를 ‘폭군’으로 매도하면서 일반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살해의 정당성을 연설하고자 했지만 분위기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또한 카이사르의 죽기 6달 전에 작성된 유언장에는 자신이 죽으면

“수도에 사는 로마인들에게 일인당 300세르테르티우스씩을 주고,
테베레 강 서안에 있는 카이사르의 소유 정원도 시민들에게 기증한다.”

고 씌여져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카이사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정직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만이 아들에게 유산을 남겨줄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유언장은 로마의 아버지인 카이사르는 로마의 아들들에게 유산을 남겨주는 정치적인 선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카이사르를 암살한 세력들에게 ‘부친살해’라는 거대한 중죄의 굴레가 씌여지게 된다.

카이사르의 유언장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의 자리를 거절할 경우 자신의 군단의 장교였던, 데키우스 브루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심중도 모르고 변절하여 카이사르의 암살파에 몸담게 된다. 카이사르파의 장교들이 암살파에 적지 않게 가담한 것은 참으로 씁쓸한 대목이며 인간을 믿고 끝까지 신뢰한다는 것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카이사르의 이러한 죽음으로 인해 로마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지만,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브레인brain을 그대로 이어받아 로마제국을 더 탄탄하게 기반을 닦아가게 된다. 물론 옥타비아누스가 어린 나이에 후계자로 지명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더 큰 이유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제국에 대한 최고의 선견지명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창조적 천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군사적인 실력을 아그립바의 보좌를 통해 커버하고, 외교적인 관계는 마이케나스를 중용함으로써 카이사르의 로마의 청사진을 그대로 재현해냄으로써 로마 황제의 자리를 이어나가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생각했던 청사진을 그대로 현실화시키기만 해도 그는 본전을 뽑는 장사를 하게 된 셈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대략적으로 로마인 이야기의 4-5권의 주인공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글을 남겨본다. 그의 매력적이고도 담도 있고, 흥미진지하면서도 비극적인 인생, 박진감 넘치는 인생 여정을 어찌 내 글로 다 담아낼 수 있으랴마는...그래도 카이사르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라도 표현해내는 것이 독서 후의 여운에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일상 가운데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문득 질문하곤 한다.

˝카이사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요즘 내 삶의 에너자이저요, 강장제와 도전의 시금석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는 영원한 나의 멘토이다.


2008년 2월에 적다.
(과거의 글을 소환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읽은 책 리뷰를 알라딘에 다 기록하지못한 북플초보니 널리 양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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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공부를 하려거든 - 3625명의 공부 습관 관찰기
정경오 지음 / 양철북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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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단순 공부책이 아니고 대학진학을 위한 중고생들을 위한 공부책이다. 고교교사로 재직하면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의 공부습관을 수집.채취하여 책으로 펴낸 책이다. 중고생을 둔 학부모가 읽거나 아이들에게 도움되게 선물할 수 있는 책이다. 난 ‘공부’라고 하길래, 덜컥 사서 읽었는데 ...하악~약간 바보같다. 잡으면 무조건 읽어야하는...<서양미술사> 1/3남은거나 읽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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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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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lieve in the church of baseball.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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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손님을 읽고

                                                        

세계지도의 아주 작은 여백을 메우고 있는 한반도는 아직도 냉전이라는 분단의 선분을 긋고 있다. 그 분단의 아픈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과거사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소설 손님의 스토리는 잔학한 미군과 기독청년들의 횡포사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소설 가운데서도 드러나지만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단지 남한과 북한, 두 이념 간의 대립. 갈등구도에서 남. 북한이 자의적으로 해결되었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3자가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남. 북한의 상처는 더 확대된다. 사람과 사람의 갈등도 제3자가 괜스레, 불필요하게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구도 자체도 어색해지고 양대 구도가 삼각구도로 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분위기는 더 험악해질 수밖에 없다.

황석영의 손님은 이러한 우리나라의 정치적, 역사적 현장 위에다 기독교를 양념(?)화하여 자신의 논리를 소설화하고 있다. 역사적 불청객으로 둔갑한 기독교인들의 만행에 대해 어떻게 변명을 할 수 없겠으나 기독교의 부정적인 면만 극대화한 것에 대해 서운함이 없지 않다.

솔직히, 우리 민족의 분단을 조장한 것이 서양 즉 미국이긴 하지만 그 미국과 기독교를 equal(=)부호로 동일시한다는 것은 말도 아니 될 뿐더러 분단의 아픈 현실 가운데 기독교가 악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수의 기독교라는 명찰을 단 기독인들의 책임이고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버리고 우리 기독교의 역사적 책임에서 회피하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처사가 아닐 것이다.

    

소설 속의 기독인의 죄스런 처사가 비록 단편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민족이 가진 상처는 기독교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 한국교회에 친일파 전통이 배여 있다는 뼈아픈 역사현실 위에다 개인적으로 황석영의 소설을 통해서 나로서는-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 중의 한 사람으로서- 6. 25전쟁 이후의 후유증에 대해 기독교는 또 한 번 통감의 의무를 감당해야 할 것임을 생각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교회는 시대를 아우르고 시대를 포용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교회 즉 기독교는 이러한 역사적인 책임성을 걸머쥐고 민족이 가진 동존상잔의 비극, 그것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 모색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더 우리가 민족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의 종교가 기독교라는 것에 있다-물론 나는 종교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Martin Llyod Jones가 쓰는 표현인 기독교는 관계이다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민족을 향한 선지자적인 눈물을 훔치고, 흘렸던 믿음의 선조들처럼 기독인들은 이런 눈물로 주 앞에서 긍휼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작금의 세태 가운데 남북관계에 대해 기독인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자주 언급되고 있는 흡수통일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봐도 통일비용에 대한 남한 국민들의 고통분담금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 현실이기에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남북한의 합일(Unity)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섣부른 긍정이나 부정의 판단 이전에 한국 기독교는 남북한의 분단 현실에 대해서 계속적이고도 진지한 관심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3년도에 적었던 글을 <누가 북한을 움직이는가>에 대한 리뷰를 적다가 <손님>리뷰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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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북한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태영호의 책을 읽는 중에, 남북한 판문점 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일어났다. 그러던중에 이 책이 나왔다.

책을 읽으면서 속도를 내기 위해 볼펜을 내려놓고 중요한 대목은 접어서 다시 줄을 긋고 메모할 요량으로 완독했다.

근데, 다시 접은 부분을 들추어내려니 시간도 시간이고, 힘들겠다 싶다.

 

내가 받은 인상 몇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1 북한의 지도자는 김정은이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으로 3대세습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이제 북한의 대표자는 김일성도, 김정일이 아닌 김정은이란 사실이다. 이 말은 이전에 두 지도자를 바라보던 프레임으로 김정은을 보아선 아니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김정은은 김정일이 북한내에서 지도자훈련을 받은 경우와 달리, 그는 유학파이다. 유학파 엘리트 출신이다. 그런 차별점이 바로 자신이 지도자로 오른 뒤, 권력의 제2인자 황장엽 숙청부터 시작해서 아버지의 측근들을 대다수 숙청 아니면 권력의 자리에서 추방시켰다. 이를 보면서 김정은을 '미치광이'라거나 '망나니'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이것은 김정은의 기획된 노림수이고 전략이다.

이를 통해 김정은은 권력을 양도받는 기간이 너무나 짧은 약점(김정일의 이른 죽음으로)을 권력중심자들의 '세대교체'라는 카드로 극복하려 한다.

 

김정은은 '북한 최초의 시스템형 지도자' 스타일을 지향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김정은이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 김일성의 권력장악스타일을 모방하는 점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외모 또한 김일성을 많이 닮았다는 것으로 어필한다는 점이다. 그게 뭐라고? 아니다. 북한은 김일성이 세운 나라이기도 하기에, 김일성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이다. 일부 의견에서는 김정은이 성형수술을 했다고 의혹도 있다고 본다. 김정은이가 할아버지 김일성을 벤치마킹했다. 김정은은 머리를 쓸 줄 아는 지략가이다.

 

2 김정은이 내건 두 가지 목표이다.

첫번째는 핵무력 건설이라는 병진노선이고, 두번째는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경제대국으로써의 꿈이다. 그런데, 핵을 보유함으로써 강대국들과의 관계에서 '코너에 몰린 생쥐'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북한의 협상의 테이블로 나왔다. 하지만, 과연 북한이 비핵화가 가능할까? 참고로 리비아라는 반면교사가 있기 때문에 북한은 핵을 포기하는 것이 어렵다는 전문가의 지적도 있다. 하지만, 북한이 경제를 잡으려면 병진노선을 접어야 한다.

 

3 불쌍하기 짝이 없는 달러히로어즈들

북한의 경제력을 버티고 있는 것은 해외에 나가 지독한 노동에 시달리며 외화를 자국으로 강제적으로 송출당하는 북한의 노동자들 때문이다. 이들은 북한의 '달러 히로어즈'들이다. 이들은 제대로 된 임금도 잘 못 받지만, 받아도 거의 정부에게 빼앗기다 싶이 한다. 그래도, 북한내부에서 일할때보다 낫다고 거기에 목을 맬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북한의 해외 송출 노동자 현황을 보면, 러시아 2만명, 유럽 400-500명, 중동 7,800명, 중국 19,000명 이상, 아프리카 1,000명, 말레이시아 400명 등이다. 2015년에는 9만여명이었는데, 2016년에는 12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북한은 변화하고 있고, 국제관계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떤 변화를 또 가져올지 기대된다.

김정은은 특별히 경제대국의 꿈을 가지고 '교육'에 신경을 쓰면서 영어, 외국어 교육을 강조한다.

베일에 싸인 북한의 모습을 들추어 본 이 책의 결론은 '북한은 나름의 시스템과 로드맵을 갖춘 국가였다'(p.264)이다.

이정서의 <85학번 영수를 아시나요?>란 소설에 보면 고성식이란 인물이 나온다. 그는 김일성대학 출신엘리트였다가 귀순한다. 그리고 신문사와의 원고 계약을 한다. 하지만, 한국사람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글을 도저히 쓸 수 없겠다고 주인공에게 이야기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역으로 말하면 돈 앞에서는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무서운 것 같아요. 북한은 못 살지만, 서로가 못사는 만큼 서로에게 관심이 많죠. 여기처럼 각박하지는 않다는 겁네다. 모든 가치 기준을 돈으로 재려 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보니 적응이 잘 안되네요."(p.99)

북한과 남한의 프레임과 패러다임의 차이점을 소설의 한 대목에서도 느껴진다.

 

문득 읽은지 한참된 황석영의 <손님>이란 소설이 생각난다. 그 내용은 미제국주의와 동일시되는 기독교, 기독교와 동일시되는 미제국주의가 한반도에 끼친 해악을 고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손님...

하지만, 이제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이 한 민족, 한 혈육이 아니라 '또 다른 손님'의 입장이 될 수도 있는 문화적인 거리감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치나 외교나 국제정세에 너무나 미약한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쓴다는 것이 너무나 쑥스럽다. 하지만, 휘발되지 않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

 

<누가 북한을 움직이는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 소설이 바로 김진명의 <미중전쟁>이다. 김진명의 소설의 마지막은 '비약'이 심하지만, 나름대로 국제관계도의 해부는 제대로 한 듯하다. 소설에 보면 중국을 노리고서 미국은 북한을 도발하려고 한다. 그런데, '북한에 전쟁을 하려면 반드시 한국 대통령 문재인에게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이런 대목이 있는데, 미국은 이를 무시하려고 한다....

'2017년 8월 15일, 문재인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는 어떤 전쟁도 안 된다는 입장을 강하게 표명했다. 김정은은 이런 문재인 대통령에게 강한 신뢰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p.148).'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란 소설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호주시민권을 얻기 위해 호주로 온 예나에게 아주 쿨한 미국인 친구, 엘리가 있다. 엘리는 모든 것이 시원시원하다. 예나가 알바를 하다가 의류점 상사에게 꾸중을 들으면, 오히려 옆에서 예나를 변호해준다. 그런 모습에 예나는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익스트림 스포츠를 굉장히 즐기는 예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엘리의 목적은 예나의 빌딩 옥상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호주법에선 불법이었다. 엘리는 거주자가 아니기에. 엘리는 자신의 순간순간의 소확생, 하지만 너무나 스펙타클한 꿈을 낙하산을 펴 들고 뛰어내린다. 근데, 그 타이밍이 안 좋았다. 그때 호주에 테러신고가 들어와서 낙하산을 탄 엘리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엘리는 착지할 때 다리를 다쳤고 벌금을 물었다. 하지만, 불법으로 집에 엘리를 들인 예나는? 예나는 엘리의 야생적인 욕구를 채워주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 엘리를 집에 들였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예나는 전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그것에 엘리도 어느정도 책임이 있음을 알로 엘리에게 찾아간다.

 

"하지만 너 때문에 난 집에서 쫓겨나게 됐다고! 4년동안 모은 돈을 전부 다 날리게 됐어! 넌 미안하지도 않니?"

"아니, 호주법에 따르면 네 손해는 네 책임이야. 너희 집을 관리 감독할 의무는 내가 아니라 네 한테 있었던 거라고. 적어도 내 생각엔 그래. 네 생각이 나와 다르다면, 우리 중 누가 옳은지 법정에서 다퉈볼 수 있겠지."(p.128)

엘리는 그런 여자였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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