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알려고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의 지적 호기심에는 실용적 지적욕구가 있고, 순수한 지적욕구가 있다. 하지만, 번외로 여성주간지적 지적욕구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속물적이며 저속한 욕구에 속한다.

 

저자는 인류의 지()의 총체를 향한 도전이란 목표로 목적으로서의 독서수단으로서의 독서를 나름 실천하고 있다. 그에게 특이한 점은 그의 <고전古典>에 대한 재정의이다. 보통 고전이란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전은 19세기의 전형적인 문학의 범주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또한 고전은 적어도 500-1000년 정도의 검증을 받은 텍스트를 가리킨다. 하지만 다치바나 다카시는 고전은 이미 과거완료형의 내용이기 때문에 의미가 덜 하다고 말한다. 그는 오히려 최신보고서에 확대되고 집적되어 있는 지의 총체에 더 의미부여를 한다. 고전과 더불어 지금까지 업데이트된 모든 것, 말 그대로 전체적인 통합의 관점에서, 보다 폭 넓은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보다는 제너럴리스트가 되길 바란다. 독학은 마음먹은 일을 지속시키는 일이며, 그러기에 비용을 지불해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하지만, 독학의 위험성은, 응답과 질의과정이 없기 때문에 독선적인 해석의 리스크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어떤 분야, 이슈에 대해 읽고자 할 때, 먼저 입문서 한권을 정독하고, 다시 입문서 5권을 가볍게 읽는 방식으로 독서를 한다. 물론 책상 위에 일단 쌓아두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한, 저자는 책 읽는 도중에 메모하지 말라는 팁도 알려준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다카시의 방식이고, 독서를 할 때는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독서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나는 간혹 너무 두꺼운 책을 밑줄 긋지 않고 중요한 페이지를 접었다가 나중에 다시 체크하려 했는데,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필사도 해보았지만, 확실히 책읽는 속도가 더뎌지는 것은 사실이다. 우연찮게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대학노트에 메모하면서 독서를 했다. 근데 너무 힘들었다. 내가 왜 그렇게 메모를 했을까? 아마도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이라 다시 볼 기회가 없으니 메모를 했을 것이다. 근데, 한 번씩 대학노트를 뒤적이면 메모의 내용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책의 내용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그게 메모의 힘이다. 독서를 할 때 너무 속도 위주로 가다보면, 기억은 휘발되고 망각이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잊어버려야 또 받아들일 수 있으니.

   

하지만, 속도도 중요하다. 독서를 시작할 처음엔 독서법에 대한 책중에 김병완의 <퀀텀독서법>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 책에서 말하는 요지는 독서는 뇌로 하는 것이지,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과, 또 하나는 결국 양이 질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31000, 더 나아가 자신은 31만권 독서를 했다고 자랑한다(독자들 중에는 김병완작가가 너무 자랑이 심하다고 하더라ㅎㅎ). 독서를 처음 할 때는 굉장히 도전이 되었다. 하지만, 김병완 작가의 자기계발서를 계속 읽다보니 중복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손에 그 사람 책을 잡기가 싫어졌다. 중복이 많아도 너무 많아 신선함이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모든 책은 모든 독자에게 다양하게 자신에게 나름대로 필요한 책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평가한 것 때문에 그 책을 가까이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선입견을 가져 멀리하게 되면, 그것만큼 악평한 자가 저자에게 미안한 일도 없다. 그래서 평가하는 것이 때론 조심스럽다. ‘결국 양이 질을 낳는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기에, 김병완 작가의 책들은 선별해서 읽으면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다독가이기에 메모하고 머무르는 여유보다는 전진하는 데 더 큰 장점을 둔다. 독서법의 왕도는 없는 듯하다.

 

지의 거장으로 불리는 그에겐 확실히 지적인 광기가 있는 듯하다. 놀란 것은 그의 부모가 크리스챤이었다는 것이다. 복음의 불모지인 일본에서 기독교집안의 출신이라는 것. 그가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런 신앙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그가 신앙을 가진 것으로 보긴 어렵다는 것은 판단된다. 영어, 페르시아어, 심지어 한국어까지 가정교사를 두어 외국어를 배웠다는 자전적인 이야기가 있다.

 

엄청난 정보광, 지적인 호기심이 고양이빌딩을 개인서재로 만들었다. 지하 1, 지상 3층까지 만들었다. 그리고서 자신의 자료와 문서들을 보관하고 관리, 정리하는 비서를 뽑기 위해 광고를 냈다. 500통이 넘는 지원자들이 몰렸다. 결국 21명으로 추려서, 최종후보를 4명으로 압축해서 시험과 면접까지 보았다는 이야기는 일반인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드는 내용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확실히 광적이다.

그의 저서, <지식의 단련법>을 읽다 도서관에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읽었다. 그리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 피도 살도 안 되는 100>을 빌렸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이 책은 읽다가 한번 대충 훑어보고 반납했다. 모든 독서가들은 나름대로의 주관과 고집이 있는데, 메가 독서가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얼마나 더 그러할까? 피가 되고 살이 되기엔 나에게는 너무 벅차다 싶어 추천도서만 챙기고 반납했다. 특별히 기억나서 구매한 책은 사진작가 카파의 책이다.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런 지의 거장이 추천하는 책은 분명하다. 내가 보지 못하는 명작과 양서를 훔쳐볼 수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에 대한 내가 느낀 점을 대충 정리해 보았다!

 

첫째, 일본인들 중에 지적 거인이 굉장히 많다.

둘째, 일본 저서들이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것이 많다.

셋째, 다치바나 다카시의 지식욕과 정보욕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fact이다. 잡지, 과학, 우주, 수학, 철학...모든 영역을 뛰어넘는 지적 탐욕이 그에겐 있다.

넷째, 지식이 차고 넘치면 외국어를 배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다. 최신의 과학정보와 자료가 외국어로 넘쳐난다. 관심은 있는데 언어가 안 된다. 언어의 한계로 보지 못한다면, 지식인으로 그것도 힘든 일이다. 과학관심자들에겐 더 그러할 듯!

다섯째, 다치바나 다카시가 그렇게 지적 거인으로 서기 위해선 아내의 내조가 크게 작용했다. 새벽에 남편의 고양이 빌딩의 벽에 그릴 그림 그리는 일로 인해 지인을 찾아가는 데, 아내가 운전을 손수하며 동행했다는 것이다. 우리 아내는 과연???

여섯째, 지적호기심은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고, 저자의 탐욕적 지식의 호기심은 넘쳐났던overflow 것이다.

일곱째, 짧은 시간에 다치바나 다카시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어 좋았다.

여덟째, 더 많은 앎을 위해 그는 선천적으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문학독서습관을 들 수 있고, 후천적으로는 그가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문학을 좋아했던 학창시절이지만, 저자는 문학은 읽지 않는다고 한다. 문학fiction보다 현재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사건들non-fiction이 더 흥미롭다고 말한다.

아홉째, ‘멋지다는 말보다는 대단하다!’ 말을 남기고 싶다.

열 번째, 하지만, 내겐 , 거기까지다!’

 

 

 

여담...인용 쪽수가 없네요. 그땐 뭐 중요하겠나 싶어 기록하지 않았나 봅니다. 겨울이 너무 추웠나? ㅋ

 

 

 

(다치바나 다카시 책 다 읽을 것도 아닌데, 리스트를 올린 것은 여러분의 검색하실때 수고를 덜어드리려고 올렸슴돠! 이미지 안보이는 두어권의 책은 제외시켰네요. 번역 안 된 책도 많겠죠! 대단하지만 부럽지는 않습니다^^ 부러우면 지는거니깐 이라믄서...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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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게우스 2018-08-16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이 질을 낳는다... 지식의 질은 어떤 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카알벨루치님, 글 잘 읽었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08-16 22:57   좋아요 1 | URL
좋은 질문인듯합니다. 양은 축적된 지식량, 폭넓은 저장고에 지식이 가득차는 넓이, 길이라고 할 수 있겠고, 질은 높이와 깊이라고 칭해볼까요!? 지식량이 증대하면 질이 낳는다는 측면을

첫째는 깊이의 측면에서 본다면, 지식의 깊이가 더해지면 사물과 사건과 사람과 더 나아가 우주적 차원에서 이해의 깊이가 더해진다고 할 수 있겠네요. 지식과 지식이 연결되면서 삶의 이해에 대한 측면이 두꺼워진다고 볼 수 있겠죠. 둘째 높이의 측면에서 본다면, 지식의 깊이는 삶의 이해의 차원이라면, 높이는 삶의 변화의 측면에서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지식의 깊이가 삶의 변화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오늘 제가 애들에게 아인슈타인 위인전을 읽어줬어요 아인슈타인은 독일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굉장히 차별을 받았지만 수학을 잘해서 고등학교 한 해 더 굽는다는 조건으로 취리히 대학에 입학할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물리학의 대가가 되고 나중에 다시 독일로 가게되지만 그의 아내는 자녀교육때문에 동행하지 않습니다. 그의 지성과 능력은 점점 인정받게 되지만 그 때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고 있었죠.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미국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이 두려워 도미하게 됩니다.하지만 결국 미국은 끝내 항복하지 않는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아닌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에 기여한 결과를 낳습니다. 그는 평생 무고한 생명의 희생에 대한 죄책감이 떠나지 않았죠. 그리고서 그는 공식적인 무대를 떠나 은둔하며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소박한 삶을 삽니다. 그가 죽을 때 유언을 남기길 자신의 뇌를 해부하여 세계과학의 발전에 사용해달라고 합니다. 그의 사후 그의 뇌를 끄집어내보니 다른이의 뇌보다 과학적인 능력이 15%더 넓게 형성되어 있다고 하네요. 아인슈타인이 원폭이후에는 핵무기를 없애자며 이제 핵무기가 전쟁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의 도구가 되길 바랬죠.

길게 적었는데, 아인슈타인의 지식의 깊이는 그의 삶의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지식의 질은 지식을 더 깊에 파고들수있게 하면서 삶을 변화시킨다고 할까요? 삶의 진정한 목적과 인류평화를 위한 진정한 첩경을 모색했던 아인슈타인의 삶의 변화, 삶의 행로로 설명해보았습니다.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다들 동의하실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지식은 결국 인간은 자고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어설프게나마 답변해 봅니다^^

베텔게우스 2018-08-16 23:19   좋아요 1 | URL
저도 대체로 동의합니다^^ 앞으로도 쭉 가져갈 고민일 것 같아요. 카알벨루치님, 답변 감사합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내가 누구인지 말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Prologue...

 

욕망하는 자아 

 

대학시절 때 참으로 내가 좋아했던 소설가가 있었다. 그 소설가는 이인화였다. 이인화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영원한 제국이 나오기 전에 이인화가 처음으로 평론이 아닌 소설로 발표한 작품이었다. 그 책 첫 부분에는 William Shakespeare‘King Lear'14장에서 나오는 대사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 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느냐

 

 

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라는 소설을 2번 정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그를 많이 좋아했던 것이다. 그 작품 속에서 작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희미하게 그 해답을 욕망하는 자아로 표현하고 있다.

 

욕망하는 자아...’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 중에 이 화두에 정확한 대답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면서 삶을 영위하리라. 나는 여기서 이인화가 이야기했던 욕망하는 자아의 안경glasses(New paradigm)을 의도적으로 착용하고서 이 작품 ‘A Streetcar named Desire'를 살펴보고자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작품은 블랑쉬의 삶의 한 단면을 담고 있다. 하나뿐인 혈육인 동생 스텔라에게서 잠시 안식을 취하기 위해-그것이 잠시인지 영원인지 알 수 없지만-뉴올리언즈로 오는 광경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블랑쉬
: 사람들이 제게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서, 묘지란 이름의 전차로 갈아 탄 다음 여섯 블록을 가서 내리면 이상향이라던데.

유니스: 여기가 바로 그곳이예요.

블랑쉬: 이상향이란 말인가요?

유니스: 바로 이곳이 이상향이예요. '

 

블랑쉬는 사람들의 말에 따라 이상향이라는 지명으로 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블랑쉬의 의식적, 무의식적 삶의 행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블랑쉬에게 있어서 죽음의 반대는 욕망”-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블랑쉬의 발언이다-이었다. 블랑쉬는 동생이 살고 있는 이 작은 아파트로 오기 전에 한 번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 결혼은 잘못된 결혼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였던 사람 엘런이 다름아닌 성도착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결혼은 곧 엘런의 권총자살로 막이 내리고 만다. 엘런은 블랑쉬와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결국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소년 소녀가 결혼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 엘런과 블랑쉬, 엘런이 성도착자라는 불명예는 두 사람 상호간에 결코 견딜 수 없는 하나의 딜레마dilemma였다.

 

참고로 블랑쉬라는 이름의 의미는 ‘white'이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일종의 순수성innocence'을 나타낸다고 본다. 이런 innocent한 블랑쉬에게 남편이 성도착자라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블랑쉬의 순수성은 남편의 성도착증과 그에 따른 자살로 말미암아 충격과 상처를 입게 된다. 자신의 남편 앨런은 삶을 욕망하기 보다 삶을 포기하는 죽음 즉 묘지를 선택했다. 그러나, 블랑쉬는 묘지가 아닌 욕망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녀의 삶을 보더라도 이해하기가 좀 힘든 구색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상처받은 순수성의 비극적 면모라고 묘사할 수도 있으리라. 앨런이 죽은 후, 그녀는 어쩌면 요즈음 10대들이 여관에서 생활하면서 매춘을 하는 것처럼 여러 낯선 남자들과의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울려고 했다.


'그래요
, 낯선 사람들하고 많은 관계를 가졌어요. 엘란이 죽은 후-낯선 사람들과의 관계만이 나의 빈 가슴을 채워 줄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어요. 내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 다니면서 어떤 보호를 받으려고 했던 것은 두려움,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어요-여기 저기를 전전하다가 마침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곳, 바로 열 일곱 살짜리에게도...'

 

 

카톨릭에선 성수(Holy Water)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 만약 파리가 빠졌다고 가정을 하자. 그러면 여기에 빠진 파리가 거룩해지는가? 아니면 성수가 더러워지는가? 그것은 당연하게 성수가 더러워질 수밖에 없다. 블랑쉬의 순수성은 이렇게 세상과 맞물리면서 성적인 관계를 통해, 이를테면 욕망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존재를 타락시키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그녀의 욕망은 그녀를 더 외롭고 불안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서 그 로우렐이란 도시에서 쫓겨나게 된다.

 

돈도 없고, 젊음도 이제는 시들어져가는 블랑쉬는 하나뿐인 혈육인 스텔라에게 의지하게 되지만, 스텔라 역시 스탠리의 욕망에 기묘하게 얽힌 여자일 뿐이었다. 스탠리는 남근적 욕망의 symbol인 셈이다. 그는 스텔라가 출산을 위해 집을 잠시 비운 사이에 블랑쉬를 강간하고 마는 동물적인 욕망의 남성이다. 욕망하는 자아들이 들끓는 사회 속에서 치이고 치이다 결국은 그 사회 속에서 또 다시 방출되고 마는 블랑쉬의 초상화는 작품 초반에 볼 수 있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서, 묘지란 이름의 전차를 갈아 탈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의 여신의 모습이다.

 

Tennessee Williams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욕망이란 것은, 우리의 삶 전체에 나타나는 그 모든 욕망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성()이라는 아주 개체적인 욕망에만 몰두하고 있음을 밝힌다. 또한 그 욕망의 끝이 묘지임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듯 하다.

    

 Epilogue...

 

나는 누구인가

 

이 작품에선 제각기 욕망하는 자아들의 움틀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한 나의 견해는 욕망하는 자아만큼은 그 해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욕망 즉 Sex를 통해서 얽히고 설킨 블랑쉬의 기묘한 인생의 비극만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분명 성급한 견해임을 전제로 하면서 말이다.

우리의 생에 있어 건전한 욕망은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의 뿌리를 내리고 삶의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하지만 그 욕망이 전차’(Streetcar)-‘전차는 누구나가 다 탈 수 있는 차이다. 그러나 욕망sex는 그럴만한 속성이 아니라고 밝히고 싶다-를 타게 되었을 때 한 사람의 인생에서 더 나아가 사회를 무너지게 한다는 것임을 은근히 밝히고 싶다.

 

 

우리 사회는 블랑쉬가 가진 innocencedesire의 두 얼굴을 다 가지고 있다고 본다. 지금의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와 시대상은 desire가 아주 강조되는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이 사회와 세계가 아직도 건재한 한 것은 desire가 아닌 innocence가 여전히(yet)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약성경 야고보서 1장 15절엔 이런 구절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담....야고보서 1장 15절을 보니, 윤태호의 <이끼>가 생각이 납니다. 욕망에 미쳐간 이장과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 류해국!

 

 

 

 

미미 여사의 <화차>는 욕망에 관한 현대인의 증후를 다룬 스토리이다.

 

"돈도 없지. 학력도 없지. 딱히 이렇다 하게 내세울 능력도 없어요. 얼굴 하나로 먹고 살만큼 예쁜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삼류 이하 회사에서 묵묵히 사무나 봐야 하죠. 그런 인간의 마음 속으로 텔레비전이나 소설이나 잡지에서 보고 듣는 풍요로운 생활을 그려보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나마 꿈을 꾸는 선에서 끝났어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꿈을 이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포기하긴 억울하다. 그러니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라도 느껴보자....쇼코의 경우는 어쩌다 그게 쇼핑이나 여행처럼 돈을 쓰는 방향으로 나갔을 뿐이예요. 그런 상황에서, 분별없이 쉽게 돈을 빌려주는 신용카드나 신용대출이 나타난 것 뿐이죠."(343-344.p)

 

"...그러니깐, 자기 돈 없이 '빚'이라는 형태로 군자금을 만드는 사람은 쇼코처럼 되는거예요."(345.p)

블랑쉬: 사람들이 제게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서, 묘지란 이름의 전차로 갈아 탄 다음 여섯 블록을 가서 내리면 이상향이라던데.
유니스: 여기가 바로 그곳이예요.
블랑쉬: 이상향이란 말인가요?
유니스: 바로 이곳이 이상향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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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8-15 1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 대학로 소극장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와 또 다른 연극만의 매력을 느꼈던 작품이었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08-15 19:38   좋아요 2 | URL
연극은 또다른 느낌일텐데 외국배우와 한국배우의 차이도 있을것이고 ~좋으셨겠어요 ㅎ

북프리쿠키 2018-08-15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책과 히로시마내사랑 2권을 들고 견주다가 히로시마를 선택했네요 ㅎ 꼭 읽고 싶어지는 글입니다ㅎ 저~어기 저 등짝 포스터도 한몫하네요^^

카알벨루치 2018-08-15 23:22   좋아요 0 | URL
ㅎㅎ 고전은 다 읽을가치가 있으니 천천히 읽으세요~자본주의의 섹슈얼리티는 상품성이 다분하죠~
 

 

<매일 하루 한 리뷰>를 지키지 못했다! 어제 리뷰를 적다가 내용의 부피가 너무 커져 버렸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제야 올린다.

하루 한 책 한 리뷰이걸 실천하는 독서가가 있다. 일본의 마쓰오카 세이꼬이다. 그는 <독서의 >이란 책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는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리뷰를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한다. 자기나름대로의 원칙을 만들어 5년 동안 장대한 북 내비게이션 프로젝트<센야센사쓰>를 진행하고 있다. 절대 똑같은 저자가 아니어야 하고, 똑같은 분야의 책은 안 되는 것으로 원칙을 정하고 매일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나는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하루를 빼먹은 셈이다. 그래도 그렇게 노력하고 싶다.

마쓰오카 세이꼬는 편집공학으로 유명한다. ‘편집독서이다. 김정운 교수가 <에디톨로지>에서 강조하는 말,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오직 편집이 창조이다라는 말은 마쓰오카 세이꼬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작년 11월부터 본격적인 독서의 가도에 올랐는데, 처음에 독서법에 대한 책을 몇 권 섭렵한 것이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 <독서의 > 이 책은 경이적인데, 책 내용이 인터뷰 형식으로 되어 있어 조금 아쉽다는 것이다.

 

오늘의 리뷰는 기독교신앙서적 가운데 하나를 택했다. <시대묵상>이란 책이다. 저자는 지금 신학대학원(조직신학 전공) 교수이다.

    

 

 

한 사람 人

저자가 미국으로 유학하여 LA에 살았을 때 일화이다. 집에서 돌 던질만한 거리(?)-이 표현 영어문장에서 나오는, 진짜 반가운 문구!-에 디즈니랜드가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학교와 교회와 집만 왔다갔다 출입한 꽉 막힌(?) 경건한 학생이었다.

그의 용모 또한 독일 전차 군병을 방불케하는 용모이다. 각진 마스크에 이국적인 생김새... 저자의 전공이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인데, 외모 또한 조직적이다’, ‘목사가 아니라 검사 같다고 주변인들이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런 용모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스타일이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가 표현처럼 저자는불 붙는 논리로 강의한다. 그러기에, 저자의 강의는 항상 설레었고 수업을 들으면서 모두가 가슴이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그가 세속(속세)에 물들지 않고 한 길만을 추구하며 달려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한 심장 心

보통 교수사역을 시작하면 오랫동안 연구와 공부로 인해 불안정했던 삶이 안정세로 접어드는 셈이다. 그러면 교수사역만 해도 벅찰 것인데, 저자는 교수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교회를 개척했다. 서울에 아주 작은 교회를 개척했다. 저자의 위치와 배경이라면, 명성있고 인기있는 큰 교회의 목사로서 사역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교수사역을 하면서 코끼리도 싫어하는교회개척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많은 숫자의 성도가 모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강의가 불 붙는 논리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옆에 책과 이론과 신학과 학문만이 즐비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영혼과 현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가! 그는 그걸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이렇게 말하면 교수사역만 전념하시는 분들을 평가절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길 바란다. 절대 그런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소위 성공적으로 목회를 해서 이름깨나 알려진 젊은 목사들에게 선지자적 메시지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다....젊어서부터 잘나가는(?) 교회만 경험했기에 실패 혹은 무명의 밑바닥에서 병든 교회와 이 시대의 아픔을 통관하는 혜안을 터득하는 영적 숙성의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시대를 깨우는 광야의 소리는, 시류에 영합하는 영특함과 잔꾀가 없어 시대가 알아주는 목회를 하지 못하고 낙오했다는 멸시를 받고 오랜 고독 속에서 하나님께 빚어진 사람에게서 흘러나온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이렇게 준비된 사람을 일시에 풀어놓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유명한 목사들에게 기대할 것이 별로 없다. 다만, 풀뿌리처럼 묻혀 있는 이름 없는 자들이 생각 외로 많다는 사실이 한국 교회의 희망이다.‘(시대를 깨우는 광야의 소리,102p)

 

‘...목사 돼서 성공하는 것보다 망해야 제대로 목사의 길을 가는 것일 거다.’(갑질하는 목사,163p).

저자에게는 한 사람을 향한 뜨거운 심장이 있어 교수사역을 하면서 개척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더 존경을 받는지도 모른다.

    

 

 

한 책

Facebook에서 올려진 칼럼형식의 글들을 모아 출간한 책이다. 읽으면서 마음이 얼마나 저미었는지 모른다. 학생들에게 농담도, 대화도 잘 건네시지 않는 분이 교수사역을 하면서 개척까지 하시다니. 그 분의 내면은 겉으로 보이는 독일장교가 아니셨다. 이 책()은 그 분의 영혼의 숨결’(영혼의 폐부)을 들여다볼 수 있다.

 

꽃은 시드니까 아름다운 거예요....이 땅에서 피지 못한 인생들이여, 너무 상심하지 마시라. 어차피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이 시든다. 이 땅에서 덧없는 아름다움과 영광의 꽃을 피우려고 안달하다가 영원한 세계에서 영구히 시들어 버릴 수 있다....이렇게 보면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만 가는 우리 인생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영원한 만개를 기대하며 잘 시들어 가자.’(시들어 감의 미학,66-67p).

 

오늘날의 모든 문화는 감각적이고 미학적이고 유혹적이다. 젊음을 선호하고 탱탱한 피부와 근육질의 몸 문화에 미쳐있다. 그건 사실이다. 나도 자주 미쳐가는 걸 보면.‘문화가 현대를 지배하고 있다. 거기에 우리는 목맨다. 건강과 웰빙과 고령화사회를 대비하기 위한 젊음을 나름대로 준비한다. 돈도 준비한다. 누군가 그런 이야길 한다. 예전에는 나이든 노인에게 당신은 암입니다라고 하면 충격을 받았다. 당연하다. 그런데, 요즈음은 당신은 암이 아닙니다라고 하면 더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 더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현대인들에겐 있는 것이다. 더 살아야 한다면 더 일해야 하고, 은퇴 이후에도 현실의 생계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현대인의 무거움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이야기가 잠깐 비껴갔는데, 노인이 되어 간다는 것은 굉장히 무력하고 슬픈 대목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인생의 노선이다. 거기에 너무 큰 무게중심을 두면 생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영원한 만개를 기대하며 잘 시들어 가자!’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싶다.

 

요즘 곱게 늙어 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다. 나이 들어 추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젊은이들의 귀감이 될 만한 어른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이 나라의 비극이다. 주님의 은혜로 잘 익은 노인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죄로 삭고 썩어 악취를 풍기는 꼰대들이 되어 가니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하나님도 그런 늙은이는 어쩔 수 없어 내버려 두신다. 나이 들어 얼굴은 쭈글쭈글해지고 추해져도 우리 속사람은 더 아름답고 청아해져야 할 텐데....젊어서부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지 않으면 별 수 없이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던 늙은이 꼴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잘 익는 은혜,180-181p).

 

‘100세 시대가 도래한다는데 어떻게 노후를 의미 있게 보낼지 우리 사회가 깊이 고민할 때가 된 것 같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빨리 죽고 싶다고 하는 말은 공인된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오래 살고 싶지 않다. 겨우 환갑이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피곤하다. 솔직히 요지경인 세상에 별로 미련이 없다.

오늘, 우리의 몸뚱이는 이 땅에 있지만 영적으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된 사람들이라는 설교를 해서 그런가. 오늘따라 그곳이 조금은 그립다.‘(체면이 밥 먹여 주냐, 101-102p).

 

이 책은 <잘 시들어가는 한 목사의 에세이집>이다.

 

 

 

한 국민 民

몇 년 전, 자신을 예언자 운운하던 한 미치광이가 한국에 12월에 전쟁이 난다며 하나님의 계시라고 헛소리를 해 댄 적이 있다. 그러면서

전쟁이 날 것이니 한국을 떠나 피신하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그런 때일수록 조국에 남아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고통받으며, 이 나라에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주님께 간절히 구할 것이다. 주님의 교회와 사랑하는 조국을 버리고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만일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면 나는 외국에 있다가도 한국에 들어올 것이다.’(정말 전쟁이 난다면?,112p).

전쟁이 터지면 우리나라 사람들 중 권력과 돈이 있는 이들은 외국행을 택할 것이 분명하다. 과거의 이승만 대통령처럼 그런 망국적 자세를 취할 사람이 이 나라는 많을 것으로 확신한다. 어쩌면 지난 세월 일제가 심어준 식민주의적 사관의 교육 탓도 있으리라. 나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나도 그 교육을 받은 세대인데, 나 또한 그런 자리에 있으면 그런 짓을 하진 않을까 두렵고 떨린다. 그런데, 저자는 전쟁 터지면 외국에 있다가도 한국에 들어와야 하지 않느냐 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저자는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오래했기에 미국시민권자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교수사역을 위해 한국에 들어오면서 시민권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 시민권을 따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매는가! 아니 시민권이 아니라 영주권이라도 따려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몸부림치는지 모른다.

인생은 제대로 살아야 하고 그리고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 잘 죽어야 한다. 정말 잘 죽어야 후세들이 욕을 먹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시선 觀

세월호 청문회 중계하지 않는 KBS, MBC, SBS, 느그가 언론이냐?”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을 보았다. 다른 청문회는 앞다투어 취재하면서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세월호 청문회는 방송3사가 약속이라도 한 듯 중계를 하지 않았다.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알아서 기는 것인가. 서슬이 시퍼런 독재 군사정권 아래서도 굽히지 않았던 저널리즘의 정신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인가. 암울한 시대에도 기개가 살아 있는 언론은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정신이 죽은 언론은 시대의 어두움과 절망을 심화시킬 뿐이다.

시대를 바라보는 혜안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눈먼 사람들과, 이런 참극을 부추긴 언론은 혹독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후손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언론의 배신, 186-187p).

 

이민생활을 15년 정도 하시고 오셨다는데, 역시 객관적이고 분별력 있는 시선을 소유하셨다. ‘나는 정치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정부가 기본적인 역할만 해 주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그런데 작금의 정치 현실은 나같은 사람도 정치에 신경을 끄고 살기 힘들게 만든다.’(국가화합의 길,200p).

나는 여당 편도 야당 편도 아니다. 나는 이 세상 정권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정부가 최소한의 기능만 해 주면 나까지 이렇게 떠들 필요가 없다....이 정권에 분개하는 이들 중에 나 같은 이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들이 모조리 종북 좌빨인가? 나는 한국에 나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선택하였다. 나는 미국보다 조국에 대한 애정이 더 깊다. 나 같은 이도 좌파로 몰아가는 나라인데도 말이다.’(좌파 딱지,250p).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애간장을 끓이며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는데도 세월호 인양하는 데 1,073일이나 걸렸다. 시리고 아픈 이 시대를 역사는 어떻게 기억할까? 세월호 참사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며 악하고 비정한 세대 또한 민족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세월호 인양,273p).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사고하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 생각 思

청빈을 스스로 공개하는 순간 청빈의 숭고한 가치는 사라진다. 물질을 버림으로써 명예를 얻는 것은 가치 있지만, 물질이라는 저급한 탐욕을 버린 대가로 명성이라는 고급적 탐욕에 사로잡힌 격이 될 수 있다. 영특한 이들이 이런 짓을 잘한다. 아무리 자기 PR시대라고 하지만 주의 종들은 자신의 선함과 잘남에 대해서는 나팔 불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이 주님의 인정과 상을 잃지 않는 비결이다’(목사사례공개, 196,p).

 

예수님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짓을 잘 했다. 도덕적인 헌신과 내려놓음을 자랑질하는 것...종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이런 욕망을 퍼져 있다. 도토리 키재기이다. 정말 군자다운, 정말예수님처럼투명한 청빈이 필요하다.

가수는 노래가 한번 히트하면 평생 그 노래를 재탕하며 돈을 버는데 목사는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해도 같은 교회에서 다시 써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설교 사역은 굉장히 소모적인 일이 된다......그러나, 하나님 나라 사역의 핵심 가치는 효율성이 아니다. 특별히 작은 교회를 섬기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주의 종은 하나님의 소모품이라는 말이 있다...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통해, 자격 없는 자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말씀을 무한히 탕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증명된다. 하나님은 효율성이 아니라 주님이 맡기신 일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우직하게 충성하는가에 따라 목회의 성공 여부를 가리신다.’(불후의 명곡과 소모되는 설교,106p).

 

 

 

한 선생 師

나는 오래 걷는 것을 싫어한다. 특별히 다른 운동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호흡운동만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 내가 오늘은 족히 만 보는 걸은 듯하다. 그것도 강의실에서 말이다. 학생들이 성령론-구원론 기말시험을 치르는 1시간 반 동안 강의실 안에서 계속 걸었다.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강의실에서 다섯 개나 되는 통로 사이를 계속 오가며 제법 다리 운동이 된다.

걷기를 그토록 싫어하는 내가 많이 걸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학생들이 시험 치느라 고생하는데 나 혼자만 물끄러미 앉아 있기보다는, 그들과 함께한다는 의미로 그들 곁을 돌아다닌 것이다. 질문도 받아 주고 여분의 답안지도 갖다 주었다. 가까이서 한 사람씩 지켜보며 그들의 얼굴을 익히고 속으로라도 축복하며 귀한 사역자들이 되기를 기도했다. 모두가 귀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평소 강의 시간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아주 괜찮은 선생인 척 자랑질 한 꼴이 되었는데, 사실 무료한 시간 죽이기를 걷기 운동으로 승화시켰을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자신들 주위를 뺑글뺑글 도는 나를 의아하게 생각했을 학생들의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해서다.‘(만 보 걷기,182-183p).

 

우리 시대는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선생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이 부여되는 자리이다. 한국사회의 현실은 공무원과 교사가 최고의 취업의 자리로 등극했다. 취업을 위해 목맬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 나랏일을 하는 공무원이나 다음세대의 주자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정말 자질이 충분한 자들이 등용되었음 좋겠다는 바램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사무적인 역할 감당과 자발적인 책임의식과 헌신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참된 선생이 많아졌음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 웃음 喜

치과에 가서 잔뜩 폼을 잡고 대기석 쇼파에 앉았다. 그런데 내가 신은 신발의 짝이 다른 것 아닌가. 현관에 놓인 두 켤레 구두를 섞어 신고 나온 것이다. 난생 처음 있는 일이다. 내 신조가 폼생폼사인데 맛이 갔나 보다. 조직신학을 전공해서인지 모든 것이 칼같이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머리털 한 올도 흘러내리면 못 견디는데 오늘 완전 스타일 구겼다. 내 구두를 보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 시대를 앞서가는 패션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을까? 아내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셔텨를 눌러 댄다.’(202-203p).

 

원래 이런 분이 아니신데, 너무 우스워서 혼이 났다. 칼 같은, 검사타입의 저자가 이런 면을 보여주시다니! 그리고 그걸 글로 많은 이들에게 오픈할 수 있다니. 체면과 권위를 중시한다면 절대 공개할 수 없는 사안인데, 너무 소탈하셔서 마음이 더 훈훈해진다.

    

 

 

() 교회 會

우리 목사들이 그보다 더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교회개혁이다. 새 창조의 은혜로 세상을 새롭게 하라고 보냄받은 목사와 교인들이 제 역할을 못하면, 무능한 정부가 세상을 부패시킨 것 보다 더 심하게 세상을 부패시킨다. 그리스도인이 청산해야 할 적폐의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우리 스스로 개혁과 회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이제는 교회가 바뀔 차례다’(새 대통령에게 바란다, 290p).

 

그렇다. 사람들은 저마다 개혁대상을 밖으로 칼을 겨누어 시위한다. 하지만, 정작 개혁해야 할 대상은 내 마음이고 내 자신이다. 그건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기독교가 그게 안 되니깐 온갖 비난을 몸소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이야길 한다. 바틀비는 탈진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탈진은 피로의 또 다른 면모이고, 현대는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난시대이고, 그것은 곧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72p)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의 현재가 바로 피로사회가 아닌가 싶다. 산업혁명 이후로 달려온 기계문명의 메카니즘, 그것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지독한 성장지상주의의 아우토반을 달리다가 과부하가 온 것이 아닐까! 부모가 자기 자식을 챙기지 않고 돈벌이에 목을 매고 자기 자녀들 보다 다른 이웃 자식들을 챙긴다면, 자녀들이 발끈하지 않을까! 우리 국가가 그런 자화상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한민국, 우리의 조국도, 우리의 교회도 피로사회, ‘피로로 찌들어수많은 사회적 질병을 양산하고, ‘쓸모없는 것의 쓸모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라고 한병철을 자신의 장chapter를 마감했는데, ‘아 대한민국이여! 아 한국교회여!’ 라고 절규하고 싶다!

 

한 소망 望

그래도, 저자를 우리에게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본의 아니게 리뷰가 길어졌지만, 다시 책을 읽으면서 다시 저자의 심장박동소리를 듣는 듯 해 너무 좋았고 감사했다! 한국교회가 바닥을 치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분이 건재하시기에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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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8-14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늘 대형 교회에서만 신앙 생활을 했던 사람으로서
그런 교회만 다니느라 개척 교회나 소형 교회 또는
목회자들의 어려움을 너무 모르고 내 만족에 의해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반성을 해 봅니다.
<시대 묵상>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그런데 하루 한 리뷰를 실천하고 계시군요.
그거 쉽지 않은데...
저는 편집 독서를 못하겠더라구요.
별 재미를 못 본 책이야 그게 가능하지만
좋은 책은 끝까지 읽고 싶고 책 읽는 속도도 느린 편이죠.
그래서 늘 안타깝습니다.
읽는 건 한정되있고, 영화와 드라마도 봐야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ㅋ

카알벨루치 2018-08-14 11:55   좋아요 1 | URL
전 요즘 영화를 못 보겠더라구요 더워서 겨우 독서 쬐금 하고 있어요 한번에 좌악 읽는게 좋은데 찔끔찔끔 읽다보니 잊혀지는게 많죠 그래도 초병렬법 독서도 좋은듯합니다
저도 어릴땐 시골교회에 다녔는데 커가면서 큰 교회만 다녔으니 작은교회의 현실은 최근에서야 느끼고 있네요 그냥 편하게 한번 읽어보시면 각성도 되고 도전도 되고 좋을 듯합니다!

cyrus 2018-08-14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쓰오카 세이고의 책을 읽으면서 본격적으로 리뷰를 써야겠다고 결심했어요. ^^

카알벨루치 2018-08-14 11:58   좋아요 1 | URL
축하해요 먼저! 사이러스님 땜에 톨스토이 지를려고 준비중입니다 그냥 지를수도 있지만 의미있는 지름을 준비하고 있어요 ㅋ리뷰쓰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책읽으면서 더없이 느끼고 있죠 사이러스님 리뷰 어제 스텔라님 땜에 또 읽었네요! 아 <전쟁과 평화>는 꼭 문학동네판으로 지르고 싶네요 디자인이 넘 맘에 드네요 사이스러님 남자??? 아.... 내 눈썰미가 왜 이렇죠 ㅜㅜ

cyrus 2018-08-14 16:00   좋아요 1 | URL
익명의 사람이 쓴 글만 보고, 그 사람의 성별과 성격을 파악하는 건 쉽지 않아요. 저 같은 경우는 사생활을 공개하는 글을 쓰지 않는 편이라서 성별을 판별하기 어려울 거예요. ^^;;

카알벨루치 2018-08-14 16:31   좋아요 0 | URL
혹시 간첩? 암호명 매스커레이드 ㅎㅎ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탈자 2020-01-21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히 딴지 한번 걸어 봅시다.

‘하루 한 책 한 리뷰’이걸 실천하는 독서가가 있다. 일본의 마쓰오카 세이꼬이다. 그는 <독서의 神>이란 책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는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리뷰를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한다.
이런 리뷰가 무슨 가치가 있을지 또 리뷰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요.
책이란 한 사람의 경험 내지 앎을 기나긴 시간을 사고 하면서 정리 한 글입니다.
이를 읽는 것도 그렇거니와 작가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버무림 없이 하루만에 리뷰 한다는 것은 자만이요 그것을 보는 사람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물론 별 내용 없는 책은 가능 하겠지만 그러하지 않은 책을 무슨 수로......
이런 사람들에 현혹됨이 아쉬워서 딴지 한번 걸어보니 너무 불쾌하여 맘 상하는 일 없기를 바랍니다.
 



https://karl21.tistory.com/


에 가시면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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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ivation Of Claudius' guilt  
  윌리암 세잌스피어의 <Hamlet>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소설이다.

한 왕실에 얽힌 음모와 그로 인한 후유증을 비극으로 그려낸 4대 비극 중의 하나이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Hamlet"에도 창조적인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여러 인물들 중에, 특히 나에게는 음모의 주동자였던, 그리하여 그 음모의 댓가로-By Costs-권력의 보좌를 차지하게 되었던 클로디어스를 주목하게 되었고, 그 클로디어스의 guilt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클로디어스의 죄책은 햄릿이 고안한 연극 공연으로 말미암아 자극되어져 그의 guilt는 정점(頂點)에 치닺게 된다. 그 peak에서 클로디어스는 참회 아닌 참회-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클로디어스가 '참회기도'를 하긴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참회라 할 수 없는 것이 그는 이 참회 이후에 자신의 잘못과 살인과 범죄를 은닉하는데 더 혈안이 되어 조카인 햄릿(클로디어스의 guilt의 폭로자, 선동자)을 광증(狂症)이라는 빌미로 영국으로 보낼려는, 더 나아가 죽일려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가 나타나는데, 개인적으로 내가 받은 인상은 자기의 형을 독살한 클로디어스라는 인물에게서

어떻게 이러한 guilt가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파렴치한 인간에게서 그러한 심각한 guilt가 나올 수 있냐 이 말이다. 그 의문점이 나를 클로디어스라는 인물에게로 이끈 Motivation이라고 할 수 있겠다.

 

 

 

 

guilt Of Claudius
  클로디어스는 자기 형인 선왕(先王)을 독약으로 죽이고서

 

그 덴마크의 왕좌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햄릿의 어머니이자 왕비인 거트루드와 재혼을 한다.

자기의 계략대로 모든 것들이 자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 모든 음모를 빤히 들여다보듯이

그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연극 공연을 관람하면서부터 그의 잠재된 guilt는 시작된다. 물론 이 연극의 내용은 햄릿의 계획에 의해 설정되어진 것이다.

 

클로디어스의 guilt는 아주 단말마적이다.

 제3막 제3장에만 드러나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클로디어스의 행동에 이렇다할 guilt의 흔적이 없다(그 이후에도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3막 제3장에서 봇물 터지듯이 그러나 아직 짧고 굵게 나타나는 guilt에 대해서 나는 조금은 어색한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클로디어스가 그런 guilt를 느끼는 인간이라면서 어떻게 자기 친형을 죽이고 더 나아가 형수를 가로챌 수 있단 말인가? 그 엄청난 살인과 간통의 참상을 저질렀던 장본인이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는 데서 조금은 어불성설한 느낌을 주는 작자의 '인물의 통합성(Unity of character)의 defect'를 지적하고 싶다. 허나 가만히 좀 더 들여다보면 왕비인 거트루드-거트루드의 성격창조는 많이 거슬리는 부분이 없지 않다-의 맘에 조금이라도 동(動)하게 한 인물이라면 이러한 guilt를 느끼는 것이 조금은 수용되어진다. 

 클로디어스의 guilt의 고백은 다음과 같이 비통하고 절실하다.

심각성을 스스로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 이 죄악, 악취가 하늘까지 찌르는구나.

인류 최초의 저주를 받으렷다. 형제로 죽인 죄로-기도도 드릴 수 없구나, 심정만은 간절한데...설사 이 저주받은 손목이 형의 피로 두꺼워졌다 할지라도, 하늘에는 이 손을 백설처럼 희게 씻어줄 단비는 없을까?

...그렇다면 나도 희망의 눈을 들어 우러러보겠다. 내 죄과는 이미 지나간 일, 하지만 어떠한 기도를 드려야 내 경우에 알맞을까? 그저 빌며 '비열한 살인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할까? 안될 말이지. 게다가 난 살인죄에서 얻은 소득을 보유하고 있쟎은가, 왕관과 야심과 왕비를, 죄의 결과를 얻은 소득을 보유하고서도 죄의 용서를 받을 수가 있을까?...하느님 앞에서는 피할 도리가 없고, 죄상은 그 본체를 드러내고, 그리고 죄상에 대해 일일이 증거를 실토할 수밖에 없으니까...아, 덫에 걸린 새 같은 이 영혼, 몸부림을 칠수록 더 죄어들기만 하는구나.

나를 도와주소서...만사 다 잘되게 해주옵소서(무릎을 꿇는다)."

 

 

 

  클로디어스의 기도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認識)-밑줄 친 부분-, 죄의 결과로 얻은 소득에 대한 자각과 죄책(罪責)-기울여진 부분-을 충분히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limit Of his guilt
 그러나 그의 회개의 한계는 여기에 있다.

"만사 다 잘되게 해 주옵소서"

   그의 기도에는 일종의 후회나 회개나 참회의 기미는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후회도 아니요, 회개도 아니요, 참회도 아니다. 그냥 넋두리에 불과하다. 자신이 벌인 죄악의 열매를 다 먹으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진정한 회개와 참회는 그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클로디어스의 guilt는 불완전하고도 온전치 못한 guilt이다. 이것은 인물창조의 일관성에도 조금은 위배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Epilogue...

   guilt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은전30에 팔았던 가룟 유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스승을 판 제자같지 않은 제자였다. 처음에는 그가 물질, 금전에 욕심을 부려 예수를 팔았지만 후에는 그것에 대한 강렬한 guilt를 느낀다. 그 guilt는 곧 목매달아 자살하는 지경에 이르른다. 그것은 가룟 유다의 guilt의 peak였다. 클로디어스의 guilt도 Judah처럼 자살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이야기하고픈 것은 최고의 악한에게도 일말의 양심(consciousness)은 있기에 그것은 죄의식 즉 guilty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넋두리처럼, 클로디어스의 guilt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기엔 일종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적(的)으로 이해하면 될까?

비록 그가 엄청난 참상을 저지른 흉악범이지만 그에게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는 언제나 지킬박사(善)적인 면모와 하이드(惡)적인 면모가 공존한다. Shakespeare는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과 안목을

 

자신의 인물창조에도 녹아나게 했다고 말하면 지나친 아부일까?

 

 

 

 

 

여담......

 

 

 

 

 

히가시노 게이고의 <기린의 날개>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고교 수영부의 유망주였던 2학년 요시나가 도모유키, 3학년들은 2학년이 잘 나가는 것에 질투와 시기가 가득했다. 수영부원들은 장난 비슷하게 도모유키를 괴롭히다가 수영장에서 질식사시킨다. 살해하고 만다. 고의성이 있어지만 죽이기까지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는 죽었다. 수학선생이자 수영교사인 이토가와는 이를 은폐한다. 학교의 명예와 자신의 미래와 모든 것을 고려해(?) 청소년들의 살해사건을 감춘다. 이를테면, 왕따 이후에 특별훈련이란 명목하에 훈련하다가 수영장에서 질식했다는 것이다. 선생이 죄를 덮고 수영부원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어찌 하지도 못한 채 죄책감 속에 살아가게끔 만든다.

 

"아이들을 위한 길이라고요? 거짓말 하는게 어떻게 아이들을 위한 길이란 말입니까?...3년전 당신은 세 아이에게 그렇게 가르쳤어. 그래서 스기노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거야."(기린의 날개,141.p)

 

스기노는 자신들의 그 옛날의 잘못된 범죄가 드러날까봐 죽은 학생, 요시나가 도모유키의 아버지 다케아키까지 살해하고야 만다. 진실이 은폐되면 은폐될 수록 진실을 더 감추기 위해 인간은 더 끔직한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르고야 만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한건가싶고, 한 사람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망쳐놓고 이렇게 태연하게 살고 있다니, 인간실격이죠."

(3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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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8-11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햄릿의 글은 대학때 쓴 글이라 부끄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