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 범우사루비아문고 149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 범우사 / 198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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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박일문의 소설 속에 언급되어진 소설...

'미문학사' 수업시간 중에 들었던 Fitzgerald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독서의 구미를 당기게끔 했고

그것은 내게 하나의 모티브의 자극이 되어 주었다.

한 작품과의 관계에서 친숙하기란 쉽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생애를 훑어보는 스캐닝은 실로 좋은 기폭제가 아닐 수 없다.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닉>이라는 1인칭 관찰자시점을 차용했기에

중간중간에 이야기를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다소의 미결점이 있지만 무척이나 흥미로운 픽션이었다.

개츠비의 삶과 사랑,

닉의 육촌동생이기도 한 데이지에 대한 첫 사랑을 잊지 못한 개츠비의 집요한 사랑...


결국 그 집요함은 개츠비의 삶을 앗아가고...

데이지와 그의 남편 톰은 완전히 물질주의에 깊이 관여된 속물로 판명되어 버렸다.

개츠비의 어리석을만치 순수하고 억척스러운 사랑을 보면서 나 자신이 많이 동감한 것은

나에게 그러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American Dream의 대표주자인 개츠비의 삶.

너무 낭만적이어서 현실은 많이 결여되어 있으나 개츠비는 아름답다.
너무나 순수함으로...
마치 태양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 눈이 멀어 버린 소년이 바로 개츠비이다.
무모함...그러나 Dream에는 그러한 무모함이 필수적인 것이 아닐까?
 

미국의 동. 서부의 상반된 가치관과 대전 후의 가치관의 변화 가운데

개츠비의 이야기는 해석하기에 참으로 멋쩍은 소설이다. 
 

개츠비의 그릇된 방법의 부의 축척과 지나친(?) 사랑으로 인한 상실.

데이지의 목소리를 '돈의 소리' 라 명명했던 개츠비의 이성적인 판단...

자본의 말로에 대한 하나의 비웃음...
낭만의 순수에 대한 하나의 격찬...

 

거기에 <위대한 개츠비>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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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는 곰브리치 세계사 2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이내금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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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 세계사 좋습니다. 백링크는 어쩔수 없이 제거했습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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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우리들의 선생님 - 존 스토트가 새에게서 배운 영적 진리
존 R. 스토트 지음, 이기반 옮김 / IVP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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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죤 스토트의 글의 매력을 힘껏 느꼈던 것 같다. 그가 평생 독신으로 80년 넘게 살아온 것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하고 존경하게끔 한다. 그의 독신을 가능케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조류신학’, 새에 대한 무지한 관심과 관찰이 끼여 있다. 그는 흰올빼미의 둥지를 발견하고서 그것을 관찰한 기쁨을 피력하면서 시므온의 찬송(Nunc Dimittis)를 인용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보았사오니”( 2:29-30) 그는 흰올빼미의 둥지를 찾기 위해 25년간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탁월한 신학자요 사상가요 설교가인 그가 시간이 날 때마다 조류신학에 심취하여 여행을 하고 관찰하고 기행하였던 것이다. 이 책은 죤 스토트의 이러한 삶을 조류에 관한 사진과 성경묵상으로 채우고 있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저술에서 성경적인 원리에 입각한 글을 늘 내뿜고 있다. 소년시절에 그는 자신의 침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겠다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고백한 기독교의 기본 진리의 경험을 떠올리면 참 그는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줄기차게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좀처럼 흩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학부2년 그러니깐 93년도에 연세대 매지리 캠퍼스에서 가진 전국IVF수련회에서 그의 강해를 들을 수 있었고 그의 연로한 모습 속에 감도는 영적인 힘과 파워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강해를 하기 위해 나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금식을 하면서 말씀을 준비하여 우리들에게 전해주었던 일화도 잊지 않고 있다. 학교 선배 형님이 직접 찍은 죤 스토트의 사진도 집에 한 장 가지고 있다. 위대한 우리시대의 신학자, 어느 출판사인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현대의 복음주의 5대 신학자로 마틴 로이드 죤스, 제임스 패커, 프란시스 쉐퍼, 한 사람이 누구더라?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그리고 죤 스토트를 들고 있다.


 조류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성질과 특징들을 기술하면서 성경적인 통찰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글이 참 감칠맛나게 사진과 잘 어우러져 있다. 특히, 새들의 귀소본능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귀소본능에 대한 이야길 잠깐만 하면,

 

여러분은 철새들의 귀소본능을 잘 알 것이다. 새들은 비상하리만치 규칙적이고 정확하게 이동해야 하는 때를 잘 안다. 봄이 되면 왔다가 가을이 되면 더 안전하고 따뜻한 지방, 먼 곳으로 이동하는 그 철새들 말이다. 맹크스슴새라는 새가 있다. 1952년에 유럽에 있는 웨일즈 지방 스코크홀름 섬에서 한 마리를 잡아 약 386km 떨어진 켐브리지 내에서 그 새를 풀어 주었다. 근데 그 새는 7시간 후에 자신의 고향인 스코크홀름 섬의 굴 속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 다른 경우는, 스코크홀름 섬에서 잡힌 맹크스슴새 한 마리가 대서양 건너 4,800km 이상 떨어진 보스턴의 로간 국제 공항에서 풀려난 적이 있다. 그러나, 12일 반나절이 지난 후에 이 새는 자기 굴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렇게 돌아오기 위해 하루에 약 400km를 난 셈이다.[1] 주님은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했다. 그들의 육적인 강한 귀소 본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1] 죤 스토트, , 우리들의 선생님, 이기반 역(서울: IVP, 2001), 21.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8:4-5).


이 글은  전에 내 글에도 발췌 인용하기도 했던 대목이기도 하다. 그가 직접 찍은 사진도 생생하게 나와 있어 읽기가 참 편하고 그의 짧고 명료한 단어들과 문체가 참으로 신선하게 그리고 오랜만에 다가온 서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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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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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현실과 기독교의 관계

-황석영의 ‘손님’을 읽고

세계지도의 아주 작은 여백을 메우고 있는 한반도는 아직도 냉전이라는 분단의 선분을 긋고 있다. 그 분단의 아픈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과거사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소설 ‘손님’의 스토리는 잔학한 미군과 기독청년들의 횡포사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소설 가운데서도 드러나지만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단지 남한과 북한, 두 이념 간의 대립. 갈등구도에서 남. 북한이 자의적으로 해결되었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제3자가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남. 북한의 상처는 더 확대된다. 사람과 사람의 갈등도 제3자가 괜스레, 불필요하게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구도 자체도 어색해지고 양대 구도가 삼각구도로 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분위기는 더 험악해질 수밖에 없다.

황석영의 ‘손님’은 이러한 우리나라의 정치적, 역사적 현장 위에다 기독교를 양념(?)화하여 자신의 논리를 소설화하고 있다. 역사적 불청객으로 둔갑한 기독교인들의 만행에 대해 어떻게 변명을 할 수 없겠으나 기독교의 부정적인 면만 극대화한 것에 대해 서운함이 없지 않다.

솔직히, 우리 민족의 분단을 조장한 것이 서양 즉 미국이긴 하지만 그 미국과 기독교를 equal(=)부호로 동일시한다는 것은 말도 아니 될 뿐더러 분단의 아픈 현실 가운데 기독교가 악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수의 기독교라는 명찰을 단 기독인들의 책임이고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버리고 우리 기독교의 역사적 책임에서 회피하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처사가 아닐 것이다.

소설 속의 기독인의 죄스런 처사가 비록 단편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민족이 가진 상처는 기독교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 한국교회에 친일파 전통이 배여 있다는 뼈아픈 역사현실 위에다 개인적으로 황석영의 소설을 통해서 나로서는-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 중의 한 사람으로서- 6. 25전쟁 이후의 후유증에 대해 기독교는 또 한 번 통감의 의무를 감당해야 할 것임을 생각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교회는 시대를 아우르고 시대를 포용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교회 즉 기독교는 이러한 역사적인 책임성을 걸머쥐고 민족이 가진 동존상잔의 비극, 그것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 모색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더 우리가 민족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의 종교가 기독교라는 것에 있다-물론 나는 종교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Martin Llyod Jones가 쓰는 표현인 ‘기독교는 관계이다’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민족을 향한 선지자적인 눈물을 훔치고, 흘렸던 믿음의 선조들처럼 기독인들은 이런 눈물로 주 앞에서 긍휼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작금의 세태 가운데 남북관계에 대해 기독인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자주 언급되고 있는 ‘흡수통일’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봐도 ‘통일비용’에 대한 남한 국민들의 고통분담금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 현실이기에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남북한의 합일(Unity)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섣부른 긍정이나 부정의 판단 이전에 한국 기독교는 남북한의 분단 현실에 대해서 계속적이고도 진지한 관심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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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2 - 한니발 전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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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도 진화한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진화한다고 믿어 왔다. 나는 진화론을 신봉하진 않지만 인간이 환경과 상황에 적응하면서 진화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로마인 이야기’의 두 번째 작품인 ‘한니발 전쟁’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는 국가가 진화하고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진화한다는 말인가?

로마는 공화정 정치를 추구하는 나라로서 ‘팍스 로마나’를 실현하는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최고의 해운국인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섬에 대한 침략의욕을 드러냈을 때 로마는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포에니전쟁은 카르타고의 이러한 야심으로 인해 발단이 된다. 하지만 로마는 여기서 계속 머물러 있지 않는다.

로마가 더욱 진화하고, 처음에는 ‘온건한 제국주의’에서, 후에는 ‘엄격한 제국주의’로 진화하게 된다. 그러면서 도시 국가인 로마에서 이제는 ‘로마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 책에선 포에니전쟁으로 시작된 ‘로마의 진화과정’의 130년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진화의 원인은 전쟁이었다

2권의 소재는 전쟁이다. 전쟁의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바로 2권의 제목처럼 챔피언(?) 한니발과 도전자 스키피오이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가 뛰어든 전쟁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이 개입하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두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매력들을 개인적으로 구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역겹거나 지겹지 않다. 오히려 흥미롭다. 한니발은 당대 최고의 전략가이자 전사였다고 볼 수 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의 리뷰에서 이야기했던 에피소드이다.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자마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키피오: 우리 시대의 최고의 군인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한니발: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스키피오: 첫째는 그렇고 그럼 두 번째는 누구인가?

한니발: 병법의 천재,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이다.

스키피오: 그렇다면 세 번째는 누구인가?

한니발: 바로 나, 한니발이다.

스키피오: 만약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스키피오)가 지고 당신이 이겼다면?

한니발: 그럼 내가 제일 첫 번째이다.

 

이런 대화 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니발은 최고의 전쟁 영웅이었다. 이러한 한니발, 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로마는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이탈리아 반도가 유린당하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치 전쟁교과서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처럼 전쟁의 과정을 싣고 있다. 물론, 재미있다.

 



국가도 진화하지만 인간도 진화한다

한니발은 당대 최고의 군인이다. 하지만 그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병법을 모방하고 자기화시켰다. 하지만 자기보다 훨씬 어린 스키피오는 한니발을 전쟁터에서 보고 배운 제자인 셈이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섭렵하여 오히려 그것으로 도전장을 내민다. 결국 스키피오의 승리로 끝이 난다.

 

진화의 벼랑 끝에 선 카르타고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의 나라인 카르타고와 로마가 벌인 전쟁이다. 카르타고는 1차, 2차, 3차에 걸친 전쟁으로 결국 패망하게 된다. 적국의 패망의 광경을 목도하던 총사령관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스키피오의 아들의 양자)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영화를 자랑했던 제국의 멸망이라는 위대한 순간을 목격하고 있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 로마도 이와 똑같은 순간을 맞이할 것이라는 비애감이라네.”(455)



 

포에니전쟁의 주인공, 카르타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카르타고의 폐허

‘번성한 자는 반드시 쇠퇴한다’

‘진화한 자는 반드시 쇠퇴한다’

로마인 이야기 2권, ‘한니발 전쟁’은 ‘번성한 자는 반드시 쇠퇴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이것을 두 가지의 줄기로 보고 싶다.

 


첫째는 번성한 국가는 반드시 쇠퇴한다는 Story.

 

당대 지중해의 해운국이었던 카르타고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마케도니아가 멸망한다는 스토리가 전개된다.

둘째는 진화한 인간은 반드시 쇠퇴한다는 Story.

 

그 탁월한 명장, 한니발이 포에니전쟁에서 패배하여 나중에는 시리아까지 도망갔다가 결국은 음독자살을 하게 한다. 한니발의 제자이면서 그를 능가한 명장, 스키피오를 大카토가 모함하여 몰아내고 스키피오는 은둔생활을 하며 생을 마감하게 되는 스토리.

 

비애감이 감도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역사가 주는 이러한 장엄한 교훈의 카타르시스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읽고, 그리고 그 역사로 인해 울고, 그 역사로 인해 울지 않는가?

 

한 여류작가가 쓴 로마인 이야기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거다.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 1-2권을 읽은 후 느끼는 점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한니발’이나 ‘스키피오’, 더 나아가 4-5권에 등장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매니아이다. 로마의 매니아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인물, 영웅에 대한 예찬가이다. 그래서인지 ‘한니발 전쟁’의 주역들을 대하는 태도가 객관적인 태도라기 보다는 주관적인 면이 좀 넘친다. ‘로마가 좋아서 로마와 결혼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이다. 실제로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이탈리아로 갔고 거기서 이탈리아인을 만나 결혼하고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로마인 이야기’의 편향적인 관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여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작가 쓴 로마인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해석하고 그려 나갈까 궁금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존재가치나 의미가 전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벌써부터 3권, ‘승자의 혼미’를 볼 기대로 가득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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