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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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고, 아름답다.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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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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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추파춥스를 입에 물고 달콤한 맛을 빤다.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소리를 크게 하여 듣는다. 추파춥스와 베토벤 교향곡은 어떠한 면을 들먹여도 썩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괴리적이다. 추파춥스는 작고 달콤하며 부드럽다. 입에서 돌돌 구르며 치아를 두드리는 동그란 알은 딱딱하고 끈끈하다. 뜨거운 열과 침에 서서히 녹아가는 추파춥스는 입 속에 달큼한 당으로 남는다. 엄지손가락 첫마디만큼 커다란 동그란 알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줄어든다. 그 모양 그대로 줄어들 때도 있고 타원형으로, 납작하게 작아질 때도 있다. 그리고 결국엔 없어진다. 입 안에 여운으로만 남아 있을 뿐 형태와 더 즐길 수 있는 사탕은 없어진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크고 감칠맛 나고 웅장하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 귓속을 치열하게 파고드는 음파는 거대하고 장중하다. 환희의 열기와 生으로 치닫는 열정은 온 몸에 전율로 남는다. 무겁고 고통스럽게 시작한 곡은 서서히 장조로 변주된다. 모든 악기는 환희를 노래하기 시작하고 그 사이로 비치는 광명의 빛을 현을 떨며 반갑게 맞이한다. 악기의 연주는 끝나도 내비치는 빛과 은은하게 울리는 현의 떨림은 여전히 남는다. 사라지지 않고 귀에서 몸으로 혈관을 타고 퍼진다. 결국에는 내 몸이 베토벤 교향곡 안에 서 있다.











<Jacques Louis David   Marat assassiné (1748~1825)>






흰 말이 갈기를 휘날리며 앞발을 최대한 쳐올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히이잉 하고 울음소리가 들릴 듯 벌어진 입술과 눈은 광기 어린 모습을 취한다. 열정으로 가득한 광기다. 그 위에는 산맥 위를 향해 손가락을 뻗은 채 앞을 응시하는 나폴레옹이 있다. 깊게 파인 눈과 꽉 다문 입은 그의 장군으로서의 패기와 결단력을 대신한다. 화려한 붉은 망토가 휘날리는 이 그림을 모두가 안다. 나폴레옹 그림을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는 살해당한 정치인을 그렸다. 바로 위의 [마라의 죽음]. 나폴레옹 그림이 반 타의적이며 인물을 미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마라 그림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다비드는 오로지 자의적으로 자신의 친구였던 마라의 죽음을 그려낸다. 마라는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었던 자코뱅당의 일원이었다. 마라는 다수의 지롱드당원을 단두대로 보냈는데 여기에 분노한 지롱드당원 샬롯 코데이는 마라를 살해한다. 칼은 정확히 그의 가슴에 찔렸고 마라는 즉사한다. 코데이는 그 자리에서 잡혀 나흘 뒤에 처형당한다. 다비드는 이 역사적 사실에 시선을 주기보다 마라를 돋보이게 하였다. 세로로 긴 구도에 절반은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다. 적막이 짙은 공허 속에 마라는 욕조에 누워 죽어 있다. 가슴팍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욕조물은 빨갛게 물드는 동시에 상체와 고개를 비스듬히 젖히고 한쪽 팔을 욕조 밖으로 빼낸 채. 연설문과 펜을 끝까지 쥐고 있는 그의 손가락은 나중에 보더라도 그의 몸에 은은히 비치는 어떠한 빛을 오래 응시해야 한다. 마치 베토벤 교향곡에서의 광명의 빛, 환희의 빛과 같은 밝음이 마라의 몸을 감싼다. 공허 속의 빛. 다비드는 마라를 순교자와 같이 그려냈고, 성공했다. 온화한 표정과 밝고 부드러운 빛은 가히 신성하기까지 하다.











<Edvard Munch   The Death of Marat 1863∼1944>






또 하나의 그림이 있다. 마라와 코데이를 그린 작품은 많다. 폴 자크나 장 자크 오에르의 그림말고도 더 있다. 다비드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마라 살해 사건을 그린 작품은 사실적이며 묘사적이다. 역사를 그리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일 터. 하지만 뭉크는 다르다. 특별한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 다수가 그렇듯 그가 그린 마라의 죽음 또한 무섭다. 거칠 필선과 아무렇게나 보이는 선들은 매우 불안하게 느껴진다. 초록색은 안정감을 준다는 색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뭉크가 사용하니 불안감을 더해준다. 마라는 죽어가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침대에 누워 있고 그 앞에 샬롯 코데이가 서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얼굴은 유령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나신인 몸은 의아함을 불러낸다. 어라, 왜 나신인 걸까. 마라도 나신인 것으로 보아 두사람 사이에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중요한 의문점은 아니라 생각되니 이만하고. 다비드가 마라의 희생정신, 혁명정신에 초점을 두고 성스럽게 그려냈다면, 뭉크는 마라의 '죽음'과 코데이의 충동성과 불안 등을 한데 모아 거칠게 그려냈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이하 파괴)>는 다비드의 그림을 차용했지만 사실 뭉크의 그림과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어딘가 검은색 물감으로 칠한 필선이 거칠에 드러나는 듯한. 분명 김영하의 글은 뭉크처럼 직설적이면서 추상적이고 불안하지 않지만 뭉크의 그림 같은 구석이 있다. 많다. 











<파괴>를 읽는 것은 그림을 왼쪽 위 모서리부터 오른쪽 아래 귀퉁이까지 훑어가는 것와 비슷하다. 느낌이 닮았다는 것. 마라의 죽음을 다룬 그림 두 편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언뜻 보아선 알 수 없는 세세한 면까지 찾아가는 희열이 그것이다. <파괴>를 읽을 때의 기분이 아직 생생한데 바로 그것이다. 한강의 단편소설 '몽고반점'을 읽을 때 그랬다. 거칠게 요약하면, 머리카락이 숭숭 빠진 중년의 남자가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비디오 아티스트&행위예술가라는 직업적 명목으로 여자를 범하는 내용이다. 작가 스스로 '파격적'이라는 평은 싫다고 말한 이 소설을 나는 학교에서 읽으며 방망이로 두들겨맞은 듯 멍했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고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혜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몸 속 어딘가가 터져 피가 봇물 터지듯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느낌이 <파괴>와 닮았다. <파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파괴>는 정적이고 '몽고반점'은 동적이다. 말하자면 <파괴>는 그림 같고 '몽고반점'은 영화 같다. 느낌과 분위기 말고도 <파괴>와 '몽고반점'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비디오 아티스트와 행위예술가이다. 두 작품 모두 비디오 아트를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파괴>는 예술욕, '몽고반점'은 성욕이다. (<파괴>에서는 아티스트가 품은 예술욕으로 인해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깊게 건드릴 능력은 되지 않고 이 문단 바로 다음에 인용하겠다.) 행위예술 또한 두 작품에서 자그마한 차이가 있다. <파괴>의 행위예술가는 당당하고 자존감이 높은 반면 '몽고반점'의 행위예술가는 곧 바스라질 듯한 고목 같이 힘 없고 순응적이다. 예전 어느 리뷰에선가 데려온 실레의 나무 그림과 그녀는 닮았다. 분위기를 좀 더 건드려보자면 두 작품은 환상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여성적이면서 남성적이고. 딱히 적확하다고 칭송할 만한 형용사가 없다는 점이 두 작품 사이의 가장 큰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당찬 한 마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김영하는 자살청부업자로 형상화한다. 살인청부업자도 아닌 자살청부업자. 작가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일본에 있는 직업이라고 하니 현실성이 조금은 부가된다. 어찌 되었든 김영하가 자살청부업자로 내세운 남자는 소설 전체의 화자이기도 하다. 남자는 매일을 자신의 손님을 찾는 데 쏟아붓는다. 신문에 조각기사를 내걸고 도서관 미술관 공원을 전전하며 재목을 탐색한다. 밤엔 동성애자부터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여학생까지 각종 고민을 가진 사람들과 전화를 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걸러내어 결국 재질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면 곧바로 낚아챈다. 즉시 남자의 손님이 된 사람은 남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남자는 손님에게 어떤 자살 방법이 있는지 어떤 자살 방법이 덜 고통스러운지를 안내해준다. 그렇게 손님을 보내고 남자는 머릿속에 저장된 것을 꺼내어 소설을 쓴다. 유디트와 유미미, C와 K의 이야기는 남자가 쓴 소설이다.





"왜 비디오를 두려워하죠?"

그의 질문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맞받았다.

"두려워하다니요? 전 단지 싫었을 따름이에요."

"두려움은 흔히 혐호의 외피를 쓰곤 하죠. 자전거를 배우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해요. 그리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 되죠."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그의 말을 곱씹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이 수긍의 표시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절 두려워하잖아요. 제 실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비디오를 들고 나온 거죠? 아닌가요? 정작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일 수도 있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또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자기 집에 돌아간 C는 거실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K와 유디트를 본다. 그리고 며칠 뒤에 C와 유디트가 거실 소파에서 동일한 행위를 하고 있다. 생일이라고 C를 불러낸 유디트와 멀리 떠나는 도중 내린 폭설로 둘은 구속된다. 거기서 한 번 더 섹스를 하고 C가 잠깐 잠든 사이 유디트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몽고반점'의 영혜가 그랬듯 유디트는 어딘가 이상하다. 섬뜩하기도 하고 기괴하기도 하다. 미친 여자 같다. 영혜는 진짜 미쳤고 유디트는 미친 척 하는 여자 같다. 그녀는 항상 공허하다. 그래서 자신의 구멍들을 채워야만 한다. 추파춥스를 달고 사는 것은 그 때문이고, 어떤 남자든 몸을 내어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C와 둘이 있는 차 안에서 자위를 하고 동그랗게 뭉친 눈을 아랫입 속으로 집어넣는 것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그에 반해 후에 C와 만나게 되는 유미미는 꽉 채워져 있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사랑 등 모조리 자신에 대한 것으로 빈틈없다. 그것에서 오히려 공허가 생겨난다. 그래서 유디트와 유미미는 닮았다. 둘 다 공허한 여자이다. 





<파괴>에는 여자가 셋 나온다. 유디트, 유미미, 그리고 나머지는 자살청부업자인 남자가 외국을 여행하다 만난 동양의 여인이다. 동양인 여자는 물을 마시지 못하는데 몸을 팔던 시절 정액을 페트병에 모아두고 여자에게 마시라고 강요했던 남자 때문이다. 유미미에게도 비슷한 과거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과 몸을 섞었는데 학교에 찾아온 선생의 아내에게서 받은 눈빛이 그것이다. 남편과 유미미가 혼란에 빠져 소리를 내지르고 있을 때 그 아내는 무서울 정도로 평온했다고 했다. 유디트에게도 있다. <파괴>의 여자들은 전부 몸 전체를 뒤덮을 만큼 큰 상처를 갖고 있다. 이것이 작품을 구성하는 불안의 한 요소일 터. C와 K를 포함, 작중 화자를 제외한 소설의 등장인물은 모두 동일하다. <파괴>를 써내려가기 위한 최소조건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뭉크의 샬롯 코데이 같은 인물들.












<Mort de Sardanapale     Ferdinand-Eugène-Victor Delacroix (1798~1863)>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일단 밝과 화려한 색채감에 압도되고 다음으로 칼에 찔려 죽는 여인들이 보인다. 맨몸의 여인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사들의 손에 잡혀 여린 살 칼에 찔린다. 흑인 병사는 보석 장식을 한 왕의 것처럼 보이는 말을 잡아 끌고 있고 그림 옆 편에서 사람들이 손을 뻗어 살인 행각을 추도한다. 그림의 저 위편 어두운 곳에서 사르다나팔 왕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듯 머리에 팔을 괸 채로.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은데 그래서 더욱 처참하다. 자신의 수하물의 말살을 지켜보는 폭군의 최후. 그것을 들라크루아는 이렇게 표현했다. 감정의 절제. 절제로 인한 폭발의 미학. <파괴>가 그렇다. <파괴>는 결코 폭발하는 법이 없다. 터지기 직전 압축시킨다. 절제하고 덮어버린다. 그것으로 인해 작품의 美는 살아난다. 삼류작가라면 그것을 폭발시켰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두 작가의 수작.





자살청부업자인 남자는 사르다나팔의 표정을 끝까지 취한다. 유디트와 유미미를 추억하며 남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유디트와 유미미가 비단 남의 일만 같으십니까? 아닙니다. 당신도 저 칼에 찔려 죽는 하녀의 처지가 될 수, 마라를 찔러 죽인 샬롯 코데이의 처지가 될 수 있습니다. 





순간 절실하게 그녀들이 그립다.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글도 완성되었고 이제 이 글을 그들의 무덤 위에 놓일 아름다운 조화가 될 것이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 공원이나 한적한 길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 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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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31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31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13-04-0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 오랫만이에요. 요새 난독증인가봐요. 장문의 글은 안 읽히네요.ㅜㅜ
 
호랑이 발자국 창비시선 222
손택수 지음 / 창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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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감싸는 차가움은 옷을 입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페이퍼를 쓸 지 리뷰를 쓸 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엊그제 휴관일인 도서관에 잠입하여(사실 잠입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열람실은 개관 중이었기에. 그런데 요즈음 청소년들, 아니 현대인들, 최소한 우리 지역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도서관은 곧 열람실이고, 열람실은 곧 독서실, 그러므로 도서관은 곧 독서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 말인즉슨 도서관에서 책을 안 읽는다는 거다. 도서관 갈래? 하는 말은 이제 책 읽으러 갈래? 가 아니라 도서관 열람실에 가서 인강 들으며 공부할래? 하는 말이나 똑같다. 여기엔 독서실이 없으니 더욱 그럴 수 밖에.) 잡지 코너 테이블에 앉았다. 종합자료실-갖가지 책이 들어선 장소는 잠겨있었지만 잡지는 통로에 공간을 만들어 따로 빼두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라도 허기진 뇌를 채우고자 했다. <PAPER>라는 잡지에 실린 이이체 시인의 인터뷰를 읽으며 감탄하던 중이었다(이이체 시인은 스스로 게으름뱅이라고 칭하는데 얼마전 글틴 캠프에 다녀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이체 시인은 그 자체로 시인이며 일반인은 따라갈 수 없는 고차원의 정신세계를 지니고 있단다. 등단하기까지 천 권을 읽었다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참 웃기다. 광화문 교보문고가 개장하자마자 시집 코너에 가서 시집을 읽다가 점심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또 시집 읽고 저녁 때가 되면 수업을 파한 문창과 친구들과 저녁 먹고 술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서점 문을 닫을 때까지 다시 시집을 읽었다고 한다. 이것이 아버지에게 충동적으로 내뱉은 "한 학기 안에 등단 못하면 시고 뭐고 때려치고, 아버지 원하는 거 할게." 하는 선언 때문이었다고 하니.). 물을 마시려 고개를 들었는데 눈 앞에 <한겨레 21>이 있었다. 불현듯 신형철이 떠올랐고, 나는 예전 호를 모아두는 곳에서 거의 칠십 권 정도를 가지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두어 시간 정도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만 찾아서 읽었다. 좋은 글이 수차례 머리를 때리는 것은 상당히 즐거운 일이었다. 신형철의 글은 두손두발 다 들어 백기를 들고 싶을 정도로 훌륭했고, 그가 소개하는 시나 소설들마저 하나같이 빛났다. 특히 나는 그 중에서 그가 김중일의 시집을 소개해둔 지면이 가장 좋았고 그 시를 가져와보려 한다. '용산, 천안함 그리고'라는 부제를 가진 시다.




이것은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의 이상형은 털 없이 매끄러운 피부에 가급적 눈물의 숱이 적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


시신의 일부 같은 저녁의 서쪽 하늘 아래서 어머니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고 나면 온몸에 털이 무성해지는구나

흑백사진 속 인화된 작약 같은 음색으로 어머니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꿈속에 숨어서 혼자 많이 우나 보다


깎아도 깎아도 끝이 없구나


누나는 턱밑까지 흘러내린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자신의 얼굴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린 긴 머리카락을

마당을 가득 채운 편서풍을 이용해 정리하곤 하였습니다


그 며칠 아버지와 형은 한 방울 그을린 눈물처럼

길에서 흔적 없이 흩어졌습니다

걷다가 모르게 빠진 한 올 머리카락처럼

길의 질량과 부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



- 눈물이라는 긴 털, 김중일 『아무튼 씨 미안해요』





길의 질량과 부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자신도 모르게 빠진 한 올 머리카락 같은 죽음. 그런 죽음으로 남편과 아들을, 아버지와 同氣를 떠나보내야한 어머니와 누이의 시간 모르고 자라나는 털. 자고 나면 무성해지고, 깎아도 깎아도 끝이 없고, 얼굴을 망쳐놓는 털들. 김중일은 눈물과 털을 훌륭하게 뒤섞어놓는다. 신형철은 이를 두고 "옳다."고까지 표현했다. 털은 누군가에게 내밀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털은 수치스러우며 부끄러운 것일 터다. 적어도 어머니와 누이에게 털은 바로 그런 것임이 분명하다. 눈물처럼 사라진 가족을 눈물이라는 긴 털로 배웅하는 여자들의 처절하고 비참한 모습은 절로 애도적 분위기에 잠기게 한다.





이렇게, 단 한 편의 시밖에, 그것도 일부만 보았지만, 김중일은 가족을 향한 애도와 슬픔을 '털'이라는 이미지로의 치환을 통해 표현했다. 눈물과 털, 그리고 은유라는 시의 기능이 조화되어 시너지효과를 십분 발휘했다. 그러나 손택수 시인은 그와 조금 다르다. 손택수 시인에게는 좀더 사실적이고 담담한 묘사가 자리하고 있다. 자신 가족을 향한 따뜻하고 서글픈 시선, 그리움, 애틋함, 동정……이 시어가 잔잔하게 깔리듯 시집 전체에 묻어 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시들도 바로 그러한 시들이고, 아마 시인이 특히 공들이고 사랑하는 시들도 바로 그러한 시들일 것 같다.



프레이야님의 페이퍼에 오른 안도현 시인의 시를 읽고 오래 가슴이 저렸다. "내 눈 밑으로 열을 지어 유유히 없는 길을 내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내려다본 적 있다, 16층이었다//기럭아, 기럭아/나 통증도 없이 너의 등을 보아버렸구나/내가 몹시 잘못했다"(안도현, 등 『북항』). 통증도 없이 너의 등을 보아버렸구나... 통증도 없이 너의 등을. '등'이란 단어를 두고 생각했다. 그저 기댈 수 있는 버팀목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던 등이 사실 통증의 부위였구나. 등이란 알고보면 얼굴과 몸의 뒷면, 즉 암면이구나. 불거진 척추 마디 사이사이에 고된 노동과 피로, 쓸쓸함이 때처럼 끼어 있구나. 손택수 시인도 등을 애틋한 부위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이하 동일)





"화성군 어디 공사장을 떠돌던 아버지"(송장뼈 이야기, 66쪽)는 한평생 제 몸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왔을 것이 분명하다. 변변한 직장 하나 없이 여러 공사장을 떠돌며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해야 했을 가장의 부담이 가장 클 테고, 뭐 어디 공사장 막노동이 쉬운 일인가. 벽돌과 콘크리트를 지게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올라야했던 고되고 쓰라린 흔적이 아버지의 등에 남은 것이다. 아버지는 "가슴 깊이 가시를 물고 떨고 있"(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 17쪽)는 빗방울처럼 "살속을 파고든 비수를 품고 둥그래진"(동일 詩) 것이 아닐까. 비수 같은 등의 흔적은 아버지에게 '털'과 같은 것이었을 지도. 아들에게 권위적이고자 했던 아버지는 그래서 아들과 목욕탕에 가지 않을 것일테다. 눈물같이 등에 그을린 지게 자국을 차마 보여주지 못하여서.


시인은 아버지가 무척 그리운 듯싶다. 조심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는 그의 시엔 대부분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때로 권위적이고 엄하고 강하지만, 위의 시와 같이 여리게 등장한다. 또 '아버지와 느티나무'에서는 젊은 청년이다. 시를 통해 아버지와 교감하고 싶었던 것일까. 시인은 아버지는 물론 다른 가족들을 하나하나 챙긴다. 송곳니가 닮은 할아버지부터 찾아오는 이에겐 무조건 숟가락부터 쥐어주었던 외할머니…… 시인은 모두를 따뜻한 시선으로 챙긴다. 


시인이 보듬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각박한 세상, 빠듯한 현실, 우리 모두의 삶을 능숙하게 다뤄낸다. 특히 불교적인 결합으로써 시인은 하고자하는 바를 충실히 드러낸다. 이시영 시인은 이를 두고 "오랜만의 생동하는 민중서사적 시인"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주로 비근한 소재를 들고 시를 쓰는 손택수 시인은 최근 문창과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나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 눈에 선하다. 내가 활동하는 합평 카페에 만약 이 같은 시를 들고 간다면 무섭고 깐깐하신 멘토분들은 이것은 시가 아니라고 쳐낼 것도 같다. 나는 시집을 읽으며 연신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좋은 시인데, 이렇게나 마음에 와닿는 시들인데 왜 시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서정시의 시대는 갔다. 그렇다. 손택수 시인은 서정시인이라는 데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오로지 서정시를 쓰는 시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의 시는 서정시라기엔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렇다고 서정시가 아닌 것도 아니다. 신서정이라고 할까. 이것이 옳은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손택수의 시는 무언가 쓸쓸하다. 아름다운 서정이 아닌 쓸쓸하고 고된 서정이다. 눈물 같은 시들, 지게자국 같은 시들이 시집을 일궈내고 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일년 전부터 붉은 거미가 보인다고 하였다. 붉은 거미가 천장에서 내려와 큼큼한 냄새가 나는 방안을 흰 머리카락 같은 거미줄로 가득 채워놓고 있다 하였다. 아무도 그걸 치워주지 않는다며 까까머리 어린 손주의 손목을 잡고 거미줄에 걸린 나비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는 숨을 몰아쉬곤 하였다. 그때 삭정이 손가락이 가리킨 곳, 눈곱처럼 먼지가 끼어 있떤 창문 너머론 짱짱한 가을 햇살이 하얗게 쏟아져내리고 있을 뿐이었는데


아십년도 더 지나 아픈 몸으로 시골집에 내려와서 당신이 앓아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다보니 보인다. 여전히 눈곱이 끼어 있는 창문 너머로 사방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 태양. 햇빛에 돌돌 말려 몸속의 수액이 빨려 올라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듣고 있어야 하는, 붉은 거미의 줄에 걸린 생. 누구도 벗어날 수 없고 아무도 대신 걷어줄 수 없다면


나는 그때 창문에 때묻은 커튼이라도 한 장 달았어야 했다.

허공에 손을 내젓는 시늉이라도 한두번 해주었어야 했다.



-붉은 거미, 22쪽





벚꽃이 진다 피어나자마자

태어난 세상이 절벽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아버린 자들, 가지마다 층층

눈 질끈 감고 뛰어내린다

안에서 바깥으로 화르르

자신을 무너뜨리는 나무,

자신을 무너뜨린 뒤에야

절벽을 하얗게 쓰다듬으며 떨어져내리는

저 소리없는 폭포


벚꽃나무 아래 들어

귀가 얼얼하도록 매를 맞는다

폭포수 아래 득음을 꿈꾸던 옛 가객처럼

머리를 짜개버릴 듯 쏟아져내리는

꽃의 낙차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폭포,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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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 2013-02-22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테그가 시집리뷰를 다시는 쓰지 않아야 겠다인거예요? ㅠㅠ
시임들을 볼 때면 매번 놀라요. 저런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에. 어떻게 사물들을 오묘하게 엮고는 하는데, 정말 감탄스러워요. 전 글을 쓸 때면, 그렇게 써보려고 노력은 하지만 이름하여 선생님들 마음에만 드는 글밖에 쓰지 못하네요.
그냥 깔끔하고, 정리정연한 글?

2013-02-23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3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구체의 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의기양양하게 그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 주며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른들은 모자가 뭐가 무섭냐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린 것은 모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코끼리를 소화시키는 보아뱀 그림이었습니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어린 왕자]에서 '나'는 보아 뱀이 동물 하나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 그림을 그렸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에 꽤 만족하여 주변 어른들에게 내보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관심한 답변-모 자가 뭐가 무섭냐뿐. 그는 낙담하여 한동안 펜을 놓고 그림을 숨겨두었다가 불시착한 사막에서 만난 '어린 왕자'에게 다시 꺼내 보인다. 양을 그려달라고 오복조림하던 어린 왕자는 그림을 보자마자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답한다. "아냐, 아냐! 뱀은 싫어. 내가 언제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을 그려 달랬어? 보아 뱀은 아주 위험해. 그리고 큰 코끼리는 너무 거추장스러워. 자리를 많이 차지 하기 때문에 함께 지낼 수 없단 말이야.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아. 그러니까 조그맣고 귀여운 양을 그려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러니까 '나'와 어린 왕자의 순수한 시각이나 어른들의 잃어버린 동심 따위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근원적인,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에 대한 것이다. 뱀은 무엇이든 씹지 않고 삼켜 소화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고 한다. 외국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거대한 뱀-비단뱀 등이 수풀을 미끄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길고 큰 몸뚱어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팔뚝에 소름이 돋기도 한다. 뱀이 사람을 삼킨다는 입소문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데, 실제로 한 탐험가는 자신 동료의 머리가 뱀의 입에 들어간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 사진을 보고 많은 학자은 뱀이 사람을 끝까지 삼키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유는 많다. 뱀의 입이 아무리 크게 찢어진다 하더라도 성인 남성의 어깨가 들어갈 만큼 넓게 벌어지지 못하고, 들어간다손 치더라도 자칫하면 뱀이 터지기 때문이다. 악어를 삼켰다가 옆구리가 터진 뱀의 사진은 유명하다. 그렇다면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의 그림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생텍쥐페리는 그림을 그린 '나'의 손을 빌려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한 것일까.


미치오 슈스케는 [구체의 뱀]을 통해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그것은 거짓을 품은 사람이라고,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은 사실 죄악과 거짓을 품은 사람이라고, 원죄로부터 시작해 자죄까지 도저히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죄악과 거짓을 삼킨 사람이라고, 미치오 슈스케는 첫 문장부터 차근차근 자의를 구축하고 있다. 장편소설이긴 하나 부담 없는 양에, 등장하는 소수 인물은 모두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다. 어쩌면 현실 그 자체다. 토모히코와 그의 이혼한 부모, 토모를 거둬 함께 사는 오츠타로네-오츠타로, 나오, 죽은 아내 이츠코와 사요, 토모코, 타사이…. 꿋꿋하게 사회를 견디어 가는 평범한 사람들로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미치오 슈스케의 손길을 거친 사람들로서 그렇지 않다. 


나열한 인물들은 모두 작거나 큰 거짓을 몸에 품고 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애써 현실을 피하고 죽는다. 그러한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에 갇혀 있다. '구체'이다. 미치오 슈스케의 인물들이 그토록 많이 가진 '스노우 돔'이다. 미치오의 말을 빌리자면, 구체에 갇힌, 저마다 거짓말을 품은 사람들이, 언젠가 구체에 비칠 저녁 해가 유리 속의 차가운 눈을 녹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즉 구체-스노우돔은 배가 빵빵하도록 거짓을 지닌 사람들이 터질 듯 쌓인 어두운 공간인 동시에 그들이 속죄를 기다리는 밝은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스노우돔 안의 물을 유영하는 하얀 눈은 예수의 십자가 흘린 피와 비슷한 의미로 해석된다. 미치오의 인물들이 스노우돔을 저마다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소망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짊어짐과 비슷한 의미로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소설에도 그러한 구절이 있다. 


"여기에 들어갈 수 있으면 행복할지도 몰라"

맑은 음색이 점차 늘어지더니 결국 곡이 연주되는 도중에 멈춰 버렸을 때, 토모코가 불쑥 말했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스노돔의 유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째서?"

"그러면 언제나 아름다운 경치만 볼 수 있잖아."

생각해보니 스노돔에 대해 사요와 토모코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요에게 스노돔은 자신을 가두는 보이지 않는 유리를 연상시키는 물건이었다. 토모코에게는 아름다운 경치를 언제까지나 보존해 주는 물건이었다.


위의 이치를 따르자면 깨어진 사요의 스노돔은 구원의 길이 사라진 걸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토모히코의 거짓된 긍휼, 거짓된 동정에 상처 입은 사요가 자살을 선택한 그 순간, 구체의 사람들이 소망하는 '광명의 저녁 해'가 그녀에게 비칠 일은 없어진 것이다. 또 그러한 이치에서 토모히코가 토모코의 스노우돔을 깬 것은 또한 그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토모히코는 그녀의 죽음을 후일에야 알게 되었는데, 그가 미치오의 이러한 의도를 깨달았다면 슬퍼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스노우돔만 깨지 않았으면 되었기에.


이야기를 조금 틀어,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범인이야 뻔하디뻔하다손 치더라도 마지막 반전은 소설에서 내내 견인해오던 싱크홀 같은 부자연스러운 부분들을 모조리 메꾸어 주는 것이어서 꽉 찬 폭발이 속에서 터지는 듯했다. 전형적인 신인작가의 면모. 미숙한 전개의 확실한 폭발. 그에 반해 [구체의 뱀]은 이제 그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확증해주는 작품이다. 생텍쥐페리의 보아뱀을 끌어와 자신만의 이야기를 구축하고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는 글솜씨는 그의 성장을 방증한다. 인물들이 살아 있는데다 하나하나 매력적이어서 지루하지도 않았다. 


다만, '개발새발'이라는 번역에서 눈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어야 했는데, 아무리 맞춤법으로 인정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공식적인 글에서 보기에 껄끄러운 면이 없잖아 있다. '괴발개발'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굳이 '개발새발'로 표현하는 건 소설의 흐름을 깨는 것 같기도 해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외에는 딱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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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2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2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3-02-13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흥미로운 리뷰이군요.. 다만ㅠ 책을 아예 읽지 않은 저로서는 죄송스럽게도 몇 몇 부분이 잘 와닿지 않네요. 책을 한 번 읽고 또 읽어보아야겠네요. 많이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ㅎㅎㅎ

이진 2013-02-16 23:13   좋아요 0 | URL
그런 걸 감안하지 못한 제 탓인 걸요. 제가 죄송합니다아 ㅠㅠ
한 숨 늦게, 가연님 반갑습니다! 새해 복 많이는, 많이 늦었군요.
그렇지만 저도 역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 보낼게요.
굳밤 :D

jo 2013-02-16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린왕자다!!!개발새발에까지 민감하진 말아요!!! ㅎㅎ 괴발개발보다 난 개발새발이 더 눈에 편한건... ㅎㅎ
한국어 능력 시험을 준비하면서 제 국어 실력을 한탄 또 한탄합니다. 어렵다 마음먹지만 능력시험 모의고사 풀고서 난생처음 그렇게 비 많이 내린 시험지 처음봤습니다. ㅎㅎ 언제나 홧팅! 공부해야하는데.. 하면서 이리기웃 저리기웃.

이진 2013-02-17 21:24   좋아요 0 | URL
개발새발에 어쩔 수 없이 눈이 멈추더라구요. 안 그래도 몇군데 맞춤법상 맞지 않거나 어색한 부분이 많아 고개를 갸웃하던 때여서 더욱 그랬어요. 한국어 능력 시험이라니! 저도 한번 공부해보고 싶네요. 어디, 모의고사 시험지좀 주실래요? ㅎㅎ
 
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에곤 실레  네 그루의 나무들 1917>



열일곱 살이 되는 겨울, 내가 처음 먹으로 그려보았던 나무 기억하나요. 나무가 너를 닮았구나, 라고 당신이 말하던 것을 나는 기억합니다.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하고 당신은 덧붙여 말했지요. 그날 오후 내내 당신의 서가를 뒤져 나무 그림들을 봤습니다. 실레가 그린 어리고 섬약한 나무들을 발견했을 때 당신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했습니다. 모든 그림이 자화상이라면, 나무 그림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가장 고요한 자화상일 거란 생각도 얼핏 했습니다.  


한강, 파란 돌 '노랑무늬영원' 192-3









 

한강의 소설은 실레의 어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으로 설명 가능하다. 아니, 실레의 어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이 오롯이 한강의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레의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을 봤을 때 가장 먼저 암울하다, 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이울고 있는 붉은 태양과 제자리를 잡고 서 있는 나무들, 그 중에 헐벗은 나무 하나, 생기 없는 땅과 하늘, 핏빛 같은 붉은 계열의 색이 한데 모여 그로테스크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쟁의 폐허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부정적인 시각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부정적인 고요와 부정적인 격렬함이다. 실레의 어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은 두 가지 모두로 볼 수 있다. 고요하다 못해 쓸쓸함 기운이 그림 안에서 맴도는 것이 느껴진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옆에, 곧 옷이 없는 몸을 함께 할 것만 같은 나무 세 개가 힙겹게 서 있다. 초롯빛 풀 한 포기 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그림에서 오로지 해만 붉은 빛을 내뿜는다. 그러나 그 빛조차 쓸쓸하고 고요해서 전체적으로 그림의 분위기는 쓸쓸하다. 한동안 쓸쓸함을 맞이하고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어보자. 쓸쓸함 이면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것이 보이는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넘어가려던 붉은 태양이 투쟁을 위한 기(旗)의 형상을 취하고, 공연히 눈물만 흘리고 벌벌 떨고 있을 나무들이 투쟁을 위해 꼿꼿히 제 몸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허무하고 허탈하고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암울하고 쓸쓸하고 음산하였던 그림이 서서히 격렬한 파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강의 소설이 이러하다. 한강의 소설은 여리고 섬약한 인물 그림이다. 실레의 하늘과 들처럼이나 생기 없고 쓸쓸한 배경을 살아간다. 그들에겐 실레의 나무에게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病이다. 한강의 사람들은 모두 병들었다. 그것이 육체적인 病이든 정신적인 病이든 病은 한강의 사람들을 힘겹게 만든다. 지친 사람들은 조용해진다. 빠르고 격정적으로 파도치는 세상의 흐름에 저항하듯 느려진다. 그들은, 한 인터뷰의 내용을 조금 빌리자면, 착한 사람처럼 보인다. 아무데나 나서지 않으며 나부대지도 않는다. 오지랖이 넓지도, 그렇다고 남에게 무관심하지도 않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고 이겨내려는 사람들이다. 착하기보다 그들은 힘든 사람이다. 실레의 여리고 섬약한 나무들 같은 사람들이다. 한강은 이런 사람들만을 채용한다. 그래서 한강의 소설은 우울하고 축 처져 있다. 커다란 바위가 소설이라는 자그마한 포대기를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 든다. 또 그렇다고 그 돌이 집채만하지는 않다. 적당히 무거우며 적당히 가볍다. 그것이 한강의 매력이다.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처럼 인간의 가장 처연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황정은처럼 통통 튀지도 않다. 적당히 우울하고 적당히 싸여 있다. 그것이 한강의 매력이다.



이제 실레의 그림을 구도적으로 보자면, 수평과 수직이 바둑판처럼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과 들은 수평으로 나무들은 수직으로 뻗어 둘이 교차된다. 수평적 구도는 안정감과 평화로움, 그리고 넓이감을 주며 수직적 구도는 엄숙함과 성스러움, 상승감을 준다. 실레의 나무는 엄숙하고 성스러운 사람들이다. 모든 그림이 자화상이라는 말을 통해 나무가 곧 실레라는 것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실레의 나무, 그러니까 실레는 어떤 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나타낸다. 이육사의 [교목]에 드러나는 의지다.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교목(喬木), 이육사





우리의 저항시인 이육사는 자신의 투쟁 의지를 교목-줄기가 곧고 굵고 긴 나무로 표현했다. 말아라, 아니라, 못해라 하는 부정 어미들이 나타내는 부정적 의지는 결국 '교목'이라는 것에 흡수된다. 하늘을 향해 곧게 선 나무는 투쟁이자 살아감인 것이다. 실레의 나무들도 그렇다. 이육사의 투쟁 의지가 실레의 나무에게서도 보인다.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로선 실레의 나무, 그러니까 실레가 어떤 것에 저항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신이 돋보인다.



그러니까 한강의 소설이 이러하다. 한강의 사람들, 그러니까 한강은 어떤 것에 투쟁한다. 그것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인생의 벽이고, 낮의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고, 잠자리를 같이하고 목소리를 나누는 가족이고, 시나브로 흘러 바야흐로 다가오는 시간이고, 그것들이 뭉쳐 만드는 세상이다. 한강의 사람들, 그러니까 한강은 '살아내야지...' 중얼거린다. 그들에겐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시련이 닥친다. 아까도 말했던 病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다. 아이를 갖기 못한 스트레스로 인한 거식증, 트라우마와 아프고 암울했던 기억들, 성정체성의 혼란, 한강의 病 중 가장 생소하고 흥미로운 외계인손 증후군, 혈우병, 그리고 자동차 사고. 모든 인물들이 아프고 조용하다보니 그녀의 소설은 모두가 비슷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소복히 쌓인 재 같은 글도 비슷하고 인물들이 취하는 행동이나 가치관도 비슷하고 결말도 비슷하다. 그러나 무언가 다르다. 미묘하게 다르다. 한강의 글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한강의 소설을 한 단어로 표현해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할 것 같다. 한강은 비슷하면서도 참 다른 작품들을 보여주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감정이나 감각에는 변화가 없지만 때론 [채식주의자] 같은 파격적(한강은 파격적이라는 평가가 싫다고 하였지만)이고 진지한 소설을 쓰는 한편, [희랍어 시간] 같은 아주 얇은 유리잔 같은 소설을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답을 독촉한다면 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갓 태어난 어린 새의 팔딱팔딱 뛰는 심장 같아." 그 말고도, "한강의 소설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광원을 감싸고 있는 유리막, 그 유리막을 글로 옮긴 것 같아." 나는 전자가 마음에 든다. 어린 새의 뛰는 심장은 여리게 느껴진다. 조금만 건드려도 봉숭아 꽃 터지는 톡 터질 것 같다. 그 작은 심장이 힘차게 뛰는 모습은 전혀 여리게 느껴지지 않는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심장이 뛰는 횟수만큼이나 가슴에 콕콕 박히는 느낌이다. 즉 이중적인 것이다. 플라톤의 사상처럼 이원적인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이중적이다. 실레의 그림처럼 여리고 섬약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면에는 피를 온몸으로 순환시키기 위해 열심히 뛰는 심장이 존재한다. 그것이 지치고 힘든 한강의 인물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유리막, 이라는 표현은 사실 한강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한강은 [희랍어 시간]을 인간이 가진 아주 연하고 투명한 부분을 생각하며 썼다고 밝혔다. 나는 [희랍어 시간]을 읽었으나 글이 계속 겉돌아 깊은 것을 느끼진 못했지만 그래도 소설의 분위기는 아직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조용했으며 고요했다. 소설이 이렇게나 고요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깊은 고요였다. 


적요


, 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 고요와 적요 속에 한 여자와 남자가 격렬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괴리적이고 부조리적이어서 놀랐었다. 그것은 [노랑무늬영원] 전체를 휘감고 있다. [노랑무늬영원]은 괴리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이나 현실적인 것을 감싼 기류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인도 여행기마다 나오는 구도적인 분위기 같은 건, 난 전혀 못 느꼈어. 굳이 특별한 게 있다면, 숨겨진 게 없다는 것? 예를 들면 죽음, 거기선 시체를 밖에서 태워. (중략)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다. 저녁에 붙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 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한강, 밝아지기 전에 '노랑무늬영원' 109-110





[노랑무늬영원]은 한강다운 글이다. 7개의 옹기종기 모인 소설이 어쩜 그렇게도 한강 같은지 보면서도 신기했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의 긴 텀이 있는 소설들. 그중에는 내가 처음 한강을 만났던 '왼손'이라는 작품도 있었다. [노랑무늬영원]에서 가장 한강답지 않은 소설인데, 책장을 덮은, 지금보다 한 살 어린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었다. 문장과 구성의 탄탄함과 어떠한 경지는 둘째 치고라도 놀라울 것이 많았다. 알라딘에도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대체 왼손이 움직이는 것을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한강은 무얼 말하려고 왼손을 통제불능으로 만든 것일까? 그 해답을 나는 후일에야 알게 되었는데, 외계인손 증후군이라는 것이었다. 외계인손 증후군이라는 것도 셋째 치고나서 나는 '왼손'을 새롭게 해석하려고 한다. 일 년 전의 나는 돈이든 이성이든 권력이든 욕정이든 자신에 의해서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다, 라고 읽었다. 불현듯 제 의지를 갖고 움직이기 시작한 왼손과 그로 인해 수 년 만에 만나게 된 하나의 인연이 평범하고 순차적으로 단계를 밟아 마침내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이야기이다. 서사적이고 기이하고 비실존적인 흐름... 어쩌면 현실적이기도 하나 비현실적으로 읽히는 이야기... 바로 그것이다. 여운조차 찝찝하다. 마치 피를 뒤집어 쓴 듯 끈적하고 꾸덕한 여운이 남는다. [노랑무늬영원]에 자리 잡은 7권 중에서는 가장 동떨어져 있지만 이 소설이 가장 한강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한강답지 않지만 가장 한강다운 소설.


 


'회복하는 인간'과 '훈자'와 '밝아지기 전에'와 '파란 돌'과 '노랑무늬영원'은 구조가 비슷하다. 마치 영화의 교차편집(교차편집의 개념이 여기에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처럼 빠르게 장면이 전환되고 그로서 시의 모습과 영상의 형상도 공존하는 듯 보인다. 한 단락, 한 문장, 한 단어 모두가 한강이 창조한 하나의 상징체이다. 한강은 말을 적당히 아끼는 법을 안다. 특히 '훈자'에서 한강은 한강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준다. 잔잔한, 그러면서도 충분히 짧은 단락들이, 역시 뒤죽박죽 이어지다가 끝에 이르러서는 여러개의 시각이 스치듯  빠르게 지나가며 각자의 말을 내뱉는다. 그 수많은 발화와 언어의 가닥이  꼬이고 꼬여 만들어 낸 질문. 곰비임비 흐르는 사건이 쌓이고 쌓여 건축된 탑. 그것이 '훈자'이며 나머지 한강의 소설이다. 한강은 평범하게 순행적으로 흐르는 구성보다는 역순행적인 구성을 좋아한다. 그것이 한강을 잘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구성이기도 할테고.



앞의 소설들은 '인간'을 그린 것이라면 뒤의 소설 두 개, '파란 돌'과 '노랑무늬영원'은 여성을 그린 소설 같다. 여성이라기보다 연인, 사랑을 그렸달까. 나는 이 소설 두 개를 근 한 달 동안 읽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읽고 난 지금 왜 그랬을까 의문스럽다. 이 소설 두 개는 [노랑무늬영원]의 소설들 중 어떤 것보다도 재밌다. 재밌으면서도 잔잔하고, 잔잔하면서도 애달프다. 그래서 재밌다. '파란 돌'은 읽으면 설레게 되는 소설이고 '노랑무늬영원'은 침묵하게 되는 소설이다. '파란 돌'은 막 피어나는, 조심스럽고 애틋한 사랑이고 '노랑무늬영원'은 지칠대로 지치고 힘들대로 힘들어 서로가 지겨워진 막바지의 사랑이다. '파란 돌'은 시작이고 '노랑무늬영원'은 끝이다. 그러나 정작 죽음은 '파란 돌'에 있다. '파란 돌'에서 파란 돌은 곧 생명이지만 남자는 죽음을 맞는다. 남자는 혈우병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혈관이 터지는 통에 조심히 살아가야했다. 그래서 남자는 인생 자체가 조심스러운 남자였다. 여자를 만나고, 좋아하게 된 후로도 조심스러웠다. 여자도 남자를 조심스레 대했다. '파란 돌'은 조심스러운 사랑의 일련의 기록이다. 남자는 뇌에 피가 고여 죽은 채로 발견된다.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였다. 한강이 야속했다. 그를 왜 죽였나요. 살려서 여자와 함께 있는 장면을 보여주시지. '노랑무늬영원'의 여인은 검정 개를 피하려다 차가 전복했다. 그림을 그렸던 여인은 왼손을 못 쓰게 되었고 덩달아 오른손마저 고장났다. 여인은 몸을 회복하는 이 년 동안 마음을 잃었다. 더 정확히는, 情을 잃었고 사랑을 잃었다. 남편은 여인이 지겨워졌고, 그만큼 여인도 남편이 지겨워졌다. '노랑무늬영원'도 조심스러운 사랑이다. 다만 언제 깨질지 알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조심스러움이다. 그런까 사랑이 없는 조심스러움이다. 사랑 없는 사랑을 지속해나가려니 여인과 남편은 서로를 경멸하게 되고 미워하게 된다. 아니 그것이 미움의 감정일까? 아니지. 미움이 아니지. 



[노랑무늬영원]은 한강이다. 실레의 여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과 같은 소설이다. 



그러니까,



살아가야하는 소설이다.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막상 당신에게 가지 않자, 깊기만 하던 가슴의 통증이 마치 넓게 도려내어진 듯 슴벅거려 더욱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한 달 만에 다시 당신을 찾았을 때 나는 얼마간 체념한 채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습니다. 내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선을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토록 내 마음을 괴롭혔던 그 사람인지, 할 수 있다면 나를 단번에 실망시킬 구석을 찾아내 그 이상한 고통을 통째로 들어내고 싶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어디가, 아팠니?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이 가슴으로 올라왔습니다. 가슴뼈 사이 오목한 곳, 어떤 장기도 없는, 그렇게 아파보기 전에는 그런 장소가 몸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곳이었습니다. 당신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을 뻗어 내 손을 가볍게 쥐었습니다. 담담하게, 무언가를 위로하듯이.

격렬한 비참함과 환희가 동시에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 혼란한 순간 내가 희미하게 깨달은 것은, 그 모든 고통이 아마도 당신을 통해서만 달래어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강, 파란 돌 '노랑무늬영원' 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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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2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4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4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13-01-0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강은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이진님 때문에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근데 왜 우리동네 도서관에 한강의 작품은 단 한 권도 없는 걸까요...............?

이진 2013-01-04 00:14   좋아요 0 | URL
한강은 동네 도서관에서 취급할 정도의 인지도는 없다고 봅니다.
이쪽에서야 대단한 문인이지만 아직 세상에 나가면...
친구들에게 한강 아냐고 물어보아 소설가 한강? 알지알지, 하는 답변 들을 수 있을까요...

댈러웨이 2013-01-0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고로 <노랑무늬영원>의 계절이네요. <희랍어시간>으로 고생을 많이 해서 한강 작가 엄두가 안 났었는데 이 단편집은 추천이 많아 기대 만빵. 처음엔 반응이 좀 엇갈리는가 싶었는데 제가 잘못 알았나봐요.

소이진님, 멋지게 새해를 시작했네요! 올해 말에는 소이진님이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생각하니 긴장도 되고 그래요. 그리고 숙제. 시제는 '인어'. 안녕 소이진님. (쑝~) 아, 실레의 그림에서 태양은 제 눈에 보이지도 않았어요. --;

이진 2013-01-04 00:17   좋아요 0 | URL
<노랑무늬영원>의 시즌이죠? 저는 아마 댈러웨이님과는 다른 의미로 <희랍어시간>에서 고생을 했을 겁니다. 글이 겉돌아서 혼났어요. 실망을 좀 했는데 그건 아마 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한 번 더 읽으려구요. 어쨌든 아무리 실망을 했어도 좋은 작가는 좋은 작가입니다. 한강 좋죠... 히히 서울예대 희망하는 것도 순전히 한강한테 배우려고... 근데 막상 가면 윤성희 작가님께 이년 내내 배울 것 같습니다. 아... 고민이군요.(순 김칫국.... ㅠㅠㅠㅠㅠㅠ)

꺄, 숙제! '인어'! 토요일까지 합평 소설을 써야하는데, 그걸 완료해내고, 아차 오늘 하나를 쓸 예정이니, 그 두개를 완료해내고 써낼게요. 다음주엔 서울에 가는데 서울가서 써야겠네요. 후후... '인어'라... 아! 제 프로필 보시고 낸 것인가요!!! ㅋㅋㅋ 인어는 왜 다 여자인가. 이거 김혜순 시인 시 제목인데, 이걸로 소설을 써봐도 괜찮을 것 같네요. 굳굳.

사실... 저도 그림 해설 보고 태양이 있구나... 아... 있구나... 태양이 있었구나... 헤헤...

마녀고양이 2013-01-0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은 한 살 나이 먹었을 뿐인데,
글은 열 살 정도 나이 먹은 듯이, 어쩜 이리 멋진지요..... 와, 물 흐르듯이 정신없이 페이퍼를 읽었답니다.

푸른 돌은 설레는, 노랑무늬영원은 침묵하는 글이군요.
짧은 이 한 줄로 저는 충분한 느낌을 받습니다. 한강이라는 작가, 섬님의 페이퍼에 이어 계속 유혹하네요.
인용해주신 문구들도 너무 맘에 드네요.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다.........

소이진님, 우리 그렇게 살아요. 힘들어도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도록.... 그렇게요.
즐겁고 평안하고 건강한 새해 되시구요.

이진 2013-01-04 00:20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많이 부족한 리뷰입니다. ㅎㅎ
달여우님의 탄탄한 글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어요.

읽어보신다면 정말 그런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저는 평론가들처럼 치장하지 않고 그대로 단어로 옮겼어요. (이 문장은... 그러니까 평론가들보다 뛰어나다, 하는 식으로 읽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파란돌'은 정말 설레요. 연애소설은 아닌데, 연애소설보다 더 설렌다니까요.
'노랑무늬영원'은 침묵하는 글이지만, 여기도 사실 분홍빛이 있어요. 이 소설도 설레는 면이 있다니까요.
한강은... 참 매력적인 작갑니다.

우리 몸은 다 타도... 심장은 꼭 남아서 끓는 한해! 그런 힘찬 새해 보내요.
달여우님 파이팅! 나도 파이팅 ㅎㅎ 새해엔 건강하세요~

비로그인 2013-01-02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모바일로 로그인이 되네요
이런 글을 새벽으로 쓰시다니요
겸손이 끝을 달리십니다아

이진 2013-01-04 00:20   좋아요 0 | URL
유다다님 어서 글을 쓰시지요...
소설을 쓰시란 말입니다.
소설 아주 잘 쓰시더니 ㅠㅠㅠㅠㅠ

프레이야 2013-01-03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소이진님의 노랑무늬영원!
실레의 그림 중 왼쪽에서 두번째 나무, 그게 한강 같아요.
채식주의자, 중 거꾸로 박혀있던 불꽃나무의 이미지 같기도 하고. 여린 듯 강한.
아무래도 이 책을 봐야겠다는 강렬한 유혹이 활활~~~

이진 2013-01-04 00:22   좋아요 0 | URL
드디어! 드디어 올렸습니다 ㅎㅎ
젠장, 제가 그걸 생각 못했군요.
프레이야님 말이 맞아요.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바로 두번째 나무...그러니까 한강이죠.
어서 읽으십시오... 댈러웨님 말처럼 <노랑무늬영원>의 계절아니겠습니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