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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을 오래 하고 글과도 멀어졌다.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2016년이었던가. 책을 읽는 대신 이런저런 일을 했다. 국어 학원에서 강사 생활을 했으며 각종 대외활동에 참여했다. 한때는 농구에 빠져서 대한체육회 대학생 기자단으로 활동하기까지 했는데 그 덕에 진천 선수촌에도 가 봤다. 세 번 정도 방문했는데 갈 때마다 선수 식당에 들러 턱이 빠져라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신들의 만찬이 있다면 분명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니다. 고백건대, 그냥 놀았다. 하필 코로나가 겹치다 보니 눈 감았다 뜨니 일 년, 이 년이 훌쩍 지나갔다. 어디 제대로 놀러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시간을 썩히는 날이 늘었다. 설상가상으로 영화도 잘 안 보게 됐고 집에서 뭘 했더라. 게임을 했던가. 드라마를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연애도 했다. 지금은 헤어졌지만 코로나가 퍼진 땅에서 연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년 드디어 복학을 했다. 호기롭게도 소설 창작 수업을 신청했다. 글을 얼마 만에 써 보는 거야… 햇수로 치면 6년? 7년? 한유주 작가님이 수업을 진행하셔서 작가님의 책을 샀다. 도저히 읽을 수가 없어 첫 장을 펴고 포기하는 일을 두세 차례 반복했다(사실 지금까지도 성공하지 못했다.) 학기 초부터 머릿속에서 쓰고 싶은 이야기는 있었다. 굿을 하는 박수 무당이 떠나질 않았고, 관련된 내용을 찾다 보니 어쩌다 세월호 이야기까지 쓰고 싶었다. 학교 광장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있는데 겨우내 가지마다 노란 리본이 묶여 흩날렸다. 정말이지, 너무 큰 이야기 아닌가. 결국 망쳤다. 합평 일이 당도했는데도 겨우 네 쪽밖에 소설을 쓰지 못했고, 민망하게도 그 네 쪽의 소설만으로 합평을 받았다. 그때 소설의 도입부로 가져왔던 그림이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었다. 그래도 나름… 나는 마음에 들었다. 고작 네 쪽이지만 쓰는 게 어찌나 힘들고 고통스럽던지. 일전에 '혼불'의 최명희 작가님이 당신께서는 바위에 손가락으로 글을 새기는 심정으로 쓴다고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첫 단락만 가져와 볼까. 글자는 작게, 9 포인트로.

  장 폴 마라는 성인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독재자에 가까웠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공포 정치를 선도했다. 과격한 숙청으로 온건파의 반발을 산 마라는 결국 집 욕조에서 피살당했다. 피부병을 앓았으므로 주로 치료약을 섞은 물에 몸을 담근 채 업무를 봤고, 지저분한 욕실에 몸을 누인 채 한 여인이 들고 온 조리용 식칼에 심장을 찔렸다. 여인은 열려있던 문을 통해 들어왔다. 인민과의 소통을 표방했던 마라는 집의 문을 항상 열어두었다. 여인은 곧 단두대에 섰고, 마라는 종내 살이 문드러져 탈락할 때까지 천천히 썩어갔다.
  동료이자 친구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최후를 그림으로 남겼다. 그림 안에서 마라는 평온히 눈을 감았다. 심한 가려움증으로 부르트고, 오랜 시간 물에 불어 푸르렀을 마라의 살갗은 도자기의 그것처럼 하얗고 매끄러웠다. 반신욕을 하듯, 정돈된 욕실에서 저항과 부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이 마라는 가만히 몸을 늘어뜨렸다. 그림 바깥을 향해 수평으로 기울어진 얼굴, 입꼬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옅은 미소가 어렸다. 죽음을 예견하고 스스로 십자가의 오른, 기꺼이 못 박는 자들에게 손과 발을 내어준…. 수천의 목숨을 앗아간 한 생애 위로 그리스도의 성채가 비치고 있었다.
  이제 그림 앞의 너, 갈빛으로 은은히 내리는 서광에 눈을 빼앗긴 채 마라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다. 그림 한 귀퉁이로부터 쏟아지는 조광이 마라의 전신을 감싸고 있다. 너는 의아하다. 마라는 구원받은 것일까? 쇄골 아래 깊은 자상을 남긴 가해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흰 광목천을 순식간에 적실 만한 핏물로써 모든 죄가 씻겨나간 것일까? 마라는 그렇게 믿었기에 저토록 순응하는 얼굴로 자기의 임종을 맞을 수 있었을까, 너는 마라의 감은 눈꺼풀 너머로 묻는다.

합평에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작가님이 출석부대로 이름을 호명하자 모두가 머뭇거리더니 '어렵다'는 평을 했다. 할머니를 주제로 소설을 써왔던 남자 후배는 첫 단락을 읽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전체를 못 읽었다고 고백했다. 다시 읽어보니 과했던 측면이 있는 것도 같다. 단어도 그렇고 난삽한 측면도 있다. 저러니까 열 페이지를 못 채웠지. 저 첫 단락을 쓰는 데에만 일주일이 걸렸다. 결국 최종본 기한을 무려 이틀이나 넘겨, 성적 발표일 직전 새벽에야 메일로 보내드렸다. 처음에 고안했던 굿으로써 영혼을 달래는, 한 편의 무가 같은 소설은 온데간데 없고… 실망스러웠다. 다른 수업은 어땠더라. 다 국문과 수업이라 기억도 안 난다.


나는 소설은 더는 안 되나 보다, 하는 생각은 들었으나 이상하게 단념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하면 쓸 수 있겠는데? 하는 이상한 야심 같은 게 찾아왔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니 너무 재밌는 거다. 한 학기 동안 강독한 소설 중 정이현 작가의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가 좋았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풍금이 있던 자리'도 생각이 나고… 좋았던 구절은,

그런데 어떻게 페이스북에서 절 찾을 생각을 하신 거예요?

나중에 내가 물었을 때 조은자 여사는 여전히 친절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21세기잖니.

본성이 성실한 학생은 못 되다 보니 강독 소설도 미루고 미루다가 수업을 앞두고서야 읽곤 했다. 아직 코로나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 강의실은 대체로 비어 있었다. 대부분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는 탓이었다. 빈 강의실에 들어가서, 날이 추우니 히터를 틀고 소설을 읽었다. 그때 강의실에 같이 있던 동기와는, 강의실에 같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겠지만 급속도로 친해졌다. 정이현의 소설뿐 아니라 강화길, 김멜라 작가의 소설도 읽었고… 이것들은 그렇게까지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미는 있었고….


여름 방학에는 아무래도 미리 소설을 써둬야겠다는 생각에 같은 과 사람들과 소설 스터디를 결성했다. 그래봐야 세 명밖에 없는 초라한 스터디였지만 나름 철저히 규칙을 정해 진행했다. 이번엔 뭘 쓸까 고민하던 찰나 휴대전화 사진 갤러리를 뒤적거리다 몇 년 전 영국에서 찍은 정체불명의 동상 몇 점을 발견했다. 상체는 땅에 묻혀 있는 형태였고, 새벽에 버스를 잘못 내린 탓에 우연히 지나치게 된 동상이었다. 소설적으로 건드릴 만하겠는데, 싶어서 당장에 쓰기 시작했다. 아침 열 시부터 인적 드문 스타벅스 카페를 찾아가 오전 내, 오후 내 써서 반 장을 채웠다. 그게 끝이었다. 방학에는 지나칠 정도로 많이 놀았다. 누워 있거나 영화를 보거나,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밖으로 나다녔다. 내 소설 제출일에 임박해서는 코로나에 걸렸다. 코로나를 핑계로 소설 스터디는 유야무야됐다.


또 무슨 호기였는지 이 학기에는 무려 소설 수업 두 개에 시 창작 수업 하나를 신청했다. 창작 수업이 무려 세 개. 강의실에 같이 있던 동기는, 이제는 급속도로 친해져버린 동기가 내게 미쳤냐고 물었다. 한 학기에 소설 수업 하나만 들어도 힘든데 두 개나 듣고, 거기에다가 시 수업까지 듣는다고? 직전 학기에 소설 네 쪽을 써낸 네가? 하지만 왠지 두렵지가 않았다. 나에겐 방학 동안 써둔 반 페이지의 소설 첫 단락이 있었으니까. 충분히 가능하겠는데? 내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하나는 염승숙 작가님, 하나는 백수린 작가님이었다. 이제와 생각하지만 언제 저런 작가님들께 수업을 들어보겠는가. 대학생으로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힘들긴 했어도 행복한 한 학기였다. 나, 다시 소설 읽는 재미를 알아버렸다. 소설 수업은 학생들이 소설 쓸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초반에는 기성 작가 작품을 강독하는 형식이다. 수업을 두 개나 듣다 보니 한 주에 단편 소설만 네 다섯 편을 읽고 감상을 써 가야 했다. 그때는 참 많다고 생각했는데, 많기도 많은 것이 학교 수업에 다른 과제도 있으니 소설 한 편 읽는 시간, 마음 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주혜, 김지연, 최은미… 또 누구더라. 소설을 읽으면서 울기도 많이 울고, 웃기도 많이 웃었다. 좋은 소설을 읽으니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박탈감? 허탈감? 도 들었다. 이기호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특히 그랬는데, 이런 사람이 작가를 하는구나 싶었다. 글도 결국은 재능의 문제 아니겠는가. 문예창작 수업을 들으면서 늘 했던 생각이, 글은 결코 배워서는 잘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날고 기던 사람이 더 뛰어난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게 일 년 동안 내린 결론이었다. 실제로 등단 작가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철학과라든가 사회과학 전공이라든가 여타 학문 전공생들도 많다. 소설 수업에도 영화과 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얘기를 나눠본 결과 소설 읽고 쓰는 게 좋아서 나처럼 소설 수업을 두 개나 듣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도 소설 제출일이 딱 붙어 있지는 않았다. 하나는 개천절까지, 하나는 12월 초까지만 내면 됐다. 지난번에 촉박하게 시작해 피를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이 주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집에서는 글을 쓰지 않으니 매일 학교가 파하면 스터디 카페로 가서 밤을 새거나, 새벽까지 글을 썼다. 소설을 쓰면서 내가 세운 원칙이 있었다. 주어X 대명사X 문장은 짧게. 서사를 완전히 배제한, 이미지로만 구성된 글을 쓰고 싶었다. 그간 소설을 쓰면서 가장 힘들어 했던 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였는데, 내가 만든 이야기는 내가 읽어도 구차하고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잘하는 묘사로만, 이야기를 제거한 채 선보이고 싶었다. 저번 학기에는 그러다 실패했다면 이번에는 그래도 7페이지 글을 써냈다. 내가 읽어도 글이 하도 어려웠어서 짧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친구들에게 시험 삼아 읽혀본 결과 모두가 어렵지만, 그래도 읽을 만하다는 평을 내렸다.


문제의 합평일. 나는 왠지 모를 기대감에 휩싸여 있었다. 다들 너무 좋았다고 하면 어떡하지? 내 멋진 글에 놀라 반하면 어떡하지? 그런데 웬걸, 그날 합평은 활발했는데 내 소설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한 학우가 이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나? 질문을 던졌고 다른 누군가 이건 소설이라고 답변하면서 열기가 더해갔다. 염승숙 작가님께서 합평을 마무리하셨는데 먼저는 불평을 토로하셨다. 읽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면서. 그래도 작가가 단어 하나하나 고심하면서 쓴 게 보인다고, 내가 고생한 점을 알아주셔서 감사했다. 물론 고쳐야 할 지점이 태산이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단락을 가져와 볼까.


육지를 향해 파고든 깊은 포물선, 선이 꺾이는 중간점에서 비켜선 곳에 뗏목이 있었다. 굵직한 대나무를 노끈으로 엮는 형태였다. 모래톱 위로 평행선을 그으며 다가갔다. 가는 모래알이 신발의 모양대로 푹푹 파였다. 수분이 날아간 대나무가 질긴 속성을 잃어버리고 깨어졌다. 길게 튿어진 상처 안쪽으로 빈 공간이 들여다보였다. 닳아버린 노끈이 해조류에 뒤섞여 발에 차였다. 돛대가 꺾이고 노의 넓은 면이 갈라져 동력을 잃은 상태였다. 더는 그것을 뗏목이라 할 수 없었다. 나무들의 묶음, 이라 명명하는 것이 나았다.

밀물이 거세어지더니 무릎 아래로 바닷물이 빠르게 다가왔다. 아주 낮은 키의 해일이었다. 들이치는 물살이 부서지기도 전에 파도가 겹쳐 붙었다. 하얀 포말이 바위 틈을 파고들어 해안을 순식간에 에워쌌다. 젖지 않으려 황급히 뗏목 위로 발을 디뎠다. 물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밀려들었다.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몸이 양옆으로 흔들렸다. 단박에 가파른 경사도로 바닥이 기울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져 어깨를 찧었다. 침구에 실려 몸뚱어리를 몇 차례 벽에 부딪쳤다.


그 무렵에는 시도 썼다. 물론 합평 수업에 내야 하기에 썼는데, 연애시를 쓰고 싶어서 썼다. 어쩌면 내가 소설보다는 시에 더 적합한 문장을 갖고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작품을 가장 먼저 읽어주는 친구도 인정했고, 교수님도 과한 부분만 덜어대면 재밌게 잘 읽었다고 말씀해주셨다. 사실 수업이 아니면, 과제 마감 기한이 주어져 있지 않으면 글을 쓰지는 않는다. 방학을 맞아 기업 실습을 진행하고 있고, 이제는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또 언제 글을 쓰게 될까. 글을 쓰지는 않아도 여전히 읽고는 있다. 글 읽는 습관이 생긴 건 좋다. 어제는 구병모 작가의 '파과'를 읽었다. 이제 오한기 작가의 '산책하기 좋은 날'을 읽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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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0 15: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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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6 1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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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아픔을 맛보지 못해서 그래. 조앤 롤링을 봐. 극한 고통의 나뭇가지 끝에 열매가 열리잖아. 네가 느끼는 갑갑함은 아직은 사치야. 자신이 처한 현실이야말로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지혜는 확신에 차 그렇게 말하곤 했다. 현실적 고통 없는 지루함. 그래서 인형 작업에도 이렇게 진척이 없는 걸까? 나른한 한 나절,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시든 난꽃의 대궁을 잘라봐도, 더께 낀 창틀을 닦아 봐도, 한껏 미뤄둔 작업대에 앉아 봐도 갑갑함은 언제나 친구처럼 가까이 있었다. 어쩌다 손재주는 있어, 종이 인형을 만들기는 하지만 죽도록 다 하는 열정이 아니었으므로 완전한 프로가 되기도 힘들었다. 허영일 뿐이었다. 뭔가를 부여잡고 제 살아있음을 증명하고픈 허욕의 뿌리이자 부질없는 욕망일 뿐이었다.

(…)

  아무리 자식이라도 너무 엎어지진 마. 무릇, 관계는 담백하고 부담이 없어야 오래간다. 부모 자식 간인들 다르겠니.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있잖아. 고슴도치가 제 날카로운 털은 생각하지 않고 사랑스럽다고 서로 가까이 가 봐. 생채기만 나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오래 갈 수 있어. 독사 스무 마리 쯤 길들이는 마음으로 견뎌내야 해. 즐기는 날보다 치욕을 견디는 날이 많은 이유가 뭐겠니. 갈망하는 관계는 오래 못 가. 누군가 말했잖아. 타인이야말로 진정한 감옥이라고. 가족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니? 사무침이 없으면 원망도 없잖아. 누가 뭐래도 그 말은 진리야. 지혜에게 횡설수설 떠들어댔지만 그것들은 모두 여자 스스로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왼손엔 달강꽃」 229-230, 241,242 p)

 

 

 

  인연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관계에서 오는 하나의 축복일 것이다. 다른 말로, 모든 지속되는 관계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 인연이란 것이 남아 있다면 단연 알라딘일 것이다. 중학 시절, 멋 모르고 책과 사랑에 빠져 모자란 글로 생각을 써내려가고 남들이 SNS를 하듯 서재를 휘젓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댓글을 주고받으며 교류했던 이 공간. 수 년을 함께 하며 수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고 과분하게도 선물까지 받아왔다. 글을 배우겠노라 주저없이 선택할 수 있게 한 기반이자 이유 중 하나가 이곳이었을 정도니,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대학에 올라 다른 인간 관계가 중첩되고,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하려다보니 자연히 발길이 뜸해졌다. 그즈음 나는 영화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대학 방송국 활동을 하며 글과는 무관한 생활에 시간을 주로 들였다. 띄엄띄엄 쓰던 일기마저도 완전히 쓰지 않게 되었을 무렵, 서재 활동도 함께 그만두었다. 의지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순리적인 것이라고 할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와 이별을 맞게 되듯, 그런 이별이 속절없이 있듯이 나는 이곳과 멀어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더이상 조용하고 감상적이던 문학 청년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글을 지우고 난 나, 나의 삶은 아름다울 리 없었다. 어떠한 흔들림도, 마음속 울림도 느끼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과제를 위한 글, 독서만으로 할당량을 채우듯 읽고 썼을 뿐이었다. 한 번 놓으니 다시 끈을 잡으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나태해졌고, 무덤덤해졌으며, 감정에 무관심해졌다. 비극의 파편 같은 순간이 찾아와도, 다리가 휘청거리는 무게가 덮쳐와도 나는 펜을 들지 않았다. 노력없이, 고통없이 그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고 덮어버렸다. 그렇게 남들처럼, 요즘 세대의 시류에 편승한 채,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는 버스 안의 승객이 된 채, 그렇게 흘러갔다.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무작정 교육 봉사를 신청하고, 동아리 활동과 공모전에 열중했다. 뚜렷한 목표 의식이나 열정, 마음 없이 흘러가듯 그렇게. 스스로도 이런 활동은, 이렇게 살아가는 삶은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자주 그런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당장의 피로가 더 무거웠으므로, 앞으로 삶의 방향보다 내일의 길을 걸어가는 일이 더 급하고 어려워보였으므로 나는 무시했다. 자각과 성찰을 거부했다. 그런 나를 이 책은 꾸짖었다. 아무 감정 없이, 성찰도 없이, 급급하게 살아가는 것은 부질없는 욕망일 뿐이라고. 너에게 의미를 주지 못하는 하루는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래, 어쩌면 이 책은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인연을 잊고 살던 나에게, 글의 의미와 하루의 가치를 무시하며 흘려보낸 나에게 질책처럼, 계언처럼, 그리고 계시처럼 울려 왔다. 감사히 책을 받아들고 기쁜 마음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책을 읽었다. 한강을 너무도 좋아하는 내게 혹 맞지 않을까 염려하시던 마음이 남아 더 애틋하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출퇴근길에 지하철에 앉아서, 근무하는 동안 틈틈이 읽어내려간 소설은 재미있었다. 한 편 한 편의 기록을 모아 리뷰를 쓸까 하다, 이 마음은 리뷰로 남기면 안 될 것 같아 페이퍼를 쓰게 됐다.


  이 소설들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작가의 시선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인간이라는 범주, 넓게는 종족을 결코 예단하지 않는 작가의 염세적이라 할 만한 시선을. 우리가 사람들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곧 보통 혹은 평범이라는 단어와 연결된다. 이데아적 형상, 표상이 인간 전체를 대표한다. 그것은 아주 건강하고 이상적인 형체다. 이것이 하나의 거대한 오류라는 사실은 역설하지 않아도 자명할 것이다. 이 사회적으로 만연한 통념을 작가는 강하게, 그러나 아프지 않게 파고든다. 옷이 젖어가듯 조용히 인간 무리에 스미어든다. 그 안에서 객체를 이루고 있는 개체 하나하나를 일일히 만져본다. 얼굴을 들여다보고, 손등을 쓸어보고,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렇게 작가는 발견한다. 어긋나고 흐트러진 지점을. '보통'이라 칭해지는 이들이 넘겨짚고 지나치기 쉬운 그 지점을. 타인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아 묵묵히 숨기고 살아가던, 입밖으로 꺼내기 민망하고 또 추레하여 속으로 참고 참았던 결점을. 통점처럼 진피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자꾸만 우리의 볼을 붉히던 부끄러운 그 통각을. 그것이 어떻게 발화하였는지,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는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집요하고도 무덤하게 뒤쫓는다. 이 건조한 시선이 오히려 무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마치 인간 모두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일상과 생각을 모두 파악당한 것 같은 느낌이어서.


  정통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단편들을 읽고 있으면 어쩐지 나 자신까지도 돌아보게 된다. 소설들에서 사회의 어긋난 지점, 일반적이지 않은 부분 혹은 추악한 지점은 주로 객체이고 누군가 그것을 관찰하고 서술하는 형식으로 쓰인다. 관찰자는 단어 그대로 관조적인 시각만을 가진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단지 조금의 짜증과 본능만을 가진 채. 자연히 우리도 이 사회의 틈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렇게 인도되는 것이다. 주변의 사건을 바라보듯, 벌어진 틈새로 자행되는 사회의 민낯을 직시하는 것이다. 내가 저 주인공은 아니었는지, 객체로서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어떤 위치이든 바뀔 수 있는 것은 없다. 여전히 우리는 내키지 않는 섹스를 하고, 실행될 수 없는 가정만을 하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다. 냉정하고 또 염세적인 시선으로 작가는 사회를 통찰한다.


  

  



  인연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축복일 것이다. 달빛 같은 축복의 빛살 아래서 따스하게 한 겨울 보낸다.


  저번 주말은 가족이 총출동하여 일본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할아버지 팔순을 기념한 가족 여행이었다. 아이들이 많아 번잡스럽고 정신 없었지만 이렇게 다같이 모여 어딘가로 떠날 수 있다는 것, 다투지 않고 마음을 모아 시간을 보낸다는 것, 참으로 행복하고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이 더 커 보였지만 할아버지도 재밌어하셨고. 나의 현재와 과거를 곱씹어보면 인간 관계만은 참으로 축복받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너무도 좋은 사람들만 내 곁에 있어왔고, 또 그들이 곁에 남아주었기 때문이다. 이곳 알라딘도 언제까지고 내 서재 한 켠 차지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힘들 때 언제든 와서 쉴 수 있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공간. 대나무숲.


  그렇게, 인연이라는 것은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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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1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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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1 0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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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저번 달엔가 꽤 긴 글을 썼는데 순식간에 그것들이 날아가버려서 다시 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여전히 책보다는 영화를 자주 접하는 요즘이다. 저번 학기에 시창작입문을 들었다면 이번 학기는 소설창작입문인데, 마지막 전 주까지 단편소설 한 편을 써서 제출해야 한다. 단편소설을 쓰겠다고 손을 번쩍 들긴 했지만 고백건대 단편 분량의 소설을 써 본 적이 없다. 써봐야 미니픽션. 나는 주로 소설보다는 시나 서평을 주로 써왔기 때문에 소설 쓰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너무 한강의 소설만 독파한 것 같아 도움을 얻고자 김중혁의 신간을 꺼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그의 소설집 [일 층, 지하 일 층]을 인상 깊게 읽었기에 기대가 컸다. 내 기억에 김중혁은 진지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내는 작가였다. 가볍다는 것은 깊이가 얕거나 하찮게 보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재치 있고 부드럽게 읽히도록 꾸며간다는 뜻이다. 




  경찰관님, 고통 같은 것은 말입니다. 절대 얼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십니까? 그게 다 어디 붙는지 아십니까? 알코올에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살에도 붙고, 조각조각 나서 뇌에도 붙고, 또 내보내려고 해도 손톱 발톱 그렇게 안 보이는 데 숨어살면서요, 조용히 있다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요, 제 뒤통수를 후려치고요, 그러는 겁니다.

  피존이 그렇게 말한 거야, 아니면 지금 자기가 취해서 혀가 꼬이는 거야?

  정윤이 규호의 눈을 들여다봤다. 규호의 눈은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규호가 고개를 숙이며 정윤의 눈을 피했다.

  맺힌다는 게 뭔지 알아?

  맺힌다고?

  아, 아니지, 피존 말투로 해야지. 흐, 미안, 정윤아, 다시 물어볼게.

  맺힌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 자, 여기 술잔을 잡아봅니다.

  규호가 헛손질을 하다가 겨우 술잔을 잡았다.

  여기에 왜 맺히는지 압니까? 이것은 온도 차이 때문입니다. 나는 차가운데, 바깥은 차갑지 않아서, 나는 아픈데, 바깥은 하나도 아프질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맺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요, 술을 마십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p.117-8




김중혁은 인간의 감정을 말로 정의하는 데 뛰어나다. 단어 하나를 사용하기 위해, 그 인물을 소설에 그려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쳤는지 소설의 한 대목만을 읽어도 알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은 굉장히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구성인데, 한 장소에서 인물들의 대사만으로 소설이 이루어진다. 비포 시리즈나, 작가주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알코올에 중독된 남자 규호와 그에 의해 불려나온 전 여자친구 정윤, 두 사람은 어느 밤 호프집에 앉아 있다. 자꾸만 술을 시키려고 하는 규호와 그를 막는 정윤. 정윤의 태도에는 규호를 대하는 피곤함이 녹아 있다.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정윤에게 규호는 알코올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피존씨 이야기를 꺼낸다. 전술한 대목에서 경찰관에게 읍소하는 목소리가 피존씨의 것이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뻔하지만 그래도, 고통을 감내하는 방법 중 한 가지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존재 이유가 될 지도 모르겠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를 견뎌낼 수 없으니. 너무나도 비참하고 외로운 몸뚱어리를 지탱해줄 마음이 없으니. 술이 내미는 가짜 팔의 포옹이라도 있어야 그나마 비틀거리며 일어설 수 있으니. 어쩌면 그 가짜 팔의 포옹이 진짜 팔의 포옹보다도 행복할 수 있으니.


김중혁의 장점 혹은 단점, 장단점을 넘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끝맺음이다. 전작들을 모두 읽어보지 못했지만 내가 읽은 몇 편의 단편 소설을 종합해보면 김중혁은 항상 이상한 지점에서 소설을 끝맺는다. 이상하다, 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소설을 더 전개시킬 수 있을 법한 곳에서 그는 으레 손을 뗀다. 이제 이야기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혔다 싶을 때, 그는 그 이야기를 독자에게 떠넘긴다. 떠넘긴다, 보다는 맡긴다, 고 하는 게 낫겠다. 김중혁의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오히려 힘이 더 드는 이유이다. 김중혁은 이제 대사의 힘을 완전히 깨달은 것 같다. 황정은이 대사를 다루는 것처럼 그는 대사를 다룬다. 아니 링클레이터 감독이 대사를 다루는 것처럼 그는 대사를 사용한다. 젊은 연인의 대사, 남자 고등학생의 대사, 포르노 업체 직원의 대사 등 모두가 몹시 현실적이다. 씨발, 개새끼야, 새끼야, 이것들은 남자 고등학생들의 대사이고, 씨발, 애무, 정액은 포르노 업체 사람들의 대사이다. 처음에는 솔직히 직설적인 대사들에 거부감이 들었다.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이번 소설집은 좀 갔다, 하고 책을 덮었다. 그런데 뭐랄까, 이게 김중혁이지 싶다. 펑키하다, 고 해야 할까. 적당한 단어가 갑자기 떠오르질 않는다. 그냥 말 그대로 젊은 작가. 발전해나갈 길이 창창한 작가. 데뷔한 지 꽤 되었으나 후가 더 기대되는 작가. 빨간책방에서도 좋고.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영화를 보다가 숨이 턱 막혀 가슴을 움켜쥐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이 있을 때 나는 그 영화를 사랑하게 된다. 올드보이가 그랬고, 밀양이 그랬다. 슬픔이 맺히고 맺혀 돌처럼 단단하게 변하여 그 돌이 진동하며 심장을 쿵쿵 내리치는 자학적인 고통. 그 고통이 명치 끄트머리에 마쳐오면 나는 몸을 내려놓고 휘둘릴 준비를 한다. 나를 또다시 주저앉게 한 영화, [그을린 사랑]이다. 


영화관에 너무 일찍 찾아가 카페에 가 눈을 붙였다. 잠이 깨고 나서도 노곤하여 영화를 보면서도 졸았다. 압구정이었고, 필름 상영이었다. 영화는, 어두운 화면으로 시작했다.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고 중년의 남자는 젊은 남매를 앞에 두고 앉아 무엇인가 이야기 중이다. 남매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이다. 어머니의 유언으로 남매에게는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생겼고, 없던 형이 생겼다. 그 둘을 찾아 편지를 전해주고, 그 후에야 자신을 제대로 장례하여 달라는 것이 어머니의 유언이었다. 영화는 이제 한 편의 스릴러, 추리극이 된다.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라고 칭해진 사람을 찾아 떠나는 여자의 모습과 그녀 어머니의 과거가 교차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사람에 사람을 거쳐 어머니의 고향에 다다르자 여자는 좀더 내밀한 어머니의 진실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진실이었다. 속으로 꼭꼭 다져 눌러두었을, 속을 그토록 헤집어 놓았을 어머니의 진실. 그 비극에 남매는 몸을 떨며 운다. 


그녀 어머니 나왈이 살았던 때는 레바논 분쟁이 한창이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나왈은 무슬림 남자와 사랑을 나눴고, 아이를 가졌다. 가족들의 반대로 나왈은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다. 발뒤꿈치에 점 세 개의 표식을 남기고 언젠가 너를 꼭 찾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바로 이 약속, 분쟁이라는 분노와 갈등, 그리고 어머니라는 이름의 사랑이 빚은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나아가 위에 보이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나왈은 집을 나와 학교에 다니던 중 떠나보냈던 아이를 찾아 무슬림 지역의 고아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나왈은 자신의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쓰고 버스에 오른다. 몽롱하게 졸고 있을 때 나왈이 탄 버스를 기독교 민병대가 습격한다. 모두가 죽고 나왈과 한 모녀만 남았을 때, 나왈은 감춰둔 십자가 목걸이를 꺼내보이며 자기는 기독교인이라고 소리친다. 민병대원 중 하나가 나왈을 버스에서 끌어내리던 중 나왈은 황황히 되돌아가 무슬림 여인이 안고 있던 아이를 내 아이, 라며 끌어당긴다. 주저하다 슬픈 눈으로 아이를 놓는 여인, 아이를 품에 안고 걸어나가는 나왈, 품에 안긴 채 엄마를 보며 절규하는 아이. 아이는 발버둥치다 결국 나왈에 품에서 벗어나 버스로 달려간다. 그 아이를 총으로 쏘는 민병대원. 그리고 나왈, 주저앉아 멍한 표정을 짓는 나왈. 영상의 강렬한 인상을 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모두가 떠나고 황량한 벌판에 홀로 주저앉아 저런 표정을 짓는 나왈을 보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녀가 앞으로 겪게 될 비극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밀도 있는 각본과 연출이 큰 공을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영상이 훌륭했다. 모래폭풍이 영상 전체를 뒤덮은 듯, 영상을 손으로 쓸면 뿌연 먼지가 조금 묻어날 듯한 영상미였다. 중동의 느낌, 몸을 사로잡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 이토록 그을린 운명, 그을린 사랑이 또 있을까. 역사가 빚은, 세상이 태워버린 너무나도 안타까운 약속에 관한, 사랑에 관한 영화.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그리스 비극이 떠오른다고 했다. 비극. 나왈의 삶은 그 자체로 비극이었다. 혼자 감당했다고 짐작조차 하기 힘든 비극적인 비극. 그녀는 위대한 여인이었다. 비극을 견뎌내고, 비극을 승화시킨 사랑의 여인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의 영화.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지, 하고 얼마전부터 생각해오던 게 있었다. 스토리보다는 촬영 구도나 연출 등에 초점에 맞춰진 생각이었다. 멋진 영화가 만들어질 것 같다고 혼자 즐거워하곤 했는데, 오늘 기대가 와장창 깨졌다. 김기덕 감독 때문이었다. 얼마전 고전문학 수업 중 교수님께서 김영임 명창이 부른 정선 아리랑을 틀어주셨다. 나는 시큰둥한 마음으로 그걸 듣다가 김영임 명창이 아리랑을 내지르는 부분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속에서 폭죽이 터져 그 연기가 밖으로 배출된 것이었다. 기숙사에 와서도 정선 아리랑을 계속 들었다. 김기덕 감독이 영화에서 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오늘에서야 영화를 보게 되었다. 웬걸, 내가 생각해오던 장면들이 영화에 모조리 담겨 있었다. 좌우대칭적인 구도, 한 곳을 오래 응시하는 카메라, 롱샷과 클로즈샷의 사용, 모든 것이 내 상상 속의, 기대 속에서만 품고 있던 것들이었다. 나는 내 것을 빼앗긴 듯 억울하면서도 영화의 훌륭함에 감탄했다. 내 생각이 이런 영화로 발현될 수 있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임권택의 [서편제]가 한국적인 영화였다면 이것은 동양적인 영화이다. [서편제]보다 더 한국적인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의 장면은 오로지 단 한 곳, 저수지 위를 부유하는 절에서만 이어진다. 절과, 절을 둘러싸고 있는 산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인물도 최소한이다. 노스님과 그 아래서 수행하는 승, 여자 이외의 몇몇뿐이다. 화선지 위에 잎을 내리는 난처럼 유려한 이야기이면서 아름답게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영화이다. 때로 그 여백이 지나치게 아름다워 심장을 벨 듯 날카롭게 다가올 때도 있다. 누군가 이창동을 작가라고 말했고 김기덕을 화가라고 표현했다. 김기덕의 작품을 아직 둘밖에는 보지 못했지만 이 작품으로 나는 이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박찬욱의 영상이 화려하다면 김기덕의 영상은 묵직하다. 묵직하게 눈으로 기어들어와 마음에 큰 파동을 주고서야 배출된다. 고양이의 꼬리를 붓 삼아 반야심경을 써내려가는 노스님과 그것을 칼로 파내는 승의 모습은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김기덕 감독은 할당된 두 시간으로 완벽하게 인생이라는 것을 그려냈다. 산다는 건, 그래, 이런 거라고 나직하게 들려준다. 좀더 인생을 더 살아낸 뒤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 그때의 느낌은 어떠할까. 지금처럼 여운에 젖어 감상적으로만 영화를 바라보지는 않을 것 같다. 가슴을 움켜쥐고는 그 승의 인생에 공감하고 있지 않을까. 산다는 건, 그래, 그런 거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고 있지 않을까. 그때의 울림은 돌멩이가 전하는 파동이 아니라 바윗덩이가 만들어내는 커다란 떨림이겠지. 몸 속 군데군데로 침투하는 떨림의 파도를 그때는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아니 쭉 밤이었다. 영화를 찍으려는 사람을 두고 소설을 써볼까 한다. 그를 어떻게 만나야 할까. 




그가 다가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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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10-2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소이진님 보면 소이진님이 떠올라야 하는데 자꾸 변요한이 떠올라가지고.. 그런데 이상하게 육룡이 나르샤에 땅새가 나오면 또 우와..잘생겼다..하면서 소이진님이 떠오르고..^^ 가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아요. 분명 미생볼 때는 안 그랬는데...

소이진님, 어디야, 나와라, 오바. 빨리 나와..처들어간다..

보슬비 2015-10-2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요한 하면 소이진 생각하는 사람. 저도 추가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어쩌면 사람이란 상처로써 지탱되고 상처가 있으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살아간다는 건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고, 다른 상처를 몸 어딘가에 새김으로써 이전에 자신을 괴롭히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론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상처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 상처를 우리 몸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휘게 한다. 마치 식물의 줄기처럼 여리게 줄 서 있는 자그마한 상처들을 짓누르면서 삶의 전진을 더디게 만드는 것이다. ‘다르마 2치료의 사람들은 모두가 삶의 휘어짐을 경험했거나 겪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삶이 버겁기만 하다. 그들의 상처를 형성한 것은 가까운 이의 죽음이다. 아들이 죽은 후로 꿈에서조차 아들을 만나볼 수 없었다고 고백하며 울음을 터뜨린 여자, 어린 나이의 손자가 살해당하고 그 아이의 어미이자 자신의 딸도 암으로 타계한 노파. 이들의 고통을 달래주는 것은 약물도, 정신과 치료도 아닌 그저 명상이었다. 내쉬고 들이마시는 숨을 코끝으로 혹은 폐로 느끼는 것, 디디고 있는 바닥의 느낌을 발바닥으로 알아채는 것,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깨닫는 것. 얼핏 보기에 하잘것없어 보이는 간단한 행위를 하는 것이 그들에게 놀라운 위로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명상 치료를 받기 위해 방 안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유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낯익었고 그들이 내뱉는 고통의 언어가 가슴에 비수로 꽂히는 듯했다. 사실 내 삶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휘어진 삶이었다. 고통스러워하거나 내색하지는 않지만 얼마간, 남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휘어져 있음을 알고 있다.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도 머리 위에 얹힌 짐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엇나가지도 특별히 바르지도 않은 삶을 살아왔고 그것이 내 휘어짐에 비하면 꽤 준수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고백건대, 내게 충만하다고 생각했던 믿음이라는 것이 완전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믿음이라는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닌 그것이 내게 수용되었을 때의 완전함을 일컫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의 주인공 싯다르타가 느꼈던 갈증과 같은 것을 나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내 정신 언저리를 깨운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었다. 얽매이지 말라는, 모든 존재를 소중히 대하라는 교리를 공부하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그토록 배척하던 불교에 호의를 가지기 시작했으니. 불교의 가르침이란 영상에도 나왔듯 시간을 초월하고 현세에도 미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상처 전부는 시간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 상처란 곧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새겨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그려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려고 서두르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한층 안정되고 편안하다고 불교는 가르치고 있다. 소설 [싯다르타]의 싯다르타가 마지막에 도달한, 시간을 초월하고 자유를 품은 그 깨달음의 상태가 불교의 이상향인 것이다. 우리 삶이 고통과 상처, 휘어짐에서 벗어나 올곧게 서기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누려왔던 것의 일부를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유의 상태는 달콤할 것이다. 명상 수업이 끝난 후 그들이 눈물로 상처를 씻어내고 포옹으로 따듯함을 나누는 모습에서 나는 큰 위로를 느꼈다. 어쩌면 치유라는 것은 덜어내는 행위가 아닐까. 너를, 우리를, 그리고 나까지도.



















이 순간에 싯다르타는 운명과 싸우기를 그치고 번뇌를 잊었다. 그의 얼굴에는 일체 아욕의 기반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완성을 이루는 경지를 터득한 기쁨의 꽃이 피었다. 거기에는 생기의 강물과 그리고 생명의 흐름과 일체가 되었다는 환희의 꽃이 피어 있었다. 그 얼굴에는 남과도 희노를 같이 할 수 있을뿐더러 흐름에 몸을 맡겨 통일에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청량한 예지의 꽃이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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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5-05-26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싯다르타 너무 좋죠 ㅋ 소이진님 오랜만이에요 수능은 잘 보셨나요라고 묻고 싶지만(?) 이미 대학생이시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니이기 때문에 굳이 물어 보지는 않겠습니다. ㅋㅋㅋ
전 여전히 공부 중이고 ㅋ 아예 신림동이라는 고시촌에 들어와서 많은 고시생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글을 올린 걸 보니 참 좋군요 ㅋㅋㅋㅋ 반가워요 ㅋ

페크pek0501 2015-05-27 14:57   좋아요 0 | URL
루쉰 님도 오랜만이에요. 고시촌에 계시는군요. 가끔이라도 소식을 접할 수 있길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페크pek0501 2015-05-27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 님이 이젠 대학생이 되어 있겠군요. 대학 생활은 어떤가요?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되겠군요. 방학이 시작되면 자주 글 올릴 수 있는 거죠?

싯다르타, 저도 오래전 읽었어요. 오늘 이 글을 읽으니 다시 이 책을 들춰 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모든 욕심, 모든 기대. 이런 것들을 내려 놓으면 걱정을 없앨 수 있을 텐데, 쉽지 않네요.
현재에만 집중하기도 쉽지 않아요. 그래도 노력은 하겠습니다.

반가웠어요. 좋은 젊은 시절을 보내시길... ^^

이진 2015-06-21 18:36   좋아요 0 | URL
페크님! 이제 여름 방학이 시작했지만 오히려 방학에 더 바쁘네요.
싯다르타는, 나중에 더 나이가 들어서 한 번 더 읽어봐야할 것 같아요.
아직은 어려운 면이 있어서.
페크님도 시원한 여름보내시길 바랍니다~
 

 

 

 

 

심장 한 켠을 난자하는 잔혹한 사건은 끊일 생각을 않는다. 윤 일병이 사망한 날도 벌써 일 년이 지났다. 무감각하게 관련 기사를 읽어내려가던 나는 어느 구절에서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구타 당하는 병사가 의식을 잃으면 수액까지 맞게 하며 때렸다는 것이다.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했다. 기사를 읽어내려가며 나는 정신을 거의 잃었고 마침내는 온몸에 힘이 빠져 잠시 누워 있어야 했다. 윤 일병이 쓰러지기 전에 읍소했던 한 마디가 살려달라, 였다고 한다. 대체 왜.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고통을 견디고 또 견뎌야 했을 그가 너무도 억울하고 미안해서 속절없이 손으로 얼굴을 막고 흐느꼈다. 그 사건이 있고 일 년 사이 군 내에서는 무수한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끊임없는 가혹행위, 탈영 후 총기난사를 자행한 임 병장 사건, 그리고 지금의 예비군 총기 사건. 군대에서 일어나는 사망 사고는 늘 어딘가 먹먹하다. 군대란 남자들에게 있어 제대로 된 인생을 꽃피우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날개 한 번 활짝 펼쳐보지 못한 자들이기에 그들의 죽음은 더 안타깝고 슬프게 들린다. 이번 사건에서 최 씨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 끔직한 사건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는 차치하고 가장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무고한 청년들이 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번에도 아침을 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기사를 읽었는데 하나의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하며 숟가락을 놓았다. 중상을 입거나 사망한 이들이 모두 엎드린 채로 최 씨의 총을 맞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등을 겨누는 최 씨의 모습이 뇌리에 번득 그려졌다. 그리고 피와 어둠. 나는 이 상황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글을 손에서 놓고 지낸 지도 석 달이 가까워간다. 국문과에 오면 질릴 정도로 책을 많이 읽고 하다못해 글을 쓰는 데에 통달하게 될 줄 알았는데 놀라울 정도로 글과 멀어지고 있다. 전공 수업을 두 개 듣는데 국어학과 시창작 수업이 그것이다. 국어학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렵고 난해해서 일단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것을 내가 끝까지 완수해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시창작 수업이 내가 고대했던 것인데 그 실상은 무척 실망스럽다. 나는 시창작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래전에 활동했던 합평 카페에 들어가서 예대 선배들이 어떻게 합평을 주고 받았는지를 톺아보았다. 시를 굉장히 잘 쓰는 누나가 한 명 있었고, 그 누나가 날카로우면서도 오류를 정확히 짚어내는 평가를 해주었던 기억이 있어 주로 그를 위주로 시합평의 방법을 내게 주입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는 전부 내 기대에 못 미쳤다. 실기로 들어온 학생들이 소수인데다 대부분은 글을 한 번도 써보지 않았거나 가까이 하지 않았던 정시생들이었기 때문인지 시의 수준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내게 주입한 시합평의 방법으로는 이건 시가 아니다, 갖다 버려, 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한심하게 느껴진 적이 많았다. 나도 관념적인 시를 쓰기 때문에 학생들의 관념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에는 너그럽지만 그들의 시는 내 아량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4주 정도 지났을까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조차 괴로웠다. 마음 같아서는 이건 아니다, 이건 쳐내라, 하고 쏘아주고 싶지만 주위에서는 다들 따듯한 말씨로 조곤조곤하게 합평을 진행하고 있었고 내 주제에 다른 이의 시를 주무른다는 것도 학생에 대한, 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결국 나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누르며 최대한 장점 위주로 쏟아내듯 비평을 건네곤 했는데, 도무지 읽어줄 수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시에는 눈길조차 줄 수 없었다. 그런 시가 지금껏 두 편 있었다.

 

시창작 수업에서 나는 첫 주 차 발표를 맡았고 그걸 끝내고 나니 한가로워졌다. 다른 수업도 널널한 편이어서 여가 시간이 상당해졌는데 나는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왔다. 게다가 공강일도 이틀이나 되어서 휴일이 나흘이나 된다. 엄청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효과적으로 쓰지 못한 것이다. 도서관이 기숙사 바로 옆에 있는데 자주 나가지 않았고 책을 한 무더기나 싸들고 왔지만 몇 번 펴보지 않았다. 대신 내가 열중한 것은 영화였다. 어느 때였던가 나는 영화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되짚어 보건대, 지적 자존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와 함께 지내던 방짝 친구가 영화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하교 후에는 으레 영화를 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나는 친구가 본 영화 편수를 넘어서고자 했다.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나는 어떠한 분야에서 남들보다 조예가 깊고자 하는 사람인데 그 대상이 그전까지는 책이었다면 책에서 영화로 옮겨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고자 하는 욕구만 충만하지 제대로 미치지는 못하여서 그저 말로만 영화 너무 좋아! 하고 내뱉기 일쑤였다. 그러다 수첩을 하나 사서 영화 노트라고 이름 붙이고 거기에 본 영화를 혼자만의 별점을 달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영화 보기에 본격적인 흥미를 붙였다. 작년 12월부터 입때껏 본 영화가 90편에 달하는데 언제 이만큼 봤지 싶으면서도 내심 아쉬웠다. 좀더 미치도록 볼 수 있었을 텐데, 더 열중할 수 있었을 텐데. 내 열의의 한계를 눈으로 목격한 것 같아서 미웠다.

 

 

 

 

가장 최근에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울음을 비오듯 쏟아냈다. 보통 영화를 보고 흘리는 눈물은 한시적에 불과한데 나는 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동안 멈추지 않는 울음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다. 마침 룸메이트도 나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엉엉 울었다. 나중에는 마츠코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아려 생각을 접어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분명히 마츠코의 일생에 대해 잘못을 범한 사람이고 그에 대한 죄책감을 항상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창과 입시 준비를 할 때 한 남자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구상한 적이 있었다. 주마다 다른 주제를 두고 글을 썼는데 그 주의 주제는 사진을 보고 그 사진에 맞게 이야기를 꾸리는 것이었다. 담당자가 내어 놓은 사진은 몽환적인 느낌이 물씬한 사진이었다. 푸른 빛깔이 사진을 덮고 있었고 중앙에 놓인 푸른 침대 위에 남자 아이가 누워 있었다. 아이는 너무 하얘서 푸른 빛이 났다. 침대 주위로 금붕어가 몇 마리 부유하고 있었다. 마치 그 공간이 어항 속인 듯했다. 나는 속에서 푸르게 누워 있는 아이에게 눈길이 갔다. 그 아이가 시리도록 푸르러서 그 아이를 정말 시리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꾸린 이야기는 남자 아이를 불행의 극치까지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늘 그랬듯 남자 아이는 성소수자였고 그 사실을 고백한 후 아버지와 의절하게 된다.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어릴 적 죽었고 아버지는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아이는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서 이상한 감정을 느낀 후로 성정체성을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었다. 집에서 쫓겨난 아이는 갈 곳이 없어지자 자연스럽게 사창가로 흘러들게 되었다. 피부가 푸르게 하얬던 아이는 한 창부에 눈에 들어 남창으로 활동하게 된다. 작은 체구였던 아이는 오랜 기간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푸르게 하얬던 아이의 몸은 갈수록 푸르게 물들었다. 그 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아이에 관한 소설은 결국 쓰지 못했지만 아이의 잔상은 자꾸만 남아 나를 쿡쿡 찔러댄다. 푸른 멍자국과 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가 두개골 어딘가에 갇혀 증발하지 못한 채 나를 덮고 있다. 이 아이의 삶을 내가 망쳤다는 생각에, 내가 무슨 권리로 이 아이를 비참으로 몰아세운 것인가, 하는 자책감에 나는 불행한 사람을 보면 죄송함에 눈물만을 흘린다. 테스가 그랬고, 마츠코가 그랬다. 테스, 오 테스. 테스의 삶을 하나의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것은 물론 비통일 것이다. 테스의 삶은 하나의 비극이다. 테스는 사랑했지만 사랑 때문에 죽은 여자다. 아버지의 말을 죽인 후로 테스의 삶은 꼬이기 시작했다. 가정부로 일을 나간 집의 아들에게 처녀성을 빼앗긴 뒤, 그녀는 에인젤이라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버림받았다. 그러나 테스는 에인젤을 잊지 못했고 에인젤 또한 그녀의 마음을 뒤늦게서야 깨달았지만 그 때문에 테스는 자신의 처녀성을 빼앗은 남자를 죽이게 된다. 테스의 가혹한 삶은 처형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마츠코의 삶은 테스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 그토록 사람을 사랑했지만 결국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의지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녀의 헌신을 이용하거나 짓밟기 일쑤였다. 친구로서 사랑을 주었던 이들은 그녀를 이해해주지 못했고 마츠코는 외로움에 찌들어 갔다. 여러 남자에게 차이고 구타 당하는 마츠코의 비참한 모습만으로도 족할 텐데, 감독은 재기하려는 마츠코의 가련한 싹까지 쥐어뜯어버린다. 마츠코의 죽음은 서럽다. 분하다. 이렇게까지 마츠코를 짓눌러야 하는가. 이렇게까지 마츠코를 밀어붙여야 하는가.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 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칼을 솟구치게 할 것이다. 얼마만큼 왔을까. 통곡하는 여자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빗물이 객실 차창에 여러 줄기의 빗금을 내리긋고 있었다. 간간이 벼락이 빛났다. 무엇인가를 연달아 부수고 무너뜨리는 듯한 기차 바퀴 소리, 누군가의 가슴이 찢어지고 그것이 영원히 아물지 않는 것 같은 빗소리가 아련한 뇌성을 삼켰다. 음산한 하늘 아래 나무들은 비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젖은 줄기와 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다. 노랗고 붉게 탈색된 낙엽들이 무수한 불티처럼 바람 부는 방향으로 흩날렸다. 조금 큰 활엽수들은 의연하게, 줄기가 여린 묘목들과 갈대 숲은 송두리째 제 몸을 고통에 바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뿌리를 움켜 안은 대지도 놀라운 힘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무수한 보릿잎 같은 빗자국들이 차창과 내 충혈된 눈을 할퀴었다.




자투리 시간에 도서관에 가 한강의 책을 집어 들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자연스럽게 책을 꺼내어 자리를 잡았다. 한강의 소설은 어떠한 적막이 인물들을 짓누르고 있는 듯 답답한 느낌을 주는데 이 작품은 특히 그렇다. 이 적막한 중편 소설을 읽는 데에 굉장한 시간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읽어내는 데에 든 시간보다 첫 장을 넘기기까지의 시간이 길었다. 첫 구절부터 감정 소모가 상당했기 때문에 나는 자신이 없었다. 겨우 읽어낸 소설은, 역시 아팠다. 두 여자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동안 나는 내가 예민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자흔을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정선처럼 나는 이 소설을 히스테릭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경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나는 이 경험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따라서 나는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을 심장 저편 어딘가에 꽁꽁 숨겨두었으나 다시 읽으며 그것이 혈관 위로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쾌와 적막이 묵직하게 가슴이 마쳐 연거푸 한숨을 내쉬지 않고선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다. 자흔은 한강이 추구하는 여성상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의 인물들이 대체적으로 불쾌하게 그려지는 반면 자흔은 발랄하고 여리다. 여름이 가까워 오는 날씨에 두꺼운 코트를 입고 짐보따리를 가득 들고서도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자흔은 그럼에도 자전거와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을 때 고통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강경함을 지니고 있다. 아기새의 모습 같다. 나는 언젠가 한강의 장편 소설을 감상하며 한강의 인물들은 아기 새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자흔이 이를 대표한다. 여리지만 생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강직한. 때문에 자흔이 정선에게 내민 손길이 거절당했을 때 나또한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자흔이 받아냈을 상처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에.


결국 자흔은 떠나고 정선은 혼자 남는다. 자흔은 여수로 떠났을 것이다. 정선 또한 여수로 향했다.


두 여인이 만났을까. 소망컨대, 두 여인이 만났으면 좋겠다. 그러나 만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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